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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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엔 주말인데도 일찍 눈이 떠졌다. 주말이라 좀 더 늦잠을 자도 되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 그게 안된다. 어제는 새벽에 잠이 들었고 빗소리를 들으며 자고 났는데 비는 그칠 기미도 없고 하루 종일 정말 쉬지도 않고 비가 내렸다. 밤새 기온이 내려가면서 아침 6시에 일어나보니 마당 잔디밭 위에도, 초등학교도 건너편 전원주택 단지도, 그리고 눈에 보이는 바로 앞 논에도 온통 눈이 내렸다. 병원 예약이 있어 다녀오는데 어찌나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지... 날이 개었다 흐렸다 바람은 불어 대는데 언제나 그치려나 자꾸 해를 기다리는 나와 남편의 대화가 부질없다 싶을 정도였다. 딸램이 있는 서울은 오전부터 맑았다는데... 

해는 늦게 나오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궂은 날씨였지만 중간 중간 나와주는 햇빛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는 하루였다. 대체적으로 내가 사는 동네는 비도 늦게까지 내리고 날도 자주 흐리고 기온도 서울보다는 3-4도 가량 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동네로 이사 온 것이 지난 11월로 만 2년이 되었다. 겨울은 불순한 일기의 영향을 많이 받고, 그 전 아파트 살 때보다 최소 6~7도 가량 낮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난 아마도 이곳에서 손바닥 만한 정원과 그보다 더 작은 텃밭을 가꾸면서 더 많은 시간들을 일궈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확신이 든다.  


매사추세츠 주의 프로빈스타운에서 바다와 숲, 늪 지대, 그리고 개와 그녀의 동반자와 50 여 년을 살아온 메리 올리버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한 곳에서 50 여 년을 사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휘파람 부는 사람>도 <완벽한 날들>도 모두 그녀가 마주하는 세상은 프로빈스타운이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묻는다. "요세미티에 가보고 싶지 않아? 펀디 만에는? 브룩스 산맥에는?" 그러면 그녀는 대답한다. "오, 그럼. 가끔은." 그렇게 대답하곤 그녀는 곧 바다와 숲, 그리고 연못들을, 햇살 가득한 항구를 산책하면서 자연을 돌보고 감시하는 그녀만의 시간들을 갖는다. 개와 함께 달리고 동반자인 M과 함께 하는 삶. 그 충만한 시간들은 변함없이 자연이, 기꺼이 아낌없이 내어주는 완벽한 선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시간이지 않았을까. 그녀가 자신이 사는 그곳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들을 읽는 나도 그저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프로빈스타운을 사랑하듯 나도 그러하다. 내가 사는 곳은 그녀가 바라보는 바다와 숲과 동물들과 사계절 다르게 아름다움을 주는 나무와 꽃과 자연과는 다르고 그곳과 같은 압도적인 석양을 주지는 않는다. 


내가 사는 동네의 작은 학교, 학교의 역사를 말해 주듯 자라난 학교를 둘러싼 위용을 자랑하는 나무들, 논 밭의 푸르름과 아름다운 황금색의 물결, 가끔 그 논을 끼익끼익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면서(구 소리 들을 때마다 운겨 죽는다) 겅중겅중 뛰어가는 고라니, 그리고 벼 베기 하고 난 논에 눈이 내리고 하얗게 줄지어 보이는 밑동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작고 소박한 산책로, 그리고 총신대 앞에 이르는 산책길 양편에 주거용 주택들은 내가 아파트에 살 때와는 다른 편안함을 나에게 준다. 산책 할 때마다 그 집들 은근히 엿보는 재미가 있다. 버스는 1 시간에 한대 오지만, 그래서 우리 아들은 질색하지만 난 어쩌다 타니까 그것도 좋아. 역설적이게도 작고 소박한 동네여서 나는 더 편안함을 느끼는 거다. 메리 올리버는 그런 아름다운 동네를 품고 있어서 다른 것에도 욕심을 내지 않았던 걸까? 그래서 그런 아름다운 글을 쓴 건 아니겠지? 그녀는 프로빈스타운으로 오기 전부터 아름다운 시를 지었으니까^^ 


오늘은 오랜만에 내 목소리로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처음에 읽을 땐 목소리도 떨려나오고 소리가 균일하지 않고 어색했는데 그래도 계속 읽었더니 어느 새 목소리가 고르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색한 건 여전했지만. 에세이지만 문장이 길지 않아서 시詩를 읽을 때처럼 소리 내어 읽기 좋았다. 나중엔 배에 힘을 줘도 숨이 차더라는... 소리내어 목소리를 계속 내는 것도 힘든 일이구나 싶었다...휴~~~ 빠른 걸음으로 산책할 때처럼 숨이 차올랐다.



