이 시집 제목은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다. 학교에는 고래가 살까? 살지 않는다. 고래는 멀리 멀리 떠나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학교에서 고래를 찾을 수 있다고, 아이들은 고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멀리 쫓아버린 고래를 아이들에게 찾으라고 한다.


  고래, 바다 생물을 넘어 우리가 꿈꾸는 그 어떤 모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이 교사였던 만큼 학교에 관한 시들이 이 시집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교사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교육에 관한 이야기 등을 시로 썼다. 마지막 5부에는 너무도 슬픈 아직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 두 편의 시를 보면서, '이런 농담'은 이런 상황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손에 흙 안 묻히고 깔끔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심어주는 학교. 그런 학교에서 우등생이란 결점 없는 학생일 터.


  장래 희망


아이들의 꿈에는

도무지 땀 흘리는 게 없다.

땡볕에서 얼굴이 시꺼멓게 타는 건

도무지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손에 물을 묻히거나 기름밥 먹는 건

작업복 걸치고 먼지 뒤집어쓰는 건

도무지 격에 맞지 않는다고

농부가 되고 어부가 되고 화부가 되는 꿈

석공이 되고 목수가 되고 잡역부가 되는 꿈

도무지 돈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의사가 되거나 법관이 되거나

책상에 앉아서 펜대를 굴리거나

아이들의 꿈에는

도무지 흙을 묻히는 게 없다

밑바닥이 되는 꿈

다리가 되고 허리가 되는 꿈

세상을 눈물로 색칠하는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최기종,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삶창. 2015년. 66-67쪽.


  이런 농담


이런 아이가 있었다

너무 착실하다고나 할까

정도가 지나치다고나 할까

1년 내내 결석 지각 조퇴 한 번 안 하고

교칙도 칼같이 지키고

지시 한 번 어긴 적도 없는

이런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아이보고

내일은 10분만 지각하라고 하니까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번쯤 결석해도 좋다고 하니까

그 아이 하는 말이

"선생님! 선생 맞아요?"


최기종,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삶창. 2015년. 71쪽.


'이런 농담'에 나오는 아이는 흙을 묻히는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그는 펜대를 굴리거나, 의사가 되거나 판, 검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잘살 것이다. 다만, 그는 도무지 흙을 묻히고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렇게 사는지...


그래서 '이런 농담'은 '장래 희망'을 비튼 시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어떤 장래 희망을 갖게 해야 할까? 아니,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도록 해야 할까? 장래 희망을 직업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쪽으로 만들어가는 일. 큰일이 아니라 작은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그렇다면 '이런 농담'에 나온 학생은 학교라는 틀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아도 마땅한데, 씁쓸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무언가 인간적인, 실수를 하면서 또 실수를 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지내는 인간적인 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선생이 지각하라고 하면 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지각하라고ㅡ, 결석해도 된다고 하는 말은 사람은 빈틈이 있어야 다른 사람과 더 잘 연결된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래야 흙을 묻히는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흙을 묻히고 사는 사람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과'라는 말로 붙어 있으니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근대 학교를 의미하리라. 근대 학교 제도가 산업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질의 노동력을 양산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학교 교육과정은 산업 노동에 맞게 구성되었으며, 교과과정 역시 산업문명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짜여졌으며, 학교에서 알게모르게 주입되는 내용은 산업문명을 체화하도록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학교가 그렇다면 이제 산업문명을 넘어 제4차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이 시대에는 과거의 학교제도는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교육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교육 내용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제4차산업혁명에 맞게 학교를 재구성하자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교육부도 스마트미래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온갖 전자기기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가 각종 전자기기로 최신화된 학교일까?


녹색평론은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는 산업문명이 끝나가니 제4차산업혁명기에 어울리는 학교를 만들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는 무엇일지, 인류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이 필요할지를 성찰하자고 한다.


일례로 이번 호에 실린 로웰 몽크의 글 '컴퓨터, 희극적이고 위험스러운 교육도구'는 우리나라 교육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 스마트미래학교라고 해서 각종 스마트 기기들을 학교에 들여와 그를 통해 교육을 한다는 발상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적절하게 융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이 글의 제목처럼 될 가능성도 많다.


여기에 다시 문명 대전환이 필요하고, 그러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심성보, 문명 대전환을 위한 교육혁명)을 싣고 있다. 이 글이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갈 길이 멀어도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는 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심성보의 글은 지금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이다. 그는 '생태교육학 운동'을 주창하고 있으니, 그 점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지금 코로나19가 생태계 파괴로 인한 전세계적인 재앙이라는 데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으니, 미래 교육은 생태교육 쪽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생태교육은 비판적 의식을 함양하는 교육이 될텐데, 비판적 의식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 꼭 제도권 학교에서만 이루어져야 할까? 오히려 제4차 산업혁명과 생태교육학이 만나는 지점이 제도권 학교라는 거대 권력을 해체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점은 박민형의 글 '학교 없는 대안 교육, 어디 없을까'를 참조하면 된다.


