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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성당, 빛이 머무는 곳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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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양식이 형성되기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형성, 발달에는 ‘로마다운’이라는 뜻을 가진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게르만족의 로마에 대한 로망이 작용하고 있다. 이런 로망이 생기게 된 것에는 그들이 로마 제국을 문명의 상징으로 간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때 우리의 부모 세대가 도자기조차 미제를 원해 코넬사의 강화유리 제품을 새롭고 좋은 도자기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래서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을 때, 내심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로마’라는 객관적인 문명의 기준이 사라졌으니까.

아마도 이런 기억들이 게르만족과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슬라브족의 심층심리에 새겨져서 그들이 각각 제2의 로마[신성로마제국], 제3의 로마를 주장한 것이 아닐까?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게르만족들은 각자 자기방식대로 로마 제국에 정착했다. 그 중 하나인 프랑크족의 프랑크 왕국에서 재미난 일이 발생했다. 후한(後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조조(曹操)가 선양(禪讓)받아 위(魏)나라를 세운 것처럼, 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였던 소(小)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로부터 선양(禪讓)받아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했던 것이다. 선양이라는 이름의 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소(小) 피핀은 로마 교황의 권위를 빌려 피핀 3세로 즉위했다. 그렇기에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요청을 받자,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Pippinus Ⅲ, 재위 751~768)와 그 뒤를 이은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재위 768~814)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자리잡은 롬바르디아 왕국(Regnum Langobardorum, 568~774)을 공략, 프랑크 왕국에 편입시켰다. 이는 건축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롬바르디아 왕국에서 정리, 발전시키고 있던, 로마 건축과 비잔틴 건축의 기술을 서유럽 전체로 퍼트리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탄생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시공간적으로 단절된 로마 건축과 비잔틴 건축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어떻게 10세기 프랑크 왕국에 나타났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 궁금증을 풀어줄 열쇠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게르만족의 일파로 알프스 북쪽에 살다가 568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자리를 잡은 롬바르디아 왕국입니다.

~ 중략 ~

6~8세기 롬바르디아 왕국에서 발생한 건축을 롬바르디아 건축이라고 부르는데, 왕국은 국가차원에서 건축 장인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호 육성하는 전통이 있어 높은 수준의 건축 기술, 특히 조적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롬바르디아 건축의 조적술은 로마 제국보다는 비잔틴 제국의 조적술에 가까웠습니다.

콘크리트로 중심 벽체를 만들고 그 외벽에 높이가 낮은 벽돌을 쌓는 방식의 로마 제국의 조적술은 강도는 좋았지만, 작업이 복잡하고 벽체가 두꺼워져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반면에 비잔틴 제국의 조적술을 오직 조적으로만 벽체를 만드는 방식으로, 벽돌 하나의 높이가 높고 콘크리트 작업이 없어서 공사가 단순하고 소요 시간이 적었습니다. 롬바르디아 왕국은 이탈리아에서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하면서 제국의 조적술을 배우고 정리해 발전시켰습니다. [pp. 42~43]


덕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싹도 카를루스 대제 시기에 발생했다. 그는 아헨 왕궁 성당(Palatine Chapel in Aachen)을 건설했는데, 로마 제국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장방형 평면의 성당)을 따르면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산비탈레 성당(Basilica di San Vitale)의 팔각형 평면과 복층 갤러리를 수용, ‘프레-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불리는 로마네스크 성당의 맹아(萌芽)를 보여주었다.


로마네스크 성당의 구조와 명칭

 

출처: <로마네스크 성당>, p. 37


 

각 국가별 로마네스크 성당  


로마네스크 성당의 특징으로는 창문과 문, 아케이드에 로마식 반원형 아치를 많이 사용한 점, 건물 내부를 떠받치기 위하여 원통형 볼트와 교차 볼트를 사용한 점, 또 아치 때문에 수평으로 발생하는 힘에 견딜 수 있도록 기둥과 벽을 두껍게 구축하는 반면 창문을 되도록 작게 만들었다는 점 등이 있다.

이런 로마네스크 양식은 십자군이나 성지 순례에 의해 여러 양식이 교류하면서 발전했고, 특히 수도회의 융성과 활약으로 여러 지역에 전파되었다.


야고보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낸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의 무덤은 순례의 중심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지중해의 머나먼 뱃길 끝 예루살렘보다도, 알프스의 높은 산 너머 로마보다도, 지척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서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순례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이미 네 갈래의 고정적인 순례길이 생겨났고, 이 순례길들이 지나는 곳에는 크고 작은 도시들이 형성되었으며, 그 곳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바탕으로 하는 순례 성당이 지어졌습니다. [p.101]



프랑스의 로마네스크는 ‘보편주의’와 ‘지역주의’라는 두 갈래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보편주의는  ‘몽샐미셸 수도원 성당(Abbaye du Mont-Saint-Michel)’으로 대표되는 북쪽의 노르망디 지방의 로마네스크와 ‘제 2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Ⅱ)’으로 대표되는 남쪽의 부르고뉴 지방의 로마네스크로 나뉜다. 이러한 프랑스 남부 초기 로마네스크 성당은 11세기 전반부에 그 형식이 완성되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전파되었다. 이런 보편주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성기는 노르망디 지방의 ‘캉의 생테티엔 수도원 성당(Abbaye Saint-Etienne de Caen)’와 부르고뉴 지방의 ‘제 3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Ⅲ)’로 대표된다.

지역주의로는 프랑스 남서부 지역의 성당이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홀(hall) 교회 양식의 ‘생사뱅 수도원 성당(Abbaye de Saint-Savin-sur-Gartempe)’과 네이브(nave)1)의 베이(bay)2)마다 천장이 석조 돔으로 올려진 돔(dome) 교회 양식의 ‘앙굴렘 대성당(Cathedrale Saint-Pierre d’Angouleme)’이 있다.



