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개정판
유진 로건 지음, 이은정 옮김 / 까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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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아랍’이지?

 

‘아랍’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오를까? 대체로 ‘이슬람’이라는 종교나 ‘중동(中東)’이라는 지역이 떠오를 것이다. <역사서설(歷史序說, Muqaddimah)>로 유명한 역사철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은 아랍을 오아시스 주변에서 간단한 농사를 하며 정착한 무리를 포함한 유목민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아랍’을 ‘사막의 거주민’이라는 베두인(Bedouin)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로 이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보는 ‘아랍’은 조금 다르다.

 

이슬람 초기 아랍인은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 중에서 언어(아랍어)와 종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다수가 수니 이슬람을 믿는 공통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p. 19]

 

어쨌든, 중동(中東) 지역에 위치하지만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튀르키에나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이란은 아랍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공식적으로 여전히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하지 않고, ‘레바논 내전(1975~1990)’ 이전에는 기독교 국가에 가까웠던 레바논의 존재도 ‘아랍’을 ‘이슬람’이나 ‘중동(中東)’과 동일시할 수 없게 한다.

 

 

유진 로건의 [아랍]은

 

이 책은 아랍의 근대와 현대를 다루고 있는 역사책이다.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1장부터 제3장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와 함께 시작된 아랍의 근대사를, 제4장부터 제8장까지는 영토와 영향력을 잃어가는 오스만 제국의 발버둥을, 제9장부터는 제14장까지는 1948년 아랍인의 땅에 유대 국가가 건국된 이후 아랍 국가들의 모습을, 개정판을 내면서 추가된 제15장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현재를 각각 그리고 있다.

 

 

아랍의 근대화

 

이 책 <아랍>은 오스만 제국의 9대 술탄 셀림 1세(재위 1512~1520)가 거느린 소총으로 무장한 최신의 화약 보병부대와 맘루크 왕조의 49대 술탄 칸수 알 가우리(재위 1501~1516)가 거느린 개개인의 무력에 치중한 기병이 충돌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오스만의 맘루크 제국의 정복은 아랍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맘루크 검객과 오스만 소총수의 운명적인 무력 충돌은 아랍 세계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또한 오스만의 정복은 이슬람 등장 이후 처음으로 아랍 세계가 비(非)아랍인이 세운 수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 중략 ~

하지만 1517년부터는 아랍 지역 밖의 수도들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아랍인의 사회적 지위가 협의되었고, 이와 같은 정치적 현실은 근대 아랍 역사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p. 34]

 

쉽게 맘루크 왕조의 멸망을 아랍 근대의 시작이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시대구분(時代區分)은 사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적용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근대(近代, Modern)’라고 하면, 흔히 시민사회의 성립과 자본주의의 형성을 떠올리는데, 이 기준으로 보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그 상징이 된다. 하지만 ‘나’라고 하는 개인의식의 성립을 기준으로 한다면 르네상스 시기까지 소급할 수 있다. 그래서 ‘근대(近代, Modern)’를 르네상스부터의 ‘Early Modern’과 프랑스 혁명부터의 ‘Late Modern’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도 이 기준을 적용해서 ‘Modern’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총, 칼 같은 냉병기(冷兵器)에서 소총과 같은 화약무기로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는 아랍의 근대가 유럽의 근대와 다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랍의 근대는 어떤 것일까?

 

맘루크 제국을 정복한 후 2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남부까지 성공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랍 지역에서 정치체제를 표준화할 생각이 없었던 또는 표준화 할 수 없었던 오스만은 많은 경우 지역 엘리트들과 협력을 통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각각의 아랍 지역들은 이스탄불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으면 각양각색의 행정 구조를 만들어냈지만, 그들 모두는 분명히 하나의 제국의 일부였다.

~ 중략 ~

그러나 중앙과 아랍 주변부 간의 역학관계가 18세기 후반에 달라졌다. 새롭게 등장한 지역 통치자가 세력을 규합하여, 종종 오스만 제국의 유럽 적국들과 협력하며 오스만 체제에 반하는 자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p. 60]

 

이건 아무리 봐도 봉건제(封建制) 혹은 고려 시대와 비슷하지 않은가! 이를 “같은 국가의 통제 하에 있으나, 서로 다른 법률과 관료에 의해 다양한 종교집단들이 함께 삶을 영위하는 일종의 ‘모자이크 구조’가 수백 년 간 오스만제국의 근간을 이룬 질서의 핵심1)”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오스만 제국이 아랍을 지배하고 몇 세기가 지난 후에  ‘오스만의 근대화 개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에 의해 아랍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면서 다시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그렇다면 아랍의 근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이었던 무함마드 알리(1770~1849)의 개혁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함마드 알리는, 훗날 오스만이 모방하게 되는, 유럽의 개념과 기술에 의존하여 이집트를 개혁의 길로 이끌었던 혁신가이기도 했다. 그는 중동 지역에서 최초로 농민 군단을 창설했다. 또한 유럽 바깥에서는 최초로 실현된 산업화 프로그램에 착수했고, 군에 필요한 무기와 직물을 생산하고자 산업혁명 기술을 도입했다. 교육사절단을 유럽의 수도들에 파견하고 유럽의 서적 및 기술편람을 아랍어 판본으로 출판하기 위해서 번역국도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술탄의 총독이 아닌 독립적인 군주로 자신을 대우하는 유럽 열강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p. 100]

 

대체로 지방의 강력한 권력자와 중앙은 갈등을 빚기 쉬운데, 풍요롭고 넓으며 중앙과 충분한 거리를 갖고 있는 이집트 총독들은 그런 유혹을 받기 쉬웠다. 무함마드 알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와 오스만 제국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의 사실상 독립을 요구하는 영국과 프랑스에 맞서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그리스 반란군을 진압하던 이집트 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파탄에 이르렀다. 그 결과 무함마드 알리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시리아를 침략했다.

