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네스크 성당, 빛이 머무는 곳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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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양식이 형성되기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형성, 발달에는 ‘로마다운’이라는 뜻을 가진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게르만족의 로마에 대한 로망이 작용하고 있다. 이런 로망이 생기게 된 것에는 그들이 로마 제국을 문명의 상징으로 간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때 우리의 부모 세대가 도자기조차 미제를 원해 코넬사의 강화유리 제품을 새롭고 좋은 도자기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래서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을 때, 내심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로마’라는 객관적인 문명의 기준이 사라졌으니까.

아마도 이런 기억들이 게르만족과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슬라브족의 심층심리에 새겨져서 그들이 각각 제2의 로마[신성로마제국], 제3의 로마를 주장한 것이 아닐까?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게르만족들은 각자 자기방식대로 로마 제국에 정착했다. 그 중 하나인 프랑크족의 프랑크 왕국에서 재미난 일이 발생했다. 후한(後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조조(曹操)가 선양(禪讓)받아 위(魏)나라를 세운 것처럼, 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였던 소(小)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로부터 선양(禪讓)받아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했던 것이다. 선양이라는 이름의 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소(小) 피핀은 로마 교황의 권위를 빌려 피핀 3세로 즉위했다. 그렇기에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요청을 받자,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Pippinus Ⅲ, 재위 751~768)와 그 뒤를 이은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재위 768~814)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자리잡은 롬바르디아 왕국(Regnum Langobardorum, 568~774)을 공략, 프랑크 왕국에 편입시켰다. 이는 건축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롬바르디아 왕국에서 정리, 발전시키고 있던, 로마 건축과 비잔틴 건축의 기술을 서유럽 전체로 퍼트리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탄생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시공간적으로 단절된 로마 건축과 비잔틴 건축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어떻게 10세기 프랑크 왕국에 나타났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 궁금증을 풀어줄 열쇠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게르만족의 일파로 알프스 북쪽에 살다가 568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자리를 잡은 롬바르디아 왕국입니다.

~ 중략 ~

6~8세기 롬바르디아 왕국에서 발생한 건축을 롬바르디아 건축이라고 부르는데, 왕국은 국가차원에서 건축 장인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호 육성하는 전통이 있어 높은 수준의 건축 기술, 특히 조적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롬바르디아 건축의 조적술은 로마 제국보다는 비잔틴 제국의 조적술에 가까웠습니다.

콘크리트로 중심 벽체를 만들고 그 외벽에 높이가 낮은 벽돌을 쌓는 방식의 로마 제국의 조적술은 강도는 좋았지만, 작업이 복잡하고 벽체가 두꺼워져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반면에 비잔틴 제국의 조적술을 오직 조적으로만 벽체를 만드는 방식으로, 벽돌 하나의 높이가 높고 콘크리트 작업이 없어서 공사가 단순하고 소요 시간이 적었습니다. 롬바르디아 왕국은 이탈리아에서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하면서 제국의 조적술을 배우고 정리해 발전시켰습니다. [pp. 42~43]


덕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싹도 카를루스 대제 시기에 발생했다. 그는 아헨 왕궁 성당(Palatine Chapel in Aachen)을 건설했는데, 로마 제국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장방형 평면의 성당)을 따르면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산비탈레 성당(Basilica di San Vitale)의 팔각형 평면과 복층 갤러리를 수용, ‘프레-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불리는 로마네스크 성당의 맹아(萌芽)를 보여주었다.


로마네스크 성당의 구조와 명칭

 

출처: <로마네스크 성당>, p. 37


 

각 국가별 로마네스크 성당  


로마네스크 성당의 특징으로는 창문과 문, 아케이드에 로마식 반원형 아치를 많이 사용한 점, 건물 내부를 떠받치기 위하여 원통형 볼트와 교차 볼트를 사용한 점, 또 아치 때문에 수평으로 발생하는 힘에 견딜 수 있도록 기둥과 벽을 두껍게 구축하는 반면 창문을 되도록 작게 만들었다는 점 등이 있다.

이런 로마네스크 양식은 십자군이나 성지 순례에 의해 여러 양식이 교류하면서 발전했고, 특히 수도회의 융성과 활약으로 여러 지역에 전파되었다.


야고보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낸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의 무덤은 순례의 중심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지중해의 머나먼 뱃길 끝 예루살렘보다도, 알프스의 높은 산 너머 로마보다도, 지척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서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순례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이미 네 갈래의 고정적인 순례길이 생겨났고, 이 순례길들이 지나는 곳에는 크고 작은 도시들이 형성되었으며, 그 곳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바탕으로 하는 순례 성당이 지어졌습니다. [p.101]



프랑스의 로마네스크는 ‘보편주의’와 ‘지역주의’라는 두 갈래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보편주의는  ‘몽샐미셸 수도원 성당(Abbaye du Mont-Saint-Michel)’으로 대표되는 북쪽의 노르망디 지방의 로마네스크와 ‘제 2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Ⅱ)’으로 대표되는 남쪽의 부르고뉴 지방의 로마네스크로 나뉜다. 이러한 프랑스 남부 초기 로마네스크 성당은 11세기 전반부에 그 형식이 완성되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전파되었다. 이런 보편주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성기는 노르망디 지방의 ‘캉의 생테티엔 수도원 성당(Abbaye Saint-Etienne de Caen)’와 부르고뉴 지방의 ‘제 3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Ⅲ)’로 대표된다.

지역주의로는 프랑스 남서부 지역의 성당이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홀(hall) 교회 양식의 ‘생사뱅 수도원 성당(Abbaye de Saint-Savin-sur-Gartempe)’과 네이브(nave)1)의 베이(bay)2)마다 천장이 석조 돔으로 올려진 돔(dome) 교회 양식의 ‘앙굴렘 대성당(Cathedrale Saint-Pierre d’Angouleme)’이 있다.



