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도시를 생각해 - 우리가 먹고 자고 일하고 노는 도시의 안녕을 고민하다
최성용 지음 / 북트리거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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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한 도시생활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것들

 

오늘날 ‘도시화’는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한국의 경우, 광복이 후 압축적인 도시화의 결과, 2021년 기준으로 인구의 91.8%가 도시에 살고 있다1)이처럼 도시화가 되돌릴 수 없는 현상이라면,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한국의 도시화를 상징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파트’다. 1980년에는 전국 주택 중 아파트 비중이 7%(37만호)였는데, 30년 만인 2010년에 이르면 59%(819만호)로 급증2)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주택을 재산증식을 위해 사는(buying) 물건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한 몫 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주택난 해소라는 같은 목적으로 아파트를 짓기 시작한 파리와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파리는 시내와는 멀리 떨어진 교외에 낮은 임대료를 내고 장시간 사용할 수 있는 장기 임대 아파트를, 서울은 시내 또는 시내에 가까운 곳에 매매가 가능한 분양 아파트를 건설했다. 그 결과

 

파리의 아파트는 위험지역이라는 인식과 함께 저소득층의 주거 공간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서울의 아파트는 선호하는 주거 형태가 되었고 중산층 이상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습니다. [p. 36]

 

이처럼 선의로 시작된 파리의 아파트 정책이 실패했지만, 서울의 아파트 정책도 완벽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다. 아파트 단지 안과 밖의 구분과 갈등, 단지 내의 분양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의 구분과 갈등, 아파트를 구매할 능력이 없는 원주민이 쫓겨나는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 등을 통해 아파트 단지를 ‘게토’로 만들어냈다.

 

출입을 막는 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더라도, 아파트 단지 하나가 만들어지면 주변 시가지에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공간이 생기는 것 같은 효과를 낳기도 합니다.

중략 ~

아파트 단지 입주자들이 이용하는 내부 공간에는 근사한 정원이 조성되어 있지만,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마을의 경관은 견고한 담장과 건물의 긴 외벽 탓에 삭막하고 단조롭습니다. 주변이 어떻게 되든 단지 안쪽의 전용 공간만 쾌적하면 그만인 것이지요. 이 아파트 담을 따라 걷는다고 상상해 봅시다. 걷고 싶은가요? 상점이 있고, 사람들의 사회적 교류가 이뤄지던 거리는 아파트 단지의 등장과 함께 ‘통행로로서의 길’만 남게 됩니다. [pp. 47~48]

 

이처럼 ‘통행로로서의 길’은 도시생활의 편리성을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 가운데 하나다.

 

교통체증 해소를 위해 선택한 자동차 우선의 교통정책도 보행자 교통사고의 급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마치 산업혁명 시기에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처럼, 자동차가 사람을 잡아먹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 문제는 ‘보행권’으로 상징되는 노력에 의해 많이 완화되고 있다.

 

자동차 중심의 거리가 사람 중심의 거리로 바뀌는 일은 단순히 걷기 편한 길로 바뀌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걷고 싶은 거리가 많아지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로 인해 시민의 일상이 작은 부분에서부터 변화하거든요. 더 안전해지고, 우연한 만남이 늘어 이웃과 더욱 가까워지고, 동네 상점은 손님으로 북적이게 되고, 공동체 구석구석이 더 건강해지지요. [p. 26]

 

물론 저자가 바라는 것처럼 긍정적인 변화만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파리의 임대 아파트 건설처럼 선한 의도가 나쁜 결과를 빚어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우리는 단일 민족 국가라는 신화 속에서 살아왔다. 물론 옛 부여 지역에 정착한 속말 말갈(粟末 靺鞨)이나 백두산 근처에 정착한 백산 말갈(白山 靺鞨) 같은 말갈계 고구려인 혹은 발해인이 존재했고, 신라의 9서당 가운데 하나인 ‘흑금서당(黑衿誓幢)’에서 알 수 있듯이 말갈계 신라인도 존재했다. 하지만, ‘3D 업종’ 기피로 인한 외국인 노동자, 농촌의 노총각 문제로 인한 국제결혼 등으로 증가한 이주민과의 갈등, 최근 지하철 시위로 부각된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 등은 여전히 우리가 다른 존재와의 공존(共存)에 서툴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1996년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를 촉진하는 시민의 모임에서 시작된 (사)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시민연대는 독특한 주장을 하고 있다.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도시를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장애물이 없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의 전환이 있었거든요. 국적, 나이, 장애, 성별 등에 따른 제약 없이,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함께할 수 있도록 도시를 설계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편의 시설을 따로 설치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 보편성을 중심으로 도시를 만드는 기법을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고 합니다. 장애나 장벽이 없는 환경을 만든다는 뜻에서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즉 ‘무장애’라고도 하고요. [pp. 136~137]

