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묻고 미생물이 답하다 - 공생하고 공격하며 공진화해 온 인류와 미생물의 미래 묻고 답하다 6
고관수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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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 역사를 바꾸다 


“2장 최초의 민주주의를 세균이 무너뜨렸다고?”는 흥미로운 얘기를 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기원전 5세기 중반 도시국가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 강대국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을 격퇴했다. 하지만 이후 지중해의 패자가 된 아테네가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펼치면서 이에 반발한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아테네는 몰락한다. 이 몰락에는 단순한 전쟁에서의 패배 외에 지도자인 페리클레스(Perikles)를 비롯한 시민 1/3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 장티푸스 혹은 염병(染病)과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아테네 해군의 노잡이로 투입되면서 사회적 영향력이 커진 4등급의 무산자(無産者)인 테테스(thetes)의 지지에 기반을 둔 중우정치(衆愚政治)도 큰 몫을 했다. 만약, 살모넬라 엔테리카(Salmonella enterica)에 의한 장티푸스가 번지지 않았더라면 전통적인 명문가 출신으로 대중을 설득하고 주체적인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페리클레스 같은 지도층이 계속해서 아테네를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소한 구실로 대승을 거둔 해군 수뇌부를 몰살시키는 멍청한 결정을 내릴 중우정치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패배도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3장에서는 대두창바이러스(Variola major)에 의한 두창(痘瘡) 혹은 마마(
媽媽)로 불리는 천연두가 유럽인에 의해 유입되어 이에 대한 면역이 없던 아스테카 왕국과 잉카 제국에 치명적인 피해를 끼쳤음을 얘기한다. 4장에서는 산업혁명으로 도시에 대규모로 유입된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근무하면서 미코박테리움 투베르쿨로시스(Mycobacterium tuberculosis) 혹은 결핵균에 의한 결핵이 대규모로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5장에서는 콜레라균(Vibrio cholera)이 세계화에 따라 수 차례 팬데믹을 발생시켰다는 사실과 최초의 역학조사를 통해 나쁜 공기가 아닌 오염된 물을 통해 콜레라가 전염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도시 위생 개혁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6장에서는 H1N1 A형 독감 바이러스로 인해 발병한 소위 ‘스페인 독감’이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 처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언급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2장에서 6장까지 어떤 미생물이 원인이 된 질병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와 그 미생물을 발견하는 과정 등을 얘기한다.


인간과 미생물의 공존

“7장 포스트 항생제 시대, 미생물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부터 앞 부분과 다소 결을 달리하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항생제의 대표로 인식된 페니실린이 상징하는 세균 박멸은 어떻게 보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서양의 시각이 담겨있다. 하지만 한때 효율적이었던 항생제의 사용은 내성(耐性)문제가 불거지면서 주춤하고 있다.
 

항생제 내성으로 기존의 항생제가 쓸모 없어지는(이미 쓸모 없어진 경우도 없지 않다) 상황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메커니즘을 갖는 항생제 개발의 어려움, 비용과 수익성의 문제, 임상시험의 복잡성, 내성 문제 등으로 많은 제약회사가 항생제 개발에서 발을 빼는 실정이다. 어쩌면 우리는 흔한 세균 감염에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포스트 항생제 시대(Post-antibiotic era)’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다시 우리의 미래를 세균에 저당 잡힐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벌써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p. 175]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인체에 존재하는 미생물의 집단적 유전체인 마이크로바이옴 연구를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조현병(調絃病), 자폐스펙트럼장애(ASD), 파킨슨병 등 다양한 병이 마이크로바이옴의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생물은 지구에 최초로 나타난 생명체이면서, 외치1)가 그랬듯 인류가 존재하는 순간부터 함께해왔다. 마이크로바이옴에 관한 지식이 쌓여가면서 단순히 함께해온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건강은 물론 정신세계에까지 몸 속 미생물의 영향이 뻗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생물은 부단히 인간을 바꿔왔다. 어쩌면 인간은 미생물에 종속된 존재가 아닐까? [pp. 223~224]


심지어 위의 글을 읽다 보면, 인간의 성격이나 건강을 미생물이 좌우하는, 나아가 인간이 숙주라는 느낌까지 든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미생물은 미생물의 일을, 인간은 인간의 일을 각각 하고 있었을 뿐이다. 단지, 인간이 그것에 선악을, 이로움과 해로움을 부여하거나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미생물이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것 또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때문이다. 증식이라는 미생물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존재가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생물의 목적을 인간 역사에서 파괴적인 역할로 전환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 중략 ~

기회주의적 병원체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즉 인체의 방어 능력이 약해졌을 때만 병을 일으킨다. 대부분의 병원체가 기회주의적이라는 말은 많은 미생물이 인체 내에서 대체로 중립적이라는 뜻이다. 인간 면역력은 완전하지 않기에 감염되는 사람이 생길 뿐이다. 또한 도움이 되는 미생물도 적지 않다. 물론 중립적인 미생물의 다양한 특성을 인간이 이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시 한번 깨닫는 것이지만, 결국은 사람의 손에 달렸다. [pp. 247~248]


