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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개정판
유진 로건 지음, 이은정 옮김 / 까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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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아랍’이지?

 

‘아랍’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오를까? 대체로 ‘이슬람’이라는 종교나 ‘중동(中東)’이라는 지역이 떠오를 것이다. <역사서설(歷史序說, Muqaddimah)>로 유명한 역사철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은 아랍을 오아시스 주변에서 간단한 농사를 하며 정착한 무리를 포함한 유목민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아랍’을 ‘사막의 거주민’이라는 베두인(Bedouin)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로 이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보는 ‘아랍’은 조금 다르다.

 

이슬람 초기 아랍인은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 중에서 언어(아랍어)와 종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다수가 수니 이슬람을 믿는 공통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p. 19]

 

어쨌든, 중동(中東) 지역에 위치하지만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튀르키에나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이란은 아랍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공식적으로 여전히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하지 않고, ‘레바논 내전(1975~1990)’ 이전에는 기독교 국가에 가까웠던 레바논의 존재도 ‘아랍’을 ‘이슬람’이나 ‘중동(中東)’과 동일시할 수 없게 한다.

 

 

유진 로건의 [아랍]은

 

이 책은 아랍의 근대와 현대를 다루고 있는 역사책이다.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1장부터 제3장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와 함께 시작된 아랍의 근대사를, 제4장부터 제8장까지는 영토와 영향력을 잃어가는 오스만 제국의 발버둥을, 제9장부터는 제14장까지는 1948년 아랍인의 땅에 유대 국가가 건국된 이후 아랍 국가들의 모습을, 개정판을 내면서 추가된 제15장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현재를 각각 그리고 있다.

 

 

아랍의 근대화

 

이 책 <아랍>은 오스만 제국의 9대 술탄 셀림 1세(재위 1512~1520)가 거느린 소총으로 무장한 최신의 화약 보병부대와 맘루크 왕조의 49대 술탄 칸수 알 가우리(재위 1501~1516)가 거느린 개개인의 무력에 치중한 기병이 충돌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오스만의 맘루크 제국의 정복은 아랍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맘루크 검객과 오스만 소총수의 운명적인 무력 충돌은 아랍 세계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또한 오스만의 정복은 이슬람 등장 이후 처음으로 아랍 세계가 비(非)아랍인이 세운 수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 중략 ~

하지만 1517년부터는 아랍 지역 밖의 수도들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아랍인의 사회적 지위가 협의되었고, 이와 같은 정치적 현실은 근대 아랍 역사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p. 34]

 

쉽게 맘루크 왕조의 멸망을 아랍 근대의 시작이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시대구분(時代區分)은 사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적용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근대(近代, Modern)’라고 하면, 흔히 시민사회의 성립과 자본주의의 형성을 떠올리는데, 이 기준으로 보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그 상징이 된다. 하지만 ‘나’라고 하는 개인의식의 성립을 기준으로 한다면 르네상스 시기까지 소급할 수 있다. 그래서 ‘근대(近代, Modern)’를 르네상스부터의 ‘Early Modern’과 프랑스 혁명부터의 ‘Late Modern’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도 이 기준을 적용해서 ‘Modern’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총, 칼 같은 냉병기(冷兵器)에서 소총과 같은 화약무기로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는 아랍의 근대가 유럽의 근대와 다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랍의 근대는 어떤 것일까?

 

맘루크 제국을 정복한 후 2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남부까지 성공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랍 지역에서 정치체제를 표준화할 생각이 없었던 또는 표준화 할 수 없었던 오스만은 많은 경우 지역 엘리트들과 협력을 통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각각의 아랍 지역들은 이스탄불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으면 각양각색의 행정 구조를 만들어냈지만, 그들 모두는 분명히 하나의 제국의 일부였다.

~ 중략 ~

그러나 중앙과 아랍 주변부 간의 역학관계가 18세기 후반에 달라졌다. 새롭게 등장한 지역 통치자가 세력을 규합하여, 종종 오스만 제국의 유럽 적국들과 협력하며 오스만 체제에 반하는 자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p. 60]

 

이건 아무리 봐도 봉건제(封建制) 혹은 고려 시대와 비슷하지 않은가! 이를 “같은 국가의 통제 하에 있으나, 서로 다른 법률과 관료에 의해 다양한 종교집단들이 함께 삶을 영위하는 일종의 ‘모자이크 구조’가 수백 년 간 오스만제국의 근간을 이룬 질서의 핵심1)”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오스만 제국이 아랍을 지배하고 몇 세기가 지난 후에  ‘오스만의 근대화 개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에 의해 아랍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면서 다시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그렇다면 아랍의 근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이었던 무함마드 알리(1770~1849)의 개혁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함마드 알리는, 훗날 오스만이 모방하게 되는, 유럽의 개념과 기술에 의존하여 이집트를 개혁의 길로 이끌었던 혁신가이기도 했다. 그는 중동 지역에서 최초로 농민 군단을 창설했다. 또한 유럽 바깥에서는 최초로 실현된 산업화 프로그램에 착수했고, 군에 필요한 무기와 직물을 생산하고자 산업혁명 기술을 도입했다. 교육사절단을 유럽의 수도들에 파견하고 유럽의 서적 및 기술편람을 아랍어 판본으로 출판하기 위해서 번역국도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술탄의 총독이 아닌 독립적인 군주로 자신을 대우하는 유럽 열강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p. 100]

 

대체로 지방의 강력한 권력자와 중앙은 갈등을 빚기 쉬운데, 풍요롭고 넓으며 중앙과 충분한 거리를 갖고 있는 이집트 총독들은 그런 유혹을 받기 쉬웠다. 무함마드 알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와 오스만 제국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의 사실상 독립을 요구하는 영국과 프랑스에 맞서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그리스 반란군을 진압하던 이집트 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파탄에 이르렀다. 그 결과 무함마드 알리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시리아를 침략했다.

