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걷으면 빛
성해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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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의 더위를 기억한다. 기록된 수치상으로도 그렇고 체감상으로도 아마 가장 더운 여름이었을 거다.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만큼 그 기록은 올 여름이라도 다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재작년 여름, 작년 여름, 올 여름... 이런 더위는 그게 어느 해였는지 애써 어떤 사건과 결부되지 않는 한 기억하지 못할 한 해로 묻히겠지....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 가장 더웠던 여름'으로 기억되는 해는  단연코 누가 뭐래도 '1994년 여름'이었다.  수치상으로도 그 해 여름은 정말 기록적인 폭염으로 남아있지 않았던가~~~!  '김일성이 죽던 해', 어떤 이들은 이렇게 기억을 할 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도 우리 현대사에 어마어마한 그 사건을 굳이 검색해 보지 않는 한 그것이 그 해 여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그 해 여름을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1994년 그 해 여름, 난 우리 둘째를 임신 중이었고 심한 입덧으로 물조차도 삼키지 못한 채 방바닥과 일체인 듯 드러누워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 3살 이었던 큰 아이는 거의 돌보지도 못한 채 방치되고 있던 수준이었다.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거의 먹지 못하고 출산 때까지 입덧 모드였는데 하필 최악의 더운 여름에 입덧이 시작이 되었으니 그 고통이야 말로 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였다. 임신인 걸 인지하지 못하는데 내 몸은 벌써 기별을 보내준다. 바로 그 즉시 입덧이 시작되면서 거의 아무것도 삼키지를 못하고 토하고 먹은 것도 없이 내 속의 모든 것을 쏟아내야만 고통이 그나마 멈추는?  문제는 내가 입덧임에도 거의 유일하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 그때까지 정말 정말 별로 좋아하지 않던 배추김치였다는 것인데. 이런 나의 어려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시 어머님과 같이 살고 있을 때였는데 그 해 여름 기온이 너무 높아 배추를 비롯한 채소류의 작황이 좋지 못해 가격이 치솟았고, 평소 틈만 나면 각종 김치를 번갈아 담아주시던 어머님이 도저히 배추김치를 담그지 못하시겠단 말에 눈물 주르륵.... 어찌나 원망스럽고 서운하던지... 아니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싶게 그 서운함은 정말 잊히지도 않고 두고두고 내 가슴 속에 앙금이 되어 남았다. 어머님과의 트러블은  출산 후에도 예기치 못한 사태로 발전을 하였고  나는 꽤 오래 어머님을 미워하는 며느리 노릇을 했지 아마... 어머님과의 작은 틈들은 결국 다 메워지지 못하고 남았다고 한다^^ 지금은 우리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시간이 지나니 당신 나름으로 나를 큰 며느리로서 존중하고자 애쓰셨던 그 마음을 이해할 만큼의 시간이 쌓여 그런가 그 어머님이 그립고 어머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질 때가 있더라는.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각자의 노력과 시간이 더해져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시간들이 이루어낸 결과일 것이다.   





