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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ㅣ 알베르 카뮈 전집 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의 <전락(轉落, La Chute)>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멕시코 시티’라는 바(bar)에서 ‘누군가’를 만난 변호사 장-바티스트 클라망스(이하 ‘클라망스’)의 고백이다. 마치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클라망스는 스스로를 ‘참회한 재판관’이라고 말하며 며칠에 걸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고 세상을 비판한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독백 속에서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저자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인간의 이기심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먼저 화자(話者)인 클라망스는 인간은 모두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어쩌다가 닥친 불행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죄(罪)는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타인을 심판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심판’은 회피하려 한다고 얘기한다.
어떤 인간일지라도(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현자(賢者)들이면 몰라도)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공격을 방어하는 유일한 길은 악질적으로 구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심판 받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남을 심판하러 덤비는 겁니다. 어쩌겠어요?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 마치 본성의 바탕에서 우러나듯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은 바로 자기는 아무 죄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저 키 작은 프랑스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사내는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그가 호송되어 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던 서기에게 이의신청을 해야겠다고 고집을 했어요. 이의신청이라니? 서기와 그 동료들이 웃어댔습니다. “소용없어, 이 친구야. 여기선 이의신청 따윈 하는 게 아니라구.” “그렇지만 말입니다, 내 경우는 예외거든요. 난 죄가 없습니다!” 하고 키 작은 프랑스인이 말했어요. [pp. 85~86]
이처럼 나만 예외라고 주장하는 것의 밑바탕에는 심판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심판을 받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
우리는 자신의 안 좋은 점을 고치거나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자면 우선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는 판정을 받았어야 했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그저 남에게 동정을 받고 제가 가고 있는 길을 가면서 격려를 받고 싶은 겁니다. 요컨대 죄를 짊어지고 있는 것도 싫고 또 동시에 깨끗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겠다는 겁니다. [p. 88]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기 보다는 타인의 위로와 주위 사람들의 인정에만 연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것은 클라망스도 과거에 그런 인간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전쟁, 자살, 사랑, 가난 같은 것에 사정이 어쩔 수 없을 때는 관심을 갖긴 했지만 그것도 예의상이거나 피상적으로 그랬을 뿐이지요. 때로는 내 일상생활과 관계가 없는 어떤 대의명분에 열렬한 관심을 기울이는체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나의 자유가 위협받는 경우라면 물론 다르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어요.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그저 표면만 스치면서 미끄러지는 거예요. 맞아요. 모든 게 내겐 겉만 스치면서 미끄러져갔어요. [p. 56]
예전에 클라망스는 가난하거나 변호할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변호하면서, 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덕망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는 클라망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한 결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리 근처를 산책하다가 어떤 여성이 자살 시도하는 걸 목격했지만 그냥 지나쳐버린다. 왜 그랬을까? 주위에 그를 심판 혹은 평가할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
몇 년 후 갑자기 그는 그때 죽은 여성의 웃음소리를 듣는 환청을 겪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무엇이 원인이 되어 그가 죽은 이의 웃음소리를 듣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각성을 통해 그는 깨닫는다.
자기 자신을 비판함이 없이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남을 비판할 권리를 갖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통렬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판관은 누구나 다 결국은 참회자가 되고 마는 법이니까 길을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가서 우선 참회자로서의 직업에 종사하다가 마침내는 재판관이 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내 말 알아들으시겠어요? 좋아요. 하지만 좀 더 분명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중략 ~
우선, 선생께서도 경험해보셨듯이,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공공연한 고백을 하는 일입니다. 나는 종횡무진으로 나 자신을 고발합니다.
~ 중략 ~
“자, 딱하게도 이게 바로 나라는 인간입니다!”하고 말하지요. 논고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가 나의 동시대인들에게 내밀어 보이는 초상화는 거울로 변해버립니다. [pp.140~142]
이런 방식으로 그는 먼저 참회자(懺悔者)가 되어 자신을 비판(批判)하고, 이어 재판관이 되어 타인을 심판(審判)한다. 하지만 그의 심판은 단지 ‘말’로만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남이 우리 말을 곧이듣는다고 한번 가정해보시죠? 그럼 정말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할 테죠. 아이구 떨려……. 물이 얼마나 차갑다구요! 그렇지만 안심해도 돼요! 이제는 때가 너무 늦었어요. 언제나 너무 늦은 것일 겝니다. 천만다행이지 뭡니까! [p. 148]
<전락>이라는 이름의 그 현란한 자기 고백은 지식인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또 하나의 언어유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