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습관 - 예술과 실용 사이 좋은 습관 시리즈 24
김선동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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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습관>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상 1부에 해당하는, [건축가의 습관]에서는 18개의 키워드로 건축가의 습관을 얘기하고 있다.

먼저 건축가의 아이디어를 즉각적으로 시각화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 스케치가 있다. 그리고 건축주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대지를 분석하는 내용, 설계안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내용, 회사의 강점을 소개하는 내용 등을 담은 보고서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건축가는 자기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해야 한다[‘글쓰기’]. 따라서 건축가는 스케치글쓰기를 연습해서 습관화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건축이라는 것이 단순히 건축주의 지시에 따라 건물을 짓기만 하는 것이라 여긴다면 그 사람은 건축가가 아니라 건축기술자라고 할 수 있다. 건축가가 되려면 르 코르뷔제(Le Corbusier, 1887~1965) <건축을 향하여(Vers une Architecture)>(1922)나 승효상(承孝相, 1952~ ) <빈자의 미학>(1996)처럼 자신의 건축 철학 혹은 건축 세계를 만들려고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 독서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큰 설계사무소에서 7년 정도 실무 경험을 쌓고 작은 설계사무소로 이직한 직후, 업무영역 변화에 저자가 어떻게 적응해갔는지를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저자는 이직 후 집짓기에 대한 실무적인 지식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이를 건축을 잘 모르는 건축주를 대상으로 집짓기의 전체적인 과정과 노하우를 설명한 책들을 읽으면서 보완했다고 한다.


건축은 결국 그 안에 사는 사람을 위해서 짓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독서입니다. 물론 건축주를 직접 만나고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많은 독서를 통해 사람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두고 지식을 넓혀가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pp. 67~68]


나아가 내 건축에 영감을 주는 장소사람’, 그리고 건축물을 이루는 재료를 관찰하면서 그 안에 숨겨진 디테일관찰해야 한다.


<논어(論語)>


세 사람이 길을 같이 걸어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살펴 스스로 고쳐야 한다[三人行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라는 말이 있다. 건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저자는


건축가라고 해도 체험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숫자는 제한적입니다. 이 말은 모든 재료를 다 다뤄보기는 힘들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프로젝트를 통한 간접적인 학습은 어찌 보면 필수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87]


고 말한다.


건축가 되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건축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여기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어느 사업에서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신뢰. 건축주나 현장 소장, 설계 사무소의 내부 직원들의 말을 경청(傾聽)’하는 것도 필요하다.


흔히 건축을 예술분야에 속한다고 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건축은 예술이기에 앞서 사업이다. 따라서 사업 전략, 관계자들과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것도, ‘라는 브랜드를 홍보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부분까지 습관이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건축혹은 건축가에 대해 기본적인 흐름을 알려주는 요소임을 확실하다.


내용상 2부에 해당하는, [못다한 건축 이야기]건물이 지어지는 과정건축주가 묻고 건축가가 답하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에서는 땅 구매설계 사무소 물색 및 설계 상담 의뢰계약 체결 후 대지측량기본설계1), 인허가 접수, 심의, 실시설계2), 시공사 선정, 착공신고 및 감리자 선정, 사용승인에 이르는 10단계의 과정을 안내하고 있다.


건축주가 묻고 건축가가 답하다는 건축주들이 자주 물어보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이 녹아있는 답변이 적혀 있다. ‘저자와의 대화같은 이벤트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Q&A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쉽게 접하기 힘든 건축가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문답이기에 건축가를 지망하는 사람뿐 아니라, 집을 짓는 것에 관심 있는 일반인에게도 충분히 유용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좋은습관연구소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1) 기본설계(basic design)는 대지 조건과 건축주 상황, 요구 조건 등을 고려해 건물의 전체적인 레이아웃과 구성, 형태, 재료 등이 정하는 작업이다.


