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지음, 하인후 옮김, 김도근 사진 / 시공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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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는

 

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들어가면서’를 보면,

 

이탈리아 여행에는 현지 가이드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일관성보다 즉흥성을 선호하는 이탈리아에서 여행자들은 당혹스러운 일을 자주 겪는다. ‘기술보다 예술이, 실력보다 매력이, 품격보다 파격이’ 가치의 상위를 차지하는 곳이 이탈리아다.

~ 중략 ~

나는 피렌체에서 태어나서 피렌체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다가 피렌체에서 죽은 마키아벨리에게 가이드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산타 크로체 성당의 영묘에 새겨져 있는 짧은 묘비명이 증언하듯이, “어떤 이름도 그보다 뛰어나지 않다(TANTO NOMINI NVLLVM PAR ELOGIVM).” 피렌체의 아들로 태어나 피렌체의 최고 공직에 올랐으며, <피렌체사>를 집필한 마키아벨리보다 더 뛰어난 자질을 가진 가이드가 있을까? [pp. 16~17]

 

라고 쓰여있다. 다시 말해, 이 책 <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는 <군주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니콜로 마키아벨리(이하 ‘마키아벨리’)가 쓴 <피렌체사>를 길잡이 삼아 피렌체를 소개하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의 구성을 따라가고 있다. 즉, 피렌체에서 펼쳐졌던, 평민들의 자유 투쟁을 그린 1부와 메디치 가문이 걸어온 영광의 역사를 기록한 2부로 구성된 <피렌체사>처럼, <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도>도 1부 평민의 시대(1216~1434)와 2부 메디치 가문의 시대(1434~1525)로 나눠 피렌체를 소개하고 있다.

동시에 과거 저자가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등을 통해 피렌체를 중세의 암흑을 걷어낸 르네상스의 도시로 봤던 관점에 대한 반성도 곁들이고 있다. 저자는 보는 사람이 첫눈에 반하게 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라는 화장을 걷어낸 피렌체는 계속된 분열과 투쟁으로 피에 물든 붉은 백합의 도시라는 것을 깨달았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노 강변에 핀 한 송이 백합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피렌체에서는 귀족과 귀족이, 귀족과 평민이, 평민과 평민이, 평민과 하층민이, 하층민과 하층민이 서로 싸우다가 결국 메디치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된다피렌체, 그곳은 피로 물든 거리였다. 지금까지 알던 피렌체는 잊어버리시라. 눈이 아닌 마음으로 피렌체를 보아야 한다! 피렌체는 아름다운 예술만 존재한 곳이 아니라 권력을 차지하려는 피 튀기는 투쟁, 이웃에 대한 끝없는 시기심, 조직적인 군사 반란과 길거리의 주먹다짐, 비열한 암살 시도와 간이라도 당장 빼서 줄 것 같은 아첨, 지배 받지 않으려는 평민과 하층민의 절규와 비명이 거리를 메웠던 곳이다. 피렌체의 성당과 공방, 수도원과 저택을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은 어쩌면 피로 물든 역사를 은닉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모른다. 가장 과격한 장소에 가장 아름다운 예술의 꽃이 피어 오른 도시가 바로 피렌체다. [p. 27]

 

 

서로 피를 부르는 복수극, 귀족의 몰락을 가져오다

 

‘피렌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메디치 가문을 떠올린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은 당시 유럽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다. 이들은 어떻게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을까?

 

이야기는 피렌체가 2차 삼두(三頭) 정치의 주역들에 의해 만들어진 무렵부터 존재했던,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가운데 하나인 베키노 다리(Ponte Vecchio)에서 시작한다.

12세기 이탈리아는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 봉건 영주 가문 중심의 교황파(Guelph)와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 부자 중심의 황제파(Ghibelline)로 갈려 다투고 있었다. 이들의 반목은 잘 알려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몬테규(Montague) 가문과 캐퓰릿(Capulet) 가문의 갈등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말도 비슷하다.

