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뒤흔들었던 성고문사건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당시 투쟁했던 사람,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민들, 그분들은 또 어떤 가슴으로 바라보았을까? 펜을 들고 사는 소위 작가라는 내 자신은? 한일합방을 늑대이빨에 찢기는 양의 비극으로 비유한다면 수많은 이 강산의 딸들이 일본 병사의 화장실 역할을 했던 일은 무엇으로 비유해야 하는지,
침묵하는 이 땅 남성들에게 묻고 싶고 만일 저 아우슈비츠(Auschwitz)의 참혹함보다는 낫다고 자위하는 리얼리스트가 있다면 우리는 인간임을 사양할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 P17

한 사람 책임지는 자 없고 벌받은 자 없는 그들에게 푼돈얻어낸, 청풍당상의 그야말로 더럽혀지지 않았던 양반들, 차라리 그것은 희극이다. 혹자는 말하리라. 그 푼돈도 우리 발전의 밑천이 되었노라고. 그러나 자(尺]로는 잴 수 없고 저울로도 달 수 없는 가치도 있다. 그 가치로 인하여 우리는 인간인 것이다. - P17

아무리 즉물적(卽物的) 세태라 해도 우리는 그 이상의 가치를 꿈꾸며 산다. 물질도 있어야 하고 계산도 해야 하지만 삶의 존귀함도 있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 문화의 본질인간다운 연유도 거기 있으니 말이다. - P18

물질과 계산에 편중한 일본인들, 그들은 지난날을 잊은 듯부담 없이 이 땅을 밟는다. 어디서든 흔히 마주치게 되는 일본인, 그러나 상투적인 그들 표면보다 내면에 숨겨졌을 서늘한 칼날이 왜 자꾸 가슴에 와 닿는 걸까. 
일제 때 미신을 소탕한다 하여 무녀들을 잡아 가두었던 그네들이 한편으론 조선의 맥을 끊겠다고 봉우리마다 쇠기둥을 박았던 섬뜩한 그 일이 연상되면서 어찌하여 그들은 그토록 광란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그 광란의 뿌리는 무엇일까?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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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6-22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런 책이 있었군요. 덕분에 알게되어 장바구니로 담아갑니다. 슝-

은하수 2023-06-22 23:18   좋아요 0 | URL
슝~~~
박경리 선생이 쓰신 일본 비판의 글인데 읽다보니 일견 속이 시원해지네요!^^
 
모두 다 예쁜 말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2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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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열여섯 살 카우보이 소년 존 그래디는 할아버지 장례식이 끝나자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이혼을 했고, 목장을 팔려는 어머니의 마음은 돌릴 수가 없다. 존은 자신의 말 레드보를 몰아 친구 롤린스와 함께 멕시코로 향한다. 말썽꾼 블레빈스를 만나 총격전을 벌이는 등 우여곡절 끝에 국경을 넘은 그들은 한 아름다운 목장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존은 말을 다루는 실력을 인정받으며 목장 주인의 딸 알레한드라와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일 뿐, 여행 중 겪었던 말 도둑 사건에 다시 한 번 휘말리며 존과 롤린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한다."




책의 뒷 표지에 이렇게 간략히 설명이 나와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아주 깔끔한 스토리 텔링이다.  처음 책을 읽을 땐 환경적 배경에 대한 설명은 존재하지만 스토리 전개는 전적으로 주인공들의 대화를 통하기 때문에 앞 부분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말 도둑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부터 진짜 소년의 모험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쯤이면 코맥 매카시 이 작가의 문체에도 익숙해져서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하등의 문제도 없다. 오히려 뒤가 자꾸 너무 궁금해서 밤까지 읽다가 잠 안자고 싶어질 정도였다. 




책의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진짜 말을 타는 마지막 카우보이 스토리가 아닐까! 말을 대단히 사랑하고 진정 말을 다룰 줄 아는 존 그래디의 실력도 너무 멋진데다  말들이 자유로이 뛰어다니는 멕시코의 대 초원과 농장에서 농장주의 딸인 알레한드라와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는 일련의 과정들이 꾸밈 없는 문체로 인하여 더 빛을 발하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들 세계의 멋짐이란 것이 폭발하는 느낌인데 이런 느낌을 일부러 장황하게 꾸며서 표현을 했더라면 그 멋짐이 오히려 반감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건 내가 여자여도 충분히 느껴질만큼 멋지다고 느꼈다. 




