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자본이 만든 메트로폴리스 1830-1871 현대의 고전 13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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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는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2003)는 1830년부터 1871년까지의 파리의 근대적 도시화 과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온전히 새로 쓰여진 글은 아니다.

 

2부에 나오는 파리 연구는 <의식과 도시 경험>에 실린 논문을 개정하고 확장한 것이다. 종결부인 ‘사크레쾨르 바실리카의 건설’은 원문에서 약간 개정되었다. 발자크의 연구는 <코스모폴리스의 지리학>(2002)과 <도시의 잔상>(2002)에 각각 실렸던 것을 개정하고 확장했다. 2장과 이 서문은 새로 쓴 것이다. [p. 42]

 

즉, 18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2부 형체를 갖다: 파리 1848~1870’[3장~17장]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방법론으로 도시문제를 분석한 <의식과 도시 경험(Consciousness and the Urban Experience)>(1985)에 실린 주요 논문을 개정, 증보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의식과 도시 경험>의 개정증보판이라고도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의식과 도시 경험>과는 달리 이 책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영향력이 짙게 배여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와 <의식과 도시 경험>은 비슷하지만 다른 책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파리 개조 사업’이라는 창조적 파괴 행위

 

저자는 서문에서 ‘근대가 그 이전과 근본적으로 단절된 시대라고 보는 것이 허구적인 신화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신화를 조장한 것이 파리 개조 사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Baron Georges-Eugene Haussmann, 1809~1891, 이하 ‘오스만 남작’)과 그가 남긴 <회고록>이라고 말한다.

왜 오스만 남작은 그런 허구의, ‘근대 신화’를 만들고 배포했을까?

 

그는 근본적인 단절이라는 신화, 오늘까지도 살아남은 이 신화로 자신과 황제를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예전에 시행된 것들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루이 나폴레옹은 어떤 면으로도 이제 막 지나간 과거의 사고방식이나 관례에 얽매여 있지 않음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이 부정은 그 이중의 의무를 달성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건국신화를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이 베푸는 자비로운 전제주의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판단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p. 22]

 

사실 파리 개조 사업 전후를 비교해보면, 오스만 남작이 과거와 단절된 근대를 얘기하는 것도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는 파리의 시가지를 깔끔하게 정비하여 도시 위생을 향상시켰고, 상수도 설비를 완전히 갈아엎어 새로 만들었으며, 도시에 대규모 공원과 광장을 조성했다. 이때의 도시계획으로 파리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파리의 개조 계획이 오스만 남작의 파리 지사 임명 이전에 이미 세워져 있고,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은 존재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오스만 남작이 파리의 도시계획에 기여한 정도를 평가절하하는 것도 아니다. 파리 개조 계획 자체는 오스만 남작이 시작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오스만 남작에 의해 ‘파리’라는 도시가 강제로 ‘근대’로 몰아 넣어졌다고 본다. 이는 파리 개조 계획이 자본주의가 새로운 부를 창조하기 위해 그에 어울리는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기존의 경제질서를 파괴, 재편하는 ‘창조적 파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스만 남작이 시행한 일련의 도시 개편 작업의 결과 파리의 근교화가 촉진되었고, 그에 따라 공장 지대와 노동자 거주 지역, 부유층 주거지가 격리되었으며, 그들 간의 의식적 단절은 극단적으로 심화되었다. ‘코뮌(Commune)’, 즉 파리 코뮌은 그 극단적인 단절이 낳은 결과물이다.

 

코뮌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이해 범위를 벗어난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제2제정 파리의 변형 과정과 그 영향에 뿌리가 있었다. [p. 539]

 

코뮌은 유일하고, 독특하고, 극적인 사건이었고, 아마 자본주의 도시의 역사에서 이런 종류로서는 가장 특별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 불씨에 불을 붙인 것은 전쟁, 프로이센에 포위되었다는 절망감과 패배의 굴욕감이었다. 하지만 코뮌의 원재료는 이 도시의 역사적 지형이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되는 느린 리듬에 맞추어 이미 한데 모여 있었다. [p. 542]

 

 

사실주의 예술가라는 렌즈

 

저자는 파리 개조 계획을 전후한 ‘파리’라는 도시의 구체적 상황들을 설명하고 분석하기 위해 사실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구체적으로는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테> 등 ‘인간 희극’ 시리즈를 기획한 오노래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 이하 ‘발자크’), 프랑스어로 쓰인 최초의 위대한 모더니즘 소설이라는 <보바리 부인>을 쓴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 루이 필리프 1세(재위 1830~1848)의 세금정책을 풍자한 <가르강튀아(Gargantua)>(1831)나 고된 하루를 보내고 삼등열차에 오른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삼등열차>(1862) 화가이자 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 등을 들 수 있다.