성해나의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을 읽었다. 총 8편의 단편들을 하나 하나 읽다 보면 작품들이 보여주는 소재가 어느 지점에서 겹쳐지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를 소재로 그 이해할 수도 없고 메워지지 않을 오해들만 쌓이는 관계들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혹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만 남게 되는 관계들이라는 것을. 첫 단편 '언두'에서는 유수와 채팅 앱으로 만난 도호, 그리고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도호의 할머니 세 사람이 만들어 내는, 서로 이해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차이를 보여준다. 'OK, Boomer(나도 기성세대에 꼰대 소리 듣겠지만... 그래도 이 말은 참 볼 때마다 슬프다.ㅠ.ㅠ.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등장하는 상 꼰대 아버지가 이해된다는 건 아니다. 너무나도 가식적이고 자기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아들의 친구들에게 날리는 "여긴 내 집이야" 같은 말은 정말 참아주기 힘들다. 아무 것도 수용하지 못하면서 수용하는 척하는 그 가식적인 행태를 보고 있자면 아들 세대와의 불화는 따논 당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이러면 결국 세상 혼자 살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안쓰럽단 생각은 안든다!)'와 '괸당'에서도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차이가 이해되고 극복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 불화하는 세대간의 갈등을 부각시켜 보여줌으로써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에서는 가족 내에서의 문제가 역사적인 차원으로까지 발전하는 양상을 띤다. 주인공은 대학 동창 오수의 조부 상수연(100세를 축하하는 잔치)에 홈 비디오 촬영을 의뢰 받는다. 서울 도심에 이런 고택이 있나 싶게 전통적인 일본식 목조 주택 형태의 3층 집은 잘 가꿔져 있었고 한국식과 서양식이 혼재된 내부 구조의 실내는 넓고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시대가 여러 번 바뀌면서 대물림 되어온 부의 격차는 나를 알게 모르게 주눅들게 하기 충분했다. 집안의 가보로 내려오는 검劍의 가치를 감별하기 위한 감별사도 초빙이 되었는데 감별사는 그 검劍이 조선 황실에서 제작된 사인검이 맞지만 조부의 바람대로 고종 황제의 하사품은 아니라는 판정을 내린다. "사료에 의하면 황실에서 보관하거나 종친이나 총신에게 하사한 사인검은 총 아홉 자루입니다. 그 중 병인년에 만들어진 사인검은 단 한 자루고요. 고종 3년에 만들어진 검인데, 그 검은 ... ... 유실 되었죠."(198쪽) 1902년에 황실에서 유실된 사인 참사검! 주칠 십이각상, 익선관과 함께 일제에 귀속되었다가 이후 총독부 관리 몇 몇에게 기념으로 내려진 검... 조부가 가진 검이 바로 그러한 검이라는 것. "그러니까 이건 고종이 하사하신 검이 아니라, 총독이 ...... 친일을 한 관리들에게 뇌사한 검이다, 이 말입니다." (198쪽) 친일을 한 후손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모인 가족들은 그것이 그저 "조상의 과오"일뿐이며  "우리가 이룩한 건 선대와는 무관"(201쪽)하다는 말로써 오늘 날 이룬 부의 원천이 "선친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 부끄러움, 죄의식에 대해 말하는 감별사의 말을 막아버린다. 캠코더로 그 장면을 모두 찍고 있던 나도 오수의 요청으로 그 장면을 깔끔하게 편집하고 삭제함으로써, 그리고 감별사는 흔적도 없이 어느 새 사라진 반면 나는 그들과 음식을 먹고 끝까지 남음으로서 그들에 동조하는 자세를 취한다. 힘없는 개인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거대 세력에 충성하고 기생하는 삶도 있겠지만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더 오래 살아남아 역사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간 무수한 개인의 역사는 누가 기록할까 하는 생각에 착잡함이 밀려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불화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불통의 세대 갈등만을 다룬 소설집이었다면 내가 별 다섯을 줄리 만무. 8편의 단편들 중에서 '화양', 작가의 등단작인 '오즈', 그리고 마지막 단편인 '김일성이 죽던 해' 이 세 작품은 특히, 여성들 간의 연대와 소통을 보여주는 작품들로써 기억에 깊이 남을 거 같다. '화양'에서 젊은 여성 '경'은 노년의 여성인 '이목'과 만나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의 등단작인 '오즈'와도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8번에 걸친 임용고시에 낙방하고 아무런 의욕도 목표도 없이 아버지가 있는 고향에 내려와 있던 '경'은 아버지와 언니의 눈치를 보며 마음 둘 곳을 못 찾는다. 우연히 아버지를 피해 잠시 벗어나고자 갔던 화양극장에서 지나간 영화를 보다 '이목'을 만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뜨거운 음식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면서 '이목'이 젊은 시절 스턴트우먼으로 활동했던 배우였으며 지금은 멀리 떠나있는 한 여인을 오래 사랑해왔다는 것, 지금은 뤼미에르(고양이, '빛'이라는 멋진 뜻을 가지고 있음)를 키우며 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녀의 사랑은 그 시절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기 힘들었고, 여자인데 '바지 씨(84쪽)"로도 불리고 사랑을 '러브, 그거'라는 말로 폄훼당하지만 경은 '이목'의 사랑인 '연수'를 떠올리며 둘의 사랑을 가만히 상상해본다. 특히 이 단편을 읽으며 좋았던 부분은 이런 말들... 이목과 경이 역 근처 복집에 들러 따뜻한 복국을 먹는 장면들, "미나리부터 먹고, 그 뒤에 복을 건져 먹어요."(74쪽) 이런 말, "둘 다 새알심을 듬뿍 넣은 팥죽을 좋아해서 우리는 동지마다 그걸 끓여 먹곤 했어요. 이번에는 경도 와요. 우리 같이 새알심 넣은 팥죽을 먹어요.(79쪽), 멀리 있던 '연수'가 찾아온 날 "이목씨는 경에게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경의 얇은 옷차림이 마음에 걸린다고. 눈이 오니 따뜻하게 입고 집으로 돌아가라며."(82쪽) 이런 문장들... 이 단편집은 책의 제목이 흔히 하듯 단편 중의 한 작품을 표제작으로 하여 제목을 지은 것이 아니어서 의외였는데 책의 제목이 이 단편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가 생각하게 되었다. "이목씨는 말했다. 어둠을 걷으면 또다른 어둠이 있을 거라 여기며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어둠을 걷으면 그 안에는 빛이 분명 있다고. 나는 이제 살아내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요. 견디지 않고 받아들이면서."(92쪽) 이 말은 경에게도 많은 위로의 언어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 좋았다. 이목과 경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노년과 청년 세대의 여성이지만 두 사람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나 서로를 이해하고 끌어안으려는 소통과 화해의 미학이 아름다웠고, 작가가 그려낸 따뜻함을 선사하는 문장들을 읽어가면서 남게 된 그 이미지들은 오래 기억하게 될 거 같다. 지금 제철을 맞은 청도 미나리가 새파랗고 향긋하게 입맛을 돋우며 끓고 있는 복국과 그 음식을 나누는 이목씨와 경의 영혼의 대화들, 그리고 새알심 듬뿍 넣은 달콤한 팥죽이 주는 이미지가 겨울이라는 계절과 어우러져 말로 다 할 수 없는 내밀한 감정을 보여주는 이 '화양'이 다른 다 단편들보다 먼저 읽어서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나이 차가 나지만 그것을 권위의 상징으로 이용하지 않고 존대함으로써 동등한 개인으로 대하는 점, 표현 하나하나 따뜻함이 묻어나는 이목씨의 배려 덕분에 경은 서서히 무기력에서 벗어나 이목씨처럼 살아가고자 애쓰는 현재를 보여주어 좋았다.


역시 '오즈'에서도 젊은 세대인 나와  자신을 '오즈'라고 불러 달라는 할머니의 동거를 시작으로 처음에는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서 한집에서 데면데면 살지만 어느 순간 '타투'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상처난 몸을 보이면서 살아온 흔적들을 서로 보듬는 과정을 고통스러우면서도 '화양'과는 다른 분위기로 보여준다. 상처난 마음을 감추기 위하여 압화에 몰두하며 꾹꾹 눌러담는 마음처럼 정성을 다하는 할머니와 상처난 몸을 감추기 위하여 타투를 시작한 젊은 나의 이야기는 '화양'의 이목씨와 경의 관계처럼 서로 동등함을 보여준다. 괴팍하고 말수 없는 무뚝뚝한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의 몸에 남은 말도 안되게 슬픈 일본어로 새겨진 똥 같은 문신들을, 할머니가 압화로 만든 아름다운 꽃들로 채워나가는 '나' 의 연대는 진정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싶게 만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깊이 공감이 되었던 작품은 '김일성이 죽던 해'라고 할 수 있다. 딸과 엄마의 불화, 그리고 1994년 여름의 임신 사실들이 내가 더 공감하게 되는 포인트가 되었다는 것은 뭐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김일성이 죽던 해'의 화자인 

