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배움은 어떻게 깊어지는가 - 배움의 공동체 수업 실천서
이시이 쥰지 지음 / 살림터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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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공동체' 참 좋은 말이다.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배움을 중심에 놓고 보면 배움은 공동체의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자고로 배움에는 공동체가 필요하고, 배움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 협동적일 수밖에 없는데... 배움에는 나를 중심에 놓되, 남도 나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교육에는 '배움'이 중심에 놓였다. 그리고 이런 배움은 홀로 하지 않고 함께 했왔다. 동양 고전이라는 논어의 시작이 '배움'에서 시작하는 사실만 보아도 우리가 얼마나 배움에 중심을 두어왔으며, 이를 교육의 중심에 놓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배움'은 멀리 사라져 버리고 '교육'만이 남게 되었다. 이것도 '가르침'으로 남지 않고 단순한 전달로 남게 되었으니... 교육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교실 붕괴, 학교 붕괴. 이런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은 교권 붕괴라는 말이 많이 나돌고 있는데, 이 교권 붕괴를 마치 학생인권조례 탓인양 말하는 무리들이 있는데... 본말이 전도된 말일 뿐이다.

 

교권이 붕괴된 이유는 단순하다. 배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니, 배움만이 아니라 가르침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만이 학교에서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교권은 더이상 존중받아야 할 무엇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다시 배움을 살리자고,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배움의 공동체를 널리 퍼뜨리고 다니는 일본의 사토 마나부 교수의 책 제목)을 배움에 머무르게 하자고 하는 노력이 바로 배움의 공동체다.

 

배움의 공동체가 어디에서 뚝 떨어져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존재하던 배움의 모습을 현대에 맞게, 그것도 학교라는 공간에 맞게 구성한 것이 바로 배움의 공동체 모형이다.

 

이를 혁신학교를 중심으로 받아들여 광범위하게 시도했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학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단지 표면상의 성공이 아니라 진정한 성공은 아이들이 배움을 즐기는 모습으로 나아가고, 단지 학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배움을 추구하는 자세를 지니게 하는 것인데...

 

베움의 공동체를 표면상 모습만 받아들였다가는 예전에 했던 열린교육이나 협동학습처럼 일회성으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일회성으로 끝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무엇보다도 현장에서 수업을 하는 교사들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하겠다.

 

배움의 공동체가 도입된 지 10년이 되어 가는 것 같은데... 이런 실천 속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되었고, 배움의 공동체가 형식에만 치우치는 경우도 생기기도 했을텐데... 이런 경험을 미리 한 일본에서 배움의 공동체 모형이 실제 학교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운영되어야 하는지, 교사들은 어떻게 배움의 공동체 수업을 이끌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경험을 바탕으로 왜 가르침이 아니라 배움이어야 하는지, 어째서 협동해야 하는지, 일제식 수업보다는 모둠별 수업이 더 효과적인지, 그냥 아이들의 대화만으로 끝나는 수업이 아니라 교사가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 여기에 학생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주는 점프는 어떻게 해야 일어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다만 수업의 과정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지 평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한계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수업의 과정과 평가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이 경우에 대한 고민이 있지 않으면 배움의 공동체 모형도 정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배움을 통해 아이들의 사고는 깊어지고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만들어갈 수가 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처럼 시험이라는 제도가 떡 가로막고 있다면 결국 배움의 공동체는 성적을 올리는 한 수단이 될 뿐이지 진정한 배움을 추구하는 모형이 되지는 못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시도는 신선하다.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아이들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수업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참 기분좋게 한다.

 

이것이 단지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잘 운영되고 있는 학교가 있다는 사실은 입시경쟁이 치열한 우리나라에서도 배움의 공동체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배움의 공동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사들이 노력을 안하는가? 아니다. 우리나라 교사들의 수준은 세계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교사들은 우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우수한 능력을 지닌 교사들이 오로지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만 한다는 것이 더 우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운영이 된 것은 교사들이 연구할 시간을 다른 업무로 빼앗았다는 얘기밖에 안된다.

