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이창익 지음 / 인간사랑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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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살아 있는 죽음’은 <월간 미술> 2017년 12월호에 발표한 <죽지 않는 것들의 죽음에 관하여>와 2010년 3월 <역사와 문화>19호에 발표한 <죽음의 연습으로서의 의례: 이중 장례식의 구조와 의미>를 새로 고쳐 쓴 것이다. 2부 ‘죽음의 해부도’와 3부 ‘죽음 너머의 시간’은 1998년 2월에 발표한 <시간과 죽음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의 석사학위논문을 물음만 남겨둔 채 모두 새로 다시 쓴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이십여 년 전에 내가 처음 제기했던 학문적 물음을 뼈대로 삼고 있다. 4부 ‘사라지는 죽음’은 2013년 9월 <종교문화비평> 통권24호에 발표한 <죽음에 관한 일곱 가지 이야기: 정진홍의 죽음론>을 새로 고쳐 쓴 것이다. [p. 12]

 

즉, 저자가 이미 발표한 글들을 첨삭과정을 통해 하나의 책으로 엮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일까?

 

1부 ‘살아 있는 죽음’에서는 로버르 에르츠(Robert Hertz, 1881~1915)의 이중 장례식에 대한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죽음’이라는 관념을 살펴본다. 죽음 후에 시체가 완전히 부패하여 뼈만 남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1차 장례식[‘살’의 장례식] 동안 죽은 자의 영혼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방황한다고 여겨진다. 살이 제거되고 뼈만 남게 되면, 이를 가지고 2차 장례식[‘뼈’의 장례식]을 치른다. 이를 통해 비로소 죽음이 완성되고, 죽은 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소속이 바뀐다.

저자에 따르면

 

이중 장례식은 개별성을 지우고 집합성을 창조하는 의례, 즉 시간을 지우고 영원을 창조하는 의례라고 할 수 있다. [p. 58]

 

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원시사회의 이중 장례식은 종교가 다른 사회영역으로부터 분화될수록 변형된다. 이로 인해 삶에 대한 인식이 이질적인 단계가 연속된 계단식에서 단일한 직선으로 변화했다.

 

장례식이 어떤 식으로 해석되고 번역되든, 장례식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사회에서 삭제하려는 시도이다. 장례식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쳐야만, 죽은 자는 조상이라는 익명의 집합성에 용해되어 새로운 존재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p. 88]

 

뭔가 모순적이지만, 일단 죽어야만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대체로 종교에서는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더 이상 죽지 않는 불멸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 128] 

 

아마도 그래서 저자는 죽음을 ‘탄탈로스의 바위’에 비유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죽음은 ‘탄탈로스의 바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탄탈로스의 머리 위에 매달린 채, 언제 허공에서 떨어져 탄탈로스의 머리를 박살낼지 알 수 없는 이 바위로 인해, 탄탈로스는 감히 신의 음식을 먹지 못한다. 아마도 제우스는 탄탈로스의 오만함을 징벌하기 위해 머리 위에 바위를 매달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위는 인간과 신의 건널 수 없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탄탈로스는 바위의 추락을 감수하지 않는 한, 신의 음식에 손을 댈 수 없다. 신처럼 살려면 탄탈로스는 신들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음식에 손을 대는 순간 바위가 떨어질 것이다. 신처럼 살려고 하는 순간 탄탈로스는 인간으로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항상 신과 인간의 차가운 경계선을 알려준다. [p. 125]

 

 

2부 ‘죽음의 해부’와 3부 ‘죽음 너머의 시간’에서는 ‘시간’관념을 중심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다양한 종교적 상상력을 유형화한다.

 

인간은 시간 개념을 통해 인간만의 죽음을 발견한다. 죽음과 시간의 복잡한 내적 관계는 인간에게만 드러나는 현상이며, 인간은 시간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시간의 차원, 즉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도약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을 통해 시간 너머를 꿈꾼다. 인간은 시간 너머의 존재, 또는 죽음 너머의 존재를 꿈꿈으로써 죽음을 넘어서려 하고, 자신의 존재를 이미 죽은 자뿐만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자와 연결시킨다. [p. 356]

 

이처럼 모든 ‘죽음’의 문화는 ‘죽음 너머’를 상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후세계와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죽음은 삶의 끝이면서도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될 수 있는 기점으로 상상된다. 완전한 끝만이 완전한 시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그 기저에 자기만의 죽음의 신화를 품고 있다. [p. 414]

 

 

4부 ‘사라지는 죽음’에서는 현대사회의 죽음의 관념에 대해 서술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너무 빨리 죽는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제사, 추도식, 무덤과 같은 죽음을 지연하는 사회적 장치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즉,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을지라도 사회적 기억을 통해 오랫동안 불멸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과거와는 반대로 너무 늦게 죽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의술의 발달로 인한 죽음의 지연현상으로 생물학적 죽음에 선행하는 사회적 죽음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자연적인 죽음 대신 인공적인 죽음인 안락사(安樂死), 존엄사(尊嚴死)와 같은 ‘좋은 죽음’의 개념이다. 결국 최근에 많이 논의되는 ‘좋은 죽음’ 혹은 ‘웰다잉(Well-Dying)’은 결국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시대적 위기의식이 가져온 산물인 셈이다.

