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전.호질.광문전.임호은전 - 한국고전문학100 11
김기동 외 지음 / 서문당 / 198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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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문자전(廣文者傳)> 혹은 <광문전(廣文傳)>(이하 ‘광문자전’)은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번쯤 제목은 들어보았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단편소설이다. 그냥 읽으면 광문(廣文)이라는 거지의 의리 있는 행동을 부각시킨 글에 불과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에 구애 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광문이라는 비렁뱅이를 통해 유교적 관습에 얽매인 조선의 사대부를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조선의 사대부는 공식적으로 군자(君子)를 지향한다. 바로 유학(儒學)의 시조(始祖)인 공자(孔子)가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꼽은 ‘군자(君子)’말이다. 하지만 영남학파의 시초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소총(홍유손(洪裕孫, 1431~1529), 생육신의 하나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 등 많은 문인들은 도가적인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지향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죽림칠현을 지향하는 것은 사대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문자전>에 언급된 광문 혹은 달문(達文)의 행적을 보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물론 그가 비렁뱅이라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지라고 해서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기는 힘들다. 심지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出家)한 스님 조차도 또 다른 사회에 얽매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병든 거지 아이를 위해 구걸했지만 살해했다고 의심받아 매를 맞고 쫓겨나도 변명하지 않았고, 약방 부자가 도둑질했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도 묵묵히 지낸 광문의 행적은 독특하다. 마치 <장자>에서 말한, 사심(私心)이 없는 ‘지인(至人)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자(莊子)> 소요유편(逍遙遊編)에 언급된 송영자(宋榮子)를 보면,

 

세상 모두가 칭찬한다고 더욱 애쓰는 일도 없고, 세상 모두가 헐뜯는다고 기(氣)가 죽지도 않는다. 다만, 내심(內心)과 외물(外物)의 분별을 뚜렷이 하고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구분할 뿐이다그는 세상 일을 좇아 허둥지둥하지 않는다.

중략 ~

그래서 “지인(至人)에게는 사심(私心)이 없고, 신인(神人)에게는 공적(功績)이 없으며, 성인(聖人)에게는 명예가 없다”고 한다.1)

 

그렇기에 광문의 평가가 가장 공정(公正)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장안에 이름난 기생으로 얼굴이 어여쁘고 노래와 춤을 잘해도 광문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지 않으면 그 기생은 한 푼어치의 가치도 될 수 없었다2)고 한 것이 아닐까?

 

어느 날 궁궐 안 별감(別監)들이며 부마(駙馬)들 또는 그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름난 기생 운심(雲心)을 찾아갔다. 술상을 차려 놓은 가운데 장고 거문고 등에 맞추어 춤추기를 부탁하며 애원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운심은 자꾸 미루면서 춤출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 광문은 밤에 이들이 노는 집 밑에 다다라 머뭇거리다가 방에 뛰어 들어가 상좌에 앉았다. 광문은 비록 다 떨어진 옷을 입었지만 아무 거리낌없이 당당한 태도였다.

중략 ~

술 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서로 눈짓을 하며 광문을 몰아내 쫓아 버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광문은 더욱 다가앉으면서 무릎을 치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장단을 맞추는 것이었다. 운심은 일어서더니 옷을 고쳐 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추기 시작하였다.3)

 

이렇게 광문은 남의 권위를 빌리려는 가짜들과 달리 당당하게 ‘나’를 내세우는 진짜였기에 운심도 그를 위해 기꺼이 칼춤을 춘 것이다. 광문이 진짜니까 그녀도 진짜를 대접한 셈이다.

 

<광문자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서광문전후(書廣文傳後)>를 보면, 광문의 명성을 빌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척 하는 거지 아이와 그의 동생인 척하는 요망한 자가 결국 사형되거나 귀양을 간 이야기가 적혀 있다. 거짓으로 남의 인생을 사는 자의 말로(末路)가 이처럼 명확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은 예외라고 생각해서 기꺼이 남의 인생, 거짓된 삶을 살려고 한다. 그렇게 사는 것도 재능이 필요하기에 쉬운 일도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잠깐 부귀영화의 끝자락이나마 맛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재능을 헛되게 낭비하게 만든 셈이다.