독일 북부의 초기 로마네스크는 보통 ‘오토 건축’이라고 불린다. 웨스트워크 자리에 이스트엔트의 성가대석과 앱스의 구성이 한 번 더 들어가는 ‘더블 엔더’가 특징인 이 양식은 작센 지역의 ‘힐데스하임의 성 미카엘 성당(Michaeliskirche in Hildesheim)’과 라인란트 하류 지역의 ‘트리어 대성당(Trierer Dom)’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지역주의 성향의 오토 건축은 ‘제1 슈파이어 대성당(Speyerer Dom Ⅰ)’ 의 완공으로 보편주의로 성장했지만, 독일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것은 ‘제2 슈파이어 대성당(Speyerer Dom Ⅱ)’이다.


국가 차원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이탈리아를 두고 서로 경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차원에서는 보편 교회인 로마와 가까운 프랑스 교회와 독일의 지역 교회가 긴장 관계에 놓였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이러한 대치는 성당 건축에서도 드러났는데, 제3 클뤼니 성당과 제2 슈파이어 성당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제3 클뤼니 성당은 보편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종교적인 면이 강했던 반면, 제2 슈파이어 성당은 지역 교회 차원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많이 띠었습니다. 하지만 두 성당 사이에 공통점도 있었는데 그것은 각각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종합한 것과 그 결과로 모두 대형화를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제2 슈파이어 성당은 독일 로마네스크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으로 독일 로마네스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pp. 173~177]


덧붙이자면,


독일의 로마네스크는 프랑스 로마네스크가 보여준 입체적이고 복잡한 구조와는 달리 평면적이고 단순하며 추상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프랑스의 로마네스크가 수직성을 강조하면서 국가보다는 교회의 우월성을 나타냈다면 독일의 로마네스크는 수직성과 수평성을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와 함께 표현하려고 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p. 180]



영국의 로마네스크 성당을 대표하는 것은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과 전성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더럼 대성당(Durham Cathedral)’다. 이들 영국 로마네스크 성당에는 기하학적이고 장식 위주의 ‘영국 로마네스크 양식’의 독특함이 묻어나 있다.

첫째, 수평성을 선호하는 영국의 정서가 반영되어 슈베(chevet)3)가 동쪽으로 길게 확장되어 있다.

둘째, 네이브도 확장되어 있다.

셋째, 로마 벽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회반죽 벽돌 쌓기를 통해 건물의 무게감 있는 외관을 강조한다.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대형화란 천장고를 높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나 영국에서는 성당의 길이를 확장하는 것을 선호한 것입니다.

영국 로마네스크는 건물의 무게감 있는 외관을 강조한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역할을 한 것은 로마 벽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회반죽 벽돌 쌓기입니다. 프랑스는 석재의 물질성과 구조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수직성을 추구했지만, 영국은 벽돌을 재료로 수평성을 유지했습니다. [p. 197]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 성당은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 등의 전통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보편주의가 아닌 지역주의에 속한다. 대표적인 성당으로는 롬바르디아 지역의 ‘성 암브로시오 바실리카(Basilica de Sant’Ambrogio)’, 토스카나 지역의 ‘산미니아토 바실리카(Basilica di San Miniato al Monte)’가 있다.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는 알프스 이북의 로마네스크에 비해서 로마 고전주의와의 연속성이 훨씬 깊습니다.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이 로마 고전주의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네이브월을 구성하는 아치, 오더, 볼트 등의 요소들과 바실리카에서 발전한 라틴 크로스 평면 역시 로마 고전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는 로마네스크의 고전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p. 210]


또한,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교회와 지중해의 전통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첫 번째 특징을 이룬 것입니다.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두 번째 특징은 지역주의입니다. 롬바르디아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지역, 토스카나의 중부 지역, 그리고 시칠리아가 주도한 남부 지역이 각기 고유한 특징을 보입니다. 이러한 두 요인으로 인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는 초기와 전성기라는 시대적 구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pp. 205~210]


중세 유럽이 ‘라틴어’라는 보편 언어와 ‘그리스도교’라는 보편 종교로 하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달과정에서 보듯이 각 국가별로 지역주의의 싹이 드러난 것이 훗날 국민국가로의 변화를 암시하는 듯해서 흥미로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이 책에서 소개된 성당들을 통해 로마네스크 양식, 그리고 로마네스크 성당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중에 유럽에 갈 기회가 있으면 좀 더 보고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에 있다는 3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인천 답동성당, 전주 전동성당)을 방문하더라도 예전에 방문해서 보다 느꼈던 것과 다른 무엇인가를 더 보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1) 네이브(nave, 身廊): 중랑(中廊)이라고도 한다.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의 내부 중앙 부분으로, 성당에서 가장 넓은 부분이고 일반적으로 예배자를 위한 장소로 사용된다.


2) 베이(bay): 네 기둥으로 구획되는 평면의 한 단위를 의미한다.


3) 슈베(chevet): 대성당에서 본당 동쪽 끝의 반원형 부분, 두부(頭部)라고도 번역된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祭臺)와 그 근처의 성가대석을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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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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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양식, 거룩한 신비의 빛]은 어떻게 구성되었나? 


이 책의 목차를 보면, 고딕 양식을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구조의 발달 단계에 따라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초기 고딕’, ‘전성기 고딕’, ‘후기 고딕’으로 나누고, 국가에 따라 ‘영국 고딕’, ‘독일 고딕’, ‘이탈리아 고딕’으로 나눈 것은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준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하면 이 책은 프랑스[초기, 전성기, 후기], 영국, 독일, 이탈리아 유럽 4개국의 고딕 양식을 국가별로 대표적인 성당들을 사례로 들어 소개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딕 양식이란?