독일 북부의 초기 로마네스크는 보통 ‘오토 건축’이라고 불린다. 웨스트워크 자리에 이스트엔트의 성가대석과 앱스의 구성이 한 번 더 들어가는 ‘더블 엔더’가 특징인 이 양식은 작센 지역의 ‘힐데스하임의 성 미카엘 성당(Michaeliskirche in Hildesheim)’과 라인란트 하류 지역의 ‘트리어 대성당(Trierer Dom)’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지역주의 성향의 오토 건축은 ‘제1 슈파이어 대성당(Speyerer Dom Ⅰ)’ 의 완공으로 보편주의로 성장했지만, 독일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것은 ‘제2 슈파이어 대성당(Speyerer Dom Ⅱ)’이다.


국가 차원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이탈리아를 두고 서로 경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차원에서는 보편 교회인 로마와 가까운 프랑스 교회와 독일의 지역 교회가 긴장 관계에 놓였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이러한 대치는 성당 건축에서도 드러났는데, 제3 클뤼니 성당과 제2 슈파이어 성당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제3 클뤼니 성당은 보편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종교적인 면이 강했던 반면, 제2 슈파이어 성당은 지역 교회 차원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많이 띠었습니다. 하지만 두 성당 사이에 공통점도 있었는데 그것은 각각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종합한 것과 그 결과로 모두 대형화를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제2 슈파이어 성당은 독일 로마네스크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으로 독일 로마네스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pp. 173~177]


덧붙이자면,


독일의 로마네스크는 프랑스 로마네스크가 보여준 입체적이고 복잡한 구조와는 달리 평면적이고 단순하며 추상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프랑스의 로마네스크가 수직성을 강조하면서 국가보다는 교회의 우월성을 나타냈다면 독일의 로마네스크는 수직성과 수평성을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와 함께 표현하려고 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p. 180]



영국의 로마네스크 성당을 대표하는 것은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과 전성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더럼 대성당(Durham Cathedral)’다. 이들 영국 로마네스크 성당에는 기하학적이고 장식 위주의 ‘영국 로마네스크 양식’의 독특함이 묻어나 있다.

첫째, 수평성을 선호하는 영국의 정서가 반영되어 슈베(chevet)3)가 동쪽으로 길게 확장되어 있다.

둘째, 네이브도 확장되어 있다.

셋째, 로마 벽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회반죽 벽돌 쌓기를 통해 건물의 무게감 있는 외관을 강조한다.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대형화란 천장고를 높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나 영국에서는 성당의 길이를 확장하는 것을 선호한 것입니다.

영국 로마네스크는 건물의 무게감 있는 외관을 강조한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역할을 한 것은 로마 벽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회반죽 벽돌 쌓기입니다. 프랑스는 석재의 물질성과 구조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수직성을 추구했지만, 영국은 벽돌을 재료로 수평성을 유지했습니다. [p. 197]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 성당은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 등의 전통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보편주의가 아닌 지역주의에 속한다. 대표적인 성당으로는 롬바르디아 지역의 ‘성 암브로시오 바실리카(Basilica de Sant’Ambrogio)’, 토스카나 지역의 ‘산미니아토 바실리카(Basilica di San Miniato al Monte)’가 있다.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는 알프스 이북의 로마네스크에 비해서 로마 고전주의와의 연속성이 훨씬 깊습니다.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이 로마 고전주의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네이브월을 구성하는 아치, 오더, 볼트 등의 요소들과 바실리카에서 발전한 라틴 크로스 평면 역시 로마 고전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는 로마네스크의 고전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p. 210]


또한,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교회와 지중해의 전통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첫 번째 특징을 이룬 것입니다.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두 번째 특징은 지역주의입니다. 롬바르디아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지역, 토스카나의 중부 지역, 그리고 시칠리아가 주도한 남부 지역이 각기 고유한 특징을 보입니다. 이러한 두 요인으로 인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는 초기와 전성기라는 시대적 구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pp. 205~210]


중세 유럽이 ‘라틴어’라는 보편 언어와 ‘그리스도교’라는 보편 종교로 하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달과정에서 보듯이 각 국가별로 지역주의의 싹이 드러난 것이 훗날 국민국가로의 변화를 암시하는 듯해서 흥미로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이 책에서 소개된 성당들을 통해 로마네스크 양식, 그리고 로마네스크 성당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중에 유럽에 갈 기회가 있으면 좀 더 보고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에 있다는 3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인천 답동성당, 전주 전동성당)을 방문하더라도 예전에 방문해서 보다 느꼈던 것과 다른 무엇인가를 더 보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1) 네이브(nave, 身廊): 중랑(中廊)이라고도 한다.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의 내부 중앙 부분으로, 성당에서 가장 넓은 부분이고 일반적으로 예배자를 위한 장소로 사용된다.


2) 베이(bay): 네 기둥으로 구획되는 평면의 한 단위를 의미한다.


3) 슈베(chevet): 대성당에서 본당 동쪽 끝의 반원형 부분, 두부(頭部)라고도 번역된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祭臺)와 그 근처의 성가대석을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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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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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양식, 거룩한 신비의 빛]은 어떻게 구성되었나? 


이 책의 목차를 보면, 고딕 양식을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구조의 발달 단계에 따라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초기 고딕’, ‘전성기 고딕’, ‘후기 고딕’으로 나누고, 국가에 따라 ‘영국 고딕’, ‘독일 고딕’, ‘이탈리아 고딕’으로 나눈 것은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준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하면 이 책은 프랑스[초기, 전성기, 후기], 영국, 독일, 이탈리아 유럽 4개국의 고딕 양식을 국가별로 대표적인 성당들을 사례로 들어 소개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딕 양식이란?


