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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평점 :
오늘 아침엔 주말인데도 일찍 눈이 떠졌다. 주말이라 좀 더 늦잠을 자도 되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 그게 안된다. 어제는 새벽에 잠이 들었고 빗소리를 들으며 자고 났는데 비는 그칠 기미도 없고 하루 종일 정말 쉬지도 않고 비가 내렸다. 밤새 기온이 내려가면서 아침 6시에 일어나보니 마당 잔디밭 위에도, 초등학교도 건너편 전원주택 단지도, 그리고 눈에 보이는 바로 앞 논에도 온통 눈이 내렸다. 병원 예약이 있어 다녀오는데 어찌나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지... 날이 개었다 흐렸다 바람은 불어 대는데 언제나 그치려나 자꾸 해를 기다리는 나와 남편의 대화가 부질없다 싶을 정도였다. 딸램이 있는 서울은 오전부터 맑았다는데...
해는 늦게 나오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궂은 날씨였지만 중간 중간 나와주는 햇빛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는 하루였다. 대체적으로 내가 사는 동네는 비도 늦게까지 내리고 날도 자주 흐리고 기온도 서울보다는 3-4도 가량 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동네로 이사 온 것이 지난 11월로 만 2년이 되었다. 겨울은 불순한 일기의 영향을 많이 받고, 그 전 아파트 살 때보다 최소 6~7도 가량 낮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난 아마도 이곳에서 손바닥 만한 정원과 그보다 더 작은 텃밭을 가꾸면서 더 많은 시간들을 일궈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확신이 든다.
매사추세츠 주의 프로빈스타운에서 바다와 숲, 늪 지대, 그리고 개와 그녀의 동반자와 50 여 년을 살아온 메리 올리버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한 곳에서 50 여 년을 사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휘파람 부는 사람>도 <완벽한 날들>도 모두 그녀가 마주하는 세상은 프로빈스타운이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묻는다. "요세미티에 가보고 싶지 않아? 펀디 만에는? 브룩스 산맥에는?" 그러면 그녀는 대답한다. "오, 그럼. 가끔은." 그렇게 대답하곤 그녀는 곧 바다와 숲, 그리고 연못들을, 햇살 가득한 항구를 산책하면서 자연을 돌보고 감시하는 그녀만의 시간들을 갖는다. 개와 함께 달리고 동반자인 M과 함께 하는 삶. 그 충만한 시간들은 변함없이 자연이, 기꺼이 아낌없이 내어주는 완벽한 선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시간이지 않았을까. 그녀가 자신이 사는 그곳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들을 읽는 나도 그저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프로빈스타운을 사랑하듯 나도 그러하다. 내가 사는 곳은 그녀가 바라보는 바다와 숲과 동물들과 사계절 다르게 아름다움을 주는 나무와 꽃과 자연과는 다르고 그곳과 같은 압도적인 석양을 주지는 않는다.
내가 사는 동네의 작은 학교, 학교의 역사를 말해 주듯 자라난 학교를 둘러싼 위용을 자랑하는 나무들, 논 밭의 푸르름과 아름다운 황금색의 물결, 가끔 그 논을 끼익끼익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면서(구 소리 들을 때마다 운겨 죽는다) 겅중겅중 뛰어가는 고라니, 그리고 벼 베기 하고 난 논에 눈이 내리고 하얗게 줄지어 보이는 밑동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작고 소박한 산책로, 그리고 총신대 앞에 이르는 산책길 양편에 주거용 주택들은 내가 아파트에 살 때와는 다른 편안함을 나에게 준다. 산책 할 때마다 그 집들 은근히 엿보는 재미가 있다. 버스는 1 시간에 한대 오지만, 그래서 우리 아들은 질색하지만 난 어쩌다 타니까 그것도 좋아. 역설적이게도 작고 소박한 동네여서 나는 더 편안함을 느끼는 거다. 메리 올리버는 그런 아름다운 동네를 품고 있어서 다른 것에도 욕심을 내지 않았던 걸까? 그래서 그런 아름다운 글을 쓴 건 아니겠지? 그녀는 프로빈스타운으로 오기 전부터 아름다운 시를 지었으니까^^
오늘은 오랜만에 내 목소리로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처음에 읽을 땐 목소리도 떨려나오고 소리가 균일하지 않고 어색했는데 그래도 계속 읽었더니 어느 새 목소리가 고르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색한 건 여전했지만. 에세이지만 문장이 길지 않아서 시詩를 읽을 때처럼 소리 내어 읽기 좋았다. 나중엔 배에 힘을 줘도 숨이 차더라는... 소리내어 목소리를 계속 내는 것도 힘든 일이구나 싶었다...휴~~~ 빠른 걸음으로 산책할 때처럼 숨이 차올랐다.