 

오스만 개혁의 시대는 제2차 이집트 위기2)가 정점에 이르렀던 1839년에 시작되었다.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죽고 10대였던 압돌 메지드 1세가 등극한 1839년은 급진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선포하기에는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군으로부터 급박한 위험에 시달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럽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유럽으로부터 영토와 통치권에 대한 보장을 받기 위해서는 근대국가 세계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유럽 기준의 치국책(治國策)을 충실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유럽 열강들에게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다고 오스만 정부는 생각했다. 더구나 마흐무드 2세의 밑에서 일했던 개혁가들은 전대 술탄의 치세 동안에 이미 시작된 변화들을 강화시키고 그의 계승자로 하여금 개혁 과정에 참여하도록 만들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이중적 동기가 오스만 개혁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 유럽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선전행위가 대내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개혁에 나선 진심 어린 결의와 결합한 것이다. [p. 128]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부강해지기 위해 시작한 일련의 개혁과 개발 사업은 도리어 오스만 제국을 더욱 유럽의 지배에 종속시켰다. 특히 유럽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은 오스만 제국을 파산으로 몰고 갔다.

 

프랑스는 1881년에 튀니지로 지배권을 확장했고, 영국은 1882년에 이집트를 점령했으며, 이탈리아는 1911년에 리비아를 장악했고, 유럽 열강은 1912년에 모로코(오스만 지배로부터 독립을 지켰던 유일한 북아프리카 국가였다)를 프랑스-에스파냐의 보호령으로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북아프리카 전체는 유럽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p. 155]

 

이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아랍인들이 대항했지만, 신식 무기와 강력한 군대를 가진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제국주의적 편의에 따라 조성한 팔레스타인 같은 위임통치령은 또 다른 불씨를 잉태했다.

 

벨푸어 선언이 공동체 간의 갈등의 빌미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매우 제한적인 자원을 고려한다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공민권과 종교적인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그곳에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향토를 건설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예상한 대로 위임통치는 대립하던 두 민족주의, 즉 고도로 조직화된 시오니즘 운동과 영국의 제국주의 및 시오니즘적 식민주의라는 이중의 위협에서 기인한 새로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간의 충돌을 야기했다.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제국주의가 중동에서 양산한 가장 큰 실패작이었고, 그 결과 중동 전역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갈등과 폭력사태에 휘말리게 되었다. [pp. 277~278

 

이런 상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대 국가가 건국되면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발생했다. 이에 대항하여 젊은 아랍 민족주의자 군인들은 1949년 시리아에서, 1952년 이집트에서, 1958년 이라크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구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연계가 없었지만, 초 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내세운 ‘냉전(冷戰)’이라는 새로운 질서(New Order)에는 적응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에게 수에즈 전쟁은 군사적으로 놀라운 승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후퇴를 의미했다. 벤 구리온은 IDF(이스라엘 방위군)가 무력으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해야 하는 현실에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아랍 이웃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군대의 기민함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3국 침략에 동참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 지역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던 아랍 세계의 보편적인 인식이 더욱더 강해졌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제국주의와 연계되면서 아랍 세계가 유대 국가를 인정하거나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물론이고 받아들이는 것조차 더욱더 어려워졌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을 패퇴시키는 문제는 팔레스타인 해방뿐만 아니라 중동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일소하는 문제와도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p. 432]

 

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에 부딪혀 단합되지 못한 아랍 민족주의는 쇠퇴했고, 무력으로 유대 국가를 말살하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랍 정부들은 시오니스트 적과 싸워서 팔레스타인 향토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아랍의 공동 의제에 말로만 경의를 표할 뿐, 모두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대의 석유 자원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아랍의 세계 경제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힘이 중동을 제어하게 되었다. [p. 503]

 

하지만 석유의 힘보다도 이슬람의 힘을 더욱 믿는 젊은 세력이 등장해서, 이란에서 혁명을 일으켜서 왕정을 폐지시키고, 이집트에서는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했다. 나아가 이들에 의해 극단적인 이슬람주의 테러 세력이 형성되었다.

 

한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 협정 체결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그 길이 아직 멀고 멀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개정판을 내면서 추가된 제15장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현재를 보여준다. 튀니지에서 발발한 “아랍의 봄”으로 인하여 아랍 각국은 혁명의 물결에 휩싸였지만, 그것이 성공한 튀니지를 제외하고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거나 더욱 참혹한 내전으로 빠져드는 등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튀니지는 아랍의 봄 혁명 이후 새로운 헌법 질서로의 평화로운 정치적 이행을 성사시킨 유일한 아랍국가이다.

중략 ~

튀니지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은 중도적이고 세속적인 두 개의 다른 정당과 연대함으로써 고도의 국민적 단결을 유지했다. 새로운 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과정은 지난했지만, 강제보다 합의에 기반한 특성을 띠었다. 2014년 1월 채택된 신헌법에는 혁명운동의 성과인 시민의 권리와 법의 지배가 명시되었다. [pp. 729~730]

 

그리고 <아랍>은 아랍의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희망적인 전망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튀니지의 취약한 민주주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이는 아랍 세계와 전 세계에 큰 이득이 될 것이다. 아랍 세계가 2010년대의 폭력과 대대적인 파괴로부터 벗어났을 때 아랍인들은 반드시 책임 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재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pp. 729~730]

 

 

 

 

옥의 티

 

p. 67

아랍의 지역 경제는 실질적인 이득을 보았고 장인(丈人)과 민병(民兵)에 대한 후원 확대로 지역 통치자의 힘은 더욱 커졌다. ⇒ 아랍의 지역 경제는 실질적인 이득을 보았고 장인(匠人)과 민병(民兵)에 대한 후원 확대로 지역 통치자의 힘은 더욱 커졌다.