시작은 축하 연회에서의 사소한 다툼이었다. 하지만 교황파와 황제파의 대립이라는 화약고는 이 작은 불씨를 전통 귀족의 몰락이라는 큰 화재로 발전시켰다. 물론 중간에 불씨가 사그라질 수 있는 기회는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교황파의 맹주 부온텔몬티(Buondelmonti) 가문의 부온텔몬테는 두 차례나 화해를 위한 약혼을 파기하고, 교황파 가문의 부유하고 아름다운 여성과의 결혼을 강행했다. 이는 황제파에 대한 모욕과 도발로 받아들여져, 황제파의 맹주인 우베르티(Uberti) 가문이 결혼식에 가기 위해 베키오 다리를 건너는 부온텔몬테를 습격한다. 24년 후 이번에는 부온텔몬티 가문이 화해를 위한 결혼을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인 우베르티 가문을 결혼식장에서 몰살한다.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다시 10년이 흐른 뒤 우베르티 가문의 생존자가 신성로마제국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의 정권을 탈취하고 교황파의 생존자를 추방한다. 또다시 6년이 흐른 뒤 이번에는 교황파가 피렌체를 탈환하고 우베르티 가문의 저택을 파괴하고 그곳에 시뇨리아 정청(政廳)을 건축함으로써 교황파[부온텔모티 가문]와 황제파[우베르티 가문]의 길고 긴 복수극은 끝나고 만다.

 

힘을 회복해 다시 돌아온 교황파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피렌체 황제파의 수장인 우베르티 가문의 저택이었다. 웅장했던 저택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피렌체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베키오 다리는 시뇨리아 정청과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광장에 건축되지 않았고 한 블록 빗겨나 있다. 이렇게 불편하게 도시를 설계한 이유가 있다. 피렌체를 다시 차지하게 된 교황파가 우베르티 가문의 저택을 무너뜨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에 시뇨리아 정청을 새로 건축했기 때문이다. [p. 47]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에 따르면, 전통 귀족들이 이렇게 서로 피를 부르는 복수극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유력한 평민들(Grandi popolani, 이하 ‘그란디’)로 불린, 7개의 대형 직능 조합 출신 평민들이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행정장관직이 바로 귀족의 몰락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이런저런 구실로 귀족들을 행정장관직에서 배제했고, 결국 귀족들은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고 파멸했기 때문이다. 서로 대립하고 있던 귀족들은 처음에는 이런 변화에 저항하지 않았고, 그래서 귀족들끼리 서로 정부를 빼앗으려 애쓰다가, 마침내 그들 모두 권력을 잃고 말았다. [p. 60]

 

이렇게 권력을 획득한 평민,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인이거나 기술을 익힌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토록 싫어하던 귀족들의 행태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교황파 귀족들이 교황파 백당[비앙키]과 교황파 흑당[네리]으로 갈리고, 그들과의 거래 관계가 얽힌 평민이 가세하면서, 피렌체는 또다시 분열과 갈등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끝없는 자중지란(自中之亂)의 끝에 피렌체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아테네 공작이자 브리엔 백작인 프랑스인 발테르 6세(Walter Ⅵ, 1304~1356, 이하 ‘발테르 공작’)에게 종신 통치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장고(長考)끝의 악수(惡手)였다.

 

발테르 공작이 시민들에게 부과한 세금은 가혹했고, 그의 판결은 부당했으며, 그가 처음에 가장했던 성실함과 친절함은 교만함과 잔인함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많은 훌륭한 시민들과 뛰어난 평민들이 벌금을 물거나 추방당하거나 살해당했으며, 들어본 적도 없는 방법으로 고문을 받기도 했다.

~ 중략 ~

비록 그는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고 또 귀족들 중 상당수를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게 해주었지만, 그럼에도 계속 귀족들을 의심했다. 왜냐하면 자부심 강한 귀족이 자신의 절대 권력에 순순히 복종하며 살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하층민들에게 이득을 주기로 했다. 외국의 용병에다 하층민의 지지만 있으면 독재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pp. 107~108]

 

결국 1년도 지나기 전에 발테르 공작의 전횡에 지친 귀족들과 평민들은 그를 축출하기 위해 도시의 중심부인 메르카토 베키오(Mercato Vecchio)에 모여 무장 봉기를 한다. 이들은 발테르 공작의 지휘를 받는 하층민[미누티(Minuti)]과 전투를 벌였고, 끝내 발테르 공작으로부터 피렌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항복선언을 이끌어 낸다.