'나'는 신춘문에 당선으로 등단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관점에 대한 확신이 없다. '김해원 소설은 기성 문학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듣고 나서는 더욱. 엄마와의 불협화음은 '나'의 묹제일 수도 있지만 내가 가지지 못하는 자신감은 엄마의 영향도 무시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매사에 말수가 적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고 대화가 되지 않는 엄마와의 관계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일상의 세세함까지 공유하는 모녀 사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이러한 관계에서 기인하는 공허함은 '나'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보여주는데 '나'를 이해받고자 하는 마음은 일방적인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엄마가 작가인 나에게 다이어리에 적어 건네는 글 '내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이라는 큰 제목을 단, '김일성이 죽던 해'로 시작되는 긴글을 읽고 난 후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받기를 원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엄마와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엄마의 글은 '나'가 그녀의 뱃속에 자리잡은 1994년 여름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일성이 죽던 해, 그해 더위는 지금도 피부로 느껴질만큼 선연하다. 더위를 타지 않는 나도 꽝꽝 얼린 사골 팩을 이마며 목을 대야 겨우 잠들 정도였으니까. 징그러울 만큼 무더운 날에 북녘의 지도자가 죽었다기에 일사병으로 죽은 것 아니냐고 여공들이 속닥이던 것도 기억난다. 그날의 기묘한 망연함도."(363쪽) 여공이란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도 그 더운 1994년 여름, 공장 노동자로 일을 하고 있었고, 그 곳에서 만난 상희 언니, 문덕과 노동자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고, 당시 유행하던 '나우누리'에 올려 놓고 자신들의 처지를 글로 표현하던 시절들, 그리고 그 모임에서도 가장 소극적이었고 현실을 피해 한 발짝 물러나 있었던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러던 엄마가 '나'를 낳은 후 비로소 자신의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을. 이 후 다이어리를 건네받고 가려는 엄마에게 "밥 먹고 가."(393쪽)라고 한다든지 엄마와 티 테이블에 마주앉아 턴테이블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대화를 나누고 엄마의 꿈을 묻는 장면, 엄마가 하던 대로 사과 껍질을 먹는 내가 "엄마 딸이잖아."(394쪽)하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차올라와 찔끔 눈물이 나기도 했다. 지금도 살짝 어긋나는 대화를 하지만 대화는 하는, 이젠 크게 싸우고 몇 년씩 얼굴 안보고 살지는 않는, 하지만 우리 딸과 나 같은 세세한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는 결코 될 수 없을 거 같은 나와 우리 엄마가 생각이 나서.





올 봄에 엄마와 해외 여행을 계획 했었다. 엄마가 가고픈 곳이 동유럽이어서 나는 이미 다녀온 곳이라 이번엔 안가고 엄마와 친구 두 분이 모여 세 분이 같이 가시기로 했다. 나와의 여행은 자연스레 내년 봄, '튀르키예' 여행을 함께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김일성이 죽던 해'의 딸 해연과 엄마 이순이씨처럼 우리도 그닥 잘 맞는 엄마와 딸은 아니다. 세대간의 차이도 분명하고 엄마나 나나 서로 굽힐 생각이 없는 채로 서로 피하는 대화 주제는 입에 올리지를 않으니 지금은 평온한 듯 하지만 나는 솔직히 언제 엄마가 또 예전처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주장에 핏대를 올릴까 싶어 걱정한다. 그런 엄마와의 여행이라니... 동생은 극구... 말린다^^ 다시 생각해보라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엄마와 딸이다. 모녀지간에도 이리 어려운 것이 이해, 화해, 포용, 연대일진데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의 연대와 화합, 이해가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이런 생각이 든다면 성해나의 <빛을 걷으면 빛> 중에서도 '화양', '오즈', '당춘', 그리고 '김일성이 죽던 해'를 권해주고 싶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기를...  아무튼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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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3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하수 2024-03-13 20:18   좋아요 1 | URL
1994년의 그 여름을 기억하시는군요! 큰애의 몸에 땀띠 돋아서 욕실에 담가놓으면 뛰어나오고 엄마 몰래 비 오는날 집압 물웅덩이에서 물장구치고 놀던 모습 .. 근데 엄만 아이를 제대로 케어할 수 없는 상태고... 그때의 막막함은 말도 못해요. 그때만큼 시엄니와 친정엄마가 야속한 적은 진짜 없었던거 같은 그 절망감 때문에 울던 날들이요..
지금도 아리네요 ...
전 시어머니가 일단 저에 대한 곡해나 억하심정은 일도 없단 것이 느껴졌던 시간이었거든요. 거기다 수술 후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더 아쉬움이 남았죠.
아직도 ‘증‘이 5배시라니... 제 마음으론 이해가 되고도 남죠. 밉고 야속하던 시간들도 많았으니까요. 어찌하면 며느리의 그런 감정조차 지난 일이지.. 옛얘기하는 시간이 올 수 있을지 정말 어려운 문제네요.
 
더 라스트 걸 - 노벨 평화상 수상자 나디아 무라드의 전쟁, 폭력 그리고 여성 이야기
나디아 무라드 지음, 제나 크라제스키 엮음, 공경희 옮김, 아말 클루니 서문 / 북트리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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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티빙 오리지널 들어갔다가 빠져서 넋 놓고 보게 된 드라마가 신세경, 조정석 배우 주연의 <세작, 매혹된 자들>이다. 아직 드라마가 완결된 건 아니지만 10 화까지 많은 횟수가 나와 있었고, 거기다 주연인 두 배우야 말할 것도 없이 믿보배인지라 완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책도 읽는 둥 마는 둥 마구마구 정주행해서 이틀 만에 10 화를 다 보고야 말았다. 넘 재밌어서 다음 편은 언제 나오나 목이 빠지게 생겼다. ㅠㅠ



드라마의 배경은 조선인 듯 하지만 실제 역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허구의 세계.

요즘은 현실 세계에서도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 되고 있고 드라마에서도 청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 전쟁과 사대의 정치 상황은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드라마의 줄거리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1화 시작 부분에서 이미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패해 왕(이 선)이 굴욕의 화친을 당하고, 우리의 남주인 진안 대군은 볼모로, 백성들은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할 것인데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갔던 역사적 사실이 떠오르고 드라마가 전개되는 과정에서는 배 다른 형인 왕(이 선)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문이 세간에 도는 것을 보면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을 여럿 차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여러 복선을 깔고 있으니 이래저래 갈등 상황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거기다 예쁜 신세경(강희수) 배우는 남장까지 하고 있다. 아니... 남장을 해도 그렇게 자그마하니 절세미인인데... 아무리 봐도 남자는 아니고만... 왜 아무도 못 알아보는 걸까 의아하다는... ㅋㅋ



아무튼 이 말을 하려던 건 아니고 강희수 그녀는 영의정 강항순의 금지옥엽 고명딸로서 바둑을 기가 막히게 잘 두는데, 남장을 하고 내기 바둑을 두어 이기고 받은 바둑판을 팔아 돈을 모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여인들의 속환금으로 사용을 하려 한다.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 도와주는 친구가 있었으니 바로 환향녀(還鄕女) 기생 홍장이다. 