 

웰다잉은 자기가 살았던 자리를 깨끗하게 치우고, 남은 자들에게 최대한의 작은 상처를 주고, 그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고백하면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말 같다. 이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표준화된 ‘엔딩 매뉴얼’에 따라 자신을 죽음을 준비하면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죽음의 기술’을 습득해야 할 것 같다. 결국 웰빙이나 웰다잉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질에 대한 개별적 책무를 강조하는 말이다. [p. 500]

 

과거에는 ‘죽음’과 그에 관련된 일은 사회적 책무였다.

 

우리가 죽은 자와 함께 형성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의 존재를 파괴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다. 이 공동체는 내 존재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p. 378]

 

하지만 의학이 발달한 현대사회가 되면서 지나치게 늦은 죽음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좋은 죽음’이나 ‘웰다잉’은 이런 과정에서 과거 사회적 책무였던 것들이 개인적 책무로 변화하는, 즉 ‘개별화’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이고 ‘웰(well)’일까? 그리고 이런 ‘좋은 죽음’이나 ‘웰다잉’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저 막연히 단어로만 다가왔던 ‘죽음’ 그리고 ‘웰다잉’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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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의 도쿄
나이토 아키라 지음, 호즈미 가즈오 그림, 이용화 옮김 / 논형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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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江戶]의 등장

 

일본의 수도는 794년에 당시 세계 제일의 대도시였던 중국 당(唐)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을 본 떠 4분의 1 정도의 크기로 조성된, 계획도시 헤이안쿄[平安京, 오늘날의 교토]가 먼저다. 그러다가 고대 율령제 국가가 무너지면서, 교토 사람들이 ‘동이(東夷)’라고 부르며 업신여기던 간토[關東] 사람들이 주역으로 활동하는 중세가 시작됐다. 소위 ‘반도[坂東] 무사’ 혹은 ‘간토[關東]의 무사’들에 의한 막부(幕府) 시대, 구체적으로는 가마쿠라[鎌倉] 막부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에도[江戶, 오늘날의 도쿄]’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렇다면 ‘에도’라는 도시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본격적인 에도성[江戶城]의 시작은 간토 간레이[關東 管領] 우에스기 사다마키[上杉 定正, 1443~1494]의 가신인 오타 도칸[太田 道灌, 1432~1486, 이하 ‘도칸’]이 1457년에 쌓은 요새라고 한다. 이 후 에도성이 ‘간토 제일의 명성(名城)’으로 불리면서, 많은 학자와 승려들이 황폐해진 교토를 떠나 도칸을 따르기 위해 모였다. 이렇게 그의 위망(威望)이 높아지자, 1486년 그의 주군, 우에스키 사다마키가 그를 암살한다. 도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에도성은 더 이상 번영하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런 에도성이 변화를 겪게 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이하 ‘이에야스’]가 간토를 새로 영지로 받으면서부터였다. 석축(石築) 하나 없이 잡초로 덮인, 흙을 다져 쌓은 토담[土墻]만 남아있는 에도성에 자리잡은 이에야스는 헤이안교를 모델로 삼아 1592년 에도성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세계 제일의 문명을 자랑하는 중국에서는 오랜 경험에서 ‘음양학(陰陽學)’이라는 학문이 번성했습니다. 현대의 천문학과 지리학을 합친 학문으로 인간이 행복한 생활을 보내려면 어떠한 지형에서 살면 좋은가를 점치고 예측하는 일종의 과학입니다.

음양학에서는 도시 만들기의 원리로써 ‘사신상응(四神相應)의 지형’을 선택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동서남북 4개의 신을 모시는 다음과 같은 지형을 찾아 도시계획을 하라는 것입니다.