 

오스만 개혁의 시대는 제2차 이집트 위기2)가 정점에 이르렀던 1839년에 시작되었다.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죽고 10대였던 압돌 메지드 1세가 등극한 1839년은 급진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선포하기에는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군으로부터 급박한 위험에 시달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럽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유럽으로부터 영토와 통치권에 대한 보장을 받기 위해서는 근대국가 세계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유럽 기준의 치국책(治國策)을 충실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유럽 열강들에게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다고 오스만 정부는 생각했다. 더구나 마흐무드 2세의 밑에서 일했던 개혁가들은 전대 술탄의 치세 동안에 이미 시작된 변화들을 강화시키고 그의 계승자로 하여금 개혁 과정에 참여하도록 만들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이중적 동기가 오스만 개혁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 유럽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선전행위가 대내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개혁에 나선 진심 어린 결의와 결합한 것이다. [p. 128]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부강해지기 위해 시작한 일련의 개혁과 개발 사업은 도리어 오스만 제국을 더욱 유럽의 지배에 종속시켰다. 특히 유럽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은 오스만 제국을 파산으로 몰고 갔다.

 

프랑스는 1881년에 튀니지로 지배권을 확장했고, 영국은 1882년에 이집트를 점령했으며, 이탈리아는 1911년에 리비아를 장악했고, 유럽 열강은 1912년에 모로코(오스만 지배로부터 독립을 지켰던 유일한 북아프리카 국가였다)를 프랑스-에스파냐의 보호령으로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북아프리카 전체는 유럽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p. 155]

 

이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아랍인들이 대항했지만, 신식 무기와 강력한 군대를 가진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제국주의적 편의에 따라 조성한 팔레스타인 같은 위임통치령은 또 다른 불씨를 잉태했다.

 

벨푸어 선언이 공동체 간의 갈등의 빌미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매우 제한적인 자원을 고려한다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공민권과 종교적인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그곳에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향토를 건설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예상한 대로 위임통치는 대립하던 두 민족주의, 즉 고도로 조직화된 시오니즘 운동과 영국의 제국주의 및 시오니즘적 식민주의라는 이중의 위협에서 기인한 새로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간의 충돌을 야기했다.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제국주의가 중동에서 양산한 가장 큰 실패작이었고, 그 결과 중동 전역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갈등과 폭력사태에 휘말리게 되었다. [pp. 277~278

 

이런 상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대 국가가 건국되면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발생했다. 이에 대항하여 젊은 아랍 민족주의자 군인들은 1949년 시리아에서, 1952년 이집트에서, 1958년 이라크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구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연계가 없었지만, 초 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내세운 ‘냉전(冷戰)’이라는 새로운 질서(New Order)에는 적응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에게 수에즈 전쟁은 군사적으로 놀라운 승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후퇴를 의미했다. 벤 구리온은 IDF(이스라엘 방위군)가 무력으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해야 하는 현실에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아랍 이웃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군대의 기민함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3국 침략에 동참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 지역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던 아랍 세계의 보편적인 인식이 더욱더 강해졌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제국주의와 연계되면서 아랍 세계가 유대 국가를 인정하거나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물론이고 받아들이는 것조차 더욱더 어려워졌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을 패퇴시키는 문제는 팔레스타인 해방뿐만 아니라 중동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일소하는 문제와도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p. 432]

 

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에 부딪혀 단합되지 못한 아랍 민족주의는 쇠퇴했고, 무력으로 유대 국가를 말살하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랍 정부들은 시오니스트 적과 싸워서 팔레스타인 향토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아랍의 공동 의제에 말로만 경의를 표할 뿐, 모두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대의 석유 자원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아랍의 세계 경제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힘이 중동을 제어하게 되었다. [p. 503]

 

하지만 석유의 힘보다도 이슬람의 힘을 더욱 믿는 젊은 세력이 등장해서, 이란에서 혁명을 일으켜서 왕정을 폐지시키고, 이집트에서는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했다. 나아가 이들에 의해 극단적인 이슬람주의 테러 세력이 형성되었다.

 

한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 협정 체결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그 길이 아직 멀고 멀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개정판을 내면서 추가된 제15장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현재를 보여준다. 튀니지에서 발발한 “아랍의 봄”으로 인하여 아랍 각국은 혁명의 물결에 휩싸였지만, 그것이 성공한 튀니지를 제외하고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거나 더욱 참혹한 내전으로 빠져드는 등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튀니지는 아랍의 봄 혁명 이후 새로운 헌법 질서로의 평화로운 정치적 이행을 성사시킨 유일한 아랍국가이다.

중략 ~

튀니지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은 중도적이고 세속적인 두 개의 다른 정당과 연대함으로써 고도의 국민적 단결을 유지했다. 새로운 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과정은 지난했지만, 강제보다 합의에 기반한 특성을 띠었다. 2014년 1월 채택된 신헌법에는 혁명운동의 성과인 시민의 권리와 법의 지배가 명시되었다. [pp. 729~730]

 

그리고 <아랍>은 아랍의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희망적인 전망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튀니지의 취약한 민주주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이는 아랍 세계와 전 세계에 큰 이득이 될 것이다. 아랍 세계가 2010년대의 폭력과 대대적인 파괴로부터 벗어났을 때 아랍인들은 반드시 책임 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재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pp. 729~730]

 

 

 

 

옥의 티

 

p. 67

아랍의 지역 경제는 실질적인 이득을 보았고 장인(丈人)과 민병(民兵)에 대한 후원 확대로 지역 통치자의 힘은 더욱 커졌다. ⇒ 아랍의 지역 경제는 실질적인 이득을 보았고 장인(匠人)과 민병(民兵)에 대한 후원 확대로 지역 통치자의 힘은 더욱 커졌다.

 

1) 김가희, <이슬람 국제체제의 역사적 탐구를 통한 걸프위기의 재구성>,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p. 22

2) 제2차 이집트-오스만 전쟁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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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지음, 하인후 옮김, 김도근 사진 / 시공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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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는

 

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들어가면서’를 보면,

 

이탈리아 여행에는 현지 가이드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일관성보다 즉흥성을 선호하는 이탈리아에서 여행자들은 당혹스러운 일을 자주 겪는다. ‘기술보다 예술이, 실력보다 매력이, 품격보다 파격이’ 가치의 상위를 차지하는 곳이 이탈리아다.

