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가을 2020 소설 보다
서장원.신종원.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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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눈이 내렸다. 고무 재질의 신발을 신고 가느라 조심조심. 미끄러지면 큰일이니까. 눈이 쌓였다가 오후가 되니 녹아 있었다. 바람은 차갑지만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오후. 요즘에는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에 일어난다. 그전에는 12시가 돼갈 때쯤 일어나 허기진 배를 채우고 집을 정리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꾸준하게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걸 하고 있는 게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로 저녁형 인간이었다. 오전에 일어나니 하루가 길다. 시간을 알차게 쓰고 있다는 착각까지 생길 정도이다.


어제오늘. 6시 30분에 일어나 문지에서 나오는 소설 보다 시리즈 중 『소설 보다 가을 2020』을 읽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지 않고 집중해서 읽었다. 대신 휴대전화에 타이머를 설정해 두고 알람이 울리면 책을 덮었다. 아침을 챙겨 먹고 버스를 타러 가야 하니까. 눈이 오는 겨울이 되어서야 '가을의 소설'을 읽는다. 지나간 계절을 실감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가을이 있었구나. 우리가 가을을 살아냈구나. 안도.


얼마 전에 뉴스에서 단편 소설이 인기라는 기사를 보았다. 문지에서 나오는 소설 보다 시리즈를 기획한 이의 인터뷰도. 바쁜 사람들이 길이가 짧은 소설을 찾아 읽는다고. 손에 쥐기 가벼운 판형의 소설책들이 인기란다. 팬데믹 시절에도 소설은 읽힌다. 먹고 사느라 힘든데도 무언갈 찾아서 읽는다. 대단하고 대견하다. 그중에 으뜸은 나! ㅎㅎ


2021학년도 수능 만점자 중에 한 학생은 매일 아침 한 시간의 독서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학업 스트레스를 받으면 시를 썼다고 한다. 이런 야무지고 똘똘한 학생이 있다니. 따라 해보려고 아침 독서 시간을 가진다. 세 편의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새벽에서 아침으로 시간의 변화 역시 느낄 수 있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더니. 비유가 아니었어 하는.


서장원의 「이 인용 게임」은 아들을 잃은 두 어머니의 현재를 병치해서 보여준다. 기억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죽은 아들의 기억만은 선명한 어머니. 아들의 과거가 담긴 일기장을 찾기 위해 애쓰는 어머니. 둘의 세계에 가닿지 못한 나머지 아이들의 현재는 무엇이 되는지를 묻는 소설이다. 「멜로디 웹 텍스처」는 이해하지 못했다. 한숨. 내가 바보라서 그렇다.


우다영의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에서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각성자들의 세상을 그린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무엇이었을까. 과거의 기억을 떠안고 살아간다면 어떤 심정일까로 시작한 소설은 쓸쓸한 현재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 각성자들을 인터뷰하는 화자 역시 과거를 기억해 낸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세상은 나아갈 수도 후퇴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제 나는 『소설 보다 겨울 2020』을 읽는다. 며칠 전에 주문한 책이 어제 도착해 있다. 겨울 지나고 봄이 오면 세상은 나아질 거야. 이런 믿음으로.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서사가 풍부한 소설을 좋아한다. 겨울에는 그랬으면 좋겠다. 전구 불빛 아래에서 책을 읽어나가면서 아무래도 좋은 심정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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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 빌려줄래? - 멈출 수 없는 책 읽기의 즐거움
그랜트 스나이더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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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욕심이 많아서(어찌 책 욕심뿐일까. 모든 것에 있어서 욕심쟁이.) 누가 책을 빌려 달라고 하면 없다고 말한다. 꼼쟁이, 얌체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다. 몇 번 책을 빌려주었다가 되돌려 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왜. 왜. 도대체 왜? 책을 빌려 가서는 돌려주지 않는 건가. 시리즈 물일 경우 1권이 빠져 있다든지. 중간에 권 수가 빠져 있는 걸 도저히 눈 뜨고는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다시는 결코 누구에게도 책을 빌려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던데. 정리 강박증이 있다든지. 문학 애호가라든지. 인문학 덕후라든지. 평소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있겠다. 그랜트 스나이더의 카툰 에세이 『책 좀 빌려줄래?』에 나오는 한 장면은 즐겁고 웃겼다. 다른 사람 집에 가서 책장을 훑어보는 장면이다.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책장 앞을 서성인다. 취향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전자책 리더기가 있는 컷이 유난히 웃겼다.