 

좋은 얘기이기는 하지만, 기존의 도시에는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힘든 주장이다. 전쟁이나 재해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거나 새로 도시를 만들 경우에나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지속 가능한 도시개발

 

개발제한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3조에 의하면 ‘그린벨트’라 불리는 개발제한구역은 도시의 무질서한 확산을 방지하고 도시 주변의 자연환경을 보전하여 도시민의 건전한 생활환경을 확보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하지만 신도시를 개발하는 등 조금만 토지가 필요하게 되면 대뜸 그린벨트 해제를 들먹인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그린벨트가 개발예정구역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닐까?

 

2019년, 대장들녘은 3기 신도시 예정지에 포함되면서 ‘대장지구’로 불리게 됐습니다. 주택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정책적 필요 속에서, 넓게 펼쳐진 대장들녘이 개발의 적지로 꼽힌 것입니다. 대장들녘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잘 보존해야 할 개발제한구역’이 아니라 ‘언젠가는 개발해야 할 개발예정구역’에 그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보통 개발제한구역을 해제할 때는 이미 훼손이 많이 진행되어 보존 가치가 낮은 4, 5등급의 개발제한구역이 대상이 됩니다(개발제한구역은 1~5등급으로 나뉘는데, 1등급이 환경적 가치가 가장 높고 5등급이 가장 낮습니다). 대장지구는 면적의 99.9%가 개발제한구역이고, 그 중 84.5%가 2등급 이상의 보존 가치가 높은 땅입니다. 3등급까지 포함할 경우 그 수치는 92.2%로 올라갑니다. [pp. 263~264]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통한 양적인 도시 개발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시를 개발하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뉴욕의 ‘하이라인 공원(The High Line)’으로 대표되는 도시재생이 있다. 이 방식은 버려진 도시 건축물에 숨을 불어넣어 과거와 미래를 조화시킨다. 그리고 ‘공생(共生)’을 전제로 하는 지속 가능한 도시개발 방식이기도 하다.

 

낡은 공장은 일단 밀어 버려야 한다는 시선을 거두고 나니,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인천시 서구 가좌동에는 ‘코스모 40’이라는 복합 문화 공간이 있습니다. 카페, 공연장, 전시장이 어우러져 있는 이곳은 오래된 화학 공장을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독특한 이력을 자랑합니다. 건물이 위치한 곳에는 원래 코스모화학이라는 이산화티타늄 정제 공장이 있었습니다.

중략 ~

1968년부터 40여 년간 자리를 지켰던 공장은 울산으로 이주하면서 2016년을 끝으로 가동이 중단됩니다. 그리고 철거 절차에 들어갑니다. 오염 물질을 내뿜는 공장의 가동 중단과 철거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희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역의 한 회사가 이곳의 역사적 가치에 주목해 공장의 한 동을 매입하면서 ‘코스모 40’이라는 새로운 페이지가 열리게 됩니다. 전체 45개 동 가운데 유일하게 철거되지 않고 남겨진 40번째 동이 리모델링 대상이었지요. 이곳의 이름이 코스모 40인 이유입니다. 기존의 오래된 공장 건물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필요한 시설은 새롭게 증축해 연결하니 멋진 공간이 탄생했습니다. [pp. 290~292]

 

어떤 방법이든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누구나 살고 싶은 도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1) 국토교통부/한국국토정보공사(LX), ‘도시계획현황’(e-나라지표).

(https://www.index.go.kr/unity/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200)

 

2) 국토연구원 자료. 최성용, <내일의 도시를 생각해>, (북트리거, 2021), p.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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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 살인 사건 -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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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다르게 읽어보기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의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1)

 

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 <이방인>은 프랑스령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인 ‘뫼르소’라는 남자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일상을 살아가던 중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이게 되기까지의 상황을 그린 1부와 ‘뫼르소’를 재판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부조리함,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고 변화하는 주인공의 의식을 통해 묘사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방인>이 가해자 ‘뫼르소’만 조명하고 있기에 우리가 무심코 넘어가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피해자인 아랍인 ‘무싸’와 그 가족의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가 가해자의 인권은 보호되고 피해자의 인권은 보호되지 못하는 사례들을 보는 것처럼, 아랍인 '무싸'는 시신조차 보호받지 못했다.

