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것>

한때 인생이 시트콤 같다고 생각한 적 있어. 스스로 떠올린 생각은 아니고 내가 겪었던 일을 하소연하듯 몇 차례 들려주었더니친구가 네 인생은 꼭 시트콤 같네, 라고 말했던 것이다. 네가 경험했다는 일들,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경우도 더러 있는데 솔직히 좀재밌고 기막혀. 전반적으로 기구한 느낌? 그리고 왠지 끝맛이 씁쓸해 뭔가를 영영 잃어버리거나 망한 것 같은 엔딩이라서.
내가 한 이야기들이 그렇다고?
응, 그리고 듣다보니 네가 상황을 그렇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해.
상황을 그렇게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 P213

이후로 나는 억울하거나 원통한 처지에 놓일 때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우는소리를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어. 그러면 친구는 킥킥 웃거나 아이고, 어쩜 좋니 하는 탄식을 번갈아 내뱉으며 귀기울여주었다.
순전히 듣기만 한 것은 아니고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거나 쪼그려앉아 발톱을 깎거나 어쨌든 자기 할일을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었어. 기나긴 넋두리 끝에 내가 시무룩하게 가라앉으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제 좀 후련해? 하고 물었고 내가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면 그래, 다 지나갈 거야, 그런 게 인생이야, 하고 말했다.
그런 게 인생이야?
그런 게 인생이야.
그렇게 말해주던 친구는 이제 내 곁에 없다. 서울이 아닌 이국의 도시로 멀리 떠났다거나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니고 어느 날부터인가 내 전화는 물론이고 메시지에도 일절 응답을 하지 않았지. - P214

삼년전 나는 수형과 친구에게 거의 동시에 절교를 당했다고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이 아주 가까워졌고, 내게거리를 두기로 어떤 협약 같은 걸 맺었으리라 여겼다. 망할 놈들. - P217

 한번은 삼일교 근처 바위에 나란히 앉아 쉴 때였다. 그날 내가 반년 넘게 붙들고 있던 장편소설을아무래도 포기해야겠다며 울먹이자 수형은 내 어깨를 감싸안고등을 토닥여주었다.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기도, 그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문지르기도 했지. 그렇게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둘이서 일렁이는 물결만 바라다보던 날들. 그러다가 나는 이따금수형이 친구라고 언급하는 이가 내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는사실을 알게 되었다.
와, 세상 좁네.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 P221

그런 상태로 삼 년이나 흐른 지금, 둘에게 실제로 벌어진 일을들었을 때 나는 내심 당황했다. 대체 친구는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끊어냈던 것일까. 곰곰이 되짚어봐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수형에게도 말했다시피 친구와 나의 우정은 알고 지낸 세월에 비해 그리 깊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고등학생 시절 내내 같은 무리에 속해 있었으나 거의 성소수자 동아리 같은 모임이었다.
가장 교류가 적은 축에 속했다. 내게 친구는 언제나 친한 친구의친구일 뿐이었고 친구에게 나 역시도 그랬다.  - P223

그렇지만 수형이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아, 이걸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친구는 재작년 여름에 프랑스에서 불의의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크립터 겸 조감독으로 참여한 영화 촬영현장에서였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친구는 스태프들의 만류에도불구하고 산책을 나갔다가 발을 헛디뎌 에트르타의 절벽 아래로굴러떨어졌다. 날이갠뒤 해양경찰대가 몇날 며칠을 수색했으나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고.빈관의 덮개를 어루만지며 친구의 어머니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고 한다. 가까운 친인척들만 참석한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고. 나는 이런 소식을 장례가 끝나고 반년이 지나서야 듣게 되었다.
이걸 말해야 할까.
왠지 모르게 망설여졌다. 나만 입을 다물면 수형이 친구의 죽음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으니까.  - P225