『책 좀 빌려줄래?』는 책 좀 읽는다는 모든 이에게 주저 없이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확실하게 말한다. 『책 좀 빌려줄래?』를 읽고 다들 재미있다고 유익했다고 할걸. 다음 장이 넘어가는 게 아쉬워서 한 페이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을걸. 나만 알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그러니 다들 2020년이 가기 전까지 읽어보시길. (얼마 안 남았군요. 서두르세요.) 세상에는 즐거운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할 일도 많은데.


왜 책을 읽고 계시는지. 화려한 조명 대신 책 읽기 좋은 색온도 조절 조명 아래 앉아 책을 읽고 계시는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영화를 보고 넷플릭스를 켜는 대신 책을 읽는지. 모르겠네요. 아니, 모르지 않습니다. 책을 펼친다는 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현실의 스위치를 꺼두고 환상의 세계로 나를 밀어 넣는 일이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듯.


책을 아끼고 사랑한다. 책을 읽는다. 읽다 보니 이건 나도 쓰겠다. 하는 마음이 생긴다. 『책 좀 빌려줄래?』에서 작가와 작가 지망생의 차이를 단 두 컷으로 비교해 놓았다. 쓰려고 앉아 있는 자는 작가 지망생. 쓰려고 앉아 쓰는 자는 작가. 온갖 글쓰기 책에서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구구절절이 늘어놓았지만 이 만화를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작가의 하루 편도 보고 있으면 즐겁고 사랑스럽다.


책의 증식을 막기 위해 종이책을 줄이고 전자책으로 책 읽기를 하는 요즘이다. 『책 좀 빌려줄래?』를 전자책으로 읽었다. 찾아보니 올 컬러였다. 종이책으로 보면 화려한 색감과 더불어 책덕후들은 기분이 마구마구 좋아질 듯. 안 봐도 비디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 세계를 압축해 놓은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책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책은 어떤 의미인가. 이 사랑스러운 책이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도서관에 가고 싶다. 읽고 싶은 책을 마구 골라 오고 싶다. 다 읽지 못해도 최대 대출 권수인 10권을 빌려 나오고 싶다. 그러지 못하는 요즘 책을 사랑하는 이가 그리고 쓴 『책 좀 빌려줄래?』를 읽는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어 생각하는 것이다. 책덕후들은 다들 특이하고 이상하지. 좋은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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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건네는 위로 - 오늘이 소중해지는 애착 사물 이야기
AM327 지음 / 미래의창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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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前직장에서 테스크탑 하나를 받아왔다. 검색, 문서 작업, 음악 듣기에 무리 없는 사양인데 버린다고 했다. 안에 있는 하드를 부셔서. 같이 일했던 분이 괜찮은 거니까 가져가서 쓰라고 했다. 나는 공짜는 좋아하니까. 뭐든 모아 놓으면 쓸 데가 있으니까. 특히 기계는 더욱. 원래는 거실에 책상을 두고 노트북으로 글을 썼다. 남는 책상 하나가 있어서 안방에 집어넣고 컴퓨터를 세팅했다. 그리하여 나의 방에 안락한 작업실 하나를 만들었다. 대단한 걸 작업하는 건 아니고. 리뷰 쓰고 음악 듣고 엑셀과 영타 연습한다.


공부는 뒷전. 책상 꾸미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유튜브로 오늘의 집 보고. 알고리즘에 힘입어 집과 책상 꾸미기 영상을 홀린 듯이 보고 있다. 그리하여 필요한 게 잔뜩 생겼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책상에는 서랍이 없다. 찾아보니 틈새 수납장이란 게 있다더라. 국민 수납장을 살까 하다가 조립해야 해서 패스. 나는야 똥 손. 바퀴가 달린 틈새 수납장에 간식, 필기류, 노트, 읽을 책을 올려놓을 생각을 하니 심장이 두근두근. 뭐야. 미니멀 한다더니.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게 인생이라 굽쇼.


AM327 작가의 『물건이 건네는 위로』는 지금 내 상황에 딱 맞는 찰떡 책이었다. 제목만 보고 오해하지 마시라. 욜로주의로 마구 물건을 사대라는 책이 절대 아니다. 평소 작가가 좋아하는 사물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추억과 관심이 잔뜩 묻은 물건부터 삶의 전환점에서 만난 물건까지.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일상을 꾸리고 싶은 사람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안방에 책상을 들여놓고(예전에 한 번 들여놓았다가 장식용으로 전락해 퇴출 된 적이 있는 책상, 미안) 컴퓨터를 세팅해 놓으니,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바쁘고 풍요롭다.