 

<뫼로소, 살인 사건>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이방인>의 이야기를 피해자 아랍인 ‘무싸’ 가족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이 작품이 잘 알려진 원작의 전복(顚覆)을 꾀하는 유일한 작품은 아니다. <춘향전>의 전복을 꾀한 영화 <방자전>(2010)도 있고, <제인 에어>의 전복이랄 수 있는 진 리스(Jean Rhys, 1890~1979)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1966)도 있다.

 

 

하룬, 또 다른 뫼르소

 

이 소설 <뫼르소, 살인 사건>의 화자(話者)는 <이방인>에서 ‘뫼르소’에게 살해당한 아랍인의 동생 ‘하룬’이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한 형태로 쓰여진 작품이지만, 읽다 보면 <뫼르소, 살인사건>의 ‘하룬’에게서 <이방인>의 ‘뫼르소’가 떠오른다.

 

뫼르소에 대한 증오에서 출발하여 그를 집요하게 분석하던 하룬은, 결국 자신이 뫼르소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뫼르소가 조국이 아닌 땅에서 고아처럼 떠도는 삶을 살았다면, 하룬은 죽은 형이 살아오기만을 바라는 엄마 곁에서 죽은 듯 지내야만 했다. 뫼르소가 대낮에 햇빛 아래에서 저지른 살인을 하룬 역시 한밤중에 달빛 아래에서 저지른다. 또한 뫼르소가 살인 자체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죄인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하룬은 프랑스인을 죽였지만 죽인 시기가 알제리 독립 이전이 아니라 이후라는 점에서 비난 받는다. 이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두 사람은 똑같이 종교를 맹렬히 부정하며 자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확고한 태도를 보인다. [pp. 202~203]

 

다시 말해, <이방인>이나 <뫼르소, 살인사건>에서는 일반적인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처럼 살인의 구성요건을 가지고 다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인 행위 그 자체와 관련 없는 요소 때문에 가해자가 비난 받고 판결이 선고된다. 뭔가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한 느낌이 든다.

 

프랑스인 뫼르소가 눈부신 햇빛이 따가운 오후 2시에 알제리인을 살해했듯이, 알제리인 하룬은 달빛이 서늘한 새벽 2시에 프랑스인을 살해한다. 다음에는 그 프랑스인의 유족이 알제리인을 살해할까? 뭔가 이상한 ‘뫼비우스의 띠’를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왠지 저자가 지나치게 <이방인>을 의식한 나머지 재해석 혹은 안티-테제가 돼버린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피해자 ‘무싸’의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 들면서 ‘뫼르소’ 이야기를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맴돌았다.

 

1) 알베르 카뮈, <이방인>, (책세상, 2012), p.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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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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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은 인간의 생각과 세상의 물질이 만나 만들어진 결정체다. 건축물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할 때만 완성되기에 그 사회의 반영이자 단면이다. 건축물을 보면 당대 사람들이 세상을 읽는 관점, 물질을 다루는 기술 수준, 사회 경제 시스템, 인간을 향한 마음, 인간에 대한 이해, 꿈꾸는 이상향, 생존을 위한 몸부림 등이 보인다. [p. 6]

 

그렇기에 건축가 유현준이 충격과 감동을 받은 30개의 건축물을 소개하면서 ‘인문’이, ‘유럽’, ‘북아메리카’, ‘아시아’라는 권역 별로 소개하기에 ‘기행’이 각각 이 책의 제목에 포함된 것이 아닐까?

 

어쨌든 저자의 안내에 따라 건축 기행을 시작해본다.

 

빌라 사보아

출처: <인문건축기행>, p. 22

 

가장 먼저 소개된 건축물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빌라 사보아(villa savoye)](1931)로, 그가 제창한 근대 건축의 5원칙1)1)이 고스란히 적용된 작품이다.

 

서양은 전통적으로 돌이나 벽돌을 이용해서 벽을 구조체로 하는 건축이었는데,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면서 기둥 중심의 건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비로소 서양 건축은 벽이 주는 한계와 구속으로부터 탈출하게 된 것이다. [p. 19]

 

 

퐁피두 센터

출처: <인문건축기행>, p. 32

 

 

 

 

두 번째 건축물은 렌초 피아노(Renzo Piano, 1937~ )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 1933~2021)의 [퐁피두 센터(Centre Georges-Pompidou)](1977)다.

