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

6월 어느 날, 키터리지 부부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헨리는 예순여덟, 올리브는 예순아홉이었고, 두 사람은 딱히 젊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늙었다거나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일 년이 지나자, 뉴잉글랜드 지역의 작은 해안 마을 크로스비 주민들은 모두 입을 모았다. 그 사건으로 키터리지 부부는 변했다고. - P189

크리스토퍼가 갓 결혼한 고집 센 아내 때문에 별안간 고향을등지게 된 것은 아들이 가까이에 살면서 가정을 꾸리길 기대했던(올리브는 미래의 손자들에게 튤립 구근을 심는 법을 가르치는 상상을 했었다) 키터리지 부부에게 실로 엄청난 꿈을 산산조각 내는 충격이었지만, 빌과 버니의 경우 손자들이 바로 옆집에 살기는 했지만 그 아이들이 아주 못됐다는 것이 키터리지 부부에게는 입 밖에 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 P194

그다음부터는 스펀지로 그린 그림 같았다. 누가 페인트를 적신 스펀지로 그녀의 머릿속을 눌러놓은 것만 같았고, 페인트가그려놓은 것만이, 그자리에 남은 얼룩만이 그날 밤의 나머지에대해 그녀가 기억하는 부분을 담고 있었다. 급히 서두르는 소리가 나고, 커튼봉의 작은 고리들이 쇳소리를 내며 커튼이 홱 젖혀졌다. 파란 스키 마스크를 쓴 사람 하나가 올리브에게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내려와!" 마스크가 "씨바, 내려오랬지, 아줌마!"
라고 말하는 동안, 올리브는 잠시 혼란스러우면서도 내면의 선생기질이 발동해 "어이, 뭐라구?" 하고 대꾸했다. "어디로 내려가란 말이야?" 그렇게 말할 뻔했다. 두 사람 다 혼란스러웠다.
그 점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종이 같은 가운을 움켜쥔 올리브도, 파란 마스크를 쓰고 팔을 내젓고 있는 마른 남자도. - P205

키큰남자가 라이플을 들고 주머니가 여럿 달린 커다란 군용 조끼 비슷한걸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물속으로 그녀를 던져넣은 것은 그가 쓰고 있는 마스크였다. 분홍색 뺨의 웃는 돼지 얼굴이 그려진 핼러윈가면이었다. 분홍돼지가 웃고 있는 엽기적인 플라스틱 가면 물속에서 그녀는 해초 같은 그의 군복 바지를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소리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놈의 말을듣지는 못했다. - P206

돼지 얼굴은 그들을 화장실에 두고 나갔다. ("말도 안돼." 이일이 있은 얼마 후, 사건에 대해 신문에서 읽고 TV에서 본 많은사람들이 키터리지 부부에게 말했다. "말도 안 돼. 두 남자가 마약을 구하려고 병원에 그렇게 들이닥쳤다는 게." 키터리지 부부가 이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으리란 걸 사람들이 깨닫기 전의일이었다. 세상에 말이 되는 일이 얼마나 된다고, 올리브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돼지 얼굴은 그들을 두고 나갔고, 파란 마스크는 문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조금 아까 올리브가 문을 닫았을 때처럼 화장실 문이 찰칵 소리를 내며 잠겼다. - P208

"누구라도 움직이기만 해, 죽여버릴 거야." 소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씨팔, 일초면된다구." 그런 다음 소년은 그녀의 종이 같은 파란 가운 양쪽을 얼른 잡아당겨 그녀의 배 위로 하얀비닐 끈을 묶었다. 오렌지빛 짧은 그루터기가, 삭발한 소년의 반짝이는 머리가 그녀 가까이에 있었다. 스키 마스크가 이마를 자극한 때문인지 이마 위쪽은 아직 벌겠다. "됐어." 소년이 말했다. 그는 총을 집어들고 다시 변기에 앉았다. - P216

