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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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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이 열린 책들과 창비에서 각각 다른 번역자로 비슷한 시기에 출간이 되었다. 지난 번에는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눈먼 올빼미>가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으로 나란히 출간된 적이 있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선택과 비교의 폭이 넓어지니 재미있는 현상인 것 같다. 이 작품은 1920년대 혁명과 내전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의사였던 작가 불가꼬프가 과학이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써낸 기발한 작품이다. 인간의 놔하수체와 생식기를 개에게 이식을 한다니, 어쩜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는지 작품의 시작부터 너무도 독특하고 기발해서 흥미를 유발시키는 작품이라 하겠다.

 

극중 쁘레오브라젠스끼 교수는 뇌하수체의 적응성에 대한 문제를 연구 중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의 유기체를 젊어지게 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뇌하수체과 고환을 연결해 이식하는 실험을 하게 된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주인 없는 개를 데려다, 부랑자의 시신에서 남성의 생식기를 이식하고, 인간의 뇌하수체로 교체를 하는 엄청난 수술을 한다. 그리고 경과를 지켜보는데,  갑자기 이마와 몸통 옆구리에서 털이 현저하게 빠지고, 개 짓는 소리가 멍멍 소리 대신에 아-오 음절로 바뀌고, 대단한 식욕을 보이더니 몸무게가 늘어나고, 웃고, 단어를 짖어 대는 지경에 이른다. 개가 점점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개 샤리크가 아닌 인간 샤리꼬프가 된 것이다. 뇌하수체의 이식이 개를 젊어지게 한 게 아니라, 아예 개를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놀라운 대발견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되는 커다란 사건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샤리꼬프가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은 하지만, 인간답지는 않다는 것이다. 욕을 하고, 흡연을 하고, 술을 마시고, 인간처럼 먹고, 옷을 입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인간' 처럼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행동을 그저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윤리적인 판단을 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인간답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한테 나를 수술해 달라고 청한 적이 있나?

 

그는 흥분하여 지껄이기 시작했다

 

좋은 일 하셨구먼! 동물을 잡아다가 칼로 머리를 길게 썰어 줄무늬를 만들어 놓고서, 이제 와서는 싫어하고 경멸하신다 이거지. 나는 나를 수술하라고 허락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그는 천장을 향해 두 눈을 위로 치켜 뜨고, 마치 모종의 법률적 문구라도 회상해 내려는 듯했다) 마찬가지로, 내 친족들의 동의도 없었다고. 나는 민사상의 손해 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

 

 

불가꼬프는 당시 러시아 혁명으로 만들어진 소비에트 인간형을 풍자하고 사회주의의 허상을 이렇게 비판한다. 물론 우리는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한 혹은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한 숱한 작품들을 이미 본 적이 있다. 루타 서페티스의 <회색세상에서>,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 44> 그리고 영화 <웨이백>, 조금 멀리 영화 <타인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란 국가가 인간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당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러시아는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최초의 인간 실험장이었다는 말조차 있을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알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동 아파트에 거주하며 개인적인 생활은 국가에 의해 철저히 감시를 당하고, 불순분자로 찍히면 바로 노동수용소행이다. 따라서 집단적 인간은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사생활을 감시해야 했고, 자연스레 자기중심주의가 자라나는 온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체포되지 않기 위해 남을 고발해야 했던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도 마음 놓고 대화하지 못하고속삭이며살아야 했으니, 과연 사회주의 유토피아라는 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

 

불가꼬프는 개를 인간으로 변형시키는 비자연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수술을 볼셰비끼의 파괴적인 혁명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 수술이 잘못되었음을 마치 혁명의 부당함을 알리듯이 주인공 쁘레오브라젠스끼를 통해 전한다. 1925년에 쓰인 이 작품은 1988년에 블라디미르 보르트코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대체 인간처럼 변한 개는 어떤 모습일까?>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에 영화도 찾아서 보았다.

 

영화 속의 '개 샤리크' 와 인간 '샤리꼬프'는 바로 이런 모습이다.