 

 

메디치 가문,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다

 

하지만,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귀족들과 평민들은 여전히 서로 ‘지배 받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나아가 프랑스 혁명 시기의 상퀼로트(Sans-Culotte)처럼, 피렌체의 최하층민[치옴피(Ciompi), 이하 ‘치옴피’]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치옴피를 대상으로만 사용하게 강제된 은화인 피치올로(Picciolo)가 지속적으로 가치 절하되면서 그들의 실질 구매력은 떨어져, 생활고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견디다 못한 그들은 산타 크로체 광장에 모여 임금 인상과 더 많은 일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평화로운 집회로 시작되었지만, 어떤 치옴피의 연설로 치옴피들도 ‘지배 받지 않을 자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던져진 불씨는 폭동과 집단 약탈로 물든 치옴피 반란(1378)으로 치달았다. 이 반란으로 치옴피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치옴피의 리더나 그들에게 우호적인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Salvestro de’ Medici, 1331~1388 ?, 이하 ‘살베스트로’)는 처음부터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실권은 옛 귀족 출신으로 피렌체의 마지막 그란디였던 알비치(Albizzi) 가문, 스트로치(Strozzi) 가문, 스칼리(Scali) 가문, 알베르티(Alberti) 가문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통치에 방해되는, 살베스트로 등은 차례로 추방되었다. 아마도 이 일 때문에 메디치 가문은 ‘동네건달’ 이미지는 탈피했을지 몰라도 ‘그란디들의 하수인’이라는 이미지는 더 짙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최후의 그란디 가운데 스트로치(Strozzi) 가문, 스칼리(Scali) 가문, 알베르티(Alberti) 가문이 몰락하자 남은 것은 교황파 흑당[네리]의 당수(黨首)였던 도나티 가운이 이름을 바꾼 알비치(Albizzi) 가문뿐이었다.

 

이 결정을 권고한 사람이 누구든, 그는 당신의 힘을 빌려 하층민들로부터 권한을 빼앗자마자, 그 침해로 당신의 적이 될 하층민들의 도움을 받아 당신의 권한을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오. 그리 되면 당신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던 자들의 설득으로 조르조 스칼리와 톰마소 스트로치의 파멸에 동의했으나 그 직후 자신을 설득했던 바로 그자들에 의해 추방당한 베네데토 델리 알베르티의 운명과 똑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오. [p. 195]

 

이러한 난장판 속에서 등장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 이하 ‘조반니’)는, 우리가 알고 있는 메디치 가문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매우 부유하지만 친절하고 자비로운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평민 귀족(Noviles populares)’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여기에 ‘치옴피 혁명의 아버지’ 살베스트로의 후광이 곁들여지자, 조반니는 이를 바탕으로 옛 귀족과 그란디, 평민들과 하층민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면서 피렌체 시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본업인 은행업에서 ‘의리와 신용’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간주되고 있음을 감안,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 교황 요한네스 23세에 대한 의리를 지켜, 한번 거래한 고객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조반니의 뒤를 이은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519~1574, 이하 ‘코시모’)는 대규모 공공 건축 사업을 펼치고 예술가들을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나아가 이렇게 ‘우리 모두를 위해 아낌없이 베푼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서 피렌체 시민들에게 메디치 가문의 사소한 잘못은 눈감아주어야 한다는 부채의식과 나도 기회가 오면 엄청난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기대 심리를 조장했다. 덕분에 1433년 10월 오랜 정적(政敵) 알비치 가문에 의해 추방되었지만 1년 만에 반대로 알비치 가문을 추방하고 되돌아갈 수 있었다. 이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실질적인 참주(僭主)가 되었다.

피에로 데 메디치(Piero de Medici, 1416~1469)의 짧은 통치를 거쳐 새로운 메디치가의 가주가 된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 이하 ‘로렌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는 은행가가 아닌 문학적 소양을 갖춘 군주처럼 행동했고, 본업인 은행 경영에서 멀어져 점차 관리 감독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로렌초가 은행업에 무관심해지자 메디치 은행의 주요 지점들도 잇달아 문을 닫았다.

