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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다 1 - 흠영 선집 ㅣ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9
유만주 지음, 김하라 편역 / 돌베개 / 2015년 7월
평점 :
유만주(兪晩柱, 1755~1788). 그는 한 양반 가정의 외아들로 자라, 두 여성의 남편이자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갔다. 그리고 서른넷이라는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삶의 대부분을 혼자서 읽고 쓰는 데 할애하여 스물네 권의 방대하고 치밀한 일기 <흠영(欽英)>을 남겼다.
이렇게 그의 삶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 흔한, 주변부의 삶을 산 사대부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흠영>을 남기지 않았다면, 아니 남겼더라도 누군가 그 일기를 연구하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역사에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흠영>을 제외한다면 그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13년간 일기를 꾸준히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몇 배의 기간 동안 일기를 쓴 경우도 많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역법 체계 및 책력(冊曆)인 ‘시헌력(時憲曆)’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후 일기 쓰기가 본격화된 것을 감안하면 <흠영>의 특별함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삭주부사(朔州府使, 정3품)와 우림위장(羽林衛將, 정3품)을 역임한 노상추(盧尙樞, 1746∼1829)가 68년간 기록한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영의정(領議政, 정1품)을 역임한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71년간 기록한 <경산일록(經山日錄)> 등과 비교해 보면 <흠영>의 저자인 유만주가 일기를 쓴 기간이나 저자의 경력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만주의 <흠영>은 특별하다. 왜냐하면, <흠영>에는 다른 사대부의 일기와 달리, 우리가 흔히 ‘근대(近代)’를 얘기할 때 언급하는 ‘개인’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의 등장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인간이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양반 사대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안동 김씨 김좌근(金左根)의 아들 ‘김병기(金炳冀)’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만주는 과거시험 응시자인 거자(擧子)라는 불안정한 처지 때문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얘기하고자 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1786년 2월 16일 눈이 내리고 으슬으슬했다. 저녁 무렵 눈발이 날리다 간혹 그쳤다.
과거 응시생이라는 명목을 취하지 않으면 한미한 딸깍발이로 손가락질을 받고, 조금 구두를 떼어 읽을 줄 아는 정도라면 촌학구라는 비웃음을 받으며, 가난하여 의지할 데 없으면 파락호라는 지목을 받는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가 아닐 터이다. [p. 86]
라는 1786 년 2월 16일 일기는, 오늘날 우리가 계속해서 대학 입시에 실패한 장수생(長修生)에게 보내는 날 선 시선이 그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1782년 2월 6일 일기에서
세 선비가 각자 자기가 잘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길흉을 점치고 미래를 헤아리며 기문둔갑(奇門遁甲)을 하는 데 능하오. 좋고 나쁜 일을 미리 알 수 있소.”
다른 한 사람은 말했다.
“나는 쇠로 된 활을 당겨 300걸음 밖의 과녁을 쏠 수 있소. 백발백중이라오.”
나머지 한 사람은 말했다.
“나는 병든 사람을 고쳐 줄 수 있소. 천만 가지 이상한 질병도 모두 그 자리에서 치료할 수 있단 말이오.”
그때 어떤 사람이 밖에서 들어오자 세 선비는 그에게 무엇을 잘하는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다른 재주는 없고, 다만 과거 시험장에서 제한 시간 안에 답안을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을 잘합니다.”
세 선비는 맥이 풀려 서로 돌아보다 이렇게 말했다.
“재주 있는 건 당신이구려. 우리는 아무 쓸모가 없소이다.” [p. 115]
라고 하여, 사람마다 타고난 재주가 다른데 그것을 무시하고 단 한 가지만 요구하는, 당시의 관리선발제도에 대해 풍자의 방식으로 비판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책을 보고 글을 읽는 것은 그저 작문을 익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십중팔구는 지식과 사고를 넓히고 품격을 온전하게 지키고 자신의 가능성을 펼쳐 나가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저 읽고 보기만 한다면 대단히 무의미한 행동이 될 테니 아주 그만두어 버려도 괜찮다. [p. 257]
심지어 1784년 12월 13일 일기를 통해 지식과 사고를 넓히고 품격을 지키고 자신의 가능성을 펼치기 위함이 아니라면 독서인인 사대부라도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까지 한다.