 

 

소설에선 쁘레오브라젠스끼 교수를 중심으로 수술을 하고, 관찰을 하면서 그의 심경 변화가 중점적으로 서술되었다면, 영화에서는 그런 변화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인 부분에 조금 더 시선을 두고 만들어진 느낌이다. 무산계급의 혁명대원들에게서 울려 퍼지는 혁명의 목소리, 모두 방을 나눠가져야 하는데 박사 혼자 너무 넓은 공간을 차지한다며 쳐들어온 이웃들, 그리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기존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샤리꼬프. 게다가 그는 이제 자신이 사람의 형상이니 다른 사람들처럼 서류에 이름도 올리고 싶고 어쩌고 하면서 슬슬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다. 결국 교수는 창조가 아닌 또 다른 변형물인 개인간을 만들어 낸 것이 중대한 실수였음을 직시하고..샤리꼬프(개인간)을 다시 샤릭()로 환원시키는 수술을 단행한다. 마치 작가 자신이 당시에 저질러지고 있던 혁명의 소용돌이를 다시 그 이전으로 환원시키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사람 다울 때, 개는 개 다울 때가 가장 자신다울 수 있다. 각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리를 거역했을 때 엄청난 재앙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 사회에도 자연스러운 법칙과 순리가 있거늘, 국가에서 강제로 통제하여 억지로 만들어내는 평등은 부자연스럽고,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기발한 발상으로 풀어가는 한 편의 소동 극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짐작해보면 슬프고 무서운 작품이다.

 

소설을 읽고 내용 파악이 잘 안되거나, 이미지가 와 닿지 않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영화로도 만나보기를 권한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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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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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의 주인공은 65세 할머니 킬러이다. 손톱이라는 의미의 '조각'이라는 가명으로 45년간 킬러로 살았고,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현직킬러이다. 그녀는 청탁 받은 존재들을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제거하는 청부살인업자이다.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나 친척 집에서 눈치 밥을 먹으면서 자랐고, 집을 나와 주방 일을 하던 시기에 자신에게 달려드는 미군을 방어하다 죽인 것이 그녀의 첫 살인이었다. 살인의 시작에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이유가 있는 정당방위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했던 남자 ''에 의해서 전문 청부살인을 시작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그녀 삶의 전부가 된다. 자신의 의지로 시작한 살인은 아니었지만, 평생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살인을 했고, 무려 60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현역 활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존심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조각이 어떤 캐릭터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보자.

 

그녀가 심란한 이유는 팔이 붙잡힌 순간 곧바로 소매를 뿌리치려고 했으나 투우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서인데, 자신의 신체적 노화가 일상의 노력을 추월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초조함이다. 베일 철을 지난 이삭은 고스러지게 마련이고 젊은 남자와 나이 든 여자의 당연한 힘 차이라는 건 이 상황에 고려 대상이 아니며 지금은 업자 대 업자일 따름인데 조각으로선 사소하고 순간적인 장면이라 한들 이 코흘리개한테 졌다는 게 핵심이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적 반응보다 부실한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녀는 투우가 천천히 힘을 풀고 소매를 놓았음에도 그 자리를 떠날 생각을 미처 못 하고 다시금 소파에 주저 앉는다.

 

물론 육 십대의 그녀가 삼 십대의 투우와 힘 싸움으로 이길 수 있을리는 만무하다. 그녀가 아무리 노련한 킬러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투우는 조각을 만날 때마다 시비를 걸고, 그들은 그렇게 늘 부딪힌다. 그래서 이런 순간에도 <부실한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실망>을 느끼는 그녀의 마인드야 말로 그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여태껏 그 누구한테도 기대거나, 혹은 기대어보려고 마음을 먹거나 한 적 없이 자립적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온 강단 있는 여성 캐릭터라는 느낌이다. 물론 작가는 외부에서 노인들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의 처음 지하철 내의 풍경을 묘사한 장면은, 우리가 매일같이 실제 보는 그 풍경이다. 노인에 대한 젊은이들의 시선과 생각, 그리고 '나이 듦'을 권력으로 이용하려는 횡포와 실제 그들의 쇠락한 육체가 비춰지는 모습까지 말이다. 하지만 '조각'이 여느 노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의 킬러로서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여전히 의뢰를 받아서 방역 업무를 하고 있으며, 젊은 그 누구에게도 실력으로 밀리지 않는다.

 

조각은 길 잃은 개 무용과 함께 지내는데, 무용을 집에 데려온 뒤로는 항상 창문을 열어둔다. 그리고 창문을 밀어젖히는 모습을 몇 번이고 무용에게 보여주며 확인시킨다. 언젠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혹은 어느 날 아침 네가 눈을 떴을 때 내가 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그때 너는 저리로 나가야 해.라고 가르쳐주기 위해서. 너는 나가서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개 장수들한테 잡히지 말고. 사람들이 너를 안락사 시키지 않도록. 늙은 개는 누구도 맡으려고 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이런 순간에야 조각이 평범한 65세 할머니처럼 느껴진다. 혼자 남겨질 누군가를 걱정해야 할 만큼, 이제는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나이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평소와 달리 방역 작업 준비 중에 만난 폐지 수거 노인을 도와주다, 작업을 망쳐버리고 만다. 그리고 다친 자신을 몰래 치료해준 강박사의 가족에게 연민을 가지고, 그의 딸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면서, 처음으로 '연민'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것이 노화의 증거라고 스스로 느끼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복숭아, 그 뒤로 복숭아를 어떻게 했더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각은 냉장고를 연다. 혼자 살면서 식료를 쟁여둘 일이 없으니 냉장고는 300리터다.