 

일반적으로 기술이 발달하면 우리는 그 기술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긴다. [p. 35]

 

이 작품은 이와 반대로 건축물의 구조체와 기계설비를 밖으로 노출해서 보여주는 ‘하이테크 건축’에 속한다. 여기에 퐁피두 센터 앞 광장이 퐁피두 센터를 향해 약간 기울어져 시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형상이 되어 퐁피두 센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독일 국회의사당

출처: <인문건축기행>, p. 144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에서 이상현 교수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의 말을 변형하여 “그들이 건물을 빚어내고, 건물은 우리를 빚어낸다2)”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덟 번째 소개된,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 1935~ )가 리모델링한 [독일 국회의사당](1999)은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둠은 당대 최고 권력자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건축 공간이었고 여전히 절대 권력을 상징한다. 그런데 노먼 포스터는 둠을 투명한 유리로 만들고 그 안에 경사로를 넣어서 베를린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로 만들었다. 나아가 전망대에서 아래층에 있는 국회 회의장을 내려다볼 수 있게 설계하여 ‘시민이 주인인 사회’라는 것을 선언했다. 앞에서 말한 이상현 교수의 말대로라면, 독일 국회의사당은 국회의원과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을 건축을 통해 국회의원이 특권을 가진 권력자가 아닌, 국민보다 아래에서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을 주입시키려는 의도도 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도 이렇게 리모델링해서 국회의원 등을 ‘길들이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시티그룹 센터

출처: <인문건축기행>, p. 248

 

열다섯 번째로 소개된 휴 스터빈스(Hugh Stubbins, 1912~2006)의 [시티그룹 센터](1977)은 건축상의 제약을 독특한 발상과 혁신적인 구조로 뛰어넘은 작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티그룹 센터’가 가장 훌륭한 오피스 건축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건물 하나의 디자인에 사회적 이해, 경제적 혜안, 타협과 중재 능력, 창의적 생각, 구조 기술력, 법규의 기발한 활용, 친환경 사고 등등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장점들이 종합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p. 244]

 

저자는 왜 시티그룹 센터에 대해 이렇게 극찬했을까?

땅을 팔고 떠나기를 거부한 바로 옆의 작은 교회 때문에 시티그룹 센터를 건축하기 곤란했다. 이 때 건축가는 작은 교회의 공중권을 구매해서 10층 정도를, 거대한 기둥 네 개로 지탱되는 혁신적인 구조를 채택하여 시민에게 개방된 공지를 제공함으로써 다시 10층 정도를 더 높일 수 있었다.

 

건축가는 우선 전체 ‘시티그룹 센터’ 부지의 북서쪽 사거리 코너에 있던 교회를 새롭게 디자인했다. 그리고 교회의 지붕 위로 ‘시티그룹 센터’를 지으면서 과감하게 12층 높이까지 비우고 13층부터 건물을 배치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하철에서 올라오면 만나게 되는 지하 1층의 광장부터 시작해서 13개 층 높이의 공간이 비워졌다. 거리에서 보면 대지의 남측과 서측의 대부분 땅에 건물이 하나도 지어지지 않은 것 같은 경관이 연출된다. 그리고 그렇게 비워진 땅은 오롯이 시민을 위한 광장으로 사용된다. [p. 249]

 

이렇게 해서 ‘시티그룹 센터’는 주변의 건물보다 20층 더 높게 지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남쪽으로 45도 경사진 좌우 비대칭의 첨두(尖頭)가 뉴욕 스카이라인에서 돋보여, 뉴욕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꼭 필요한 건물이 되었다고 한다.

 

 

베트남전쟁 재향군인기념관

 

 

출처: <인문건축기행>, p. 293, 298

 

열여덟 번째로 소개된 것은 마야 린(Maya Lin, 1959~ )의 [베트남전쟁 재향군인기념관](1982)로 단지 몇 분 걸었을 뿐인데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이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경험이 가능한 이유로

 

첫째, 마야 린은 주변에 이미 위치하는 거대한 ‘위싱턴 기념탑’과 ‘링컨 기념탑’을 이용하는 지혜가 있었다. 베트남 전쟁과 미국 역사라는 거대한 이야기를 두 개의 단순한 직선 산책로의 각도 조절만으로 함께 엮어서 관람객의 마음으로 스며들게 해 하나의 서사를 만들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몸을 쓰게 했다는 점이다. 내리막을 어슬렁거리며 걸어 들어갈수록 이야기의 수렁에 빠져들게 했고, 나올 때는 오르막을 오르면서 희망차게 땅속에서 벗어나도록 연출했다.