‘로마네스크’가 ‘로마다운’이란 뜻이었다면, ‘고딕’은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을 가리키는 ‘고트인의’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 중략 ~

‘고딕’이라는 이름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이 양식을 두고 게르만족의 세련되지 못하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경멸하면서 붙인 것인데, 계속 사용하면서 후대에 공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p. 8]


마치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는 ‘中’國이고, 자신들의 문화는 ‘華’라고 자부하면서 주변 국가와 문화를 ‘夷’라고 무시하는 것처럼, ‘고딕’이라는 명칭도 이탈리아인의 뒤틀린 자존심에서 붙여진 셈이다.


그렇다면 이 고딕 양식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정치적으로는 왕령지(王領地)를 실질적인 왕의 땅으로 만든 루이 6세(재위 1108~1137) 이후, 카페 왕조는 왕권 강화를 시작하여 중앙집권적 군주 국가로의 변화가 진행되었다. 종교적으로는 ‘서임권 분쟁’으로 유명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재위 1073~1085)의 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세속권력으로부터 성직자 임명권을 회수하여 교황권을 강화했다. 지리적으로는 카페 왕조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던 일 드 프랑스가 ‘몽샐미셸 수도원 성당(Abbaye du Mont-Saint-Michel)’으로 대표되는 북쪽의 노르망디와 ‘제 2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Ⅱ)’으로 대표되는 남쪽의 부르고뉴 프랑슈 콩테(이하 ‘부르고뉴’) 사이에 있어 노르망디의 일체성과 부르고뉴의 대형화를 조화한, 보편주의 건축을 태동시킬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요소의 교집합이 루이 6세와 루이 7세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생드니 수도원장인 쉬제(Suger, 1081~1151)였다. 그는 수직화와 경량화라는 모순의 갈등을 해결할 새로운 건축 양식, 즉 고딕 양식을 내놓았다. 최초의 고딕 양식 성당이라 할 수 있는 생드니 대성당(Cathedrale royale de Saint-Denis)에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전성기 고딕 성당의 요소


고딕 양식의 사상적 배경이 된 스콜라철학은 사유의 논리를 타인도 알 수 있는 명료성[명료화 원리]을 추구하고, 대론[~라고 생각된다. 正]과 반론[그러나 반대로. 反] 그리고 대답[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고 답한다. 合]으로 이어지는 논증 방식[일치(concordantia)의 원리]을 따른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건축에 있어서 이전까지 사용해오던 두 요소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면 그 중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연구를 통하여 두 요소가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파사드의 창을 예로 들면, 전통적인 아치창은 긍정(대론)이고, 생드니 대성당에 나타난 아치창 위의 장미창은 부정(반론)입니다. 문제의 해결(대답)은 위그 리브르지에 건축가가 생니케즈 성당에서 장치창 안에 아치창을 통합함으로써 이루어냅니다.

고딕 성당의 수직화와 경량화라는 상호 모순의 두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고딕 건축가들은 유기적인 구조 체계를 연구했고, 결국 포인티드 아치, 리브 그로인 볼트, 플라잉 버트레스 등의 구조 부재들을 고안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해결 방식이 일치성의 원리라는 스콜라철학의 습성이 확산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pp. 104~105]


저자는 고딕 성당 양식의 싹을 틔운 쉬제가


하느님의 집인 성당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곧 창조주께서 첫날 만드신 빛으로 성당을 밝히고 그 안에서 둘째 날, 셋째 날의 피조물들로 가득 채우는 것이 그의 꿈이었을 것입니다. [p. 53]


라고 얘기한다. 쉬제의 바램 때문인지 고딕 성당의 벽체는 높고 얇게, 창은 크고 넓게 설계되었고 이로 인해 실내에 들어오는 빛의 양이 충분히 증가했다. 덕분에 성당의 맑은 투명창을 오늘날 고딕 성당하면 떠오르는 요소 가운데 하나인 색유리창[스테인드글라스]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모든 공간적 변화는 수직성의 원천인 포인티드 아치[Pointed Arch, 첨두(尖頭)아치)], 천장에 설치되어 하중을 안정적으로 분산하는 리브 그로인 볼트[Rib Groin Vault, 늑재 교차 궁륭(肋材 交差 穹窿)], 건물 외벽에서 팽창하는 힘을 지탱하고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는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 공중 버팀벽] 덕분에 가능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건축 기술을 고딕 성당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핵심이라고 한다.


고딕성당의 구조


출처: <고딕성당>, p. 92



각국의 고딕 성당


프랑스 고딕은 건축 구조의 발달 단계에 따라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초기 고딕, 전성기 고딕, 후기 고딕으로 나뉜다. 초기 고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수직성을 지향하는 생드니 대성당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Nortre-Dame de Paris), 수직성과 더불어 고전적 비례를 위한 수평성도 함께 고려하는 랑 대성당(Cathedrale Nortre-Dame de Laon)이 대표적이다. 이 두 흐름은 전성기 고딕에도 이어졌는데, 수평성도 고려하는 부르주 대성당(Cathedrale Saint-Etienne de Bourges)과 수직성을 지향하는 샤르트르 대성당(Cathedrale Nortre-Dame de Chartres)이 대표적이다. 다만, 프랑스 고딕의 주류는 수직성을 강조하는 쪽이었고, 랭스 대성당(Cathedrale Nortre-Dame de Reims)에서 절정을 이루며 프랑스 고딕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된다. 고딕 양식의 쇠퇴기인 후기 고딕은 빛의 밝음 그 자체만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13세기 중반에 시작된 레요낭(Rayonnant) 양식과 15세기에 등장한 플랑부아양(Flamboyant) 양식으로 대표된다. 생트샤펠(Sainte-Chapelle)과 트루아의 성 우르바노 바실리카(Basilique Saint-Urbain de Troyes)로 대표되는 레요냥 양식이 구조가 단순해진 성당의 전체 조도를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서 최대한으로 넓힌 창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면, 루앙의 생마클루 성당(Eglise Saint-Maclou de Rouen)으로 대표되는 플랑부아양 양식은 처음부터 장식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한다.