이 참에 한꺼번에 청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하단 채소 칸을 연다.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집에 와서 그녀는 꼭 한 개를 먹었을 뿐이고, 그 뒤로 잊어버린 모양이다.

 

냉장고에 넣어둔 과일이나 채소가 색이 변질되고 형태가 망가지는 걸 누구나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난 여름에 남자친구가 복숭아를 한 박스 집으로 보내준 적이 있다. 주문하면서 모양 예쁜 걸로 잘 골라서 담아달라고 했다고 하면서. 그래서인지 도착한 복숭아 한 상자엔 멍들지 않고, 탐스러운 복숭아들이 가득했다. 색깔이 변하지 않게, 물러지지 않게 빨리 먹어야지. 마음 먹었었는데, 워낙 집에서 뭘 잘 안 먹는 성격이라 그런지 이 주쯤 지난 뒤에 어김없이 모양이 망가진 '파과'들을 냉장고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음 써준 남자친구에게 미안해서 그것들을 골라 잘라서 조각을 내고, 성한 부분만 모아서 복숭아 잼을 만들었다. 잼을 만드는 것이 결과적으로 복숭아의 유통기한을 늘려주는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싱싱한 과육 상태일 때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미안함 마음이 남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달콤하고 상쾌하던 것이 갈색 덩어리로 변해서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무엇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간이 자연히 나이를 먹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원한 젊음이란 없으니까. 과일이 만들어질 때부터 방부제로 보존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조각은 투우와의 마지막 결전의 날을 앞두고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콜트 45구경을 꺼낸다. 오래되었다고 해도 구한 지 15년은 넘지 않았고, 밀봉상태였으니 불발탄이 나올 가능성이 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하루가 달라지는 자신의 몸만큼이나 그것의 기능이 불안해 점검을 받으러 나선다. 사람의 영혼을 포함해서 자연히 삭아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노후 된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원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파과'라는 제목만큼이나 작품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복숭아의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아마도 사라져 버린 것들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느낌에 내가 지난 여름의 그 과육에 대한 미련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리고 같은 시기에 출간된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미 많은 이들이 리뷰에서 이 두 작품에 대한 감상문을 올렸지만, 같은 소재로 이렇게나 다른 색깔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흥미로움이 나도 몇 자 끄적이게 만든다.

 