셋째는 인공의 건축은 최소한으로 하고 대부분은 기분 좋은 자연의 공원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pp. 299~300]

 

 

아주마 하우스

출처: <인문건축기행>, p. 416

 

스물여섯 번째로 소개된 건축물은 안도 다다오[安藤 忠雄, 1941~ ]의 스미요시 나가야[住吉の長屋] 혹은 [아주마 하우스(Azuma House)](1976)다. 이 작품은 그가 일관적으로 추구하는 노출 콘크리트를 소재로 간결하고 독창적인 건축 공간에 자연을 끌어들이는 경향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는 내부 중앙에 하늘을 향해 개방된 중정(中庭)이 배치되어 있어 하늘과 바람, 빛이 자연스럽게 드나들어, 도시 안에서 자연을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게 설계되었다. 이를 ‘인간과 자연을 직접 대면’하게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좁은 집의 1/3을 차지하는, 지붕 없는 중정(中庭)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면 서재에서 마루로 가는 동안 우산을 써야 하는 등 일상 생활에 있어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이처럼 이 책은 건축가 20인의 건축물 30개를 권역에 따라 나눠 소개하고 있다. 물론 30개의 건축물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퐁피두 센터]를 다룬 두 번째 장을 보면 퐁피두 센터를 설계한 렌초 피아노의 [메닐 미술관]도, 그에게 영향을 준 루이스 칸의 [리처드 의학연구소]와 [킴벨 미술관], 심지어 노트르담 대성당마저 소개 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장에서 해당 건축가의 다른 건축물을 소개하거나 그 건축물에 영향을 준 건축가와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30개의 건축물 가운데 내가 본 것은 [퐁피두 센터]와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뿐이지만, 기회가 되면 다른 작품들도 보러 가고 싶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서 각각의 건축물에 대한 소개 속에 담긴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생각들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이들 건축물을 따라 가는 기행(紀行)도 즐거울 듯 하다고 느껴서 일 것이다.

 

1) 첫째, 얇은 기둥 몇 개로 건물을 떠받치는 ‘필로티’ 구조

둘째, 철근콘크리트 구조는 벽이 아니라 기둥에 하중을 전달한다. 덕분에 원하는 곳에 벽을 자유롭게 세울 수 있었고, 유연한 공간 활용이 가능하다. [자유로운 평면]

셋째, ‘자유로운 입면’. 외벽을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있다.

넷째, 가로로 긴 ‘수평창’은 집 안을 밝게 만들고 외부 풍경을 끌어들여 파노라마처럼 집 안에 펼쳐놓는다.

다섯째, 경사지붕과 다락방을 없애고 만든 ‘옥상정원

2) 이상현,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효형출판, 2013), p.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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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전영애.박광자 옮김 / 청미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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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빵[pain]이 없으면 케이크[brioche]1)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치스럽고 생각 없는 여인을 상징하는 이 말은 불행히도 그녀가 한 말이 아니라 누군가가 계몽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제6권의 한 구절2)을 인용해서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런 누명을 써야 했을까? 먼저 이 책,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가를 살펴보자.

 

진실이란 대개 그렇듯이 중용에 가까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권주의의 위대한 성녀도 아니었고, 혁명의 ‘매춘부’도 아니었으며, 중간적인 성격에 유난히 영리하지도 유난히 어리석지도 않으며불도 얼음도 아니고, 특별히 선을 베풀 힘도 없을뿐더러 악을 행할 의사 또한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인일 뿐이었다. 마성(魔性)을 과시할 소양도 없고 영웅적인 행위를 이룰 의지도 없으며, 따라서 비극의 대상이 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인물이다. [p. 10]

 

그러면서

 

그렇지만 평범한 혹은 아주 나약한 천성의 인물이 엄청난 운명의 수렁에 빠져들었을 때, 또 무시무시한 개인적인 책임에 몰릴 때에도 비극은 발생한다.

중략 ~

마리 앙투아네트야말로 그러한 역사의 분명한 증거이다. 38년이라는 생애의 초반 30년 동안 이 여인은 무심한 길을 간다. 적어도 눈에 띄는 범위 안에서는, 그녀는 한 번도 선이든 악이든 평균치를 넘지 않았다. 미적지근한 인생이요 평범한 성격이며, 역사적으로 보면 처음에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쾌활하고 구김살 없는 그녀의 유희 세계 안으로 혁명이 밀어닥치지 않았더라면, 미미한 이 합스부르크가(家)의 여인은 모든 시대의 수많은 여인들처럼 그저 그렇게 무심히 살아갔을 것이다. [pp. 10~12]

 