여기서 나의 심정적 걸림돌은 사실 따로 있었는데 존 그래디와 롤린스, 그리고 알레한드라의 나이가 고작 열여섯, 열일곱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나이에 있다.  말을 길들이고 총격 사건이 일어나고 또 진하고 진한 사랑의 스토리를 써나가는 그들의 나이... 그리고 그 이후의 모험에서 벌어지는 목숨을 건 격투 장면들, 어른들과의 협상으로 목숨을 구하는 과정, 또 그들의 예쁜 말을 다시 찾으러 가고 당했던 만큼 갚아주는 복수의 과정들을 통쾌하게 전개해 나가는 존의 나이가 고작 열 여섯이라는 것.  이것이 자꾸만 걸리적 거린다. 이들의 나이가 열아홉이라면, 스물이라면 이들이 사랑을 하고 모험을 감행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걸까 생각을 해보지만 만약 이들의 나이가 그 나이라면 이미 성인이라고 할 수 있으니 스토리 전개가 당연히 달라질 것이고. 그 나이라면 말을 타고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넘어 시작되는 모험의 스토리에 대한 감동이 반감되었겠지.  그리고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을 앞에 두고 차라리 도피를 택했을지도... 이러면 전면적인 수정이 이루어져야하는 거쥐. 고럼~~~!  춘향과 이도령의 나이도 이팔청춘 방년 열여섯이었을걸???  이렇게 생각해보면 열여섯이라는 나이와 존 그래디의 모험과 사랑의 스토리가 영 말이 안되는 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역시 이 나이가 적당한 나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열다섯도 열일곱도 아닌...  소년을 이제 막 벗어나 아직은 미숙한 청년으로 가는 이 나이가 이 작품에서 중요하다는 것에 고개가 끄덕끄덕해지는 것이다.  괜히 나이에 집착해서 엉뚱한 길로 혼자 새지는 말자.



그래서... 열여섯의 사랑도 모험도, 그리고 말들도 모두 다 예쁘다. 난 그렇게 느꼈다!


  


코맥 매카시...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로드>였고 그 이후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선셋 리미티드> ,<모두 다 예쁜 말들>까지 네 작품을 읽었다.  이 작품은 국경 삼 부작의 첫번째니까 앞으로  <국경을 넘어>,<평원의 도시들>을 읽게 될 것이다. 쿨론 아닐 수도 있고.

코맥 매카시의 타계에 즈음하여 서가에서 잠자고 있던 그의 작품을 다시 읽게 되었지만 나에게는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좋아하는 작가라고 해서 모든 작품을 다 좋아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코맥 매카시의 작품도 그렇지만 이번에 읽은 <모두 다 예쁜 말들>은 너무 당연하게 별 다섯 개를 줄 수 있다. 국경 삼부작을 몰아서 읽어도 좋겠지만 다음 책은 그에게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작품인 <핏빛 자오선>이 될지도 모른다.  그 작품이 궁금해졌댜. 하지만 작품 선택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으니까... 어떤 작품이 될 지 지금은 나로서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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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컬렉션 박스 세트 (리커버 특별판, 전4권) - 뉴욕 3부작 + 달의 궁전 + 빵 굽는 타자기 + 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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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물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

   이 문장으로 시작되는 폴 오스터의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아.... 정말. 오스터 씨, 또 시작이네!" 하고 헛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예수님도 아니고 대체 뭐람... 말이 되냐구...!

하지만 나는 폴 오스터 이 작가를 너무 좋아한다.  작가가 그렇다면 나는 그냥 무턱대고 따라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평소엔 그가 들려주는 환상적이고 이상한 이야기 속으로 기꺼이 빠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은 십 수년 전에 사놓고 안 읽고 의심하고 이러기를 여러번.  폴 오스터의 컬렉션 박스를 구입하게 되면서 그 동안 미뤄두었던 그의 책을 홀린 듯이 읽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줄거리를 남겨놓을 생각은 없다(내가 가장 싫어하는 독후 활동이 책을 읽고 줄거리를 남기는 거다. 으악 진짜 싫어ㅠㅠ). 폴 오스터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영문 M이라는 글자를 연상케 하는 인생의 굴곡을 여러 번 그리는데, 거기에 또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우연이 겹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재밌어진다.  이건 줄거리로 남긴다고 해서 책을 읽고 나서 내가 느꼈던 즐거움과 감동을 제대로 표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의 책은 무조건 읽어봐야만 진정한 재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원더 보이 월트(월터 롤리)는 물 위를 걸을 수도 있고 공중에 떠올라 원을 그리며 곡예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계단을 오르는 듯한 곡예를 공중에서 보여주는 ㅡ 실제로 이런 공연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가서 보고 싶네.  공연의 구성을 읽기만 해도 굉장히 멋질 거 같다 ㅡ 공연을 하면서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를 조련하는 것은 예후디 사부님. 33 개의 어렵고 힘든, 그리고 조금은 황당하기도 한 단계를 거쳐 공중 부양을 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당연히 이 사람이 미친 건가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당연히 떠 오른다. 말도 안되는 걸 알지만 이게 또 그럴 수 있다고 믿게 된다. ㅎㅎ   

