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지어라
안도 다다오 지음, 이규원 옮김, 김광현 감수 / 안그라픽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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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다다오[安藤忠雄]

 

일본 건축의 대중화를 이끈, 일본 3세대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1941~ ]는 여러 모로 유명하다. 일단 그의 이력이 특이하다. 프로복싱 선수 출신이라는 경력이나 고졸이라는 학력 모두 일반적인 건축가와 다르다. 거기에 그는 건축을 독학했다. 그렇기에 ‘빛과 콘크리트의 건축가’라는 이명(異名)을 지닌 세계적인 건축가로 우뚝 선 현재, 그의 삶은 밑바닥에서 정상에 오른 입지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첫 자서전,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보면 뭔가 건축가로 성공할 수 있는 비법 혹은 자신의 성공담이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군다나 이 책을 고희(古稀)를 앞둔 시점에 내놓았으니 그런 생각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부정한다.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다. 쓰러졌다 일어서기를 거듭해 온 이 무뚝뚝한 자전을 읽고 한국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인생에 용기를 가져준다면 좋겠다. [p. 5]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그림자

 

안도 다다오는 독학으로 건축을 배우는 과정에서 근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빛과 콘크리트의 건축가’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건축은 유리와 노출 콘크리트를 많이 사용하지만 ‘물’이나 ‘빛’ 같은 자연적 요소와의 융합을 꾀함으로써,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차갑지 않은 느낌을 받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콘크리트를 사용하되, 그 안의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을 배려하는 건축을 추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을 배려했다는 것과 인간이 생활하기 편리하다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예를 들어, 그의 처녀작인 ‘스미요시 나가야[住吉の長屋]’(1976)은 그가 일관적으로 추구하는 노출 콘크리트를 소재로 간결하고 독창적인 건축 공간에 자연을 끌어들이는 경향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는 내부 중앙에 하늘을 향해 개방된 중정(中庭)이 배치되어 있어 하늘과 바람, 빛이 자연스럽게 드나들어, 도시 안에서 자연을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게 설계되었다. 하지만, 그 대신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좁은 집의 1/3을 차지하는, 지붕 없는 중정(中庭)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면 서재에서 마루로 가는 동안 우산을 써야 하는 등 일상 생활에 있어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스미요시 나가야[住吉の長屋]

출처: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p. 89

 

건축 설계의 목적이란 합리적이고 경제성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쾌적한 건물을 짓는 것이다. 닫힌 실내에서 숨죽이고 사는 것과 다소 불편하더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연과 호흡 할 수 있는 생활 중에 어느 쪽이 더 ‘쾌적’할까. 이것을 결정 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다. 일상생활과 가치관의 문제까지 살펴서 궁리한다면 건축의 가능성은 더욱 넓어지며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p. 335] 

 

관점의 차이겠지만, 내가 살아가야 하는 생활공간이라면, 나는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안도 다다오의 ‘쾌적한 건물’보다 생활하기 편리한 건물을 선택할 것이다. 미술관, 박물관 같은 공공시설이나 교회, 성당, 절 같은 종교시설 같은 경우라면 몰라도 굳이 몸과 마음을 쉬는 공간인 생활공간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투쟁적인 건축가가 되기까지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일본사회에서 학연이나 혈연 등 아무런 배경 없이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맨바닥에 헤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연히 안도 다다오가 뭔가 시작해도 거의 대부분은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어쩌면 1%의 가능성도 사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성공했다. 그의 성공은 기성의 개념과 고정관념, 경제적인 제약 등 어려움을 감수하고도 도전을 멈추지 않은 결과다. 그래서 그를 ‘가장 투쟁적인 건축가’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이 자서전,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의 성공담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령 나의 이력에서 뭔가를 찾아낸다면, 아마 그것은 뛰어난 예술가적 자질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뭔가 있다면 가혹한 현실에 직면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남으려고 분투하는 타고난 완강함일 것이다.

자기 삶에서 '빛'을 구하고자 한다면 먼저 눈앞에 있는 힘겨운 현실이라는 '그늘'을 제대로 직시하고 그것을 뛰어 넘기 위해 용기 있게 전진할 일이다.

정보화가 발달하고 고도로 관리되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늘 볕이 드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

무엇이 인생의 행복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참된 행복은 적어도 빛 속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빛을 멀리 가늠하고 그것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몰입의 시간 속에 충실한 삶이 있다고 본다.

빛과 그늘. 이것이 건축 세계에서 40년을 살아오면서 체험으로 배운 나 나름의 인생관이다. [pp. 417~419]

 

 

노출 콘크리트가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처음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한 것은 가성비가 좋은 재료이자 공법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70년대 내가 노출 콘크리트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도 미학적 의도에서만은 아니었다. 벽 안팎을 단번에 마감할 수 있는 노출 콘크리트는 제한된 예산과 대지에서 최대한 커다란 공간을 확보하고 싶다는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비용도 저렴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p. 170]

 

하지만 안도 다다오는 노출 콘크리트에서 다른 의미를 찾았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은 공장에서 품질 관리를 할 수 없는 현장 작업’이기 때문에 조건 여하에 따라 마감의 질이 크게 달라진다는 난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재미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콘크리트라고 해도 르 코르뷔지에의 라투레트수도원 같은 강력하고 거친 표현도 있고, 칸의 킴벨미술관 같은 단정한 표현도 있다. 즉, 건축가의 생각을 표정으로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재료라는 것이다. [pp. 170~171]

 

그렇다고 그가 노출 콘크리트에만 집착한 것은 아니었다. 외국인들이 서양식 주택을 짓고 모여 살던, 고베의 주택가에 위치한 ‘로즈 가든’(1977)은 노출 콘크리트를 배제한 작품이다. 이 건축물은 다소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거리 보존과 주변과의 조화를 위해, 벽돌 벽과 합각지붕 디자인이라는 이진칸[異人館]1) 고유의 이미지를 계승하고 있다.