속환은 돈을 주고 포로를 사 온다는 것이고 환향녀는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뜻이지만 이들이 병자호란이 끝나고 볼모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이라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홍장은 원래는 양반집 규수이지만 볼모로 끌려갔다 돌아왔고 집 안에서 버림을 받았기에 자진해 기녀가 되었다. 병든 부모님을 극진히 모셨고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였지만 오라비에게 모진 수모를 당하고 남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 당시에 홍장과 같은 환향녀들의 수가 수십 만에 달하였으며 극히 일부는 돌아왔지만 양반집 규수들은 속환금이 비쌌고 돌아온다고 해도 버림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타국에서 죽거나 목숨을 끊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기생 홍장의 인생은 한마디로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왕을 비롯한 조정의 대소 신료 놈들, 그녀를 타국에 볼모로 뺏긴 집 안의 한심한 남자 놈들, 그리고 특히 돌아와서도 핍박을 잊지 않는 '유현보'라는 개놈식히 오라비 놈! 때문에 말로 다 못할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고, 거기다 가당치 않은 역모에 가담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불귀의 객이 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차라리 환향하지 말고 청나라에서 죽는게 나았다는 논리가 성립할 만하다. 환향하였지만 고향은 그녀를 반겨주지도 집을 내어주지도 위로하고 보듬어주지도 않았다. 이 부분이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는 거다.



그런데 이 환향녀 홍장(거기에 덧붙여 위안부 할머니들까지...)의 이야기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러한 사실이 보편성을 띄고 만연해 있다는 것에 분노하는 것은 우리 여자들뿐인 것일까. 얼마 전 읽었던 <THE LAST GIRL>을 쓴 나디아 무라드를 비롯한 이라크 소수민족의 여인들도 ISIS(2003년 국제 테러 조직 알 카에다의 이라크 하부 조직에서 출발해, 2011년 시리아 내전 이후 시리아로 거점을 옮겨 활동하였으며 세력을 넓혔다. 급진 수니파 무장 단체로, 집단 학살과 잔인한 테러를 일삼았다. ISIS는 IS(Islamic State)가 그들 스스로 국가 수립을 선언하기 이전의 이름이다. 2019년 현재 IS는 대부분 와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 포로가 되어 성폭력을 당하고 성 노예가 되어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돌려지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집 안의 남자들에게 버려지고 혹은 '명예살인'이라는 이름으로 목숨을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돌아가기를 주저한다. 그러니까 이들 역시 그들의 잘못으로 포로가 되고 강간을 당하고 팔리고 다시 팔리는 과정을 반복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으로서 엄마로서의 소임을 다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 몸이 더럽혀진다는 그 끔찍한 현실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가부장제 하의 힘없는 여성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그 책임과 고통은 왜 언제나 아직까지 여성의 몫이어야 하는가. 왜 그들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가. 




나디아 무라드는 이라크 북쪽 지역 '코초'라는 작은 '야지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야지디' 부족은 자신들만의 종교인 '야지디'로 인해 붙은 이름인데 이슬람 국가인 이라크에서도 소외되고 상대적으로 보호받기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이 지역은 수니파 아랍족과 시아파 아랍족 사이에 끼어 있어 양 진영으로부터 끊임없는 회유와 압박을 받는다. 그러던 중 2014년 ISIS(수니파)가 나디아의 고향인 코초 마을을 공격하였고, 21세의 학생이었던 그녀의 삶은 그야말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의 6명의 오빠들과 어머니, 어린 사촌들은 끌려가 총살 당하고 묻혔으며, 나디아 자신, 부족의 젊은 여자들, 언니들은 ISIS의 대원에서 대원에게로 넘겨지면서 강간 당하고 폭행에 시달렸으며 담뱃불로 지져지고 채찍질 당하는 등의 폭력에 노출되면서 잔인하게 정복 당했다. 그들에게는 '야지디'라는 종교가 있었지만 ISIS에게 당하는 내내 '더러운 불신자'라는 모욕적인 말들을 들었다. ISIS는 이렇게 포로로 잡은 여성들을 시장에서 혹은 페이스북을 통해 수없이 거래하였고 나디아도 이 여성들 중의 한 명이다. 21세기 이 문명의 세계에서 너무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이들의 만행은 '여자 포로와 노예는 재산에 불과하므로 사거나 팔거나 선물하는 게 가능하다'는 악의적인 논리를 당연시하도록 세뇌시키고 있는데 이는  ISIS의「포로와 노예 포획에 대한 질문과 응답」이라는 그들이 만들어 배부한 소책자에 문답 형식으로 나와있다. 실제로 이러한 책자를 읽고 ISIS에 동조하는 남자들이 있었다.(우리나라 고등학생도 IS에 입대하기 위해 출국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야지디'라는 이름의 부족이자 종교를 가진 '야지디 나디아 무라드'를 비롯한 부족의 여인들은, 경전이 없는 쿠르드어를 쓰는 불신자들일 뿐이며 단지 이슬람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예로 삼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따라 종교재판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전쟁 포로 여성들을 강간하고 폭행하고 죽이고 엄마와 아이들을 분리시켜 사고 팔고 노예화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율법이라면 이러한 종교는 우리 인간 사회에 왜 있어야 하는가. 이러한 종교가 없어도 적어도 이보다는 더, 충분히 인간답게 잘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은데...



다행히 나디아는 그녀를 돕는 천사 쿠르디스탄 아자위(아자위는 야지디와 오랜 친분이 있는 부족이란다. 이라크에 자신들만의 종교를 가진 소수민족이 많다는 것을 이 책을 읽어 알게 되었다. 소중한 경험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족, 그리고 고향을 잠시 떠나 있었던 덕분에 목숨을 건진 오빠 헤즈니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다. 그녀는 탈출 후에 여러 기회를 통하여 ISIS의 만행을 고발하였고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출석하여 증언하였다.  전쟁과 무력 분쟁의 무기로서의 성폭력 근절을 위하여 헌신한 공로로 201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인권 변호사 아말 클루니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디아는 침묵을 거부했다. 인생이 그녀에게 준 고아, 성폭행 피해자, 노예, 난민의 꼬리표를 거부했다. 그 대신 새 꼬리표를 만들어 냈다. 생존자, 야지디 지도자, 여성의 대변자, 노벨 평화상 지명자, UN 친선 대사. 이제는 저술가."  