또 시작이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생각했다. 눈을 반짝이며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수형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형은 예전부터 자신이 친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내게 이런 식으로 털어놓곤 했다. 열렬히 고백하다시피 했지. 누가물어보기나 했어? 그동안 잊고 지냈는데 너도 참 한결같구나…………그러면서 나는 수형에게 친구의 죽음을 털어놓기가 이제 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당초 말해줄 작정도 아니었지만 그것이자의가 아니라 타의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기분에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친구에 대한 수형의 애정이 변함없다는 것을-혹은 더 깊어졌는
지도 모른다는 것을-알게 된 지금, 내가 친
구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그저 수형을 난
데없이 상처입히는 일, 충격과 비탄에 빠뜨
리는 일, 울부짖게 만드는 일, 그 외에 어떤
의미도 아닌 듯했으니까. - P235

모르는 게 약이야, 수형아.
속뜻은 달라졌지만 나는 친구의 죽음을 함구하기로 다시 한번마음먹었다. 그러면서 수형이 들려준 이야기 중 친구가 시지프관해 한 말을 떠올렸다. ‘형벌 속에서 영원토록 사느니 벼랑에 몸을 던지겠다‘는 말. 폭우 속에서 에트르타의 절벽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친구의 모습이 절로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혹시사고가 아닐 수도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친구가 자살을 할 만한결정적 이유를 나는 알지 못했다.  - P236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면서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앞만 보며 걸었고 수형도 그리했으리라 여겼다. 헤어지기 직전에우리는 손을 흔들면서 잘 가라고,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그런 말만 했다. - P241

 전부 듣고 나서는 후련하냐고 묻거나 그런 게 인생이니뭐니 같은 충고는하지 않았고, 대체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럴 때 친구의 미소는 꼭 이 세상 것이 아닌듯했는데 그래, 이 세상 것은 아니지. 아니고말고, 하면서 나는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내가 이렇게 보고 있는데, 느낄 수 있는데, 나를 위로하는
데, 어찌하여 이 세상 것이 아닌가. 이 세상 것이지.하게 되었다. 갈수록 그리 믿게 되었다. 그러자 수형에게도 친구는 이와 비슷한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한 존재가 비단 우리에게만 주어진 은총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END.


*마지막편이어서 그런건지 알수 없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거 같다. 나머지 단편들도 다 좋았다. 퀴어소설이라는 인식을 거의 하지않고 자연스럽게 읽혀서,
그래서 한 편, 한 편 놀라운 작품이었다고 ..
박선우 작가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게 될 것같은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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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기다리기>

신년을 맞아 해돋이를 보러 가자.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네가12월 31일 오후에 서울을 떠나 부산에서 이틀을 묵고 돌아오자제안했을 때,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일출이었으니까. 저멀리 수평선 위로 진홍색 불덩이처럼 떠오르는 해, 잿빛구름 사이로 어지러이 활공하는 갈매기들, 일정한 간격으로 귓가에 밀려들고 부서지는 해조음,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감고 올리는 기도, 새 인생,
새 출발 뭐 그런 것들.
그러나 아니었지. - P177

우리가 사귄 지도 어느덧 팔백 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달콤한애정에 눈이 멀어 서로의 새치나 뾰루지마저 어여쁘게 여기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만날 때마다 뇌리를 스치는 의구심이랄까 의아함을-얘는 왜 이러는 거지? -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단계에 이른 것이다.  - P179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렇지만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새해랍시고 아침 댓바람부터 너를 끌고 나가 해돋이를 보는 일 따위가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지. 나는 그저 네가 원하는 일을 했으면 했다. 원하지 않는 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내게 말해주었으면 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솔직했으면 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연인일 테니까. 그렇지만네가 일출 따위 눈곱만큼도 관심 없다고, 귀찮으니 형이나 보러가라고 내게 가감 없이 털어놓았을때과연내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있느냐를 묻는다면… 그건 또 자신 없었다. 틀림없이 실망하겠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사람도 변했니, 하면서 주접을 떨게 될지도. 하, 그럼 이제 나는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 P180

그즈음 나는 몇시에 잠자리에 들든 세 시간쯤 후에는 반드시 깨어나 동틀 무렵까지 불면에 시달리는 증세를 앓고 있었다. 눈이떠지면 다시금 잠을 청해도 십오 분에서 이십 분 간격으로 재차깨어나기 일쑤였고, 심할 적에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짤막한 분량의 비연속적 꿈인지 망상인지 모를것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그 속에서 나-실제의 ‘나‘라기보다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나‘-는 언제나 사력을 다해
도망다니고 있었다. - P181