저자의 평가처럼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가 평범한 보통사람, 우리 주변의 소시민과 같은 마인드를 가졌기에 비극의 대상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신성로마제국의 사실상의 황제였던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나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의 왕비인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1752~1814) 같은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운명에 희롱 당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갔을 테니까. 어쩌면 그녀가 겪은 비극은 아무런 준비 없이 왕비가 된 그녀가 받아야 할 업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의 머리 위에 얹혀진 왕관의 무게를 어떻게 느끼고 반응해야 하는지 그녀가 결혼하기 직전까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부모의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제대로 왕권을 쓴 자의 역할을 배우지 않은 탓인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수 차례의 징조를 그냥 넘기고 만다. 만약 루이 16세와 그녀가 그 징조들을 보고 제대로 대처했다면 혁명과 공화정이라는 루트 대신 개혁과 입헌군주정이라는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흔히 소시민적인 평범한 사람이 격변기에 권력의 정상에 위치하게 되면, 그가 선량하고 좋은 사람일수록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거나 그가 속한 조직이 나락으로 향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선량한 아버지이나 무능한 지도자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청(淸)나라를 동네북으로 만든 시기의 황제였던 도광제(道光帝, 재위 1820~1850),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 등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슈테판 츠바이크도 이 책을 통해 평범한 여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역사의 커다란 비극 앞에서 어떻게 극적으로 변화하는지 그려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생각 없이 경솔하게 살아온 15년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왕비라는 것은 오로지 궁중에서 가장 멋지고, 가장 애교 있고, 가장 옷을 잘 입고, 가장 버릇이 없고 또 무엇보다고 가장 잘 노는 여자라는 찬사를 받는 것아르비테를 엔레간티아룸, 즉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지나치도록 고상하게 훈련된 사교계의 지도적인 사교부인임을 뜻했다.

중략 ~

혁명이 그녀를 이 좁디좁은 로코코의 무대에서 완력으로 거세게 끌어내려 세계사라는 위대한 비극의 무대 위에 올려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운명이 자기에게 영웅적인 역할을 맡을 힘과 강한 영혼을 주었는데도, 지나간 20년 동안 너무나 보잘것없는 시녀의 역과 살롱 귀부인의 역만을 해왔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이런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왕비의 역을 맡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진정한 모습을 보였다[p. 118]

 

비록 그것이 뒤늦은 노력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시도와 도전은 그녀를 진정한 프랑스 왕비로 만들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욱 그녀에 대해, 그녀의 비극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닐까?

 

번역가들도 이 책에 대해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평범한” 인물에 대한 심리소설 쪽에 가깝다. 쇤브룬 궁의 철없는 소녀가 프랑스 왕비가 되고 결국은 단두대에서 사라지기까지의 내면적 성숙을 그린 작품이다. [p. 552]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 책도 고귀한 태생의 주인공이 운명의 사슬에 얽매여 몰락하는 고전 비극을 따라가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여기에 다소 변형을 가해 태생은 고귀하지만 평범한 소시민 같은 성격의 주인공을 등장시켰을 뿐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에게 잘못이 있다면 국왕과 왕비가 된 것이 아닐까?

 

1) 서민들이 주식으로 먹던 빵[pain]과 부자들이 먹던, 버터와 달걀을 넣어 맛을 돋운 고급 빵[brioche]을 대조하는 말인데, 영어나 한국어 등에서는 ‘브리오슈(brioche)’가 ‘케이크’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2) 드디어 나는 한 지체 높은 공주가 제안했던 임시방편을 기억해 냈다. 사람들이 그 공주에게 “농민들에게 빵이 없다”고 말하니, 그 공주는 “브리오슈(brioche)를 먹게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Enfin je me rappelai le pis-aller d’une grande princesse a qui l’on disait que les paysans n’avaient pas de pain, et qui repondit : Qu’ils mangent de la brio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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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한 권으로 독파하는 우리 도시 속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함규진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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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수도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30개 도시에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지안[集安 혹은 輯安, 국내성], 백제의 수도인 공주, 신라의 수도인 경주, 전기 가야연맹의 수장인 가락(駕洛) 혹은 금관가야[김해], 발해의 수도인 닝안[寧安, 상경용천부], 후백제의 수도인 완산주(完山州) 혹은 전주(全州), 고려의 수도인 개성, 조선의 수도인 서울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가 빠진 것이 의외였고, 후기 가야연맹의 수장인 가라(加羅) 혹은 대가야[고령]은 포함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옛 수도들 가운데서 아무래도 시선이 가는 곳은 잃어버린 영토에 있는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지안]과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닝안]다. 먼저 지안[集安 혹은 輯安]은 졸본(卒本) 혹은 홀본(忽本)에 이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424년이나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지만, 당대(當代)의 사서(史書)가 전해지지 않은 탓에 그 위치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지안설이 대세이며, 이 책에서도 지안을 두고 국내성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유적 때문이다. 국내성 유적과 환도성 유적 외에 구 외곽에 있는 태왕릉, 장군총, 무용총, 각저총, 광개토대왕릉비 등 오늘날 고구려 문화유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안의 유적들은 수백 년 동안 잊혀 있다가, 20세기 초 뒤덮은 나무와 잡초, 흙 등을 제거하고 무너진 부분을 복원하고 나서야 제 모습을 드러냈다. [p. 636]