 

교육을 살리고 싶으면, 학생들이 서로서로 돕는 배움을 만들어가게 하려면 정말로 교사들이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학생들과 교사들이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다.

 

학생들 스스로 배움을 일으키고, 학생과 교사들 간에도 배움이 일어나고, 교사들 사이에서 배움이 일어나며, 학교와 지역사회,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배움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참 많은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우선 이렇게 학교 현장에서 교실에서 이런 식의 수업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도 우리만큼 입시의 중압감이 큰 나라인데도 이런 교육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멀리 볼 필요도 있지만 실천은 늘 가까이서부터이니...

 

교육의 중심은 가르침이 아니라 배움이다. 이걸 명심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교육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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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 2014-04-07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움의 공동체를 실천해보고 싶기는 한데...결국 엄두가 나질 않아 잠시 미뤄두고 있습니다. 아무튼 근래 들어 옳은 가르침이란 무엇인지 고민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
 
교육사유 - 실천하는 교사,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함영기 지음 / 바로세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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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

 

이 말이 정답이다. 아무리 제도가 바뀌어도, 환경이 바뀌어도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존재는 교사다.

 

교사들의 질이 교육의 질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교사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다. 옛부터 스승에 의해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많았듯이, 교사들은 지금도 학생들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물론 요즘은 교사의 영향력이 많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도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교사다.

 

그런 교사들이 교육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교육정책가이다. 교육정책가들이 제대로 된 교육정책을 펼칠 수 있게 하는 존재가 바로 민주시민들이고. 그냥 시민들이라고 하지 않고 민주라는 붙인 이유는, 민주란 자신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나선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 세금만 잘 내면 되지라는 생각을 지닌 시민들이 아니라, 우리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이기 때문에 제대로 운영되는지 확인할 권리가 있고, 제대로 운영하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는 자각을 하고 있는 시민들, 그들이 바로 민주시민이고, 이런 민주시민들이 깨어 있는 눈으로 교육정책가들을 바라볼 때 학교 교육은 정상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많아진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교사들의 질은 어떤가? 이 책에도 나와 있듯이 교사들의 경제적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는 편이 아니라 다른 나라보다도 경제적인 대우는 높다고 한다. 물론 절대적인 금액에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 교사들의 급여수준은 다른 직장에 비해 그리 낮지는 않다.

 

초임교사들의 월급이 적고, 경력교사들의 월급이 많아서 평균이 높게 나왔다고 하는데... 이런 월급체계는 어쩌면 교직의 안정성에 기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계에 위협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더 안정감을 느끼게 되니 말이다.

 

이런 경제적 수준 말고 교사의 수업 능력은? 우리나라 교사들은 치열한 임용고시를 통하여(임용고사라고 하나, 다른 고시만큼 치열하다고 해서 고시라고도 한다) 임용이 되기 때문에 교사들의 지적 능력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들은 대학 내내 공부하고, 이런 공부를 바탕으로 시험을 통과한 교사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른 나라 교사들에 비해 우리나라 교사들이 지적으로 수준이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적능력과 수업능력이 일치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옛날처럼 제자가 몇 안되는 시대에 스승은 지적능력만으로도 뛰어난 수업을 할 수 있었겠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옛날과 비교하면 옛날엔 제자들이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 스스로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의 가르침 방법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어떻게든 배워냈기 때문인데...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삶 자체를 배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배우고자 해서 스승을 찾아온 제자들은 없다. 그냥 나라에서 의무적으로 가라고 하니까, 부모들이 가라고 하니까,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유리하다고 하니까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스스로 배우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주어 최단시간 내에 최고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가르쳐주길 바랄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교사의 수업능력이 뛰어나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 교육은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이건 절대로 자랑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 한다) 사교육에서 이루어진다. 이 책에서는 그 점을 짚어내고 있다. 무언가 산출을 기대하는 교육제도 아래에서는 단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내야 하는 사교육식의 교육이 판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교사의 수업능력은 떨어진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은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교사들의 수업능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교사들은 교육의 목적에 맞게 수업을 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 노력들이 모여 여러 수업사례들이 발표가 되고 자신들끼리 동호회를 만들어 서로의 수업을 관찰하고 개선점을 찾으려 노력을 한다.