   느 가을날, 나는 숲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우편물을 가지러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간다. 시에서 나온 직원들이 주차금지 표지판들을 철거하고 있다. 낯익은 얼굴과 목소리들, 몇 사람은 내가 40년 전부터 알고 지낸 프로빈스타운 주민들의 아들들이다. 작업을 마친 트럭이 떠난다. 늦은 오후, 아직은 여리고 고요하기만 한 어둠의 기운이 허공에 감돈다. 우체국 계단을 내려오는데 거기까지도 모래가 날아와 발에 밟힌다.(151쪽, '내가 사는 곳' 중에서)


   그게 나고, 이런 식으로 산다. 나는 날마다 내 풍경 속을 걷는다. 늘 똑같은 들판, 창백한 해변. 늘 똑같은 푸른빛으로 즐겁게 넘실대는 바닷가에 선다. 늦은 여름 오후, 보이지 않는 바람이 거대하고 단단한 똬리를 틀고, 파도가 흰 깃털을 달고 해변을 향해 달려와 소리 지르며, 고동치며 마지막 상륙을 감행한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목격했다. 여름이 물러가고, 다음에 올 것이 오고, 다시 겨울이 되고, 그렇게 계절은 어김없이 되풀이 된다.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은 우주 안에서 그 뿌리, 그 축, 그 해저로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흔들리고 있으니까. 세상은 재밌고, 친근하고, 건강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고, 사랑스럽다. 세상은 정신의 극장이다. 하나의 불가사의에 지극히 충실한 다양함이다. (137~138쪽, '집' 중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메리 올리버가 묘사하는 그런 세상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은 재미도 없고 서로에게 친근함이라곤 없으며 병들어 있을 수도 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악이 가득할 수도 있다. 그래서 메리 올리버의 시와 에세이를 읽어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적어도 그녀가 보여주는 세상은 그녀의 말과 같은 세상이다. 그녀의 글을 읽는 동안은 나도 메리 올리버가 그린 세상 속에 있는 것이니까. 나도 날마다 내가 가진 풍경 속을 걸어 가다 보면 풍경과 내가 하나가 될지도 몰라. 메리 올리버처럼...! 나 오늘 왜 이리 센티멘털한 거니?... 메리 올리버의 글을 읽고 나서 나도 감염되어 버렸다! 세상을 보는 눈이...


P.S. 

어제와 오늘 메리 올리버의 책이 읽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다. 딸램 아는 언니가 '마음산책'에 다닌다. 임경선, 김혜리 작가의 책을 몇 권 주문했는데(직원가 할인은 비밀이어야하나요???) 그걸 기다리다 책상 정면에 마음 산책의 메리 올리버 책을 발견했다. 읽다 만 채로 몇 달 간 방치했는데 읽어야겠단 생각이 당연히 들겠지! 내가 가진 두 권의 메리 올리버 책은 이제 다 읽은 거야~~ ㅎㅎㅎ 이러고 있는데...  오늘 책을 받았다. 예쁜 굿즈와 마스킹 테이프, 엽서 세트와 함께 메리 올리버의 <서쪽 바람>을 같이 보내 주셨다. 내가 딱 없는 책을 보내주신 선구안에 감탄! 잘 읽을 게요. 혹 이 글을 읽을지 모르겠지만...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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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17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독 이어가시길 바랄게요.ㅎㅎ

은하수 2023-12-17 07:35   좋아요 0 | URL
넵! 즐거운 독서생활 잘 이어가겠습니다. 전 앞으로도 쭈욱 행복한 독서가가 될 거 같습니다.
호시우행 님께서도요?^^

호시우행 2023-12-17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3-12-17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좋죠?
제목처럼 완벽한 산문집!