장난처럼 유야무야 덮긴 했지만 사실 그즈음 나는 너의 보금자리 마련에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법적으로 묶이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너에게 주택 마련을 위한 현금을 증여하거나 함께 빚을 갚아나가기로 약조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좀... 사랑을 압도하는 지점이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돈을 빌려주면서 차용증을 요구하기도뭣하고...…. 어째서 나는 이렇게도 속물일까.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연인에게 그냥 전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어야 하는것 아닐까.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혹시 나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해서 이렇게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대는 것일까. 내 안위를 가늠하고, 파국을 넘겨짚고, 골치 아픈 문
제들을 외면하고자 우스갯소리만 늘어놓
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나는 이러한 속내를 네게 한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 P201

관두자.
비로소 마음먹었을 때였다.
난 말이야. 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뭐가 됐든 형이 내키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 내가 정말로 바라는 건 그뿐이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네 쪽을 건너다보았다. 마냥 떠넘기는구나.
뒷짐지고 물러서는구나. 연하는 원래 다 이런가 싶었는데 실은무엇이든 함께해줄 심산이었구나. 내가 원하는 것을 너는 기꺼이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구나.
그날 나는 팔을 뻗어 말없이 너를 끌어안았다. 두 눈을 감은 채네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왜 이래, 간지럽게. 너는 핀잔을 주다가이내 나를 꼭 안아주었다. 네 체온은 내 살갗 위로 뭉근히 번져왔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너의 몸. 그렇게 네 가슴에 한쪽 귀를 얹고 있으니 심장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쿵쿵, 쿵쿵.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나른한 감각이 엷은 베일처럼 우리 몸 위로살며시 내려앉는 듯했다. 그대로 가라앉히는 듯했다. 나는 설핏한잠결 속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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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사랑>

이 사랑은 어떻게 끝날까. 그것은 연인과의 관계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이면 내가 빼놓지 않고 떠올리는 생각이었다. 앞서 파국을예측해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놓는 예방주사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와 인사한 뒤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서 나는 생각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너에 대한마음을 잠시 억누른 채, 과연 우리는 어떤 식으로 헤어지게 될까하는 상상을 펼쳤던 것이다. 그렇지만 차창 너머로 서서히 번져가는 어스름과 하나둘씩 조명을 밝히는 가로등을 지켜보는 내내 나는 도무지 우리의 끝을 가늠해볼 수 없었다.  - P109

삼년 전 여름, 나는 더이상 누구도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엄마에게 첫 커밍아웃을 했다. 그걸 시작으로 친구, 직장 동료들에게까지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그해방감, 삼십 년 가까이 숨기고 부정해야만 했던 내 정체성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나는 삶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펼쳐질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 일말의 조짐만으로 가슴이 설레었고 만족스러웠다. 그러던 중 너를 만나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면서・・・・・… 나는 새로운 비밀을 갖게 되었다. 네가 HIV감염인이라는사실이었다. - P117

문제는 HIV가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지속적인 관리로 통제할수 있는 질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보편 인식은 참담한 수준이라는 데 있었다. 어쩌다가 관련한 이야기라도 나누게되면 대부분이 "그거 밥만 같이 먹어도 옮는 병 아니야?"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 없어. 혹시라도 있으면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할 거야" 같은 반응을 보였으니까. - P118

그날 우리는 카페를 나와 지하철역 앞까지 함께 걸었다. 어느틈엔가 하늘은 어둑해져 있었고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걷는 동안 나는 네가 돌아오지 않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렸을 순간들에 대해 생각했다. 친구나 가족도 아니고 처음 만난 낯선 이에게, 단지 연인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가능성 하나 때문에 자신의 내밀한 질환을 털어놓아야 했을 순간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때마다 네가 외로이 견뎌내야 했을 두려움과 떨림에 대해서도...... 나는 막연하게 상상만 해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가슴 한편에 뜨겁고 묵직한 덩어리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 P127