~ 중략 ~

나는 피렌체에서 태어나서 피렌체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다가 피렌체에서 죽은 마키아벨리에게 가이드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산타 크로체 성당의 영묘에 새겨져 있는 짧은 묘비명이 증언하듯이, “어떤 이름도 그보다 뛰어나지 않다(TANTO NOMINI NVLLVM PAR ELOGIVM).” 피렌체의 아들로 태어나 피렌체의 최고 공직에 올랐으며, <피렌체사>를 집필한 마키아벨리보다 더 뛰어난 자질을 가진 가이드가 있을까? [pp. 16~17]

 

라고 쓰여있다. 다시 말해, 이 책 <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는 <군주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니콜로 마키아벨리(이하 ‘마키아벨리’)가 쓴 <피렌체사>를 길잡이 삼아 피렌체를 소개하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의 구성을 따라가고 있다. 즉, 피렌체에서 펼쳐졌던, 평민들의 자유 투쟁을 그린 1부와 메디치 가문이 걸어온 영광의 역사를 기록한 2부로 구성된 <피렌체사>처럼, <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도>도 1부 평민의 시대(1216~1434)와 2부 메디치 가문의 시대(1434~1525)로 나눠 피렌체를 소개하고 있다.

동시에 과거 저자가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등을 통해 피렌체를 중세의 암흑을 걷어낸 르네상스의 도시로 봤던 관점에 대한 반성도 곁들이고 있다. 저자는 보는 사람이 첫눈에 반하게 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라는 화장을 걷어낸 피렌체는 계속된 분열과 투쟁으로 피에 물든 붉은 백합의 도시라는 것을 깨달았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노 강변에 핀 한 송이 백합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피렌체에서는 귀족과 귀족이, 귀족과 평민이, 평민과 평민이, 평민과 하층민이, 하층민과 하층민이 서로 싸우다가 결국 메디치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된다피렌체, 그곳은 피로 물든 거리였다. 지금까지 알던 피렌체는 잊어버리시라. 눈이 아닌 마음으로 피렌체를 보아야 한다! 피렌체는 아름다운 예술만 존재한 곳이 아니라 권력을 차지하려는 피 튀기는 투쟁, 이웃에 대한 끝없는 시기심, 조직적인 군사 반란과 길거리의 주먹다짐, 비열한 암살 시도와 간이라도 당장 빼서 줄 것 같은 아첨, 지배 받지 않으려는 평민과 하층민의 절규와 비명이 거리를 메웠던 곳이다. 피렌체의 성당과 공방, 수도원과 저택을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은 어쩌면 피로 물든 역사를 은닉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모른다. 가장 과격한 장소에 가장 아름다운 예술의 꽃이 피어 오른 도시가 바로 피렌체다. [p. 27]

 

 

서로 피를 부르는 복수극, 귀족의 몰락을 가져오다

 

‘피렌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메디치 가문을 떠올린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은 당시 유럽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다. 이들은 어떻게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을까?

 

이야기는 피렌체가 2차 삼두(三頭) 정치의 주역들에 의해 만들어진 무렵부터 존재했던,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가운데 하나인 베키노 다리(Ponte Vecchio)에서 시작한다.

12세기 이탈리아는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 봉건 영주 가문 중심의 교황파(Guelph)와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 부자 중심의 황제파(Ghibelline)로 갈려 다투고 있었다. 이들의 반목은 잘 알려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몬테규(Montague) 가문과 캐퓰릿(Capulet) 가문의 갈등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말도 비슷하다.

시작은 축하 연회에서의 사소한 다툼이었다. 하지만 교황파와 황제파의 대립이라는 화약고는 이 작은 불씨를 전통 귀족의 몰락이라는 큰 화재로 발전시켰다. 물론 중간에 불씨가 사그라질 수 있는 기회는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교황파의 맹주 부온텔몬티(Buondelmonti) 가문의 부온텔몬테는 두 차례나 화해를 위한 약혼을 파기하고, 교황파 가문의 부유하고 아름다운 여성과의 결혼을 강행했다. 이는 황제파에 대한 모욕과 도발로 받아들여져, 황제파의 맹주인 우베르티(Uberti) 가문이 결혼식에 가기 위해 베키오 다리를 건너는 부온텔몬테를 습격한다. 24년 후 이번에는 부온텔몬티 가문이 화해를 위한 결혼을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인 우베르티 가문을 결혼식장에서 몰살한다.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다시 10년이 흐른 뒤 우베르티 가문의 생존자가 신성로마제국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의 정권을 탈취하고 교황파의 생존자를 추방한다. 또다시 6년이 흐른 뒤 이번에는 교황파가 피렌체를 탈환하고 우베르티 가문의 저택을 파괴하고 그곳에 시뇨리아 정청(政廳)을 건축함으로써 교황파[부온텔모티 가문]와 황제파[우베르티 가문]의 길고 긴 복수극은 끝나고 만다.

 

힘을 회복해 다시 돌아온 교황파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피렌체 황제파의 수장인 우베르티 가문의 저택이었다. 웅장했던 저택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피렌체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베키오 다리는 시뇨리아 정청과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광장에 건축되지 않았고 한 블록 빗겨나 있다. 이렇게 불편하게 도시를 설계한 이유가 있다. 피렌체를 다시 차지하게 된 교황파가 우베르티 가문의 저택을 무너뜨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에 시뇨리아 정청을 새로 건축했기 때문이다. [p. 47]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에 따르면, 전통 귀족들이 이렇게 서로 피를 부르는 복수극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유력한 평민들(Grandi popolani, 이하 ‘그란디’)로 불린, 7개의 대형 직능 조합 출신 평민들이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행정장관직이 바로 귀족의 몰락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이런저런 구실로 귀족들을 행정장관직에서 배제했고, 결국 귀족들은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고 파멸했기 때문이다. 서로 대립하고 있던 귀족들은 처음에는 이런 변화에 저항하지 않았고, 그래서 귀족들끼리 서로 정부를 빼앗으려 애쓰다가, 마침내 그들 모두 권력을 잃고 말았다. [p. 60]

 

이렇게 권력을 획득한 평민,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인이거나 기술을 익힌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토록 싫어하던 귀족들의 행태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교황파 귀족들이 교황파 백당[비앙키]과 교황파 흑당[네리]으로 갈리고, 그들과의 거래 관계가 얽힌 평민이 가세하면서, 피렌체는 또다시 분열과 갈등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끝없는 자중지란(自中之亂)의 끝에 피렌체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아테네 공작이자 브리엔 백작인 프랑스인 발테르 6세(Walter Ⅵ, 1304~1356, 이하 ‘발테르 공작’)에게 종신 통치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장고(長考)끝의 악수(惡手)였다.