   중력을 거스르는 월트의 능력은 사춘기가 되면서 엄청난 두통을 동반하는 고통으로 인하여 공중 부양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3K(큐 클럭스 클랜)의 폭도들에게 사랑하는 형 이솝과 수 아주머니가 살해 당하고, 예후디 사부님의 죽음이라는 시련을 겪으면서 비범한 능력을 지닌 월트의 삶은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긴 어느 인생인들 예측할 수 있을 것이며 예측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언제나 의연하게 시련을 대하고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전력투구하는 월트의 자세는 나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시련 사이 사이마다 월트는 언제나 긍정적이고 또한 위트 넘친다. 이런 삶의 자세를 갖기가 어디 쉬운가 말이다. 그의 비범함ㅡ 혹은 위대함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ㅡ은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재미와 감동만이 아니라 독자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독자를 끌어들이는 폴 오스터의 작품 세계는, 문학 작품(특히, 소설)이 지녀야 할 궁극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폴 오스터가 나에게 선사하는 궁극의 가치, 작품성, 재미와 감동. 나는 여기에 앞으로도 계속 빠져 있지 싶다. 


   "내심으로 나는 몸을 띄워 올려 공중에서 떠다니는 데 어떤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고 믿지 않는다. 남자건 여자건 아이이건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내면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집중만 한다면 누구라도 내가 원더 보이 월트로서 달성했던 것과 똑같은 위업을 다시 이루어 낼 수 있다. 


물론 그러러면 당신 자신이기를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출발점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신은 자신을 증발시켜야 한다. 근육에서 힘을 빼고,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숨을 내쉰 다음, 눈을 감아보라. 그것이 요령이다. 그러면 당신 몸속의 공허함이 당신 주위의 공기보다 더 가벼워진다. 조금씩 조금씩, 당신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더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눈을 감고, 팔을 펼치고, 당신 자신을 증발시켜 보라.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당신은 땅 위로 떠오른다.

   그런 식으로." (376쪽)



   그래서 나도 침대에 앉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해봤다.   

당신 자신이기를 멈추고, 자신을 증발시켜야 하고, 근육에서 힘을 빼고(이건 된다).... 나의 영혼이 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숨을 내쉰다구?... 아무리 해도 내 몸은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가벼워지지 않는다. 물론 떠오르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는다. ㅋㅋㅋ

침대에 가만히 앉아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요가 자세나 취할 수 있을 뿐이지 다른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나는 평범하다 역시... ㅎㅎㅎ



   오늘 아침에 서가가 있는 다락방에 올라가서 폴 오스터의 책이 몇 권인가 보니 전집 포함해서 총 16 권이다. 그 중 3 권은 겹치는 거니까 13 종 16 권이 되는 셈이다. 그 중 반은 읽었고 반은 아직이다.  그래서 다음에 무엇을 읽을까 뒤적뒤적하다가 <거대한 괴물>과 coolcat329님 리뷰 보고 지금은 읽을 수 있을 듯하여 <롤리타> 찾아 들고 내려왔다. 

<리바이어던>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데 나는 열린책들에서 간행된 <거대한 괴물>로 가지고 있다. 먼저 읽고 있는 책들 정리가 되면 읽어야 하나... 어느 날 갑자기 동해서 읽어버릴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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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5-31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은하수님 폴 오스터 찐팬이시군요~ 저는 십여 년 전 <뉴욕삼부작>으로 오스터를 처음 만났는데 이해가 안 가서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히 후에 읽은 <달의 궁전>은 어디로 뻗어나갈지 모르는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죠.
그러고 보니 올해 <빵굽는 타자기>를 읽었네요. 작가의 입담에 즐거웠던 시간이었어요.🤗

은하수 2023-05-31 08:41   좋아요 0 | URL
저와 비슷한 경로를~~~하하하하
저도 어느 라디오 프로에서 신간소개하는 <뉴욕3부작> 처음 듣고 바로 읽었었거든요. 그땐 정말 이게 뭔가... 그러고 한동안 손이 안가다가 <달의 궁전>부터 완전 빠져서 줄줄이 찾아 읽게 됐죠! 어차피 전집에 있어서 <빵굽는 타자기> 곧 읽게 될거 같네요. 일단 <거대한 괴물>부터 시작했습니다^^
 
우아한 언어
박선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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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말하는 우아한 언어란 사진이었다. 우아한 사진과 필립 퍼키스의 우아한 사진 강의 노트...

중간 중간 사진을 보는 재미도 있었고 <필립 퍼키스의 사진 강의 노트>에 수록된 일부 내용들도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뭔가 마음이 끌리는 글이었다. 



공원의 벤치나 숲속의 바위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면

내가 보는 대상에 따라 시야가 급속히 바뀌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여기서 저기로 시선을 돌린다.