 

1) 김가희, <이슬람 국제체제의 역사적 탐구를 통한 걸프위기의 재구성>,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p. 22

2) 제2차 이집트-오스만 전쟁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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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도쿄 깊숙이 일본 1
진나이 히데노부 지음, 안천 옮김 / 효형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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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물의 도시’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의 도시’라고 하면 파리를 떠올리듯이, ‘물의 도시’라고 하면 대부분 베네치아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도쿄[東京]를 ‘물의 도시’라고 한다. 동양의 베네치아라는 중국의 ‘쑤저우[蘇州]’나 태국의 ‘방콕’처럼 수로(水路)가 발달한 곳이라면 몰라도 오늘날의 도쿄에서 ‘물의 도시’를 떠올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다.

 

이걸 뻔히 알면서도 저자가 자신 있게 도쿄를 ‘물의 도시’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지어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서울도 물의 도시라고 얘기한다.

 

서울의 고지도를 보면 뒤로 산과 언덕이 있는 이 도시에서 가운데를 흐르는 청계천에는 남쪽과 북쪽에서 많은 작은 하천이 흘러 들어 독특한 물의 도시를 이룬 모습이 떠오릅니다. 물을 축으로 한 서울의 도시 공간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제기한 것과 같은 관점에서 도쿄와 서울의 비교 연구가 진전되기를 기대합니다. [p. 7]

 

여기까지 보면, 저자가 사용하는 ‘물의 도시’의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수로(水路)나 운하가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는 ‘물의 도시’와는 다른 듯하다. 게다가 1장에서 도쿄의 스미다 강[隅田川]을 파리의 센 강 및 런던의 템스 강과 비교하면서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파리나 런던을 ‘물의 도시’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에도[江戶]와 메이지 시대의 도쿄[東京]는 ‘물의 도시’였다

 

<간에이 에도 전도(寬永江戶全圖)>의 일부

출처: <물의 도시 도쿄>, p. 23

 

에도가 ‘물의 도시’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철도와 노면 전차가 등장한 근대 도쿄는 땅의 도시로 변모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에도를 계승한 메이지 시대의 도쿄는 여전히 여러 강과 운하를 품은 물의 도시였다. 수운(水運)의 중요성 또한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근대에 들어 동력선이 생기면서 속도가 빨라지고 수송량도 늘었다.

~ 중략 ~

도쿄가 ‘물의 도시’로서의 성격을 잃은 것은 전후(戰後)로, 수상 교통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1964년 올림픽 무렵 이후다. [p. 65]

 

이렇게 ‘물의 도시’에 대한 기존 개념에 따라 ‘1장 스미다강’부터 ‘4장 베이 에어리어’까지 각각 에도[江戶] 문화의 정신적 원류(原流)인 스미다 강[隅田 川], 도쿄 중심부를 흐르는 니혼바시 강[日本橋 川], 스미다 강 건너 물의 지역인 고토[江東], 1980년대 ‘워터프런트(water front)1)’ 붐으로 각광받았다가 잊혀진 도쿄만[東京灣, Tokyo Bay] 일대를 각각 얘기한다.

 

에도.도쿄의 특징에 대해 내린 결론은 에도성=황거(皇居)의 바다 쪽에 자리한 시타마치[下町]는 수로와 하천이 그물망처럼 뻗어 있는 베네치아와 유사한 ‘물의 도시’고, 무사시노 대지 쪽의 야마노테[山手]는 기복이 심한 울퉁불퉁한 녹지를 중심으로 한 ‘전원 도시’라는 것이었다. [p. 167]

 

여기에서 그쳤으면 기존 논의의 반복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자는 ‘물의 도시’에 대한 개념을 확장한다.

 

에도 수계도(水系圖)

출처: <물의 도시 도쿄>, p. 290

 

물의 도시 에도.도쿄는 저지대에 발달한 베네치아, 암스테르담, 쑤저우, 방콕과 공동적으로 시타마치에 펼쳐지는 평탄한 운하 중심 도시일 뿐 아니라, 서쪽의 무사시노 대지에서도 울퉁불퉁한 지형을 절묘하게 읽어내어 다양한 수자원을 활용하면서 환경을 개조해 조성한,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역동적인 ‘3차원적 물의 도시’였음을 깨달았다.