2) 실시설계(working design)는 기본설계도에 입각하여, 건물의 디테일 한 사항들, 즉 재료나 세부적인 설비 스펙 등을 결정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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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의 도쿄
호즈미 가즈오 지음, 이용화 옮김 / 논형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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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明治]의 시작은 1868년이다. 1868년은 일본 역사에 큰 의미가 있는 해인데,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중세에서 근대로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에도[江戶]가 신정부의 수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에도가 당시 일본의 중심이 되는 대도시였고, 보신[戊辰] 전쟁 당시 도쿠가와 막부측의 가쓰 가이슈[勝 海舟, 1823~1899]와 메이지 신정부군측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 隆盛, 1828~1877]의 협상으로 ‘에도’라는 도시가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고 온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탄생한 메이지 정부의 도쿄는 어떤 모습일까?

먼저 ‘1장 문명개화’에서 소개된 메이지 시대의 특징을 보면,

 

에도 이래의 전통과 서구의 근대문명이 뒤섞여진 이상한 이국정취야말로 메이지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전통과 근대화라는 이중구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과 사고방식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pp. 18~19]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메이지 정부가 목표로 한 것은 ‘근대도시’로서의 도쿄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의 수도’ 즉 국가의 수도로서의 딱딱한 관리사회를 의미하고 있었다. 요컨대 걸핏하면 쾌적성보다도 국가의 체면과 통치가 우선되어 정치성과 경제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도쿄의 일반시민들은 에도 이후의 시민문화를 이어받아 자유로운 생활공간을 추구했다. 메이지의 도쿄는 ‘천황’의 의향과 ‘시민’의 목소리라는 두 개의 요소가 대립과 공존하면서 성립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p. 19]

 

라고 한다.

 

이러한 메이지의 도쿄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도쿄 최초의 본격적인 호텔이라고 불리는 ‘쓰키지[築地] 호텔관’이다.

 

쓰키지[築地] 호텔관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28~29

 

이곳의 설계는 미국인 리차드 브리젠스(Richard P. Bridgens)가 했지만, 건축은 훗날 시미즈[淸水] 건설의 창업자의 양자인 2代 시미즈 기스케[淸水 喜助, 1815~1881]가 맡았다. 그래서인지 완성된 쓰키지 호텔관은 시미즈 기스케의 독창적인 디자인이 가미되었다. 쓰키지 호텔관의 외관은 흙과 회로 두껍게 바른 것 같은 해삼벽[海鼠壁]1)이고, 지붕 중앙에는 절의 종루를 닮은 탑이 솟아 있다. 탑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나선형 계단이 있어 일본식도 서양식도 아닌 너무나도 기묘한 건축물이 되었다. 게다가 외국인이 바다에서 직접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는 바람에 원래 후문으로 설계된 나가야문[長屋門]2)이 정문으로 바뀌는 등의 설계상의 변동도 발생했다. 하지만 이 건물은 아쉽게도 1872년 긴자[銀座]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호텔들은 메이지 정부가 내세운 ‘서구화 정책’ 혹은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명개화(文明開化)의 또 다른 상징으로는 긴자[銀座]의 벽돌거리가 있다. 1872년 발생한 긴자 대화재를 기점으로 메이지 정부는 도쿄 전체를 불에 타지 않는 서구식 건물로 바꾸겠다는 방침 아래 화재로 인한 폐허 위에 서구식 거리(street)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토마스 워터스(Thomas J. Waters, 1842~1898)에게 설계를 맡겼다. 이렇게 조성된 ‘벽돌거리’ 혹은 ‘렌가가이[煉瓦街]’는 일본 최초로 대로를 중심으로 차도와 인도를 분리했으며 가로수를 심고 가스등을 세웠다. 대로변의 상점 건물을 붉은 벽돌로 지었으며, 부채꼴의 벽돌로 만든 원주로 지탱되는 아케이드를 상가 입구에 붙였다. 이렇게 건설된 벽돌거리의 모습은 19세기 영국과 그 식민지에서 볼 수 있었던 아케이드로 둘러싸인 모습 그대로3) 였다고 한다. 하지만 습기가 많은 일본 환경과 거주자를 고려하지 않고 조성했기 때문인지, 완공 후 약 5~6년간 가옥들이 거의 빈 채로 있었고, 입주 후에도 목조 부엌과 변소 등을 건물 외부에 대나무로 만든 전통 빗물 보호대를 설치하는 등 일본적 요소를 추가한 대대적인 개축 등을 실행했다4)고 한다.