그렇다고 학교를 모두 해체할 수는 없다. 학교와 학교라는 이름을 버린 교육 기관(장소, 단체?)이 함께 공존하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대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과연 대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기업이 원하는 노동자를 제공해주는 역할에 그쳐야 하는가? 아니면 대학은 스스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인간, 그리고 함께 자유롭게 사는 사회를 추구하는 인간을 양산해야 하는가? 닉 콜드리의 글 '대학,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항문화'를 읽으면서 그 점을 생각해도 좋다.


이제 코로나19로 4단계가 되어도 기존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수를 확대했다.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한다. 그러나 학교는 과연 변했는가? 코로나19 이전의 학교와 코라나19가 한창인 지금의 학교, 또 코로나19를 이겨낸 다음의 학교는 같아야 하는가?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학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교육의 본질을 살릴 수 있는 학교 교육에 대해, 학교 환경에 대해 논의하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과밀, 거대 학교로는 감염병 시대를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겪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라는 제목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녹색평론 180호, 김종철 선생에 대한 추모글들도 읽을 만하지만 지금 현안과 관련해서 이런 학교에 관한 글들 읽고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과 연결지어서 이보 모슬리의 '민중의이름으로(6)' 실린 글을 곱씹어 보자. 우리 권리를 남에게 이양하고 손을 놓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욕으로 동기가 부여된 사람들은 보통 선함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들 중 최량의 인간이라도 부도덕하고, 사람을 조종하는 데 능하며, 더 나쁜 경우에는 지독하게 사악하다. 개인적 야심은 교활함과 이중성에 통달하게 만든다. 야심가들은 "나는 공익을 위한다"고 말하고, 스스로 가장 먼저 그 말을 믿는다.

  국가 건설은, 법이나 기관을 세우는 일이 일반적으로 그렇지만, 권력과 야심을 억눌러서 그런 것들이 공익을 거스르는 쪽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서 행동하게 만드는 예술이다. (178쪽)


  유권자들이 이러한 권력들을 '집단으로' 직접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무도 그럴 시간도, 주의력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이 권력들의 활동에 한계를 정하고 결정하는 일에 주동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하지 않다면 의미 있는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 (179-180쪽)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내년 선거를 앞두고 많은 정치가들이 '공익'을 내세우면서 '국민'을 들먹이면서 출사표를 던졌다. 이들이 '공익을 위해서 행동하게' 만들려면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투명하게 정보가 공개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의미 있는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정착했다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해학적인 표현이 제법 많은 시집인데... 


  가령 소금쟁이를 '저수지의 옷을 수선하는 수선공'(92쪽)이라고 표현한다던지, '쥐의 여행'라는 시에서 고스톱 치는 장면을 '아버쥐, 똥 먹어/아버쥐, 그냥 죽어/아버쥐, 쌌네'라는 표현에서 아버지 대신 아버쥐라고 한 표현도 재미있는데,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 '아버쥐, 인분 드시죠/아버쥐, 그만 작고하시지요/아버쥐! 사정하셨습니다'(85쪽)라는 표현에서는 안 웃을 수가 없다.


  부모 자식 간에도 상(성)스러운 말이 오가는 고스톱 치기에서, 쥐가 등장하고, 그 쥐를 통해서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이런 재미 있는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 시인데, 이는 웃음이 점차 사라지고 소위 썪은 미소(썩소)만이 넘치는 사회에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제공하고 있는 시들이 많다.


그럼에도 슬픈 시들도 많은데, 집값을 위해서 죽음까지도 단합하는 모습을 그린 시 '공범'(87쪽)에서는 박완서의 소설 '옥상의 민들레꽃'이 떠오르기도 한다. 죽음보다 집값을 우선하는 물신시대. 그런 시대를 시를 통해서 비판하고 있는데... 


이런 시도 있지만 이 시집에서 '페로몬'이라는 시를 읽으면 장인수 시인은 우리에게 웃음 페로몬을 내뿜어, 그 웃음으로 자신을 따르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시집 제목이 된 유리창이라는 시는 정지용의 유리창을 떠올리지만, 정지용의 유리창이 자식을 잃은 슬픔을 담고,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비통함을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하고 탄식이 절로 나오게 하지만, 장인수의 유리창은 그 죽음을 승화하고 있다. 물론 장인수 시에서 죽음은 새들의 죽음이다.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 새들. 그러나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한다.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는 다시 살아나 / 유리창을 마음대로 통과하며 살아간다고 한다/산맥과 달님도 마음대로 뚫으며 날아다닌다고 한다' (23쪽)


그러니 그의 시는 죽음이라고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이 있다. 그 다음이 있으니 우리는 절망에서 허우적대서는 안된다. 비극을 딛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시인은 우리를 이끈다. 