은하수 2023-12-17 17:10   좋아요 0 | URL
읽고 나서 행복해지고 충만해지는 책이 흔하지 않은데...
전 메리 올리버 읽고 나면 제가 그곳에서 같이 호흡하는 거 같은 착각 속에 빠질 때가 있어요
영혼이 맑은 사람이예요 작가는^^

새파랑 2023-12-18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벽한 책이라니 읽어봐야 겠습니다~!!

소리내어 읽으시다니 ~! 전 못할거 같습니다...완전 어색할거 같습니다 ㅜㅜ

은하수 2023-12-18 20:57   좋아요 1 | URL
집에 혼자 있을 때 했는걸요~~^^
제 목소리 듣는거 괜찮던데요. 하면서 딕션좋고 톤 좋은 배우들 정말 대단하구나 느끼긴 했죠 ㅎㅎ
<휘파람 부는 사람>도 소리내 읽어봤는데..ㅎ
좋았어요.
함 해보세요^^
 

1부. 자연의 질서를 찾아 헤매기 시작하다.
- 2장따개비 안에 담긴 기적

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다윈이 판을 완전히 바꿔놓은것이다. 사람이 지닌 감각의 힘, 고정된 자연 질서에 대한 그 강력하고 주관적인 비전은 더 이상 지배력을 휘두르지 못한다. 크기에 따른배열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부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화의 계통수에 근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분류의 정확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최종 결정자는 진화적 관계였다. 진화적으로 관계가매우 먼 종들은 올바른 생명의 분류에서 서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 P118

이렇게 서로 매우 유사해서 우리의 감각으로는 자연의 질서에서 서로 나란히 두어야 마땅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둘은 진화적으로 상당히 먼 친척들이라 생명의 나무에서 서로 멀리 떨어뜨려놓아야 한다. 반대로 모습이 서로 매우 다르고 따라서 우리 감각으로는 자연 질서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은 두 유기체가 진화적 생명의 나무에서는 가까운 관계일 수 있다. 예컨대 둘 다 갑각류인 따개비와 바닷가재가 그렇다. 자연에는 우리가 자연의 질서로 인식하는 것이 진화적 생명 분류와 완전히 충돌하는 예들이 가득하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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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결정
오가와 요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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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사라지는 세상, 물건, 식물, 동물이 사라지고 나중엔 인간의 몸도 사라진 후 소리로만 남은 말! 그와 반대로 말소리를 가장 먼저 빼앗기고 차츰 몸도 사라지는 소설 속의 세상! 어떤 것이 더 끔찍한 세상일지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분명한 건 어느 쪽도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아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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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파도에 빠지다
아오바 유 지음, 김지영 옮김 / 시월이일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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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흐리고 으슬으슬한 날 탓일 수도 있겠지만 요즘 내 독서생활이 영 재미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슨 책을 읽을까 망설이다 역시 나는 소설이야 술술 읽히는 소설을 읽어보자 싶어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온 아오바 유의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를 집어들었다. 2000년생이라는 작가가 2016년에 처음 쓴 작품인 <별에 소원을, 그리고 별을>로 스바루 신인상을 최연소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하였고, 3 년 후 이 작품을 발표했다니 고작 우리 나이로 20살??? 와 이 사람 천잰가 봐 하는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데 작품은 20살이라는 나이가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라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진짜.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자. 28살에 요절한  가수이자 작곡가, 그리고 밴드 '노이즈 오브 타이드'의 프런트맨인 '기리노 줏타'의 노래가 갑자기 역주행을 타기 시작하고 무명 밴드의 음악으로는 이례적으로 유튜브 조회수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알고리즘으로 타고 들어온 사람들이 그의 영상을 접하고 그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가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데뷔도 하기 전에 갑자기 죽어버린데다 블로그나 영상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밴드의 새로운 소식으로 그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이 올라오게 되고, 그가 이미 1 년 전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망연자실해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년 전 사망한 가수의 소식을 지금 갑자기 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그에게 과연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그의 음악을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것인지 그의 음악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허탈해한다.