 

<광문자전>과 <서광문전후(書廣文傳後)>에서 보이는 광문처럼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장자>에서 말하는 사심(私心)이 없는 ‘지인(至人)’이라고 할 수 있는 광문의 마지막을 저자는 “그 뒤에 광문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는 말로 끝낸 것 같다. 아마도 광문과 같은 이가 세상에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1) 장주, <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 1993), pp. 33~34

2) 김기동, 전규태 엮음, <양반전, 호질, 광문전, 임호은전>, (서문당, 1984), p. 33

3) 앞의 책, pp. 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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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 - 곽재식의 기후 시민 수업
곽재식 지음 / 어크로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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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사회의 약자를 괴롭히다

 

사람들은 기후변화를 지구를 멸망시키는 위기인 것처럼 말하고, 우리가 그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여 무언가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 결과 무의식적으로 기후변화 문제를 대홍수 전설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진실일까?

 

지구는 수천 년, 수만 년, 수십만 년 전부터 어느 정도 온실효과를 겪어왔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출현하기도 전의 먼 옛날부터 지구는 온실효과의 영향을 받는 온실 속 같은 곳이었다. 지금 온실효과와 기후변화가 문제인 것은 그 효과의 정도가 갑자기 너무 빠른 속도로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p. 32]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기후 위기라는 것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0.03%에서 0.04%로 짙어짐에 따라 부가적으로 발생한 현상을 가리킨다. 이렇게

 

사람들은 0.03퍼센트이던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양을 0.04퍼센트 정도 올린 것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데, 광합성을 하는 세균들은 긴 세월에 걸쳐 0퍼센트에 가깝던 산소 기체 농도를 20퍼센트 이상으로 높여버렸다. 지구의 생명체들과 자연은 이런 일을 벌였다. 그 모습만 놓고 보면 46억 년 지구 역사 전체에서 요즘의 기후변화는 미세한 변화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p. 76]

 

결국 기후 위기는 지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다. 그래서 저자도 이 책의 제목을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라고 정한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지구 온난화의 원인으로 꼽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산화탄소로는 고작 사람, 그것도 사회적 약자의 삶을 힘겹게 만들 뿐이다.

 

사람이 뿜어내는 온실 기체가 지구를 통째로 금성처럼 바꾸어놓기는 부족하겠지만당장 지구에 사는 사람 자신의 삶을 괴롭히기에는 충분하다. [p. 37]

 

 

기후 위기’ 혹은 ‘지구온난화’라는 슬로건

 

지구온난화로 대표되는 기후위기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기후변화로 인한 비극을 피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자’와 같은 당연한 얘기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도덕 교과서가 없어서, 도덕 교육을 받지 않아서 도덕적이지 않는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에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의 기후위기를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한, 유럽의 선진국은 인구가 줄어들기 때문에 예전보다 더 풍족하게 생활하면서도 저절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기후위기로 타격을 받는 개발도상국은 인구가 늘어나기 때문에 더 적은 연료와 전기를 사용하면서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더 나은 삶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한다.

심지어 글로벌 기업은 본사 사무실은 선진국에, 생산공장은 개발도상국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당연히 생산공장이 있는 개발도상국의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단순히 이산화탄소 발생량만 따져 규제를 하면, 지구온난화 극복을 위해 더 가난한 사람들이 더 희생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기후위기나 지구온난화는 개발도상국에서 돈을 걷어 선진국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수단처럼 보인다.

 

 

기후 위기를 벗어나려면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로 이산화탄소를 뿜어내지 않고 전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수력, 태양광과 풍력, 지열(地熱)과 조류(潮流) 같은 재생에너지의 사용이 필요하다.

그 다음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전기화(電氣化)가 있다. 만약 모든 것이 전기화되어 있다면,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를 개선하는 것만으로 이산화탄소 배출을 쉽게 줄일 수 있다.

보다 공격적인 방법으로는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탄소 흡수 혹은 탄소 포집(捕執)도 있다. 문제는 아직까지는 이산화탄소를 모으더라도 그 비용이 많이 들고, 수집된 이산화탄소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나마 현실적인 것이 식목사업이다. 비록 많은 공간과 오랜 시간이 요구되지만, 식목사업은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도로 빨아들일 수 있다.

 

 

지구온난화를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

 

지금까지 기후변화라고 하면, 대체로 미래를 내다보는 공공기관이 개인과 사기업을 이끌고 통제하는 일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가 엄격한 단속반을 만들어 기후변화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물건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거나, 공장에 어떤 시설을 설치하라는 규정을 만들고 엄한 처벌 조치를 통해 그것을 따르도록 시키거나, 혹은 기후변화와 관련 있는 어떤 일에 세금을 매겨 돈을 걷는 등의 일이 정부의 일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면 정부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을 통제하는 권한이 강해지게 된다.

