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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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란 어떤 존재일까

 

좀비. 부두교 신앙의 전설에서 비롯된, 움직이는 시체 형태의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중앙아메리카에서는 약물과 폭행을 이용해 부려먹는 노예노동자 같은 형태로 실존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니,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안 염전 노예'와 같은 모습이 '좀비'라고 불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주인공 네오가 '빨간 알약(red pill)'을 먹고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된 것처럼, 소금을 먹고 정신을 되찾아 돌아오기도 한다.

물론 이 '좀비'이야기는 이후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주(變奏)되고 있다. 천선란의 연작소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에 등장하는 좀비도 그런 변주에 속한다. 

 

 

떠나는 자들

 

'1부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에서 동면에서 깨어난 기계 엔지니어 황옥주가 겪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좀비 바이러스를 피해 지구를 떠나 에르사(Ersa) 행성으로 향한 이주선에서 냉동수면 상태로 있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이미 이주선은 잠복기에 있던 좀비 바이러스가 깨어난 리더 타일러 조에 의해 그녀를 제외한 모든 승무원이 살해된 상태였다. 비록 그녀의 남사친이었던 묵호는 좀비가 되는 과정에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그도 움직이는 시체가 된 상태였다. 신기하게도 그런 상태에서도 묵호는 옥주를 인식하고 그녀를 물지 않을 뿐 아니라 끝까지 그녀를 지키려고 한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려는 마음이 좀비 바이러스마저 억누른 것일까? 

 

좀비로 인한 세상의 종말이 다른 종말보다 더 끔찍한 이유가 뭔 줄 알아? 

~ 중략~

모든 종말의 순간에도 인물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뛰어. 서로를 살리기 위해. 죽어가는 순간에도 애틋하게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여. 슬프지만 아름답고 극적인 이별을 맞이할 수 있어. 하지만 좀비는 아니거든.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고,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쏴야 해아름다운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시체가 되어버린 처참한 몰골을 봐야만 해. 이게 가장 끔찍한 종말이야. [p.52]

 

그래서였을까? 옥주는 묵호를 버리고 원래 목적지였던 에르사 행성으로 향하는 대신 묵호와 함께 대기 부적합으로 이주가 보류된 카르노(Carnot)으로 향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가던 묵호를 볼 때조차 나오지 않던 눈물이, 그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지금은 참으려 애를 써도 비집고 흘러나온다는 사실이 또 억울해서, 억울함의 억울함을 더해 내가 감당할 수 없게끔 흐른다. 죽어가는 묵호는 괜찮았는데 왜 이미 죽어버린 묵호는 포기가 안 될까. 죽음은 끝이고, 내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 같았는데, 죽은 채 곁에 있는 묵호는 닿을 수 있어서일까. 끝을 넘었으니 영원도 가능할 것만 같다. [p. 94]

 

 

이성적으로는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옥주의 선택아 최악이 아니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이주선으로부터의 메시지였다.

 

에르사… 부적합… 항로 변경이 필요합니다. 갈 곳… 잃었습니다…. 키사… 도착한 그곳은… 어떱니까? [p. 115]

 

어쩌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 해결하려는 대신 회피하려던 인간의 대응이 결국 갈 곳을 잃게 했는지도 모른다.

 

 

남는 자들

 

1부와 달리 2부와 3부는 지구에 남은 이들의 이야기다.

'2부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는 대부분 인간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거나 좀비가 된 지구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사랑하는 이가 좀비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아니 좀비로 변하지 않았기에 더 사랑하는 존재를 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스스로 족쇄를 차는 일일지도 모른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 카카포를 지키는 제비나 자폐아인 딸, 노윤을 지키는 은미는 그런 삶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비는 밤이라서 못 본 것인지, 자신들을 태우지 않고 떠나가는, 어쩌면 마지막 구조 헬리콥터를 향해 총을 쏜다. 마치 여기 생존자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처럼.

 

죽음이 들이닥친 순간에 네 존재를 알리는 데 써야지세상한테. 내가 여기에 있다고. 아무도 듣지 않는데, 제비가 살아야만 하는 그 순간에. 그럴 때 총을 사용하는 거야[p. 139]

 

'3부 우리를 아십니까'에서는 2부와 달리 이미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존재를 이야기한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지만, 뇌종양 때문인지 기억과 의식을 지닌 화자가 좀비가 된 아내를 리넨 카트에 싣고 그들이 돌보던 거북이 ‘장풍’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바다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부는 고목으로 변해간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존재의 마지막치고는 평온하면서도 이상한 결말인 셈이다. 