에도성을 에워싼 내호(內濠, 안쪽 해자)와 외호(外濠, 바깥쪽 해자)도 울퉁불퉁한 지형을 활용하여 높낮이 차이를 살리며 축조한 계단형의 거대한 물의 공간 장치다. 또한 야마노테에 산재한 다이묘 저택 상당수가 경사면을 효과적으로 살려 건물을 배치하고, 용수를 끌어 만든 연못을 중심으로 에도 특유의 멋진 회유식(回遊式) 정원을 만든 것을 고려하면 새로운 ‘물의 도시 도쿄론’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pp. 167~168]

 

구체적으로 ‘5장 왕의 거주지와 해자’에서는 기복이 심한 울퉁불퉁한 지형을 살려서, 에도성과 그 주변을 감싸고 도는 내호(內濠)와 외호(外濠)를 계단식 논처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수면(水面)이 줄줄이 이어져 위에서 아래로, 시계 방향과 반(反)시계 방향으로 각각 물이 흐르는 순환 시스템을 가진 인공 수계(水系)를 형성되었다. ‘6장 야마노테’에서는 우에노[上野]의 산과 시노바즈노 연못[不忍池]은 산과 계곡이 번갈아 나타나는, 그래서 울퉁불퉁한 야마노테 지역의 ‘산자락’과 ‘물가’의 조합을 상징한다고 얘기한다. 이런 식으로 ‘물의 도시’에 대한 개념을 ‘수운(水運)’이 중심이 되는 도시에서 확장시켜 나간다. 어떻게 보면 우리 옛 선조들의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사고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가 이런 발상을 하게 된 것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1985년~1986년에 도쿄 임해부도심을 조성하다가 실패했지만, 세계 각지에서는 스페인의 빌바오처럼 물가 공간의 재생과 재개발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1980년대 말 이탈리아에서 나온, ‘테리토리오[영역]’이라는 개념의 영향이다. 이 ‘테리토리오’는 전원(田園)이 지닌 문화와 그 풍경을 존중하는, 즉 역사와 생태를 잇는 작업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구체적으로는 슬로푸드 운동, 지산지소(地産地消)2)에노가스트로노미아[와인+식문화], 농촌의 ‘문화적 경관(paesaggio culturale)3)’ 등을 통해 전원과 농촌에 잠재된 가능성을 살려내는 운동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도시의 영향을 받는 도시 인근의 전원이라고 생각되는데, 도시의 범위를 확대해서 해석하는 방식인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이 책에서 다루는 ‘도쿄’라는 도시의 범위도 확장되고,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특징인 물의 도시’라는 개념도 적용시킬 수 있게 된다. 발상의 전환인 셈이다.

 

발상을 전환하고 확장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물의 도시 도쿄를 연구해 보면 이렇게 지형 변화가 많고 다양한 수자원의 혜택을 받은 도시는 국내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뚜렷이 나타난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특징인 일본다운 물의 도시를 생각하는 것은, 한계를 드러내 온 도시 문명을 성찰하는 서구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p. 334]

 

즉, 단순히 수운(水運)의 여부가 아닌, 도시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물을 이용하고,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했는지도 감안한다는 점에서 뭔가 입체적이고 독특하게 ‘물의 도시’를 결정하자는 얘기인 셈이다.

 

1) 워터프론트(water front): 대상지를 하천 또는 해양과 연결시켜 유람선이나 요트 등 수상교통이 접근할 수 있는 교통의 통로로 이용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휴식 및 레저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도록 하는 수변(水邊)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일본의 지산지소(地産地消)는 한국의 신토불이(身土不二)처럼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운동이다.

3) 문화경관(文化景觀)은 자연에 인간의 영향이 가해져 이루어진 풍경을 말한다. 인간집단이 자연환경과 상호작용하여 형성한, 가시적인 물질문화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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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한 권으로 독파하는 우리 도시 속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함규진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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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수도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30개 도시에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지안[集安 혹은 輯安, 국내성], 백제의 수도인 공주, 신라의 수도인 경주, 전기 가야연맹의 수장인 가락(駕洛) 혹은 금관가야[김해], 발해의 수도인 닝안[寧安, 상경용천부], 후백제의 수도인 완산주(完山州) 혹은 전주(全州), 고려의 수도인 개성, 조선의 수도인 서울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가 빠진 것이 의외였고, 후기 가야연맹의 수장인 가라(加羅) 혹은 대가야[고령]은 포함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옛 수도들 가운데서 아무래도 시선이 가는 곳은 잃어버린 영토에 있는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지안]과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닝안]다. 먼저 지안[集安 혹은 輯安]은 졸본(卒本) 혹은 홀본(忽本)에 이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424년이나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지만, 당대(當代)의 사서(史書)가 전해지지 않은 탓에 그 위치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지안설이 대세이며, 이 책에서도 지안을 두고 국내성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유적 때문이다. 국내성 유적과 환도성 유적 외에 구 외곽에 있는 태왕릉, 장군총, 무용총, 각저총, 광개토대왕릉비 등 오늘날 고구려 문화유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안의 유적들은 수백 년 동안 잊혀 있다가, 20세기 초 뒤덮은 나무와 잡초, 흙 등을 제거하고 무너진 부분을 복원하고 나서야 제 모습을 드러냈다. [p. 636]

 

<신당서>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려에 더부살이하던 것들로서, 성은 대씨다[渤海 本 粟末靺鞨 附高麗者 姓大氏)]’이라는 기록 때문에 중국에서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가 아닌 중국사의 일부로 본다. 그들은 발해를 ‘당(唐))나라의 속국 중 하나, 속말말갈(粟末靺鞨) 중심의 지방 민족 정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적인 연호1)와 고구려라는 정체성2)을 가졌으며, <신당서>보다 앞선 <구당서>에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渤海靺鞨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라는 표현 등을 감안하면 발해는 한국사의 일부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장기간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즉 닝안[寧安]에 대해 저자가 어떻게 서술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지안에 이어 닝안 부분을 펼쳐봤다.