 

교사들은 흔히 말한다. 교사가 기분이 좋을 때가 언제인가 하면 수업이 잘되었다고 느낄 때... 그 때 뿌듯한 마음으로 교실을 나선다고... 수업이 잘 되지 않았을 때는 엄청난 자괴감을 느낀다고...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수업에 대해 생각하는 교사들, 이들의 수업능력이 떨어질 리가 없다.

 

그럼에도 교육청, 교육부에서는 교사들의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연수를 시켜야 한다고 한다. 어떤 능력... 그것이 수업능력이라는데, 수업능력이 어떻게 수치화될 수 있는지... 교육의 효과가 한 해 한 수업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교육 효과가 얼마나 많은지 그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여기까지 살펴본 바를 이 책의 관점에서 정리하면 우리나라 교사들의 질은 결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 교육은 형편없다는 인식이 팽배할까? 교사의 질이 높다면서 교육의 질은 낮다고 여겨지는 이 역설은 무엇일까?

 

답은 이 책에 있다. 교사의 질이 아무리 높아도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구조라면 교육의 질이 높아질 수가 없다. 우리나라 교사들에게 무슨 자율권이 있는가? 자기가 가르친 내용을 자기 식으로 평가할 수도 없는 교사들이 어떻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

 

가르치는 방식은 다 달라도 평가방식은 다 똑같은 우리나라 현실에서 어떻게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지, 오히려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지금은 혁신학교다 뭐다 해서 많은 시도들이 있고, 또 평가에서도 자율성을 발휘하려는 교사들도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교사의 자율권 확보는 요원하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전권을 쥐고 있는 존재는 바로 교장이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노력하고 학교 문화를 바꾸어가려고 해도 교장이 반대하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도저히 변화를 이끌어낼 수가 없다. 여기에 지금의 교장 임용제도를 보면 도대체 수업에서 자율성을 발휘하는 교사들이 교장이 될 수가 없다.

 

오로지 주어진 일에만 열심인 교사, 자신의 점수 관리만을 잘한 교사, 수업보다는 행정업무에 능숙한 교사, 이들이 주로 교장이 된다. 그리고 이들이 교장이 되었을 때 수업에 열심이고, 학생들과 잘 어울리며 학생지도를 잘하는 교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자신들과 비슷한 길을 가는 교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중심으로 교장은 또 학교를 운영한다. 악순환이 반복된다.

 

수업능력을 키우는 교사, 자율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교사, 행정업무보다는 학생들과 어울리기를 원하는 교사는 학교에서 제대로 인정을 못 받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학교의 변화없음에 좌절한다.

 

이런 교육의 현실이, 학교의 적나라한 모습이 이 책에 잘 드러나 있다. 지금 교육은 문제가 많다고 그 문제점들을 한 번 짚어보고 대책을 마련하자고 이 책을 시작한 지은이는 책을 쓰면서 정말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제안"을 담고 있다. 이 제안들 귀 기울일 만한데... 나는 무엇보다도 교장임용제도가 바뀌어야 하고(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교장을 그냥 하나의 보직으로 만드는, 그래서 교장 임기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교사가 되어야 하는), 또 교사들에게 자율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언급이 되지 않고 있지만... 교육청... 소위 본청이라고 하는 광역시도 교육청 하나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없애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말은 '교육지원청'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교육을 지원하지 않고 통제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이며, 교사가 수업에 전념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역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지원청"이면 이들이 다른 행정업무를 전담하고 교사들은 수업 이외에는 신경쓰지 않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들이 교사들을 오라가라, 이것 내라 저것 내라 하면서 교사의 수업을 방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세 가지 정도만 이루어져도 교육은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을 보일텐데... 하는 생각.