구병모의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고, 김영하의 이야기는 다소 '후일담'같은 느낌이다. <파과>의 문장은 호흡이 매우 길어 대충 흘려 읽으면 의미가 분명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어,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읽어야 한다. 대신 주인공이 왜 킬러 일을 하게 되었는 지와 그녀가 '방역'을 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묘사가 되어 있어 스토리 자체는 구체적이고 분명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문장은 단문이라 속도감 있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늙은 살인범이 기억과의 사투를 벌이는 스토리는 서사가 툭툭 끊어지며 전개되어 불친절하다. 그가 왜 살해를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동기와 살해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없기에 모호하다. 누군가는 구병모의 긴 문장이 술술 읽히지 않고 자꾸만 걸린다고 불편해하고, 누군가는 김영하의 이야기에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두 명의 완전히 다른 색깔을 가진 작가가, 정확히 같은 시기에 유사한 소재로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었다는 것 자체가 독자 입장에서는 꽤나 행복한 일이 아닌가 싶다. 간결하고 압축되어 짧은 남성적인 문체의 너무나 잘 읽히는 작품과 호흡이 길고 수식이 많아 긴 여성적인 문체의 너무나 어렵게 읽히는 작품. 그러나 전자는 스토리가 모호하고, 반면에 후자는 스토리가 명확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 70세 김병수는 은퇴한 연쇄 살인범이다. 30년 동안 사람을 죽였지만, 마지막 살인으로부터 25년이나 흘렀다. 그리고 그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신의 사라져 가는 기억과 사투 중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 살인을 계획하려고 한다. 이제 그에게 마지막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내 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기 전에 박주태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이 적어둔 기록도 다음날이면 까맣게 잊어버리는데. 김병수의 첫 살인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들겨 팼던 아버지에 대한 살인은 그 이후에 30여 년 동안 행했던 살인과 인과관계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가 왜 아버지 이후에, 다른 사람들을 계속 죽여야 했는지에 대해서 작품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스토리 자체가 모호해진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이니 독자가 혼란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말이다. <파과>는 반대로 주인공 65세 조각이 왜 킬러가 되었고,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실제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묘사가 되어 스토리가 매우 명확하다. 3인칭으로 쓰여진 시점이라 각 캐릭터 별로 사연과 감정선이 분명하게 보여진다. 김영하의 작품이 150페이지 정도의 아주 가볍고 짧은 책으로, 수식 없이 단문으로 이루어진 문장이 스륵스륵 책장이 넘어가는 것에 비해 내용을 모호하게 만들었다면, 구병모의 작품은 스토리가 명확한데 비해 호흡이 긴 문장들로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더디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렇게나 다른 두 작품이지만, 사실 두 작품 모두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부분들이 많다. 으깨진 과일.에서 소멸하는 육체에의 비유를 발견하고 이팔청춘이 지나가버린 늙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만든 구병모 작가도 멋지고,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이 마지막 살인을 준비하고, 살인일지를 쓰는데 문장력이 부족해 시 강좌를 듣는다는 설정을 한 김영하 작가도 멋지다. 구병모 작가는 독자들이 페이지를 빨리 넘기는 것이 싫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좀 들여서 읽으라는 뜻으로 긴 문장을 썼다고 하는데, 그에 따라 누군 가에게는 그 긴 호흡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김영하 작가는 이번 작품이 하루에 한두 문장, 한 단락 정도만 쓰는 날이 많았을 정도로 천천히 쓰였다고 하는데, 그와 반대로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너무' 잘 읽혀서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구병모 작가의 결말은 어딘지 쓸쓸하기 보다는 따뜻하고, 김영하 작가의 결말은 서늘하고 섬뜩하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부서지고 소멸에 가는 것들에 대한 시선이 아닐까 싶다.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어쩐지 그의 짧은 소설은 농담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피식 웃게 만드는 이야기 속에 남아 있는 건 찝찔한 슬픔의 맛이 남아 있다. '육체적인 소멸과 더불어 사회적인 시선에 저항하는 방식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킬러라는 소재를 사용했다'고 하는 구병모 작가의 말처럼, 그녀의 소설은 늙어서 약해져 가는 인간에 대한 애틋하고도 달콤한 맛이 나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이런 두 작가의 '다른' 작품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건, 같은 시대를 사는 독자로서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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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 - 라만차 돈 키호테의 길
서영은 지음 / 비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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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는 기사인 척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밑바닥까지 이미 기사인 사람이에요. 그는 자기 자신을 의의 병기로 바치겠다는 각오였지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연극'과 돈키호테이 연극 성이 전혀 다른 이유는, 연극은 배우가 자기 아닌 어떤 캐릭터를 그럴 듯하게 연기하는 것이고, 돈키호테는 그럴 듯하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속속들이 기사인 자기 자신을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는데 있지요. 그의 자기 확신이 너무 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를 대할 대 오히려 연극을 해야 되는 거지요. 타인으로 하여금 연극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돈키호테의 연극 성이라고 할까요?

 

 

충직한 하인 산초를 데리고 다니면서, 풍차를 적군으로, 이발사의 대야를 맘부리노 투구로 여기고 공격하는 돈키호테의 허무한 싸움은, 그가 가진 꿈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매혹적이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건 허황된 꿈이나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기사가 사라진 시대에 웬 노인이 자신을 방랑기사 돈키호테라 칭하고 여관을 성으로 여기고, 허드렛일을 하며 가끔은 몸을 파는 천한 알돈자를 고귀한 레이디 둘시네아라고 부르며 그녀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여기서 방점은 그가 기사인 척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밑바닥까지 이미 기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돈키호테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발표한지 무려 400년이 넘었다. 서영은 작가는 이번에 마음껏 부딪히고, 두려움 없이 날아올라라!는 뜻의 멋진 제목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새롭게 읽어낸다. 바로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그 길에서, 스페인 마드리드 지역에 있는 세르반테스의 묘부터 둘시네아의 집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돈키호테와 산초, 둘시네아가 살아있는 듯한 자취를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스페인을 찾는 여행객들은 곳곳에서 그림이나 조각, 조형물 등으로 돈키호테와 산초를 만날 수 있다. 두 인물이 작품 속의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마치 실제 현존했던 사람들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리 곳곳, 상점 곳곳에서 그들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스페인 광장에 가면 세르반테스의 조각상과 돈키호테와 산초의 동상이 함께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가에겐 관심이 없고 돈키호테와 산초 앞에서 주로 사진을 찍는다. 이렇게 작품 자체의 불멸성은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는 인물들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시킨다. 이런 것이 바로 글의 힘으로 현실이 달라지는 그런 순간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책 속에 있는지, 실제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그런 지점 말이다. 극중 인물이 책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것이야말로 아마도 모든 작가들이 꿈꾸는 일일 것이다.