 

내가 그간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한 걸 기특하게 여겨서 신이 우리 둘을 저승에서 만나게 해주면 좋으련만. 우리는 욕심이 없잖아. 많은 걸 바란 적이 없잖아. 천국은 바라지도 않아. 어디든 저승의 남은 땅에 같이 있게만 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우리가 그곳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는데. [p. 248]

 

부부의 마지막은 신이 두 사람의 소망을 들어준 것일까 아니면 인간을 배제한, 지구의 자정(自淨)이 시작된 것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지구에 남는 것을 선택한, 혹은 선택당한 이들도 지구를 탈출한 이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형태는 다르지만, 미련을 떨치지 못한, 또 다른 형태의 회피자이기 때문이다.

 

이상 3편의 소설에서 천선란이 보여준 '좀비'는 이성이 없는 살아있는 시체가 아니다. 오직 사랑하는 이 혹은 집착하는 존재가 남아있는 한, 이성(理性)이 살아있지만, 신체가 변형되었거나 일부가 결여된 존재에 가까워 보인다. 그랬기에 '모든' 존비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묵호와 같은 '일부' 좀비가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

 

 

 

옥의 티

 

p. 52

모든 종말의 순간에도 인물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뛰어. ⇒ 모든 종말의 순간에도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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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멸종 - 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
이정모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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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는 지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보면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탄생을 위해 구세계가 멸망해야 한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지구가 46억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겪은 다섯 차례의 멸종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 기존의 세계를 깨뜨리는 행위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저자도 

 

멸종이란 다음 세대의 생명체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p. 23]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 멸종이 내가 속한 종(種)의 멸종이 아니라면 우리는 기꺼이 그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그러니까 인류가 멸종의 대상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지구온난화 혹은 기후 변화를 지구를 멸망시키는 위기인 것처럼 말하고, 우리가 그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것이 진실일까?

 

지구는 수천 년, 수만 년, 수십만 년 전부터 어느 정도 온실효과를 겪어왔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출현하기도 전의 먼 옛날부터 지구는 온실효과의 영향을 받는 온실 속 같은 곳이었다. 지금 온실효과와 기후변화가 문제인 것은 그 효과의 정도가 갑자기 너무 빠른 속도로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기후 위기라는 것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0.03%에서 0.04%로 짙어짐에 따라 부가적으로 발생한 현상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0.03퍼센트이던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양을 0.04퍼센트 정도 올린 것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데, 광합성을 하는 세균들은 긴 세월에 걸쳐 0퍼센트에 가깝던 산소 기체 농도를 20퍼센트 이상으로 높여버렸다. 지구의 생명체들과 자연은 이런 일을 벌였다. 그 모습만 놓고 보면 46억 년 지구 역사 전체에서 요즘의 기후변화는 미세한 변화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기후 위기로 촉발된 인류의 멸종은 지구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문제에 불과하다.

 

 

다양한 생명체의 눈으로 본 지구의 역사

 

자, 그렇다면 누가 이 ‘지구’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합한 화자(話者)일까? 흔히 역사에서 1차 사료(史料)는 사건이 발생한 당시 또는 그 시기에 만들어진 자료를 얘기한다. 그렇다면 멸종(滅種)의 역사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그 당사자가 설명하는 것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는 인류가 멸망한 것으로 가정한 2150년부터 지구가 탄생한 46억 년 전까지 거꾸로 거슬러 오르며, 지구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 생명체의 시선에서 17개의 주요 장면을 소개한다. 물론 여기서 설명해주는 화자(話者)들이 실제 화자가 아니라 저자가 선택한 20여 종의 존재가 직접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꾸민 것에 불과하다. 특히 6600만년 전[중생대 백악기] 티라노사우루스(Tyrannosaurus)가 들려주는 다섯 번째 대멸종, 2억 1000만년 전[중생대 트라이아스기] 포스토수쿠스(Postosuchus)가 들려주는 네 번째 대멸종, 2억 5100만년 전[고생대 폐름기 말기] 디메트로돈(Dimetrodon)가 들려주는 세 번째 대멸종처럼 각 시대 최고의 포식자가 들려주는 ‘멸종’에 대한 얘기는 ‘여섯 번째 대멸종’의 대상이 될 우리 인류의 입장에서는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 또한 이런 다양한 존재가 화자(話者)가 되는 방식은, 독자에게 마치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얘기처럼 흥미로우면서도 ‘인간’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게다가 이런 방식으로 지구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마치 자기가 각 글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감정 이입하기도 쉽다.