야간 조명이 켜진 해안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무대처럼 텅 비어 있어서 우리는 환호성을 올리며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겅중겅중 뛰었다. 마스크를 벗고 단숨에 바다 가까이 내려갔다가 금세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했다. 성난 파도가 순식간에 밀려들어 발목까지 적실 듯했고, 지척의 바위에 부딪치면서 거센 물보라를 일으킨 탓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너울이 몰아치는 자리에서 다섯 걸음쯤 물러나 얕은 둔덕에 올라서서 바다를 건너다보았다.  - P134

스물셋의 여름, 너는 확진 판정을 받고 충격에 휩싸인 나머지의사와 간호사 앞에서 삼십 분이 넘도록 울음을 쏟아냈다. 눈앞이 캄캄했고,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서 제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누구도 너를 위로할 수 없었고, 일으켜세울 수도 없었다. 그바람에 너는 다음 순서의 환자에게 본의아니게 폐를 끼쳤다면서,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영문도 모른 채 대기실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을 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 P135

그 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일순 바위에 부딪치며 솟아올랐다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내려앉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는 검은 물결의 움직임을, 그 흐름을 지켜보았다. 한순간 보얗게 일어나고 사그라드는 물거품과 습기를 머금은 추위와영원히 우리를 가로막고 서 있을 듯한 어두움과 그 앞에 버티고선 순간에만 감지할 수 있을 불가해한 아름다움까지 우리는 함께했다. 그러다가 네 어깨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을 즈음, 나는너를 붙든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네가 나를 보았을 때 나도 너를 보았고,우리는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이만 돌아갑시다."
"좋아요."
그런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바다를 등지고 선 채 천천히 걸음을옮겼다. 그러다가 부러진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모래 위에 하트를 그렸고, 그것의 양옆에 너와 나의 이름을 적어넣기도 했다. 쓰이자마자 바람에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우리의 사랑을 내려다보면서 어느 드라마의 엔딩처럼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려울 것 없잖아. 라는 네 말과 함께 소망을 이루기 위한 하
나의 몸짓으로 우리는 입을 맞추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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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날, 올리브는 도서관 주차장에서 후진하다 그를 거의 들이받을 뻔했다. 그는 소리는 지르지 않았지만 다가오는 차를 물리치려 했는지, 혹은 그저 놀라서였는지 한 팔을 들어올렸다. 어쨌든, 올리브는 제때 브레이크를 밟았고, 잭 케니슨은 올리브를보지 않고 그저 제 차로 다가갈 뿐이었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세워놓은, 번쩍이는 작고 빨간 차였다.
재수 없는 영감탱이, 올리브는 생각했다. 그는 배가 불룩하고키가 크고 등이 굽은 남자였는데, (올리브의 생각에는 고개를뻣뻣하게 내밀고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는 태도에 어쩐지 오만한데가 있었다. - P449

케니슨 부부에게는 오리건에 사는 레즈비언 딸이 있는데, 그딸을 아버지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을 마리나 카페의 여종원한테 듣자 헨리는 말했다. "오, 그건 잘못이야. 자식은 어찌든 받아들여야지."
물론 헨리는 이런 시험을 받은 적이 없었다. 크리스토퍼는 게가 아니었으니까. 헨리는 아들의 이혼을 목격하도록 오래 살다. 하지만 곧 심한 뇌졸중이 온 후로-올리브는 아들의 이혼헨리의 뇌졸중을 유발하지 않았다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었헨리는 거의 전신이 마비된 채 여생을 보냈고, 크리스토퍼- 재혼했을 때는 지각이 없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의 아기가태어나기 전에 요양원에서 죽었다.
- P451