연말연시라서. 일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새벽에 자니?라는 문자라도 보내고 싶은 시간인데. 그러지 못하는 2020년의 겨울. 우울해하거나 답답해하지 마시고.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관심 분야의 책을 읽으며 자기만의 공간을 새롭게 꾸며 보는 게 어떨까. 그러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쇼핑몰 앱을 열어서 장바구니에 쏘옥. 『물건이 건네는 위로』에서 나의 심장을 나대게 만들었던 물건은 두고 두구 두구 바로! '까만 양장 10년 다이어리!' 너무 중요하니 강조의 표시로 글씨 굵게!


10년 넘게 다이어리를 쓰고 있는 나. (의외로 꼼꼼한 편) 매해 11월이 되면 다이어리 검색에 열심이다. 최근 몇 년간은 라이언에 빠져서 무조건 귀염둥이 라이언이 얼굴에 크게 있는 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골라서 샀다. 올해까지는 라이언 다이어리. 내년은 (라이언, 미안. 널 배신한 게 아니야. 난 네가 최고야) 펭수 다이어리를 쓸 예정이다. 이걸 작년에 사 두었다. 작은 서점에서 10년 치의 오늘을 적을 수 있는 다이어리를 알았다면. 아니야. 그래도 살 거라면 살 수 있지.


어제오늘 계속 생각하다가 10년은 긴 시간일 것 같아(아닙니다. 이건 변명이고. 찾아봤더니 10년 다이어리 가격이 좀 있더라고요. 다이어리가 없으면 모를까. 펭수 다이어리가 제발 써 달라고 앙증맞게 웃고 있는데 이걸 또 1년 동안 묵혀 둘 수가 없어서) 서점 적립금을 털어서 3년 다이어리를 주문했다. 오늘 토요일인데 벌써 배송 중이라는 알림이 떴다. 오예. 그런데.


자꾸만 그 서점의 10년 다이어리가 눈에 밟히는 건 왜 때문일까. 『물건이 건네는 위로』에서 작가는 오랜 시간 직장 생활을 하다가 프리랜서의 삶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밝힌다. 말이 프리랜서이지 오롯이 혼자서 생계를 책임지고 일을 해야 하는 압박감이 상당한 직업이다. 향수, 손수건, 화분, 손목시계, 안경, 문진, 장 스탠드, 책장 등. 한 사람의 일상을 밝혀 주고 위로해 주는 건 거창하고 대단한 게 아니다. 마음이 깃든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에 쓰인 『물건이 건네는 위로』. 요즘 같은 불안한 시절에 읽으면 행복해지는 책이다.


내가 벌어 내가 쓰는 소소한 재미를 모두 누리시길. 그리고 위로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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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드의 계절
랜스 울러버 지음, 모드 루이스 그림, 박상현 옮김, 밥 브룩스 사진 / 남해의봄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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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드는 자신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딕비라는 시골 마을에 사는 모드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그랬었죠. 너무나 힘든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녀는 가능한 자신의 주변을 단순하고, 조용하고, 평화롭고, 밝게 만들었습니다.

스티븐 아웃하우스의 인터뷰/노바스코샤, 브라이턴, 1997

(모드 루이스, 랜스 울러버, 밥 브룩스 공저, 『모드의 계절』中에서)


『모드의 계절』은 모드 루이스에 관한 또 다른 책이다. 단순하고 밝은 그림에 반해 버렸지만 모드 루이스에 관해 알아갈수록 그녀의 삶에서 더 깊은 감동을 받는다. 굽은 손으로 작은 오두막에서 평생 동안 그림을 그렸다. 선천적인 몸의 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붓이 있으면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 모드 루이스. 오두막은 큰 캔버스가 되었다. 창가 쪽에 앉아 그녀가 사랑한 마을의 풍경을 기억에 의지에 그렸다. 크리스마스카드에 그림을 그려 생활비에 보탰을 때 모드는 기뻐했다.