 

로렌초의 뒤를 이은 ‘불행한 자’ 피에로 데 메디치(Piero de’ Medici, 1472~1503)는 무능한 리더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창과 칼로 싸우던 시대에서 대포와 화약으로 싸우는 시대로의 변화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밀라노의 군사력을 지렛대 삼아 ‘힘의 균형’을 유지하던 외교정책을 즉흥적으로 변경한다. 이 결정으로 밀라노와 프랑스가 침공하자 그는 겁을 집어먹고 피사 항구 등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추진했다. 피렌체의 목줄을 넘겨주려는 협상은 피렌체 시민에 의해 거부되었고, 그를 포함해 겁을 집어먹은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제일 먼저 도시에서 탈출하고 만다.

 

 

모든 것을 독점하려다 모든 것을 잃게 되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

 

마키아벨리는 지금까지 메디치 가문, 귀족, 그란디의 지배하려는 욕망과 이들의 지배를 거부하려는 피렌체 평민과 하층민들의 적의가 모든 악의 근원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충돌은 로마에서도 일어났다. 로마나 피렌체나 계급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을 가진 자와 지배 받는 자, 많이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자본가와 노동자는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국가나 도시, 혹은 집단이 분열된다면 그것은 두 계급 모두에게 해악을 끼치는 일이다. 이것이 악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로마는 어떻게 충돌을 막고, 세계를 호령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을까? 피렌체는 이 충돌 때문에 몰락해갔다지만, 로마는 이 악의 근원을 슬기롭게 피해 갔다피렌체는 계급 간의 싸움을 이어갔지만, 로마는 논쟁을 거쳐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피렌체는 한쪽의 압도적인 승리를 갈구했지만, 로마는 양보를 통해 양쪽의 승리를 도모했다. 로마에서 지배하려는 자는 타협할 줄 알았고,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자는 지배하려는 자와 명예를 함께 누리는 법을 알았다.

~ 중략 ~

하지만 피렌체에서는 평민이 승리하자 귀족은 정부의 요직에서 철저히 배제당했다. 따라서 만일 귀족이 다시 관직에 오르려면, 행동과 성격과 생활방식 모두 진짜 평민이 되거나, 적어도 평민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평민의 호의를 얻기 위해 가문의 문장과 이름을 바꾸는 귀족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귀족 안에 있던 관용의 정신과 군사적 미덕은 사라지고 말았고, 결코 한 번도 이것들을 가져본 적 없는 평민의 내면에서 다시 이것들을 살려낼 수도 없었다. 그 결과 피렌체는 점점 더 왜소해지고 비루해졌다. [pp. 415~417]

 

라고 얘기한다. 로마인과 달리 피렌체 사람은 서로 ‘지배 받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권력투쟁에 몰두한 결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몰락이라는 배드엔딩을 가져왔다. 어쩌면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인 김상근 교수도 후기(後記)에 해당하는 ‘피렌체를 떠나며’에서

 

권력을 잡은 자와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지배하려는 자의 욕심과 지배 받지 않으려는 자의 저항이 우리 사회가 지탱할 수 있는 비등점을 넘어, 일촉즉발의 위기에 몰려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은 이미 도를 넘었다. 제3의 집단임을 자처하는 정치가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오히려 두 집단의 갈등을 부추긴다. 두 집단을 갈라치면 칠수록 사회적 갈등은 양산되고, 정치가들에게 돌아갈 이익은 커진다. 분열되면 흥분하기 쉬운 것이 대중의 속성이고, 흥분한 대중은 이성을 잃고 진영 논리의 이분법에 빠져들게 된다. 진영 논리 속에서 정책과 미래 전망은 빛을 잃는다. 무엇을 이야기하는 지보다 어느 쪽에 속했는지가 사리판단의 기준이 된다. [pp. 420~421]

 

라고 얘기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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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의 리스본 - 작가들이 사랑하는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가 안내하는 리스본 여행 가이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박소현 옮김, 최경화 감수 / 안그라픽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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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 지나도 유효한 리스본 여행 가이드북

 

이 책, <페소아의 리스본(Lisbon: What the Tourist Should See)>은 포르투갈의 국민작가인 페르난두 안토니우 노게이라 페소아(Fernando Antonio Nogueira Pessoa, 1888~1935, 이하 ‘페소아’)가 1925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리스본 여행 가이드북이다. 매년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한 여행 가이드북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책은 박물관에나 가야 할 골동품처럼 느껴질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한다. 물론 20세기 초반 유럽을 여행했던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다시 여행해보는 것은 독특하고 신선할 것이다.