거칠게나마 책을 엮고 글을 고르는 법을 터득했으니, 남이 건성으로 보는 것을 나는 깊이 응시하고, 남이 아무렇게나 버리는 것을 나는 때로 신중히 모은다. 그 가운데서 글의 정밀하고 오묘한 뜻을 이해할 수 있고, 책을 엮어 내는 데 기준이 되는 범례를 정할 수 있는 것이다. 나 혼자 생각으론, 이렇게 함으로써 수백 권의 새로운 총서(叢書)를 이루어 내고 경사자집(經史子集) 네 분야의 책들을 총망라하여, 천고의 역사를 포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한다면 살아 있는 동안 마음이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있게 되고 죽은 다음에는 이름을 남길 수 있으리니, 나의 이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게 될 것이다. [pp. 28~29]
공적인 저술로는 정돈되지 않은 <춘추합강>의 초고가 책 상자에 넘쳐나고, 사적인 저술로는 자잘한 글씨로 쓴 <흠영징류>가 한 권을 채웠다. <흠영징류>를 써서 나의 일생을 정리하고, <춘추합강>을 써서 만고의 역사를 살펴 검토했으면 한다. [p. 58]
또한, 1778년 10월 1일과 1780년 6월 21일의 일기에서 드러났듯이 그는 관리가 아니라 역사가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그를 ‘루저(Loser)’라고 여긴다. 이것은 그 당시만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을 역사 연구가라고 소개하면 그것을 ‘백수’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더욱더 지도, 역사책, 여행에 집착하게 된 것이 아닐까?
<흠영>의 편역자인 김하라 교수는 유만주를 두고
유만주가 좋아하는 것 다섯 가지 가운데 지도와 역사책은 공간과 시간의 차원에서 자유를 얻게 해주는 도구로서 의미를 가진다. 좁고 복잡한 18세기 후반 조선의 서울이라는 국한된 시공간을 벗어나 더 넓은 세계를 거침없이 밟아 볼 수 있게 하고, 인간의 시간을 훌쩍 초월하여 천고의 역사를 투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지도와 역사책인 것이다.
‘여행이 편하다’고 한 것 역시 지도와 역사책을 좋아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행자가 되어 길 위에 선 순간 자유를 얻는 것이다.
안과 밖을 구분하고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도구인 주렴에 대한 애착은 무얼 의미할까? 아마도 자신의 고유성을 지킬 수 있는 내면 공간을 갈구하던 심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p. 44]
라고 평가한다.
어쩌면 유만주가 그렇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일기를 통해 해명하려고 한 것도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자신이 바라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갈등을 벗어나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우연히 벽에 걸린 지도를 보고 나도 모르게 세 번 빙그레 웃었다. 천하는 크다. 어찌 ‘나’라는 존재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 좁고 자질구레하고 하찮으며 구차한 하나의 모퉁이에서 금세 생겼다 소멸하는 존재임에랴. 누가 알아주겠는가. [p. 34]
라는 1785년 11월 21일의 일기처럼 자조적인 내용이 실리는 것도 그런 내적 갈등이 빚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사실 <사기(史記)>를 남긴 사마천(司馬遷) 같은 비범한 역사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저 역사책을 좋아하고 즐기는 평범한 양반에 불과하다는 괴리에서 오는 자괴감은 쉽게 해소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젊고 맡은 일이 없으며 주변에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없기에 더욱 이 것을 진지하고 깊게 고민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1783년 6월 27일 일기를 보면, 자신의 일기, <흠영>에 대한 자부심도 엿보인다.
1783년 6월 27일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하지만 나의 글은 <흠영>에 있고, 나는 시를 잘 쓰지 못하지만 나의 시는 <흠영>에 있으며, 나는 말을 잘 못하지만 나의 말은 <흠영>에 있다. 나는 하나의 땅에서 경제제민(經世濟民)하는 일을 할 수 없지만, 내가 어떤 땅에서 경세제민 하고자 한 것은 <흠영>에 있다. <흠영>이 없으면 나도 없다. [p. 60]
이처럼 자신의 일기 <흠영>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늘어놓은 유만주가 도달한 결론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여행을 편하게 느끼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여행은 일상에서의 탈출 혹은 일탈로 여겨진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끌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듯이, 조선시대에 ‘개인’이라는 근대성의 싹을 피어낸 유만주도 다방면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1783년 7월 11일 일기에서 토로했듯이 그가 행장(行裝)을 꾸려 여행 다니는 것을 편하게 여기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여행을 괴롭게 여기지만 나는 여행이 편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지자(知者)와 더불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p. 41]
아쉽게도 유만주의 일기 <흠영>에서 엿보인 ‘개인’의 싹은 그가 서른넷에 요절하고, 또 주변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해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스러진 것 같다. 이런 싹들이 잘 자랐다면 한국의 근대도 조금 다른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아쉽고 애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