 

이렇게 지구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저자가 단순히 그것만 바랬다면, 이 책의 제목은 <지구사> 정도가 아니었을까? 저자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혹은 겪을 ‘여섯 번째 대멸종’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하고 있다. 

 

2150년에는 과연 인류가 살고 있을까요? 물론 저는 그때도 인류가 살아남았기를 기대합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기술은 지금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바뀌지 않고 지금처럼 산다면, 그래서 지구가 꾸준히 더워진다면 2150년 지구에는 인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섯 번째 대멸종은 이미 진행 중입니다. [pp. 7~8]

 

 

멸종에 순응해야 하나 저항해야 하나

 

지금까지 지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멸종’ 당시의 최고 포식자는 반드시 멸종하고, 생물량이 가장 많은 생물도 반드시 멸종한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달성한 유일한, 그리고 최초의 존재가 바로 ‘인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의 대상으로 당당하게 올라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인류는 당장의 이득에 눈이 어두워 이 대멸종을 막기는커녕 진행을 재촉하고 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무려 95%나 지니고 있으면서 말이다. 결국 ‘의지’와 ‘실천’의 문제인 셈이다.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충분한 기술이 있었다. 그들이 멸종하기 130년 전에도 기후변화를 막는 데 필요한 기술의 95퍼센트가 있었으며 이 기술을 사회에 적용하는 데 충분한 돈도 있었다. 또 많은 사람이 에너지 전환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절실하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해결하리라 믿었다. [p. 37]

 

‘공유지의 비극’처럼 개별 주체의 합리성과 자유가 빚은 미래인 셈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미래가 될 가능성이 높은 예측이다. 이 예측이 현실화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인류에게는 더 이상 지구를 걱정하거나 다음 세대의 생명체를 위해 기꺼이 자리를 비켜주겠다는 이타적인 마음가짐으로 보낼 시간이 없다.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기후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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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2023,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 어크로스, p. 32

 곽재식, 앞의 책, p.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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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일사 - 부산 선비, 근대 일본을 목격하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1
박상식 지음, 부산박물관 옮김 / 서해문집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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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산 사람은 사행일기(使行日記)를 남기지 않는 것일까


<동도일사(東渡日史)>는 부산광역시의 모태인 동래부(東萊府) 사람이 쓴 유일한 사행일기(使行日記)라고 한다. 조선 후기부터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포함한 12차례의 통신사(通信使)와 개항 이후 4차례의 수신사(修信使)가 일본으로 파견되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의외의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부산 사람이 통신사나 수신사 일행에 참가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고구마 종자를 전파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조엄(趙曮, 1719~1777)을 정사(正使)로 하는, 1763년 통신사에는 적어도 두 명의 부산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계미수사록(癸未隨槎錄)>을 쓴 제2기선의 기선장(騎船將) 변탁(卞琢)과 <부산진 순절도(釜山鎭 殉節圖)> 등을 남긴 제3기선의 기선장 변박(卞璞)이 바로 그들이다. 비록 변탁이 <계미수사록>을 남겼지만, 이는 통신사 일행이 타고 갈 기선(騎船)과 복선(卜船)의 제조 과정과 운항 실태를 기록한 것이라서 일반적인 사행일기(使行日記)와는 거리가 있다. 이들이 남긴 글과 그림으로 볼 때, 사촌간인 이들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역관 집안인 밀양 변씨(密陽 卞氏)의 일원이지만, 사행일기를 남기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들 지방의 중인들은 나랏일은 나와 상관없다고 선을 긋고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사행일기를 쓰지 않았거나 썼더라도 전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동도일사(東渡日史)]의 구성과 내용

그런 의미에서 중앙의 사대부 출신 관료가 아닌 지방의 중인 출신 향리가 남긴 <동도일사>는 독특하면서도 소중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박상식(朴祥植, 1845~1882)의 <동도일사>는 어떻게 구성되었고,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을까? 

 <동도일사>는 크게 3부분, 즉 박상식 본인의 사행일기[1부], 1880년 7월 6일에서 8월 4일까지 정사(正使) 김홍집(金弘集, 1842~1896)과 일본 외무성 관료들이 주고 받은 문답[2부], 수신사 관련 공문[3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김홍집과 일본 외무성 관료간의 문답이 기록된 2부다. 왜 저자가 이것을 기록해서 자신의 사행일기에 남겼을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향서기(鄕書記)라는 직책으로 수신사에 합류한 저자의 이 결정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당시 조선과 일본이 가진, 날것의 생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보면,

7월 6일 차관보에 해당하는 외무소보(外務小輔) 요시카와 아키마사[芳川 顯正, 1842~1920, 이하 ‘요시카와’]와의 대화가


요시카와: 귀국의 사신은 이번 행차에 며칠 머물 것인가?