    페로몬


카페이 앉아 있는 남녀 고등학생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남녀 고등학생

담배를 피우고, 이어폰을 꽂고, 만화책을 보고 있는 

그들에게서

성페로몬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하나님을 갈구하는 예배당에 모인 신자들의

영혼에서도

주님을 향한 길안내페로몬 향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나의 몸에 돼지 수컷 페로몬을 바르면

암컷 돼지들이 난리를 피우며 따라붙을 것이다

이끌림의 에너지인 페로몬 향기처럼

생애의 물꼬가 터졌으면 좋겠다


장인수, 유리창, 문학세계사. 2006년 초판 2쇄. 93쪽.


보통 어른들이, 특히 교사들이 일탈행위라고 하는 고등학생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지 않고 성페로몬이 발동했다고 하고, 종교적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서도 페로몬을 발견하며, 자신에게도 그런 페로몬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시의 화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우리에게 페로몬을 발산해 그 페로몬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존재.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시를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삭막한 시대에는 더더욱 '생애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도 시를 읽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시를 읽으며 나도 모르는 세계로 들어설 때가 있으니, 시인들은 이렇게 페로몬을 발산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인수 시집을 읽으며 그 페로몬이 시인만의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페로몬을 지니고 있음을... 그래서 그 페로몬으로 다른 사람을 이끌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페로몬에 이끌려 함께 가기도 한다.


함께 함. 이게 바로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 아니겠는가. 그러니 우리 서로에게 긍정 페로몬을 발산했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를 이끌며 사는, 아니 굳이 이끌 필요도 없다. 그냥 함께 있어도 좋은 페로몬을 내뿜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소년 시집을 읽으면 가능성이 보인다. 어떤 형태로든 고정이 되어 있지 않은 청소년들의 모습. 또 청소년들의 마음. 그들 마음이 하나가 아니고, 또 굳어있지 않기 때문에 성장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노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딱딱함, 굳음은 죽음이다. 그러니 우리가 청소년들에게 특정한 형태로만 있으라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청소년에게서 생동감을 빼앗는 일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시집을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겠지만, 청소년보다도 어른들이, 기성세대들이 먼저 읽어야 한다. 그들이 청소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문학을 통해야 한다.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하다보면 청소년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우선 어른들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어른들이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지 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칫 잘못하면 청소년과 직접 이야기하는 일은 어른들의 일방적인 전달이 되거나, 또는 어른들 구미에 맞는 말을 늘어놓는 청소년들의 말을 듣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청소년시집은 그렇지 않다. 청소년들의 내밀한 마음들을 상상을 통해 표현한다. 우리가 쉽게 놓치고 있던 소소한 감정들을 시로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청소년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역할이다. 시인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들을 표현해낸다. 


시인이 꼭 청소년일 필요는 없다. 청소년시라고 해서 청소년이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청소년의 마음을 알고, 표현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쓸 수 있고, 써야 한다. 그런 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청소년의 마음에 한발 다가설 수 있다.


오은 시집을 읽으며 청소년들의 마음이라는, 그 마음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고, 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수시로 변하며, 과거나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보게 됐다. 제목도 '마음의 일' 아닌가.


그런 청소년들의 무한한 가능성, 마음의 가소성을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읽었다.


그리지 않아야 그려졌다


내가 쓰고자 했던 것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

그릴 수 없다


내가 그리고자 했던 것도

쓰거나 말할 수 없다

온전하게는


창밖에는 나무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몇 분 뒤에 나도 나무 아래에 있을 수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을 맞으며

아, 행복하다

여기가 따뜻하구나

여기가 시원하구나

따뜻하면서 시원할 수 있구나

말할 수도 있다


현장의 나만 아는

그때의 나만 아는

내 몸에 새겨지고 있지만

아무도 해독하지 못하는


나이테가 있다

지문이 있다


그리지 않아야 그려지는 부분이 있었다

안에 있어야 보이는 바깥 부분이 있었다


내뱉고 나면 사라지고 말까 봐

차마 말하지 못하는 꿈이 있었다


나는 아직 창 안에 있다

창 안에 있기에

백지 위에 한가득

창밖을 상상할 수 있다


오은, 마음의 일. 창비. 2020년. 초판 2쇄. 53-54쪽


청소년을 고정시키지 말자. 어떤 한 역할로 국한시키지 말자. 그들을 기대라는 이름으로 틀에 가두지 말자.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행동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일, 그들이 '백지 위에 한가득 / 창밖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 그것이 어른이 해야 할 일이다.