‘로마네스크’가 ‘로마다운’이란 뜻이었다면, ‘고딕’은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을 가리키는 ‘고트인의’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 중략 ~

‘고딕’이라는 이름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이 양식을 두고 게르만족의 세련되지 못하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경멸하면서 붙인 것인데, 계속 사용하면서 후대에 공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p. 8]


마치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는 ‘中’國이고, 자신들의 문화는 ‘華’라고 자부하면서 주변 국가와 문화를 ‘夷’라고 무시하는 것처럼, ‘고딕’이라는 명칭도 이탈리아인의 뒤틀린 자존심에서 붙여진 셈이다.


그렇다면 이 고딕 양식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정치적으로는 왕령지(王領地)를 실질적인 왕의 땅으로 만든 루이 6세(재위 1108~1137) 이후, 카페 왕조는 왕권 강화를 시작하여 중앙집권적 군주 국가로의 변화가 진행되었다. 종교적으로는 ‘서임권 분쟁’으로 유명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재위 1073~1085)의 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세속권력으로부터 성직자 임명권을 회수하여 교황권을 강화했다. 지리적으로는 카페 왕조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던 일 드 프랑스가 ‘몽샐미셸 수도원 성당(Abbaye du Mont-Saint-Michel)’으로 대표되는 북쪽의 노르망디와 ‘제 2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Ⅱ)’으로 대표되는 남쪽의 부르고뉴 프랑슈 콩테(이하 ‘부르고뉴’) 사이에 있어 노르망디의 일체성과 부르고뉴의 대형화를 조화한, 보편주의 건축을 태동시킬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요소의 교집합이 루이 6세와 루이 7세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생드니 수도원장인 쉬제(Suger, 1081~1151)였다. 그는 수직화와 경량화라는 모순의 갈등을 해결할 새로운 건축 양식, 즉 고딕 양식을 내놓았다. 최초의 고딕 양식 성당이라 할 수 있는 생드니 대성당(Cathedrale royale de Saint-Denis)에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전성기 고딕 성당의 요소


고딕 양식의 사상적 배경이 된 스콜라철학은 사유의 논리를 타인도 알 수 있는 명료성[명료화 원리]을 추구하고, 대론[~라고 생각된다. 正]과 반론[그러나 반대로. 反] 그리고 대답[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고 답한다. 合]으로 이어지는 논증 방식[일치(concordantia)의 원리]을 따른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건축에 있어서 이전까지 사용해오던 두 요소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면 그 중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연구를 통하여 두 요소가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파사드의 창을 예로 들면, 전통적인 아치창은 긍정(대론)이고, 생드니 대성당에 나타난 아치창 위의 장미창은 부정(반론)입니다. 문제의 해결(대답)은 위그 리브르지에 건축가가 생니케즈 성당에서 장치창 안에 아치창을 통합함으로써 이루어냅니다.

고딕 성당의 수직화와 경량화라는 상호 모순의 두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고딕 건축가들은 유기적인 구조 체계를 연구했고, 결국 포인티드 아치, 리브 그로인 볼트, 플라잉 버트레스 등의 구조 부재들을 고안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해결 방식이 일치성의 원리라는 스콜라철학의 습성이 확산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pp. 104~105]


저자는 고딕 성당 양식의 싹을 틔운 쉬제가


하느님의 집인 성당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곧 창조주께서 첫날 만드신 빛으로 성당을 밝히고 그 안에서 둘째 날, 셋째 날의 피조물들로 가득 채우는 것이 그의 꿈이었을 것입니다. [p. 53]


라고 얘기한다. 쉬제의 바램 때문인지 고딕 성당의 벽체는 높고 얇게, 창은 크고 넓게 설계되었고 이로 인해 실내에 들어오는 빛의 양이 충분히 증가했다. 덕분에 성당의 맑은 투명창을 오늘날 고딕 성당하면 떠오르는 요소 가운데 하나인 색유리창[스테인드글라스]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모든 공간적 변화는 수직성의 원천인 포인티드 아치[Pointed Arch, 첨두(尖頭)아치)], 천장에 설치되어 하중을 안정적으로 분산하는 리브 그로인 볼트[Rib Groin Vault, 늑재 교차 궁륭(肋材 交差 穹窿)], 건물 외벽에서 팽창하는 힘을 지탱하고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는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 공중 버팀벽] 덕분에 가능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건축 기술을 고딕 성당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핵심이라고 한다.


고딕성당의 구조


출처: <고딕성당>, p. 92



각국의 고딕 성당


프랑스 고딕은 건축 구조의 발달 단계에 따라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초기 고딕, 전성기 고딕, 후기 고딕으로 나뉜다. 초기 고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수직성을 지향하는 생드니 대성당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Nortre-Dame de Paris), 수직성과 더불어 고전적 비례를 위한 수평성도 함께 고려하는 랑 대성당(Cathedrale Nortre-Dame de Laon)이 대표적이다. 이 두 흐름은 전성기 고딕에도 이어졌는데, 수평성도 고려하는 부르주 대성당(Cathedrale Saint-Etienne de Bourges)과 수직성을 지향하는 샤르트르 대성당(Cathedrale Nortre-Dame de Chartres)이 대표적이다. 다만, 프랑스 고딕의 주류는 수직성을 강조하는 쪽이었고, 랭스 대성당(Cathedrale Nortre-Dame de Reims)에서 절정을 이루며 프랑스 고딕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된다. 고딕 양식의 쇠퇴기인 후기 고딕은 빛의 밝음 그 자체만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13세기 중반에 시작된 레요낭(Rayonnant) 양식과 15세기에 등장한 플랑부아양(Flamboyant) 양식으로 대표된다. 생트샤펠(Sainte-Chapelle)과 트루아의 성 우르바노 바실리카(Basilique Saint-Urbain de Troyes)로 대표되는 레요냥 양식이 구조가 단순해진 성당의 전체 조도를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서 최대한으로 넓힌 창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면, 루앙의 생마클루 성당(Eglise Saint-Maclou de Rouen)으로 대표되는 플랑부아양 양식은 처음부터 장식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한다.



