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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일사 - 부산 선비, 근대 일본을 목격하다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1
박상식 지음, 부산박물관 옮김 / 서해문집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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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산 사람은 사행일기(使行日記)를 남기지 않는 것일까
<동도일사(東渡日史)>는 부산광역시의 모태인 동래부(東萊府) 사람이 쓴 유일한 사행일기(使行日記)라고 한다. 조선 후기부터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포함한 12차례의 통신사(通信使)와 개항 이후 4차례의 수신사(修信使)가 일본으로 파견되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의외의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부산 사람이 통신사나 수신사 일행에 참가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고구마 종자를 전파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조엄(趙曮, 1719~1777)을 정사(正使)로 하는, 1763년 통신사에는 적어도 두 명의 부산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계미수사록(癸未隨槎錄)>을 쓴 제2기선의 기선장(騎船將) 변탁(卞琢)과 <부산진 순절도(釜山鎭 殉節圖)> 등을 남긴 제3기선의 기선장 변박(卞璞)이 바로 그들이다. 비록 변탁이 <계미수사록>을 남겼지만, 이는 통신사 일행이 타고 갈 기선(騎船)과 복선(卜船)의 제조 과정과 운항 실태를 기록한 것이라서 일반적인 사행일기(使行日記)와는 거리가 있다. 이들이 남긴 글과 그림으로 볼 때, 사촌간인 이들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역관 집안인 밀양 변씨(密陽 卞氏)의 일원이지만, 사행일기를 남기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들 지방의 중인들은 나랏일은 나와 상관없다고 선을 긋고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사행일기를 쓰지 않았거나 썼더라도 전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동도일사(東渡日史)]의 구성과 내용
그런 의미에서 중앙의 사대부 출신 관료가 아닌 지방의 중인 출신 향리가 남긴 <동도일사>는 독특하면서도 소중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박상식(朴祥植, 1845~1882)의 <동도일사>는 어떻게 구성되었고,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을까?
<동도일사>는 크게 3부분, 즉 박상식 본인의 사행일기[1부], 1880년 7월 6일에서 8월 4일까지 정사(正使) 김홍집(金弘集, 1842~1896)과 일본 외무성 관료들이 주고 받은 문답[2부], 수신사 관련 공문[3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김홍집과 일본 외무성 관료간의 문답이 기록된 2부다. 왜 저자가 이것을 기록해서 자신의 사행일기에 남겼을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향서기(鄕書記)라는 직책으로 수신사에 합류한 저자의 이 결정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당시 조선과 일본이 가진, 날것의 생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보면,
7월 6일 차관보에 해당하는 외무소보(外務小輔) 요시카와 아키마사[芳川 顯正, 1842~1920, 이하 ‘요시카와’]와의 대화가
요시카와: 귀국의 사신은 이번 행차에 며칠 머물 것인가?
나[김홍집]: 한 보름 계획하면 일을 마치고 도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요시카와: 병사(兵士)의 기숙사[寮舍]와 기국(機局)은 볼 것이 많은데 여행기간이 이처럼 촉박한가?
나: 종전 통신사의 행차는 이보다 더 되지 않았다. 또한 병학(兵學)과 기계(器械)는 이 사신이 어수룩해서 평소에 아는 바가 없어서 보더라도 도움될 것이 없다. [p. 87]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조선의 집권층은 두 번째로 수신사를 보내는 순간까지도 일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겠다는 자세가 안 보인다. 어쩌면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일본에 대한 시혜(施惠)라고 여기는 시각을 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이는 수신사로 파견된 59명 중 실무를 담당한 것은 당상관 이종무(李宗懋), 군관 윤웅렬(尹雄烈, 1840~1911), 서기 이조연(李祖淵, 1843~1884)와 강위(姜瑋, 1820~1884), 반당(伴倘)1) 지석영(池錫永, 1855~1935) 등 19명이고 나머지 2/3가 사행 때 부절(符節)과 부월(斧鉞)을 받들고 가는 절월수(節鉞手), 나팔수(喇叭手), 가마꾼 등 의례를 위한 인원이었다는 점에서도 엿보인다.
또한 일본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이에 따른 소요시간에 대한 예측도 없었던 것 같다. 요시카와와의 대담에서 보름이라고 언급한 일정이 두 배로 늘어 한 달이 된 것은 이를 반증(反證)한다.
7월 8일 차관급인 외무대보 우에노 가게노리[上野 景範, 1845~1888, 이하 ‘우에노’]와의 대화는
우에노: 우리 나라는 요즈음 부강해지는 기술을 모두 터득했다. 귀국도 부강해지기를 원하는 만큼 상무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요즈음 세계의 형세가 일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순치의 도움이 있어야 하니, 귀국과 함께 동심동력(同心同力)으로 군무(軍務)나 기계 등 어느 곳이나 서로 이끌어 구라파(歐羅巴)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나: 귀국의 왕성한 의욕이 이러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정부에 일찍 알게 해 주어 감사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강토(疆土)가 한구석에 있고 서쪽에는 청국, 동쪽에는 귀국이 있는데 그 밖의 다른 나라는 처음부터 경계를 접하지 않고 왕래도 없으므로 조야(朝野)의 인심이 옛 규정만 지키니 오늘날의 사세가 실행하기 쉽지 않은 바가 있다. [p. 95]
라고 기록되었는데, 여기에는 시대의 변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옛 것만 묵수(墨守)하는 조선 지배층의 모습이 엿보인다.