 

 

돈키호테의 역설은 철저하게 의미의 세계에 대한 것이에요. 풍차를 악의 상징, 양떼를 군대로, 이발사의 머리에 얹어진 번쩍거리는 대야를 맘부리노 투구로 여기고 공격하는 돈키호테의 모든 싸움의 진실은 사실의 세계를 뒤엎고, 사랑과 순종이 본질인 의미의 세계를 확장해가는 침노적 전투예요. 이 침노는 사실의 세계, 물질의 세계로만 보았을 때 생기는 우리 삶의 왜소함, 덧없음, 속절없음, 비루함을 갈아엎고 위대함, 거룩함, 성스러움에 접목시키려는 존재적 반란인 거지요. 그러기 때문에 이 인물이 소설 속 주인공이어서 우리하고 상관없는 허구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해 깨닫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광야의 소리 같은 거라고 생각돼요.

 

 

현실에서 돈키호테란, 꿈과 이상을 향해 두려움 없이, 다소 무모하게 직진하는 캐릭터에 자주 비유되곤 한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그 유명한 넘버 "The Impossible Dream"의 가사처럼, 그 꿈, 그 싸움 모두 이길 수 없고, 길이 아무리 험해도 나는 정의와 사랑을 위해 싸우겠다. 잡을 수 없는 별처럼 먼 희망이라도, 나는 멈추거나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는 것이 바로 돈키호테의 정신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이야기. <사실은 이렇지만> 의 현실을 배제한. 왜냐하면 이상 가득한 우리의 기사 돈키호테와 험난한 모험을 떠나더라도 산초는 여전히 아내에게 구박을 받고, 돈키호테의 충고에 따라 주변 남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보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당하고 마는 알돈자는, 여전히 천한 여종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니 말이다.

 

 

꿈도 열정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현실을 무시하고 공상에 빠진 사람들이나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영은 작가의 말처럼 어느 시대이든지 투혼은 인간에게 자기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힘이 되어준다. 돈키호테가 정의감에 사로잡혀 분별없이 행동하는 무모한 캐릭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최소한 자기 자신을 속이지는 않았다. 기사인 척 연기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이 기사라고 믿고 그에 맞게 행동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럴 듯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삶을 살아내는 것 말이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거리낌이 없다는 그 순수한 마음가짐. 나는 그것에 가치를 두고 싶다. 바로 소설 속 주인공이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실체로 거듭하는 그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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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컵을 위하여
윌리엄 랜데이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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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바버는 지방검찰청에서 검사장 바로 아래 직책인 차장검사로 유능한 검사이다. 중산층이 모여사는 조용한 도시에서 어느 날 열 네 살 어린 소년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앤디는 수사를 직접 지휘하고 근처에 사는 아동 성추행범인 레너드 패츠를 용의자로 소환하지만, 직접 적인 증거가 없다. 며칠이 지나도 수사의 돌파구는 발견되지 않고, 아들 제이콥이 다니고 있는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면담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아들의 페이스 북에 접속을 했다, 친구 데릭이 작성한 글을 보게 된다.

 

제이크, 네가 그랬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 너 칼 가지고 있잖아. 내가 봤어.

 