 

발테르 공작이 시민들에게 부과한 세금은 가혹했고, 그의 판결은 부당했으며, 그가 처음에 가장했던 성실함과 친절함은 교만함과 잔인함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많은 훌륭한 시민들과 뛰어난 평민들이 벌금을 물거나 추방당하거나 살해당했으며, 들어본 적도 없는 방법으로 고문을 받기도 했다.

~ 중략 ~

비록 그는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고 또 귀족들 중 상당수를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게 해주었지만, 그럼에도 계속 귀족들을 의심했다. 왜냐하면 자부심 강한 귀족이 자신의 절대 권력에 순순히 복종하며 살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하층민들에게 이득을 주기로 했다. 외국의 용병에다 하층민의 지지만 있으면 독재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pp. 107~108]

 

결국 1년도 지나기 전에 발테르 공작의 전횡에 지친 귀족들과 평민들은 그를 축출하기 위해 도시의 중심부인 메르카토 베키오(Mercato Vecchio)에 모여 무장 봉기를 한다. 이들은 발테르 공작의 지휘를 받는 하층민[미누티(Minuti)]과 전투를 벌였고, 끝내 발테르 공작으로부터 피렌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항복선언을 이끌어 낸다.

 

 

메디치 가문,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다

 

하지만,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귀족들과 평민들은 여전히 서로 ‘지배 받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나아가 프랑스 혁명 시기의 상퀼로트(Sans-Culotte)처럼, 피렌체의 최하층민[치옴피(Ciompi), 이하 ‘치옴피’]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치옴피를 대상으로만 사용하게 강제된 은화인 피치올로(Picciolo)가 지속적으로 가치 절하되면서 그들의 실질 구매력은 떨어져, 생활고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견디다 못한 그들은 산타 크로체 광장에 모여 임금 인상과 더 많은 일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평화로운 집회로 시작되었지만, 어떤 치옴피의 연설로 치옴피들도 ‘지배 받지 않을 자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던져진 불씨는 폭동과 집단 약탈로 물든 치옴피 반란(1378)으로 치달았다. 이 반란으로 치옴피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치옴피의 리더나 그들에게 우호적인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Salvestro de’ Medici, 1331~1388 ?, 이하 ‘살베스트로’)는 처음부터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실권은 옛 귀족 출신으로 피렌체의 마지막 그란디였던 알비치(Albizzi) 가문, 스트로치(Strozzi) 가문, 스칼리(Scali) 가문, 알베르티(Alberti) 가문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통치에 방해되는, 살베스트로 등은 차례로 추방되었다. 아마도 이 일 때문에 메디치 가문은 ‘동네건달’ 이미지는 탈피했을지 몰라도 ‘그란디들의 하수인’이라는 이미지는 더 짙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최후의 그란디 가운데 스트로치(Strozzi) 가문, 스칼리(Scali) 가문, 알베르티(Alberti) 가문이 몰락하자 남은 것은 교황파 흑당[네리]의 당수(黨首)였던 도나티 가운이 이름을 바꾼 알비치(Albizzi) 가문뿐이었다.

 

이 결정을 권고한 사람이 누구든, 그는 당신의 힘을 빌려 하층민들로부터 권한을 빼앗자마자, 그 침해로 당신의 적이 될 하층민들의 도움을 받아 당신의 권한을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오. 그리 되면 당신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던 자들의 설득으로 조르조 스칼리와 톰마소 스트로치의 파멸에 동의했으나 그 직후 자신을 설득했던 바로 그자들에 의해 추방당한 베네데토 델리 알베르티의 운명과 똑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오. [p. 195]

 

이러한 난장판 속에서 등장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 이하 ‘조반니’)는, 우리가 알고 있는 메디치 가문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매우 부유하지만 친절하고 자비로운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평민 귀족(Noviles populares)’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여기에 ‘치옴피 혁명의 아버지’ 살베스트로의 후광이 곁들여지자, 조반니는 이를 바탕으로 옛 귀족과 그란디, 평민들과 하층민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면서 피렌체 시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본업인 은행업에서 ‘의리와 신용’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간주되고 있음을 감안,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 교황 요한네스 23세에 대한 의리를 지켜, 한번 거래한 고객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조반니의 뒤를 이은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519~1574, 이하 ‘코시모’)는 대규모 공공 건축 사업을 펼치고 예술가들을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나아가 이렇게 ‘우리 모두를 위해 아낌없이 베푼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서 피렌체 시민들에게 메디치 가문의 사소한 잘못은 눈감아주어야 한다는 부채의식과 나도 기회가 오면 엄청난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기대 심리를 조장했다. 덕분에 1433년 10월 오랜 정적(政敵) 알비치 가문에 의해 추방되었지만 1년 만에 반대로 알비치 가문을 추방하고 되돌아갈 수 있었다. 이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실질적인 참주(僭主)가 되었다.

피에로 데 메디치(Piero de Medici, 1416~1469)의 짧은 통치를 거쳐 새로운 메디치가의 가주가 된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 이하 ‘로렌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는 은행가가 아닌 문학적 소양을 갖춘 군주처럼 행동했고, 본업인 은행 경영에서 멀어져 점차 관리 감독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로렌초가 은행업에 무관심해지자 메디치 은행의 주요 지점들도 잇달아 문을 닫았다.

 

로렌초의 뒤를 이은 ‘불행한 자’ 피에로 데 메디치(Piero de’ Medici, 1472~1503)는 무능한 리더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창과 칼로 싸우던 시대에서 대포와 화약으로 싸우는 시대로의 변화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밀라노의 군사력을 지렛대 삼아 ‘힘의 균형’을 유지하던 외교정책을 즉흥적으로 변경한다. 이 결정으로 밀라노와 프랑스가 침공하자 그는 겁을 집어먹고 피사 항구 등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추진했다. 피렌체의 목줄을 넘겨주려는 협상은 피렌체 시민에 의해 거부되었고, 그를 포함해 겁을 집어먹은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제일 먼저 도시에서 탈출하고 만다.