하지만 여행 가이드북으로써 유효할까? 한국으로 치면,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1875년이 쓴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를 가이드북 삼아 한라산 유람을 하는 셈이니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다행히 이 책을 들고 직접 리스본을 다녀온 옮긴이와 현재 리스본에 거주하는 감수자에 의하면, 리스본은 페소아가 살던 시절과 지금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한다.

 

2017년 3월, 이 책을 들고 방문한 리스본은 다행히도 “스스로를 엉망으로 만드는 도시가 아닌”지라 페소아가 살던 시절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책에서 언급된 건축물은 대부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생긴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다. [p. 18]

 

아, 한 가지 더. 한국어판은 원서와 다소 다르게 편집되어 있다고 한다.

 

원서는 리스본 전체를 하루에 둘러보는 빠듯한 여정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한국어판에서는 본문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구역별로 나누었다(마지막 두 장 ‘리스본의 신문들’과 ‘켈루스를 거쳐 신트라’를 제외한 장은 모두 편집 과정에서 임의로 넣은 것임을 밝혀둔다). 한 구역을 찬찬히 살펴보는 데 반나절 정도 걸리지만 도보 여행을 계획한다면 시간을 더 넉넉하게 잡기를 권한다. 또한 페소아는 자동차를 타고 리스본을 둘러보자고 제안하지만, 지금의 리스본은 그보다는 가끔 전차의 도움을 받아가며 도보로 둘러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고 효율적이다. 또한 지금은 필요 없는 페소아 당대의 여행 정보를 모두 원문대로 수록했다. 대신 해당 장소에 주석을 달아 현재의 정보와 그 사이 달라진 내용을 일러두었다. [pp. 17~18]

 

 

페소아는 왜 리스본 여행 가이드북을 썼을까?

 

페소아가 그의 계부(繼父)를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으로 옮겨가서 살면서, 그곳 사람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포르투갈에 대해 무지(無知)하다는 것에 이 책을 기획했다고 한다.

 

보통의 영국인, 그뿐만 아니라 (스페인 사람을 제외하면) 어느 나라 사람이건 포르투갈을 유럽 어딘가에 있는 작은 나라로, 심지어는 스페인의 한 지방인 줄로만 안다.” 페소아는 남아프리카 시절 외국인, 특히 영국인이 포르투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들이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쪽 해안을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조차 모른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pp. 12~13]

 

하지만 다른 사람과 달리 페소아는 자신의 모국 포르투갈과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 리스본을 외국인에게 알릴 방법을 고심했다.

 

페소아는 자신의 리스본을 이방인 앞에 가장 잘 내보일 방법을 고심하며 관광 코스를 구상했을 것이다. 이렇게 여행 안내서를 쓰는 것만큼 한 도시에 대한 사랑을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특히 그처럼 여행을 혐오하고 “정주적 삶을 향한 유기적이고 숙명적인 애정”으로 뭉쳐 있는 사람에게 리스본은 그가 속한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이었을 테다. 덕분에 우리는 다른 안내서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방식으로 리스본의 과거와 현재, 북적이는 관광 명소와 인적 드문 거리 사이를 오갈 수 있게 된다. [p. 17]

 

예를 들어 본래 군사훈련장이었으나 리스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 되었다는 캄푸 그란드(Campo Grande)를 보자. 얼마나 넓은지[면적], 언제 공원이 되었는지, 어떤 시설이 있는지 등에 대해 설명하고 마지막에

 

캄푸 그란드 공원은 제일 인기 있는 일요일 나들이 장소 중 하나다. 일요일이면 공원 사이사이로 난 길을 따라 인파가 몰려들고 도로 왼쪽은 말과 마차로 분주하다. 공원 한쪽 끝에는 포르투갈 스포츠클럽의 축구장이 있고, 공원 뒤쪽으로 가면 왼쪽에 동 페드루 5세 구빈원과 보르달루 피녜이루 미술관이 나온다. 그리고 하울 사비에르가 제작한 이 유명한 국민 예술가 보르달루 피녜이루의 청동상이 보인다. [p. 54]

 

라는 말로 마무리 한다.