책의 순서를 꼽자면 『내 사랑 모드』를 먼저 읽으면 좋겠다. 그래야 모드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드의 계절』은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과 편지, 사계절의 이야기로 꾸민 모드의 그림에 관한 다정한 찬사가 실려 있다. 그림에 관해서는 문외한. 작품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건 다른 사람의 몫. 나는 나대로 모드의 그림에서 받은 인상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겠다. 처음 모드의 그림을 보았을 때 작은 충격에 휩싸였다.


동화 속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눈이 쌓여 있고 집에서는 음식을 하는지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다. 그 집을 향해 손을 잡은 두 사람이 걸어간다. 도시에서 고향의 집으로 도착한 듯한 모습이다. 꿈에서 본 듯한 아련한 장면. 문을 열면 맛있는 음식이 그 집에 가득할 거 같다. 또 다른 그림은 어떤가. 검은색 고양이가 눈을 빛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꽃의 색깔은 계절에 상관없이 다채롭다. 겨울에는 모든 식물이 잎을 떨구고 동면에 들어가는 게 일반 상식이지만 모드의 세계에서 겨울은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자연을 만날 수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하나밖에 없는 오빠와도 인연이 끊긴 모드는 이모 집에서 살았다. 일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먼 길을 걸어 에버릿을 찾아간다. 모드를 처음 만난 에버릿은 당황했을 것 같다. 모드의 신체는 일을 하기엔 버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깊이 알 수는 없으나 둘은 평생을 함께 하기로 한다. 모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페인트와 보드를 구해다 주는 에버릿. 모드는 그림을 통해서 현실의 고난을 극복해 나간다.


아니, 이 말은 틀렸다. 모드는 현실이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증거는 그녀가 그린 그림이다. 기억력과 관찰력이 뛰어난 모드는 자신이 살았던 고향 마을과 딕비의 풍경을 화폭에 담는다. 밝고 화려한 색깔의 그림은 모드의 내면을 보여준다. 타자의 눈에 비친 모드와 모드가 바라보는 모드의 세계는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힘들어 보인다. 행복해 보인다. 피동의 접사를 사용하며 추측할 뿐이다.


모드의 계절에는 일 년 내내 꽃이 피고 고양이가 뛰어다니고 화려한 장식을 한 소가 들길을 걸어간다. 모드의 그림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사기 위해 오두막 집으로 온다. 모드는 공평하게 한 사람은 하나의 그림만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수줍은 얼굴이지만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모든 것을 단순하게. 이웃 주민의 증언대로 모드는 자신이 가진 삶의 조건을 부정하지 않고 최대한 밝고 긍정적으로 만들어 갔다. 붓 하나를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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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큰 축복 - 성석제 짧은 소설
성석제 지음 / 샘터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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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잘 지내고 계시나요? 버스를 기다릴 때.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모 손을 잡고 유치원 버스를 타러 가는 아이를 만날 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에게 무작정 다가가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걱정은 없으신가요? 오지랖을 부리고 싶은 요즘입니다. 예전에는 그저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서로를 보는 둥 마는 둥 했어요. 왜 이럴까요? 마스크에 가려 서로의 표정을 알 수 없게 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네요. 그래서 그런 걸까요?


웃어도 웃어 보이는 것 같지 않고. 당황하거나 화를 내는 것 같은데도 어쩐지 속내를 알 수 없어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노래도 있지만 전 누군가의 마음속을 그렇게 확실히 알아챌 수 없는 눈치 없는 1인이거든요. 운전면허 있으신지요. 남들 부지런을 떨며 살아갈 때 전 뭘 했는지 몰라요. 면허가 없으니 차는 당연히 없지요. 버스를 타고 컴퓨터 학원을 다니는 2020년 12월의 근황 보고드립니다. 옆자리에 누가 앉으면 좀 멈칫하게 되네요. 지금은요.


거리 두기라는 말이 내년에는 사라지면 좋겠어요. 흔들리는 버스에 앉아 오늘도 무사히, 아픈 사람이 나오지 않기를. 마음껏 카페에 가고 수다를 떨고 대형 서점 문구 코너에 가서 이것저것 만져 보고 들었다 놨다 하면서 결국 결제를 하는. 평범한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깜짝 선물처럼 주어지기를요. 그때까지 힘을 내시기를요. 여행을 가지 못해 답답하신가요. 친구들을 만나지 못해 서운하신가요. 여기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짧은 소설의 대가 성석제가 쓴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이라는 책을 소개해 올립니다.