영국은 노르망디를 통해 프랑스 전성기 고딕 양식을 수입했지만 지역주의적 독립성을 가미하여 초기 영국 양식(Early English style), 장식 양식(Decorated style, 곡선 중심), 수직 양식(Perpenddicular style, 직선 중심)으로 분화되었다. 초기 영국 양식은 수평성과 기하장식이라는 영국 고딕 성당의 전형을 이룬 켄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장식 양식은 레요냥 양식과 곡선 양식이 조화를 이룬 요크 민스터(York Minster)에서, 수직 양식은 글로스터 대성당(Gloucester Cathedral)에서 각각 시작되었다.



중앙집권이 이루어진 프랑스와 달리 지방분권이 강한 독일


프랑스 고딕건축의 수입에 철저히 의존하는 경향과 독일만의 독자적 양식을 고집하는 경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두 양상이 하나로 합쳐졌지만, 독일에서는 각각의 양식을 이루면서 독일 고딕만의 특색을 가졌습니다. [p. 207]


따라서


프랑스의 고딕 보편주의를 따른 스트라스부르 대성당과 쾰른 대성당을 독일 고딕의 전성기로 본다면, 이후의 독일 고딕은 지역주의가 강세를 이루어 다양한 형태로 분화됩니다. [p. 215]



완성된 고딕 양식이 전해진 영국이나 독일과는 달리 이탈리아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짙은 영향 아래 고딕 요소가 첨가되는 정도에 머무른다.


보편적인 프랑스 고딕 성당의 구조 원리를 배워서 이탈리아에 고딕 성당을 세운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장인이 프랑스의 고딕 성당을 보고 스스로 학습하여 이탈리아 고유의 고전적 그리스도교 전통에 입각하여 재해석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고딕 양식은 전례가 없는 고유한 형태로, 이탈리아 고딕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탈리아 고딕을 보면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성당, 독일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과 쾰른 대성당처럼 프랑스의 전성기 고딕을 거쳐 완성된 고딕 양식이 수입된 사례는 없고, 매우 배타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믿기지 않겠지만, 골목마다 성당으로 가득 찬 로마에서 고딕 성당은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이 유일합니다. [pp. 229~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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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18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여행 때 만난 뾰족한 첨탑이 특징인 이런 건축 양식이 고딕임을 알았지만 이렇게 깊은 지식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아요.

KOEMMA 2024-03-22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시우행님, 격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한 달의 후쿠오카 - 행복의 언덕에서 만난 청춘, 미식 그리고 일본 문화 이야기 일본에서 한 달 살기 시리즈 5
오다윤 지음 / 세나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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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의 후쿠오카>는 저자가 한 달, 정확히는 32일 동안의 여정을 일기 쓰듯이 정리하고, 매일의 일정 마지막에 방문한 곳의 영업시간, 입장료, 주소 등에 대한 정보를 간략하게 곁들인 책이다.

 

그렇다면 후쿠오카는 어떤 도시일까?

 

후쿠오카는 도시의 편리성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콤팩트 도시’이면서 조금만 외곽을 나가도 천혜의 자연, 아름다운 해변과 산, 유수의 온천이 있다. 후쿠오카는 알면 알수록 더욱 궁금해지는우리를 ‘먹고 즐기고 움직이게 하는 도시’입니다. [p. 5]

 

일본의 다른 도시와 비교하자면,

 

하카타역에서 내려 마주한 후쿠오카는 도쿄보다는 소박하지만오사카나 교토가 있는 간사이 지역과는 다른 또 다른 느낌의 번화가면서 일본 소도시보다는 활기찬독특한 매력을 지닌 도시였다. [p. 14]

 

라고 한다. 특히 일본에서 ‘미식(美食)의 도시라고 하면 흔히 오사카[大阪]을 떠올리는데, 후쿠오카도 그에 못지 않는, ‘미식의 도시’라는 자부심이 강한 곳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일본의 다른 번화가와 다른 후쿠오카 번화가의 풍경이 형성된 것이 아닐까?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상점마다 빽빽이 놓여 있는 후쿠오카의 명물 멘타이코(명란젓), 아마오우(후쿠오카의 명물 딸기) 관련 상품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명품 브랜드나 의류 매장이 즐비한 다른 일본 번화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p. 14]

 

재미있게도 내가 후쿠오카를 방문했을 때는 그런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후쿠오카가 나의 첫 해외 당일치기 여행지였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내가 당일치기를 선택했을 만큼 후쿠오카가 한국인에 있어서 심리적 거리가 짧은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단 1시간. 비행기를 타면 후쿠오카가 얼마나 한국에서 가까운 곳인지 실감하게 된다. [p. 13]

 

어쨌든, 나는 ‘당일치기’라는 초단기(超短期)로 둘러봤기에, ‘한달 살기’라는 장기(長期)로 즐기고 느낀 저자의 후쿠오카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래서 책을 받자마자 내가 방문했던 스미요시 신사[住吉 神社]캐널시티 하카타(Canal City Hakata)케고 신사[警固 神社] 등을 소개한 페이지를 먼저 펼쳐보았다.