 

로즈 가든

출처: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p. 129

 

또한 안도 다다오는 도큐토요코선[東急東橫線]의 시부야역[谷驛](2008)에 지하 깊은 곳까지 빛과 바람이 들어오는 보이드(void2))를 ‘달걀’ 모양의 껍데기로 둘러싼 지중선(地中船)의 형태를 제안했다. 이 ‘달걀’에 덮인 원룸형 역사를 지하 공간의 채광, 통풍, 방습을 위해 설치된 통로 드라이 에어리어와 연결하고, 달걀’ 껍데기의 재료로 일반 콘크리트가 아니라 안에 빈 공간이 있는 GRC(Glass fiber Reinforced Concrete)를 채택하여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환기가 가능한 ‘자연 환기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런 점에서 환경파괴적인 노출 콘크리트가 대표하는 이미지와 달리 그가 환경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해왔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경제의 세기[20C]’에서 ‘환경의 세기[21C]’로의 전환을 고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도큐토요코선[東急東橫線]의 시부야역[谷驛]


출처: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p. 328

 

아마도 이런 모습 때문에 책 날개에

 

생각의 자유를 잃지 않는 열정을 청춘이라 한다면 그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의 방법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청춘을 살고 있다.

 

라고 얘기한 것 같다.

여전히 청춘인 안도 다다오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며 이만 그의 자서전을 덮어야겠다.

 

1) 이진칸[異人館]은 막말(幕末)부터 메이지[明治]시대에 걸쳐 일본으로 온 서양인이 살았던 서양풍의 집

2) 보이드(void)는 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비어 있는 공간 혹은 오픈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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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 - 정치교육의 새로운 방법을 찾다
박종성 지음 / 인간사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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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정치사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의 저자는 이 책을 쓴 목적을

 

이 책은 영화의 정치사상적 빈곤과 ‘혁명’의 무관심을 반증하려는 작은 시도다. 하지만 숱한 영화들 가운데 과연 몇이나 이 같은 관심을 기울였는지 경험적인 검색과 과학적 추적에 주력하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빈곤한 조건 속에서도 이를 무릅쓴 대표적인 작품들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오히려 부족함 속의 풍요와 덜함의 정치미학이 펼치는 영화의 지평을 누벼보려 한다. [p. 44]

 

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2장 전체주의: ‘선’과 ‘악’은 생각의 상태일 뿐, 경계는 없다’에서는 마가레테 폰 포르타의 <한나 아렌트>(2012)를, ‘3장 사회주의: 시(詩)로 쓰는 공산주의 전사(前史)’에서는 장-뤽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2010)을, ‘4장 원리주의: 폭력의 미학과 복수의 굴레’에서는 하디 하자이그의 <클린스킨>(2012)과 하니 이부-아싸드의 <천국을 향하여>(2005)를, ‘5장 자본주의: 거침없는 방종, 하염없는 불평등’에서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2012)를 다루고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저자가 정치영화로 내세운 5편의 영화 가운데 하나도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이들 영화를 보고 정치사상 혹은 이데올로기를 발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가선용 방법의 하나라는 점을 감안하면, 해당 영화에서 저자가 말하는 정치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떠올리는 것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사상과 PPL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간접광고, 즉 PPL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경우 여주인공 송혜교가 사용한 아모레퍼시픽의 립스틱[라네즈 두톤 립바]은 드라마에서 노출된 후 전달 대비 556%의 매출이 급증했고, 남주인공 송중기가 탔던 현대 자동차의 투싼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판매량이 18.5% 증가했다고 한다.1) 물론 드라마 <미생>처럼 현실성 있고 적절할 PPL은 상관없지만, 지나치게 노골적인 PPL은 <용팔이>, <여신강림>, <지리산>처럼 드라마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등 오히려 악영향을 끼친다.

 

정치사상도 마찬가지다. 과도하게 정치사상 혹은 이데올로기를 노출하면, 그것은 예술작품인 ‘영화’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위한 ‘선전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사상은 드라마나 영화에서의 PPL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사상은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습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이라는 제목은 외줄타기보다 더 어려운, 영화에서 정치사상을 다루는 일을 피하고자 하는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동시에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니까 그 안에 의미를 알아서 찾아보자는, 저자의 갈망이자 역설적 표현이 아닐까?

 

다만 아쉬운 것은 한국인이 쓴 책인데 한국영화가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 류승완의 <베테랑>(2015) 같은 작품에서도 자본주의의 거침없는 방종과 불평등을 엿볼 수 있을 듯 한데……. 영화관계자들에 대한 배려일까 아니면 한국 영화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일까 궁금하다.