영국은 노르망디를 통해 프랑스 전성기 고딕 양식을 수입했지만 지역주의적 독립성을 가미하여 초기 영국 양식(Early English style), 장식 양식(Decorated style, 곡선 중심), 수직 양식(Perpenddicular style, 직선 중심)으로 분화되었다. 초기 영국 양식은 수평성과 기하장식이라는 영국 고딕 성당의 전형을 이룬 켄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장식 양식은 레요냥 양식과 곡선 양식이 조화를 이룬 요크 민스터(York Minster)에서, 수직 양식은 글로스터 대성당(Gloucester Cathedral)에서 각각 시작되었다.



중앙집권이 이루어진 프랑스와 달리 지방분권이 강한 독일


프랑스 고딕건축의 수입에 철저히 의존하는 경향과 독일만의 독자적 양식을 고집하는 경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두 양상이 하나로 합쳐졌지만, 독일에서는 각각의 양식을 이루면서 독일 고딕만의 특색을 가졌습니다. [p. 207]


따라서


프랑스의 고딕 보편주의를 따른 스트라스부르 대성당과 쾰른 대성당을 독일 고딕의 전성기로 본다면, 이후의 독일 고딕은 지역주의가 강세를 이루어 다양한 형태로 분화됩니다. [p. 215]



완성된 고딕 양식이 전해진 영국이나 독일과는 달리 이탈리아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짙은 영향 아래 고딕 요소가 첨가되는 정도에 머무른다.


보편적인 프랑스 고딕 성당의 구조 원리를 배워서 이탈리아에 고딕 성당을 세운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장인이 프랑스의 고딕 성당을 보고 스스로 학습하여 이탈리아 고유의 고전적 그리스도교 전통에 입각하여 재해석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고딕 양식은 전례가 없는 고유한 형태로, 이탈리아 고딕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탈리아 고딕을 보면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성당, 독일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과 쾰른 대성당처럼 프랑스의 전성기 고딕을 거쳐 완성된 고딕 양식이 수입된 사례는 없고, 매우 배타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믿기지 않겠지만, 골목마다 성당으로 가득 찬 로마에서 고딕 성당은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이 유일합니다. [pp. 229~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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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18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여행 때 만난 뾰족한 첨탑이 특징인 이런 건축 양식이 고딕임을 알았지만 이렇게 깊은 지식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아요.

KOEMMA 2024-03-22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시우행님, 격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한 달의 후쿠오카 - 행복의 언덕에서 만난 청춘, 미식 그리고 일본 문화 이야기 일본에서 한 달 살기 시리즈 5
오다윤 지음 / 세나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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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의 후쿠오카>는 저자가 한 달, 정확히는 32일 동안의 여정을 일기 쓰듯이 정리하고, 매일의 일정 마지막에 방문한 곳의 영업시간, 입장료, 주소 등에 대한 정보를 간략하게 곁들인 책이다.

 

그렇다면 후쿠오카는 어떤 도시일까?

 

후쿠오카는 도시의 편리성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콤팩트 도시’이면서 조금만 외곽을 나가도 천혜의 자연, 아름다운 해변과 산, 유수의 온천이 있다. 후쿠오카는 알면 알수록 더욱 궁금해지는우리를 ‘먹고 즐기고 움직이게 하는 도시’입니다. [p. 5]

 

일본의 다른 도시와 비교하자면,

 

하카타역에서 내려 마주한 후쿠오카는 도쿄보다는 소박하지만오사카나 교토가 있는 간사이 지역과는 다른 또 다른 느낌의 번화가면서 일본 소도시보다는 활기찬독특한 매력을 지닌 도시였다. [p. 14]

 

라고 한다. 특히 일본에서 ‘미식(美食)의 도시라고 하면 흔히 오사카[大阪]을 떠올리는데, 후쿠오카도 그에 못지 않는, ‘미식의 도시’라는 자부심이 강한 곳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일본의 다른 번화가와 다른 후쿠오카 번화가의 풍경이 형성된 것이 아닐까?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상점마다 빽빽이 놓여 있는 후쿠오카의 명물 멘타이코(명란젓), 아마오우(후쿠오카의 명물 딸기) 관련 상품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명품 브랜드나 의류 매장이 즐비한 다른 일본 번화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p. 14]

 

재미있게도 내가 후쿠오카를 방문했을 때는 그런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후쿠오카가 나의 첫 해외 당일치기 여행지였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내가 당일치기를 선택했을 만큼 후쿠오카가 한국인에 있어서 심리적 거리가 짧은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단 1시간. 비행기를 타면 후쿠오카가 얼마나 한국에서 가까운 곳인지 실감하게 된다. [p. 13]

 

어쨌든, 나는 ‘당일치기’라는 초단기(超短期)로 둘러봤기에, ‘한달 살기’라는 장기(長期)로 즐기고 느낀 저자의 후쿠오카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래서 책을 받자마자 내가 방문했던 스미요시 신사[住吉 神社]캐널시티 하카타(Canal City Hakata)케고 신사[警固 神社] 등을 소개한 페이지를 먼저 펼쳐보았다.