나[김홍집]: 한 보름 계획하면 일을 마치고 도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요시카와: 병사(兵士)의 기숙사[寮舍]와 기국(機局)은 볼 것이 많은데 여행기간이 이처럼 촉박한가?

나: 종전 통신사의 행차는 이보다 더 되지 않았다. 또한 병학(兵學)과 기계(器械)는 이 사신이 어수룩해서 평소에 아는 바가 없어서 보더라도 도움될 것이 없다. [p. 87]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조선의 집권층은 두 번째로 수신사를 보내는 순간까지도 일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겠다는 자세가 안 보인다. 어쩌면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일본에 대한 시혜(施惠)라고 여기는 시각을 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이는 수신사로 파견된 59명 중 실무를 담당한 것은 당상관 이종무(李宗懋), 군관 윤웅렬(尹雄烈, 1840~1911), 서기 이조연(李祖淵, 1843~1884)와 강위(姜瑋, 1820~1884), 반당(伴倘)1) 지석영(池錫永, 1855~1935) 등 19명이고 나머지 2/3가 사행 때 부절(符節)과 부월(斧鉞)을 받들고 가는 절월수(節鉞手), 나팔수(喇叭手), 가마꾼 등 의례를 위한 인원이었다는 점에서도 엿보인다.


또한 일본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이에 따른 소요시간에 대한 예측도 없었던 것 같다. 요시카와와의 대담에서 보름이라고 언급한 일정이 두 배로 늘어 한 달이 된 것은 이를 반증(反證)한다.
7월 8일 차관급인 외무대보 우에노 가게노리[上野 景範, 1845~1888, 이하 ‘우에노’]와의 대화는


우에노: 우리 나라는 요즈음 부강해지는 기술을 모두 터득했다. 귀국도 부강해지기를 원하는 만큼 상무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요즈음 세계의 형세가 일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순치의 도움이 있어야 하니, 귀국과 함께 동심동력(同心同力)으로 군무(軍務)나 기계 등 어느 곳이나 서로 이끌어 구라파(歐羅巴)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나: 귀국의 왕성한 의욕이 이러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정부에 일찍 알게 해 주어 감사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강토(疆土)가 한구석에 있고 서쪽에는 청국, 동쪽에는 귀국이 있는데 그 밖의 다른 나라는 처음부터 경계를 접하지 않고 왕래도 없으므로 조야(朝野)의 인심이 옛 규정만 지키니 오늘날의 사세가 실행하기 쉽지 않은 바가 있다. [p. 95]


라고 기록되었는데, 여기에는 시대의 변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옛 것만 묵수(墨守)하는 조선 지배층의 모습이 엿보인다.


하긴, 오죽 답답했으면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팔’이라는,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 1836~1915]가 수신사 일행이 떠나기 직전인 8월 3일에 만났을 때 충고까지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이노우에]: 각하가 돌아가 보고할 지라도 조정에서는 들어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충고하지 않을 수 있나? 서양 각국은 먼저 수호하기만 바랄 뿐이지 서둘러서 반드시 통상을 하려 하지 않는다. 현재 귀국의 계획을 보건대 병사와 기계는 배울 필요가 없고 오직 빨리 몇 사람을 파견해 이곳에 와 머무는 동안 각국의 교제 사정을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허술하게 듣지 마시기 바란다.

만약 위험에서 안전하게 회복하고 재해에서 유리해진 뒤에도 성의를 마음에 두지 않으면 다시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 조정에서 명령하는 뜻을 미리 알 수는 없을지라도 어찌 감히 하나하나 상세히 아뢰지 않겠는가?

그: 예조의 원서계(原書契)2) 외에 각국 사정을 하나로 마련해 별도로 함에 넣어 올린다. [pp. 105~106]


뿐만 아니라 김홍집은 일본을 경계한 것인지 오랑캐라고 멸시하는 화이관(華夷觀)이 발동한 것인지 몰라도 묘하게도 일본인과의 교류에 소극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인천항 개항과 관세문제에 대한 재논의를 목적으로 파견되었는데, 전권위임장과 초안을 아예 준비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신사를 파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논의의 기회를 상실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김홍집만 일본인에 대해 이런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박상식도 7월 11일 사행일기에서 일본에 대한 선입견을 노출한다.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와 공사 하나부사가 와서 이야기를 했다. 모두 천하의 형편과 세계의 대세를 이야기했는데 과장된 저의가 아닌 것이 없었다.