그리고, 그는 아들의 방에서 검정색 접칼을 발견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하지만 제이컵은 그저 멋있어 보이는 칼이라 샀다고 할 뿐이다. 자신은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그런데 살해현장에서 발견된 잠복 지문과 제이컵의 지문이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희생자의 상의 안쪽에서 제이컵의 지문이 나온 것이다. 앤디는 휴직 처리되는 걸로 수사에서 바로 제외가 된다. 열네살 제이컵은 살인죄로 기소되고, 앤디는 그의 아버지이자 변호인으로서 아들의 무죄 입증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기소된 이에게서 어떻게든 숨겨진 나쁜 면을 찾아내던 원고의 입장에서, 반대로 좋은 면을 찾아내어 문죄를 입증해야 하는 피고 측에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속속 밝혀지는 증거들은 모두 제이컵에게 불리하게 전개된다. 살해된 벤은 지속적으로 제이컵을 괴롭혀왔었고, 제이컵은 데릭에게 괴롭힘이 지속되면 칼로 자신을 지키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확실하고 분명한 살해 동기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건 당일 아침, 오른손에 소량의 핏방울을 묻히고 학교에 왔던 것을 친구인 데릭이 기억하고 있었다. 제이컵이 즐겨 찾는 웹사이트 편집실은 섹스와 폭력을 다루고 있는 곳인데, 그는 그곳에 실명으로 범행 사실과 관련된 허구의 글을 올린다. 모든 증거들이 마치 짜맞추기라도 한 듯이 제이컵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제이컵 사건이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그들 가족은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 혐의를 벗는다고 해도, 비난의 멍에를 벗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배심원단이 제이컵을 '무죄'라고 선언할 수 는 있을지언정, 결코 '무고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그 누구보다 앤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검사로서 다시는 법정에 서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게다가 재판이 진행되면서 그들은 이미 재정적으로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변호사의 수임료도 이미 여섯 자리에 이르렀고, 제이컵의 대학 학자금 전부를 소송 비용으로 썼으며, 이제는 노후 자금으로 비축해둔 것을 조금씩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파산할 것이 뻔하고, 남은 비용을 지불하려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무죄 평결이 내려진다고 해도, 검사로서의 이미 경력도 끝장이 났다. 그제야 앤디는 피고인이 되면 죄의 유무를 떠나서 기소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형벌이 된다는 걸 깨닫는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은 비용이 들기도 하고, 재판 이후 다시는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 입장이 되어봐야 아는 것이다. 다른 법정 스릴러와는 차별성 있는 이 작품의 묘미가 바로 이런 부분에 있다. 실제 지방 검사 출신인 윌리엄 랜데이는 누구보다도 리얼하고, 세세하게 재판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피고 측과 원고 측이 어떤 입장으로, 어떻게 재판에 임하는지를 보여준다. 법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런 디테일로 탄탄하게 플롯을 구축하고, 사실에 입각한 현실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백이 없으면 사건을 입증할 수 없지만, 증거를 확보하지 않고는 자백을 받아낼 수가 없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 그 시간에 범인으로 의심되는 그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물적 증거는 없다. 실제로 그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모두가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는 얘기도 된다.

 

만약에 우리가 틀렸으면 어쩌지? 제이컵이 정말 유죄면 어쩌지?

 

이 작품이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재미있어지는 부분은 바로 이 질문이다. <당신은 가족을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가?> 작가는 시종일관 독자들에게 말한다. ,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당신은 자신의 부모, 혹은 형제 혹은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거의 무조건 믿어야 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평범한 내 아들이 누군가를 죽인 살인자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럴 리가 없으니 나는 당연히 나의 아들이 무죄라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과 증거들은 모두 아들이 살인자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앞 뒷면과 같다. 사소한 행동, 말투들이 쌓여 오해를 만들고, 견고하게 쌓인 세월을 넘어 믿음을 깨트린다. 그리고 부모와 닮은 아이들은 점점 자라면서 낯선 타인처럼 이질적이고 불가해한 존재로 변해간다. 외모는 점점 부모를 닮아가더라도, 어느 순간 아이는 친근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진짜일까?

 

앤디는 자신이 얼마나 아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지 깨닫게 된다. 제이컵은 운동을 잘하는 것도,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닌, 두드러진 특징이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않았고, 친구가 별로 없었던 괴짜였다. 가장 친한 친구인 데릭은 제이컵이 다른 아이들과 달리 야비하고, 차가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동물에 대해서도 감정이 놀랍도록 싸늘한 면이 있었다고. 그래서 언젠가 제이컵에서 무슨 일이 생길거라고 생각했었다고. 과연, 살인 유전자라는게 진짜 있는 걸까? 앤디의 아버지대로부터 이어진 그 끔찍한 살인유전자가 자신의 아들, 제이컵에게로 이어진 것인지 앤디와 로리는 두렵기만 하다. 그리고 로리는 우리가 아이를 창조했기 때문에, 만약에 제이컵이 유죄라면 자신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 충격적인 결말을 포함하여 이후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내용은 여기까지만 언급하겠다.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윌리엄 랜데이가 얼마나 굉장한 작가인지도 새삼 깨달았다. 물론 존 그리샴, 제프리 디버 등 변호사 출신 작가들이 실제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므로, 지방검사 출신인 윌리엄 랜데이의 이력이 독특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품 속 공판 과정이 실제 법정을 보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감이 있다는 것 외에 이 작품에 장점이 너무 너무 많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꼼꼼한 복선, 다채로운 플롯, 긴장 감있는 구성... 그리고 도덕적인 고민과 딜레마, 스릴러 장르로서의 재미까지..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냥 이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다.

 

말이 필요 없다. 직접 읽어보아야 한다.