 

스미요시 신사[住吉 神社]

조즈야[手水舍]

본전[本殿]

에마괘[繪馬掛]


3일 에비스 신사[三日 惠比須 神社]

에비스[惠比須] 신상(神像)

 

스미요시 신사에서는 신사 내에 있는 ‘3일 에비스 신사[三日 惠比須 神社]’ 사진을 보며 엉뚱한 곳을 방문한 줄 알고 순간 당황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칠성신을 모신 칠성각(七星閣)이나 산신이나 가람신을 모신 산신각(山神閣) 등이 하나의 사찰에 수용된 것처럼, 신사[神社]도 세쓰샤[社]와 마쓰샤[末社]라는 형태로 표석(標石)까지 두고 여러 신을 모신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에비스[惠比須]는 일본의 칠복신(七福神)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 고유의 신으로 오른손에 낚싯대를, 왼쪽으로는 도미를 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어업의 신이었다가 상업의 신도 겸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미요시 신사 본전 옆에 ‘고대 스모 선수 동상’이 있다는데, 나는 그것을 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신사나 절에 기원할 때나 기원한 소원이 이루어져 사례를 할 경우에 봉납하는 말의 그림이 그려진, 5각형 모양의 나무판, 즉 에마[繪馬]를 걸어놓은 에마괘[繪馬掛]가 인상적이었던 것을 보면, 관심사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른가 보다.

 

캐널시티 하카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 “Fuku/Luck, Fuku=Luck, Matrix”

 

한국의 코엑스 같은 느낌의 캐널시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분수 쇼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 “Fuku/Luck, Fuku=Luck, Matrix”였다. 솔직히 백남준의 작품은 알고 가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가기 쉬운 곳에 있어서 저자가 언급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곳의 분수 쇼 ‘댄싱 워터’보다 저녁 시간의 3D 프로젝션 매핑쇼인 ‘캐널 아쿠아 파노라마’가 유명하다고 한다. 아쉽게도 당일 치기 여행이라 시간 관계상 낮의 분수 쇼만 보아야 했다. 사진으로 표현하기가 애매했는데, 다행히 저자가

 

캐널시티 건물 전체에 신나는 록 음악이 쾅쾅 울리면서 음악에 맞춰 맨 아래층의 분수가 건물의 2층, 3층 높이까지 치솟았다. 이리저리 방향도 바꾸고 물줄기가 세졌다가 약해졌다가 현란했다. 매시간 무료로 볼 수 있는 분수 쇼라고 하기에는 퀄리티가 높았다. [p. 88]

 

라고 실감나게 설명했다.

 

분수 쇼(댄싱 워터)

 

당일치기 여행이었기에 나에게 허용된 식사는 점심과 저녁뿐이었다. 점심은 캐널시티에 들린 김에 이치란[一蘭] 라멘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테이크 아웃 전문점 같은 분위기였다.

 

캐널 시티의 이치란[一蘭] 라멘

 

그래서 지나쳤는데,

 

키오스크에서 먼저 결제를 한 뒤 5분 정도 지났을까? 종업원이 나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냈다. 마침 이번에도 운 좋게 딱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칸막이가 쳐진 독서실 같은 좌석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종지에 면 삶기 정도, 국물 진함 정도, 매운 정도, 마늘, 파, 차슈, 면 양 등을 체크한 뒤 직원에게 건넸다. 이렇게 내 취향에 맞게 이것저것 고를 수 있다는 점이 이치란 만의 색다른 재미이면서 자신의 입맛에 가장 잘 맞는 라멘을 먹을 수 있기에 이치란 라멘이 누구에게나 사랑 받게 되지 않았을까? [p. 190]

 

라는 저자의 설명을 보니, 혹시 그 때 내가 허기가 져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섣부르게 판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저자가 일본 3대 라멘이라는 이치란[一蘭]과 잇코샤[一幸舍] 등에서 돈코츠 라멘을, 다이치노 우동[大地のうどん]에서 야채 튀김 붓카케 우동을, 텐진호르몬에서 호르몬[곱창] 정식을, 카이센동 히노데[海鮮 日の出]의 뎃카동[鐵火], 커리 혼포 모지코[伽 本 門司港]에서 야끼카레[燒きカレ-] 등 일본에 가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일본 음식을 신나게 맛보는 모습에 살짝 부러움을 느꼈다. 일반적인 직장인에게 허용된 짧은 휴가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일본의 하와이라는 ‘이토시마[島]’에서 아름다운 바다를 두 눈에 담고 하나시오 푸딩[花鹽プリン]을 맛보고, 일본의 베니스라는 ‘야나가와[柳川]’에서 일본 4대 히나마츠리 가운데 하나인 ‘사게몬 메구리’를, 일본의 온천도시로 유명한 ‘벳부[別府]’에서 벳부 지옥 순례를 즐기는 것이라면 계획을 세워 분초 단위로 빽빽하게 돌아다니면 짧은 시간에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먹는 것은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맛있어도 하루에 5끼, 10끼를 먹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저자의

 

만약 후쿠오카에 짧은 여행을 왔다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포기할지 고민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다 버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무려 한 달의 시간이 더 남아 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무언가를 못 해도 나중을 위해 아껴놓는다는 편한 느낌이 들었다. [p. 25]

 

라는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 냄새 진하게 나는 맛있는 도시, 후쿠오카. 이 정겨운 도시를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일본’하면 떠오르는 독보적인 도시도 아니고 놀거리가 풍부하지도 않은, 흔히 말하는 평범한 도시. 하지만 자칫 매력이 없다는 뜻으로 오해되기 쉬운 이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당함’의 또 다른 표현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 도시가 후쿠오카였습니다.