 

만들 수 없어 못 만든 게 아니다. 만들기를 저어했고 보기를 망설였으며 다시 돌리기를 자제했던 터다. 하지만 일부러 안 만들었다는 저 편리한 핑계 속에 묻어나는 과거의 정치적 무능과 침묵으로 일관한 영화적 무관심을 늘 면책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제라도 차근히 제작방향을 세우고 촬영을 고민해야 할 진짜 이유다. [p. 224]

 

언젠가는 저자가 바라는 대로 정치사상과 영화의 예술성이 절묘하게 조합된 한국 영화가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리뷰는 도서출판 인간사랑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 노승욱/김기진, “ ‘태양의 후예’ PPL로 재미 본 상품들… 강모연 립스틱 5배 ↑ “대박이지 말입니다~” “, <매경이코노미> 제1853호(2016.04.1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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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자본이 만든 메트로폴리스 1830-1871 현대의 고전 13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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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는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2003)는 1830년부터 1871년까지의 파리의 근대적 도시화 과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온전히 새로 쓰여진 글은 아니다.

 

2부에 나오는 파리 연구는 <의식과 도시 경험>에 실린 논문을 개정하고 확장한 것이다. 종결부인 ‘사크레쾨르 바실리카의 건설’은 원문에서 약간 개정되었다. 발자크의 연구는 <코스모폴리스의 지리학>(2002)과 <도시의 잔상>(2002)에 각각 실렸던 것을 개정하고 확장했다. 2장과 이 서문은 새로 쓴 것이다. [p. 42]

 

즉, 18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2부 형체를 갖다: 파리 1848~1870’[3장~17장]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방법론으로 도시문제를 분석한 <의식과 도시 경험(Consciousness and the Urban Experience)>(1985)에 실린 주요 논문을 개정, 증보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의식과 도시 경험>의 개정증보판이라고도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의식과 도시 경험>과는 달리 이 책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영향력이 짙게 배여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와 <의식과 도시 경험>은 비슷하지만 다른 책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파리 개조 사업’이라는 창조적 파괴 행위

 

저자는 서문에서 ‘근대가 그 이전과 근본적으로 단절된 시대라고 보는 것이 허구적인 신화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신화를 조장한 것이 파리 개조 사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Baron Georges-Eugene Haussmann, 1809~1891, 이하 ‘오스만 남작’)과 그가 남긴 <회고록>이라고 말한다.

왜 오스만 남작은 그런 허구의, ‘근대 신화’를 만들고 배포했을까?

 

그는 근본적인 단절이라는 신화, 오늘까지도 살아남은 이 신화로 자신과 황제를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예전에 시행된 것들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루이 나폴레옹은 어떤 면으로도 이제 막 지나간 과거의 사고방식이나 관례에 얽매여 있지 않음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이 부정은 그 이중의 의무를 달성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건국신화를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이 베푸는 자비로운 전제주의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판단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p. 22]

 

사실 파리 개조 사업 전후를 비교해보면, 오스만 남작이 과거와 단절된 근대를 얘기하는 것도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는 파리의 시가지를 깔끔하게 정비하여 도시 위생을 향상시켰고, 상수도 설비를 완전히 갈아엎어 새로 만들었으며, 도시에 대규모 공원과 광장을 조성했다. 이때의 도시계획으로 파리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파리의 개조 계획이 오스만 남작의 파리 지사 임명 이전에 이미 세워져 있고,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은 존재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오스만 남작이 파리의 도시계획에 기여한 정도를 평가절하하는 것도 아니다. 파리 개조 계획 자체는 오스만 남작이 시작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오스만 남작에 의해 ‘파리’라는 도시가 강제로 ‘근대’로 몰아 넣어졌다고 본다. 이는 파리 개조 계획이 자본주의가 새로운 부를 창조하기 위해 그에 어울리는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기존의 경제질서를 파괴, 재편하는 ‘창조적 파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스만 남작이 시행한 일련의 도시 개편 작업의 결과 파리의 근교화가 촉진되었고, 그에 따라 공장 지대와 노동자 거주 지역, 부유층 주거지가 격리되었으며, 그들 간의 의식적 단절은 극단적으로 심화되었다. ‘코뮌(Commune)’, 즉 파리 코뮌은 그 극단적인 단절이 낳은 결과물이다.

 

코뮌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이해 범위를 벗어난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제2제정 파리의 변형 과정과 그 영향에 뿌리가 있었다. [p. 539]

 

코뮌은 유일하고, 독특하고, 극적인 사건이었고, 아마 자본주의 도시의 역사에서 이런 종류로서는 가장 특별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 불씨에 불을 붙인 것은 전쟁, 프로이센에 포위되었다는 절망감과 패배의 굴욕감이었다. 하지만 코뮌의 원재료는 이 도시의 역사적 지형이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되는 느린 리듬에 맞추어 이미 한데 모여 있었다. [p. 542]

 

 

사실주의 예술가라는 렌즈

 

저자는 파리 개조 계획을 전후한 ‘파리’라는 도시의 구체적 상황들을 설명하고 분석하기 위해 사실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구체적으로는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테> 등 ‘인간 희극’ 시리즈를 기획한 오노래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 이하 ‘발자크’), 프랑스어로 쓰인 최초의 위대한 모더니즘 소설이라는 <보바리 부인>을 쓴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 루이 필리프 1세(재위 1830~1848)의 세금정책을 풍자한 <가르강튀아(Gargantua)>(1831)나 고된 하루를 보내고 삼등열차에 오른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삼등열차>(1862) 화가이자 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 등을 들 수 있다.