하긴, 오죽 답답했으면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팔’이라는,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 1836~1915]가 수신사 일행이 떠나기 직전인 8월 3일에 만났을 때 충고까지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이노우에]: 각하가 돌아가 보고할 지라도 조정에서는 들어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충고하지 않을 수 있나? 서양 각국은 먼저 수호하기만 바랄 뿐이지 서둘러서 반드시 통상을 하려 하지 않는다. 현재 귀국의 계획을 보건대 병사와 기계는 배울 필요가 없고 오직 빨리 몇 사람을 파견해 이곳에 와 머무는 동안 각국의 교제 사정을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허술하게 듣지 마시기 바란다.
만약 위험에서 안전하게 회복하고 재해에서 유리해진 뒤에도 성의를 마음에 두지 않으면 다시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 조정에서 명령하는 뜻을 미리 알 수는 없을지라도 어찌 감히 하나하나 상세히 아뢰지 않겠는가?
그: 예조의 원서계(原書契)2) 외에 각국 사정을 하나로 마련해 별도로 함에 넣어 올린다. [pp. 105~106]
뿐만 아니라 김홍집은 일본을 경계한 것인지 오랑캐라고 멸시하는 화이관(華夷觀)이 발동한 것인지 몰라도 묘하게도 일본인과의 교류에 소극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인천항 개항과 관세문제에 대한 재논의를 목적으로 파견되었는데, 전권위임장과 초안을 아예 준비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신사를 파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논의의 기회를 상실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김홍집만 일본인에 대해 이런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박상식도 7월 11일 사행일기에서 일본에 대한 선입견을 노출한다.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와 공사 하나부사가 와서 이야기를 했다. 모두 천하의 형편과 세계의 대세를 이야기했는데 과장된 저의가 아닌 것이 없었다.
~ 중략 ~
그 자랑하고 과장하는 버릇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pp. 57~58]
뿐만 아니라, 7월 17일 일기에서 서양 각국을 양이(洋夷)로만 여기는 시선을 드러낸다.
오후에 10리쯤 돌아가 도서관에 갔더니 바로 성묘(聖廟)3)였다. 밖에서 들어가니 문이 셋 있는데 첫 번째는 서적관(書籍館)이고 두 번째는 입덕문(入德門)이고 세 번째는 행단(杏壇)인데 정전(正殿)에 대성전(大成殿)이라는 액자(額子)가 걸려 있었다.
~ 중략 ~
메이지[明治] 이후 양서(洋書)를 조금 두었는데 그 수가 오히려 많으니 생도(生徒)가 모두 오랑캐로 변하고 유풍(儒風)은 거의 잠잠하다고 한다. [p. 64]
그런데 신기한 것은 수신사의 일원으로 방문한 기계공작소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서술했지만, 유곽(遊廓)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유곽이 있는 오시와라[吉原]를 묘사하는 7월 15일의 일기와 기계공작소를 설명하는 7월 16일의 일기는 그들이 얼마나 서양 문물에 대해 무지하고, 관심이 없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기계공작소에 들르니 쇠를 다루고 나무를 다듬는 일을 오로지 기관차의 힘에 의존하고 있으니 참으로 천기(天機)를 쏟고 화공(化工)을 모으는 것이라 할 만하다. [p. 63]
멀리 높은 누각과 큼직한 집들을 바라보니 몇 리에 걸쳐 있는지 알 수 없는데 층마다 난간에 채색등이 상. 중. 하 세 줄로 걸려 있고, 창문에는 수를 놓았다. 반쯤 걷어 올린 주렴 속에는 아가씨들이 백옥(白玉)같은 용모로 너덧 혹은 예닐곱씩 짝을 지어 있었다. 모두 머리에 금화(金花)를 꽂고 몸에는 청라(靑羅)를 입고 손에는 단선(團扇)을 흔들면서 담소하며 찻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화려한 촛불이 안팎으로 환히 밝히고 있는 것이 흔히 말하는 <요지연도(瑤池宴圖)>와 흡사했다.
~ 중략 ~
조금씩 보고 지나면서 100여 집이 넘었으나 끝을 보지 못했다. 이윽고 계수나무 그림자가 서쪽으로 기울고 향기로운 먼지가 얼굴을 스치니 정신이 피로하고 눈이 어른거려 바로 관소로 돌아왔는데 그 형용을 생각해 보면 춘몽(春夢)에서 깨어난 것 같다. [pp. 61~62]
이것은 일본에서 독촉하니 방문은 하지만, 천(賤)한 기술은 관심도 없다는 마음자세가 반영된 기록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수신사에 참여한 이들이 개방이나 근대화에 찬성한 것은 신기하다. 비록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에 영향 받은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웠지만.
그래서 훗날 김홍집을 비롯해서 이조연(李祖淵), 종두법을 보급하고 독립협회에서 활약한 지석영(池錫永) 등을 동도서기(東道西器)에 기반을 둔 온건개화파로 분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살짝 결이 다른 이도 있다. 갑신정변 참여로 급진개화파로도 분류되는 윤웅렬(尹雄烈)은 적극적인 친일활동은 안 했다지만,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 받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바 있다.
어쨌든 수신사에 실무진으로 참여한 이들이 국제정세에 눈을 떴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동도서기’에서 출발했다는 태생적인 한계는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들은 끝내 조선의 집권세력을 설득하지 못했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올라가 조선을 제대로 바꾸지도 못했다. 결국 이 책에 암시된, 어설픈 충격이 가져다 준 근대화 욕구는 우리가 아는, 예정된 비극으로 치달았다. 읽으면서 왠지 입 안이 씁쓸해졌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반당(伴倘)은 조선시대 종친, 공신, 당상관들에게 그 특권을 보장하고 신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급한 일종의 호위병이다. 2) 서계(書契)는 조선시대 일본과 내왕한 공식 외교문서를 의미하고, 원서계(原書契)는 그 원본을 가리킨다. 3) 성묘(聖廟)는 공자(孔子)의 신위(神位)를 받드는 묘우(廟宇)로 공자묘(孔子廟) 혹은 문묘(文廟)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