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제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드는 나이기에 요즘 관심을 두는 작가에는 백수린이 있다기에 책을 사서 읽어 나갔다. 그렇게 친애하는 작가 목록에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 신간이 나오면 읽는 것으로 멀리서 미약한 응원을 보낸다. 『다정한 매일매일』이 나왔다는 걸 알았지만 당장 읽어야지 했지만 핑계겠지만 여차여차한 나름의 사정으로 뒤늦게 읽었다. 너무너무 굉장히 좋았다는 걸 먼저 밝힌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화 하나. 컴활 2급 필기시험을(그렇다. 요즘의 나는 컴활 2급 자격증 시험에 목숨을 걸고 있다. 남들은 독학으로 일주일 만에도 딴다는데 컴맹인 나는 아무리 책을 들여다봐도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머리를 굴려서 함수식을 넣어보지만 매번 오류가 뜬다. 그놈의 #VALUE! 오류. 그만 좀 떠라.)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컴퓨터로 푸는 CBT 시험이었는데(그렇다. 요즘에는 컴퓨터로 시험을 보는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컴퓨터 사인펜 가져가려고 했지 모야.) 화면에 나온 폰트가 충격이었다. 문제를 읽어야 하는데 폰트가 신경 쓰여 집중이 안 됐다. 아실랑가 몰라. 그 옛날 도스 시절에 컴퓨터 화면에 나오던 폰트. 명령어를 입력할 때 나오던 두껍고 납작한 글자체였다. 찾아보니 둥근 모꼴이란다.


파란 화면에 명령어를 입력해야 부팅이 되던 시절. 그걸 몰라서 컴퓨터를 관상용으로 놔두기만 했던 나였다. 화면으로 글을 읽는 건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마주한 컴퓨터를 포기하게 만들었던 그때의 기억을 불러오는 화면의 글자들을 보면서 충격에 빠지긴 했지만 충격에 빠지면 어쩔 건데 빨리 시험을 봐야지. 집 나간 정신을 부여잡고 천천히 화면 속 글자를 읽어 나갔다.


결과는? 컴퓨터 일반은 무조건 외우면 되는 거라 백 점을 맞았는데 스프레드시트 일반은 65점을 맞았다. 그리하여 엑셀 공부를 진지하게 하고 있다. 실기의 꽃인 계산 작업에 올인하고 있다, 지만 오류만 뜨고 난리다, 난리. 머리를 식히고 감성을 충족해 줄 책이 필요했다. 숫자와 영어만 있는 책이 아니라. 한 달 만에 간 도서관. 평일의 도서관은 조용해서 숨도 나직이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이용 제한 시간이 한 시간이어서 얼른 책을 빌려 나왔다. 부들부들하고 내가 좋아하는 피치색의 표지를 가진 『다정한 매일매일』을 매일매일 읽어 나갔다. 빵과 책이라니. 꿀 조합 아닌가. 이 책은 종종 빵을 만든다는 백수린 작가가 책과 빵을 이야기하는 산문집이다. 책 한 권에 빵 하나씩이다. 소설가 백수린의 리뷰를 모은 책인데(리뷰를 열심히 쓰는 나지만 다른 이의 리뷰를 잘 읽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나여서) 책을 읽으며 이런 리뷰 책이라면 매일매일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이 어떻고 하는(하긴 리뷰는 책이 어떻고 이건 뭐가 좋고 뭐가 얼마나 굉장하고 후세에 드높일 발자국을 남길 만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게 목적이지만) 날카로운 분석은 없다. 자신의 일상을 담백하게 이야기하면서 편안하게 글을 시작한다.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좋아할 줄 아는 이의 명확함이 돋보이는 글들이다. 주로 외국 문학을 소개하고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한국 문학을 더 애호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는 게 쉬우니까. 그래도 읽을 거라고 사 놓기만 한 외국 문학이 있다. 손도 안 대고 있는데 『다정한 매일매일』에서 다정하게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책을 읽고 싶게끔 만드는 책 소개를 하고 있어서 천천히 읽어보리라 다짐한다.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이 그런 내용이었다니.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소설가 백수린. 『다정한 매일매일』에는 소설가로서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소설을 바라보는 자세와 태도에는 무엇이 필요한지 성찰한다. 언어를 고르고 언어를 분석하고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기술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 소설이 좋아서 소설을 읽고 급기야 소설을 써내기까지 하는 사람. 소설가 백수린.


재능과 노력이 부족해서 소설을 쓰지는 못하지만 시험을 보러 가서 글자체만 보고 있는 나 역시도 소설 읽는 게 좋고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문장을 읽으면 지금 이 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엑셀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은 부족하지만 화면에 뜨는 오류들을 보며 내 인생에 오류는 어떤 수식을 잘못 넣어서 된 것인가 고민에 빠지며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이런 마음만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좋아하는 책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더불어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 달콤하고 고소한 빵에 대해 쓰인 『다정한 매일매일』은 우리의 오늘이 그런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책상 위에 놓인 마들렌. 연필과 종이. 키감이 좋은 키보드. 창을 열면 보이는 푸른 하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가지런히 꽂아두는 거. 함수를 이해하진 못하지만 소설가가 애정 하는 책을 소개하는 글을 읽으며 그 마음이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있어 지금까지 헛산 건 아니구나 위로받았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하려 애쓰거나, 그러지 않거나 두 가지밖에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가능한 한 나는, 언제나 사랑의 편에 서고 싶다.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인생을 실패나 성공으로 요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좋은 문학 작품은 언제나, 어떤 인생에 대해서도 실패나 성공으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소설가로서 나는 언제나 서사의 매끄럽지 않은 부분, 커다란 구멍으로 남아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마음을 주는 사람이다. 소설에서도, 그리고 인생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은 그런 지점들이 아닐까? 우리는 삶과 세계를 하나의 매끄럽고 완결된 서사로 재구성하려 애써 노력하지만, 사실은 끝끝내 하나가 될 수 없는 단편적인 서사들을 성글게 엮으며 살아갈 뿐이니까. 그리고 바로 거기,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때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도 없는, 서사와 서사 사이의 결락 지점. 그런 지점이야말로 문학적인 것의 자리일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지나치게 눈부신 빛 속에 서 있다는 생각에 갑작스럽게 현기증이 나고 두려워지면, 언젠가부터 나는 기꺼이 어스름 쪽으로 눈을 돌린다. 창가에 어린 입김과 계절과 계절 사이의 바람 냄새, 새벽에 내리는 첫눈과 말이 되지 못한 채 기척으로만 존재하는 마음 쪽으로. 붙잡으려는 순간 사라짐으로써만 존재하는 어떤 것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나는 무척 사랑한다.


(백수린, 『다정한 매일매일』中에서)


당신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이 책을 매일매일 읽으며 다정함으로 포근해지기를 바란다. 그래도 문학,이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버텨 나가는 당신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 『다정한 매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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