돼지 얼굴의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들으니그들은 죽을 운명인게분명했다. 간호사는 다급한 목소리로 성모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올리브의 기억으로는 간호사가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로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를 반복했을 때였다. 올리브가 간호사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젠장, 그 짓 좀 제발 그만하지!"
그러자 헨리가 말했다. "올리브, 그만해."
허, 이런 식으로 간호사를 편들다니.
- P218

"올리브, 우리는 그날 밤 겁을 먹었어." 그는 그녀의 무릎을살며시 꼭 쥐었다. "우리는 둘 다 겁에 질려 있었어. 대부분의사람은 평생 한 번도 겪지 않을 상황이었다고. 우리가 어떤 말들을 한 건 맞지만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거야." 하지만 그는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바다를 내려다보았고, 올리브는 남편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기에 그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밤을 결코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앤드리아 비버가 위기로 생각한-화장실 인질 사태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관점을 바꿔놓은 그 말들 때문에 그 밤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올리브는 그 일 이후 내면의 비밀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늘 눈물을 흘렸기에.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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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갈 미술관이 최소 두 곳은 될 것 같다. 이중섭 미술관과 김창열 미술관이다.
이중섭 미술관은 아이들 어릴 때 가본 곳이라 다시 가도 좋을 것이고, 김창열 미술관은 2016년에 지어졌는데 외관만도 너무 멋져서 꼭 가보고 싶어졌다. 정우철 도슨트의 책을 페이퍼로 남겨놓았으니 도움이 되겠지?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


꼭 봐야 할 작품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깨닫게 됩니다. 대부분의 작품명이 ‘회귀‘라는 것을요. 제가 방문했을 때의 전시 제목도 ‘회귀의 품, 제주‘였으니까요. ‘회귀‘는 작가가 태어나고자란 토양과 풍토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작가의 작품에는 비슷한 모티프가 반복됩니다. 보시다시피, 물방울과 천자문이죠.
금방 사라질 물방울과 사라질 모든 것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글자의 공존. 그 작품 중에서도 이 작품은 특히 위엄 있었습니다. 천자문은 할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웠던 향수와, 그 위로 있는 사실적인 물방울들의 얼룩이 참 영롱합니다.

*관련작품
회귀, 1997
회귀, 1987

*김창열 미술관의 제 2 전시관에 대한 설명인듯.
제 1전시관은 물방울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의 온라인 전시관으로 확인해 보았다. - P72

전쟁이 끝난 후 1957년에 박서보, 하인두,
정창섭 등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한국의 급진적인 앵포르멜, 즉
내면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미술이자 구체적 형상을 강렬히 재현하려는 미술운동을 이끌었으며 한국 추상미술에 앞장섰던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당시 그의 작품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물방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캔버스에 물감의 흔적을 그대로 살려 상처의 깊이를 표현하는 추상이 주된 기법으로 쓰입니다. 그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 총을 맞은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목도했습니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 <제사>,
<상흔> 등이 있는데요,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지만 그 아픔만큼은 어떤 작품들보다 격하게 느껴집니다.
그 충격으로 당시 그림에는 총을 맞아 구멍이 뚫린 형상,총 맞은 육체를 연상시키는
 <상흔>이란 제목으로 또 사람이 찢긴 듯한 이미지는 <제사>와 같은 작품으로 시각화되기도 했습니다.

*관련작품
제사, 1964
판자집, 1959 - P79

뜻밖에도 그의 제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이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1952년에서 1953년까지 1년6개월간 제주에서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육로로는 닿을 수 없고 비행기나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곳,
제주 제주는 그곳을 가는 여로부터 이미 타지의 감각을 불러 일깨우죠. 김창열 화백에게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남은 반도를 떠나 도착한 제주가 좋았던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인생 전체로 보아 1년 6개월이 결코 긴 기간이라고는 하기 어렵겠지만, 그 기간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시기에 쌓은 행복의 밀도일 것입니다. - P84