 

오노레 도미에의 풍자화 <가르강튀아>

출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p. 117

 

이들 사실주의 예술가들이 본 파리는 오스만 남작이 개조하려고 했던 그 낡은 ‘파리’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이 무렵 진행되고 있던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인간형과 그들을 지배하는 ‘파리’라는 도시의 위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작품에서 ‘파리’라는 도시는 또 하나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사실주의 소설가인 발자크는 <인간 희극> 시리즈에서

 

대개 시골 출신들이 파리 생활에 적응해가는 통과의례의 장면을 묘사하는데, 상인이든 야심 찬 젊은 귀족이든, 아니면 연줄이 좋은 여자든 상관없다. 일단 적응하고 나면 그들은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는다. 설령 자신들이 파리에서 겪은 실패 때문에 결국 파멸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지방 출신이라는 것, 지방의 권력에 대한 격렬한 부정은 이렇게 발전하여 파리 생활의 창립 신화 가운데 하나가 된다. 즉 파리는 독자적인 실체이며, 어떤 면으로든 그것이 그렇게 경멸하는 지방 세계에 의존하지 안는다는 신화다. [p. 61]

 

 

공간과 기억, 근대를 만들다

 

역사지리학자인 저자는 발자크의 소설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공간적 유형을 분석한다. ‘공간은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상류계급과 귀족은 자기들만의 중심을 가지고 있고, 평민들도 언제나 자기만의 특별한 구역을 갖고 있다.

 

도시 자체가 그 주민들의 집합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억이 그렇듯이 그것도 대상과 장소에 결합되어 있다. 도시는 집합적 기억의 장소다. 그렇다면 장소와 주민 사이의 이 같은 관계는 건축학적으로나 지형적으로 도시의 지배적 이미지가 되고, 어떤 물건이 기억의 일부가 되듯이 새로운 기억이 솟아난다. 이렇게 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도시의 역사에는 엄청나게 많은 상념이 흘러가며 도시에 형태를 부여한다. [pp. 103~104]

 

발자크는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공간이 어떻게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지 보여준다.

 

그의 인물들은 심지어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이사하면 성격이 바뀌기까지 한다. [p. 79]

 

이런 공간의 변화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영향 가운데 하나다. 왜냐하면 오스만 남작의 계획에 따라 건설된 대로변과 그 뒷길 사이의 토지 가격의 격차와 그로 인한 임대료 수준의 격차, 중심부에서 변두리로 갈수록 점증적으로 낮아지는 임대료로 인해 파리의 여러 지역은 서로 다른 직업적,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즉, 노동자와 자본가 등의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격리되고 그들간에 의식적 무의식적 단절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가 루아예는 19세기 파리의 설계와 건설 관례를 자세하게 재구성하면서, 당시 준수되던 원칙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본주의가 건축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기획 규모의 변화였다.” [p. 26]

 

공간에 이어 이야기 되는 것은 ‘기억’이다. 발자크는 ‘희망은 욕구하는 기억[99’이라고 했는데, 기억과 욕구의 이러한 결합은 근대성의 신화가 어떻게 그처럼 강력한 힘으로 유통되는 지 보여준다. 나아가 발자크는 공간과 기억이 결합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지를 <인간 희곡> 시리즈를 통해 드러낸다.

 

발자크는 <인간 희극> 전체를 관통하여 이 연관성을 끈질기게 다루었다. 그는 도시의 역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상념의 흐름에 뭔가를 추가하고 보완한다. 그는 도시를 기억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집합적 기억을 위한 특별한 장소를 상상 속에 구축한다. 이것은 혁명의 순간이 오면 “번뜩이는” 어떤 정치적 감수성의 근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작동중인 도시를 근거로 한 혁명적 변형으로서의 근대성의 신화다. 기억이 1830년에 “번뜩여” 혁명적 감수성을 이어 붙이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고, 1848년과 1871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혁명적 순간들이 전통에 호소하는 바람에 짐이 더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미래를 향해 열릴지도 모르는, 완전히 다른 길로 나아가는 급격한 단절을 추구하는 강렬한 근대적 면모도 있었다. 그러므로 희망이 기억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연결된 기억이 희망을 발생시킨다. [p. 104]

 

 

사크레쾨르 성당, 핏자국을 눈으로 덮으려는 시도

 

사크레쾨르 바실리카가 아름답거나 우아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이 충격적이고 눈에 확 들어온다는 점, 스타일이 특이하고 유별나서, 그 발밑에 펼쳐진 도시로부터 존경을 요구하는 일종의 거만하거고 장엄한 분위기를 빚어낸다는 점도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중략 ~

그리하여 사크레쾨르는 성스러운 장엄함의 이미지, 영원한 기억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의 기억인가? [p. 548]

 

1871년 파리 코뮌이 성립될 당시 군중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던 정부군의 르콩드 장군과 1848년 6월 혁명기간에 잔혹한 학살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토마 장군이 군중들에 의해 총살되고, 32살의 코뮌의 지도자 외젠 발랭이 군중에게 모욕받으며 몽마르트르 언덕길 주위를 끌려다니다가 총살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 사크레쾨르 바실리카는 세워졌고, 그 내부에 그려진 반구형의 천장화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의 승리[Le Triomphe du Sacre-Cœur de Jesus] 아래에는 흔히 프랑스는 회개하노라[GALLIA POENITENS]”로 알려진 “SACRATISSIMO CORDI JESU GALLIA POENITENS ET DEVOTA ET GRATIA”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파리 코뮌 당시 좌우익의 희생자를 기념하는, 순결한 영묘(靈廟)처럼 생긴 이 바실리카 혹은 대성당에는 무엇이 묻혀 있는 것일까?

