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

6월 어느 날, 키터리지 부부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헨리는 예순여덟, 올리브는 예순아홉이었고, 두 사람은 딱히 젊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늙었다거나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일 년이 지나자, 뉴잉글랜드 지역의 작은 해안 마을 크로스비 주민들은 모두 입을 모았다. 그 사건으로 키터리지 부부는 변했다고. - P189

크리스토퍼가 갓 결혼한 고집 센 아내 때문에 별안간 고향을등지게 된 것은 아들이 가까이에 살면서 가정을 꾸리길 기대했던(올리브는 미래의 손자들에게 튤립 구근을 심는 법을 가르치는 상상을 했었다) 키터리지 부부에게 실로 엄청난 꿈을 산산조각 내는 충격이었지만, 빌과 버니의 경우 손자들이 바로 옆집에 살기는 했지만 그 아이들이 아주 못됐다는 것이 키터리지 부부에게는 입 밖에 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 P194

그다음부터는 스펀지로 그린 그림 같았다. 누가 페인트를 적신 스펀지로 그녀의 머릿속을 눌러놓은 것만 같았고, 페인트가그려놓은 것만이, 그자리에 남은 얼룩만이 그날 밤의 나머지에대해 그녀가 기억하는 부분을 담고 있었다. 급히 서두르는 소리가 나고, 커튼봉의 작은 고리들이 쇳소리를 내며 커튼이 홱 젖혀졌다. 파란 스키 마스크를 쓴 사람 하나가 올리브에게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내려와!" 마스크가 "씨바, 내려오랬지, 아줌마!"
라고 말하는 동안, 올리브는 잠시 혼란스러우면서도 내면의 선생기질이 발동해 "어이, 뭐라구?" 하고 대꾸했다. "어디로 내려가란 말이야?" 그렇게 말할 뻔했다. 두 사람 다 혼란스러웠다.
그 점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종이 같은 가운을 움켜쥔 올리브도, 파란 마스크를 쓰고 팔을 내젓고 있는 마른 남자도. - P205

키큰남자가 라이플을 들고 주머니가 여럿 달린 커다란 군용 조끼 비슷한걸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물속으로 그녀를 던져넣은 것은 그가 쓰고 있는 마스크였다. 분홍색 뺨의 웃는 돼지 얼굴이 그려진 핼러윈가면이었다. 분홍돼지가 웃고 있는 엽기적인 플라스틱 가면 물속에서 그녀는 해초 같은 그의 군복 바지를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소리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놈의 말을듣지는 못했다. - P206

돼지 얼굴은 그들을 화장실에 두고 나갔다. ("말도 안돼." 이일이 있은 얼마 후, 사건에 대해 신문에서 읽고 TV에서 본 많은사람들이 키터리지 부부에게 말했다. "말도 안 돼. 두 남자가 마약을 구하려고 병원에 그렇게 들이닥쳤다는 게." 키터리지 부부가 이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으리란 걸 사람들이 깨닫기 전의일이었다. 세상에 말이 되는 일이 얼마나 된다고, 올리브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돼지 얼굴은 그들을 두고 나갔고, 파란 마스크는 문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조금 아까 올리브가 문을 닫았을 때처럼 화장실 문이 찰칵 소리를 내며 잠겼다. - P208

"누구라도 움직이기만 해, 죽여버릴 거야." 소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씨팔, 일초면된다구." 그런 다음 소년은 그녀의 종이 같은 파란 가운 양쪽을 얼른 잡아당겨 그녀의 배 위로 하얀비닐 끈을 묶었다. 오렌지빛 짧은 그루터기가, 삭발한 소년의 반짝이는 머리가 그녀 가까이에 있었다. 스키 마스크가 이마를 자극한 때문인지 이마 위쪽은 아직 벌겠다. "됐어." 소년이 말했다. 그는 총을 집어들고 다시 변기에 앉았다. - P216

돼지 얼굴의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들으니그들은 죽을 운명인게분명했다. 간호사는 다급한 목소리로 성모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올리브의 기억으로는 간호사가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로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를 반복했을 때였다. 올리브가 간호사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젠장, 그 짓 좀 제발 그만하지!"
그러자 헨리가 말했다. "올리브, 그만해."
허, 이런 식으로 간호사를 편들다니.
- P218

"올리브, 우리는 그날 밤 겁을 먹었어." 그는 그녀의 무릎을살며시 꼭 쥐었다. "우리는 둘 다 겁에 질려 있었어. 대부분의사람은 평생 한 번도 겪지 않을 상황이었다고. 우리가 어떤 말들을 한 건 맞지만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거야." 하지만 그는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바다를 내려다보았고, 올리브는 남편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기에 그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밤을 결코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앤드리아 비버가 위기로 생각한-화장실 인질 사태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관점을 바꿔놓은 그 말들 때문에 그 밤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올리브는 그 일 이후 내면의 비밀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늘 눈물을 흘렸기에.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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