물방울은 고단하던 유학 시기에 얻은 뜻밖의 수확이었습니다. 그는 1970년대 초파리 근교의 마구간을 빌려 작업을 이어갔죠. 마구간을 빌려 작업했다는 대목에서도 알 수있듯, 당시 그는 무척이나 가난했었습니다. 재료비도 아껴야 하던 시절이라 캔버스를 재활용해야 했는데요. 사용한캔버스를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도록 캔버스 뒷면에 물을뿌려두었습니다. 물감이 쉽게 떨어질 수 있게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햇빛에 캔버스에 뿌려뒀던 물방울이반짝이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은 마구간에서 탄생한 셈이죠. - P85

빈 배경에 끊임없이 물방울이 변주되다가, 80년대 중후반이 되자 천자문이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이제 황혼기에 접어든 화가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 것일까요. 작품을 보며 배경의 빼곡한 천자문에는 무슨 뜻이 담겼을지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아마 전시를 보는 많은 분이 저와 비슷한 의문을 가지실 것도 같습니다.
작품 속의 천자문은 어떤 특별한 뜻을 가졌다기보다, 무작위로 쓴 기호에 가깝다고 합니다. - P87

미술관의 설계는 홍재승 건축가가 담당했습니다. 당시 "미술관이 신전 혹은 무덤같으면 좋겠다"라는 그의 요청에따라 건물 전체에 나뭇결 문양의 검회색 콘크리트를 사용했습니다.
간담회 당시 지팡이를 짚은 김창열 화백은 "이렇게 미술관을 갖게 되다니 고맙다"라며 여러 번 목이 메었다고 합니다.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눈으로확인한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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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얼마나 지났는가. 아직 절반도 못 되었네.
별들이 눈부시게 빛을 내누나.
깊은 산그윽한 골짜기 어둡기만 한데
그대는 어이해 이 고장에 머무는가.
夜如何其夜未央 繁星粲爛生光芒深山幽邃杳冥冥 嗟君何以留此鄉

김시습은 이 시에서 ‘冥冥‘이라고, 그러니까 ‘어둡고 어두울정도로 어둡다‘며 세 번이나 어둡다는 말을 썼다. 김시습이 맞닥뜨린 어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 P200

하지만 바다는 그런 바다는 다시 보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흐르고 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바다다"라는 말에 놀라던 그때로 흘러간다. 세월은그렇게, 그렇게 부드럽게 따뜻하게 일본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秋의 세월은 가네」라는 시를 읽으면
가끔 아무런 후회도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던 세월의 속도다. 그 시절이결코 아니다.

세월은 가네. 붉은 증기선의 뱃전이 
지나가듯
곡물창고에 번득이는 석양빛,
검은 고양이의 아름다운 귀울림 소리처럼,
세월은 가네. 어느 결엔가, 부드러운 그늘 드리우며 가네.
세월은 가네. 붉은 증기선의 뱃전이 지나가듯.

- P212

아마도 나는 늦되게 태어나서, 또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어린 시절에는 세상물정을 잘 몰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세상 물정을 알든 모르든 시간은 참으로 부지런히 흐르더라.
나이가 들고 결혼한 뒤, 사진첩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문득, 너무나 뒤늦게, 참으로
어리버리하게도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젊었었는지 깨닫게 됐다. 아아, 이런 깨달음이란 새벽에 일어나 아무도 몰래 쓰레기장에 내버리고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요즘도 멍청한 생각을 많이 하는 나는 가끔 타임머신이 있어서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한번 만나봤으면 하는 꿈을 꿀 때가 있다. 말은 걸지 않고 그냥 얼마나 예뻤다는 것인지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싶다.

*나도 타임머신 타고 가서 우리 아버지 한번 보고 싶다. ㅠㅠ - P233

그런 생각을 하고 얼마 뒤, 신문을 읽다가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추사명품전을 한다는 기사를 읽고 찾아갔다. 이때가 아니면간송미술관의 아름다운 뜰을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눈에 익은추사 글씨를 보다가 2층 한쪽에 걸린 난 그림을 보게 됐다. 이파리 세 개가 너무나 아름답게 종이를 가르고 있었다. 추사는 그 그림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놓았다.