 

<신당서>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려에 더부살이하던 것들로서, 성은 대씨다[渤海 本 粟末靺鞨 附高麗者 姓大氏)]’이라는 기록 때문에 중국에서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가 아닌 중국사의 일부로 본다. 그들은 발해를 ‘당(唐))나라의 속국 중 하나, 속말말갈(粟末靺鞨) 중심의 지방 민족 정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적인 연호1)와 고구려라는 정체성2)을 가졌으며, <신당서>보다 앞선 <구당서>에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渤海靺鞨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라는 표현 등을 감안하면 발해는 한국사의 일부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장기간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즉 닝안[寧安]에 대해 저자가 어떻게 서술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지안에 이어 닝안 부분을 펼쳐봤다.

 

오늘날 발해 상경 유적지는 보하이진[渤海鎭]에 있다. 그곳에 가면 상경유지(上京遺址) 박물관이 있어서 1930년대 이래 발굴되고 조사된 발해 유적지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진열실 첫머리부터 발해를 설명하는 문구는 “당나라의 속국 중 하나. 속말말갈 중심의 지방 민족 정권”이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계가 왕실을 구성하며 고구려의 후계국가로 존립했다는 진실과 당에 형식적으로 조공했더라도 결코 속국이라 할 수 없는 독립국가 해동성국이었다는 사실, 보다 나아가 발해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정체성을 깡그리 부정하는 문구인 것이다. 이는 동북공정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기 전부터 중국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곳을 들르는 한국 연구자와 관광객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고, 발해 관련 국제학술대회가 열릴 때마다 ‘발해사는 한국사인가? 중국사인가?’를 두고 두 나라의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거듭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엉뚱하게도 러시아 쪽에서 두 나라의 과도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중재한다며 발해사는 중앙아시아 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와 만주의 삼림 지대는 생활환경, 문화환경이 모두 판이하건만, 그렇게 주장하는 까닭은 중앙아시아의 맹주가 러시아라는 의식 때문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만주 땅 전부가 일본의 터전이라 여긴 일본의 만선사관처럼 말이다. [pp. 685~686]

 

거란, 즉 요(遼)나라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28년 상천용천부의 주민을 이주시켜 상경용천부가 급격히 쇠락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 부흥 운동을 전개하다가 수만 명의 백성과 함께 고려로 망명했다. 이런 가운데 발해 유민들은 점차 응집력을 잃어버렸고, 이들을 대신해서 흑수말갈의 후예, 그 가운데서도 건주 여진이 이곳을 그들의 발상지인 ‘닝구타[寧古塔]’로 기억한다.

 

옛 수도이지만 우리가 가기 힘든 도시로는 평양과 개성도 있다. 여기서 가장 흥미 있는 도시는 ‘붉은 워싱턴’, 평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훨씬 뛰어넘는 무지막지한 폭격으로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휴전 뒤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평양이 건설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평양과 비슷한 도시를 꼽는다면 어디일까? 서울? 아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자 혈맹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 그렇지 않다. 지구상에서 평양과 가장 비슷한 도시는 미국의 워싱턴이다.

누군가 워싱턴을 “죽은 사람들을 위한 도시”라고 폄하했었다. 과언이 아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오벨리스크를 본뜬 워싱턴 기념탑을 중심으로 넓고 긴 도로가 마름모꼴을 그리고, 마름모의 꼭지점마다 국회의사당, 백악관, 링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이 있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 정치권력의 두 정점이며, 링컨과 제퍼슨 기념관은 건국의 아버지와 현대 미국의 아버지이자 노예 해방자를 모신 신전이다. 고고한 백색으로 빛나는 건물을 넓고 푸른 잔디밭과 포토맥강이 둘러싸고 있다. 전후 평양시를 재건할 때 이 워싱턴을 참고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동강이 도는 도시 공간을 일정하게 구획하고 거대 기념물들을 배치한 점에서 이만큼 짝을 이루는 도시도 없다. [pp. 553~554]

 

 

이 곳도 한국사에 등장하는 30개 도시인가요?

 

이 책에 소개된 ‘30개 도시’ 가운데 가장 의아했던 곳은 ‘제주’와 ‘대마도’다.