그가 작사, 작곡하고 부른 노래인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극적인 감정의 변화를 겪게 하는 힘이 있다. 뭐랄까...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느낌, 그러면서 무슨 일인가가 반드시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일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든다고 할까... 그 느낌의 정체가 무언지 궁금해 하지만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는 건 분명하다. 우연한 기회로 그의 노래를 접하게 된 2019년의 하루카, 그와 밴드 활동을 같이 했던 마사히로, 아즈사, 히로키, 그리고 기리노 줏타가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그 노래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일본의 올림픽 수영 대표 나쓰카와 기리노 줏타가 가고 그의 아이인 노조미(일본어로 '희망'이라는 뜻이라고 한다)를 낳은 세이라, 다시 기리노 줏타와 그를 찾으려 애쓰는 프리랜서 기자인 히카리의 이야기가 서로 얽히면서 마침내 기리노 줏타의 이야기가 히카리의 블로그에 게재가 된다. 꽤 큰 반향을 일으킨다.

요절한 예술가의 음악과 삶은 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



기리노 줏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뭔지 모르게 이 상황과 비슷한, 뭔가 비슷한 느낌의 가수가 있었는데 있었는데... 하는 감정이 자꾸만 들었다. 생각이 날듯 말듯 뭔가 아련한 느낌이 들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게 뭐였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점심도 못 먹고 책을 봤던지라 에어프라이어에 고구마 두 개 넣어 놓고, 다락방에 있는 CD를 보러 올라갈까 하다가 거실 한 켠에 LP판을 뒤적뒤적해보고 있었다. 그 시절, 나의 2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던 그 시간들에 들었던 가수의 음반들... 김종찬, 양수경, 조하문, 김민우, 이문세도 있고...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음반 하나! 찾았다. 유. 재. 하....!



비운의 요절 가수라면 우리에게도 있다. 불과 25살의 나이로 음반 하나 달랑 남기고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나간 그 사람. 유. 재. 하이다. 음반을 제작해주겠다는 곳을 찾을 수 없어 자비로 음반을 제작했다지 아마. 수록곡 하나 하나 가사를 음미하며 들어본다. "지난 날/ 텅 빈 오늘 밤/ 우리들의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대 내 품에/ 가리워진 길/ 우울한 편지"와 "Minuet", 건전 가요 하나. 어느 곡 하나 안 좋은 게 없지만 난 역시 "사랑하기 때문에"를 가장 좋아했다. 텐테이블에서 나오는 한 곡, 한 곡 다 흥얼거리며 따라 불러 보았다. .. 이 노랜 가사를 안 적을 수가 없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

   어제는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말아요.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후략)



지금 이 노래를 따라부르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떠나간 연인을 못 잊는 그런 아름다운 사연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20 대 초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그 시기에 난 공부도 하면서 돈도 벌어야할 때여서 옆을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엄마는 우리 3 남매를 어떻게든 잘 키워야한다는 압박감에 그러셨겠지만 정말 어마무시하게 우리를 닦달하셨다. 엄마만 남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아버지가 갑자기 이 세상에서 사라지신건데 그런 우리 마음은 생각지도 않으신건지 그땐 우리도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엄마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차라리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가 우리한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동생들과 되도 않게 그런 모진 말들을 주고받곤 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를 쥐 잡듯 하셨는데 큰 게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밑에 동생들도 본을 받아서 따라간다고 하시면서 정말 나를 무지무지 힘들게 하셨다. 아빠가 살아 계실 때도 엄마와는 상극이었는데 그나마 내 편을 들어주시고 다정다감한 성격이셨던 아빠가 안 계시니 집안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을 정도로 집안엔 엄마와 내가 핏대를 올리며 고래고래 싸우는 소리, 물건 집어 던지는 소리, 문 쾅 닫고 나가는 소리, 끊임없이 잔소리를 퍼붓는 엄마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의 시간들...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카세트 테이프로 유재하를 들었다(음악 틀어놓고 몇 번을 불러야 대답한다고 문 쾅 열어 젖히던 엄마 모습 지금도 생각나...으..... 다시 싸움 시작).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정말 노래 하나하나 어쩜 그렇게 다 좋냐.  분명 남자지만 젊고 아름다운 미성의 담백한 그 목소리가 나는 뭐랄까, 유재하의 노랠 듣고 있으면 보호 본능을 느낀달까... 소년의 모습은 벗었지만 아직 강인한 남자는 아닌, 여리고 매끈한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어우러지고, 그러나 노래할 땐 단단함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애잔함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더 빠져든다.  