 

오늘날 발해 상경 유적지는 보하이진[渤海鎭]에 있다. 그곳에 가면 상경유지(上京遺址) 박물관이 있어서 1930년대 이래 발굴되고 조사된 발해 유적지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진열실 첫머리부터 발해를 설명하는 문구는 “당나라의 속국 중 하나. 속말말갈 중심의 지방 민족 정권”이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계가 왕실을 구성하며 고구려의 후계국가로 존립했다는 진실과 당에 형식적으로 조공했더라도 결코 속국이라 할 수 없는 독립국가 해동성국이었다는 사실, 보다 나아가 발해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정체성을 깡그리 부정하는 문구인 것이다. 이는 동북공정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기 전부터 중국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곳을 들르는 한국 연구자와 관광객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고, 발해 관련 국제학술대회가 열릴 때마다 ‘발해사는 한국사인가? 중국사인가?’를 두고 두 나라의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거듭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엉뚱하게도 러시아 쪽에서 두 나라의 과도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중재한다며 발해사는 중앙아시아 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와 만주의 삼림 지대는 생활환경, 문화환경이 모두 판이하건만, 그렇게 주장하는 까닭은 중앙아시아의 맹주가 러시아라는 의식 때문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만주 땅 전부가 일본의 터전이라 여긴 일본의 만선사관처럼 말이다. [pp. 685~686]

 

거란, 즉 요(遼)나라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28년 상천용천부의 주민을 이주시켜 상경용천부가 급격히 쇠락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 부흥 운동을 전개하다가 수만 명의 백성과 함께 고려로 망명했다. 이런 가운데 발해 유민들은 점차 응집력을 잃어버렸고, 이들을 대신해서 흑수말갈의 후예, 그 가운데서도 건주 여진이 이곳을 그들의 발상지인 ‘닝구타[寧古塔]’로 기억한다.

 

옛 수도이지만 우리가 가기 힘든 도시로는 평양과 개성도 있다. 여기서 가장 흥미 있는 도시는 ‘붉은 워싱턴’, 평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훨씬 뛰어넘는 무지막지한 폭격으로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휴전 뒤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평양이 건설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평양과 비슷한 도시를 꼽는다면 어디일까? 서울? 아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자 혈맹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 그렇지 않다. 지구상에서 평양과 가장 비슷한 도시는 미국의 워싱턴이다.

누군가 워싱턴을 “죽은 사람들을 위한 도시”라고 폄하했었다. 과언이 아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오벨리스크를 본뜬 워싱턴 기념탑을 중심으로 넓고 긴 도로가 마름모꼴을 그리고, 마름모의 꼭지점마다 국회의사당, 백악관, 링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이 있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 정치권력의 두 정점이며, 링컨과 제퍼슨 기념관은 건국의 아버지와 현대 미국의 아버지이자 노예 해방자를 모신 신전이다. 고고한 백색으로 빛나는 건물을 넓고 푸른 잔디밭과 포토맥강이 둘러싸고 있다. 전후 평양시를 재건할 때 이 워싱턴을 참고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동강이 도는 도시 공간을 일정하게 구획하고 거대 기념물들을 배치한 점에서 이만큼 짝을 이루는 도시도 없다. [pp. 553~554]

 

 

이 곳도 한국사에 등장하는 30개 도시인가요?

 

이 책에 소개된 ‘30개 도시’ 가운데 가장 의아했던 곳은 ‘제주’와 ‘대마도’다.

우선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라고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이 책, 아니 이 시리즈가 숱한 세월 속에서도 그 자리에 남아 축적된 도시 속 숨은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를 풀어내고자 하는 의도라고 알고 있는데,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라고 밀어 넣은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로 본다고 하더라도 ‘대마도’의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바로 대마도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하느냐의 문제다. 만약 대마도의 역사를 한국사의 일부라고 한다면 독도(獨島)를 다께시마[竹島]라고 하면서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 혹은 극우적인 사고 방식의 산물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다. 저자도 여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지, 11장 대마도 편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마도를 이 책의 일부로 넣는 일은 많이 망설여졌다. 지안이나 단둥 등은 한때는 분명 한국의 영토였지만, 대마도는 ‘확실히’ 영토였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칫 이 책이 ‘낭만적 민족주의’를 부추긴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어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불확실하게’ 영토였던 적은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비롯해 한일관계사, 한국이 일본과 겪은 여러 애증의 역사에서 대마도가 중심에 있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이 장을 썼다. [p. 287]

 

라고 서술했다. 도대체 언제 대마도가 ‘불확실하게’나마 한국의 영토였을까?

 

대마도가 신라 땅이었다는 말은 조선 초에도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듯하다.  바로 세종 때의 대마도 정벌 당시, 대마도주에게 보낸 유시문(諭示文)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해 있던 섬이니, 본래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느니라. 다만 그 땅이 매우 좁고 바다 가운데 있어서 오가기 힘든 관계로 백성들이 살지 않았다. 이에 왜노 중에 본국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자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어 소굴을 만들어놓고, 수시로 약탈을 자행하면서 약한 백성의 처자식을 잡아가거나 백성의 살림을 분탕질하기도 하니, 그 흉악한 만행이 여러 해 이어져 오고야 말았다.

 

종합해서 추정해 보면, 신라가 대마도를 내륙의 고을처럼 세를 거두고 법을 집행하며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방관도 주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군사적 거점 같은 것은 있었을지 모르며, 백성이 살지 않거나 별로 없지만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런 모호한 영토권은 왜의 입장에서도 주장할 만했다. [pp. 296~297]

 

1246년 백제계 아비루[阿比留] 가문에서 일본계 소[宗] 가문으로 대마도의 지배자가 교체되었고, 일본에서 ‘분에이[文永]의 역(役)’이라 부르는 여몽연합군의 1차 일본원정(1274년)을 계기로 모호한 경계선에 있던 대마도인들은 일본인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아예 일본의 한 지방으로 확정되었다.