 

올해 최고의 법정 스릴러인 이 작품에 투자하면 비용과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다. 별 점이 다섯 개까지 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이다. 별 점을 곱 배기로 주고 싶은 너무 너무 멋진 작품!!! 책장을 덮자 마자, 이 두꺼운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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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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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소설은 딱 두 종류라고 생각한다. ''의 이야기거나, ''의 이야기거나. 전자는 공감과 위로를 바탕으로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끔 만들어준다. 페이지 속에서 잊고 있었던 사람을 만나거나, 과거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 일인데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각이 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후자는 인물의 행동을 구경하고 푹 빠져서 지켜보게 만들어준다. 인물은 멋지고, 스토리는 흥미진진하지만 내가 현실에서 직접 겪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그런 스토리 말이다. 어차피 소설은 허구의 서사이므로 대부분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후자의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책 속에서 과거의 나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번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몇 페이지 읽다가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이건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쓰쿠루는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짐을 챙겨 신칸센을 타고 나고야의 집으로 돌아가, 자연스레 네 명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한다. 하지만 그 누구하고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며칠 뒤 통화가 된 친구는 아무런 설명 없이 쓰쿠루에게 이렇게 말한다.

 

"미안하지만 이제 더는 누구의 집에도 전화를 걸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마음이 덜컹거리는 걸 느꼈다. 기차를 타고 가는 것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잊고 있었던 누군가가 저 멀리 기억 속에서 생각이 났다. 쓰쿠루는 알았다며 그냥 전화를 끊는다. 특별히 항의도 하지 않고, 따지고 들지도 않고. 나 역시 과거에 그런 기억과 상황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동안 시간의 무게에 묻혀서 잊고 있었다고 생각한 그것이 이 문장을 계기로 다시 생각이 나고 말았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이었다. 그리고 그 여름을 경계로 다자키 쓰쿠루의 인생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날카롭게 솟은 능선이 양쪽의 식물 생태를 다르게 갈라놓듯이.

 

7년 전, 당시에 나는 어떤 취미 생활에 푹 빠져 있었는데 그것과 관련된 동호회 소모임이 있었다. 10여명으로 이루어진 그 모임에서 나는 동갑내기 친구 A, 한 살 위 언니 B, 한 살 아래 동생 C와 각별히 친하게 지냈었다. 모임 외에도 자주 통화하고, 따로 만나서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고, 일상의 거의 대부분을 그들과 함께 보냈던 몇 년 간이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C를 통해서 그가 B와 몰래 사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모임의 그 누구도 알면 안 되는 비밀이었는데, 왜냐하면 당시 B에게는 공식적인 남자 친구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B언니가 바람이 난 건지, C때문에 두 사람이 헤어진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연애를 하던 중이었고, 제일 가까웠던 나에게만 털어놓았던 것이다. 나는 그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가장 친했던 A를 비롯해서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의 데이트에 나도 자주 같이 있었고, 나는 그들의 비밀 연애를 알았지만, 이전과 똑같이 B C를 대했다. B는 내가 좋아하는 언니였고, C 또한 내가 아끼는 동생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C와 당시 공부하던 자료에 대해서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아마 여름이었고, 지하철 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갑자기 나에게, "우리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을 했다. 당시에 내가 무슨 소리냐고 했었는지, 갑자기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었던지..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고, 거의 상처받아서 알았다고 대답하고 그냥 전화를 끊었던 것 같다. 이유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깊이 따지고 들지도 않았고, 특별히 항의를 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극중에서 쓰쿠루가 네 명의 친구들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난 뒤 했던 행동처럼 말이다. 그의 말처럼 정말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으면, 말 같은 건 나오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모임에서 자연스레 빠지게 되었고, 나는 여전히 A B를 만났지만 대체 내가 C에게 뭘 잘못한 건지,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은 채로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몇 년 흐른 뒤에 B C도 더 이상 커플이 아닐 때, 그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서로 그 일에 대해서는 묻지도, 해명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와 예전처럼 각별한 누나, 동생 사이로는 되돌아 갈 수 없었다.

 

다자키 쓰쿠루는 고등학교 시절 네 명의 친구와 각별히 친하게 지냈었는데, 그들은 5명의 그룹으로 항상 시간을 함께 보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쓰쿠루 혼자 멀리 도쿄로 떨어지게 되었지만, 방학 때마다 네 명의 친구들을 만나러 나고야로 가며 그들의 우정은 지속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를 받는데. 이제 우리들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그렇게 친구들의 그룹에서 추방당한 뒤 그는 여러 달 동안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보낸다. 물론 다섯 달 뒤에 그 심연의 밑바닥을 치고 올라왔지만, 그러고 나니 기존의 얼굴과 체형, 분위기까지 모두 바뀌어버린다. 거울을 보았을 때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스스로가 채워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성인이 된 쓰쿠루는 어떤 친한 친구도 만들지 않고, 여자를 만나더라도 깊이 있게 만나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면서 어느새 서른 여섯이 된다. 16년 전의 상처는 극복하지 못한 채, 아무렇지도 않게 의문 가득한 채로 묻어두고 말이다.