동쪽에 ‘청룡’의 신이 머무는 강

남쪽에 ‘주작’의 신이 머무는 연못이나 바다

서쪽에 ‘백호’의 신이 머무는 길

북쪽에 ‘현무’의 신이 머무는 산

 

요컨대, 산을 등지고 남으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태양 빛을 가득 받은 동쪽에서 맑은 물을 끌어들여와 평상시의 음용수로 이용하면서 서쪽에서 들여온 식료로 풍족한 생활을 한다 - 이것을 인간의 이상향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pp. 39~40]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6~1598]이 후시미성[伏見城]의 건설을 명하면서 에도성의 건설은 중단됐다. 그러다가 이에야스가 에도[江戶] 막부를 개설하면서 다시 공사가 재개됐다. 이후 에도 막부의 2대 쇼군[將軍]이 된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1581~1632]의 지시로 축성술의 대가인 도도 다카토라[藤堂 高虎, 1556~1630]가 에도성을 중심으로 소용돌이 모양의 수로가 시계방향으로 끝없이 이어지도록 도시계획의 기본설계를 변경했다.

 

달팽이 모양의 확장계획

사진출처: <에도의 도쿄>, pp. 58~59

 

새롭게 고안해낸 것이 ‘달팽이[の]’ 모양의 거대한 확장계획이었습니다. 에도성을 중심으로 마치 ‘달팽이’를 그리듯이 오른쪽으로 소용돌이치는 모양의 수로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까지 만든 동네를 보존했다는 것입니다. 외각에 있는 구릉이나 계곡과 산 등의 자연지형을 효율적으로 살리며 ‘달팽이’ 모양으로 수로를 뻗어가게 했습니다. 토목기술만 잘 활용하면 에도라는 도시는 그야말로 발전가능성이 무한했습니다.

그리고 이 ‘달팽이’ 모양의 수로에 방사상(放射狀)으로 다섯 갈래의 큰 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에도가 제아무리 커져도 무사의 소비생활을, 쵸닌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도시계획은 아주 특이했으며, 처음부터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 계획에 의해 막부는 여러 다이묘들의 부인과 자녀를 에도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1년마다 참근교대(參勤交代)를 안정적으로 실시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전국에서 아무리 많은 무사가 몰려와도 충분히 거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확장계획이 없었다면 에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작 해야 나고야[名古屋] 정도의 죠카마치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pp. 57~60]

 

토목공사

사진출처: <에도의 도쿄>, pp. 42~43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단단한 암반 위에 돌을 쌓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에도성의 해자는 히비야만을 매립한 갯벌 위에 쌓는 것이기 때문에 무거운 석축은 푹푹 가라앉았습니다.

그래서 진흙 속에 소나무를 나란히 깔고 뗏목을 짜넣고 긴 말뚝을 박아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킨 후에 돌을 얹는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이것을 ‘뗏목지형’이라고 합니다만, 가라앉는 일이 잦아 모처럼 쌓은 석축이 공사 중반에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중략 ~

(이에 가토 기요마사는) 무사시노에 우거져 있는 억새풀을 베어내어 진흙 늪 속에 깔고, 10살에서 15살까지의 어린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 그 위에서 놀게 하면서 시간을 두고 굳어지게 한 후에 석축을 쌓았다고 합니다. 아사노 가문의 사고로 인해 공사는 늦어졌지만 이렇게 쌓은 석축은 지진이 발생해도 꿈쩍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pp. 79~80]

 

이렇게 석축 쌓는 토목공사가 끝나자 건축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 목수 출신인 나카이 마사키요[中井 正淸]는 그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혼마루[本丸] 중앙에 솟아 있는 대천수(大天守)의 동-북-서쪽에 소천수(小天守)를 에워싸듯 짓는 마치 고리처럼 연결하는  ‘환립식(環立式)’ 천수를 세웠다.

 

환립식 천수(天守)

사진출처: <에도의 도쿄>, p. 83

 

1640년 4월,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때에 이르러 비로소 에도성이 완공됐다. 거의 50년 만이었다.

 

에도성[江戶城] 혼마루[本丸]

사진출처: <에도의 도쿄>, pp. 104~105

 

1644년의 에도 시역은 44평방 킬로미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일본 제일의 거대도시였습니다. 두 번째 도시인 교토는 21평방 킬로미터 정도였습니다. 언제부턴가 에도는 고대 이후 문화의 중심이었던 교토를 뛰어넘어 그 두 배 이상 되는 거대도시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달팽이’ 모양의 도시계획은 드디어 그 위력을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도 시민은 모두가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가 영원히 이대로 지속될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p. 173]

 

이러한 안이함은 메이레키[明曆] 3년(1657)에 발생한 대화재로 사라졌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에서 일어난 대형화재로 인해 50년에 걸쳐 세워진 에도성이 불과 이틀 만에 허허벌판으로 변했다.

이에 따라 막부는 서양식 삼각측량 기술에 의한 ‘에도 실측도’를 완성하고, 성곽 내에 ‘방화용 공터[火除け地]’라는 빈 터를 마련했다. 그리고 다양한 건축규제를 적용했다. 예를 들면, 들보 3간(약 5.9m) 이상의 대형 건축을 지을 수 없게 되었고, 도로의 폭이 넓어졌으며, 도로변에는 소화작업을 쉽게 하기 위해 1간(약 1.8m)의 차양을 새로 설치해야 했다.