 

왜란 이전까지 일본 지도나 일본 행정 체제에 대마도는 없었다. 그러나 왜란 이후로는 일본의 한 지방으로 인정된다. [p. 308]

 

이 책에는 조선시대 8도를 대표하는 도시 가운데 독일풍의 도시로 재건된 함경도의 함흥, 평안도의 평양, 황해도의 해주,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경주, 강원도의 강릉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사라는 요소만 고려한다면, 고려 왕건을 지지하면서 후백제 견휜(甄萱)의 배후를 노리는 비수 역할을 했으며 전라도의 또 다른 대표도시였던, 나주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제외되어 아쉬웠다.

 

독일 태생으로 북한에 유학해 북한 연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 빈 대학의 뤼디거 플랑크 교수는 현대의 함흥을 “독일풍의 도시”라고 말한다. 그렇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잿더미가 된 도시의 전후 복구 과정에 동독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가진 이 동양의 고도(古都)는 근대 서구의 도시처럼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도시로 재탄생했고, 동독에서 유행하던 노란색 타일을 붙인 건물이 즐비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새로 닦은 가로의 이름을 빌헬름피크대로로 붙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슬그머니 그 이름을 바꾸고, 전후의 재건도 천리마운동 등 자체 노력의 산물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pp. 592~593]

 

어쨌든 이렇게 28개의 도시와 2개의 섬을 둘러보면서, 단순히 무슨 왕이 어떤 일을 했느냐 혹은 **년에 무엇이 일어났느냐를 외어야 했던 한국사에서 벗어나 여행하듯이 각각의 도시들이 간직하고 있는 얘기들을 듣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면의 10% 이상을 서울이 차지하고 있고, 30개 도시라는 제한으로 한국사에서 한 몫 했던 도시 모두가 포함되지 못해 다소 아쉬운 점은 있지만 한번쯤 읽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가 직접 가기 힘든 북쪽 땅과 잃어버린 영토에 있는 도시들의 경우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면 쉽게 만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 리뷰는 다산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 2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때의 인안(仁安)부터 왕호가 전해지지 않는 11대 대이진(大彛震)때의 함화(咸和)까지는 중국측 사서에도 발해의 독자적인 연호가 전해진다.


2)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스스로 ‘고려(=고구려)’를 칭했다고 한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고려국왕 대흠무[大欽茂, 발해의 3대 국왕 문왕]가 말합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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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 - 익숙하고 낯선 도시가 들려주는 일본의 진짜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조 지무쇼 지음, 전선영 옮김, 긴다 아키히로.이세연 감수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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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크게 서일본의 규수[九州], 시코쿠[四國], 주고쿠[中國], 간사이[關西]와 동일본의 주부[中部], 간토[關東], 도호쿠[東北], 후카이도[北海道], 그리고 1872년 1차 류큐 처분을 통해 일본에 편입된 오키나와[沖繩]까지 9개 지역으로 나뉜다. 오키나와는 규수-오키나와 지방으로도 표기되지만, 엄연히 독립국가였던 류큐(琉球) 왕국의 터이기에 이 책에서도 하나의 지역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9개 지역에서 30개 도시를 선별해서, 위의 그림처럼 첫 장에 해당 도시가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지, 2020년 기준 도시 인구가 얼마인지, 도시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열거하고 있다. 이어 해당 도시의 핵심적인 특징과 간략한 역사 등을 통해 작게는 해당 지역, 크게는 일본을 드러내려고 시도한다.

 

가장 먼저 나오는 홋카이도[北海道] 지방에서는 우리에게 ‘눈의 도시’로 유명한 삿포르[札幌]와 쓰가루[津輕] 해협을 사이에 두고 혼슈[本州]와 마주보고 있어 초기 훗카이도 개척의 거점이 되었던 하코다테[函館]가 선정되었다. 삿포르는 ‘훗카이도 개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시마 요시타케[島 義勇, 1822~1874]에 의해 교토를 본뜬 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로 구상되었다는 점이, 하코다테는 최초이자 최대의 서양식 성곽인 고료카쿠[五稜郭]이 인상적이다.

 

고료카쿠[五稜郭] 고지도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3%8C%EC%B9%B4%EC%BF%A0#/media/%ED%8C%8C%EC%9D%BC:GoryokakuPlanLarge.jpg)

 

고료카쿠

출처: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 p. 32

 

도호쿠[東北] 지방에서는 한때 번영했다가 몰락한 교역 도시 도사미나토[十三溱], 금채굴 등으로 얻은 재원으로 번영했던 히라이즈미[平泉],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567~1636]의 도시인 센다이[仙臺등이 선정되었다. 센다이에는 스페인 대사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Sebastian Vizcaino, 1548?1624)가 ‘일본에서 가장 우수하고 가장 견고한 성’이라고 평가했던 센다이성[仙臺城]이 있었다. 아쉽게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으로 성(城)의 정문 등이 소실되었다. 다행히 도시의 경관(景觀)은 유지되어, 숲 속의 거리를 보는 듯한 조망에서 유래된 ‘숲의 도시’라는 애칭은 남아있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다테 마사무네의 지시에 의한 것이니 센다이를 ‘다테 마사무네의 도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마사무네가 기근 대책으로 복숭아 나무와 감나무, 배나무 등을 심게 하고, 이웃과의 경계를 명확하게 할 목적으로 삼나무를 심게 했으며, 바람과 화재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나무를 심도록 장려한 결과이다. [p. 70]

 

간토[關東] 지방에서는 도쿄[東京], 1859년 개항한 이후 일본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한 요코하마[橫浜], 막부 정치를 시작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 賴朝, 1147~1199]가 거점으로 삼은 가마쿠라[鎌倉등이 선정되었다.