 

오랫만에 교육에 관한 책으로 쉽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을 읽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교육의 바꾸려면 교사들이 수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마지막 제안 마음에 와닿았다. 그렇다. 교사가 수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제도라면 교사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테니.. 교육의 질은 덩달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제발 교육정책가들 이런 책을 읽기 바란다. 또 깨어있는 시민들도...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서 적어도 교육에 관한 이런 책은 읽어야 한다.

 

이 책에 나온 몇 구절을 결론 삼아 맺는다.

 

  나는 주장한다. 전문성 향상을 구실로 업무와 수업, 생활지도에 지친 교사들을 내몰아 소진시키지 말고 그들에게 충분한 여유를 주어서 좋은 책과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대화를 많이 나누게 하라. 좋은 책과 좋은 경험, 풍부한 사유로 교사의 안목과 통찰력을 높이게 하는 것, 그래서 깊은 안목과 통찰력으로 아이들과 만남이 이루어지게 돕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요구되는 교사전문성의 핵심이다. (이 책 111쪽)

 

  수업이란 교실 안에서 교사와 학생 간에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으로 어떤 기준을 향해 내달리는 무지한 행위가 아닌 역동적이고 예술적이며, 독특하고 신비로운 경험을 연속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이럴 때만 지식은 학습자에게 내면화된다.

지적 호기심에 충만한 교사와 학생이 눈빛과 눈빛이 만나고 숨결과 숨결이 만나 섞이고 쌓이면서 화음을 만들어 가는 수업에 무슨 기준이 필요하고, 지표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 책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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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학교의 힘 - 아이의 학력, 인성, 재능을 키워주는
박찬영 지음 / 시공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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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제목을 보면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떠오른다.

큰 것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외친 슈마허는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으로 작은 것을 추구했다.

 

이 책의 제목은 "작은 학교의 힘"이다.

무엇을 위한 힘인가? 아이들 성적을 올리기 위한 힘? 아니다.

바로 작은 학교의 힘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힘이다.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행복하게 자랄 수 있게 해주는 학교, 그것이 모든 학교의 목표이겠지만, 지금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교에서 아이들은 불행해하고 있다.

 

학교에 다녀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인데, 정작 학교 생활을 불행하다고 여기는 상태. 학교가 자신의 존재이유를 배반하고 있는 현실이다.

 

글쓴이는 현직 초등학교 교사다. 그는 작은 학교에 근무하면서 작은 학교의 힘을 몸소 느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왜 작은 학교가 힘을 발휘하는지를 작은 학교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담고 글로 썼다.

 

큰 학교, 대도시의 학교를 추구하는 학부모들을 답답해 하면서, 정말로 아이들의 행복을 원한다면 아이들을 작은 학교에 보내라고 하고 있다.

 

작은 학교가 왜 좋은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또 자신이 찾고 연구한 바에 의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책의 1부는 행복하지 않은 학교 현실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이 갈등을 풀어가지 못하는 모습, 또 자그마한 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피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미래 또한 밝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런 부정적인 학교의 모습, 아이들의 모습, 학부모의 모습, 그리고 이 속에서 나날이 무능해져가는 교사들의 모습은 정말로 우리 교육이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되나 하는 우려를 하게 만든다.