 

 

모든 것을 독점하려다 모든 것을 잃게 되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

 

마키아벨리는 지금까지 메디치 가문, 귀족, 그란디의 지배하려는 욕망과 이들의 지배를 거부하려는 피렌체 평민과 하층민들의 적의가 모든 악의 근원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충돌은 로마에서도 일어났다. 로마나 피렌체나 계급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을 가진 자와 지배 받는 자, 많이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자본가와 노동자는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국가나 도시, 혹은 집단이 분열된다면 그것은 두 계급 모두에게 해악을 끼치는 일이다. 이것이 악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로마는 어떻게 충돌을 막고, 세계를 호령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을까? 피렌체는 이 충돌 때문에 몰락해갔다지만, 로마는 이 악의 근원을 슬기롭게 피해 갔다피렌체는 계급 간의 싸움을 이어갔지만, 로마는 논쟁을 거쳐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피렌체는 한쪽의 압도적인 승리를 갈구했지만, 로마는 양보를 통해 양쪽의 승리를 도모했다. 로마에서 지배하려는 자는 타협할 줄 알았고,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자는 지배하려는 자와 명예를 함께 누리는 법을 알았다.

~ 중략 ~

하지만 피렌체에서는 평민이 승리하자 귀족은 정부의 요직에서 철저히 배제당했다. 따라서 만일 귀족이 다시 관직에 오르려면, 행동과 성격과 생활방식 모두 진짜 평민이 되거나, 적어도 평민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평민의 호의를 얻기 위해 가문의 문장과 이름을 바꾸는 귀족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귀족 안에 있던 관용의 정신과 군사적 미덕은 사라지고 말았고, 결코 한 번도 이것들을 가져본 적 없는 평민의 내면에서 다시 이것들을 살려낼 수도 없었다. 그 결과 피렌체는 점점 더 왜소해지고 비루해졌다. [pp. 415~417]

 

라고 얘기한다. 로마인과 달리 피렌체 사람은 서로 ‘지배 받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권력투쟁에 몰두한 결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몰락이라는 배드엔딩을 가져왔다. 어쩌면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인 김상근 교수도 후기(後記)에 해당하는 ‘피렌체를 떠나며’에서

 

권력을 잡은 자와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지배하려는 자의 욕심과 지배 받지 않으려는 자의 저항이 우리 사회가 지탱할 수 있는 비등점을 넘어, 일촉즉발의 위기에 몰려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은 이미 도를 넘었다. 제3의 집단임을 자처하는 정치가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오히려 두 집단의 갈등을 부추긴다. 두 집단을 갈라치면 칠수록 사회적 갈등은 양산되고, 정치가들에게 돌아갈 이익은 커진다. 분열되면 흥분하기 쉬운 것이 대중의 속성이고, 흥분한 대중은 이성을 잃고 진영 논리의 이분법에 빠져들게 된다. 진영 논리 속에서 정책과 미래 전망은 빛을 잃는다. 무엇을 이야기하는 지보다 어느 쪽에 속했는지가 사리판단의 기준이 된다. [pp. 420~421]

 

라고 얘기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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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도쿄 깊숙이 일본 1
진나이 히데노부 지음, 안천 옮김 / 효형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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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물의 도시’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의 도시’라고 하면 파리를 떠올리듯이, ‘물의 도시’라고 하면 대부분 베네치아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도쿄[東京]를 ‘물의 도시’라고 한다. 동양의 베네치아라는 중국의 ‘쑤저우[蘇州]’나 태국의 ‘방콕’처럼 수로(水路)가 발달한 곳이라면 몰라도 오늘날의 도쿄에서 ‘물의 도시’를 떠올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다.

 

이걸 뻔히 알면서도 저자가 자신 있게 도쿄를 ‘물의 도시’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지어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서울도 물의 도시라고 얘기한다.

 

서울의 고지도를 보면 뒤로 산과 언덕이 있는 이 도시에서 가운데를 흐르는 청계천에는 남쪽과 북쪽에서 많은 작은 하천이 흘러 들어 독특한 물의 도시를 이룬 모습이 떠오릅니다. 물을 축으로 한 서울의 도시 공간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제기한 것과 같은 관점에서 도쿄와 서울의 비교 연구가 진전되기를 기대합니다. [p. 7]

 

여기까지 보면, 저자가 사용하는 ‘물의 도시’의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수로(水路)나 운하가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는 ‘물의 도시’와는 다른 듯하다. 게다가 1장에서 도쿄의 스미다 강[隅田川]을 파리의 센 강 및 런던의 템스 강과 비교하면서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파리나 런던을 ‘물의 도시’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에도[江戶]와 메이지 시대의 도쿄[東京]는 ‘물의 도시’였다

 

<간에이 에도 전도(寬永江戶全圖)>의 일부

출처: <물의 도시 도쿄>, p. 23

 

에도가 ‘물의 도시’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철도와 노면 전차가 등장한 근대 도쿄는 땅의 도시로 변모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에도를 계승한 메이지 시대의 도쿄는 여전히 여러 강과 운하를 품은 물의 도시였다. 수운(水運)의 중요성 또한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근대에 들어 동력선이 생기면서 속도가 빨라지고 수송량도 늘었다.

~ 중략 ~

도쿄가 ‘물의 도시’로서의 성격을 잃은 것은 전후(戰後)로, 수상 교통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1964년 올림픽 무렵 이후다. [p. 65]

 

이렇게 ‘물의 도시’에 대한 기존 개념에 따라 ‘1장 스미다강’부터 ‘4장 베이 에어리어’까지 각각 에도[江戶] 문화의 정신적 원류(原流)인 스미다 강[隅田 川], 도쿄 중심부를 흐르는 니혼바시 강[日本橋 川], 스미다 강 건너 물의 지역인 고토[江東], 1980년대 ‘워터프런트(water front)1)’ 붐으로 각광받았다가 잊혀진 도쿄만[東京灣, Tokyo Bay] 일대를 각각 얘기한다.