중략 ~

그러나 기후변화 적응 기술에 무게를 실으면 정부가 국민들에게 무엇을 시키는 것만큼이나 국민을 구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점이 중요해진다. [pp. 384~385]

 

최근 유엔환경계획(UNEP) 주도로 개최된 ‘국제 플라스틱 협약 제2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INC2)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회의에서 노르웨이와 르완다 등은 플라스틱 생산 제한과 플라스틱 제조에 쓰이는 화학물질의 규제에,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등은 플라스틱 폐기물과 플라스틱 재활용에 각각 초점을 두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나프타를 원재료로 하는 플라스틱은 개발 초창기에는 기후변화를 줄이는 방향으로 기여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플라스틱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나프타도 휘발유처럼 태워 연료로 사용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플라스틱을 만든 제품은 가치가 낮고 가짜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이 아끼지 않고 쉽게 버린다는 점이다.

 

비닐봉지 대신에 종이봉투를 사용한다면, 그 종이를 만들기 위해 종이의 원료가 되는 나무를 숲에서 잘라내야 한다. <애틀랜틱>의 2014년 10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비닐봉지를 사용해서 장을 보면 1년간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7.52킬로그램 가량이지만, 종이봉투를 사용하면 훨씬 많은 44.74킬로그램 가량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고 한다. 비닐봉지보다 종이봉투가 자연적인 것 같아도 이산화탄소를 뿜어내는 양은 오히려 여섯 배 가까이 많다는 이야기다. [p. 418]

 

여러 번 재사용할 수 있는 면으로 만든 장바구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닐봉지는 워낙 만드는 데 이산화탄소 배출이 적기 때문에, 면으로 만든 가방을 하나 만들 정도면 비닐봉지 131개 만들 수 있다이 계산은 영국환경청의 2011년 발표인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면 가방을 131번 정도는 꾸준히 장바구니로 활용해야만 비닐봉지를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것보다 환경에 이로울 수 있다는 뜻이다. [pp. 418~419]

 

다시 말해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플라스틱 빨대 금지’로 대표되는 플라스틱 규제 정책으로 도리어 기후위기가 가속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플라스틱의 사용을 규제하는 것보다 저렴하다는 이유만으로 방치되고 버려지는 플라스틱을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기후변화에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는 플라스틱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하고, 2022년 전체 플라스틱 생산량의 9%만 재활용되었다는 유엔환경계획(UNEP)의 발표처럼 아직까지는 미흡한 플라스틱 재활용 비율 상승을 위한 노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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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알베르 카뮈 전집 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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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의 <전락(轉落, La Chute)>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멕시코 시티’라는 바(bar)에서 ‘누군가’를 만난 변호사 장-바티스트 클라망스(이하 ‘클라망스’)의 고백이다. 마치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클라망스는 스스로를 ‘참회한 재판관’이라고 말하며 며칠에 걸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고 세상을 비판한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독백 속에서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저자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인간의 이기심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먼저 화자(話者)인 클라망스는 인간은 모두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어쩌다가 닥친 불행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죄(罪)는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타인을 심판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심판’은 회피하려 한다고 얘기한다.

 

어떤 인간일지라도(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현자(賢者)들이면 몰라도)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공격을 방어하는 유일한 길은 악질적으로 구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심판 받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남을 심판하러 덤비는 겁니다어쩌겠어요?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 마치 본성의 바탕에서 우러나듯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은 바로 자기는 아무 죄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저 키 작은 프랑스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사내는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그가 호송되어 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던 서기에게 이의신청을 해야겠다고 고집을 했어요. 이의신청이라니? 서기와 그 동료들이 웃어댔습니다. “소용없어, 이 친구야. 여기선 이의신청 따윈 하는 게 아니라구.” “그렇지만 말입니다, 내 경우는 예외거든요. 난 죄가 없습니다!” 하고 키 작은 프랑스인이 말했어요. [pp. 85~86]

 

이처럼 나만 예외라고 주장하는 것의 밑바탕에는 심판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심판을 받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

 

우리는 자신의 안 좋은 점을 고치거나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자면 우선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는 판정을 받았어야 했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그저 남에게 동정을 받고 제가 가고 있는 길을 가면서 격려를 받고 싶은 겁니다. 요컨대 죄를 짊어지고 있는 것도 싫고 또 동시에 깨끗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겠다는 겁니다. [p. 88]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기 보다는 타인의 위로와 주위 사람들의 인정에만 연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것은 클라망스도 과거에 그런 인간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전쟁, 자살, 사랑, 가난 같은 것에 사정이 어쩔 수 없을 때는 관심을 갖긴 했지만 그것도 예의상이거나 피상적으로 그랬을 뿐이지요. 때로는 내 일상생활과 관계가 없는 어떤 대의명분에 열렬한 관심을 기울이는체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나의 자유가 위협받는 경우라면 물론 다르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어요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그저 표면만 스치면서 미끄러지는 거예요. 맞아요. 모든 게 내겐 겉만 스치면서 미끄러져갔어요. [p. 56]