~ 중략 ~

그 자랑하고 과장하는 버릇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pp. 57~58]


뿐만 아니라, 7월 17일 일기에서 서양 각국을 양이(洋夷)로만 여기는 시선을 드러낸다.

오후에 10리쯤 돌아가 도서관에 갔더니 바로 성묘(聖廟)3)였다. 밖에서 들어가니 문이 셋 있는데 첫 번째는 서적관(書籍館)이고 두 번째는 입덕문(入德門)이고 세 번째는 행단(杏壇)인데 정전(正殿)에 대성전(大成殿)이라는 액자(額子)가 걸려 있었다.

~ 중략 ~

메이지[明治] 이후 양서(洋書)를 조금 두었는데 그 수가 오히려 많으니 생도(生徒)가 모두 오랑캐로 변하고 유풍(儒風)은 거의 잠잠하다고 한다. [p. 64]


그런데 신기한 것은 수신사의 일원으로 방문한 기계공작소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서술했지만, 유곽(遊廓)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유곽이 있는 오시와라[吉原]를 묘사하는 7월 15일의 일기와 기계공작소를 설명하는 7월 16일의 일기는 그들이 얼마나 서양 문물에 대해 무지하고, 관심이 없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기계공작소에 들르니 쇠를 다루고 나무를 다듬는 일을 오로지 기관차의 힘에 의존하고 있으니 참으로 천기(天機)를 쏟고 화공(化工)을 모으는 것이라 할 만하다. [p. 63]


멀리 높은 누각과 큼직한 집들을 바라보니 몇 리에 걸쳐 있는지 알 수 없는데 층마다 난간에 채색등이 상. 중. 하 세 줄로 걸려 있고, 창문에는 수를 놓았다. 반쯤 걷어 올린 주렴 속에는 아가씨들이 백옥(白玉)같은 용모로 너덧 혹은 예닐곱씩 짝을 지어 있었다. 모두 머리에 금화(金花)를 꽂고 몸에는 청라(靑羅)를 입고 손에는 단선(團扇)을 흔들면서 담소하며 찻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화려한 촛불이 안팎으로 환히 밝히고 있는 것이 흔히 말하는 <요지연도(瑤池宴圖)>와 흡사했다.

~ 중략 ~

조금씩 보고 지나면서 100여 집이 넘었으나 끝을 보지 못했다. 이윽고 계수나무 그림자가 서쪽으로 기울고 향기로운 먼지가 얼굴을 스치니 정신이 피로하고 눈이 어른거려 바로 관소로 돌아왔는데 그 형용을 생각해 보면 춘몽(春夢)에서 깨어난 것 같다. [pp. 61~62]


이것은 일본에서 독촉하니 방문은 하지만, 천(賤)한 기술은 관심도 없다는 마음자세가 반영된 기록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수신사에 참여한 이들이 개방이나 근대화에 찬성한 것은 신기하다. 비록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에 영향 받은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웠지만.


그래서 훗날 김홍집을 비롯해서 이조연(李祖淵), 종두법을 보급하고 독립협회에서 활약한 지석영(池錫永) 등을 동도서기(東道西器)에 기반을 둔 온건개화파로 분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살짝 결이 다른 이도 있다. 갑신정변 참여로 급진개화파로도 분류되는 윤웅렬(尹雄烈)은 적극적인 친일활동은 안 했다지만,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 받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바 있다.


어쨌든 수신사에 실무진으로 참여한 이들이 국제정세에 눈을 떴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동도서기’에서 출발했다는 태생적인 한계는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들은 끝내 조선의 집권세력을 설득하지 못했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올라가 조선을 제대로 바꾸지도 못했다. 결국 이 책에 암시된, 어설픈 충격이 가져다 준 근대화 욕구는 우리가 아는, 예정된 비극으로 치달았다. 읽으면서 왠지 입 안이 씁쓸해졌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반당(伴倘)은 조선시대 종친, 공신, 당상관들에게 그 특권을 보장하고 신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급한 일종의 호위병이다.
2) 서계(書契)는 조선시대 일본과 내왕한 공식 외교문서를 의미하고, 원서계(原書契)는 그 원본을 가리킨다.
3) 성묘(聖廟)는 공자(孔子)의 신위(神位)를 받드는 묘우(廟宇)로 공자묘(孔子廟) 혹은 문묘(文廟)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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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스페인사 - 현대 스페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윌리엄 D. 필립스 주니어 외 지음, 박혜경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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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하나의 국가인가
 