 

1789년의 정신인가? 프랑스의 죄악이 묻혀 있는가? 비타협적인 가톨릭주의와 반동적 군주제의 동맹인가? 르콩드와 클레망 토마 같은 순교자의 피? 아니면 외젠 발랭과 그와 함께 무자비하게 도살된 2만 명 이상의 코뮌 가담자들의 피인가? [p. 598]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잔혹한 전쟁터에 내린 눈처럼, 이 바실리카는 그 모든 것을 묻어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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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 제3권 독립과 냉전의 시대 - 믿고 보는 신일용의 인문교양 만화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3
신일용 지음 / 밥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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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親美)에서 반미(反美)로, 호치민[胡志明]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호치민[胡志明, 1890~1969]는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그는 이념보다 민족을 앞세운 독립운동가였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제2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1935)처럼 좌파 민족주의자 혹은 민족적 사회주의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는 서술되지 않았지만, 호치민은 젊은 시절 파리에서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Eugene Choi)의 실제 인물이라는 황기환(黃玘煥, EARL K. WHANG, 1886~1923),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된 대한국민의회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윤해(尹海, 1888~?) 등과 만나 교류했으며,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 활동했다고 한다.1) 그래서인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부분의 동남아 지도자2)들은 일본에 협력했지만, 호치민은 이와 반대로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심지어 CIA의 전신(前身)인 OSS와 협력관계에 있을 정도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볼 때, 미국이 베트남의 독립을 용인하고 지원했다면, 호치민의 베트남은 친미(親美)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프랑스의 베트남 재점령에 부정적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F.D.Roosevelt, 1882~1945)가 1945년 4월에 급사한 후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는 반공(反共)으로 흘렀다. 당연히 ‘공산주의자’ 호치민은 미국의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越南獨立同盟會]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협상조차 반대하는 매파가 득세했다. 결국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생했고, 1954년 디엔비엔푸[奠邊府]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여 프랑스의 식민지라는 선택지는 사라졌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마무리하는 제네바 합의에는 “2년 내에 국제사회 감시하에 선거를 치뤄 통일정권을 세우도록 해주겠소”[p. 40]라는 조항이 있었다. 이때 중국에 이어 베트남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는 ‘도미노 현상’을 막기 위해 미국이 선택한 것은 저명한 반공(反共) 반(反)프랑스 민족주의자 응오딘디엠[吳廷琰, 1901~1963]이다. 가톨릭을 믿는, 지주 출신의 정통 엘리트였던 그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비판에 민감했다. 여기에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던 응오딘디엠은 정권을 잡자마자 반공(反共)을 내걸고 날뛰는 사조직, 즉 메콩델타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가톨릭 교리를 흉내 낸 종교 단체 ‘카오다이[高臺]’와 사이공 인근의 촐론에서 공권력 노릇을 하는 깡패 조직인 ‘빈슈옌[平川]’을 군대를 보내 소탕3)했다. 그 결과 이들의 잔존세력은 우리에게 ‘베트콩’으로 알려진 인민해방전선(NLF)으로 귀순했다.

응오딘디엠 본인은 당시 동남아 지도자 가운데 드물게 부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베트남 공화국은 부패하고 무능했다. 게다가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가지고 그를 따르는 북부 출신의 반공주의자를 우대하면서, 노골적으로 친(親)가톨릭 반(反)불교 정책을 펼쳐 그를 선택한 미국조차 그에 대한 기대를 버리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의 뒤를 이은 정치군인들이 응오딘디엠 만도 못했다는 것이다.

 

 

시하누크의 외줄타기, 킬링필드의 비극을 빚다

 