후쿠오카 한 달 살기를 하며 즐거웠습니다. 훌륭하고 멋진 인생도 좋지만, 즐거운 인생만큼은 못한 것 같습니다. 후쿠오카에서는 돈이 많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도시 가까이에 산과 바다가 있고 정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후쿠오카를 다녀온 지 벌써 몇 달이 흘렀지만, 바쁜 일상에서 드문드문 후쿠오카를 떠올리면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나카스 강변 거리를 산책하고 이토시마 해변으로 드라이브를 떠나고 유후인 온천에서 힐링하고 오호리 공원에서 산책했던 그날들, 다시 손에 닿을 듯한 그 시간을 꿈꿉니다. [p. 272]

 

언젠가 다시 여행을 가게 되면, 이번에도 좀더 덜 쫓기듯이 여유를 가지고 저자처럼 여행을 즐기고 추억을 쌓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 리뷰는 세나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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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 서촌편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황정수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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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백악산 아래 경복궁 주변], [수성동 밑 옥인동 주변], [필운동과 사직동 부근]으로 나눠, 서촌(西村)과 그 주변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일제강점기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예술가들을 보면 표지화로 유명한 정현웅(鄭玄雄, 1911~1976)형제화가 청정(靑汀) 이여성(李如星, 1901~?)과 이쾌대(李快大, 1913~1965), 디아스포라(Diaspora)적 삶을 산 청계(靑谿) 정종여(鄭鍾汝, 1914~1984)조선어학회 회원으로 한글서예 발전을 위해 노력한 야자(也自) 이만규(李萬珪, 1889~1978)과 ‘각경체’를 만든 그의 둘째 딸 봄뫼 이각경(李珏卿, 1914~?) 등 월북한 이들을 제외하고도 나혜석, 이상범, 구본웅과 이상, 이중섭, 천경자 정도만 들어봤을 뿐 낯선 이들이 많다.

 

아니, 이름은 들어봤어도 대표작이나 작품세계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불꽃처럼 살다 간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혹은 신여성의 대표주자로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이 그녀가 남긴 작품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도리어 파리에서의 최린(崔麟)과의 불륜 그리고 이에 따른 이혼으로 대표되는, 불꽃처럼 살다간 그녀의 삶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로서의 나혜석은 어떨까?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 불리는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은 1909년 도쿄미술학교 양화과로 유학하여 유화를 공부했다. 이어 김관호(金觀鎬, 1890~1959)가 1911년, 유방(維邦) 김찬영(金瓚永, 1889~1960)이 1912년에 잇달아 같은 학교에 입학한다. 이들 세 사람은 도쿄미술학교에서 빼어난 성과를 보여 장차 한국의 서양화단을 짊어질 것이라 기대 받던 재목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귀국 후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서양화단을 떠나고 만다. 고희동은 처음에 시작했던 동양화로 회귀하고, 김관호는 교육에 전념했으며, 김찬영은 문학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문화재 수집에 열을 올린다.

~ 중략 ~

이들과 비교하면 나혜석의 삶은 두드러진다. 나혜석은 비슷한 시기에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후 한평생 거의 서양화를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았다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남편을 따라 유럽과 미국을 돌아다닐 때에도 그림을 그렸고, 세상을 등지고 산중에 있을 때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는 천생 화가였다.

당시는 여성이 사회적 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혜석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세상과 맞서며 여성으로서의 주체적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성격이 그를 세상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p. 30]

 

다시 말해 한국 근대 서양화단을 개척했다는 고희동(高羲東), 김관호(金觀鎬), 김찬영(金瓚永)은 귀국 후 곧 서양화단을 떠났기에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평생 화가로 사는 정월 나혜석과 설초(雪蕉) 이종우(李鍾禹, 1899~1981)가 전정한 의미의 한국 최초 서양화가라 할 만하다. [p. 261]

 

불행히도 진정한 그녀의 대표작을 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1933년 화실의 화재로 그녀의 작품 대부분이 타버려서 현재 전하는 그녀의 작품은 10여 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해지는 것도 조선미술전람회 등에 출품했던 작품들의 도판에 비교하면 수준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하니……. 이것도 그녀의 예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데 한 몫 하지 않았을까?

 

나혜석, <봉황성의 남문>(1923)

출처: 황정수, “나혜석은 죽기 전 왜 서촌으로 왔을까”, <오마이뉴스> 2018.11.08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485300&SRS_CD=0000011894)

 

나혜석, <선죽교>(1933)

출처: 황정수, “나혜석은 죽기 전 왜 서촌으로 왔을까”, <오마이뉴스> 2018.11.08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485300&SRS_CD=0000011894)

 

하나 덧붙이자면,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이들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친일(親日)’논란이다. 이 책에서 ‘친일’이 직접 언급된 이로는 친일파 노익형이 창간한 월간 <신시대>에 노골적으로 군국주의를 선동하는 “멍텅구리”를 연재했던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1899~1978)일장기 말소사건(1936)으로 구속되었지만, 이후 국방헌금을 모금하기 위한 국책 기획전에 적극 참가하고, <매일신보>에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며 삽화 “나팔수”(1943)를 기고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저지른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과 그의 큰아들 이건영(李建英, 1922~?)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한 ‘결전미술전람회(決戰美術展覽會)’에 참여하고 태평양전쟁 출정자와 입영자에게 증정할 <수호관음불상> 1,000매를 제작한 청계(靑谿) 정종여(鄭鍾汝, 1914~1984)가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었지만 이 책에서는 친일 사실이 언급되지 않은, 이상(李箱)의 절친 서산(西山) 구본웅(具本雄, 1906~1952)야마다 신이치[山田 新一]이 주도한 친일미술단체인 단광회(丹光會) 소속의 운봉(雲峯) 심형구(沈亨求, 1908~1962)석정(石鼎) 이봉상(李鳳商, 1916~1970)도 있다.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는 인물을 나열식으로 소개하는, 다소 인명사전 같은 분위기의 책이다. 그래서 인물 연구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체로 인물 연구를 하다 보면 연구 대상에 대한 연구자의 애정이 커져서 연구 대상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하기 쉽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해도 연구 대상을 어느 정도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노수현은 바위산을 중심으로 나무와 수풀을 점묘로 그리는 산수화가 주특기였지만 동양화의 유려한 필법을 바탕으로 삽화나 만화도 잘 그렸다. 삽화와 만화가 당시 노수현이 추구하는 미술의 본령은 아니었으나, 근대 삽화와 만화 발전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수현은 일제 말기 활동으로 친일 미술인이었다는 시비가 있지만 한국 근대미술사의 일부를 구성하는 중요한 작가다 [p. 98]

 

그래서 저자가 심산 노수현에 대한 평가에서 보듯이 친일 행위와 예술 작품과 활동을 구분해서 평가하자는 입장에 공감이 가면서도 그 밑바닥에 깔린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에 조금 난감하기도 하다.