얼마 전에 읽었던 <중앙아시아, 막이 오른다>라는 책을 펼치면,

소비에트 이전까지 중앙아시아 대부분 나라는 단일한 민족국가라기보다는 씨족 중심의 공동체 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연방이 해체된 뒤 각각의 공화국으로 독립하게 되자, 이제 하나의 민족국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을 결합시킬 구심점이 필요하게 되었다.1)


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단일민족 국가에 태어나고 살아와서 그런 것일까? 국가가 나서서 이렇게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낯설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렇게 국가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모습은 ‘근대적’ 국경(國境) 개념이 희박했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 국가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절대왕정(絶對王政)을 처음 꽃피웠다고 여기지는, 서유럽의 스페인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난다. 스페인 내전 이후 집권한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이하 ‘프랑코’) 총통은 ‘스페인은 하나’임을 내세워, 우리에게 스페인어로 알려진 카스티아어를 제외한 각 지역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탄압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각 지방이 독자적인 언어와 역사, 전통을 가지고 있으니 이에 대해 반발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바스크 분리주의자’나 ‘카탈루냐 분리주의자’처럼 ‘분리 불가능한 국가로서의 스페인’이라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급증했다고 한다. 심지어 2017년 10월 27일 카탈루냐 의회는 ‘카탈루냐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카탈루냐 지역이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680~741)에 의해 프랑크 왕국의 속국이 된, 아키텐 공국(602~1453)의 지배에 반항하기 위해 지역 유력자들이 바르셀로나와 손잡고 형성한 바르셀로나 백작령에서 기원했다는 점에서 이런 중앙집권에 대한 반항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스페인의 기원(起源)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를 포르투갈과 공유하는 근대국가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곳의 지리적 용어는 모두 복잡한 역사를 지닌다. 그리스인은 이 반도를 이베리아(Iberia)라고, 로마인은 히스파니아(Hispania)라고 불렀다. 로마제국 말기부터 8세기까지 사용된 스페인(Spain)이라는 용어는 정치적 현실보다 편의에 따른 용어였다. 이곳의 영토와 민족들을 묘사한 다른 용어들은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졌다. 무슬림이 스페인을 장악했던 시기에 그들은 반도에서 손에 넣은 지역을 알안달루스(al-Andalus)라고 불렀고, 이 단어가 이르는 지리적 범위는 이슬람 세력의 통치하에 팽창하다가 종국에는 축소되었다. 중세 유대인들은 이곳을 세파라드(Sefarad)라고 불렀다. 중세 기독교 스페인에는 수많은 왕국과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중세 말에 이르러 반도의 상당 부분을 통치했다. 카스티야의 통치자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통치자 페르난도 2세의 결혼은 스페인이라는 근대적 국가 개념의 기원이 되었다. [p. 13]


즉, 스페인은 처음부터 지방자치적 성격이 강한, 연방국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은 오랫동안 분열과 통합을 반복해왔다. 예를 들면, 한때 스페인의 황제를 칭했던, 나바라 왕국(Reino de Navarra, 824~1841)의 산초 3세(Antso Ⅲ, 재위 1004~1035)는 그의 자식들에게 나바라, 레온(Leon)-카스티야(Castilie), 아라곤(Aragon)을 나눠주었고, 이들은 상당기간 서로 견제하면서 존속했다. 산초 3세의 차남이자 카스티야의 백작 겸 레온의 국왕인 페르난도 1세는 자신이 확장한 영토를 그의 자식들에게 나눠주었다. 페르난도 1세의 차남 알폰수 6세는 그의 아버지가 나눈 카스티야, 레온, 갈라시아(Galicia)와 포르투갈 백작령을 재통합했다. 이런 식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은 분열과 통합을 반복해왔다.

오늘날 이베리아인과 전 세계 스페인어 화자들은 중세 카스티야에서 쓰이던 언어에서 유래된 카스티야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스페인인 외에는 대부분 이 언어를 스페인어라고 부른다.