2017년 5월 말, 그녀의 고향 코초가 ISIS의 관할에서 해방되었고 전투를 피해 먼 길을 돌아 고향 마을에 찾아갔지만 학교의 지붕은 깨지고 안에는 일부 시신이 남아 있었으며 남은 것은 뭐든 소각되었다. 그녀와 가족들이 살던 집은 지붕의 나무까지 빼앗길 정도로 약탈당했고 잿더미가 되었다. 지금은 코초에서 잘 살고 있는 걸까... 코초로 돌아가기 1년 전 UN 연설에서 그녀는 말한다. 모든 야지디는 ISIS가 집단 학살 죄로 기소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청중들은 세계의 약한 자들이 보호받도록 도울 만한 권력을 갖고 있다고, 그리고 우리를 유린한 남자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그들이 벌받는 것을 보고 싶다고 .... 나두 보고 싶다...! 숨어 있는 모든 IS 대원들 지구 끝까지 찾아가 모두 찾아내서 법정에 세워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야한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나 같은 사연을 가진 마지막 여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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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집중력 - 집중력 위기의 시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법
요한 하리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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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 왜 '도둑맞은'인지 다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 말이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작가가 말하는 요소들을 솔직히 나에게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긋나 있는 부분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흔히 말하는 방해 요소들인 SNS와 빅테크 기업들의 앱들, 그리고 우울감과 정신의 혼란을 야기하는 각종 약물들로부터도 어느 정도는 떨어져 있는 나이대이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그러한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각종 SNS와 흔한 이메일도 거의 열어 보질 않고 동영상 시청도 OTT 드라마, 예능 시청도 즐기지 않는 편이다.  리모콘 붙들고 안 놓는 남편 때문에 티비 시청도 싫어한다. 그렇다고 남들하는 그 모든 것들을 안하는 건 아니고... 주로 모바일을 이용하는데 유튜브 영상 보기 정도랄까... 요즘은 숏폼도 자주 보긴한다.그리고 알라딘 서재와 북플은 하루 종일 들락날락한다. 이게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는데... 이것도 못하면 정말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요즘의 나의 생활이란 것이 너무도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남편과 아들 출근하고 나면 아침 7시 30분 무렵부터 두 남자가 퇴근해오는 6시 30분 정도의 시간까지 거의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주민자치센터에서 하는 수영 강습 가는 화, 목만 빼고 보통 11시간에서 12시간 정도의 시간이 나에게 통으로 주어진다. 나는 이 시간을 정말 마음껏 즐기려고 노력하는데 코로나 사태가 한창이던 2021년 말, 아파트 생활의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지금 이 집(용인 외곽의 주택)으로 이사를 온 후 책 읽는 시간을 대폭 늘릴 수 있게 되었다. 어쩌다 친구를 만나러 나가긴 하지만 그건 정말 한 달에 한 두번이고, 이것도 잦으면 귀찮아서 패스해버린다. 그러니 온전히 책을 읽는데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요즘 같은 겨울엔 특히 더 그렇다. 운전은 하지만 차는 거의 매일 집 주차장에 서 있고 운전하는 것도 싫고 장 보러 가는 것도 진짜 진짜 싫어한다. 추울 땐 더 싫어... 그런데 또 음식하는 건 좋아하고 좀 하는 편..ㅎㅎ 자화자찬이지만 아유 이 정돈 해도 되지 뭐... 싫어하는 게 왜 이리 많냐 싶은데... 어쩔 수 없다는...시간이 너무 아깝단 생각이 들고 이런 것들이 다 내가 좋아하는  책 읽기를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많이 읽진 못해도 책은 고조 붙들고만 있어도 좋은 거 아니겠습니꽈! 

암것도 안하고 책만 붙들고 있고 싶기도 하지만 그럴 순 없고. 그럼 책 읽기도 지루해질걸? 집중력 저하의 요인이 되겠다^^



아무튼 나의 소일거리라는 것에 대해 말해보자면... 아파트 밀집 지역도 아니고 도시 외곽의 도농 복합 동네라 시장과 마트를 가려면 거리가 멀어졌으니 싫어도 운전은 꼭 필요하고 도서관을 가려고 해도 걸어서 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특히 동네 작은 도서관은 내가 원하는 도서가 거의 없어서 시내의 큰 중앙도서관까지 차로 이동을 해야한다. 마트보다 도서관을 더 자주 이용하고 있는 것도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아들과 나의 도서관 회원증을 동시에 이용을 하다보니 예약도서, 반납도서, 상호대차, 거기다 바로 대출까지 ... 1주일 중에 중앙도서관 갔다 동네 도서관 갔다 바로대출 서점 갔다 하느라 바쁜데, 운전은 싫지만 이 시간이 내가 코에 바람 넣는 시간이라 난 또 이 시간을 즐긴다. 원하는 책을 받아올 땐 더 기분이 설레고...^^ 그리고 대충 놀면서 대충 읽어도 한 달 열 권 이상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러니 집중력을 "도둑맞은" 적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난 도둑 거부한다~~~ 라라라~~~

따라서 내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서비스는 도서관 앱과 알라딘 앱, 쿠팡 앱이고, 가끔 유튜브, 하루 중 몇 번은 카톡 확인, 전화는 거의 안받는 편(무음모드라서).  책을 읽으면서 지루할 땐 동영상 시청도 하고 책 검색도 하고 장을 보기도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하루 종일 책을 읽을 수는 없지 않나..ㅎㅎ 그럴 때 쿠팡으로 쇼핑도 하고 미리미리 먹을 걸 구매하기도 한다.(참고로 여기 이사 와서 모든 프레시한 장보기 쓱, 컬리, 쿠팡 등등, 뿐만 아니라 새벽배송, 당일배송도 안된다.진짜 대/개실망함). 알라딘 가서 책도 검색하고 일부는 사기도 하고 다시 중고로 팔기도 하고 그러는 편인데 이 정도면 생활이 머리에 그려질 듯 단순하구나 하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생각을 해보자. 나는 대체 언제 집중력을 "도둑맞는" 것일까? 나의 집중력을 "빼앗아" 가는 도둑은 무엇일까? 코로나 시국에서 잠시 1 년 동안 공부를 하긴 했었다. 그 동안엔 책도 끊었었다. 지금은 집중력을 요하는 일을 안 벌인 상태라서... 테크 기업들이 나의 즐거움을 위해 봉사하지만 나의 집중력을 "도둑맞은"이라고 할 정도까진 아닌 거 같다. 책을 읽다가 아님 집안일을 하거나 아들 방 들어갔다 쓰레기장으로 변한 방을 보고 열 받아서 문을 쾅 닫아버리고 돌아 나와 잠시, 그것도 아니면 마당에서 잡초를 뽑거나 텃밭 채소들에 낀 벌레를 잡다가 지쳐서 잠시 내 스스로, 지극히 자발적으로 보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거 같고...  