물론 알고 있다. 100%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미술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일제 강점기의 낯선 예술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삶을, 손이 가는 대로 순서에 상관없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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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근교를 산책합니다 - 일상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작은 여행, 특별한 발견
이예은 지음 / 세나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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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근교를 산책 합니다]는

 

작가의 말’에 담긴

 

이 책은 ‘도쿄에 사는 사람들은 주말에 어디에 갈까’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했습니다지난 수년간, 한 달에 한 번 꼴로 전철과 버스를 타고 도쿄 근교 도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제 일상을 더 풍요롭게 하는 총 스무 번의 만남에 이르렀습니다. 도쿄를 조금만 벗어나도 전철 밖 풍경이 극적으로 바뀝니다. 소박하지만 분명한 도시와 마을의 특징이 눈에 들어옵니다. 비록 세련된 멋이나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어도, 주민들이 애정을 갖고 오랫동안 가꿔온 문화와 꾸밈을 덜어낸 삶이 특별한 여운을 남깁니다도쿄 근교를 산책하며 발견한 낯선 나라의 이야기를 더 많은 이와 나누고 싶었습니다. [p. 5]

 

라는 말처럼 이 책은 우리에게 도쿄 근교에 대해 소개하지만, 도쿄 근교 여행 가이드북은 아니다. 말 그대로 도쿄 근교의 10개 현(縣)을 배경으로 ‘음식’, 인상 깊게 감상한 일본 문화 ‘콘텐츠’, 그리고 ‘키워드’라는 3개의 테마로 20개의 글을 엮은 책이다. 각각의 글마다 해당 콘텐츠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담담히 얘기하고, 산책 tip, 가 볼만한 곳을 덧붙였으니 여행 가이드와 여행 에세이의 사이 어딘가에 있는 셈이다.

 

 

음식

 

가장 먼저 소개된 곳은 도쿄에 참치를 공급하던 가나가와[神奈川]현 미우라[三浦] 반도였다. 저자는 이곳에서 참치의 다채로운 맛을 한번에 만끽할 수 있는 ‘마구로 만개 세트’를 맛보며, 에도 시대(1603~1868)에 생선을 좋아하는 고양이도 외면하고 뛰어넘어 간다는 뜻에서 ‘네코마타기[猫]’라고 불리며 버려졌던 참치의 영욕(榮辱)을 생각한다.

 

살다 보면, 본질이 바뀌지 않아도 상황이 바뀐 탓에 대우가 달라지는 경우 종종 본다. 그 옛날, 기름지다는 이유로 천대받던 참치가 지금은 똑 같은 이유로 선호되듯이 말이다. 먼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던 참치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인정받으려 애쓰거나 억지로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 언젠가 세상이 알아준다 메시지는 꽤 희망적이다. [pp. 22~24]

 

가나가와현 에노시마[江の島]에 가서는 그곳의 명물, 시나스동을 시켰다가 한일 양국의 인간관계가 반영된 비빔밥과 돈부리의 차이를 떠올린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나는 두 나라의 밥 요리에 곧잘 빗대곤 한다. 우리나라의 비빔밥이나 식사의 마지막에 나와 우스갯소리로 ‘코리안 디저트’라고 불리는 볶음밥은, 밥과 토핑이 한 몸처럼 뒤범벅된다. ‘우리’라는 틀 안에서 말 그대로 지지고 볶으며 서로에게 동화되는 인간관계 보는 듯하다. 한편, 일본의 덮밥인 돈부리는 토핑과 흰 밥의 경계가 뚜렷하다. 입에 넣기 직전까지도 둘을 완전히 섞지 않음으로써, 재료 본연의 맛을 유지한다는 점도 큰 차이다. 혹시 아무리 친한 사이에서도 타인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일본인의 성향 무의식 중에 음식에도 반영된 것은 아닐까. [p. 29]

 

도치기[?木]현 닛코[日光]의 특산품인 가열한 콩물의 막인 유바[湯波]와의 만남을 애기한 글에서는 여행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여행은 사실 바깥세상이 아닌, 내면의 세계를 탐험하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안전지대를 벗어나 낯선 환경에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다름 아닌 자신의 성향과 취향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여행자가 정작 관찰하는 대상은 외부 풍경이나 이국의 문화보다는 그런 자극에 반응하는 나 자신이 아닐까. [p. 64]

 

 

콘텐츠

 

천편일률적인 패키지 여행에 질린 이들이 자신들만의 테마를 선정해서 자유롭게 돌아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여행 방법의 한 가지가 자신들이 흥미롭게 본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소설, 애니메이션, 만화 등에 나온 장소를 돌아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쓰메 소세키[夏目 漱石, 1867~1916]가 쓴 소설 <도련님>의 배경이 된 온천 마을인 마쓰야마[松山]는 온천을 즐기러 오는 사람보다 소설 <도련님>의 발자취 따라 거닐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라고 한다.

 

가나가와현 가마쿠라[鎌倉]는 막부 정치를 시작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 賴朝, 1147~1199]가 거점으로 삼은 곳이지만, 이 책에서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게 부각된다.