 

벽돌거리의 계획은 수도의 체제를 정비하려는 정부의 생각만으로 진행된, 이를테면 주민 부재의 지역 개발이었다. 타고 남은 가옥의 강제철거를 시작으로 벽돌구조의 비싼 건축비로 인한 집세와 불하료5)문제, 일본의 기후습도에 어울리지 않는 설계상의 약점, 게다가 거주자의 생활양식과 맞지 않는 점도 특이할 만하다. [p. 37]

 

긴자[銀座] 벽돌거리의 변화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34~35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242~243

 

이처럼 일방적으로 서구화를 하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도 발생했다.

 

메이지 5년(1872) 연말은 실로 황당하고도 묘한 일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정령에 의해 지금까지의 태음력 대신에 태양력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12월은 겨우 이틀 만에 끝나고, 다음날인 3일은 다시 메이지 6년(1873) 1월 1일이 되었다. 이 때문에 관공서에서 지불하는 월급이 1개월분 덜 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런 설 준비로 시민들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pp. 95~96]

 

메이지의 패션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48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50

 

일본 여성의 머리모양과 속발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53

 

당대의 아이돌이었다는 ‘뮤수메 기다유[娘 義太夫]’와 메이지 시대의 오빠 부대인 ‘도스루 팬클럽[ド-スル連]’의 얘기는 신기했다. 다만, 이 책에서 언급된 뮤수메 기다유[娘 義太夫]가 사람 이름인지 아니면 ‘걸그룹’처럼 장르 혹은 분야의 명칭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판소리처럼, 일본에는 독특한 창법으로 말하고 노래하는 다유[太夫]와 다유의 표현을 리드하고 반주하는 샤미센[三味線]으로 구성된 기다유부시[義太夫節]라는 장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는 문명개화, 새 나라 만들기, 도시의 시설, 언론의 시대, 도시 만들기, 시민의 생활, 도시의 즐거움, 메이지의 쇠퇴기라는 8개의 주제로 메이지 시대의 건축물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양으로부터 들여 온 새로운 문화, 풍습, 사회 현상 등을 깔끔한 일러스트와 함께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가 건축학과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호즈미 가즈오[穗積 和夫, 1930~ ]이기 때문이 아닐까? 전체적으로 역사에 기반을 두면서도 건축물, 도로와 철도, 도시 계획 등에 초점을 맞춰 오늘날의 도쿄가 어떤 기틀에서 형성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백과사전적인 측면이 있다 보니 메이지 시대의 역사를 살피고자 하는 이에게는 다소 난잡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또 흑백 일러스트이기에 건축물들이 비슷비슷해 보인다는 점도 아쉽다.

 

1) 흙벽돌로 된 외벽에 네모진 평평한 기와를 붙이고 그 이은 틈을 석회로 불룩하게 만든 벽

2) 다이묘[大名]이 자신의 저택 주변에 가신들을 위해 나가야[長屋]을 지어 살게 하고 그 일부에 문을 연 것에서 비롯된, 일본 무가 저택의 전통식 문(門)의 형식.