비시 프랑스 정부가 선택한 캄보디아의 왕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1922~2012, 이하 ‘시하누크’)는 뛰어난 외교능력으로 1949년 프랑스 연합의 반(半)독립국이 되고, 태국으로부터 시엠립과 바탐방도 다시 찾아왔다. 나아가 1953년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독립도 했다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그는 미국과 소련 양쪽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원을 받는 등거리 중립외교를 펼쳤다. 문제는 시하누크가 말했듯이 약소국이 중립외교를 할 때는 어느 한 쪽에 기울어지면 안 되는데, 베트남 전쟁(1955~1975)이 진행 중인 1963년에 시하누크는 남베트남과 단교를 선언하고, 1965년에는 미국과도 단교를 선언했다. 이렇게 한쪽으로 기울어지자 시하누크에게 선택권이 사라졌고, 어쩔 수 없이 베트남의 병참수송로[호치민 루트] 역할을 떠 맡아야 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우파 민족주의자였던 총리 론 놀(Lon Nol, 1913~1985)은 쿠데타를 통해 ‘크메르 공화국’이라는 친미 정부를 세우고 베트남인 말살정책을 펼쳤다.  권좌(權座)에서 쫓겨난 시하누크는 극좌파인 폴 포트(Pol Pot, 1925~1998)의 크메르 루즈와 협력, 부패한 론 놀 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 캄푸치아 공화국’을 세웠다. 이 정권의 실질적인 리더는 폴 포트로, 그가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을 벤치마킹한 결과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것이 영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1984)로 널리 알려진 그 학살이다. 이 과정에서 침공을 당한 베트남은 반격에 나서 크메르 루즈를 쫓아내고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을 세웠다. 베트남군의 철수 후 시하누크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수상 출신 훈 센(Hun Sen, 1952~ )이 권력을 나눠가졌다. 하지만 이 기형적인 정치체제는 1997년 훈 센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1인 독재로 다시 회귀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말라야 정권이냐 말레이 정권이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은 연방말레이주(FMS)에 속하는 4개 주와 비연방말레이주(UMS)에 속하는 5개의 주, 해협식민지인 페낭과 믈라카를 합쳐 말라야 연방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수용되어 독립하는 과정에서 말레이인을 위한 정권인 ‘말레이 정권’이냐 말라야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정권인 ‘말라야 정권’이냐 논의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말레이시아 건국의 아버지로 꼽히는 초대 수상 툰쿠 압돌 라만(Tunku Abdul Rahman, 1903~1990)을 중심으로 하는 UMNO(United Malays National Orgaization)는 영국과 타협, 말라야 정권을 표방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해협 중국인계 MCA(Malayan Chinese Association)와 연립정권, 중국계 및 인도계의 참정권 자격의 거주기간 제한 단축 등의 혜택과 다른 종교도 허용하나 이슬람 교도를 타 종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금지하고 말레이인에게 경제적 특혜를 부여하는 부미푸트라 정책을 시행했다. 독립 당시 말레이인이 과반수가 아니었고[말레이인 230만, 중국인 200만, 인도인 54만], 중국계가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비주류인 인도계 출신의 4대 수상 마하티르 모하맛(Mahathir Mohamad, 1925~ )도 장기간 집권하면서 대형 사업에서 말레이인의 지분을 늘리는 등 부미푸트라 정책을 강화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배우자는 Look East 정책을 펼쳐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부미푸트라 정책의 지속은 인종차별적인 말레이시아를 만들었고, 차별에 반발한 중국계 우수인력의 해외유출도 이루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특이한 것은 동남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군부 쿠데타가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테러는 군대가 아닌 경찰의 문제라고 본 말레이시아 지도부의 입장이 작용했다. 그래서 중국인 중심으로 조직된 말라야 공산당(MCP)이 친펭[陳平, 1924~2013]의 지도 하에 무장투쟁을 전개했지만, 정부는 범죄자들의 테러라면서 끝까지 경찰로만 대응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군부에게 권력의 지분을 주장할 명분을 주지 않았기에 이후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니 않은 유일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p. 163]고 한다.

 

 

미국의 판단,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독립을 지원하다.

 

일본에 협조하고 있던 수카르노(Soekarno, 1901~1970)와 모하맛 하타(Mohammad Hatta, 1902~1980, 이하 ‘하타’)는 종전이 가까워지자, 해군소장 및 자카르타 주재무관으로 근무 중이던 마에다 타다시(前田精, 1898~1977, 이하 ‘마에다’)의 지원을 받아 독립선언 준비를 했다는 얘기가 있다. 1945년 8월 17일의 인도네시아 독립선언이 마에다의 관저에서 이루어지고, 1976년에 마에다에게 인도네시아 국가 및 국민에게 주어지는 최고영예인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된 점을 감안하면 그럴 듯하다.

 

어쨌든 수카르노와 하타가 독립선언을 했으나 젊은 과격파가 득세하여 인도스(네덜란드 혼혈)이나 중국계를 대상으로 하는 사적 보복으로 혼란이 지속됐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독립지도자들의 친일부역 전과와 공산주의 의혹을 제기하며 복귀를 서둘렀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1949)]. 이때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수카르노가 이끄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반기를 들고 마디운(Madiun)에서 정권을 세웠다. 수카르노는 이들과 타협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덕분에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는 패배했으나 무난히 독립할 수 있었다.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미국을 도와 일본과 싸웠다. 하지만 미국은 그를 민족주의자라기보다 공산주의자로 판단하였다. 반면에 수카르노는 일본에 부역한 전력이 있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로 판단하였다. 이 차이로 베트남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도 미국과 7년의 가혹한 전쟁을 치뤄야 했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에 패하고도 미국이 지지한 덕에 온전한 신생독립국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p. 238]

 

독립은 했지만 다양한 종교를 믿는 수많은 인종과 언어로 갈라진 군도(群島)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에 수카르노는 사실상 독재인 교도(敎導) 민주주의를 제창했고,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하타는 이에 반발해서 사임했다. 점차 독재자로 변하면서 수카르노는 많은 지지를 받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을 통해 군부를 견제했다. 이는 반미(反美)정책을 통한 지지자 결집을 가져왔지만, 미국의 불안도 증가시켰다. 여기에 좌우로 쪼개진 군부를 통해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하지 모하마드 수하르토(Haji Mohammad Soeharto, 1921~2008)에게 진압됐다.