봄빛 짙어 이슬 많고, 땅풀려 풀돋다.
산 깊고 해 긴데, 사람 자취 고요하니 향기만 쏜다.
春濃露重 地暖艸生 山深日長 人靜香透

나는 그 그림의 화제 ‘춘농노중‘을 몇 번이나 되뇌면서 성북동고갯길을 걸어 내려왔다.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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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미술관>

꼭 봐야 할 작품

별이 떠 있는 밤하늘처럼 보이는 공간에 붉은 하트 모양이 매력적이라 한참 보았습니다. 가까이서 하트는 심장으로 보이고 물감이 거칠게 쌓여있는 모습이 지금이라도 살아서 두근댈 것만 같아요. 무언가 묵직한 느낌이 가슴을짓눌렀습니다. 이런 무게감 넘치는 그림에 사연이 없을 리없겠죠. 김환기 화백의 부인 김향안은 <성심>을 그릴 때의김환기 화백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환기는 미칠 듯 괴로워하며 울며 성심을 그렸다."

*김환기, 성심, 1957 - P20

아마 누구라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보았을 작품, <어디서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의 대상 수상작입니다. 마치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무수한 점들로 메운 작품은 당시 미술계에 큰 충격과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사연을 알고 보면 감동은 배가 되는데요, 김환기화백은 뉴욕에서의 생활 중 30년 지기인 시인 김광섭의부고를 듣습니다. 이에 김환기 화백은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한점, 한점에 담아 찍어 그림을 그리고, 그렇게 완성한 전면점화가 바로 이 작품인 것입니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 P22

몇 해 전, 김환기 화백의 <우주>가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최고가인 132억 원에 낙찰되어 신문과 뉴스를 도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곳, 환기미술관에 대한 관심도 더욱높아졌습니다. 저 또한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환기미술관에 관해 이야기했을 정도니까요. 당시 인터넷 기사의 한흥미로운 댓글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런 그림을 100억이나 주고 사다니", "그들만의 리그" 등의 비난이었죠.
물론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그 심정도 충분히 이해되긴 합니다. 저도 그림, 화가의 삶에 깊이 빠져들어 공부하기 전에는 비슷하게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김환기화백이 살아온 인생과 의지와 노력을 알게 된다면 이런 생각도 조금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환기 화백의 이 그림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무료로 열리고 있다. 인터파크 예매 필수!


화중서가(畵中抒歌) 환기의 노래, 그림이 되다
https://mobileticket.interpark.com/goods/22013787?app_tapbar_state=hide - P24

한국을 떠나서야 느낀 고국의 그림, 떠나보니 더 잘 느껴진 고유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한국적인 정서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일까요. 그의 50년대 작품에는 특유의 소재가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백자, 청자, 전통 기물, 산과 달, 구름과나무가 그것이죠. 그의 그림 속 자연은 한국의 자연이었습니다. 동서양의 융합이었죠. <매화와 항아리>에서 풍기는매화의 향기는 한국의 매화향입니다. 알아볼 수 있는 형태와 알아볼 수 없는 형태가 함께 표현되어 있죠. 이런 그림을 ‘반추상‘이라 합니다. 당시 그의 스타일이었죠.
신비로운 푸른색을 의미하는 ‘환기 블루‘라는 말도 이 시기에 등장했습니다.  - P33

이후 김환기 화백은 마치 우주에 아로새겨진 무수한 그리움의 별을 나타낸 듯한 전면점화를 다수 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열정을 온전히 소화하기에는 이미 너무노쇠한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루에 10시간이 넘게고개를 숙이고 작업을 한 결과 디스크가 심해지고, 또 다른 부분의 건강도 그리 좋지 않은 상황에서 결국 1974년7월 7일에 뇌출혈로 쓰러지고 맙니다. 수술을 받았지만결국 7월 25일 뉴욕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지요.
캔버스에 새겨둔 무수한 별빛을 향해 그가 떠난 때는 향년 61세였습니다. - P37

이후 홀로 남은 김향안은 30년간 김환기의 그림을 비롯한 모든 예술관을 정리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전시를열며 그의 작품을 꾸준히 알렸고, 부암동에 환기미술관도설립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해외에 가지 않아도 세계에서 인정받는 작품을 언제든 볼 수 있게 되었죠. 또 김향안은 접어두었던 화가의 꿈도 다시 펼치게 됐는데요, 그녀가 남긴 작품은 미술관에 함께 있는 수향산방에서 볼 수있습니다.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던 부부는 이제 밤하늘의무수한 별 중 한 쌍이 되었으리라 믿어봅니다.