 

이후 에도에는 거대도시에 얽힌 다양한 재해가 일어났지만 그 때마다 시민은 ‘화재와의 싸움은 에도의 꽃[火災と喧?は江戶の華花]’이라고 여기며 억척스럽고 힘차게 부흥하는, 더 큰 발전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동시에 가부키와 우키요에[浮世繪] 등,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를 창조해 냈습니다. [p. 108]

 

어쨌든 ‘메이레키 대화재’는 결과적으로 ‘에도’가 ‘거대도시 에도’로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뿐만 아니라 화재예방을 위해 1쵸[町]마다 30명으로 구성된 시민소방조직[町火消し]을 모아 ‘이로하 48조’라는 소방대를, 화재감시대[火の見]를 설치하고, 불에 강한 내화건축을 위해 기와지붕 건축을 허가하는 등 변화가 시작됐다.

 

이에야스 이후 발전해 온 소비도시 에도는 ‘흑선내항(黑船來航)’ 이후 개항, 참근교대제의 완화 등을 거쳐 물가상승으로 약탈소동이 발생하는 등 쇠퇴의 기미를 드러냈다. 여기에 도막(倒幕) 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신정부군[倒幕軍]에게 에도성이 넘어가고, 1868년 에도[江戶]가 도쿄[東京]로 명칭이 바뀌면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이 책, <에도의 도쿄>는 ‘에도[江戶]’라는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에도 막부 시대에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그린 책이다. 일본 건축사를 전공한 나이토 아키라[內藤 昌, 1932~2012]의 글과 건축학과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호즈미 가즈오[穗積 和夫, 1930~ ]의 일러스트가 맛깔지게 결합하여 비전공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쓰여졌다. 중세 도시의 형성과정이나 ‘에도’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옥의 티                                                                                                                                   

p. 12 [거대도시 에도에 관한 연표] 중에서

에도성 완성 시기가 1940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1640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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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디테일 - 고객의 감각을 깨우는 아주 작은 차이에 대하여
생각노트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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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정체를 밝히지 않는, ‘생각노트’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기록활동가’ 혹은 ‘인플루언서’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책 <도쿄의 디테일>은 ‘도쿄’라는 말이 들어가있지만, 도쿄[東京]라는 도시의 여행을 위한 가이드북도, 도쿄에서 유행하는 최신의 트랜드를 전해주는 책도 아니다. 굳이 이 책의 성격을 정의하자면, 누구나 알 만하거나 들어 봄직한 ‘도쿄’라는 도시의 곳곳을 경험하고, 도시의 면면을 살피면서 기록하고 생각한 것을 공유하는 수단이다.

 

이 책에서 기록한 디테일은 2017년 12월의 도쿄의 디테일이다. 먼저 집중하기 힘든 기내 안전 수칙을 네이버 웹툰의 주요 캐릭터가 설명하는 방식으로 극복한 ‘에어 서울’, 항공여행객의 캐리어 보관에 대한 고민이 담긴 ‘나리타 익스프레스’의 ‘캐리어 셀프 잠금 시스템’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본격적인 소개는 100년이 넘게 일본 문구류 시장을 선도하는 ‘이토야(Itoya) 문구점’부터 시작한다. 저자가 방문한 이토야 본점은 1층부터 12층까지 각 층마다 다른 카테고리와 콘셉트로 구성되어 있다. 고급스러운 만물상의 지향하는 독특함이 이토야를 ‘문구 덕후의 성지’로 꼽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다음에 소개하는 곳은 도쿄중앙우체국을 쇼핑몰과 백화점을 결합한 복합 문화 쇼핑몰로 재탄생시킨 ‘키테(KITTE)’ 쇼핑몰이다 어떻게 보면 도시재생사업의 결과물인데, 일본 전국의 시니세[老鋪]에게 쇼핑몰의 자리를 먼저 내주는 정책에 의해 전통과 현대의 성공적인 결합도 이루어냈다.

도쿄의 번화가인 오모테산도[表參道]에 있는 독특한 점포들도 소개되어 있다. 자신이 느낀 바를 현장에서 기록하고, 다른 관람객이 어떤 점을 느꼈는지 방명록을 통해 볼 수 있는 전시공간인 ‘디자인 페스타 갤러리’, 푸드트럭도 고정적인 위치에서 운영하는 식당, 나아가 복합 문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커뮨 세컨드(COMMUNE 2)’ 등이 그것이다.