 

스미요시 신사[住吉 神社]

조즈야[手水舍]

본전[本殿]

에마괘[繪馬掛]


3일 에비스 신사[三日 惠比須 神社]

에비스[惠比須] 신상(神像)

 

스미요시 신사에서는 신사 내에 있는 ‘3일 에비스 신사[三日 惠比須 神社]’ 사진을 보며 엉뚱한 곳을 방문한 줄 알고 순간 당황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칠성신을 모신 칠성각(七星閣)이나 산신이나 가람신을 모신 산신각(山神閣) 등이 하나의 사찰에 수용된 것처럼, 신사[神社]도 세쓰샤[社]와 마쓰샤[末社]라는 형태로 표석(標石)까지 두고 여러 신을 모신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에비스[惠比須]는 일본의 칠복신(七福神)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 고유의 신으로 오른손에 낚싯대를, 왼쪽으로는 도미를 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어업의 신이었다가 상업의 신도 겸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미요시 신사 본전 옆에 ‘고대 스모 선수 동상’이 있다는데, 나는 그것을 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신사나 절에 기원할 때나 기원한 소원이 이루어져 사례를 할 경우에 봉납하는 말의 그림이 그려진, 5각형 모양의 나무판, 즉 에마[繪馬]를 걸어놓은 에마괘[繪馬掛]가 인상적이었던 것을 보면, 관심사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른가 보다.

 

캐널시티 하카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 “Fuku/Luck, Fuku=Luck, Matrix”

 

한국의 코엑스 같은 느낌의 캐널시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분수 쇼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 “Fuku/Luck, Fuku=Luck, Matrix”였다. 솔직히 백남준의 작품은 알고 가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가기 쉬운 곳에 있어서 저자가 언급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곳의 분수 쇼 ‘댄싱 워터’보다 저녁 시간의 3D 프로젝션 매핑쇼인 ‘캐널 아쿠아 파노라마’가 유명하다고 한다. 아쉽게도 당일 치기 여행이라 시간 관계상 낮의 분수 쇼만 보아야 했다. 사진으로 표현하기가 애매했는데, 다행히 저자가

 

캐널시티 건물 전체에 신나는 록 음악이 쾅쾅 울리면서 음악에 맞춰 맨 아래층의 분수가 건물의 2층, 3층 높이까지 치솟았다. 이리저리 방향도 바꾸고 물줄기가 세졌다가 약해졌다가 현란했다. 매시간 무료로 볼 수 있는 분수 쇼라고 하기에는 퀄리티가 높았다. [p. 88]

 

라고 실감나게 설명했다.

 

분수 쇼(댄싱 워터)

 

당일치기 여행이었기에 나에게 허용된 식사는 점심과 저녁뿐이었다. 점심은 캐널시티에 들린 김에 이치란[一蘭] 라멘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테이크 아웃 전문점 같은 분위기였다.

 

캐널 시티의 이치란[一蘭] 라멘

 

그래서 지나쳤는데,

 

키오스크에서 먼저 결제를 한 뒤 5분 정도 지났을까? 종업원이 나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냈다. 마침 이번에도 운 좋게 딱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칸막이가 쳐진 독서실 같은 좌석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종지에 면 삶기 정도, 국물 진함 정도, 매운 정도, 마늘, 파, 차슈, 면 양 등을 체크한 뒤 직원에게 건넸다. 이렇게 내 취향에 맞게 이것저것 고를 수 있다는 점이 이치란 만의 색다른 재미이면서 자신의 입맛에 가장 잘 맞는 라멘을 먹을 수 있기에 이치란 라멘이 누구에게나 사랑 받게 되지 않았을까? [p. 190]

 

라는 저자의 설명을 보니, 혹시 그 때 내가 허기가 져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섣부르게 판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저자가 일본 3대 라멘이라는 이치란[一蘭]과 잇코샤[一幸舍] 등에서 돈코츠 라멘을, 다이치노 우동[大地のうどん]에서 야채 튀김 붓카케 우동을, 텐진호르몬에서 호르몬[곱창] 정식을, 카이센동 히노데[海鮮 日の出]의 뎃카동[鐵火], 커리 혼포 모지코[伽 本 門司港]에서 야끼카레[燒きカレ-] 등 일본에 가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일본 음식을 신나게 맛보는 모습에 살짝 부러움을 느꼈다. 일반적인 직장인에게 허용된 짧은 휴가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일본의 하와이라는 ‘이토시마[島]’에서 아름다운 바다를 두 눈에 담고 하나시오 푸딩[花鹽プリン]을 맛보고, 일본의 베니스라는 ‘야나가와[柳川]’에서 일본 4대 히나마츠리 가운데 하나인 ‘사게몬 메구리’를, 일본의 온천도시로 유명한 ‘벳부[別府]’에서 벳부 지옥 순례를 즐기는 것이라면 계획을 세워 분초 단위로 빽빽하게 돌아다니면 짧은 시간에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먹는 것은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맛있어도 하루에 5끼, 10끼를 먹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저자의

 

만약 후쿠오카에 짧은 여행을 왔다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포기할지 고민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다 버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무려 한 달의 시간이 더 남아 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무언가를 못 해도 나중을 위해 아껴놓는다는 편한 느낌이 들었다. [p. 25]

 

라는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 냄새 진하게 나는 맛있는 도시, 후쿠오카. 이 정겨운 도시를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일본’하면 떠오르는 독보적인 도시도 아니고 놀거리가 풍부하지도 않은, 흔히 말하는 평범한 도시. 하지만 자칫 매력이 없다는 뜻으로 오해되기 쉬운 이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당함’의 또 다른 표현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 도시가 후쿠오카였습니다.