*환기미술관과 수향산방은 날이 좋을 때 딸과 가기로 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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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26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저도 보고싶었는데 mokl2000님덕분에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을거 같네요. ^^
 

꼭 봐야 할 작품

오른쪽 작품은 <나무와 여인>으로, 박수근 화백의 나목 시리즈 중 한 점입니다. 소설가 박완서의 장편소설 <나>의바탕이 되었던 작품입니다. 그는 유독 나무와 여인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림의 크기를 바꾸거나 구도를 조금씩 바꾸며 반복해서 그렸죠.

*박수근, 나무와 여인, 1962

박수근 화백의 유년기를 이야기할 때 놓쳐서는 안 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19세기 프랑스의 농민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를 존경했다는 겁니다. 그의 대표작이 된 <만종>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하는데요, 이 작품은더할 나위 없이 유명하죠. - P145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않겠습니까?"
화가들의 삶을 공부하며 예술가들의 감수성과 어휘력에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고 로맨틱한 구혼 편지라니요. - P151

박수근은 그녀를 빨래터에서 처음 만났는데요, 그래서일까요.
그곳은 그의 작품세계에 자주 등장합니다. 아마 김복순 여사를 만난 곳이니만큼, 그에게 더욱 특별한 장소였을 겁니다.
여섯 명의 여인이 냇가에 줄줄이 앉아 빨래하는 중인 이작품은 2007년 45억 2천만원에 낙찰되며 화제를 낳았습니다. 한때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불리기도 했죠.

*박수근, 빨래터, 1950년대후반 추정 - P152

박수근은 평창동판자촌에 터를 잡아 본격적인 전업 작가로 활동하는데요, 가족과 함께 살면서 생활은 더욱 궁핍해져 갔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952년부터 1963년까지 이곳에서 그림으로 생업을 꾸려가던 시기가 화가로서는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그의 그림엔 유독 여성과 나무가 자주 등장합니다. 힘든 노동을 하는 여성과 잎사귀가 다 떨어진 나목은춥고 배고팠던 전후 시대를 맨몸으로 견뎌야 하던 우리의자화상입니다. 무겁고 힘겨운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죠.  - P155

질감이 느껴지는데요, 그림에 나타나는 우둘투둘한 특유의 마감은 박수근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기도합니다. 그는 물감을 아주 두께감 있게 덧칠한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치 화강암 위에 그림을 그린 듯한 느낌을 주죠. 그래서 초가집의 흙벽이나, 사찰의 돌조각 등을 연상시키죠.  - P155

박수근 화백은 지인의 소개로 미군 부대에서 잡부 자리를얻게 됩니다. 다행히 크지는 않아도 꾸준한 봉급을 타게돼 가난을 조금은 덜 수 있었죠. 그러다가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면 또 돈을 더 벌 수 있다고 해 초상화도 그리기시작합니다.
이 시기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로 《나목》을 쓴 박완서작가와의 인연이 생기죠. 이 둘은 1951년 PX 초상화부에함께 일했습니다. 20살 박완서는 정규직 영업사원이었고 30대 후반 박수근은 비정규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박완서가 영어로 미군을 불러오면 박수근은 미군의 손수건이나 스카프에 가족, 애인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 P157

1964년 국전에 할아버지와 손자>를 출품했는데요. 이시기 박수근의 몸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런 처지에 끝까지 작품 활동을 이은 것만 봐도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죠.
작품 속에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박수근, 할아버지와 손자, 1964 - P163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출품작이었습니다. 그는 간경화심해져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으나 회복의 가망이없었습니다. 결국 한 달 후 퇴원해 집으로 돌아와 눈을 감습니다. 1965년 5월 6일이었습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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