에그머니나. 올리브는 더 잰걸음으로 걸었다. 잭 케니슨이 옆으로 누워 무릎을 구부리고, 거의 낮잠을 자려는 듯 누워 있었다. 올리브가 몸을 숙이니 그가 눈을 뜨고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눈은 아주 파랬다.
"당신 죽었소?" 올리브가 큰 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이 움직이며 올리브의 눈과 마주쳤다. "안 죽은 거 같소." 그가 말했다.
올리브는 그의 가슴과 엘엘빈 상표 재킷 아래로 비어져 나온커다란 배를 내려다보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칼맞았소? 아니면 총?" 올리브가 그에게 더 가까이 몸을 숙였다.
"아니오." 그가 말하더니 덧붙였다. "내 기억으론 아니오."
"움직일 수 있어요?" - P453

집으로 돌아온 후, 올리브는 잭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 점심이나 하러 가시려우?"
"나는 저녁이 더 좋은데요." 잭이 말했다. "저녁 약속이 있으면 종일 고대하게 되잖아요. 점심은 헤어지고 나면 아직 하루가많이 남지만."
"그럽시다." 올리브는 해가 지면 바로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는 것은 그녀에게는 사실 자정을 훨씬 넘기도록 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 P463

크리스토퍼도 전화하지 않았고, 비니도 전화하지 않았다. 재케니슨도 전화하지 않았다. 어느 밤, 올리브는 자정에 깼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전에 점심을 먹고 포틀랜드 음악회에 가던당시에 받았던 잭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했다.
"딸이 먹을 미워해요?" 올리브가 썼다.
아침에 온 답장은 한마디였다. "그래요."
올리브는 이틀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썼다. "내 아들도 날미워해요."
한 시간 후 답장이 왔다. "그래서 죽도록 괴롭소? 난 죽도록괴로워요, 딸이 날 미워해서. 하지만 나도 그게 내 잘못이라는건 알아요."
올리브는 당장 답장을 썼다. "나도 죽도록 괴로워요. 죽음보다더 분명 내잘못일텐데, 난 이해를 못하겠어요. 같은 일도 아이가 기억하는 것하고 내가 기억하는 게 달라요. 아들은 아서라는정신과 의사를 만나는데, 내생각엔 아서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아요." 그리고 오랫동안 가만히 있다가 ‘보내기를 누르곤 바로 다시 썼다. "추신. 하지만 분명 내잘못이기도할 거예요. 내가 절대로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헨리가 말한 적이있는데, 어쩌면 헨리 말이 맞을 거예요." 올리브는 ‘보내기‘를 눌렀다. 그러고는 또다시 썼다. "또 추신. 헨리 말이 맞아요." - P480

"후우, 난 무서워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올리브는 이렇게 말할 뻔했다. "아, 그만해요. 난 겁먹은 사람은 싫어요." 헨리에게,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했을 터였다. 어쩌면 두려워하는 자신의 면모를 싫어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대기실에서 제인 홀턴을 만났던 기억이 떠올라, 그평범한 짧은 대화 때문에 올리브는 침대로 갔다. 병원에서 잭은올리브를 필요로 했고, 세상에는 올리브의 자리가 있었다. 이제 그의 푸른 눈이 올리브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용히 그의 곁에 앉으면서, 잭의 눈빛에서 올리브는 두려움을, 손을 내미는 여린 마음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펼쳐 그의 가슴에 대고 쿵쿵 뛰는 심장을 느껴보았다. - P483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 P483

그렇기에, 지금 그녀 곁에 앉은 이 남자가 예전 같으면 올리브가 택하지 않을 사람이
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그도 필시 그녀를 택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 둘은 이렇게 만났다. 올리브는 꼭 눌러 붙여놓은 스위스치즈 두 조각을, 이 결합이 지닌 숭숭 난 구멍들을 그려보았다. 삶이 어떤 조각들을 가져갔는지를. .......
그러나 올리브는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 - P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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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재연되기를 거부한다. 기억 스스로 모종의 척력을발휘하기도 나 스스로 위험을 감지하여 뒷걸음질치기도 하므로,
비록 머릿속 사정에 불과할지라도 그 일은 좀체 성사되지 못한다.
여린 불씨처럼 기미만 드러낼 뿐 언제나 맥없이 사그라지길 반복한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어쩌면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복기가 필요한 것 아닐까.
그러한 예감이 소슬바람처럼 옷깃을 스치던 어느 가을. 나는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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