 

예전에 클라망스는 가난하거나 변호할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변호하면서, 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덕망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는 클라망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한 결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리 근처를 산책하다가 어떤 여성이 자살 시도하는 걸 목격했지만 그냥 지나쳐버린다. 왜 그랬을까? 주위에 그를 심판 혹은 평가할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

몇 년 후 갑자기 그는 그때 죽은 여성의 웃음소리를 듣는 환청을 겪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무엇이 원인이 되어 그가 죽은 이의 웃음소리를 듣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각성을 통해 그는 깨닫는다.

 

자기 자신을 비판함이 없이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남을 비판할 권리를 갖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통렬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재판관은 누구나 다 결국은 참회자가 되고 마는 법이니까 길을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가서 우선 참회자로서의 직업에 종사하다가 마침내는 재판관이 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내 말 알아들으시겠어요? 좋아요. 하지만 좀 더 분명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중략 ~

우선, 선생께서도 경험해보셨듯이,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공공연한 고백을 하는 일입니다. 나는 종횡무진으로 나 자신을 고발합니다.

중략 ~

자, 딱하게도 이게 바로 나라는 인간입니다!”하고 말하지요. 논고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가 나의 동시대인들에게 내밀어 보이는 초상화는 거울로 변해버립니다. [pp.140~142]

 

이런 방식으로 그는 먼저 참회자(懺悔者)가 되어 자신을 비판(批判)하고, 이어 재판관이 되어 타인을 심판(審判)한다. 하지만 그의 심판은 단지 ‘말’로만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남이 우리 말을 곧이듣는다고 한번 가정해보시죠? 그럼 정말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할 테죠. 아이구 떨려……. 물이 얼마나 차갑다구요! 그렇지만 안심해도 돼요! 이제는 때가 너무 늦었어요. 언제나 너무 늦은 것일 겝니다. 천만다행이지 뭡니까! [p. 148]

 

<전락>이라는 이름의 그 현란한 자기 고백은 지식인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또 하나의 언어유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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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2023-10-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글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은 적 있는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서 포기했던 책이라서요… 항상 올려주시는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KOEMMA 2023-10-21 08:21   좋아요 0 | URL
1. 주인장님의 격려에 감사합니다.^^

2. 저도 막연해서 고민하다가 이해가 되는 부분만 엮어서 정리했습니다.
 
도쿄 근교를 산책합니다 - 일상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작은 여행, 특별한 발견
이예은 지음 / 세나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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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근교를 산책 합니다]는

 

작가의 말’에 담긴

 

이 책은 ‘도쿄에 사는 사람들은 주말에 어디에 갈까’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했습니다지난 수년간, 한 달에 한 번 꼴로 전철과 버스를 타고 도쿄 근교 도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제 일상을 더 풍요롭게 하는 총 스무 번의 만남에 이르렀습니다. 도쿄를 조금만 벗어나도 전철 밖 풍경이 극적으로 바뀝니다. 소박하지만 분명한 도시와 마을의 특징이 눈에 들어옵니다. 비록 세련된 멋이나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어도, 주민들이 애정을 갖고 오랫동안 가꿔온 문화와 꾸밈을 덜어낸 삶이 특별한 여운을 남깁니다도쿄 근교를 산책하며 발견한 낯선 나라의 이야기를 더 많은 이와 나누고 싶었습니다. [p. 5]

 

라는 말처럼 이 책은 우리에게 도쿄 근교에 대해 소개하지만, 도쿄 근교 여행 가이드북은 아니다. 말 그대로 도쿄 근교의 10개 현(縣)을 배경으로 ‘음식’, 인상 깊게 감상한 일본 문화 ‘콘텐츠’, 그리고 ‘키워드’라는 3개의 테마로 20개의 글을 엮은 책이다. 각각의 글마다 해당 콘텐츠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담담히 얘기하고, 산책 tip, 가 볼만한 곳을 덧붙였으니 여행 가이드와 여행 에세이의 사이 어딘가에 있는 셈이다.

 

 

음식

 

가장 먼저 소개된 곳은 도쿄에 참치를 공급하던 가나가와[神奈川]현 미우라[三浦] 반도였다. 저자는 이곳에서 참치의 다채로운 맛을 한번에 만끽할 수 있는 ‘마구로 만개 세트’를 맛보며, 에도 시대(1603~1868)에 생선을 좋아하는 고양이도 외면하고 뛰어넘어 간다는 뜻에서 ‘네코마타기[猫]’라고 불리며 버려졌던 참치의 영욕(榮辱)을 생각한다.