 

에도.도쿄의 특징에 대해 내린 결론은 에도성=황거(皇居)의 바다 쪽에 자리한 시타마치[下町]는 수로와 하천이 그물망처럼 뻗어 있는 베네치아와 유사한 ‘물의 도시’고, 무사시노 대지 쪽의 야마노테[山手]는 기복이 심한 울퉁불퉁한 녹지를 중심으로 한 ‘전원 도시’라는 것이었다. [p. 167]

 

여기에서 그쳤으면 기존 논의의 반복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자는 ‘물의 도시’에 대한 개념을 확장한다.

 

에도 수계도(水系圖)

출처: <물의 도시 도쿄>, p. 290

 

물의 도시 에도.도쿄는 저지대에 발달한 베네치아, 암스테르담, 쑤저우, 방콕과 공동적으로 시타마치에 펼쳐지는 평탄한 운하 중심 도시일 뿐 아니라, 서쪽의 무사시노 대지에서도 울퉁불퉁한 지형을 절묘하게 읽어내어 다양한 수자원을 활용하면서 환경을 개조해 조성한,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역동적인 ‘3차원적 물의 도시’였음을 깨달았다.

에도성을 에워싼 내호(內濠, 안쪽 해자)와 외호(外濠, 바깥쪽 해자)도 울퉁불퉁한 지형을 활용하여 높낮이 차이를 살리며 축조한 계단형의 거대한 물의 공간 장치다. 또한 야마노테에 산재한 다이묘 저택 상당수가 경사면을 효과적으로 살려 건물을 배치하고, 용수를 끌어 만든 연못을 중심으로 에도 특유의 멋진 회유식(回遊式) 정원을 만든 것을 고려하면 새로운 ‘물의 도시 도쿄론’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pp. 167~168]

 

구체적으로 ‘5장 왕의 거주지와 해자’에서는 기복이 심한 울퉁불퉁한 지형을 살려서, 에도성과 그 주변을 감싸고 도는 내호(內濠)와 외호(外濠)를 계단식 논처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수면(水面)이 줄줄이 이어져 위에서 아래로, 시계 방향과 반(反)시계 방향으로 각각 물이 흐르는 순환 시스템을 가진 인공 수계(水系)를 형성되었다. ‘6장 야마노테’에서는 우에노[上野]의 산과 시노바즈노 연못[不忍池]은 산과 계곡이 번갈아 나타나는, 그래서 울퉁불퉁한 야마노테 지역의 ‘산자락’과 ‘물가’의 조합을 상징한다고 얘기한다. 이런 식으로 ‘물의 도시’에 대한 개념을 ‘수운(水運)’이 중심이 되는 도시에서 확장시켜 나간다. 어떻게 보면 우리 옛 선조들의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사고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가 이런 발상을 하게 된 것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1985년~1986년에 도쿄 임해부도심을 조성하다가 실패했지만, 세계 각지에서는 스페인의 빌바오처럼 물가 공간의 재생과 재개발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1980년대 말 이탈리아에서 나온, ‘테리토리오[영역]’이라는 개념의 영향이다. 이 ‘테리토리오’는 전원(田園)이 지닌 문화와 그 풍경을 존중하는, 즉 역사와 생태를 잇는 작업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구체적으로는 슬로푸드 운동, 지산지소(地産地消)2)에노가스트로노미아[와인+식문화], 농촌의 ‘문화적 경관(paesaggio culturale)3)’ 등을 통해 전원과 농촌에 잠재된 가능성을 살려내는 운동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도시의 영향을 받는 도시 인근의 전원이라고 생각되는데, 도시의 범위를 확대해서 해석하는 방식인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이 책에서 다루는 ‘도쿄’라는 도시의 범위도 확장되고,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특징인 물의 도시’라는 개념도 적용시킬 수 있게 된다. 발상의 전환인 셈이다.

 

발상을 전환하고 확장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물의 도시 도쿄를 연구해 보면 이렇게 지형 변화가 많고 다양한 수자원의 혜택을 받은 도시는 국내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뚜렷이 나타난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특징인 일본다운 물의 도시를 생각하는 것은, 한계를 드러내 온 도시 문명을 성찰하는 서구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p. 334]

 

즉, 단순히 수운(水運)의 여부가 아닌, 도시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물을 이용하고,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했는지도 감안한다는 점에서 뭔가 입체적이고 독특하게 ‘물의 도시’를 결정하자는 얘기인 셈이다.

 

1) 워터프론트(water front): 대상지를 하천 또는 해양과 연결시켜 유람선이나 요트 등 수상교통이 접근할 수 있는 교통의 통로로 이용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휴식 및 레저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도록 하는 수변(水邊)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일본의 지산지소(地産地消)는 한국의 신토불이(身土不二)처럼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운동이다.

3) 문화경관(文化景觀)은 자연에 인간의 영향이 가해져 이루어진 풍경을 말한다. 인간집단이 자연환경과 상호작용하여 형성한, 가시적인 물질문화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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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 서촌편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황정수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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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백악산 아래 경복궁 주변], [수성동 밑 옥인동 주변], [필운동과 사직동 부근]으로 나눠, 서촌(西村)과 그 주변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일제강점기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예술가들을 보면 표지화로 유명한 정현웅(鄭玄雄, 1911~1976)형제화가 청정(靑汀) 이여성(李如星, 1901~?)과 이쾌대(李快大, 1913~1965), 디아스포라(Diaspora)적 삶을 산 청계(靑谿) 정종여(鄭鍾汝, 1914~1984)조선어학회 회원으로 한글서예 발전을 위해 노력한 야자(也自) 이만규(李萬珪, 1889~1978)과 ‘각경체’를 만든 그의 둘째 딸 봄뫼 이각경(李珏卿, 1914~?) 등 월북한 이들을 제외하고도 나혜석, 이상범, 구본웅과 이상, 이중섭, 천경자 정도만 들어봤을 뿐 낯선 이들이 많다.