3) 김효진, “일본의 초기 근대 건축의 양상과 변모”, <일본비평> 15호, (2016), pp. 264~265

4) 김효진, 앞의 글, pp. 266~268

5) 불하(拂下)는 국유나 공유재산 또는 귀속재산을 개인에게 팔아 넘기는 일. 다만, ‘불하’라는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이기에 ‘매각’ 또는 ‘팔다’로 순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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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조선 선비 중국을 표류하다 - 기행문 겨레고전문학선집 14
최부 지음, 김찬순 옮김 / 보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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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종 18년(1487) 최부(崔溥, 1454~1504)가 제주 세 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1)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파견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성종 19년(1488), 최부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이야기는 급진전된다. 이 소식에 최부는 수행원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서둘러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에는 제주도를 오가는 것이 목숨을 걸 각오까지 해야 할 정도로 험난한 일이었다. 문제는 날씨를 가늠하기 어려워 출항여부를 놓고 다투다가 진무(鎭撫) 안의(安義)가 동풍(東風)이 좋으니 떠나자고 권하자, 부친상을 빨리 치르고자 하는 최부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러니 조금만 상황이 안 좋아지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 밖에. 그래서일까? 최부의 나주행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바람이 약해지면서 비가 쏟아졌다. 추자도의 배 대는 자리가 가까워졌을 때 썰물은 몹시 급하고 하늘은 매우 캄캄하였다. 군인들을 지휘하여 노를 젓게 하였으나,

이런 날에 배를 떠나게 한 것이 누구 잘못인데…….”

하고 모두 중얼거리며 반발심을 품고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이 제멋대로 노질하여 뒤로 밀려나 초란도(草蘭島)에 이르러 서편 언덕 아래에 닻을 내리고 배를 대었다. [p. 20]

 

이 무렵 닻이 부서져서, 이를 확인하고 급히 노를 저었으나 북풍에 휩쓸려 바다 가운데로 불려 나갔다. 본격적인 표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간신히 닿은 절강(浙江) 영파부(寧波府) 하산(下山)에서 해적을 만나 약탈을 당하고, 다시 큰 바다에 버려져 표류하다가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닿았다. 하지만 최부 일행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상륙 후 그 곳을 담당하는 사자채(獅子寨)의 관원이 그들을 왜구(倭寇)로 몰아 머리를 바치고 공훈을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부 일행이 배를 버리고 마을로 진입하는 바람에 그 흉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왜구라는 의혹은 풀지 못해, 임해(臨海) 도저소(桃渚所), 소흥부(紹興府), 항주부(杭州府)에서 각각 조사를 받았다. 가까스로 왜구가 아닌 표류한 조선의 관리임이 확인된 후에야 대운하를 따라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에서 명(明)나라 홍치제(弘治帝)를 알현한다.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답게 최부는 황제에 알현하는 과정에서 상복을 벗고 관복을 입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나는 차마 길복을 입을 수가 없었다. 이상은 직접 내 굴건을 벗기고 사모를 씌우더니

나라에 일이 있게 되면 기복(起服)2)하는 제도도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이 문에서 길복을 입고 들어가서 사은의 예를 마치고는 다시 문밖으로 나와서 도로 상복을 입을 테니 그저 잠시 동안일 뿐입니다. 하나만을 고집해서 예절을 잃어서는 안 되지요.” [pp. 212~213]

 

결국 잠시나마 상복을 벗고 알현을 했다. 그 후 귀국 길에 올라 요동과 압록강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했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하루속히 부친상을 치르고자 했던 최부에게 성종은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우선 기록으로 남기라 명한다. 이에 최부는 단 8일만에 중국에서 겪었던 거의 모든 일들을 꼼꼼히 기록해 바친다. 그것이 바로 이 책 <표해록>이다. 이 책은 일기를 적듯 하루 하루 최부가 겪은 내용을 엮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들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위한 중국 관원과의 문답과정에서 조선의 제도, 조선과 명의 문화적 차이 등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 대운하를 따라 이동하면서 본 중국 각지의 기후, 도로, 방죽과 갑문 등 물길 이용 제도, 살림살이와 옷 차림새, 인정과 풍속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의 강남과 강북의 문화적 차이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면,

 