 

이런 우려 속에서 지은이는 작은 학교를 이야기한다. 작은 학교들의 기적을. 아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작은 학교라는 말은 학생수가 적다는 말도 있지만, 다른 말로 하면 적은 숫자로 인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한 학년, 한 학급에서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내는 대도시, 거대 학교의 학생들과는 달리, 이들은 서로를 모두 잘 알고, 교사들 또한 그 학교의 모든 학생들을 알고 지낸다는 얘기는, 아이들 개개인의 특성에 대해 교사와 학부모가 공유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관계에서 신뢰관계가 싹트고,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기존의 성적 위주의 교육을 뛰어넘어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교육을 해나가기에 작은 학교는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막대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2부다. 작은 학교들이 얼마나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지, 그 속에서 교사들도 얼마나 행복해 하고 있는지, 또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 역시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를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이가 있다면 작은 학교에 보내고 싶을 정도로.

 

3부는 2부를 토대로 작은 학교의 모습이 몇몇 학교에 국한되지 않고 더 많은 학교로 전파될 수 있음을, 전파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경기도에서 먼저 시도되었던 혁신학교다. 그리고 혁신학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혁신지구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물론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성공 사례가 있다는 것은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고, 이는 우리가 이러한 교육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글쓴이는 이렇게 작은 학교처럼 운영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갖춰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초등학교는 몰라도 중학교는 30명 선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를 20명 선으로 줄인다면, 그리고 교사들의 자율권을 대폭 보장해준다면... 교육은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을 지니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작은 학교가 힘을 발휘하는 이유를 이 책의 지은이는 '기다림'이라고 했다. 작은 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을 기다리는데 큰 학교의 교사들보다 더 유리하다는 것. 그래서 작은 학교는 이런 기다림을 바탕으로 해서 행복 학교가 될 수 있었다는 것.

 

아이들이 행복하면 그 다음은... 정말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된다. 그것이 성적 향상 쪽이건 아니면 다른 족이건 말이다.

 

자, 이런 기다림을 이 책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부어주면 90퍼센트는 도로 밑으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콩나물은 점점 자라난다. 교육도 그렇다.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별다른 변화 없이 지내는 것 같아도 교사나 학부모가 보내는 작은 신호들은 아이들에게 조금씩 영향을 끼친다. (205쪽)

 

잠재적 교육과정이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학교에서 교사와 학부모들의 관심 속에서 무언가 계속 발전해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 콩나물도 그런데,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런 기다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획일적인 교육에서 벗어나야 할테고, 작은 학교들이 효율성은 떨어지고 돈만 많이 쓰게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작은 학교야 말로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학교라는 생각을 가지고 정책을 펼쳐야 할 것이다.

 

곧 다가오는 지방자치 선거. 각 시도교육감도 선출한다. 어떤 교육감이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교육정책을 펼치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핀다면, 이 책에서 말한 '작은 학교의 힘'이 전체 우리나라 교육의 힘으로 전환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최소한 학급당 학생수를 20명으로, 아니 25명으로 하겠다는 교육감은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이 정도 학급 인원은 되어야 큰 학교에서도 작은 학교의 모습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미 교육 선진국에서는 다 하고 있는 일인데...

 

덧글

 

서울에서 교육혁신지구라고 해서 학급당 학생수를 25명으로 유지했던 몇몇 학교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특혜를 일부 학교에만 줄 수 없다고 하여 폐지했지만... 그것은 폐지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지역의 학교들도 25명 선으로 학급당 학생수를 줄이려고 해야 할 정책이었는데... 왜 교육정책이 앞으로 가지 않고 뒤로 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모두들 교육전문가라고 하는 이 나라에서, 아이들의 행복을 추구한다고 주장하는 교육학자들이 득시글한 나라에서, 저마나 자신만이 우리나라 교육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교육정책가들이 널려 있는 이 나라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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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교육 -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만남
이상오 지음 / 강현출판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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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만남'인데... 테크놀로지라고 하는 말을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과학기술이라는 의미로 주로 쓰고 있다.

 

과학기술은 고도로 이성적인 능력일 것 같지만 사실 상상력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이 먼저냐 상상력이 먼저냐를 따지기 보다는 둘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면 더 좋을 듯하다.