그땐 집에 턴테이블이 없었고. 결혼을 하면서 오디오 콤포넌트를 장만하고 하나씩 하나씩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LP를 사서 모았었는데 반복되는 이사에 아이들이 태어나고 짐이 늘어나면서, 그리고 고장난 오디오 콤포넌트를 대체할 제품을 살 수가 없더라는... 현실이 내 발목을 잡는구나. 아무튼 열심히 모았던 수백장의 LP를 중고처분했다는 사연 ㅎㅎㅎ. 너무 후회된다.

유재하의 LP는 2016년인가에 서울 혁신 파크라는 곳에서 레코드 & CD 페어 할 때 딸과 함께 구경가서 다시 구입해왔다. 예전의 처음 자켓은 아니고 리마스터링된 LP였는데 유재하의 흑백 사진이 인쇄된, 그 나름의 멋이 있는 앨범이었다.



에어프라이어에 넣었던 고구마가 노릇노릇 잘 익었다. 유재하 노래 들으며, 내가 기르고 수확해서 담근 맛있는 동치미에 군고구마 한 개 얼른 먹고 생각을 해봤다. 유재하 노래 듣는데 왜 눈물이 나고 난리지? 저게 그리 슬플 일인가 하고... 왤까?

기리노 줏타를 사랑하고 기리노의 아이 노조미를 낳아 살아가는 세이라는 기리노와 고등학생일 때 만난 사이다. 그 때 이미 기리노는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를 만들어 부르고 있었는데 기리노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옆 마을 중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일본 올림픽 수영선수인 나쓰카를 만났고 그 노래는 나쓰카를 보며 작사를 한 곡이었던 것. 서로는 수영을, 음악을 계속하자고 약속을 했었다. 세이라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였는데 졸업 후 고향에 눌러 앉으려는 세이라를 기리노가 데리고 함께 도쿄로 오게 된 것이어서 기리노로서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기도 하고 나중엔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했다. 뭐든지 멋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겉돌면서 친구들과의 사이가 깊어지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겨 친구들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던 세이라. 엄마에게 맞고 자란 것이 모든 일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기리노의 죽음에 의도하지 않게 일조를 하게 되었으니 등장하는 캐릭터들 중에 가장 비호감이긴 하지만 아이를 낳아 홀로 살아가야 할 그녀에게 마냥 미운 감정을 가지게 되지만은 않았다. 아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게 될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애달픈 감정이 든다. 가장 마음이 쓰인다. 그리고 차마 말하기 힘든 또 한 사람도 생각나고. 우리 조카도.



일본에 징용가셨다 돌아가신 우리 엄마의 아부지, 그리고 남은 남매를 키우시느라 악바리가 되신 외할머니의 사랑을 못받고 구박뎅이로 자랐다고 맨날 한탄하시던 우리 엄마... 그런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기보단... 

아무튼 우리 엄마도 불쌍해. 아버지 복도 없어, 남편 복도 없어, 거기다 하나 뿐인 아들 손써볼 새도 없이 병으로 보내고....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야. 성질은 불같은데 아무튼 너무 반듯해. 절대 부러지지 않아. 정말 잔정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어서 그렇지! 그런 엄마를 견디고 나도 반듯한 사람이 되었는데 왜 눈물이 날까. 

시리고 아픈 세이라와 노조미를 따뜻하게 품어준 건 결국 기리노의 엄마였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견딘 엄마, 징글징글하게 피 터지게 싸우던 엄마와 동남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나(기대되는지 오늘도 전화왔다. 우리 엄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 정말 이상해. 그래서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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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라스 SHG EP 코판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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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건 신맛 없는거 하나.
그냥 무맛. 싱거움.
내가 강배전에 너무 길들어 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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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1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저는 심지어 세 봉다리 샀답니다. ㅜㅜ

은하수 2023-12-13 16:45   좋아요 0 | URL
어째요 ㅠㅠ
전 좀 더 다크 로스팅했으면 좋겠던데요. 저도 이거 먹다 그라인더에서 다시 빼놨어요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3-12-13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커피 먹느라 애 먹었어요…봉지도 불편 맛도 불편 분쇄도 선택 안 되는 거도 불편… ㅋㅋㅋㅋㅋ

은하수 2023-12-13 21:33   좋아요 1 | URL
그러셨군요^^
봉지는 참 예뻤는데...
커피가 참 아쉬웠죠.
저만 그런게 아니었어요~~
전 다 못먹고 밀폐용기에 그냥 쏟아놨어요.. 안먹게 될 거 같지만 버리긴 또 그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