 

"분명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고, 그것이 나한테 일어났다는 것은 아마도 좋은 일이었을 거야.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랬던 만큼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아니 거부당했을 때의 충격은 너무 컸어. 상실감, 고독감.... 그런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어."

"그렇지만 벌써 16년이란 세월이 흘렀잖아. 당신, 지금 30대 후반의 어른이야. 그때의 아픔이 아무리 컸다고 해도 이제 슬슬 넘어설 때도 되지 않았을까?"

 

2살 연상의 여자친구 사라는 쓰쿠루에게 친구들에게 거부당해야만 했는지 이유를 밝혀보라고 말한다. 이제는 상처 입기 쉬운 순진한 소년이 아니니까,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 해야 한다고.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봐야만 하는 걸 보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그 무거운 짐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야 해> 라고 말이다. 문제를 얼렁뚱땅 내버려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그녀 덕분에, 쓰쿠루는 무려 16년 만에 헤어졌던 네 명의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가서 만나보기로 결정한다. 기억을 덮어 둘 수는 있지만, 역사를 숨길 수는 없는 거니 말이다. 나고야에 남아 있는 친구도 있고, 멀리 핀란드에 거주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쓰쿠루는 그들을 찾아간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그룹에서 추방되어야만 했던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서, 당시 친구들의 비밀에 대해서 알게 된다. 당시에 그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쓰쿠루에게 벌어진 일의 실체에 대해서는 직접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그가 과연 친구들로부터 상처를 받은 피해자인지,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던 가해자였는지..는 이 책의 끝까지 다다르면 알게 될 것이다.

 

네 명의 친구들에겐 사소하고 우연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름에 색깔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카마쓰 게이는 레드, 오우미 요시오는 블루, 시라네 유즈키는 화이트, 구로노 에리는 블랙이다. 다자키만이 색깔과 인연이 없었고, 그는 자신을 색채도 없고 개성도 없는 텅 빈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다. 제목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는 그런 의미이다. 네 명은 서로를 당연한 것처럼 색깔로 불렀다. 아카, 아오, 시로, 구로라고. 그들의 이름의 색깔 만큼이나 개성 있고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룹 중에 유일하게 쓰크루 만이 이렇다 할 특징이나 개성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재미있게도 대학 시절에 만난 두살 아래 동생 하이다의 이름에도 그레이라는 색깔이, 그가 들려주던 이야기에 등장하는 피아니스트 미도리카오도 녹색이라는 색깔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쓰쿠루는 자신만 색깔이 없는, 아무런 특징도 없고, 고유의 개성도 없는 존재라고 여기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모두다 고유의 색깔이 있다. 그 색깔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람도 있을 테고, 희미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루키의 작품에는 자주 특정 음악이 언급된다. 1Q84에서 아오마메가 택시 안에서 듣던,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와 덴고가 좋아한다고 했던,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이번 작품에는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 라는 소곡집에 수록된 [르 말 뒤 페이] 가 언급된다. 학창시절 시로가 곧잘 연주했던, 그리고 하이다가 가져온 레코드를 통해서. 박스에 든 세 장짜리 레코드는 그가 소식이 끊어진 뒤에도 여전히 쓰쿠루의 방에 있다. 그리고 그는 과거와 마주할 때마다 그 음악을 떠올린다. 나는 예약판매 기간에 책을 구입한 덕분에 해당 음원을 받았는데, 단음으로 천천히 조용하게 이어지는 선율이 위로를 품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과거에 덮어둔 그 기억이 결국에는 따뜻한 낙관으로 연결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치유되지 않은 채 내버려져 있던 나의 상처에 위안을 주는 것 같이 말이다.

 

쓰쿠루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서기 위해서,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서 순례를 떠난다. 도쿄에서 나고야로, 또 핀란드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여행을 말이다. 역에서 근무하는 그는 매일같이 떠나고, 도착하는 사람들을 볼 것이다. 역이란 공간은 멈춰있는 것 같으면서도 움직이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쓰쿠루가 색채가 없다고 느끼지만, 친구들은 그를 다르게 기억하고 있던 것처럼, 모든 의미부여는 상대적이니 말이다. 문득 나는 지금 어느 역에 서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1년의 절반이 지난 지금, 나는 과연 2013년이라는 길에서 어디 쯤에 와 있는 걸까? 올 초에 내가 생각했던 그 길로 올바르게 가고 있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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