롯폰기 미드타운을 대표하는 ‘21_21 디자인 사이트는 전시회마다 색상이 바뀌는 둥근 스티커 입장권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으로 기획 의도를 설명하는 디렉터의 메시지, 관람을 마친 후 건물에 대한 호기심을 간직할 수 있게 한 굿즈 등이 돋보인다.

 

이런 디테일들이 저자를 매혹시킨 것이 아닐까?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소한 디테일 때문입니다. 그 디테일이 누군가에겐 보잘것없는 부분일 수 있지만 저에겐 도쿄행 티켓을 끊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p. 24] 

 

사실 이런 특성은 우리가 ‘일본인’하면 떠올리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가 도쿄 구석구석의 디테일한 물건들과 장소들에 얘기하고, 삶을 편하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기획과 디자인에 대해 얘기해도 오히려 친숙함을 느끼게 된다.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는 도쿄’ 혹은 ‘안다고 생각하는 도쿄’의 시시한 이야기라고 느낄 수도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지행합일(知行合一)하지 않고, 공리공론(空理空論)에만 몰두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비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는 많아도, 그것을 제대로 알아채고, 적용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오히려 우리들은 ‘대충’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디테일한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생활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 깜빡할 뻔 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디테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사용하는 ‘디테일’과 다소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디테일은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한 점의 오류도 없이 완벽한 상태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디테일이 잘 살아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칫 놓칠 수 있는 사소한 부분까지도 신경을 썼다고 느껴질 때 그렇게 말하죠. 또한 세부 사항을 의미할 때도 디테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내용을 조금 더 디테일하게 알려줘”라고 말할 때처럼요.

중략 ~

<도쿄의 디테일>에서는 완벽한 상태 또는 세부 사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고객 입장에서 체감하는 감동의 순간을 ‘디테일’로 정의했습니다.  [p. 325]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도쿄의 디테일>은 도쿄의 디테일한 물건을 보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효과를 주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이를 우리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저자의 아이디어를 보면서 영감을 얻거나 습관을 기르기를 권유하는 책이다. 손질된 생선을 먹기 좋게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라는 얘기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발견한 것을 기록하는 ‘성실함’과 생각한 것을 공유하는 ‘전달의 힘’을 가지고 ‘나의’ 아이디어를 만들면 된다. 처음에는 시원찮은 결과만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에 실명하지 않고 반복하다 보면 이런 방식이 체화(體化)되어, 어느 순간 디테일에 강한, 그러니까 고객의 마음을 울리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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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답안지 - 시권 고전탐독 3
김학수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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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과거제 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 셀러가 된 이후, ‘공정(公正)’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화두(話頭)가 된 듯하다. 그런다면 ‘공정’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례는 어떤 경우가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지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분야는 ‘취직’과 이를 위한 ‘입시’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양반을 자처하는 지식인에 있어서는 이 것이 둘이 아닌 하나였다. 게다가 그들에게 있어서 관리가 되는 길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먼저, 조선시대 지식인의 가장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던 관료 선발 제도부터 살펴보자. 관료를 선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중국 수(隋)나라의 과목선거(科目選擧, ‘선거제’)에서 시작된 과거제도만큼 고위 관료를 능력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선발하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공무원 제도도 연공서열에 따라 승진한다는 점에서 제도 그 자체만 본다면 과거제보다 공정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마 그래서 과거제를 고위 공무원 선발에 있어서 제대로 시행한 국가가 중국(587~1905), 한국(958~1894), 베트남(1075~1919)1)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선비의 답안지]는

 

이 책은 조선 시대 선비의 모습을 과거제, 보다 정확하게는 과거 시험의 답안지인 시권(試卷)을 통해 보여준다. 13개의 논문을 엮어 3부 13장으로 구분했다. ‘1부 시권을 살펴보다’에서는 시권이라는 과거 시험 답안지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과거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되는지를 살펴본다. ‘2부 조선의 과거를 이해하다’에서는 장원 급제 비결, 합격자 발표인 방방(放榜)과 과거급제자의 시가행진이라 할 수 있는 삼일유가(三日遊街) 등 사회 풍속 및 여기에 얽힌 비화 등을 알려준다. ‘3부 시권의 행간을 읽다’는 과거 시험에 나왔던 문제, 특히 책문(策問)을 통해 당대의 지식인인 선비의 눈에 비친 사회상을 들여다 본다.

이 중 3부는 조선시대 성리학에 대한 대중의 편견을 교정해주는 측면도 있다. ‘책문’이라는 시험방법과 그 답안들을 통해 왠지 현실 문제에 관심이 부족하고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을 듯한 조선의 선비들이 어떻게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있고, 또 실제로 어떤 해결책을 제시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권(試卷)이란?