오은 시집을 읽으며 이렇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청소년들, 청소년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학교 하면 얼굴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을 머금게 될까? 아니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찡그린 얼굴이 될까? 과연 아이들은 학교에 오고 싶어할까?


  학교란 공간은 학생들에게는 자유를 상실한 공간, 자신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교사들의 목소리만 들리는 그런 공간일 수도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하는 말들이 '해라'와 '하지 마라'는 명령형으로 끝나는 말들이 대부분일텐데, 그런 공간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학생들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 교사들이 있고, 학생들이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무엇보다도 격의 없이 교사와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런 학교라면 그 학교에 가고 싶을 수도 있겠다.


이 시집을 낸 최은숙 시인은 교사다.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시로 표현했다. 이 시집은 청소년시집이고, 청소년들이 읽으면 '와, 우리 이야기네.' 할 수 있는 그런 시들이 많이 실렸다.


학생을 이해해주는 교사의 모습은 완벽한 교사가 아니다. 허점이 있는 교사다. 학생들에게 배울 수 있는 교사다. 그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딱이다. 이 시들은 그런 교사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배시시 웃음이 배어나온다. (선생님은 우리한테 딱이다, 비밀, 깜빡하기, 무서운 상민이, 선생님께 하는 부탁, 핵인싸각 등등)


또한 마을 사람들과 정겹게 지내는 모습도 표현되어 있고,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과 지내는 모습도 표현되어 있다. 그러니 이 시집을 읽으면 웃음이 있는 학교를 떠올리게 된다. 학교가 이렇게 웃음으로 충만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학생이 졸업을 한 뒤에도 자기 자식들을 데리고 와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그런 학교. (우린 운이 좋다 언제나)


그 중에서도 아이들을 위해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행동하는, 마을과 학교가 동떨어져 있지 않고 함께 하는 모습, 그야말로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떠오르는 그런 시가 있다.


정말 이런 학교, 이런 마을, 이런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이 세상에서, 학교가 담장을 굳게 치고, 교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인 통제를 하며, 심지어 학생들도 한번 등교하면 하교할 때까지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단절된 공간이 아닌, 열린 학교, 함께 하는 학교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 정경이 눈에 그려져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랬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학교를, 학생을 대하는 모습이.


      알고 보니


올봄에도 아이들이 쑥 뜯으러 나올 거라고

동네 어른들은 둑길에 제초제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쑥 뜯는 동안 자동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은 것은

다들 뒷길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공부 안 하고 놀러 나온 게 좋아서

장난치고 도망가고 야단법석

그래도 쑥이 모자라지 않았던 것은

방앗간 사장님이 뜯어 놓았던 쑥을

한 소쿠리 보태 주셨기 때문이에요


학교 앞 솔로몬문방구랑 스마일분식, 독립상회까지

떡을 돌리고도 전교생이 실컷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엄마들이 쌀을 듬뿍듬뿍 퍼 주셨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선생도 자라고

마을은 깊어 갑니다


최은숙, 지금이 딱이야. 창비. 2021년.  87쪽. 


참 아름다운 정경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 그렇다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느냐 하면 아니다. 아이들은 공부 안 하고 나와서 논다고 생각한다. 그 모습들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애늙은이처럼 어른들이 우리를 배려하고 있으니, 우리 최선을 다해서 쑥을 뜯자가 아니다. 


그냥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즐겁게 논다. 즐겁게 놀아도 된다. 이 놀이가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에서 서서히 자라리라. 그들도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리라. 굳이 지금 그렇게 하라고 도덕적인 말로 훈계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이 채우지 못한 쑥은 마을 사람들이 채우면 된다. 아이들과 함께 쑥떡을 먹는 그런 즐거움을 누리면 된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우리가 공동체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이런 어른들의 마음을 자라면서 알게 되리라. 시 제목이 '알고 보니'다. 


왜 아이들이 이렇듯 편안하게 쑥을 뜯을 수 있었는가, 마음 놓고 놀 수 있었는가 하니,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을 배려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공동체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학교와 마을의 관계다.


이 시집에 실린 시 한편 한편이 따스하게 다가온다. 청소년들이 읽어도 쉽게 이해가 될 언어들로 시가 쓰였고, 또 자신들의 이야기가 표현되었으니, 시를 가까이하는 청소년들이 이런 시집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1-09-09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채우지 못한 쑥은 마을 사람들이 채우면 된다.
시가 아닌데 왜 시로 읽히죠?
아마도 아이들과 쑥이라는 단어가 함께 오는것이 드물어서 그런가봅니다.
시 읽기 좋은 계절이 왔네요~~♡

kinye91 2021-09-09 13:17   좋아요 0 | URL
네. 시를 읽기도 책을 읽기도 좋은 계절이 왔어요. 코로나 시국이 빨리 안정이 되면 아이들이 이렇게 밖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