 

호시우(Rossio) 혹은 동 페드루 4세 광장

사진 출처: <페소아의 리스본>, p. 90

 

리스본의 중심지로 ‘호시우(Rossio)’라고 부르는 동 페드루 4세 광장은 거의 모든 대중교통이 지나가는 곳이라고 한다. 때문에 리스본에 머물 숙소를 구하려면, 이곳이 가장 적당한 곳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여행 가이드북이 그렇듯이 이 책도 리스본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리스본에는 예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감성을 자극하는 수많은 볼거리가 있지만, 포르투갈을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수도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리스본에 처음 왔다면 누구나 테주강 유역의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일곱 언덕 위에서 보이는 근사한 경치, 공원과 기념비, 오래된 거리와 새로 난 대로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교외 지역 또한 그 나름대로 볼만한 가치가 있다. 리스본 근교의 풍광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자연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건물의 아름다움이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리스본 근교로 나가보도록 하자. 함께 가는 이방인은 이 짧은 여행에 쓰는 시간을 잠시라도 낭비라 여기지 않을 것이다. [p. 162]

 

라는 말과 함께 리스본 교외의 ‘리스본 동물원’, 로코코 양식의 궁전인 ‘켈루스궁(Palacio de Queluz)’, ‘신트라 언덕(Serra de Sintra)’과 ‘무어인의 성(Castelo dos Mouros)’ 등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거나 언급되어 있다.

 

 

여행 가이드북으로서의 아쉬움

 

대부분의 여행 가이드북과 달리 이 책은 대부분의 장소를 사진 없이 말로 소개하고 있다. 아마 원서에 사진이 없어 현재의 사진을 넣기도, 과거의 사진을 넣기도 애매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어쨌든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또 하나는 지도다. 페소아가 제시한 경로를 꼼꼼하게 표시한 지도와 원문이 인터넷에 공개(http://lisbon.pessoa.free.fr/)되어 있다고 하지만 QR코드로 바로 접속할 수 있도록 하면 더 편리하지 않을까?

 

리스본 지도

사진 출처: <페소아의 리스본>, 책날개의 앞날개

 

위의 사진처럼 책 속에서 페소아가 소개한 리스본의 장소들이 지도상에 숫자로 표시되고 본문에서 언급될 때에는 지도상의 위치(숫자)가 함께 적혀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로 인해 어디가 어딘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 출처: <페소아의 리스본>, p. 65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100여 년 전에 쓰여진 리스본의 여행기에 장소에 따라 현재의 운영시간과 입장료가 표기되어 있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책이라는 점에서 리스본 여행을 시도하는 이에게 색다르고 재미있는 선택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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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그리고, 타이베이 - 이메이의 어반스케치와 펜드로잉으로 기억하는 대만 여행
이명희(이메이) 지음 / 밥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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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그리고, 타이베이]는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많은 이들이 해외로 나갔고, 그 만큼 많은 여행 에세이가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같은 지역에 대한 에세이를 읽으면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게 되었다. 타이베이[臺北]이라고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 책, <걷고 그리고 타이베이>는 기존의 타이베이 여행 에세이와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첫째, 여행지의 풍경과 현지의 음식을 사진 대신 드로잉으로 만난다는 점이다. 분명 같은 공간, 같은 음식인데도 펜으로 그려진 드로잉으로 만나면 느낌이 달라진다.

둘째, 책 제목에 굳이 ‘걷고’를 붙일 만큼 저자가 많이 걸었다는 것이다. ‘타이완[臺灣]’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타이베이는 최소한 수도 역할을 하는 도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을 걸어서 여행한다니……. 마치 서울 걷기 여행 같은 느낌이 들어 신기했다. 물론 여기에는 저자가 어반 스케치(Urban sketch)를 위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피사체를 그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도 왠지 걸어서 여행한다는 것은 낭만적인 감상에 젖게 한다. 이제는 찾기 힘들어진, 구불구불 복잡하게 엮인 골목길에 대한 향수(鄕愁)처럼.