 

스즈와 학교 친구들이 즐겨 가던 식당과 카페를 방문했고,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작 만화에서 인상 깊게 본 작은 신사와 가게도 부지런히 둘러보았다. 그렇게 온종일 이야기의 무대를 누비며, 나만의 추억을 덧씌웠다. 물론 내 여행은 사전 답사도 편집도 거치지 않은 현실이라, 모든 과정이 영화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스즈와 언니들이 맛있게 먹던 전갱이 튀김을 기대하고 간 에노시마의 한 식당에서는 똑같은 메뉴를 팔지 않았고, 만화에서 스즈가 요시노의 남자친구를 미행하던 어느 신사에서는 카메라를 떨어뜨려 고장 내고 말았다. 또 스즈와 사치가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던 산을 찾아 2시간을 헤맸지만, 태풍 탓이었는지 등산로 입구가 폐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아쉽지 않았던 이유는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바다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네 자매는 이나무라가사키의 해안선을 거닐며 아버지의 추억을 반추한다. 스즈에게는 다정했을지 몰라도, 세 언니에게는 자신들을 버린 원망스러운 아버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치는 이제 언니들에게 스스럼없이 장난도치는 막내 스즈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고백한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동생을 남겨준 아버지는 분명 다정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p.116]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지 못해 저자의 감상에 쉽게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반대로 내가 읽어보았던 소설 <설국>의 배경이 되는 니가타[新瀉]현 유자와[湯澤]를 방문한 이야기는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도쿄에서는 이미 매화가 만개하고 성미 급한 벚꽃도 고개를 내밀던 겨울의 끝자락, 다카한에서의 하룻밤을 예약한 뒤 에치고유자와역으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랐다. 창가에 앉으니 멀리 눈이 소복이 쌓인 산에 시선이 닿았다. 깜깜한 터널을 지날 때마다 설산이 한기를 몰고 내게 뚜벅뚜벅 다가오는 것 같았다. 에치고유자와역에 내리기 전 마지막 터널을 통과하자 고작 1시간 반 만에 도쿄와 완전히 다른 계절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산맥과 건물의 지붕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신칸센이 없던 시대에 설국을 찾은 시마무라처럼 보통열차를 탔다면, 길이 약 9.7km에 이르는 시미즈 터널을 지나야 한다. 긴 어둠을 지나 이토록 환한 설경을 마주한다면, 국경이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강렬한 인상을 받지 않을까. [p. 160]

 

언젠가 겨울에 도쿄를 방문할 일이 있으면 한번 유자와를 방문해서 설국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다는 기분이 절로 드는 글이었다.

 

 

키워드

 

키워드’라는 테마로 여러 글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을 알 수 있는 키워드라고 하면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라는 뜻의 ‘이이토코도리[良いとこ取り]가 대표적인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쓰오카 세이고[松岡 正剛, 1944~ ]는 ‘이이토코도리’라는 일본식 문화편집 방식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도시로 보면, 가나가와현의 항구 도시인 요코하마야말로 이이토코토리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요코하마는 1859년, 미국에서 온 페리 제독에 의해 닫혀 있던 빗장을 푼다. 비록 무력에 의한 불평등한 개항이었지만, 이는 요코하마가 서양 문화를 흡수해 눈부시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새로운 문명과 기술을 발 빠르게 체득한 요코하마인은 당시 일본에서 흔치 않았던 서양식 호텔과 베이커리, 이발소를 열었고 아이스크림과 칵테일을 만들었으며, 경마와 야구 시합을 즐겼다. 자연스레 외국인은 물론 선진 문물을 배우려는 일본인까지 요코하마로 몰려들었다.

중략 ~

지금도 요코하마 곳곳에는 150여 년 전 뿌리를 내린 세계 각국의 문화가 살아 숨 쉰다. 덕분에 여행객도 마치 셀렉트 숍에 온 기분으로 원하는 것을 취하는 이이토코토리 여행이 가능하다. [pp. 207~208]

 

또 다른 키워드로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가 있다.

 

일본인은 오래 전부터 벚꽃을 죽음과 결부해 왔다. 한번 피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절정에 이르고, 가장 화려할 때 덧없이 흩어지는 꽃잎이 생의 무상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바로 일본인만의 미의식이라 불리는 모노노아와레다. [pp. 290~291]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이를 반영한 작품으로는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 <러브 레터> 등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모노노아와레’의 미학(美學)때문에 일본의 정서가 과거지향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도쿄 사람들의 ‘에도[江戶] 시대’에 대한 감정도 ‘모노노아와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도쿄에 살다 보면, 이곳 사람들은 에도 시대(1603~1868)에 대한 집단적 향수를 앓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100년 넘은 가게를 일컫는 시니세[老?]는 흔하지만, 에도 시대 때부터 내려온 곳은 훨씬 각별하게 친다. 또, 도쿄 국제공항이나 스카이트리처럼 도시를 대표하는 시설에는 에도를 테마로 한 공간이나 전시물이 빠지지 않는다. 단순히 도쿄의 옛 지명이 에도라서는 아니다. 에도 시대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에도를 지금의 수도로 만든 도시의 기원이자, 어쩌면 근대화 이전의 일본을 상징하는 정신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pp. 234~235]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도쿄에는 에도 시대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동네가 사라졌다. 다행히 개발의 열풍이 비껴간 덕분에 에도 시대의 분위기가 잘 보존된 곳이 있다. 바로 ‘고 에도[小 江戶]’라고 불리는 사이타마[埼玉]현 가와고에[川越]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 고에도로서의 자부심을 꼿꼿이 지켜나가는 가와고에는 가끔 들춰보고 싶은 오래된 사진첩과도 같다. 물질적 풍요나 첨단 기술은 도쿄에 집약되어 있지만, 막상 도쿄가 잃어버린 에도의 풍경은 가와고에에서 숨 쉬고 있으니. 그래서일까. 도쿄로 돌아오는 전철을 타고 가와고에를 떠날 때, 나는 일본인의 추억 한 페이지를 거닐다 나온 기분이 들었다. [p. 240]

 

 

이 리뷰는 세나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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