 

살다 보면, 본질이 바뀌지 않아도 상황이 바뀐 탓에 대우가 달라지는 경우 종종 본다. 그 옛날, 기름지다는 이유로 천대받던 참치가 지금은 똑 같은 이유로 선호되듯이 말이다. 먼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던 참치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인정받으려 애쓰거나 억지로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 언젠가 세상이 알아준다 메시지는 꽤 희망적이다. [pp. 22~24]

 

가나가와현 에노시마[江の島]에 가서는 그곳의 명물, 시나스동을 시켰다가 한일 양국의 인간관계가 반영된 비빔밥과 돈부리의 차이를 떠올린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나는 두 나라의 밥 요리에 곧잘 빗대곤 한다. 우리나라의 비빔밥이나 식사의 마지막에 나와 우스갯소리로 ‘코리안 디저트’라고 불리는 볶음밥은, 밥과 토핑이 한 몸처럼 뒤범벅된다. ‘우리’라는 틀 안에서 말 그대로 지지고 볶으며 서로에게 동화되는 인간관계 보는 듯하다. 한편, 일본의 덮밥인 돈부리는 토핑과 흰 밥의 경계가 뚜렷하다. 입에 넣기 직전까지도 둘을 완전히 섞지 않음으로써, 재료 본연의 맛을 유지한다는 점도 큰 차이다. 혹시 아무리 친한 사이에서도 타인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일본인의 성향 무의식 중에 음식에도 반영된 것은 아닐까. [p. 29]

 

도치기[?木]현 닛코[日光]의 특산품인 가열한 콩물의 막인 유바[湯波]와의 만남을 애기한 글에서는 여행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여행은 사실 바깥세상이 아닌, 내면의 세계를 탐험하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안전지대를 벗어나 낯선 환경에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다름 아닌 자신의 성향과 취향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여행자가 정작 관찰하는 대상은 외부 풍경이나 이국의 문화보다는 그런 자극에 반응하는 나 자신이 아닐까. [p. 64]

 

 

콘텐츠

 

천편일률적인 패키지 여행에 질린 이들이 자신들만의 테마를 선정해서 자유롭게 돌아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여행 방법의 한 가지가 자신들이 흥미롭게 본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소설, 애니메이션, 만화 등에 나온 장소를 돌아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쓰메 소세키[夏目 漱石, 1867~1916]가 쓴 소설 <도련님>의 배경이 된 온천 마을인 마쓰야마[松山]는 온천을 즐기러 오는 사람보다 소설 <도련님>의 발자취 따라 거닐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라고 한다.

 

가나가와현 가마쿠라[鎌倉]는 막부 정치를 시작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 賴朝, 1147~1199]가 거점으로 삼은 곳이지만, 이 책에서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게 부각된다.

 

스즈와 학교 친구들이 즐겨 가던 식당과 카페를 방문했고,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작 만화에서 인상 깊게 본 작은 신사와 가게도 부지런히 둘러보았다. 그렇게 온종일 이야기의 무대를 누비며, 나만의 추억을 덧씌웠다. 물론 내 여행은 사전 답사도 편집도 거치지 않은 현실이라, 모든 과정이 영화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스즈와 언니들이 맛있게 먹던 전갱이 튀김을 기대하고 간 에노시마의 한 식당에서는 똑같은 메뉴를 팔지 않았고, 만화에서 스즈가 요시노의 남자친구를 미행하던 어느 신사에서는 카메라를 떨어뜨려 고장 내고 말았다. 또 스즈와 사치가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던 산을 찾아 2시간을 헤맸지만, 태풍 탓이었는지 등산로 입구가 폐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아쉽지 않았던 이유는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바다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네 자매는 이나무라가사키의 해안선을 거닐며 아버지의 추억을 반추한다. 스즈에게는 다정했을지 몰라도, 세 언니에게는 자신들을 버린 원망스러운 아버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치는 이제 언니들에게 스스럼없이 장난도치는 막내 스즈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고백한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동생을 남겨준 아버지는 분명 다정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p.116]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지 못해 저자의 감상에 쉽게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반대로 내가 읽어보았던 소설 <설국>의 배경이 되는 니가타[新瀉]현 유자와[湯澤]를 방문한 이야기는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도쿄에서는 이미 매화가 만개하고 성미 급한 벚꽃도 고개를 내밀던 겨울의 끝자락, 다카한에서의 하룻밤을 예약한 뒤 에치고유자와역으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랐다. 창가에 앉으니 멀리 눈이 소복이 쌓인 산에 시선이 닿았다. 깜깜한 터널을 지날 때마다 설산이 한기를 몰고 내게 뚜벅뚜벅 다가오는 것 같았다. 에치고유자와역에 내리기 전 마지막 터널을 통과하자 고작 1시간 반 만에 도쿄와 완전히 다른 계절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산맥과 건물의 지붕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신칸센이 없던 시대에 설국을 찾은 시마무라처럼 보통열차를 탔다면, 길이 약 9.7km에 이르는 시미즈 터널을 지나야 한다. 긴 어둠을 지나 이토록 환한 설경을 마주한다면, 국경이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강렬한 인상을 받지 않을까. [p. 160]