답답하고 알 수 없는 미움의 감정이 들 때 읽으면 딱인 책입니다. 총 40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오늘부터 한 편씩 읽어가다 보면 2021년을 맞이하실 거고 그러다 어느새 이야기에 취해 저 무서운 코로나19가 물러가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이야기는 힘이 세다. 이야기는 우리를 웃고 울게 하는 초강력 마법이 있습니다. 한 편당 페이지 두세 장 정도입니다. 차 한 잔을 끓여 놓고 읽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먹기 좋은 온도로 식은 차를 마시며 방금 읽어낸 이야기를 음미하는 것이지요.


인생, 별거 있나요. 인생사 새옹지마. 전화위복.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고. 비유야 어찌 됐든 큰 걱정 하지 말라는 위로를 건네는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입니다. 즐거운 이야기가 한가득입니다. 명절 때 되면 슈퍼에서 파는 과자 종합 선물 세트 구성 같은 책입니다. 취향 따라 입맛 따라 마구 고르면 좋겠지만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사달라고 조르던 과자 종합 선물 세트. 리본을 풀어서 포장지를 벗겨 그 안에 든 과자를 구경하는 즐거움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을 읽다 보면 어린 시절 느꼈던 들뜬 행복감을 만끽하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 한 편마다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에서는 이제는 느낄 수 없는 아련함이. 자유롭게 여행을 떠났던(아, 옛날이여 ) 시간에 쓴 여행기에서는 재미와 감동과 모험이. 나이가 들면 입맛이 변한다고는 하지만 힘들었을 때 먹었던 영혼의 음식 이야기에서는 그리움이. 서로 다른 얼굴만큼이나 개성이 특별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맛보는 황당함이. 듬뿍 들어 있습니다.


어느 이야기를 읽어도 마음이 뭉클해지고 뭉클해지다 못해 노긋노긋해집니다. 이렇듯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성석제라는 네임드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때 읽은 성석제 소설은 우울과 번민, 분노, 짜증, 불안을 날려주었더랬습니다. 혹부리 영감의 혹처럼 이 사람은 어딘가에 이야깃주머니를 달고 있는 거 아닌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재담의 황제였습니다. 결코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해 번쩍이다 못해 황홀해지는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읽어도 여전히 성석제 소설은 즐겁고 신납니다. 그러다 한 가지 더 올라오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울컥함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온기가. 인간을 그리는 마음에서는 연민이. 저처럼 부정적이고 마음에 미움이 가득한 사람은 절대로 파악해낼 수 없는 삶에 대한 긍정이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에 있습니다. 짧은 소설이니 부담이 없습니다. 뉴스도 봐야 하고 구직 사이트도 둘러보고 자격증 시험공부도 해야 하는 지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건 맞지만 몸이 열 개라도 여전히 게으름을 부리고 있을 것 같긴 하네요) 데도 불한당의 자세로 소설을 읽으니 더 즐겁습니다.


『내 생애 가장 큰 축복』 안에 실린 「다음에, 나머지 반도」의 풍경처럼 전국의 장터를 돌아다니며 좌판을 펼쳐 놓고 사람 구경, 경치 구경을 하고 싶어질지 모릅니다. 좌판에는 생활 필수품인 책,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을 늘어놓고요. 이 책 한 번 읽어봐. 우울, 답답함, 불안, 슬픔이 사라집니다. 골라. 골라. 일단 한 편만 읽어봐. 옆에는 빵과 막걸리, 수구떡이 있으면 더 좋겠지요. 도서정가제 법에 맞추어 10% 이상 할인은 안 되지만 책을 사는 사람에게는 보름달 빵 하나씩을 줘도 되고요.


책을 읽고 나니 더욱더 모르는 사람들의 안부가 묻고 싶습니다. 아는 사람들 안부는 안 물어보냐고요? 그이들은 굳이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 지내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패스합니다. 부모 품에 안긴 어린아이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어요. 부스스한 머리로 눈도 덜 뜬 아이가 유치원 버스를 타러 달리고 있었어요. 일상은 그리 쉽게 파괴되지 않습니다. 컴알못인데 엑셀을 배우러 다니기도 한답니다. 수식 암기를 못해 쩔쩔 매기도 하지만 일취월장할 거라는 옛 성현의 말씀을 응원 삼아 씩씩해지기로 했습니다.


다정한 사람들의 이야기 모음집, 『내 생애 가장 큰 축복』. 오늘 자빠지면 내일은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성석제표 희망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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