 

과거 시험의 답안지를 시권(試卷)이라고 하는데, 시험의 방식 혹은 내용에 따라 제술(製述), 강서(講書), 사자(寫字), 역어(譯語)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제술(製述) 방식은 글을 짓는 능력과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 등을 살피는 시험으로 시(詩), 시와 산문의 중간 형태를 띤 부(賦), 어떤 인물의 공적이나 업적을 찬양하는, 전아(典雅)하고 장중(莊重)한 운문인 송(頌), 국왕의 물음에 대해 응시자가 해결 방안 등을 진술한 대책(對策),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논(論) 등을 제출한다. 주로 문학적 능력을 살피는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책(對策)처럼 응시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요구하는, 일종의 논술시험에 해당하는 부분도 있어 그런대로 관료 선발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다고 할 수 있다.

 

강서(講書)는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경전을 보면서 물음에 답하는 임문(臨文) 형식과 경전을 시험관 앞에 펴 놓고 외우거나 책을 보지 않고 물음에 답하는 배강(背講)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과(文科)에서 많이 쓰이나 무과(武科)나 잡과(雜科)에서도 사용하는 시험방식이다. 이런 방식의 시험에는 답안 작성을 위한 시권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험절차상 시험문제를 내고, 채점내용을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시권을 작성한다. 즉, 강서 시권이란 시험출제 내용과 점수를 기록한, 일종의 구두(口頭)시험 채점표라고 할 수 있다.

 

역어(譯語)는 <경국대전>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형식이고, 사자(寫字)는 몽골어, 왜어(倭語), 여진어(女眞語) 등으로 된 출제부분의 내용을 외워서 베껴 쓰는 형식이다.

 

 

시권, 무엇을 기재하나

 

시권에 기재되는 내용은 크게 응시자 본인이 기록한 것과 시관(試官) 등이 기록하거나 확인하는 것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장 시권이 많이 남아 있는 제술의 경우, 응시자는 먼저 본인과 사조(四祖;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기재한다. 그리고 과목마다 정해진 양식에 따라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제(試題)가 짧을 경우는 문제를 그대로 쓰고, 긴 경우에는 ‘문운운(問云云)’ 등으로 문제를 생략한다. 그리고 시험명은 시(詩)나 부(賦)는 시제의 아래쪽, 대책(對策)과 경의(經義)는 대(對), 서의(書義), 예의(禮義), 역의(易義), 시의(詩義)라고 써서 시제의 위쪽에 각각 기록한다. 시나 부는 운자(韻字)를 맞춰야 하고, 경의나 대책의 답안에는 첫 부분과 끝 그리고 서술 중에 우(于), 근대(謹對), 신복유(臣伏惟), 신복독(臣伏讀), 공유(恭惟) 등의 자구를 삽입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답안의 글자 수도 최저 하한선이 있어 그 이상을 써야 했다.

 

응시자가 답안지를 제출하면 시관은 먼저 인적 사항 부분의 근봉(謹封) 여부를 확인한다. 그리고 시권을 연결시킨 부분이나 틀린 곳을 수정한 곳에 도장을 찍는다[착인(着印)]. 그리고 나서 시권을 관리하기 위해 답안지를 10장씩 묶어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연번호(連番號)를 기재한다[자호(字號)]. 그 다음 점수를 붉은 글씨로 굵게 기록하고, 과차(科次) 즉 등수를 표시한다.

 

어쨌든 과거제가 공정을 강조했기 때문일까? 아무리 훌륭한 실력을 갖추고 뛰어난 내용을 담았다고 해도 시권의 규정된 형식을 지키지 못하면 합격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다소 억울하다고 느낄 사례도 발생한다.

오늘날 시험에서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1681년 강경에서 15분(分)2)이라는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은 주항도(朱恒道)는 시권에 이름과 나이를 써 넣지 않아 불합격으로 처리됐다. 얼마나 긴장했기에 사조(四祖;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기재해놓고 정작 본인의 인적 사항을 누락했을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이렇게 웃으면 얘기할 수 있지만,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속이 터져 미칠 것 같을 것이다.

 

 

시험 부정을 막기 위한 노력

 

우리가 ‘과거’라고 할 때 떠올리는 대과(大科)는 문관 임용 ‘자격’ 시험으로 소과(小科)에 합격하지 않아도 응시가 가능했다.  1차 시험인 초시(初試)에서 240명, 2차 시험인 복시(覆試)에서 33명을 각각 뽑는다. 3차 시험인 전시(殿試)는 복시에서 선발된 33명의 순위 결정전인데, 여기에서의 순위에 따라 처음 임관되는 품계가 달라진다. 즉, 갑과 1등인 장원(壯元)은 종6품, 갑과 2등인 아원(亞元) 혹은 방안(榜眼)과 3등인 탐화랑(探花郞)은 정7품, 을과 7명은 정8품, 병과 23명은 정9품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현관서용(顯官敍用)과 한품서용(限品敍用)의 임용원칙 때문에 4등 이하의 을과나 병과 합격자들은 사실상 전직관료나 명문가의 자제가 아니면 임용이 어려웠다. 그래서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부정행위에의 유혹도 강해질 수 밖에 없었다.