 

언젠가 겨울에 도쿄를 방문할 일이 있으면 한번 유자와를 방문해서 설국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다는 기분이 절로 드는 글이었다.

 

 

키워드

 

키워드’라는 테마로 여러 글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을 알 수 있는 키워드라고 하면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라는 뜻의 ‘이이토코도리[良いとこ取り]가 대표적인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쓰오카 세이고[松岡 正剛, 1944~ ]는 ‘이이토코도리’라는 일본식 문화편집 방식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도시로 보면, 가나가와현의 항구 도시인 요코하마야말로 이이토코토리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요코하마는 1859년, 미국에서 온 페리 제독에 의해 닫혀 있던 빗장을 푼다. 비록 무력에 의한 불평등한 개항이었지만, 이는 요코하마가 서양 문화를 흡수해 눈부시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새로운 문명과 기술을 발 빠르게 체득한 요코하마인은 당시 일본에서 흔치 않았던 서양식 호텔과 베이커리, 이발소를 열었고 아이스크림과 칵테일을 만들었으며, 경마와 야구 시합을 즐겼다. 자연스레 외국인은 물론 선진 문물을 배우려는 일본인까지 요코하마로 몰려들었다.

중략 ~

지금도 요코하마 곳곳에는 150여 년 전 뿌리를 내린 세계 각국의 문화가 살아 숨 쉰다. 덕분에 여행객도 마치 셀렉트 숍에 온 기분으로 원하는 것을 취하는 이이토코토리 여행이 가능하다. [pp. 207~208]

 

또 다른 키워드로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가 있다.

 

일본인은 오래 전부터 벚꽃을 죽음과 결부해 왔다. 한번 피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절정에 이르고, 가장 화려할 때 덧없이 흩어지는 꽃잎이 생의 무상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바로 일본인만의 미의식이라 불리는 모노노아와레다. [pp. 290~291]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이를 반영한 작품으로는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 <러브 레터> 등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모노노아와레’의 미학(美學)때문에 일본의 정서가 과거지향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도쿄 사람들의 ‘에도[江戶] 시대’에 대한 감정도 ‘모노노아와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도쿄에 살다 보면, 이곳 사람들은 에도 시대(1603~1868)에 대한 집단적 향수를 앓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100년 넘은 가게를 일컫는 시니세[老?]는 흔하지만, 에도 시대 때부터 내려온 곳은 훨씬 각별하게 친다. 또, 도쿄 국제공항이나 스카이트리처럼 도시를 대표하는 시설에는 에도를 테마로 한 공간이나 전시물이 빠지지 않는다. 단순히 도쿄의 옛 지명이 에도라서는 아니다. 에도 시대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에도를 지금의 수도로 만든 도시의 기원이자, 어쩌면 근대화 이전의 일본을 상징하는 정신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pp. 234~235]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도쿄에는 에도 시대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동네가 사라졌다. 다행히 개발의 열풍이 비껴간 덕분에 에도 시대의 분위기가 잘 보존된 곳이 있다. 바로 ‘고 에도[小 江戶]’라고 불리는 사이타마[埼玉]현 가와고에[川越]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 고에도로서의 자부심을 꼿꼿이 지켜나가는 가와고에는 가끔 들춰보고 싶은 오래된 사진첩과도 같다. 물질적 풍요나 첨단 기술은 도쿄에 집약되어 있지만, 막상 도쿄가 잃어버린 에도의 풍경은 가와고에에서 숨 쉬고 있으니. 그래서일까. 도쿄로 돌아오는 전철을 타고 가와고에를 떠날 때, 나는 일본인의 추억 한 페이지를 거닐다 나온 기분이 들었다. [p. 240]

 

 