우선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라고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이 책, 아니 이 시리즈가 숱한 세월 속에서도 그 자리에 남아 축적된 도시 속 숨은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를 풀어내고자 하는 의도라고 알고 있는데,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라고 밀어 넣은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로 본다고 하더라도 ‘대마도’의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바로 대마도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하느냐의 문제다. 만약 대마도의 역사를 한국사의 일부라고 한다면 독도(獨島)를 다께시마[竹島]라고 하면서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 혹은 극우적인 사고 방식의 산물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다. 저자도 여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지, 11장 대마도 편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마도를 이 책의 일부로 넣는 일은 많이 망설여졌다. 지안이나 단둥 등은 한때는 분명 한국의 영토였지만, 대마도는 ‘확실히’ 영토였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칫 이 책이 ‘낭만적 민족주의’를 부추긴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어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불확실하게’ 영토였던 적은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비롯해 한일관계사, 한국이 일본과 겪은 여러 애증의 역사에서 대마도가 중심에 있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이 장을 썼다. [p. 287]

 

라고 서술했다. 도대체 언제 대마도가 ‘불확실하게’나마 한국의 영토였을까?

 

대마도가 신라 땅이었다는 말은 조선 초에도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듯하다.  바로 세종 때의 대마도 정벌 당시, 대마도주에게 보낸 유시문(諭示文)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해 있던 섬이니, 본래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느니라. 다만 그 땅이 매우 좁고 바다 가운데 있어서 오가기 힘든 관계로 백성들이 살지 않았다. 이에 왜노 중에 본국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자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어 소굴을 만들어놓고, 수시로 약탈을 자행하면서 약한 백성의 처자식을 잡아가거나 백성의 살림을 분탕질하기도 하니, 그 흉악한 만행이 여러 해 이어져 오고야 말았다.

 

종합해서 추정해 보면, 신라가 대마도를 내륙의 고을처럼 세를 거두고 법을 집행하며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방관도 주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군사적 거점 같은 것은 있었을지 모르며, 백성이 살지 않거나 별로 없지만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런 모호한 영토권은 왜의 입장에서도 주장할 만했다. [pp. 296~297]

 

1246년 백제계 아비루[阿比留] 가문에서 일본계 소[宗] 가문으로 대마도의 지배자가 교체되었고, 일본에서 ‘분에이[文永]의 역(役)’이라 부르는 여몽연합군의 1차 일본원정(1274년)을 계기로 모호한 경계선에 있던 대마도인들은 일본인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아예 일본의 한 지방으로 확정되었다.

 

왜란 이전까지 일본 지도나 일본 행정 체제에 대마도는 없었다. 그러나 왜란 이후로는 일본의 한 지방으로 인정된다. [p. 308]

 

이 책에는 조선시대 8도를 대표하는 도시 가운데 독일풍의 도시로 재건된 함경도의 함흥, 평안도의 평양, 황해도의 해주,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경주, 강원도의 강릉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사라는 요소만 고려한다면, 고려 왕건을 지지하면서 후백제 견휜(甄萱)의 배후를 노리는 비수 역할을 했으며 전라도의 또 다른 대표도시였던, 나주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제외되어 아쉬웠다.

 

독일 태생으로 북한에 유학해 북한 연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 빈 대학의 뤼디거 플랑크 교수는 현대의 함흥을 “독일풍의 도시”라고 말한다. 그렇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잿더미가 된 도시의 전후 복구 과정에 동독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가진 이 동양의 고도(古都)는 근대 서구의 도시처럼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도시로 재탄생했고, 동독에서 유행하던 노란색 타일을 붙인 건물이 즐비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새로 닦은 가로의 이름을 빌헬름피크대로로 붙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슬그머니 그 이름을 바꾸고, 전후의 재건도 천리마운동 등 자체 노력의 산물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pp. 592~593]

 

어쨌든 이렇게 28개의 도시와 2개의 섬을 둘러보면서, 단순히 무슨 왕이 어떤 일을 했느냐 혹은 **년에 무엇이 일어났느냐를 외어야 했던 한국사에서 벗어나 여행하듯이 각각의 도시들이 간직하고 있는 얘기들을 듣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면의 10% 이상을 서울이 차지하고 있고, 30개 도시라는 제한으로 한국사에서 한 몫 했던 도시 모두가 포함되지 못해 다소 아쉬운 점은 있지만 한번쯤 읽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가 직접 가기 힘든 북쪽 땅과 잃어버린 영토에 있는 도시들의 경우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면 쉽게 만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 리뷰는 다산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 2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때의 인안(仁安)부터 왕호가 전해지지 않는 11대 대이진(大彛震)때의 함화(咸和)까지는 중국측 사서에도 발해의 독자적인 연호가 전해진다.


2)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스스로 ‘고려(=고구려)’를 칭했다고 한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고려국왕 대흠무[大欽茂, 발해의 3대 국왕 문왕]가 말합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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