어느 가을날, 나는 숲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우편물을 가지러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간다. 시에서 나온 직원들이 주차금지 표지판들을 철거하고 있다. 낯익은 얼굴과 목소리들, 몇 사람은 내가 40년 전부터 알고 지낸 프로빈스타운 주민들의 아들들이다. 작업을 마친 트럭이 떠난다. 늦은 오후, 아직은 여리고 고요하기만 한 어둠의 기운이 허공에 감돈다. 우체국 계단을 내려오는데 거기까지도 모래가 날아와 발에 밟힌다.(151쪽, '내가 사는 곳' 중에서)
그게 나고, 이런 식으로 산다. 나는 날마다 내 풍경 속을 걷는다. 늘 똑같은 들판, 창백한 해변. 늘 똑같은 푸른빛으로 즐겁게 넘실대는 바닷가에 선다. 늦은 여름 오후, 보이지 않는 바람이 거대하고 단단한 똬리를 틀고, 파도가 흰 깃털을 달고 해변을 향해 달려와 소리 지르며, 고동치며 마지막 상륙을 감행한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목격했다. 여름이 물러가고, 다음에 올 것이 오고, 다시 겨울이 되고, 그렇게 계절은 어김없이 되풀이 된다.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은 우주 안에서 그 뿌리, 그 축, 그 해저로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흔들리고 있으니까. 세상은 재밌고, 친근하고, 건강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고, 사랑스럽다. 세상은 정신의 극장이다. 하나의 불가사의에 지극히 충실한 다양함이다. (137~138쪽, '집' 중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메리 올리버가 묘사하는 그런 세상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은 재미도 없고 서로에게 친근함이라곤 없으며 병들어 있을 수도 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악이 가득할 수도 있다. 그래서 메리 올리버의 시와 에세이를 읽어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적어도 그녀가 보여주는 세상은 그녀의 말과 같은 세상이다. 그녀의 글을 읽는 동안은 나도 메리 올리버가 그린 세상 속에 있는 것이니까. 나도 날마다 내가 가진 풍경 속을 걸어 가다 보면 풍경과 내가 하나가 될지도 몰라. 메리 올리버처럼...! 나 오늘 왜 이리 센티멘털한 거니?... 메리 올리버의 글을 읽고 나서 나도 감염되어 버렸다! 세상을 보는 눈이...
P.S.
어제와 오늘 메리 올리버의 책이 읽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다. 딸램 아는 언니가 '마음산책'에 다닌다. 임경선, 김혜리 작가의 책을 몇 권 주문했는데(직원가 할인은 비밀이어야하나요???) 그걸 기다리다 책상 정면에 마음 산책의 메리 올리버 책을 발견했다. 읽다 만 채로 몇 달 간 방치했는데 읽어야겠단 생각이 당연히 들겠지! 내가 가진 두 권의 메리 올리버 책은 이제 다 읽은 거야~~ ㅎㅎㅎ 이러고 있는데... 오늘 책을 받았다. 예쁜 굿즈와 마스킹 테이프, 엽서 세트와 함께 메리 올리버의 <서쪽 바람>을 같이 보내 주셨다. 내가 딱 없는 책을 보내주신 선구안에 감탄! 잘 읽을 게요. 혹 이 글을 읽을지 모르겠지만...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