다시 말하면 주위를 '둘러본다'. 내가 바라본

전체가 한 장의 사진으로 조합되어 마음속에

각인된다. 우리가 과학 시간에 들었던 지리멸렬한

설명과는 다른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나의 뇌와 눈은 얼마간 서로 공모자인 셈이다.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다. 


이런 짧은 글들... 



왜 장가 못 가느냐고 주변에서 핀잔 받던 내가

어느 사이엔가 1녀 2남의 어엿한 가장이 된

것이다. 아이들을 낳은 후로는 안고 업고 뒹굴고

비비대고 그것도 부족하면 간질이고 꼬집고

깨물어가며 그야말로 인간 본래의 감성대로

키웠다. 공부방에 있다 보면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는 소리가 온 집 안 가득했다.

그 소리에 이끌려 나도 몰래 아이들에게 달려가

함께 뒹굴기도 일쑤였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집

같았다. 나는 이런 사람 사는 분위기를 먼 훗날

우리의 작은 전기(傳記)로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만 돌아오면 카메라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ㅡ 전몽각 <윤미네 집> 중에서



그런데 어젯 밤 이 글을 읽다가 갑자기 격하게 울컥해져서 눈물을 쏟을 뻔 했다.

내가 고 2 올라가던 18살에 돌아가신 젊디 젊으셨던 내 아버지.

그 아버지의 나이보다 18년만큼 더 나이를 먹어버린 나.

공교롭게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이에 18년을 더하면 내 나이가 된다. 그런데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새로 나온 기계를 참 좋아하셨다. 집에서 음악을 들으시고 동그란 녹음 테이프가 돌아가는 녹음기와 마이크를 사서 노래 녹음도 하시고, 특히 카메라를 구입해서 사진 찍기를 좋아하셨다. 여동생과 나에게 예쁜 옷을 입게 하시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걸 즐기셨다. 그때 찍어주셨던 사진과 앨범은 아직 친정 엄마 집에 보관되어 있다. 엄마 보러 갔다 가끔 그 앨범들 보곤 했기 때문에 그때 우리가 취했던 포즈와 표정, 동네 집들과 길, 풍경들. 그리고 웃기는 건 우리가 들고 다니며 먹던 '죠니'라고 하는 과자까지 사진에 찍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다 기억이 나고 해 질 무렵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때가 초등학교 4~5학년 무렵이었는데 그 때 이후로 아버지의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셔서 요양 차 부산에 계신 친 할머니 댁으로 내려가 계시던 몇 년 간 우린 아버지의 카메라도 녹음기도 전축도 모두 잊고 살았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고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하던 취미 생활 등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전율이란...



그 밤 갑자기 나의 작은 카메라가 생각이 나서 오늘 아침 다락방으로 올라가 카메라를 갖고 내려왔다.

좀 전에 충전이 다 된 카메라를 돌려보니 2019년 12월 남편과 베트남 여행가서 찍었던 사진들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걸 보았다. 코로나 이전의 시간에 멈춰 선 메모리 카메라...

오랜만에 들어보니 손 안에 쏘옥 들어오는 그립감이 꽤 좋았다. 

어디든 여행을 가면 내가 카메라를 챙기고 친구들과의 모임엔 항상 내가 찍사였기 때문에 카메라엔 당연히 욕심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수동 카메라에서 디카를 거쳐 작은 디쎄랄  카메라까지 카메라의 변천사도 , 남아 있는 앨범들도 모두 추억이라고만 하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크다. 그런데 언젠가부턴 카메라를 챙기는 일상이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카메라만(!) 들고 갔을 때의 아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카메라에 망원렌즈에 광각렌즈에 카메라 가방 등의 악세사리와 메모리카드, 후레쉬 등등등...  한 마디로 어깨 빠진다. 

이젠 나도 카메라를 버리고 핸펀 하나로... 따라서 사진 현상도 없다. 그러니 버려지는 사진도 많고 남아 있는 사진도 드물어져서 나만의 낭만은 사라진 느낌이다. 박선아 작가는 정리도 잘하고 정리된 사진을 커~~~다란 화면으로 돌려보던데...  이 책을 읽으며 잠시 옛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

우리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 계셨다면 요즘의 신문물도 참 좋아하셨을 거 같다. 남아 있는 아버지 사진이 거의 없어서 너무 아쉽다. 사진은 추억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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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하우스에서 영국 교외를 바라보며,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만족감에 차서 비로소 자신이 자연 세계의 복잡한 구조가 존재하게 된 과정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해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의 가장 장엄하고 잘 알려진 마지막 구절에서 다윈은 식물과 새, 곤충, 벌레가 가득 차 있으며 그 모두가 복잡하고 체계적으로 상호작용 하는, 얼기설기 얽힌 강 둔덕에 대한 명상에 잠긴다. - P13

다윈의 거대한 유산은 서로 뒤얽힌 이러한 웅장함의 대부분을 이제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한 진화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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