하, 이걸 내 입으로 말하려니... 알고 있지만 별로 말하고 싶지가 않다. 내 나이쯤 되면 가장 큰 도적이 무엇인지 자연스레 알게 될테니까... 그렇다면 난 이 책을 왜 읽은 걸까... 따지고 보면 나와 하등 관련없는 말들일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굳이굳이 왜 끝까지 읽은 걸까.



"도둑맞은"과 "집중력"이라는 제목으로 유추할 수 있듯이 우리의 집중력을 앗아가는 각종 SNS와 수많은 앱들이, 그리고 빅테크 기업들의 무한 푸시와 무한 스크롤, 그리고 끊임없이 제공되는 알고리즘의 연속이라는 지옥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그동안 말로만 들어왓던 테크 기업들의 상업적 술수에 놀아나 빼앗긴 우리의 집중력 상실은 우리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들 기업들의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운영 방침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추적하고 조종하는 테크 기업들 - 집중력 파괴는 그들의 사업 모델이다"라는 6장의 제목은 우리의 산만함을 조장하고 집중력을 훔침으로써 성장하는 기업들의 생리를 보여주었다. 특히, 집단의 집중력이 이들의 비도덕적인 상업모델로 인하여 파괴되었을 때 어떤 식으로 위험한 폭력의 양상을 띨 수 있는지를 보여준 7장 "산만함에 불을 지피다 - 집중하지 못하는 사회는 어떻게 위험에 빠졌나"를 읽었을  때 문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다. 이용자들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하여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미미하고 간단한 프로그래밍으로도 윤리적이면서 비파괴적, 비폭력적 기술을 접목할 수 있음에도 그들은 그러한 접근법을 싫어한다. 이용자들은 그저 그들의 돈벌이를 위하여 상업적으로 이용당하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성장 모델을 제시하고 그들의 성장에 우리는 무한 스크롤, 무한 알고리즘의 덫에서 나오지 말아야 하고 나오지 못하게 막는 그들의 프로그램에 따라 숨가쁘게 빠른 속도로 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성장과 속도... 오로지 이것만 중요한 가치가 된 것이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집중력 저하 어린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기술했을 때이다. 어린이의 삶의 요소를 파악하지 않고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으로 ADHD 진단을 내리고 어른들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는 약물을 처방하고 남용하는 사례들을 보면 정말 말로 하기 힘든 역겨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놀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작가의 생각에 나도 백 펴센트 동의한다. 



그래서 작가가 하고 싶은 최종적인 결론은 뭐란 말인가. 집중력, 몰입, 뇌에게 휴식을 주고 딴생각하게 내벼려 두기.. 다 중요한데 지금 우리에게 집중력이 긴급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이게 궁금한 것이지 암.... 이게 궁금해서 내가 책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집중력 저하가 걱정할 만한 수준이고 우리의 집중력을 빼앗아 가는 빅테크 기업들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집중력을 논한 것은 아닐테니까 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집중력 반란이 필요한 특히 큰 이유가 하나 있다. 매우 엄연한 이유다. 인류에게 바로 지금만큼 집중력(우리 인간종의 초능력)이 필요한 때는 없었다. 현재 우리가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431) 라고 말하면서  "집중력 위기에서 가장 염려되는 점이 지구 온난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음... 그래요. 잔뜩 기대하고 읽었는데 사실 조금 허탈한 결론이기도 해서 잠시 실망스런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우리의 상황도 결코 낙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특히 우리 정부는 기후 위기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미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가 더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한 3년이란 기간은 코로나 팬데믹과 맞물려 있으며, "산불의 해"였다고 한다. "시드니와 상파울루, 샌프란시스코 등의 지역에서 대규모 산불이 발생하였고, 내가 기억하기로 2023년 봄과 여름 사이에 캐나다에서도 어마어마한 면적의 산불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가뭄과 폭염으로 인한 기후 위기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러한 위기에서 각 개인이 각자의 의지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해야하기도 하지만 보다 더 거대한 경고 시스템(과학자들이 하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우리 사회의 능력)이 작동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기후위기는 해결 가능하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화석연료에서 벗어나 깨끗한 녹색 에너지원으로 사회에 동력을 공급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집중할 수 있어야 하고, 분별력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3분마다 작업을 전환하고 알고리즘이 불어넣은 분노 때문에 늘 서로에게 고함을 치는 정신없는 인구 집단은 이 해결책을 실행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집중력 위기를 해결할 때에만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  (433쪽)