~ 중략 ~

반도의 로망어들 가운데 포르투갈어는 포르투갈의 공용어이고, 가까운 사촌 격인 갈리시아어는 지역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 출판계에서 사용되며 스페인 서북부에서 부활하고 있다. 카탈루냐어는 수많은 카탈루냐 주민의 모국어로 교육과 대중매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카탈루냐어는 프랑스 남부의 중세어인 오크어, 즉 프로방스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 중략 ~

가장 특이한 언어는 바스크어(에우스케라(Euskerra)어)다. 이 언어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구어이며,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무렵 언어가 쇠퇴하자 바스크 지식인들은 바스크어를 다시 사용하고 이전에 미흡했던 문어체를 발전시켰다. 그 후 에우스케라어의 사용은 바스크 민족주의로, 스페인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얻기 위한 다양한 모색으로 연결되고 있다. [pp. 15~16]


이러한 특성 때문에 오늘날 스페인은 스페인어로 알려진 카스티야어 외에 옛 왕국의 언어를 공용어로 쓰고, 자치입법권, 자치행정권을 가지고 있는 17개의 광역자치주(Comunidad Autónoma)가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스페인은 연방의 성격이 강한 미국 못지 않은, ‘연방국가’의 성격을 띄고 있음이 드러난다.



스페인,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다

아마도 스페인이 국민 스스로가 ‘스페인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되려면, 소수 언어와 문화 등에 대해 프랑코 총통 이상의 강력한 탄압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예컨대 베트남의 경우 불교를 믿는 비엣[越]족이 지속적인 남진(南進)을 통해 중부와 남부를 병합했다. 그런 후,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 문화, 민족들을 포용하는 대신 배제를 선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슬람과 힌두교를 믿던 말레이계 참족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이다. 그 결과, 한때 참파 왕국(192~1832)을 형성하고 베트남 중남부를 장악했던 참족은 베트남 내에서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만약 프랑코 정권이 지속되었다면, 스페인에 있어서 베트남의 얘기는 남의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개인은 신앙, 정치 이데올로기, 경제적 계층, 직업, 가문의 내력 등을 근거로 또는 이 모든 요소를 조합해 본인이 무엇에 진정으로 충성하는지를 규정했다. 하지만 많은 시민은 자기가 살고 있던 지역을 장악한 진영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들은 한 진영에 서서 싸우려고 다른 진영의 통제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목숨을 걸었다. 다른 곳의 내전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내전은 가족과 공동체를 산산이 부숴놓았다. 강한 신념, 공포, 개인적 반감, 야심, 비겁함, 혹은 온갖 수많은 다른 동기로, 이웃들은 서로를 공격했다. 내전은 억압된 분노와 과거의 증오 곁에 참상에 대한 기억을 새로이 만들어냈다. [p 341]

 
이런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정권이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었을까? 프랑코 총통의 후계자로 등장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지방자치를 존중하는, 입헌군주정을 추구했다. 어쩌면 이때부터 스페인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에 들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문제점은 남아있다. 바스크와 카탈루냐가 정서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주의 운동을 이어나가는 등 프랑코 정권의 유산(遺産)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불행했던, 그리고 잊고 싶었던 과거를 바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Cuéntame como pasó)>라는 제목의 주말 드라마는 가공의 알칸타라 가족 이야기를 몇 세대에 걸쳐 풀어놓는다. 이야기는 프랑코 정권 말기인 1968년부터 그들을 따라가면서 현재로 이어진다. 드라마 방영이 시작된 이후 매주 목요일, 스페인의 저녁 식사 시간인 밤 10시, 자신들의 삶과 조국의 최근 역사를 다룬 이야기가 펼쳐지면 수백만 명의 스페인 사람이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꼼짝 않고 앉는다. 노련한 작가, 프로듀서, 배우로 이루어진 팀이 얽히고설킨 역사를 인간애와 더불어 균형 있게 묘사하는 이 시리즈는 압도적인 성공작으로서 그 자체로 사회적·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p. 393]



 
1) 김주연, <중앙아시아, 막이 오른다>, (파롤앤, 2025), p.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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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골목마다 백년 가게
쑨이멍 지음, 박지민 옮김 / 빅허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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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스토리가 있는 장소, 백년 가게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그런 의미와 고유한 느낌이 있는 도시의 공간들을 ‘장소(lieu)’라고 정의했다. 장소라고 다 ‘장소’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주유소, 맥도날드, 24시간 편의점 등 획일적으로 디자인된 유용하지만 무의미한 공간을 ‘장소’가 아닌 장소를 뜻하는 ‘비(非)장소(non-lieu)’라고 이름 붙였다. 장소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기억을 상기시키며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고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는 공간이라면, 비장소는 우리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생존과 일상의 공간이다. 오래된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는 의미 있는 ‘장소’들이 많은 기억의 도시일수록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도시의 장소들은 감동, 기쁨, 안식, 평안을 제공한다. 장소에서는 공간과의 대화가 이루어지지만, 비장소에서 공간은 그저 상투성과 단절감만 느끼게 한다. ‘장소’는 없고 오로지 필요에 의해 생긴 기능적 ‘비장소’들만 즐비한 공간에서 살다 보면, 삶이 삭막해지고 각박해지고 알게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며 쫓기게 된다. 그러니까 어느 도시를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 속에는 ‘세렌디퍼티’1)와 ‘장소’의 화학적 결합이 쉽게 일어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도시의 공적인 ‘장소’가 기억과 상상의 연금술을 통해 나만의 장소, 나의 삶에 의미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2)