 

하여 이 책의 1부에서는 테크놀로지의 발달사를 다루고 있다. 인간의 역사와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관련이 되는지, 그러한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우리의 생활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핀다.

 

그래서 얼핏 지루한 느낌을 준다. 마치 과학사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러한 과학기술들이 단지 이성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빚을 지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기에 과학과 상상력이 연결이 되는 지점을 찾을 수가 있다.

 

우리가 과학기술을 부정하려 해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상상력도 우리가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이러한 상상력의 도움으로 인간은 동물의 수준에서 지혜로운 동물로 상승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살핌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2부에서는 이제 상상력과 교육이 어떻게 관련이 되는지를 살피고, 3부에서 구체적인 상상력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상상력. 그것은 우리 인간을 한 단계 더 상승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한때는 인간의 능력 중에서 이성의 힘 밑에 놓여 경시된 적도 있었으나, 과학기술이 최고도로 발전하는 지금은 오히려 이러한 상상력이 이성의 힘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애플사를 이끈 스티브 잡스를 들고 있는데, 그는 과학기술과 인문학을 융합한 사람이고, 그러한 융합을 자신의 상상력을 통하여 이끌어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현실은?

 

지은이는 부정적이라고 한다. 대학 강단에 있는 사람으로서 대학교육에서조차도 융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교육의 부족함은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더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사실이 그렇다.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오로지 주입식 교육이 판치는 세상에서 말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주입식 교육은 전체주의 교육, 독재 교육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독일이 나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서 나치식 교육을 철저히 분석하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듯이, 우리도 일제의 교육유산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주입식 교육제도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있어야 했는데, 산업화에 밀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은 상상력이 확대되거나 발휘되는데 걸림돌로 작용을 하고, 지금 창조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는 더욱 맞지 않는 교육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육은 반성적 사고 능력을 키우는 방식이어야 하기에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교육방식을 택해야 하고, 이것이 바로 상상력 교육이라고 한다.

 

상상력 교육은 우리 교육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보고, 즉 블루오션인 것이다. 블루오션은 존재하지 않았던 곳이 아니라, 아직 발견하지 않았던 곳이라고 한다면, 이제 우리 교육이 나아갈 길은 제시된 셈이다.

 

테크놀로지, 전혀 상상력과 관계가 없을 것 같지만, 테크놀로지는 결국 인간의 상상이 실현된 결과물이고, 이러한 결과물로 인간의 상상력은 더욱 풍부해진다고 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대상이 아니고, 상상력과 테크놀로지는 함께 가야 하는 융합의 대상인 것이다.

 

이렇게 융합된 교육을 하기 위해 정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입식 교육에서 하루바삐 벗어나는 일이다.

 

아이들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심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심심해서 무언가를 스스로 생각해 내게 해야 한다.

 

학교, 학원, 정말 바쁘게 돌아가는 이 시스템에서는 상상력이 작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상상력이 작동하는 아이는 이 제도에서는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뒤떨어지는 사회는 더이상 발전할 수 없다.

 

상상력.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육제도 안에서 온갖 실험을 해보고 실패도 해보게 해야 한다. 그래야 상상력이 살아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험제도부터 고쳐야 한다.

 

아이들이 충분히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조건을 마련해주는 일. 그것이 바로 교육자들이 해야 할 일,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다.

 

과학사 책을 읽는 기분이 들었고, 또 뒷부분은 바슐라르의 이론을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미래 사회에 필요한 교육이 무엇일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상상력은 우리가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요소이다. 우리 교육에 펼쳐져 있는 블루오션이다. 우리는 그 길로 가야 한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 이 책은 참 많은 얘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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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읽기와 소설교육 푸른사상 현대문학연구총서 28
정래필 지음 / 푸른사상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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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실이 소설보다도 더 긴박하고 박진감이 넘치는데, 누가 소설을 읽을까? 소설 속에 나오는 현실이나 인물들보다 현실 속의 사건들과 인물들이 더 흥미롭다면 소설은 제 역할을 하기도 전에 고사되어 버리고 만다.