우리 인류가 집중력을 발휘해야 할 문제가 비단 기후위기 뿐이겠는가만은... 무엇을 해결하려 하건 집중력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대체 어떤 해법을 제시해줄 것인지 궁금해서 끝까지 읽었고, 중간에 약간 지루하긴 했지만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닌데 내가 기대한 대답은 아니어서 맞는 답인거 같은데 실망하기도 했다는 뭐 그런 리뷰가 되어버렷다. 집중력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해법은 조금 부족한 듯 느껴지는데 작가라고 해서 답이 여기 있소 하고 우리에게 딱 쥐어줄 수 있을까. 이건 작가 자신도 누구나 수긍할 만한 답을 내어놓지는 못한다고 인정한 부분이니까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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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4-01-08 1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니 말씀대로 은하수님은 집중력을 도둑맞지 않으신 상태인 듯하여 사실은 내게 더 필요한 책이겠구나..(방해요소 나이대 평정심없음 등등..) 싶기도 하고요. 저자가 끝까지 읽게 용케(!) 잘 썼나보다 실없는 생각도 들고요ㅎㅎ 너무 좋은 리뷰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은하수 2024-01-08 20:30   좋아요 1 | URL
네~~~ 집중력과 관련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조사한 자료들이었구요 전문가 인터뷰, 논문, 임상 결과까지 다양한 사례제시도 돋보이는 부분인거 같아요. 일단 글을 잘쓰는 작가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어보셔도 좋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은오 2024-01-09 0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은하수님은 진짜 도둑들로부터 많이 떨어진 삶을 살고 계시네요. 제가 읽은 이 책 리뷰 중에 처음인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너무 멋지십니다🥹 은하수님의 하루 일상 넘 잔잔하고 좋아서 재밌게 구경했습니다 ㅋㅋㅋㅋ
저는 읽으면서 진짜 와... 내얘기다... 나 맨날 도둑맞고 있었구나... 충격의 연속 ㅋ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쿠팡 새벽배송 로켓배송이 안된다니!! ㅋㅋㅋㅋㅋ 아ㅠ 너무 슬픕니다 전 이제 쿠팡한테 길들여져서 배송 이틀 이상 못기다리겠어요ㅠ

은하수 2024-01-09 11:57   좋아요 1 | URL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어요.^^어떤걸 해도 책읽기보다 즐거운건 없으니까 다시 돌아오게 되더라구요~~
은오님과는 너무 다른 일상이죠? ㅎㅎ 이런 일상이 실감안나실 거 같아요. 근데 말씀하신대로 이런 잔잔한 일상에 이른 제 나이가 나쁘지 않네요. 최대한 즐기려 노력합니다~~
책 읽으며 저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는걸요. 한번쯤은 누구나 도둑 맞으며 살아가지 않을까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의 의지로 내가 칼자루 쥐는 나날도 이렇게 오기도 하구요~~~

제가 정말 새벽배송 시스템 너무너무 잘 이용하던 사람인데... 쓱, 쿠팡, 컬리 매체마다 맛있는 음식들이 다 다르잖아요. 그거 안되는게 젤 힘들었어요.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익숙해져야죠?ㅎㅎㅎㅎㅎㅎ
이렇게 또 살아지네요. 택배로요~~
 
마지막 섬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호밀밭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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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행동하는 양심 쥴피 리바넬리의 <마지막 섬>을 2024년의 첫 책으로 읽었다.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은 작품 속의 화자인 '소설가'가 말하길 '마지막 은신처,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자투리땅'이라고 표현하는 유토피아였다. 결국 오래가지 못했고 낙원과 같았던 섬은 디스토피아로 막을 내리고 말지만. 


처음에 작은 하나를 내어주었지만 그것이 점점 커져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권력의 탐욕스러운 칼날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처음엔 알지 못한다. 아무도 승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작은 것에 굴복했던 우리들, 독재자와 그에 동조했던 사람들 모두 결국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굴복해서 패배했다. 점차 수위를 높여가던 권력의 폭압이 얼마나 더 극에 달할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했기에 패배했다. 그 나무들이 잘려 나갔을 때, 그리고 구멍가게 아들이 얻어맞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냈어야 했다. 저항했어야 했다.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전 대통령이 시도했던 모든 것들을 너무나 순진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갈매기들은 저항했고, 타협하지 않았기에 승리했다." (286쪽)


     "인간은 저항한다는 정의를 망각한 것, 이기주의, 예측 부재, 외면, 독재에 굴복, 작은 것에 대한 탐닉과 같은 죄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 글은 우리 일상에서의 작은 굴복들이 만들어낸 작은 원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286쪽)   



1960년, 1980년 두 번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던 터키의 상황은 우리와 많이 닮아 있다. 친이슬람 정당의 집권과 군부의 통제는 이에 맞서고자 하는 터키 국민들의 저항을 강하게 억압했고, 저항 세력은 미약했다. 그 가운데서 쥴피 리바넬리는 독재에 저항하였다. 군 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하였고 해외로의 도피와 망명 시간도 길었다. 그의 경험들은 그의 여러 작품에도 투영되어 있고 <마지막 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군부 독재 정권 뿐만 아니라 친이슬람 독재 정권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억압적인 독재 정권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모든 결정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하여 결정이 내려졌다고 하지만 결국은 독재자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작품의 줄거리를 보면서 오늘 내가 오랜만에 영화관 가서 보고 온 영화 "서울의 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섬>을 읽다 보면 '전前 대통령'으로 표현되는 권력자의 모습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전前 전全대통령"이라는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 속 그 사람이 원하는 방향과 작품 속 '전 대통령'의 모습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작가는 우리가 익히 들어 왔던 '다수가 정의다 '라는 말의 당위성?을 부정하고, '민주주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수의 독재' 라는 말로 대답한다. 정말로 민주적인 권력이 되려면 다수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권력분립이 완벽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완벽한 권력분립이 과연 가능한가. 터키에서의 사정도 그렇지만 지금 우리의 상황을 봐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한 번 권력을 잡은 자는 그 권력에 중독이 되고 다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억압적인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고, 자신들이 주도한 '무력 선전' 방식으로 인해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되는 독재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마지막 섬>에서는 모두가 패하고 오로지 갈매기들만이 '저항했고, 타협하지 않았기에' 승리한 암울한 상황이 벌어진다. 작품에서 '소설가'는 말한다. "사실 어딘가에 악이 존재한다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조금씩의 책임이 있는 거야."(172쪽)라고. '소설가'의 이 말에 동의한다면, 우리에게 온갖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행하던 독재자들은 결국 우리가 방관하고 물러서고 타협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저항하는 것은 고귀한 것"이고 희생이 따르지만 저항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서서히 독재자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에게 처음부터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저항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한 갈매기들처럼!


<마지막 섬>은 독재자의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동조함으로써 모두가 패배하는 극단의 상황이 우리와 너무 닮아 있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마지막 섬'은 특정 국가에 한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무시하고 관심을 끊고 진저리를 치면서 감시를 게을리하는 사이에 수많은 진실들은 묻혀버릴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동조하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고 있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오늘도 나는 뉴스를 보며 핏대를 올린다. 쉽게 굴복하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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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개인적인>어디까지나 개인적인...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정리!
