후쿠오카 한 달 살기를 하며 즐거웠습니다. 훌륭하고 멋진 인생도 좋지만, 즐거운 인생만큼은 못한 것 같습니다. 후쿠오카에서는 돈이 많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도시 가까이에 산과 바다가 있고 정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후쿠오카를 다녀온 지 벌써 몇 달이 흘렀지만, 바쁜 일상에서 드문드문 후쿠오카를 떠올리면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나카스 강변 거리를 산책하고 이토시마 해변으로 드라이브를 떠나고 유후인 온천에서 힐링하고 오호리 공원에서 산책했던 그날들, 다시 손에 닿을 듯한 그 시간을 꿈꿉니다. [p. 272]

 

언젠가 다시 여행을 가게 되면, 이번에도 좀더 덜 쫓기듯이 여유를 가지고 저자처럼 여행을 즐기고 추억을 쌓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 리뷰는 세나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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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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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삶이란 어떤 것일까? ‘삶’, ‘Life’, ‘生’……. 다양한 언어로 표현하기는 쉬워도 정의(定義)하기는 어려운 단어다. 어쩌면 사람마다 자신만의 삶에 대한 정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각자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느끼는 것이 다를 테니까.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로 유명한 알렉산드로 푸시킨(Alexander Pushkin, 1799~1837)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왜 슬퍼하는가?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 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게 여겨지리라

 

라는 시(詩)를 남겼다. 어떤 삶이든 상관없이 삶에 순응하라는 의미로 읽혀진다. 하루하루가 고달픈 삶을 사는 이라면 이런 자세가 위로가 될 것이다.

에밀 아자르, 아니 로맹 가리(Romain Gary, 1914~1980)의 <자기 앞의 생>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1970년 이방인들이 밀집된 빈민지역인, 파리의 멜빌에 있는 아파트에서 창녀들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폴란드계 유대인 아줌마 로자의 손에서 아랍 소년 모하메드 카디르(이하 ‘모모’)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려가고 있다.

 

모모는

 

나는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여러분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그가 생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감상에 젖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p. 139]

 

라고 얘기한다. 이것만 보면, 저자가 모모의 입을 빌려 말하는 생(生)은 무척 건조할 것 같은데, 또 막상 소설 속에 그려지는 삶이 그렇지도 않은 것을 보면 묘(妙)하다.

 

 

생(生)을 긍정해야 버틸 수 있는

 

열네 살 모모의 주변에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거리의 여자로 살아가다가 은퇴 후에는 주로 창녀의 자식을 맡아 키우게 된 폴란드 출신 유대인 로자 아줌마, 여자의 삶을 선택한 세네갈의 전직 권투선수 출신의 여장 남자 롤라, 첫사랑을 평생 잊지 못하는 알제리 출신 무슬림 노인 하밀, 나이지라아 출신의 멋쟁이 포주인 은다 아메데, 거리에서 묘기를 부리는 카메룬 출신의 청소부 흑인 왈룸바…….

 

로자 아줌마는 폴란드 태생 유태인이었지만, 수년간 모로코와 알제리에서 몸으로 벌어먹고 살았기 때문에 아랍어를 웬만큼 할 줄 알았다. 유태어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곧잘 유태어로 이야기하곤 했다. [p. 13]

 

오층에 사는 롤라 아줌마는 여장 남자로, 볼로뉴 숲에서 일했다.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는 세네갈에서 권투 챔피언이었다고 했다. [p. 18]

 

하밀 할아버지는 알제리에서 온 사람이었다. 삼십 년 전 알제리에서 메카로 순례를 떠났었다. [p. 48]

 

생 미셸 거리에서 불을 삼키는 묘기로 구경꾼을 끌어 모으던 왈룸바 씨도 찾아와 로자 아줌마 앞에서 자기 재주를 보여주었다.

왈룸바 씨는 카메룬 출신의 흑인으로 청소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는 여러 명의 아내와 자식들을 고향에 두고 왔다. 그의 불 삼키는 솜씨는 가히 올림픽 금메달 감이었고, 그는 여가시간을 모두 이 일에 바쳤다. [pp. 196~197]

 

이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고 노력한다.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 한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여러 사람이 나눔으로써 그 무게를 줄이고 상황을 다소 누그러뜨리는 것처럼.

 

그래서 모모의 아버지 유세프 카디르가 자기 아들을 찾으러 왔다가, 아랍인[모하메드]이 아닌 유대인[모세]으로 키워졌다는 오해에 충격을 받아 죽은 다음에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모습을 그린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좀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서로 말하지 않으려 애썼다. 머리만 복잡해질 것이 뻔했다. 나는 그녀의 발치에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서, 그녀가 나를 지키기 위해 해준 일들에 감사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우리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은 지켜야 했다. 아주 못생긴 사람과 살다 보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정말로 못생긴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p. 232]

 

이 부분은 아무리 힘들어 버거운 삶도, 혼자가 아닌 ‘함께’라면 살만하다고 얘기가 아닐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역설적으로 각자가 자기 앞에 놓인 생(生)을 긍정하고 버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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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개정판
유진 로건 지음, 이은정 옮김 / 까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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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아랍’이지?

 

‘아랍’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오를까? 대체로 ‘이슬람’이라는 종교나 ‘중동(中東)’이라는 지역이 떠오를 것이다. <역사서설(歷史序說, Muqaddimah)>로 유명한 역사철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은 아랍을 오아시스 주변에서 간단한 농사를 하며 정착한 무리를 포함한 유목민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아랍’을 ‘사막의 거주민’이라는 베두인(Bedouin)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로 이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보는 ‘아랍’은 조금 다르다.