이처럼 사회학자 정수복의 <파리의 장소들>은 오래된 기억과 스토리(story)가 있는 공간을 ‘장소(place)’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노포(老鋪)라고 부르는 백 년 가게들도 누군가의 장소일 것이다.

그렇기에 파리고등응용예술대학 학생이었던 쑨이멍[孫藝萌]이 일러스트레이션 과제로 그렸던, 파리 백 년 가게들에 대한 책인 <파리 골목마다 백년 가게>에 손이 갔다. 그녀는 가게들을 찾아 다니며 가게의 역사, 가게 사람들의 이야기, 상품에 대해 취재하고 이를 일러스트와 함께 짧은 글로 옮겼다. 다만 50곳이라는 많은 장소를 한정된 지면에 소개하려고 하다 보니 정보의 양이 아쉽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백년 가게’라는 이름의, 추억과 이야기가 얽힌 장소들


노포(老鋪) 혹은 백년 가게라고 하면 흔히 대(代)를 이어 운영되는 오래된 식당을 떠올린다. 여기에는 대장간처럼 산업혁명 이후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사라진 수공업 가게들도 한 몫하고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오래된 식당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이 책에서 요식업이 아닌 다른 업종의 백년 가게들도 소개하고 있는 것이 기껍다.
요식업에 해당하는 ‘아름다운 맛을 파는 가게’ 17곳을 제외하며 ‘특별한 기념품이 필요할 때 갈만한 가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파리 시민이 아닌 이상, 우리는 파리에 출장처럼 업무상으로 방문하거나 관광하기 위해 방문하게 된다. 어느 쪽이든 기념품 혹은 선물 생각이 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향초(트루등), 향수(불리오리자 엘 로그랑, 화장품(데따이유), 파이프(아 라 피프 뒤 노르), 자수(아니 부케) 등에 시선이 가게 된다.
기념품에 관심이 없는, 자타공인의 ‘책벌레’라면 ‘문화가 가득한 가게’에서 소개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골 가게이자 문학에 대한 토론의 장이 펼쳐졌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17세기 이후 문헌자료의 벼룩시장이라는 라 갈캉트, 고전 만화책과 잡지가 가득한 뤼테스, 희귀 중고서적을 사고파는 리브레리 주솜 등에 군침이 흐를 것이다.

라 갈캉트(La Galcante)

출처: <파리 골목마다 백년 가게>, pp. 76~77


혹시 현지인의 일상이 궁금한 이라면, ‘파리 시민의 일상이 있는 가게’에서 소개하는 꽃집(라숌), 약국(파르마시 생토노레오루즈), 주방용품 가게(E. 드일르랑), 공구점(게냐르 미용), 담배 가게(아 라 시베트) 등에 관심이 갈 수도 있다.

파르마시 생토노레(Pharmacie Saint-Honore)

출처: <파리 골목마다 백년 가게>, pp. 106~107


어쩌면 이런 백년 가게들이야말로, 흔히 ‘파리’라고 하면 떠올리는, 예술과 문화의 1번지에 걸맞은 관광명소가 아니라 오래된 기억과 스토리(story)가 있는, 진정한 파리의 장소들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해당 장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 이에게는 추억을 되새겨줄 좋은 매개체가 될 듯하다. 또 파리를 방문하지 않았더라도 파리만의 감성을 느
껴보고 싶은 이에게도 괜찮은 선택이 될 것 같다. 다만, 2%부족한 정보 때문인지, 파리 관광을 위해서라면 이 책 이외에 여행가이드북과 같은 다른 책도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1) 세렌디퍼티(serendipity): 완전하게 우연히, 예상치 않게, 기분 좋은 발견을 하는 재능


2) 정수복, <파리의 장소들>, (문학과지성사, 2010) , pp.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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