이 리뷰는 세나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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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주택지 - 인구 폭증 시대 경성의 주택지 개발 정암총서 12
이경아 지음 / 집(도서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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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개발의 시작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주택 공급은 짓고자 하는 사람과 지어주는 사람만 존재하는 일종의 주문생산 방식이었다. 그런데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부터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인구가 갑작스럽게 늘어나고 엄청난 주택난으로 몸살을 앓게 되면서 주택 공급 방식도 바뀌게 된 것이다조선 500여 년간 약 10만에서 20만 내외로 유지되던 한양의 인구 규모가 불과 30년 만에 100만에 육박하게 되는, 그야말로 ‘인구 폭증 시대’를 맞았다. 개발자 또는 개발회사는 앞다투어 대규모 필지를 사들이고 그것을 나누어 불특정 다수에서 분양하기 시작했다. [p. 9]

 

주택 개발의 시작이자, 부동산 투기의 시작인 셈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후암동의 학강(學岡) 주택지, 장충동의 소화원(昭和園) 주택지와 함께 경성의 3대 주택지로 손꼽히던 북아현동의 금화장(金華莊) 주택지다.

 

금화장 주택지는 원래 토막민이 움집을 짓고 살던 빈민촌이었다금화장 주택지 개발을 할 당시 토막민들과 갈등이 생기는 일은 당연했다. 새롭게 개발된 신규 서양식 주택지와 주변으로 밀려난 토막민의 초라한 움집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은 비슷한 시기 신당동을 포함한 경성의 여러 주택지 개발에서 나타난 모습과 매우 유사했다. 결국 밀려난 토막민들은 아현리와 홍제내리로 옮겨 아무런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p. 310]

 

이렇게 토막민이 움집을 짓고 살던 빈민촌을 밀어낸 자리에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명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금화장 주택지는 금화산에 둘러싸여 있고 금화원이 있어서 녹음과 사계절의 풍경을 즐길 수 있고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땅이 건조하며 공기가 맑은 위생적인 주택지로 여겨졌다. 그야말로 자연과 함께 하는 교외 주택지의 이미지가 금화장 주택지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일찍부터 전차가 연결되어 도심부는 물론이고 한강의 마포까지 손쉽게 연결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택지가 개발된 이후에는 전차를 타고 경성역, 용산, 멀리는 한강교를 건너 노량진과 영등포까지 갈 수 있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주택지였다. 금화장 주택지 올라가는 언덕 바로 앞에는 죽첨정이정목 전차역이 있었으며 인근에는 서대문소학교와 미동보통교, 죽첨보통교와 같은 교육시설적십자병원과 같은 의료시설동양극장과 같은 문화시설 등등 생활편의시설이 주택지 주변에 두루 구비되어 있었다. 이렇듯 시대의 유행을 타고 나타난 신규 주택지 금화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최적의 주택지로 인식되면서 경성의 3대 주택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pp. 304~306]

 

물론 이 과정에서 시세 차익을 노린 부동산 투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쿠가와 요리사다[德川 賴貞]은 이 땅을 30만원에 매입해서 10년 만에 130만원에 매각했다.

 

“이곳은 원래 도쿠가와[德川] 가문의 도쿠가와 요리사다[德川 賴貞] 후작이 1916년에 매입한 땅이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요리사다는 장래 토지가격이 상승할 만한 곳을 찾았는데, 하세가와[長谷川] 군부 사령관에게 의뢰하여 찾은 땅이 바로 이 일대 토지와 부산의 토지였고 이것을 30만 원에 매입했다. 이 땅을 1926년 마스다 다이키치[增田 大吉]가 130만 원에 매입했다고 하니 이전 소유자였던 도쿠가와 요리사다는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긴 셈이다.” [pp. 306~307]

 

 

한옥 개량의 노력 - 정세권과 박길룡

 

주택 개발의 시대는 ‘문화주택’이라고 불리던 서양식 주택의 시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문화주택’의 광풍(狂風) 속에서도 한옥을 개량하여 경제적이면서도 위생적인 주택을 공급하기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인 경성의 건축왕 기농(基農) 정세권(鄭世權, 1888~1965) (https://blog.yes24.com/document/9734348) 최초의 조선인 건축사무소를 개설한 일송(一松)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다.

 

먼저 정세권을 살펴보면,

 

그는 조선 재래주택의 단점을 발견한 뒤 경제적이면서도 위생적인 주택을 목표로 매년 300여 호의 개량주택을 지었다주택 공급방식으로는 연부, 월부의 판매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의 주택난에 다소 도움이 되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직접 주택 개량의 실험대상이 되었다. 개량주택에 들어가 살다가 매각하기를 반복하면서 단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개선해 나가는 식으로 주택 개량 실험을 이어나갔다. 당시 박길룡과 같은 건축가들과 교류하면서 주택 개량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건축가도 정세권처럼 많은 한옥을 직접 짓고 살아보며 실질적인 개량안을 내놓진 못했다. [p. 21]

 

이러한 정세권의 한옥 개량 노력이 집약된 것이 가회동 한옥 단지다.