 

시제(試題)의 사전 누설, 붓에 커닝페이퍼를 숨기는 협서(挾書), 남의 답안을 베껴 쓰는 차술(借述), 답안을 대신 작성해주는 대술(代述), 응시자들이 하나의 접(接, team)을 이뤄 과장에 함께 입장하여 한 자리에 앉아 서로 돕고 의논하여 답안을 작성하는 공동제술(共同製述) 등의 부정행위는 입시부정이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정행위를 막으려는 노력은 계속 되어 왔다.

 

첫째, 봉미법(封彌法)이 있다. 응시자의 사조, 나이, 성명, 거주지 등 신원이 기재된 부분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말아올려, 말아올린 부분의 상단·중단·하단 세 곳에 구멍을 내고 끈으로 묶은 다음 ‘근봉(謹封)’이라는 글을 써 넣거나 도장을 찍어 두는 방법이다.

 

둘째는 역서법은 응시자가 작성한 문장의 필체를 시관이 알아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다. 즉, 서리를 시켜 시험내용을 다른 지면에 옮겨 쓰게 한 뒤, 이를 보고 채점하는 것이다.

 

셋째는 시관과 응시자 사이에 장막을 설치하는 것이다. 이는 강경에 있어서 시관이 응시자를 알아보고 공정하지 못하게 채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TV프로그램 [복면가왕]과 비슷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행위는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아마도 사람 사는 곳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비슷한가 보다.

 

 

옥의 티

 

p.27

③ 과시(科試): 고사나 시문 중의 문구를 시(詩)의 제목으로 제시하고 ~ 한시의 일종이다.

⇒ ③ 과시(科詩): 고사나 시문 중의 문구를 시(詩)의 제목으로 제시하고 ~ 한시의 일종이다.

 

 

1) 18세기 후반 대월(大越)의 떠이선[西山] 왕조의 꽝 쭝[光中, 재위 1788~1792] 황제는 베트남 고유의 문자체계인 쯔놈[字喃]을 공식문자로 지정하고, 나아가 과거시험에 이를 사용하여 답안을 작성하라는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기도 했다.

2) 강경(講經)의 각 과목마다 통[2분], 약[1분], 조[0.5분]의 점수를 부여하므로 원칙적으로 7과목 합산 최고 점수는 14분이 된다. 단, [주역(周易)]이나 [춘추(春秋)]를 선택했을 경우에는 2배의 점수를 부여하기에 주항도의 사례처럼 15분이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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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인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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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인간]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 <이방인>과 같은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의식을 투영한 작품으로 부조리 문학의 대표 작가로, <시지프 신화> <반항하는 인간> 같은 철학적 에세이로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로 지칭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의 문학세계는 어떤 것일까? 번역자인 김화영에 의하면 카뮈는 부정(부조리), 긍정(반항), 사랑의 발전 단계를 전제로, 작품 세계의 체계적 청사진을 세웠다고 한다. 이를 보여주듯이 그는 1943년부터 약 15년 동안 두 번째 층위에 해당하는 반항과 테러리즘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소설 <페스트>(1947)와 이를 각색한 희곡 <계엄령>(1948), 희곡 <정의의 사람들>(1949), <반항하는 인간>(1951) 등이 이런 반항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책 <반항하는 인간>의 첫 장을 보면,


반항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non, 부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반항의 첫 충동을 느끼는 순간부터 (oui, 긍정)’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p. 31]


아무리 봐도 막연하고 형이상학적인 얘기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실제 사례를 보면 보다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인지 <반항하는 인간>에서는 반항을 극단으로 몰로 간 이들, 카인의 후예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을 먼저 살펴본다.



반항하는 인간들


<소돔의 120>, 아니 사디즘으로 유명한 사드 후작(Marquis de Sade, 1740~1814)는 세계의 질서와 자기 자신에 대한 반항을 통해 절대적인 (non, 부정)’을 이끌어 낸 최초의 이론가라고 한다.


잔혹함과 철학적 사색으로 가득 찬 그 10여 권의 저술은 불행한 고행을, 전적인 으로부터 절대적인 로의 환각에 사로잡힌 이행을,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의 동의 모든 것과 만인의 살해를 집단 자살로 탈바꿈시키는 를 요약한다. [p. 89]


어떻게 보면 사드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와 같은 낭만주의적 반항인은 증오의 원리로서의 신()’과의 결별을 추구했다.


