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얼마나 지났는가. 아직 절반도 못 되었네.
별들이 눈부시게 빛을 내누나.
깊은 산그윽한 골짜기 어둡기만 한데
그대는 어이해 이 고장에 머무는가.
夜如何其夜未央 繁星粲爛生光芒深山幽邃杳冥冥 嗟君何以留此鄉

김시습은 이 시에서 ‘冥冥‘이라고, 그러니까 ‘어둡고 어두울정도로 어둡다‘며 세 번이나 어둡다는 말을 썼다. 김시습이 맞닥뜨린 어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 P200

하지만 바다는 그런 바다는 다시 보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흐르고 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바다다"라는 말에 놀라던 그때로 흘러간다. 세월은그렇게, 그렇게 부드럽게 따뜻하게 일본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秋의 세월은 가네」라는 시를 읽으면
가끔 아무런 후회도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던 세월의 속도다. 그 시절이결코 아니다.

세월은 가네. 붉은 증기선의 뱃전이 
지나가듯
곡물창고에 번득이는 석양빛,
검은 고양이의 아름다운 귀울림 소리처럼,
세월은 가네. 어느 결엔가, 부드러운 그늘 드리우며 가네.
세월은 가네. 붉은 증기선의 뱃전이 지나가듯.

- P212

아마도 나는 늦되게 태어나서, 또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어린 시절에는 세상물정을 잘 몰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세상 물정을 알든 모르든 시간은 참으로 부지런히 흐르더라.
나이가 들고 결혼한 뒤, 사진첩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문득, 너무나 뒤늦게, 참으로
어리버리하게도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젊었었는지 깨닫게 됐다. 아아, 이런 깨달음이란 새벽에 일어나 아무도 몰래 쓰레기장에 내버리고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요즘도 멍청한 생각을 많이 하는 나는 가끔 타임머신이 있어서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한번 만나봤으면 하는 꿈을 꿀 때가 있다. 말은 걸지 않고 그냥 얼마나 예뻤다는 것인지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싶다.

*나도 타임머신 타고 가서 우리 아버지 한번 보고 싶다. ㅠㅠ - P233

그런 생각을 하고 얼마 뒤, 신문을 읽다가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추사명품전을 한다는 기사를 읽고 찾아갔다. 이때가 아니면간송미술관의 아름다운 뜰을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눈에 익은추사 글씨를 보다가 2층 한쪽에 걸린 난 그림을 보게 됐다. 이파리 세 개가 너무나 아름답게 종이를 가르고 있었다. 추사는 그 그림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놓았다.

봄빛 짙어 이슬 많고, 땅풀려 풀돋다.
산 깊고 해 긴데, 사람 자취 고요하니 향기만 쏜다.
春濃露重 地暖艸生 山深日長 人靜香透

나는 그 그림의 화제 ‘춘농노중‘을 몇 번이나 되뇌면서 성북동고갯길을 걸어 내려왔다.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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