 

주부[中部] 지역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라는 스와 대사[諏訪 大社]가 있으며 시계, 카메라, 의료기기 등 정밀 기계 공업과 산이 깊은 지형으로 ‘동양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스와[諏訪], 서회항로(西廻航路)의 개설로 인해 쌀 교역항으로 번성했던 국제 무역항 니가타[]. 일본 3대 정원 중 하나인 겐로쿠엔[兼六園]와 일본 금박 생산량 98%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가나자와[金澤], 코산케[御三家]의 으뜸인 오와리 도쿠가와[尾張 德川] 가문의 터전으로 예인(藝人)과 상인을 중시한 7대 번주(藩主)인 도쿠가와 무네하루[德川 宗春, 1696~1764]의 영향으로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상술이 뛰어나다는 기질이 형성되었다는 나고야[名古屋등이 선정되었다.

 

가나자와 역

출처: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 p. 186

 

간사이[關西] 지역에서는 도시의 1/4 이상을 신궁(神宮)이 차지하고 있어 ‘신(神)의 도시’로 불리는 이세[伊勢], 당(唐)나라의 장안(長安)을 모델로 세워진 고도(古都) 헤이조쿄[平城京]였던 나라[奈良],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경제도시로 계획된 ‘천하의 부엌’ 오사카[大阪], 도시의 상공업자인 조닌[町人]들의 조직인 에고슈[會合衆]에 의한 자치가 이루어져 ‘동양의 베니치아’라고 불리던 사카이[], 천년고도(千年古都)인 교토[京都], 외국인 거류지에 건설된 이진칸[異人館]으로 대표되는 이국적 낭만과 1995년 고베 대지진의 아픔이 공존하는 국제도시 고베[神戶등이 선정되었다.

 

헤이조쿄[平城京]의 도시 구획

출처: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 p. 219

 

중세 일본의 도시 중에서 당시 유럽 사회에 가장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도시는 도쿄도 하카타도 아닌 사카이였다. 1556년 일본을 찾은 포르투갈 선교사 가스파 빌레라는 사카이를 ‘동양의 베네치아’로 자신의 저서에 소개했으며, 당시의 세계 지도에도 그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p. 256]

 

주고쿠[中國] 지역에서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발전을 이룬 탓에 원폭투하의 대상이 된 히로시마[廣島], 미야자키 하야오의 <벼랑 위의 포노>에게 영감을 준 작은 어촌인 도모노우라[?の浦], 무로마치[室町] 시대 교토 문화를 동경했던 오우치[大內] 가문에 의해 독특한 오우치 문화가 꽃피워 서쪽의 교토’라고 불렸던 야마구치[山口등이 선정되었다

 

조선의 국왕이 에도에 파견한 조선 통신사 일행도 도모노우라를 중계지로 이용했다. 겐로쿠 연간인 1690년 무렵, 도모초토모에 있는 후젠지에는 본당에 접하여 객전이 지어져 조선 통신사 일행의 영빈관으로 쓰였다. 1711년에 일본을 찾은 조선 통신사 종사관 이방언은 세토 내해에 떠 있는 벤텐섬과 센스이섬이 내려다보이는 객전의 전망을 ‘일본에서 으뜸가는 명승’이라 칭송했으며 1748년에 통신사 정사로 일본을 찾은 홍계희는 이 객전에 대조루(對潮樓)라는 이름을 붙였다. [pp. 314~315]

 

일본을 구성하는 4개의 섬 가운데 하나인 시코쿠[四國] 지역에서는 나쓰메 소세키[夏目 漱石, 1867~1916]가 쓴 <도련님>의 배경이 된 온천 마을인 마쓰야마[松山]가 선정되었다.

 

규수[九州] 지역에서는 한반도와 대륙과 가까워 1세기 무렵부터 교역의 창구가 되었던 후쿠오카[福岡], 포르투갈인의 교역과 포교를 위한 개항지로 시작되어 서양문화 수입의 창구가 된 나가사키[長崎],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고향이라는 가고시마[鹿兒島] 등이 선정되었다

 

우리에게는 이국적인 휴양지가 떠오르는, 오키나와[沖繩] 지역에서는 류큐(琉球) 왕국의 수도이자 옛 왕성이 있던 슈리[首里]가 그 외항이었던 나하[那覇]에 합쳐져서 소개되었다.

 

슈리성

출처: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 p. 389

 

총 30개 도시를 다룬 30편의 글인 만큼 본격적으로 일본사를 파고 들어가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관심 가는 도시부터 하루 한 도시씩 역사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읽기에 괜찮은 편이다. 역사를 테마로 하는 일본 여행 가이드북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을 듯하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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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크기의 프랑스 역사 - 혁명과 전쟁, 그리고 미식 이야기
스테판 에노.제니 미첼 지음, 임지연 옮김 / 북스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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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크기의 프랑스 역사: 혁명과 전쟁, 그리고 미식 이야기(A Bite-Sized History of France: Delicious, Gastronomic Tales of Revolution, War, and Enlightenment)>는 프랑스의 여러 음식과 그에 관한 역사 등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예술을 사랑하는 프랑스 치즈 장수’를 자처하는 스테판 에노(Stephane Henaut)가 마음 편히 치즈를 가져오기 위해, 미국인 아내인 제니 미첼(Jeni Mitchell)에게 치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음식과 와인, 더 넓게는 먹고 마시고 농사짓고 포도를 재배하는 일체의 관습은 프랑스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은 프랑스라는 국가가 그렇듯 시대의 전쟁과 혁명, 전염병과 침략, 발명과 계몽을 통해 진화해왔고, 좋든 나쁘든 그 과정에서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p. 9]

 

그래서일까? 저자는 음식을 통해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자칫하면 ‘순혈(純血)’주의자 혹은 ‘국수(國粹)’주의자에게 이용되기 좋다.