 

이슬람 초기 아랍인은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 중에서 언어(아랍어)와 종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다수가 수니 이슬람을 믿는 공통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p. 19]

 

어쨌든, 중동(中東) 지역에 위치하지만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튀르키에나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이란은 아랍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공식적으로 여전히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하지 않고, ‘레바논 내전(1975~1990)’ 이전에는 기독교 국가에 가까웠던 레바논의 존재도 ‘아랍’을 ‘이슬람’이나 ‘중동(中東)’과 동일시할 수 없게 한다.

 

 

유진 로건의 [아랍]은

 

이 책은 아랍의 근대와 현대를 다루고 있는 역사책이다.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1장부터 제3장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와 함께 시작된 아랍의 근대사를, 제4장부터 제8장까지는 영토와 영향력을 잃어가는 오스만 제국의 발버둥을, 제9장부터는 제14장까지는 1948년 아랍인의 땅에 유대 국가가 건국된 이후 아랍 국가들의 모습을, 개정판을 내면서 추가된 제15장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현재를 각각 그리고 있다.

 

 

아랍의 근대화

 

이 책 <아랍>은 오스만 제국의 9대 술탄 셀림 1세(재위 1512~1520)가 거느린 소총으로 무장한 최신의 화약 보병부대와 맘루크 왕조의 49대 술탄 칸수 알 가우리(재위 1501~1516)가 거느린 개개인의 무력에 치중한 기병이 충돌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오스만의 맘루크 제국의 정복은 아랍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맘루크 검객과 오스만 소총수의 운명적인 무력 충돌은 아랍 세계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또한 오스만의 정복은 이슬람 등장 이후 처음으로 아랍 세계가 비(非)아랍인이 세운 수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 중략 ~

하지만 1517년부터는 아랍 지역 밖의 수도들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아랍인의 사회적 지위가 협의되었고, 이와 같은 정치적 현실은 근대 아랍 역사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p. 34]

 

쉽게 맘루크 왕조의 멸망을 아랍 근대의 시작이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시대구분(時代區分)은 사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적용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근대(近代, Modern)’라고 하면, 흔히 시민사회의 성립과 자본주의의 형성을 떠올리는데, 이 기준으로 보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그 상징이 된다. 하지만 ‘나’라고 하는 개인의식의 성립을 기준으로 한다면 르네상스 시기까지 소급할 수 있다. 그래서 ‘근대(近代, Modern)’를 르네상스부터의 ‘Early Modern’과 프랑스 혁명부터의 ‘Late Modern’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도 이 기준을 적용해서 ‘Modern’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총, 칼 같은 냉병기(冷兵器)에서 소총과 같은 화약무기로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는 아랍의 근대가 유럽의 근대와 다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랍의 근대는 어떤 것일까?

 

맘루크 제국을 정복한 후 2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남부까지 성공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랍 지역에서 정치체제를 표준화할 생각이 없었던 또는 표준화 할 수 없었던 오스만은 많은 경우 지역 엘리트들과 협력을 통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각각의 아랍 지역들은 이스탄불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으면 각양각색의 행정 구조를 만들어냈지만, 그들 모두는 분명히 하나의 제국의 일부였다.

~ 중략 ~

그러나 중앙과 아랍 주변부 간의 역학관계가 18세기 후반에 달라졌다. 새롭게 등장한 지역 통치자가 세력을 규합하여, 종종 오스만 제국의 유럽 적국들과 협력하며 오스만 체제에 반하는 자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p. 60]

 

이건 아무리 봐도 봉건제(封建制) 혹은 고려 시대와 비슷하지 않은가! 이를 “같은 국가의 통제 하에 있으나, 서로 다른 법률과 관료에 의해 다양한 종교집단들이 함께 삶을 영위하는 일종의 ‘모자이크 구조’가 수백 년 간 오스만제국의 근간을 이룬 질서의 핵심1)”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오스만 제국이 아랍을 지배하고 몇 세기가 지난 후에  ‘오스만의 근대화 개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에 의해 아랍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면서 다시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그렇다면 아랍의 근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이었던 무함마드 알리(1770~1849)의 개혁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함마드 알리는, 훗날 오스만이 모방하게 되는, 유럽의 개념과 기술에 의존하여 이집트를 개혁의 길로 이끌었던 혁신가이기도 했다. 그는 중동 지역에서 최초로 농민 군단을 창설했다. 또한 유럽 바깥에서는 최초로 실현된 산업화 프로그램에 착수했고, 군에 필요한 무기와 직물을 생산하고자 산업혁명 기술을 도입했다. 교육사절단을 유럽의 수도들에 파견하고 유럽의 서적 및 기술편람을 아랍어 판본으로 출판하기 위해서 번역국도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술탄의 총독이 아닌 독립적인 군주로 자신을 대우하는 유럽 열강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p. 100]

 

대체로 지방의 강력한 권력자와 중앙은 갈등을 빚기 쉬운데, 풍요롭고 넓으며 중앙과 충분한 거리를 갖고 있는 이집트 총독들은 그런 유혹을 받기 쉬웠다. 무함마드 알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와 오스만 제국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의 사실상 독립을 요구하는 영국과 프랑스에 맞서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그리스 반란군을 진압하던 이집트 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파탄에 이르렀다. 그 결과 무함마드 알리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시리아를 침략했다.