덧붙이자면, 이런 
마이크로바이옴 연구에 자연을 공존의 대상으로 보는 동양의 시각이 담겼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과거 우리는 세균을 비롯한 미생물을 질병을 일으키는 못된 녀석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해로운 세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한 미생물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뿐만 아니라, 해롭다거나 이롭다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미생물을 나눌 수 없으며, 대신 미생물 군집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미국 뉴욕 대학의 마틴 블레이저(Martin Blaser)가 인간 진화의 운명이 우리의 마이크로바이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듯이, 미생물은 과거뿐 아니라 곧 현재가 될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미생물을 이용한 질병 치료로 나아가고 있다. 인류가 아직도 달성하지 못한 질병에서의 해방은 어쩌면 미생물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pp. 243~244]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저자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1) 외치(Otzi): 5,300년 전(청동기 시대)에 자연 냉동된 성인 남성의 미라. ‘아이스맨(Ice man)’이라는 별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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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의 모험 비룡소 클래식 50
카를로 콜로디 지음, 아틸리오 무시노 그림, 이승수 옮김 / 비룡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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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권리와 책임의 다른 이름

우리에게 ‘피노키오’로 기억되는 <피노키오의 모험, 꼭두각시 이야기(이하 ‘피노키오의 모험’>는 흔히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우화로 알려져 있다. 물론 나도 어렸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읽은 <피노키오의 모험>은 어린 시절과 다르게 다가왔다.

꼭두각시!
다들 알고 있다시피 ‘끈’과 ‘조종자’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존재다. 어쩌면 이것이 꼭두각시로 만들어진 존재의 숙명일 것이다. 그런데 피노키오는 다른 꼭두각시 인형과 달리 기적적으로 스스로 말할 줄 알고, 움직일 줄 알고,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아는 존재로 태어났다. 아니,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어지기 전, 늙은 목수 안토니오 혹은 버찌 할아버지에게 나무토막 상태로 발견되었을 때부터. 그래서 피노키오는 마치 인간처럼 ‘자유의지’가 부여된 인형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태초에 자유의지가 부여된 아담과 이브가 신이 정한 길을 벗어나 뱀의 유혹에 빠진 것처럼 피노키오도 다양한 유혹에 넘어간다. 물론 자유의지로 진흙탕에 뛰어들었으니 그 대가도 아담과 이브처럼 당연히 치러야 했다.

이 책, <피노키오의 모험>은 36개의 에피소드로 그 과정을 담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은 피노키오라는 주인공이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견뎌내고 인간이 되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의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 1부를 떠올릴 수도 있다.



당대 이탈리아 사회에 대한 풍자에서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우리가 단순히 동화로 인식하는 <피노키오의 모험>은 원래 지금의 절반도 안 되는, 15번째 에피소드로 끝날 예정
이었다고 한다.
15번째 에피소드 마지막은


피노키오는 눈을 감고, 입을 벌리고, 두 다리를 쭉 뻗었어요. 그리고는 한 번 크게 버둥거리더니 굳어 버린 듯 꼼짝하지 않았답니다. [pp. 99~100]


로 끝나는데, 누가 봐도 이것은 피노키오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결말이 나오게 된 것은 <피노키오의 모험>이 저자인 카를로 콜로디(Carlo Collodi, 1826~1890)가 살던,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사회를 향한 풍자와 상징으로 가득 찬 작품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피노키오부터 ‘이탈리아인’하면 떠올리는 일하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피노키오는 아직 ‘이탈리아인’이라는 소속감이 갖춰지지 않은, 갓 생겨난 이탈리아 왕국(Regno d'Italia, 1861~1946)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 지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알더라도 새롭게 열강이 되었다는 ‘뽕’에 취해 자제할 줄 모르는 이탈리아 사회와 피노키오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피노키오는 판사 앞에서 자신이 당한 몹쓸 사기 사건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어요. 도둑들의 이름과 생김새를 말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법의 심판을 요청했어요.

판사는 아주 친절하게 피노키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어요. 피노키오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였고, 피노키오를 가엽게 생각하고 동정을 표했지요. 피노키오가 설명을 다 끝내자 판사는 손을 뻗어 벨을 눌렀어요.

벨 소리에 곧 병정 옷을 입은 불독 두 마리가 나타났어요.

저 불쌍한 악마는 금화 네 닢을 도둑맞았다. 그러니 저자를 잡아서 즉시 감옥에 가두어라.” [pp. 130~131]


에서는 판사가 사기와 강도 행위를 눈감아 주고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가둔다. 이 에피소드가 사법의 집행자인 판사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지 않고 일단 처벌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는 것을 풍자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사법의 부정을 상징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저자가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사회가 어린이들이 평온, 무사하게 자라나기 힘든, 험난한 사회라고 환경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바보 잡기 도시를 다스리는 젊은 황제가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자 큰 잔치를 베풀었던 거예요. 조명을 환히 밝히고, 폭죽을 터트리고, 경마와 커다란 앞바퀴가 달린 자전거 경주 대회를 열었어요. 그리고 황제는 승리를 축하하는 뜻에서 감옥 문을 열고 도둑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명령했어요.