도전하고 거부하는 힘에 역점을 두다 보니 반항은 이 단계에서 그것이 지닌 긍정적 내용을 망각한다. 신이 인간 내면의 선을 요구하므로 그 선을 조롱하고 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불의에 대한 증오는, 악과 살인의 실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악과 살인의 옹호로 이어지게 된다. [p. 92]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보면,


이반 카라마조프는 인간들의 편을 들고 인간들의 무죄에 강조점을 둔다. 그는 인간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죽음의 형벌은 부당하다고 잘라 말한다. 적어도 그 첫 충동에 있어서 그는 악을 변호하기는커녕 신성보다 더 위에 있다고 여기는 터인 정의를 옹호한다. 따라서 그는 절대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가치의 이름으로 신을 공박한다.

~ 중략 ~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설령 신비가 진리를 품고 있다 할지라도, 설령 조시마 장로가 옳다 할지라도, 죄 없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악과 고통과 죽음이 그 진리의 대가로 치러지는 상황을 이반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반은 구원의 거부를 몸으로 구현한다. 신앙은 영생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신앙은 신비와 악을 받아들이고 불의를 감수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pp. 106~107]


이반이 마침내 마음속으로 제기하는 질문, 즉 도스토옙스키가 이 반항인으로 하여금 이룩하게 만드는 참된 진보의 핵심인 질문, 그것이야말로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것이다. 즉 인간은 반항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 또 반항 속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가?

이반은 이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내비친다. 인간은 오로지 반항을 궁극까지 밀고 나감으로써만 반항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형이상학적 반항의 극단은 무엇인가? 형이상학적 혁명이다. 이 세계의 주인은 그의 정당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된 이상, 타도되어야 마땅하다.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신도 영생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모든 것이 다 허용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 자기 자신의 법 이외의 모든 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pp. 111~112]


이처럼 인간이 신을 도덕적으로 심판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신을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는 이미 죽어 있는 신을 발견한 것일 뿐이다.


니체와 더불어 반항은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반항은 그 명제를 하나의 기정사실로 간주한다. 반항은 그리하여 사라져버린 신을 당치 않게 대신하려 드는 모든 것, 비록 정해진 방향은 없어도 여전히 제신들의 유일한 도가니인 한 세계를 욕되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맞선다. 그에 대한 몇몇 기독교측 비판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니체는 신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 바 없다. 그는 자기 시대의 영혼 속에서 이미 죽어 있는 신을 발견한 것이다.

~ 중략 ~

그러므로 니체는 하나의 반항 철학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반항이라는 기초 위에 하나의 철학을 구축했던 것이다. [p. 127]



반항이란 무엇인가


살인의 정당화를 거부하는, 반항과 폭력에 관한 연구서라고도 할 수 있는 <반항하는 인간> 서론에서 카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물의 근본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천착하는 일이 아니라, 그보다는 눈앞의 세계가 곧 현실이기에, 먼저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아는 일이다. [p. 15]


, 카뮈에게 중요한 것은 반항론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와 같은 삶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카뮈의 반항은 테러리즘이나 폭력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항 속에 폭력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반항은 형이상학적 시각에서나 역사 속에서의 기능에 있어서나 폭력에 안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항이 본래의 순수함을 잃게 되어 온통 폭력에 쏠려 버릴 경우, 특히 그 폭력이 정당하다고 보게 될 경우 그 반항은 허무주의와 살인에 이른다. 있는 그대로의 것에 대한 전적인 거부, 즉 절대적 을 신격화할 때마다 반항은 살인을 한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때, 즉 절대적인 를 외칠 때마다 반항은 살인을 한다.

~ 중략 ~

어쨌든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든 반항은 살인에 이르게 되어 반항이라 불릴 권리를 잃고 만다. [p. 565]


, 카뮈는 반항과 폭력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으며, 어떤 대의(大義)로도 무고한 사람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반항은 폭력에 대한 부정이자 가치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반항은 모든 인간들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적 토대.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p. 47]


바야흐로 역사와 씨름하고 있는 반항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와 형이상학적 반항의 ‘그리고 우리는 외롭다.’에 추가하여,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죽이고 죽을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들도 살게 해야 한다고 덧붙여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p. 434]


반항에 있어서 정치란 이러한 진리에 복종하는 것이라야 한다. 결국 반항은 역사를 전진시키고 인간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할 때, 그 폭력 없이라고는 아니라 해도 테러를 동원하는 일은 없이, 그리고 가장 다양한 정치적 조건들 속에서 그 일을 수행한다. [p. 513]


앞에서 인용한 문구들을 살펴보면, <반항하는 인간>은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폭력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이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가운데 최소한 한 가지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반항에 있어서 폭력은 불가피한 것일지라도 그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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