 

불행히도 음식을 매개로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행위는 1990년대 이후 프랑스 극우파가 선호하는 전술이 되었고, 지난 10년 동안 주류 정치에도 스며들었다.

중략 ~

프랑스인이 되려면 프랑스 사람들처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프랑스 역사를 살펴보면 프랑스 미식 전통이 전 세계의 맛과 관습이 혼합된 결과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포도밭은 로마인이 전해준 것이며, 유명한 페이스트리는 오스트리아의 선물이다. 터키로부터의 멋진 수입품, 커피가 없었다면 카페의 탄생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초콜릿? 멕시코에서 수입되었다. 프로방스 요리?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토마토 없는 프로방스 요리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순혈의’ 정통 프랑스 요리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사실상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앞으로 밝혀내도록 하겠다. [p. 10]

 

그렇기에 저자도 이 책에서 사실상 ‘순수한 프랑스 미식’은 없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저자는 프랑스의 풍부한 음식 문화가 침략과 전쟁, 정복, 식민지화의 결과였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프랑스 요리 또한 획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는 다양한 지역색 덕분만은 아니다. 긴 역사를 탐구한 결과 우리는 외국 요리가 프랑스 미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을 밝혀냈다. 와인과 리큐어, 페이스트리와 초콜릿, 그리고 프로방스의 맛 등 프랑스를 대표한다고 믿었던 많은 요소가 프랑스가 원조가 아닌 수 세기에 걸쳐 유입되어 서서히 흡수된 것이었다. 외국에서 수입된 이러한 요소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침략과 정복, 식민지화의 결과였기 때문에 그 유입과정은 실제보다 더 순화되어 묘사되었다. 이 중 식민지 정복의 영향은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온 식민지 요리가 현재도 프랑스 미식에 서서히 동화되는 과정에 있으므로 결과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pp. 426~427]

 

예컨대 초콜릿과 같은 경우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에도 프랑스인들이 매년 약 7kg을 소비할 만큼 즐긴다. 하지만, 여전히 착취와 어쩌면 폭력을 통해 생산되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 대다수가 현대의 초콜릿이 끔찍한 식민지 건설과 대량 학살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만, 서아프리카 카카오 생산 과정에서의 착취를 강조하는 지속적인 캠페인 덕분에 초콜릿 무역을 둘러싼 현재의 논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전 세계 카카오의 60퍼센트 이상이 가나와 코트디부아르, 이 두 나라에서 생산된다. 많은 카카오 농장 일꾼들이 일당 1달러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는 아동이 200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되는데 일부는 이웃 나라에서 인신매매된 아이들이다. [p. 178]

 

 

이와 함께 음식의 다양한 역할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다. 요리와 식재료는 식생활 습관 혹은 방식을 통해 계층 간의 차이를 공고히 하는 수단이기도 했고,

 

사회 계층 간 차이는 음식을 통해서도 점점 더 공고해졌다. 봉건 시대에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식습관 차이가 매우 컸다. 음식은 단순한 계급의 상징 이상의 의미를 지니면서 다른 계급에 대한 한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정 음식이 고귀함과 건강함을 상징하기 때문에 다른 음식은 비천하고 건강에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고, 이에 따라 그 특정 음식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pp. 66~67]

 

귀족들이 구운 고기를 먹는 동안 농민들은 채소를 찾아 헤맸다. 적어도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루이 14세가 채소를 더욱 고급 재료의 반열에 올려놓기 전까진 말이다. 이국적인 향신료와 설탕은 비교적 최근까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으며, 심지어 포위전과 전쟁 중에도 부유층은 계속 별미를 즐겼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데, 비단 프랑스만의 일은 아니다.

중략 ~

즉,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분열과 불평등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특정 지역이나 시대의 음식과 관련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관습인 ‘식생활 방식(foodways)’을 조사함으로써 사회에서 누가 가장 많은 권력을 쥐고 있는지, 그들이 어떤 가치를 우선하는지, 어떻게 자신들의 높은 지위를 유지하는지 등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pp. 424~425]

 

외교 수단이기도 했다.

 

탈레랑은 프랑스 대사와 외무 장관을 지내면서 프랑스 문화와 미식을 최대한 활용해 경쟁자를 이기고, 잠재적 동맹국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이도록 교묘하게 타협을 끌어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소프트 파워’라고 부르는 것의 완벽한 실천자였으며, 적어도 17세기 중반 이래 유럽에서 가장 세련되었다는 프랑스 요리의 명성을 활용해 중요한 국익을 추구했다. 그는 유럽 정치를 재편할 협상을 위해 빈 회의에 참석하고자 출발하면서 “폐하, 지시 말씀보다 소스팬이 더 필요합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p. 276]

 

이처럼 음식을 매개로 프랑스 역사의 어두운 이면까지 들여다본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프랑스의 다채로운 음식과 역사, 문화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누군가가 한국의 음식과 역사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시선으로 글을 쓴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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