강도질을 하는 자들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사람 죽이기를 거리낌 없이 한다. 그러나 여기 강남 사람은 비록 사사로운 이익에 사로잡혀 강도질은 할지언정 그렇게 마구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하산의 도적들도 우리를 죽이지는 않았고 먹을 것도 주었으며 선암리 사람들은 자기들이 빼앗은 것을 숨기지 않고 말안장을 도로 내놓지 않았는가. [p. 95]

 

부영은 “중국의 인심을 논한다면 북방 사람은 모질고 남방 사람은 유순합니다. 영파의 도적은 강남 사람이므로 아무리 도적이 되었다 해도 물건만 빼앗을 뿐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들도 목숨을 보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북방 사람은 약탈하고는 반드시 사람을 죽여 구렁텅이에 던지기도 하고 강이나 바다에 띄우기도 하니 오늘 강에 떠 있는 시체를 보고도 알 말하지 않은가요?” 하였다. [pp. 178~179]

 

처럼.

 

또한 생사가 걸려있기에 섣불리 조선으로의 이주를 시도하지 못하는 해외유민의 모습도 묘사된다.

 

계면(戒勉)이라는 중은 우리 나라 말을 잘하였다. 그가 나더러,

저는 중인데 본래 조선 사람입니다. 역시 중이었던 저희 할아버지가 여기로 들어왔으며 지금 이미 삼대째입니다.

이 지방은 옛날 고구려 땅이었으나 지금은 중국 땅이 된 지 천 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고려사를 세워 제사를 정성껏 지내며 전통을 잊지 않습니다. 새가 날면 고향으로 가고 토끼가 죽으면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지요! 언제나 본국이 그리워 돌아가 살고 싶지만, 본국에서 나를 도리어 중국 사람이라 하여 중국으로 돌려보낸다면 분명히 다른 나라로 탈출한 죄를 받아 몸과 머리가 따로 구르게 되겠으니 마음은 가고 싶어도 발이 주저합니다.”  [p. 251]

 

이렇게 일기체로 구체적인 내용을 적었기에 <표해록>은 명나라 초기의 중국 실정을 확인하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래서일까? 일본에서는 1769년 유학자 세이타 겐소[淸田??, 1719~1785]에 의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란 이름으로, 미국에서도 1965년 컬럼비아 대학의 존 메스킬(John Meskill, 1925~ )이 <최부의 일기 표해록(Diary: a record of drifting across the sea by Pu Ch’oe)>라는 이름으로 각각 번역본이 나왔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선 이 책을,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견문록>과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함께 3대 중국 여행기로 꼽는다고 하니 우리 스스로 우리의 것에 무관심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처럼 우리가 우리 옛 문헌에 수록된 우리 역사를, 옛 유물에 서린 우리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최부는 상복 일화에서 드러나듯이 꼬장꼬장한 면도 있지만, 관찰력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소흥부에서 수차(水車)를 돌리던 것을 보고 부영(傅榮)에게 수차 제작법을 알려달라고 했고, 결국 그에게 배운 수차의 형태와 운용법을 가지고, 조선에 돌아와 수차를 제작, 호서지방의 가뭄 해소에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 행동함에 거침이 없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던 15세기 조선선비의 진취적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그가 지나온 길을 지도로 확인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출판사에서 조금만 배려를 해주어 지도를 첨부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1) 경차관(敬差官)은 왕명을 받아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 행정을 감찰하는 관직이고, 추쇄(推刷)는 제 고장에서 도망하여 숨어든 자를 송환하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추쇄경차관은 제주도로 도망간 노비나 범법자들을 송환하기 위해 파견된 감찰관인 셈이다.

2) 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법이지만 나라에 일이 있을 때, 불러 상복을 벗고 출사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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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처음으로 [이달의 당선작]에 선정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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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건 온몸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명이 막는 것보단 여러 명이 막는 게 더 좋다는 것, 무른 흙도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단단해진다는 것. [p.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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