 

이런 이유말고도 소설이 읽히지 않는 이유가 있다. 소설을 읽을 여유가 없다. 어른들은 먹고 살기 바쁘고, 아이들은 공부하기 바쁘니, 서로 바쁜 세상에서 책을 마주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조금의 여유가 있다면 자신의 지친 몸과 뇌를 쉬게 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또 하나, 엄청나게 발달한 스마트 기기들이 소설을 읽지 않게 한다. 스마트 기기들로 소설보다도 더 흥미로운 것들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래서 인문학의 위기도 위기지만, 소설 또한 고사 직전에 있다. 그럼에도 엄청나게 많은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현실이니, 소설은 늘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가 소설에 눈길을 주지 않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 교육에서 소설을 배운다. 그들은 소설을 배우는데, 단지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 배운다.

 

소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간접경험하고 자신의 삶과 비교하여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실천해 간다는 자아실현으로서의 문학교육은 말로만 존재한다. 학생들에게는 이런 거창한 내용보다는 시험에 어떤 문제가 나올지가 더 중요하다.

 

그러니 학교를 졸업하면 시험에만 필요했던 소설 따위는 집어치워버리고 만다. 이게 소설의 운명이다.

 

소설의 운명? 이렇게 버려지는 것이? 그런데도 왜 소설이 꾸준히 나오고 있지? 작가 지망생도 많고, 그 많은 출판사들도 아직 소설 분야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설은 이제 운명이 다했다고 생각해도 아직 소설의 운명은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소설이 주요한 교육내용으로 등장하고 있으니, 학생들은 앞으로도 계속 소설을 읽어야 할테고, 소설에서 무언가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런 사람들에게도 소설은 계속 필요하리라.

 

그러면  소설이 고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소설을 교육하는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의미를 전해주는 소설 교육이 되어야 한다. 도대체 내 인생에서 소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야 읽을 것 아니겠는가?

 

삶과 동떨어진 가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문학이 소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이고, 내 삶임을 알게 해주는 문학이 소설임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에 대한 고민에 어느 정도 해답을 주는 책이 이 책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기억 읽기를 시도하라는 이 책. 기억 읽기가 왜 중요한지를 논증하고 있는 이 책은 기억을 통하여 자신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작가가 쓰면서 자신의 기억을 불러내어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독자는 작가가 형상화한 작품을 읽으면서 자신의 기억을 불러내어 재형상화해야 한다고, 그렇게 재형상화했을 때 그 소설은 자신에게 의미있게 다가온다고... 그런 재형상화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다.

 

학술적인 책이라서 전공을 하는 사람들이나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소설을 가운데 두고 작가와 작중인물과 대화를 할 수 있음을, 대화를 해야함을 인식하게 해주고 있기에 의미가 있는 책이다.

 

작가의 기억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작품을 읽으면서 거기에서 촉발할 수 있는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또는 숨어있던 기억이 자연스레 표출되어 기억을 언어로 다시 표현해낸다면,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것이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할테니 말이다. 그래서 소설이 이런 의미가 있기에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지 말고 읽어야 한다.

 

소설을 읽으며 그동안 숨겨왔던, 또는 잃었던 자신을 만나야 한다. 그렇게 만나는 자신은 과거의 자신이 아니고, 현재의 자신도 아니다. 현재의 내가 불러낸 과거의 나이기에 그렇게 기억된 나는 미래의 나를 만들어가는 디딤돌이 된다.

 

스마트 기기에 얼굴을 박고 수시로 변하는 그 기기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조금 느리더라도,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소설을 읽으며 자신 속의 다른 자신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기에, 그 복합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다른 나'들'이 산재해 있는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소설을 더욱 잘 읽기 위해서는 내 기억도 읽어내야 한다. 내 기억과 소설에 나오는 기억이 만나는 순간, 다른 모습의 나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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