임경선 작가 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무라카미 하루키 폐인적인 글이었다. 흠...^^
그런데 이유있는 폐인이라 생각해서 너무 재밌게 읽었다. 덕분에 하루키에 대해 쬐금 더 알게 되고 정리도 해보았고, 거기에 ˝인간적으로˝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하루키의 작품을 대충 따져봐도 10 권 이상 읽었지만 -하긴 누군들 안그럴까. 워낙 많은 책이 출간되어 있으니까 - 그렇다고 작가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특히 초기작들은 진짜 싫어하기도 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젊은 남자들의 s,s,s에 대한 집착적인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라고 말할 수 있다.
난 차라리 그 작품들보단 난해하게 읽히는 <기사단장 죽이기>,<1Q84>를 더 좋아한다?
아닌데... 좋아한다고 쓰려니까 좀 많이 망설여진다.
아무튼 썩 좋아하는 작가는 아닌데 그가 좋아하고 번역하는 미국 작가들도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남성 작가들이기까지 하다. 역시 내 취향은 아닌데 싶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그가 작가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한다는 면에서는 인간적인 공감을 표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고베 대지진(1995년)과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심층 인터뷰하였고 작가로서 충실히 정리하고자 하였다.
1996년 연초부터 사린 가스 피해자들의 달라진 삶에 대한 기록은 <언더 그라운드>로, 뒤이어 옴 진리교 신자들(사린가스 살포 사건을 일으킨 종교 집단이다)에 대한 인터뷰를 담은 <약속된 장소에서>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일본의 전쟁 책임 회피와 부인을 비난하고, 일본 사회 특유의 의무나 자기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싫어한다. 홍콩 민주화 시위 지지를 표명하고, 일본의 핵 산업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용감하게 드높여 말한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저는 해야 할 말이 있으며, 해야 할 말이 있을 때 저는 명료하게 말합니다. 그 시점에서 아무도 원자력 시설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제가 그 반대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67쪽)

임경선 작가가 작가로서 배우고 싶고 공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일 수 있지만 나는 작가가 아니고 독자라 그런지 오로지 작품으로만 그를 알았을 뿐이었다.
사실 난 작가들의 주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편이어서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쓰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활동을 하는지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오래 지속적으로 세세하게 안다는 것은 나로선 불가능하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임경선 작가가 선배 작가로서 좋아하고 따라가고 있다고 말하는 이면의 ‘사랑‘을 글로까지 쓴 것을 읽다 보니 나도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슬쩍 스며들고 싶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언급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전개일텐데, 나도 읽었던 작품들을 발견하니 반가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상실의 시대>로 읽었던 <노르웨이의 숲>,
애잔한 연애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그리고 왜 3권으로 끝이 난 건지 도통 이해할 수도 없고 그 열린 결말이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바보같이 계속 4권을 기다렸던 <1Q84>, 제목에 끌려 구입했던, 그러나 여자들이 떠나간 이유는 모른 채 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남자들의 이야기였던 <여자 없는 남자들>, 제목을 외울수 있을까 싶었고 읽고 나서 결말 부분에 어이없어했던 긴 제목을 가진 책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와 안보고 침, 아직 기억함^^)는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쉬지 않고 작품을 출간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원동력은 아마도 철저한 자기관리와 그의 한결같이 변함없는 인생관, 그리고 무라카미 요코(아내, 22살 학생때 결혼)에 있는거 아닐까 싶다. 30대부터 꾸준히 달리기를 해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라톤 대회에도 출전을 하였고 심지어 철인 3종에까지 도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글쓰기는 엄청난 지구력을 요하는 작업이고 건강해야 계속 글도 쓴다.
결혼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최고라는게 그의 생각이라는데...^^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상대가 결혼 상대로는 최고죠.˝라고 말하는 것도 멋지지만 그보다 더 현명하고 멋지단 생각이 들었던 건, 결혼 초부터 집안일을 아내와 동등하게 나눠했다는 것. 아내가 어느 날 사라진다 해도 자신의 인생을 꿋꿋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리 하는것이 너무도 당연하단다.
그의 아내 요코가 그렇다고 그냥 평범한 작가의 아내는 아니다. 가장 믿음직하고 든든한 편집자이기도 하다. 작품을 탈고하고 가장 먼저 아내가 읽게 하는 것은 불변의 법칙, 작품에 대해 토론한 후 통과해야만 편집자에게 넘어간다. 그러는 이유는 하루키가 아내의 공정함을 믿기 때문이란다. 남편의 소설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툭 던져버리는 스타일~~이라니 제일 무서울 거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의 삶의 태도에 관한 부분일 거 같다. 똑같은 걸 말해도 우리나라 사람과는 다른 일본인 특유의 언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언급한 하루키의 삶의 태도를 ‘소년다움‘이라고 했다. 
이 ‘소년다움‘이라는 말이 바람직한 삶의 태도임을 인정하는데 왠지 익숙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 ‘소년다움‘이란 말을 잠시 풀어보면...
‘일어나버린 일은 일어나버린 것이다‘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기본 태도는 고통의 ‘수용‘이라고 말한다. 일어난 일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고통을 기꺼이 품는다.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에서 빠져나온다.
옳은 답을 찾아 해결하기보다 깊은 생각과 고민을 통해 세상과 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
˝사람들은 대개 고통을 통해 배운다
그것도 무척 깊은 고통으로부터˝
(임경선 작가 인용, 하루키의 ‘고통론‘)
그에게 인생은 어차피 지는 게임이다. 언젠가는 죽을 것이므로. 자신이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찾아 방황하고 상처 입고 시간을 허비하는 고통의 삶을 살다 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삶의 태도가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차피 지는 게임이라면, 기왕이면 규칙을 지키면서 제대로 지는 것이 후회없는 삶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단 사는 이상,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함을 어김없이 깨닫는다.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닥쳐도 그것을 꾹 삼키고 헤쳐 나가는 ‘소년‘의 삶의 태도다.˝ (242~243쪽)

˝반듯하게˝ 살고자 애쓰는 작가의 여러 면모를 알게 되었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벽돌신간도 사놓고(그것도 굳이 주문해서 표지가 다른 동네서점본으로), 궁금해서 장바구니에 넣어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곧 나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올 것이다!
좋아하지 않아도 작품이 궁금할 수는 있지 않나?
난 작가를 좋아한단 말은 여간해선 못하겠더라는...! 궁금할 순 있지만.
어쨌든 오늘도 이렇게 모순적인 책읽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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