 

아니, 이름은 들어봤어도 대표작이나 작품세계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불꽃처럼 살다 간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혹은 신여성의 대표주자로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이 그녀가 남긴 작품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도리어 파리에서의 최린(崔麟)과의 불륜 그리고 이에 따른 이혼으로 대표되는, 불꽃처럼 살다간 그녀의 삶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로서의 나혜석은 어떨까?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 불리는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은 1909년 도쿄미술학교 양화과로 유학하여 유화를 공부했다. 이어 김관호(金觀鎬, 1890~1959)가 1911년, 유방(維邦) 김찬영(金瓚永, 1889~1960)이 1912년에 잇달아 같은 학교에 입학한다. 이들 세 사람은 도쿄미술학교에서 빼어난 성과를 보여 장차 한국의 서양화단을 짊어질 것이라 기대 받던 재목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귀국 후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서양화단을 떠나고 만다. 고희동은 처음에 시작했던 동양화로 회귀하고, 김관호는 교육에 전념했으며, 김찬영은 문학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문화재 수집에 열을 올린다.

~ 중략 ~

이들과 비교하면 나혜석의 삶은 두드러진다. 나혜석은 비슷한 시기에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후 한평생 거의 서양화를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았다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남편을 따라 유럽과 미국을 돌아다닐 때에도 그림을 그렸고, 세상을 등지고 산중에 있을 때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는 천생 화가였다.

당시는 여성이 사회적 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혜석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세상과 맞서며 여성으로서의 주체적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성격이 그를 세상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p. 30]

 

다시 말해 한국 근대 서양화단을 개척했다는 고희동(高羲東), 김관호(金觀鎬), 김찬영(金瓚永)은 귀국 후 곧 서양화단을 떠났기에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평생 화가로 사는 정월 나혜석과 설초(雪蕉) 이종우(李鍾禹, 1899~1981)가 전정한 의미의 한국 최초 서양화가라 할 만하다. [p. 261]

 

불행히도 진정한 그녀의 대표작을 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1933년 화실의 화재로 그녀의 작품 대부분이 타버려서 현재 전하는 그녀의 작품은 10여 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해지는 것도 조선미술전람회 등에 출품했던 작품들의 도판에 비교하면 수준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하니……. 이것도 그녀의 예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데 한 몫 하지 않았을까?

 

나혜석, <봉황성의 남문>(1923)

출처: 황정수, “나혜석은 죽기 전 왜 서촌으로 왔을까”, <오마이뉴스> 2018.11.08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485300&SRS_CD=0000011894)

 

나혜석, <선죽교>(1933)

출처: 황정수, “나혜석은 죽기 전 왜 서촌으로 왔을까”, <오마이뉴스> 2018.11.08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485300&SRS_CD=0000011894)

 

하나 덧붙이자면,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이들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친일(親日)’논란이다. 이 책에서 ‘친일’이 직접 언급된 이로는 친일파 노익형이 창간한 월간 <신시대>에 노골적으로 군국주의를 선동하는 “멍텅구리”를 연재했던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1899~1978)일장기 말소사건(1936)으로 구속되었지만, 이후 국방헌금을 모금하기 위한 국책 기획전에 적극 참가하고, <매일신보>에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며 삽화 “나팔수”(1943)를 기고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저지른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과 그의 큰아들 이건영(李建英, 1922~?)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한 ‘결전미술전람회(決戰美術展覽會)’에 참여하고 태평양전쟁 출정자와 입영자에게 증정할 <수호관음불상> 1,000매를 제작한 청계(靑谿) 정종여(鄭鍾汝, 1914~1984)가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었지만 이 책에서는 친일 사실이 언급되지 않은, 이상(李箱)의 절친 서산(西山) 구본웅(具本雄, 1906~1952)야마다 신이치[山田 新一]이 주도한 친일미술단체인 단광회(丹光會) 소속의 운봉(雲峯) 심형구(沈亨求, 1908~1962)석정(石鼎) 이봉상(李鳳商, 1916~1970)도 있다.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는 인물을 나열식으로 소개하는, 다소 인명사전 같은 분위기의 책이다. 그래서 인물 연구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체로 인물 연구를 하다 보면 연구 대상에 대한 연구자의 애정이 커져서 연구 대상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하기 쉽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해도 연구 대상을 어느 정도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노수현은 바위산을 중심으로 나무와 수풀을 점묘로 그리는 산수화가 주특기였지만 동양화의 유려한 필법을 바탕으로 삽화나 만화도 잘 그렸다. 삽화와 만화가 당시 노수현이 추구하는 미술의 본령은 아니었으나, 근대 삽화와 만화 발전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수현은 일제 말기 활동으로 친일 미술인이었다는 시비가 있지만 한국 근대미술사의 일부를 구성하는 중요한 작가다 [p. 98]

 

그래서 저자가 심산 노수현에 대한 평가에서 보듯이 친일 행위와 예술 작품과 활동을 구분해서 평가하자는 입장에 공감이 가면서도 그 밑바닥에 깔린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에 조금 난감하기도 하다.

물론 알고 있다. 100%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미술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일제 강점기의 낯선 예술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삶을, 손이 가는 대로 순서에 상관없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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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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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휴머노이드의 구분이 의미 있을까?

 

저자는 <작별인사>가 개작(改作)을 거치면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서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두 개의 화두(話頭)는 서로 배제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나는 서로 섞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휴먼매터스 랩에서 휴먼매터스의 창립 멤버인 최진수박사의 아들로 살아오던 ‘철이’는 비 오는 날 아빠에게 우산을 가져다 주러 나갔다가 미등록 휴머노이드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다. 그곳에서 철이는 스스로 기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기계파’ 휴머노이드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처럼 살아가는 최신형의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인 것처럼 행동한다.