 

그 동안 가회동 일대는 역사적, 지리적 위상, 가장 한옥 밀도가 높은 한옥단지 정도의 이유로 유명세를 탔다. 100년이 넘은 조선시대 한옥밀집지역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굳이 ‘100년’, ‘조선시대’라는 용어로 치장하지 않아도 다른 한옥단지와 차별화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건축왕이자 민족운동가였던 정세권, 정세권이 가진 조선 주택 개량에 대한 꿈과 이상이 다양하게 실현되었던 곳그래서 20세기 전반 한옥이 ‘도시 주택’으로 변화해 가던 모습을 가장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 가치는 다른 한옥단지와 견줄 수 없다. [pp. 39~40]

 

이렇게 정세권이 실무적으로 한옥 개량을 위해 노력했다면, 박길룡은 이론적으로 한옥 개량을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찍부터 조선 주택에 관심을 두고 각지를 여행하면서 조사하고 그 기록을 도면으로 남겨, 이를 바탕으로 집중식(集中式) 평면배치와 부엌과 온돌, 변소 등의 개선안을 제시했다.

 

박길룡은 1926년부터 1943년 서거하기 전까지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거의 매해 빠지지 않고 주택 개량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한글 매체든 일본어 매체든, 신문이든 잡지든 매체를 가리지 않고 재래 주택의 단점을 이야기하고 당시 주택건축 현황을 비판하고 개량에 관한 논의를 펼치고 개량안을 제시했다. 개량안은 단지 말뿐 아니라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 투시도, 액소노매트릭, 사진 등과 함께 게재해 대중의 이해도를 높였다.

중략 ~

그는 이미 지어진 주택에 대해서는 방의 위치를 바꾸는 것 같은 응급 조치책을 제시하고 새롭게 지어질 주택에 대해서는 개선안을 내놓았다. [pp. 78~80]

 

하지만, 박길룡이 원하는, 집중식 배치의 건물과 주변의 외부공간을 두는 한옥을 짓기 위해서는 대규모 토지와 건물이 요구되고문화주택’에 대한 열풍 몰아치고 있기에 이러한 주택 개량에 대한 박길룡의 생각은 온전히 반영되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생각을 가장 많이 반영한 것이 244평의 대규모 대지에 지어진 경운동 민병옥 가옥[지금의 민가다헌(閔家茶軒)]이다.

 

삼청동 H자형 하이브리드 주택의 평면과 입단면도

출처: <경성의 주택지>, p. 122

 

길가에 면한 부분에는 서양식으로 보이는 2층의 오오카베[大壁] 구조의 주택을 배치하고 안쪽에는 1층의 한옥을 배치한, 한일(韓日)절충의 H자형 주택을 제시한 김종량(金宗亮, 1901~1962)의 하이브리드 주택도 이러한 주택 개량을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별도의 출입 동선과 화장실 등을 두어 임대가 용이했으나 공간의 낭비가 심하고, 공사비가 비쌌으며, 겨울의 추위로 일본인마저도 다다미가 아닌 온돌을 선호했기에 널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양식 주택, 문화주택의 도입과 광풍

 

당시 자유연애를 부르짖었던 신여성은 문화주택을 통해 상대방의 경제력을 가늠해 결혼 여부를 결정하기도 했는데,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찬어요. 피아노 한 채만 사주면”이라는 문구에서 나타나듯 자신의 삶을 문화주택과 치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생기기도 했다. 따라서 문화주택을 선호하는 여성을 노리는 사기꾼이 나타난다거나, 문화주택을 미끼로 결혼했다가 결국 파경에 치닫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문화주택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져서, 어떤 이는 문화주택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게 은행대부를 받아 지어보기도 했지만 이자를 갚을 능력이 안 되어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문화주택을 은행에 넘기고 은행에 넘어간 문화주택은 결국 외국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가 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pp. 48~49]

 

이렇게 ‘문화주택’으로 대표되는 서양식 생활을 선호하면서도 온돌로 대표되는 기존의 습성은 버리지 않았다. 그 괴리 속에 외관은 벽돌조의 서양식 주택, 내부는 일본식 목조 주택 모듈과 중복도형 공간 구성을 취하면서 온돌 공간을 유지하는 한국, 일본, 서양의 주거문화가 공존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마치 서양문화를 수용하던 20세기 조선을 상징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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