 

오스만 개혁의 시대는 제2차 이집트 위기2)가 정점에 이르렀던 1839년에 시작되었다.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죽고 10대였던 압돌 메지드 1세가 등극한 1839년은 급진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선포하기에는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군으로부터 급박한 위험에 시달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럽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유럽으로부터 영토와 통치권에 대한 보장을 받기 위해서는 근대국가 세계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유럽 기준의 치국책(治國策)을 충실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유럽 열강들에게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다고 오스만 정부는 생각했다. 더구나 마흐무드 2세의 밑에서 일했던 개혁가들은 전대 술탄의 치세 동안에 이미 시작된 변화들을 강화시키고 그의 계승자로 하여금 개혁 과정에 참여하도록 만들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이중적 동기가 오스만 개혁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 유럽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선전행위가 대내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개혁에 나선 진심 어린 결의와 결합한 것이다. [p. 128]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부강해지기 위해 시작한 일련의 개혁과 개발 사업은 도리어 오스만 제국을 더욱 유럽의 지배에 종속시켰다. 특히 유럽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은 오스만 제국을 파산으로 몰고 갔다.

 

프랑스는 1881년에 튀니지로 지배권을 확장했고, 영국은 1882년에 이집트를 점령했으며, 이탈리아는 1911년에 리비아를 장악했고, 유럽 열강은 1912년에 모로코(오스만 지배로부터 독립을 지켰던 유일한 북아프리카 국가였다)를 프랑스-에스파냐의 보호령으로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북아프리카 전체는 유럽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p. 155]

 

이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아랍인들이 대항했지만, 신식 무기와 강력한 군대를 가진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제국주의적 편의에 따라 조성한 팔레스타인 같은 위임통치령은 또 다른 불씨를 잉태했다.

 

벨푸어 선언이 공동체 간의 갈등의 빌미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매우 제한적인 자원을 고려한다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공민권과 종교적인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그곳에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향토를 건설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예상한 대로 위임통치는 대립하던 두 민족주의, 즉 고도로 조직화된 시오니즘 운동과 영국의 제국주의 및 시오니즘적 식민주의라는 이중의 위협에서 기인한 새로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간의 충돌을 야기했다.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제국주의가 중동에서 양산한 가장 큰 실패작이었고, 그 결과 중동 전역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갈등과 폭력사태에 휘말리게 되었다. [pp. 277~278

 

이런 상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대 국가가 건국되면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발생했다. 이에 대항하여 젊은 아랍 민족주의자 군인들은 1949년 시리아에서, 1952년 이집트에서, 1958년 이라크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구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연계가 없었지만, 초 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내세운 ‘냉전(冷戰)’이라는 새로운 질서(New Order)에는 적응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에게 수에즈 전쟁은 군사적으로 놀라운 승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후퇴를 의미했다. 벤 구리온은 IDF(이스라엘 방위군)가 무력으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해야 하는 현실에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아랍 이웃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군대의 기민함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3국 침략에 동참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 지역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던 아랍 세계의 보편적인 인식이 더욱더 강해졌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제국주의와 연계되면서 아랍 세계가 유대 국가를 인정하거나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물론이고 받아들이는 것조차 더욱더 어려워졌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을 패퇴시키는 문제는 팔레스타인 해방뿐만 아니라 중동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일소하는 문제와도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p. 432]

 

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에 부딪혀 단합되지 못한 아랍 민족주의는 쇠퇴했고, 무력으로 유대 국가를 말살하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랍 정부들은 시오니스트 적과 싸워서 팔레스타인 향토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아랍의 공동 의제에 말로만 경의를 표할 뿐, 모두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대의 석유 자원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아랍의 세계 경제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힘이 중동을 제어하게 되었다. [p. 503]

 

하지만 석유의 힘보다도 이슬람의 힘을 더욱 믿는 젊은 세력이 등장해서, 이란에서 혁명을 일으켜서 왕정을 폐지시키고, 이집트에서는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했다. 나아가 이들에 의해 극단적인 이슬람주의 테러 세력이 형성되었다.

 

한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 협정 체결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그 길이 아직 멀고 멀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개정판을 내면서 추가된 제15장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현재를 보여준다. 튀니지에서 발발한 “아랍의 봄”으로 인하여 아랍 각국은 혁명의 물결에 휩싸였지만, 그것이 성공한 튀니지를 제외하고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거나 더욱 참혹한 내전으로 빠져드는 등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튀니지는 아랍의 봄 혁명 이후 새로운 헌법 질서로의 평화로운 정치적 이행을 성사시킨 유일한 아랍국가이다.

중략 ~

튀니지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은 중도적이고 세속적인 두 개의 다른 정당과 연대함으로써 고도의 국민적 단결을 유지했다. 새로운 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과정은 지난했지만, 강제보다 합의에 기반한 특성을 띠었다. 2014년 1월 채택된 신헌법에는 혁명운동의 성과인 시민의 권리와 법의 지배가 명시되었다. [pp. 729~730]

 

그리고 <아랍>은 아랍의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희망적인 전망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튀니지의 취약한 민주주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이는 아랍 세계와 전 세계에 큰 이득이 될 것이다. 아랍 세계가 2010년대의 폭력과 대대적인 파괴로부터 벗어났을 때 아랍인들은 반드시 책임 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재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pp. 729~730]

 

 

 

 

옥의 티

 

p. 67

아랍의 지역 경제는 실질적인 이득을 보았고 장인(丈人)과 민병(民兵)에 대한 후원 확대로 지역 통치자의 힘은 더욱 커졌다. ⇒ 아랍의 지역 경제는 실질적인 이득을 보았고 장인(匠人)과 민병(民兵)에 대한 후원 확대로 지역 통치자의 힘은 더욱 커졌다.

 

1) 김가희, <이슬람 국제체제의 역사적 탐구를 통한 걸프위기의 재구성>,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p. 22

2) 제2차 이집트-오스만 전쟁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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