 

처음엔 그저 그들을 흉내냄으로써 안전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점차 그들과 나 사이에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들의 관절은 연골과 윤활액 대신 인공적으로 합성한 유기화학 제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뇌에 뉴런 대신 회로가 있다는 것 등의 차이들이 있겠지만, 이미 많은 인간이 뇌에 칩을 박아 컴퓨터와 연결하거나, 잘린 팔다리 대신 인공 수족을 장착하여 높은 곳에 쉽게 뛰어오르거나 무거운 것을 가볍게 들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pp. 68~69]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서부터가 기계인 걸까? 육체의 몇 %까지 인공 기기로 교체해야 기계일까? ‘뇌’만 남아있으면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의 고유한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육체의 100%가 기계로 되어 있어도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소설 <작별인사>에 배경이 되는 시대라면 어디까지 ‘인간’이라고. 또 어디까지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가 '나'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중략 ~

예를 들어 새로운 몸을 가지고 다시 태어날 민이는 예전의 그 민이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어디까지 ‘나’일까? 팔도 교체할 수 있고, 다리도 교체할 수 있고, 몸의 모든 부품을 교체할 수 있다면, 그 부분들은 '나'가 아닌 거잖아. 그게 없어도 나는 나일까?

그렇지. 뇌가 그 경계일 거야. 의식은 거기서 생겨나니까.” [pp. 200~201]

 

 

나를 '나'로 정의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소설 속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알고, 인간처럼 살아가는 최신형의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는 겉보기에는 인간과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스스로 기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기계파’ 휴머노이드는 수용소에서 자신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개체의 팔을 뽑아 버린다. 분명히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수단이기는 하다. 하지만 휴머노이드가 아닌 인간일 경우 이런 구분방법은 치명적인 부상이 된다. 따라서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사실,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하는 ‘기계’, 아니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기계’를 그리는 작품은 이 작품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인간다움’에 대해 논의하는 작품으로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1920~1992)의 단편 <바이센테니얼 맨(The Bicentennial Man)>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와는 다소 다르지만 외관상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리플리컨트를 다루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도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네가 스스로 인간이라고 믿는 증거 같은 거 말야.”

아, 음악. 음악이 있어. 나는 음악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여. 정말 말 그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아. 그리고 보니 수용소에 잡혀올 때도 소광장에서 하이든을 듣고 있었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요. 마음은 그냥 안에 있어요.”

민이가 내 말을 잘랐다.

이런 걸 비유라고 하는 거야. 마음은 물론 내 안에 있지만 흔들리고 무너지는 거야. 나는 집에서 들었던 아름다운 음악들을 떠올리면서 수용소의 끔찍한 날들을 견뎠어. 내가 기계라면 왜 음악 같은 것을 듣고 감정이 변할까? 음악은 기계에겐 아무 의미도 정보도 없는 소음일 뿐인데나는 시를 읽으며 감탄하고 영화를 보다가 괴로워하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19세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안타까워하면서 읽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인간이 아니야 [p. 123]

 

여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나를 '나'로 정의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다. 예전에 화제가 되었던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사태를 기억하는가? 가수 타블로가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한 ‘대니얼 선웅 리(Daniel Seon Woong Lee)’임을 증명하는 여러 증거들을 믿지 않는 ‘타진요’ 같은 이들이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화 <트루먼쇼>의 트루먼처럼 거짓으로 꾸며진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

 

 

영생(永生), 그 덧없음에 대하여

 

미등록 휴머노이드라는 이유로 잡혀간 수용소에서 ‘철이’는 복제인간 ‘선이’와 버림받은 휴머노이드 ‘민이’를 만난다. 그들은 철이를 만나기 전에 이미 탈출을 시도하다가 민이의 왼쪽 팔목만 로봇 개에게 잃고 다시 잡혀왔다. 수용소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민병대의 습격으로 수용소가 혼란해지자 철이, 선이, 민이는 탈출한다. 휴먼매터스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민이는 살해되고, 철이와 선이는 휴머노이드 재활용 업체를 운영하는 휴머노이드 달마를 만난다. 철이는 달마를 통해 자신이 휴머노이드임을 인지하고,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영생(永生)할 수 있음도 알게 된다.

 

나는 휴먼매터스 밖으로 나와 진짜 세상을 보았다. 민이 같은 휴머노이드가 존재하는 걸 이미 알아버렸고, 선이처럼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클론과 친구가 되었다. 휴먼매터스는 내 피난처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혼란에 큰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언제나 문제의 일부였다. 아빠가 나를 원하는 것은 아마도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진행해온 자랑스러운 프로젝트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그가 정확히 나에게서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나를 통해 세상의 고통을 줄이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휴머노이드를 만드는 게 정말 그 휴머노이드를 위해서일까? 인간에게 필요한 장기를 생산하기 위해 선이와 같은 클론을 배양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도구로만 여기고 그것의 활용을 고민한다. 나의 ‘용도’는 정확히 무엇일까? 그것을 분명히 알기 전에는 휴먼매터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pp. 212~213]

 

하지만 누구도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영생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개별성이 보존된다면, 레이먼드 F. 존스(Raymond F. Jones, 1915~1994)의SF소설 <합성 뇌의 반란(The Cybernetic Brains)>에서 ‘뇌’가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영생(永生)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름만 영생(永生)이지, 사실상 종신노예가 아닌가.

 

나의 의식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즐기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갔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단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p. 276]

 

영생(永生)은 아니지만 판타지 소설에서 만 년의 수명을 가졌다고 설정된 드래곤의 경우, 긴 수명을 무게에 짓눌려 다른 생명체의 모습으로 유희를 떠나거나 장시간의 수면에 든다. 육신이 있는 존재도 그러할진대, 육체 없이 의식만 있는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 아닐까? 육체가 없다면 쉴 수도 없을 텐데……. 여기에 망각도 할 수 없다면…….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드래곤 ‘크라드메서’처럼 미치거나 자살해버리지 않을까?

 

하지만,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 1917~2008)의 SF소설 <유년기의 끝(Childhood’s End)>를 보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어 영생하는 방식은 개별성이나 독자성을 점차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된다. 그 소설에서 인류는 점차 개개의 독자성을 상실하고, 기존의 인류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완전히 다른 새로운 종(種)으로 변한 끝에 ‘오버마인드’라고 부르는 하나의 거대한 정신체의 일부로 통합되어 버린다.

 

이 소설, <작별인사>에서는 인간도, 휴머노이드도 대부분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어 영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제목 ‘작별인사’는 개별성 혹은 독자성과의 작별인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 그리고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라는 종(種)이 개체성을 상실하여 ‘종(種)’으로서 소멸해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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