 

 

먹고

 

그러면 구체적으로 작가의 눈에 비친 타이베이는 어떤 모습일까?

중국인은 다리가 4개인 것은 의자 빼고 다 먹고,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기 빼고 다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에 대해 얘기하면서 식도락(食道樂)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 타이베이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식사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예를 들면,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100년 된 역사의 상어 국수 가게를 지나치고 나중에 후회한 얘기를 들 수 있다.

 

타이베이의 골목길, 뜬금없는 장소에 유명한 맛집이 숨어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보물찾기라도 한 것처럼 신기했다. 그 식당에만 사람들이 북적북적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꼭 이럴 때 감이 떨어진다. 아쉬웠다. 한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상어고기를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인데 말이다. [p. 57]

 

저자가 인터넷 검색을 좀 더 하고 갔다면 달랐을까? 왠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구절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어고기 국수[?魚麵]가 아니라 우육면(牛肉麵)이지만, 저자는 미슐랭가이드1)에 소개된 식당을 방문하게 되었다. ‘건굉(建宏) 우육면’과 ‘융캉[永康] 우육면2)’이 바로 그 식당이다. 아마도 우육면이 타이베이의 대표적인 요리 가운데 하나라서 그런지 미슐랭가이드에 올라간 식당도 많이 존재하는 것 같다.3) 이렇게 미슐랭가이드에 선정된 식당이라면 맛이 궁금해지는데, 저자의 입맛에는 ‘건굉 우육면’쪽이 맛과 가성비 면에서 더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세계에서 꼭 가보고 싶은 레스토랑 100선에 꼽히기도 한 딘타이펑[鼎泰豊]은 육즙 가득한 샤오롱바오[小龍包]로 유명한데, 저자는 갈 때마다 대기시간이 최소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어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 긴 대기 줄에 질려 돌아다니다가 지쳐서 도달한 곳이 ‘항주소룡포’로 이곳도 유명한 맛집이라서 꽤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여기서 맛본 것이 샤오롱바오와 고소하고 부드러운 새우 살이 감칠맛 나는 새우 사오마이[燒賣]인데, 저자에게는 샤오롱바오보다 새우 사오마이가 더 맛있게 느껴졌다고 한다.

 

원래 여행은 계획대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아니 여행은 계획에서 일탈해야 즐거운 여행이 된다. 왜냐하면 여행 계획과 여행의 목적에 신경을 쓰다 보면, 뭔가 꼭 경험해야 할 것 같고, 놓치지 않고 즐겨야 할 것 같은 불안함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여행이 가져오는 여유로움은 사라진다. 그래서 일러스트레이터(illustrator) 영민이 <당신의 치앙마이는 어떤가요>에서 “가끔은 목적지에 가기 위한 여정이 목적지 그 자체보다 의미를 가지기도 하니까.4)라고 한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래서 저자도

 

언제인가부터 여행을 가게 되면 꼭 가고 싶은 장소 리스트를 만드는 일이 줄어들었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은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어떻게든 가게 되는 법. 물론 일정이 꼬이거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겨서 못 가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지만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곳에 못 가서 아쉬운 마음이 생길수록 그곳에 다시 가야 할 핑곗거리가 하나 더 생기는 것 같았다. [p. 260]

 

라고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자그마한 일탈과 우연들이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여행을 더 값지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향신료 같은 역할을 해준다. 그래서 여행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예측불허의 안개 같은 것이 된다.

 

 

걷고

 

내가 경험한 서울, 베이징, 타이베이의 주요 교통수단은 모두 달랐다. 물론 베이징이나 타이베이에 자동차가 적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방문했던 베이징, 타이베이와 지금의 베이징, 타이베이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인상적인 것은 도로 위를 달리는 서울의 자동차, 베이징의 자전거와 타이베이의 오토바이였다.