 

오노레 도미에의 풍자화 <가르강튀아>

출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p. 117

 

이들 사실주의 예술가들이 본 파리는 오스만 남작이 개조하려고 했던 그 낡은 ‘파리’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이 무렵 진행되고 있던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인간형과 그들을 지배하는 ‘파리’라는 도시의 위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작품에서 ‘파리’라는 도시는 또 하나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사실주의 소설가인 발자크는 <인간 희극> 시리즈에서

 

대개 시골 출신들이 파리 생활에 적응해가는 통과의례의 장면을 묘사하는데, 상인이든 야심 찬 젊은 귀족이든, 아니면 연줄이 좋은 여자든 상관없다. 일단 적응하고 나면 그들은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는다. 설령 자신들이 파리에서 겪은 실패 때문에 결국 파멸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지방 출신이라는 것, 지방의 권력에 대한 격렬한 부정은 이렇게 발전하여 파리 생활의 창립 신화 가운데 하나가 된다. 즉 파리는 독자적인 실체이며, 어떤 면으로든 그것이 그렇게 경멸하는 지방 세계에 의존하지 안는다는 신화다. [p. 61]

 

 

공간과 기억, 근대를 만들다

 

역사지리학자인 저자는 발자크의 소설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공간적 유형을 분석한다. ‘공간은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상류계급과 귀족은 자기들만의 중심을 가지고 있고, 평민들도 언제나 자기만의 특별한 구역을 갖고 있다.

 

도시 자체가 그 주민들의 집합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억이 그렇듯이 그것도 대상과 장소에 결합되어 있다. 도시는 집합적 기억의 장소다. 그렇다면 장소와 주민 사이의 이 같은 관계는 건축학적으로나 지형적으로 도시의 지배적 이미지가 되고, 어떤 물건이 기억의 일부가 되듯이 새로운 기억이 솟아난다. 이렇게 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도시의 역사에는 엄청나게 많은 상념이 흘러가며 도시에 형태를 부여한다. [pp. 103~104]

 

발자크는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공간이 어떻게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지 보여준다.

 

그의 인물들은 심지어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이사하면 성격이 바뀌기까지 한다. [p. 79]

 

이런 공간의 변화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영향 가운데 하나다. 왜냐하면 오스만 남작의 계획에 따라 건설된 대로변과 그 뒷길 사이의 토지 가격의 격차와 그로 인한 임대료 수준의 격차, 중심부에서 변두리로 갈수록 점증적으로 낮아지는 임대료로 인해 파리의 여러 지역은 서로 다른 직업적,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즉, 노동자와 자본가 등의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격리되고 그들간에 의식적 무의식적 단절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가 루아예는 19세기 파리의 설계와 건설 관례를 자세하게 재구성하면서, 당시 준수되던 원칙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본주의가 건축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기획 규모의 변화였다.” [p. 26]

 

공간에 이어 이야기 되는 것은 ‘기억’이다. 발자크는 ‘희망은 욕구하는 기억[99’이라고 했는데, 기억과 욕구의 이러한 결합은 근대성의 신화가 어떻게 그처럼 강력한 힘으로 유통되는 지 보여준다. 나아가 발자크는 공간과 기억이 결합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지를 <인간 희곡> 시리즈를 통해 드러낸다.

 

발자크는 <인간 희극> 전체를 관통하여 이 연관성을 끈질기게 다루었다. 그는 도시의 역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상념의 흐름에 뭔가를 추가하고 보완한다. 그는 도시를 기억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집합적 기억을 위한 특별한 장소를 상상 속에 구축한다. 이것은 혁명의 순간이 오면 “번뜩이는” 어떤 정치적 감수성의 근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작동중인 도시를 근거로 한 혁명적 변형으로서의 근대성의 신화다. 기억이 1830년에 “번뜩여” 혁명적 감수성을 이어 붙이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고, 1848년과 1871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혁명적 순간들이 전통에 호소하는 바람에 짐이 더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미래를 향해 열릴지도 모르는, 완전히 다른 길로 나아가는 급격한 단절을 추구하는 강렬한 근대적 면모도 있었다. 그러므로 희망이 기억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연결된 기억이 희망을 발생시킨다. [p. 104]

 

 

사크레쾨르 성당, 핏자국을 눈으로 덮으려는 시도

 

사크레쾨르 바실리카가 아름답거나 우아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이 충격적이고 눈에 확 들어온다는 점, 스타일이 특이하고 유별나서, 그 발밑에 펼쳐진 도시로부터 존경을 요구하는 일종의 거만하거고 장엄한 분위기를 빚어낸다는 점도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중략 ~

그리하여 사크레쾨르는 성스러운 장엄함의 이미지, 영원한 기억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의 기억인가? [p. 548]

 

1871년 파리 코뮌이 성립될 당시 군중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던 정부군의 르콩드 장군과 1848년 6월 혁명기간에 잔혹한 학살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토마 장군이 군중들에 의해 총살되고, 32살의 코뮌의 지도자 외젠 발랭이 군중에게 모욕받으며 몽마르트르 언덕길 주위를 끌려다니다가 총살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 사크레쾨르 바실리카는 세워졌고, 그 내부에 그려진 반구형의 천장화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의 승리[Le Triomphe du Sacre-Cœur de Jesus] 아래에는 흔히 프랑스는 회개하노라[GALLIA POENITENS]”로 알려진 “SACRATISSIMO CORDI JESU GALLIA POENITENS ET DEVOTA ET GRATIA”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파리 코뮌 당시 좌우익의 희생자를 기념하는, 순결한 영묘(靈廟)처럼 생긴 이 바실리카 혹은 대성당에는 무엇이 묻혀 있는 것일까?

 

1789년의 정신인가? 프랑스의 죄악이 묻혀 있는가? 비타협적인 가톨릭주의와 반동적 군주제의 동맹인가? 르콩드와 클레망 토마 같은 순교자의 피? 아니면 외젠 발랭과 그와 함께 무자비하게 도살된 2만 명 이상의 코뮌 가담자들의 피인가? [p. 598]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잔혹한 전쟁터에 내린 눈처럼, 이 바실리카는 그 모든 것을 묻어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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