 

 

싱가폴, 사형제도가 있는 디즈니랜드

 

해협중국인 출신의 리콴유[李光耀, 1923~2015]는 이주중국인 출신의 림친시옹[林淸祥, 1933~1996]등 정적들을 제거하고 말레이시아의 싱가폴주(州)를 만들었다. 하지만 2년 만에 싱가폴은 말레이시아로부터 퇴출되어 강제적으로 독립되었다. 여기서 리콴유는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조그만 섬인 싱가폴의 위기의식을 자극해서 극단적인 공익우선과 실용주의를 실천하는 싱가폴을 기획, 연출했다.

구체적으로 1969년 노조의 파업권 등을 노조 활동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강성노조를 무력화시키고,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을 통해 상급학교 진학여부 등이 결정되게 만들었다. 또한 공무원 보수를 민간기업보다 높여 충분한 보상을 하되, 부패행위가 적발되면 파멸적 징계[파면, 가혹한 형량 선고, 벌금, 신문1면에 대문짝만 하게 사진을 실어 사회적으로 사망 선고 등]를 하여 싱가폴을 부패 없는 풍요로운 도시로 만들었다.

 

이렇게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이야기 3>에서는 동남아 각국의 독립과정과 베트남[호치민, 응오딘디엠], 캄보디아[시하누크, 론 놀, 폴 포트, 훈 센], 말레이시아[마하티르 모하맛], 인도네시아 [수하르노, 수카르노], 싱가폴[리콴유] 등 각국의 독재자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동남아 각국의 리더와 국민들의 선택 하나하나가 모여 그들의 오늘을 만든 것이라는 점을 만화를 통해 가볍게 보여주는 셈이다. 하지만 영웅이 될 수도 있던 동남아 리더들이 독재자로 전락(轉落)하는 모습들은 왠지 씁쓸했다.

 

1) 김용래, “호찌민 감시 佛 경찰문건 대거발굴… 한국 임시정부 활약상 생생”, <연합뉴스> 2018.09.30 (https://www.yna.co.kr/view/AKR20180929039500081)

2)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Achmed Sukarno, 1901~1970)는 일본군의 점령에 협력하고 일본군의 묵인을 얻어 독립을 선언했다. 타이의 피분송크람(Luang Phibun Songkhram, 1897~1964)는 일본과 방위동맹을 체결(1942)하고 일본과 협력하여 참전했다. 미얀마의 아웅 산(Aung San, 1915~1947)은 일본의 원조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로 침입하였다.

3) 빈슈옌과의 전투과정에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인 찐민테[程明世, 1920~1955]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미국이 가지고 있던 ‘응오딘디엠’의 대안이 사라졌다. 또한 응오딘디엠에 협조적이었던, 그가 속해있던 반(反)베트민[越盟] 조직은 유력한 지도자를 잃었고, 그의 부하들은 해산되어 흩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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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로 만나는 서양철학 - 지금 우리에게 서양철학은 무엇일까?
박병기.강수정 지음 / 인간사랑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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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이해의 난해함

 

전공자가 아닌 보통 사람에게 ‘철학’은 난해한 학문이다. 교과서에 쓰여진 것처럼 성리학(性理學)하면 ‘이기론(理氣論)’, 양명학(陽明學)하면 ‘지행합일(知行合一)’ 같은 방식으로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교적 유사한 풍토에서 나와 오랜 시간 한국인의 사고에 맞게 현지화한 유교철학과 불교철학만 해도 그런데 아예 전혀 다른 풍토에서 태어난 서양 철학의 경우에는 더욱 난해할 것이다.

이런 서양철학을 저자들은 선(禪)불교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붙들고 있는 물음, 즉 ‘화두(話頭)’의 형식을 빌려 소개하고 있다. 마치 불교가 중국에 전래 되던 초기에 불교 교리를 노장(老莊)사상 등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던 것[격의(格義)]처럼.

 

이 책, <화두로 만나는 서양철학>은 행복, 환상, 운명, 쾌락, 자기보존, 감정, 실존적 삶, 일상 속의 철학이라는 8개의 화두(話頭)를 매개로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데카르트, 스토아 철학, 에피쿠로스, 벤담, J.S.밀, 스피노자, 홉스, 흄, 칸트, 니체, 사르트르, 싱어, 롤스, 하버마스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8개의 화두(話頭), 17개의 답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에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진정한 자아(自我)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끝내 물에 빠져 죽는다. 이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진짜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트리나 폴러스의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는 행복을 찾아가는 세 가지 모습을 통해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트리나 폴러스(Trina Paulus)의 책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주인공인 호랑 애벌레는 행복을 찾아가는 세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노랑 애벌레와 풀밭에서 먹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 치열한 경쟁과 속도의 덩어리인 애벌레 기둥을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삶, 그리고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잠재된 참모습을 끌어내 나비가 되는 삶,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p. 39]

 

 

우리가 생각하는 환상 혹은 판타지와는 다소 다르지만 빨간 약을 먹고 진짜 세계를 알게 되는 영화 <매트릭스>와 지혜의 힘으로 무지의 사슬을 끊고 현실이라는 동굴 밖을 나가 이데아의 세계를 기억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다르지만 닮았다.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지금 있는 곳이 현실 세계인가에 대해 자문해야 하는 영화<인셉션>은 진리를 찾기 위해 끝없이 의심한 끝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남긴 데카르트와 연결된다. 이런 영화들을 보고 나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아니면 진짜 세계라고 믿는 환상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마도 이를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 타블로 사건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운명론이며 결정론인 스토아 철학을 얘기하는 자들에 있어 인간은 신(神)이라는 감독이 써놓은 시나리오에 따라 맡은 바 배역을 소화해야 할 연극배우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삶은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고정시켜놓고 팔을 휘둘러 발버둥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드라마 <도깨비>는 운명을 반대로 얘기한다.