 

대만은 오토바이가 자동차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니 오토바이가 많을 수 밖에 없다. 대만도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좁은 국토에 많은 인구가 수도인 타이베이에 밀집되어 있다. 그 탓에 교통체증이 심각해서 오토바이를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도로와 거리에 오토바이가 많은 점은 이웃 동남아 국가인 베트남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베트남과도 다르다. 베트남의 도로와 거리는 수많은 오토바이의 행렬로 무질서하고 복잡하다 못해 때론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면에 타이베이의 오토바이 부대는 그에 비해 정리가 잘 되어 있고 덜 혼잡해 보였다. [pp. 160~161]

 

누군가 나에게 여행을 제대로 즐기려면, 방문한 곳의 재래시장을 둘러보라고 권한 적이 있다. 아마도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이 생활하는 공간이자 도시의 민낯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기에 그런 얘기를 한 것이리라. 물론 그 재래시장이 대놓고 ‘여기는 관광객을 위한 공간’이라고 내세우면 다른 얘기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부키[歌舞伎] 공연을 위해 분장한 무용수를 보고 민낯을 짐작하라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도시에서 어두워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여행사나 가이드가 권고하는데, 야(夜)시장으로 유명한 타이베이의 경우에는 예외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타이베이의 야시장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는 관광객이 현지의 공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완벽한 하드웨어를 갖춘 ‘스린[士林] 야시장’, 인기 먹거리 20여 가지를 한 테이블에 차려내는 천세연(千歲宴) 행사로 유명한 ‘닝샤[寧夏] 야시장’, 타이베이 최초의 관광 야시장인 용산사 부근의 ‘화시가(華西街)’가 유명하다.

 

즐기다

 

여행 중에만이라도 마음이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이고 싶다는 말은 명소를 배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저자도 여러 명소를 방문했다. 이 책에 그려진 장소 가운데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이나 용산사(龍山寺) 같은 곳은 나도 가본 곳이기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특히 용산사 정문의 지붕장식을 그린 것은 낡은 인화사진으로만 남아있던, 공간을 꽉 채우는 향냄새로 가득한 용산사를 다시 떠오르게 했다.

 

용산사 정문의 지붕장식

 

출처: <걷고, 그리고 타이베이>, p. 207

 

중정기념당 전경

 

출처: <걷고, 그리고 타이베이>, p. 248

 

쓰쓰난춘[四四南村]은 1949년 이후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의 군인과 그들의 가족 등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오래된 마을이다. 그렇기에 도시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철거 대상이 되었다. 다행히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려는 도시재생 움직임 덕분에 완전히 철거되지 않고, 복합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기념품과 굿즈를 파는 ‘굿초[Good cho’s; 好丘]’라는 편집숍은 이런 노력의 결과물 가운데 하나다. 덕분에 이곳을 방문하면, 타이베이의 과거와 현재, 옛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쓰쓰난춘 내부에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생활 소품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자그마한 공간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것이 아닐까?

 

내가 예전에 타이베이를 방문했을 때는 패키지로 가서 그런지 굳이 또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책 <걷고 그리고, 타이베이>를 읽다 보니, 왠지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마도 사진과는 다른 감성의 드로잉 때문에 소개된 장소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생겼나 보다.

 

 

옥의 티

 

중국어 표기 방식을 하나로 통일했으면 좋겠다. 건굉(建宏) 우육면’과 ‘융캉[永康] 우육면’처럼 하나는 한자음으로, 다른 하나는 중국어 원음으로 표기되어 있으면 왠지 어색하고 거슬린다.

 

1) ‘미슐랭가이드’로 표시되어 있지만, 정확하게는 가성비가 좋은 식당을 선정한 미슐랭가이드 빕구르망(Michelin Guide Bib Gourmand Table)이다.

2) 이 책에는 ‘융캉 우육면’이 이연복 셰프가 방문한, 현지에서 유명한 맛집으로만 소개되어 있는데, ‘건굉(建宏)우육면’과 함께 미슐랭가이드 타이베이 빕구르망(Michelin Guide Taipei Bib Gourmand Table)에 이름이 올라간 식당이기도 하다.

3) 미슐랭가이드 타이베이 빕구르망 2018을 보면, 36곳의 레스토랑 가운데 淸眞中國牛肉麵食館, 建宏牛肉麵, 老山東牛肉家常麵店廖家牛肉麵, 林東牛肉麵, 劉山東牛肉麵, 牛店精燉牛肉麵, 永康牛肉麵 8곳의 우육면 가게가 포함되어 있다.

4) 영민, <당신의 치앙마이는 어떤가요>, (북노마드, 2022), pp. 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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