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로 만나는 서양철학 - 지금 우리에게 서양철학은 무엇일까?
박병기.강수정 지음 / 인간사랑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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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이해의 난해함

 

전공자가 아닌 보통 사람에게 ‘철학’은 난해한 학문이다. 교과서에 쓰여진 것처럼 성리학(性理學)하면 ‘이기론(理氣論)’, 양명학(陽明學)하면 ‘지행합일(知行合一)’ 같은 방식으로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교적 유사한 풍토에서 나와 오랜 시간 한국인의 사고에 맞게 현지화한 유교철학과 불교철학만 해도 그런데 아예 전혀 다른 풍토에서 태어난 서양 철학의 경우에는 더욱 난해할 것이다.

이런 서양철학을 저자들은 선(禪)불교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붙들고 있는 물음, 즉 ‘화두(話頭)’의 형식을 빌려 소개하고 있다. 마치 불교가 중국에 전래 되던 초기에 불교 교리를 노장(老莊)사상 등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던 것[격의(格義)]처럼.

 

이 책, <화두로 만나는 서양철학>은 행복, 환상, 운명, 쾌락, 자기보존, 감정, 실존적 삶, 일상 속의 철학이라는 8개의 화두(話頭)를 매개로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데카르트, 스토아 철학, 에피쿠로스, 벤담, J.S.밀, 스피노자, 홉스, 흄, 칸트, 니체, 사르트르, 싱어, 롤스, 하버마스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8개의 화두(話頭), 17개의 답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에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진정한 자아(自我)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끝내 물에 빠져 죽는다. 이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진짜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트리나 폴러스의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는 행복을 찾아가는 세 가지 모습을 통해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트리나 폴러스(Trina Paulus)의 책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주인공인 호랑 애벌레는 행복을 찾아가는 세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노랑 애벌레와 풀밭에서 먹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 치열한 경쟁과 속도의 덩어리인 애벌레 기둥을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삶, 그리고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잠재된 참모습을 끌어내 나비가 되는 삶,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p. 39]

 

 

우리가 생각하는 환상 혹은 판타지와는 다소 다르지만 빨간 약을 먹고 진짜 세계를 알게 되는 영화 <매트릭스>와 지혜의 힘으로 무지의 사슬을 끊고 현실이라는 동굴 밖을 나가 이데아의 세계를 기억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다르지만 닮았다.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지금 있는 곳이 현실 세계인가에 대해 자문해야 하는 영화<인셉션>은 진리를 찾기 위해 끝없이 의심한 끝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남긴 데카르트와 연결된다. 이런 영화들을 보고 나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아니면 진짜 세계라고 믿는 환상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마도 이를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 타블로 사건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운명론이며 결정론인 스토아 철학을 얘기하는 자들에 있어 인간은 신(神)이라는 감독이 써놓은 시나리오에 따라 맡은 바 배역을 소화해야 할 연극배우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삶은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고정시켜놓고 팔을 휘둘러 발버둥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드라마 <도깨비>는 운명을 반대로 얘기한다.

 

신은 여전히 듣고 있지 않으니.

투덜대기에

기억을 지운 신의 뜻이 있겠지.

넘겨짚기에

 

늘 듣고 있었다.

죽음을 탄원하기에 기회도 줬다.

 

기억을 지운 적 없다.

스스로 기억을 지운 선택을 했을 뿐

 

그럼에도 신의 계획 같기도, 실수 같기도 한가?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pp. 93~94]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운명이라는 화두와 함께 소개되고 있지만, 오히려 쾌락에 대해 논의하는 파트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에피쿠르스’라고 하면 흔히 ‘쾌락주의자’ 혹은 ‘쾌락주의 철학자’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쾌락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처럼 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다.

 

에피쿠르스는 쾌락주의자이자만 적극적인 쾌락의 추구보다는 고통을 제거함으로써 평정심에 이르는 소극적인 쾌락을 강조하는 사상가이다. 그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조차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p. 109]

 

오히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불교의 교리와도 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월포드는 설국열차 안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5살 이하의 몸집이 작은 아이를 엔진의 부품으로 사용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에 따르면 이는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영화를 보지 않아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이 선발되고 희생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양심의 가책 없이 그 아이들에게 다수 혹은 공동체의 행복(=쾌락과 안전)을 위해 너희의 삶을 바치라고 할 수 있을까?

 

 

홉스는 국가가 만들어지기 전의 ‘자연상태’의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당할 수 있는 평등하면서도 취약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자연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불리는 폭력사태가 일상화된다고 주장한다. 월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에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아포칼립스는 바로 이런 ‘자연상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리를 일부 포기하더라도 사회의 규율과 통솔에 대해 최소한의 합의[자연법]을 따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육체가 사라져도 ‘기억’ 등을 통해 가족, 친구, 동료 등에게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개체가 아닌 종족으로서의 ‘자기 보존’을 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태아(胎兒) 생산과 세뇌 등을 통해 미래가 결정되는 신세계를 거부하는 존은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후예이자 역설적으로 자기 보존을 위한 또 다른 선택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감정을 다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주인공 라일리의 감정 캐릭터 중 기쁨과 슬픔이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이탈했다가 복귀하는 내용이다. 감정 입장에서 인간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을 통해 사회적 차원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고, 이러한 공감이 인간의 도덕성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원리라는 흄의 철학과도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드라마 <비밀의 숲>의 주인공인 황시목 검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이성(理性)에만 충실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이익이나 평판에도, 동료나 선후배 간의 인간 관계에도, 금전적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밥 한끼에서 시작된 균열에서 무너진 강직했던 선배 검사 이창준과 달리. 어쩌면 그래서 저자들은 감정 따위를 초월한 선(善)의지, 이성적 준칙에 의한 도덕적 결단만이 인간 본연의 의무를 완성한다고 주장하는 칸트와 이 드라마를 연결시킨 것이 아닐까?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가 시민사회에 적응하려는 ‘인간’과 복잡하면서도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자유를 구가하는 ‘이리’를 대비시켰다면, 서미싯 몸의 <달과 6펜스>에서 ‘달’은 화가의 이상을, ‘6펜스’는 절망적인 현실을 대비시킨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 인간의 실존 혹은 실존적 삶을 논의할 그 무엇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와 사르트르를 거론한 것이 아닐까?

 

 

철학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고 사변적(思辨的)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도 철학이 가능하다. 여기서 공리주의(功利主義)와 연결되는 두 철학자 피터 싱어와 롤스가 거론된다.

피터 싱어는 영화 <옥자>에 등장하는 공장식 축산으로 대표되는 동물에 대한 착취와 학대에 대한 비판을 담은 <동물해방>을 통해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실천 윤리를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채식주의 등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고 있다. 반면에 공리주의적 정의론의 약점을 지적한 롤스는 공정한 조건에서 가상적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의가 도출되었다면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제시한 셈이다. 이는 프랑스 사회당이 그의 차등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분배 정책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했던 것으로, 이런 점에서 그를 현실적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이런 방식으로 8개의 화두(話頭)를 매개로 17명의 서양 철학자들의 주요 학설을 소개한다. 다만 그렇다 보니 8개의 화두와 그 화두에 이어지는 철학자들의 사상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도 있다. 다시 말하면, 화두에 자의적(恣意的)으로 철학자들의 사상을 끼워 맞춰, 서로 따로 노는 듯해서 아쉬운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철학자들의 사상을 대학입시를 대비한 수험서를 읽듯이 가능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각각의 챕터 끝에 해당 철학자들의 생애와 핵심 성과에 대해 요약한 부록이 곁들여져 있어 서양철학 혹은 서양철학사에 대해 입문하는 이라면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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