 

신은 여전히 듣고 있지 않으니.

투덜대기에

기억을 지운 신의 뜻이 있겠지.

넘겨짚기에

 

늘 듣고 있었다.

죽음을 탄원하기에 기회도 줬다.

 

기억을 지운 적 없다.

스스로 기억을 지운 선택을 했을 뿐

 

그럼에도 신의 계획 같기도, 실수 같기도 한가?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pp. 93~94]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운명이라는 화두와 함께 소개되고 있지만, 오히려 쾌락에 대해 논의하는 파트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에피쿠르스’라고 하면 흔히 ‘쾌락주의자’ 혹은 ‘쾌락주의 철학자’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쾌락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처럼 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다.

 

에피쿠르스는 쾌락주의자이자만 적극적인 쾌락의 추구보다는 고통을 제거함으로써 평정심에 이르는 소극적인 쾌락을 강조하는 사상가이다. 그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조차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p. 109]

 

오히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불교의 교리와도 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월포드는 설국열차 안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5살 이하의 몸집이 작은 아이를 엔진의 부품으로 사용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에 따르면 이는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영화를 보지 않아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이 선발되고 희생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양심의 가책 없이 그 아이들에게 다수 혹은 공동체의 행복(=쾌락과 안전)을 위해 너희의 삶을 바치라고 할 수 있을까?

 

 

홉스는 국가가 만들어지기 전의 ‘자연상태’의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당할 수 있는 평등하면서도 취약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자연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불리는 폭력사태가 일상화된다고 주장한다. 월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에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아포칼립스는 바로 이런 ‘자연상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리를 일부 포기하더라도 사회의 규율과 통솔에 대해 최소한의 합의[자연법]을 따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육체가 사라져도 ‘기억’ 등을 통해 가족, 친구, 동료 등에게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개체가 아닌 종족으로서의 ‘자기 보존’을 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태아(胎兒) 생산과 세뇌 등을 통해 미래가 결정되는 신세계를 거부하는 존은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후예이자 역설적으로 자기 보존을 위한 또 다른 선택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감정을 다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주인공 라일리의 감정 캐릭터 중 기쁨과 슬픔이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이탈했다가 복귀하는 내용이다. 감정 입장에서 인간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을 통해 사회적 차원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고, 이러한 공감이 인간의 도덕성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원리라는 흄의 철학과도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드라마 <비밀의 숲>의 주인공인 황시목 검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이성(理性)에만 충실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이익이나 평판에도, 동료나 선후배 간의 인간 관계에도, 금전적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밥 한끼에서 시작된 균열에서 무너진 강직했던 선배 검사 이창준과 달리. 어쩌면 그래서 저자들은 감정 따위를 초월한 선(善)의지, 이성적 준칙에 의한 도덕적 결단만이 인간 본연의 의무를 완성한다고 주장하는 칸트와 이 드라마를 연결시킨 것이 아닐까?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가 시민사회에 적응하려는 ‘인간’과 복잡하면서도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자유를 구가하는 ‘이리’를 대비시켰다면, 서미싯 몸의 <달과 6펜스>에서 ‘달’은 화가의 이상을, ‘6펜스’는 절망적인 현실을 대비시킨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 인간의 실존 혹은 실존적 삶을 논의할 그 무엇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와 사르트르를 거론한 것이 아닐까?

 

 

철학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고 사변적(思辨的)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도 철학이 가능하다. 여기서 공리주의(功利主義)와 연결되는 두 철학자 피터 싱어와 롤스가 거론된다.

피터 싱어는 영화 <옥자>에 등장하는 공장식 축산으로 대표되는 동물에 대한 착취와 학대에 대한 비판을 담은 <동물해방>을 통해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실천 윤리를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채식주의 등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고 있다. 반면에 공리주의적 정의론의 약점을 지적한 롤스는 공정한 조건에서 가상적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의가 도출되었다면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제시한 셈이다. 이는 프랑스 사회당이 그의 차등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분배 정책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했던 것으로, 이런 점에서 그를 현실적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이런 방식으로 8개의 화두(話頭)를 매개로 17명의 서양 철학자들의 주요 학설을 소개한다. 다만 그렇다 보니 8개의 화두와 그 화두에 이어지는 철학자들의 사상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도 있다. 다시 말하면, 화두에 자의적(恣意的)으로 철학자들의 사상을 끼워 맞춰, 서로 따로 노는 듯해서 아쉬운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철학자들의 사상을 대학입시를 대비한 수험서를 읽듯이 가능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각각의 챕터 끝에 해당 철학자들의 생애와 핵심 성과에 대해 요약한 부록이 곁들여져 있어 서양철학 혹은 서양철학사에 대해 입문하는 이라면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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