~ 중략 ~

피노키오가 말했어요.

죄송하지만 저도 도둑이에요.”

“그렇다면 충분히 자격이 되지.”

교도관은 정중하게 모자를 들어 올리며 피노키오에게 작별 인사를 했어요. 그리고는 감옥 문을 열어 피노키오를 내보내 주었답니다. [pp. 132~133]


에서 보이는 모습은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설립된 이후의 남부 이탈리아 사회를 풍자하는 듯하다. 이탈리아의 통일은 프랑스에 뿌리를 둔, 북부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가 주도했다. 그리고 그들은 통일운동의 지지자인 지주층을 의식, 농민들이 원한 토지개혁 등 사회 구조 개혁은 외면하면서도 통일 자금 확보를 위해 곡물세 등을 부과했다고 한다. 이에 반발하여 남부에서는 ‘도적떼’라는 뜻을 가진 ‘브리간타조(Brigantaggio)’라는 게릴라 반란군을 통한 저항이 발생했다. 즉, 이 에피소드는 이탈리아 통일과 이에 따른 ‘도적떼’라는 뜻을 가진 게릴라 반란군의 발생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이를 풍자한 것이 아닐까?

이처럼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사회를 어린이들이 평안 무사하게 자라기 힘든 환경으로 보았기에 저자인 카를로 콜로디도 피노키오가 죽는 새드 엔딩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를로 콜로디는 끝내 피노키오를 부활시켜야 했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 사건>(1894)에서 셜록 홈즈를 죽인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처럼 독자들의 요청으로 주인공을 부활시킨 셈이다. 그런데 카를로 콜로디의 경우, 피노키오를 부활시키면서 유령이 푸른 머리의 요정으로 변화
하는 등 동화적 요소가 향신료처럼 뿌려지는 변화가 발생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사람들은 <피노키오의 모험>을 단순히 동화로 착각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의 애니메이션 <피노키오>(1940)의 역할이 크다. 그에 의해 <피노키오의 모험>이 가지고 있던 사회를 향한 풍자와 상징이 거세되었으니까.



꼭두각시가 아닌 인간, 피노키오의 입장에서는 축복일까 저주일까?

분명히 어떤 버전을 선택해도 새롭게 만들어진 결말은 똑같다. 요정이 꼭두각시 나무인형 피노키오를 활기찬 모습의 소년으로 바꾸어 준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 해피 엔딩일까?
이야기 속의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면, 인간이 된 피노키오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피노키오는 다섯 달 넘게 매일 아침 해 뜨기 전에 일어났어요. 물레방아 바퀴를 돌리고, 아빠의 건강에 아주 좋은 우유 한 잔을 벌어 오기 위해서였지요. 이것만이 아니었어요. 남은 시간에 갈대로 광주리와 빵 바구니 엮는 법을 배웠고, 바구니를 만들어 번 돈을 아끼고 아껴서 생활비로 썼어요. [p. 296]


꼭두각시 시절에 했던 노동을 반복하는, 피곤한 노동자의 삶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물론 요정이 은화 40개를 금화 40개로 바꿔주었지만, 5개월 정도 노동하고 은화 40개를 저축할 수 있었다면, 금화 40개도 신세를 바꿔줄 만큼 큰 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피노키오의 입장에서 꼭두각시 인형에서 인간으로의 신분상승(?)이 보상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왠지 카카오99% 초콜릿을 한 입 머금은 것 같은 씁쓸한 기분이 든다.


1) 원래 결말은 피노키오가 여러 잘못을 저지르다 결국 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것이었으나, 반응이 너무 좋았기에 편집자의 요구로 피노키오가 파란 요정의 도움을 받아 되살아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2) 15번째 에피소드에서 짙은 파란 머리 소녀는 피노키오에게 “나도 죽었어”, “ 날 실어 갈 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라고 대답하며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6번째 에피소드에서 갑자기 (알아 둘 필요가 있겠네요. 짙은 파란 머리 소녀는 천 년 전부터 그 숲에 살고 있는 아주 마음씨 고운 요정이었어요.)라는 추가 해설이 삽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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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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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남에게 보여지는 ‘나’에 대해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이 소설 <눈부신 안부>의 화자(話者)인 이해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가스 폭발 사고로 친언니 이해리를 잃었기에 그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의 시선을 더 의식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도 크지만, 뜻하지 않는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더 클 것이다. 그렇기에 모범생이던 큰 딸 이해리를 가스 폭발 사고로 잃은 해미의 부모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별거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서로를 볼 때마다 그 아픔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 테니까.

그런데 자식을 잃은 부모만 힘겹고 언니를 잃은 해미는 괜찮을까? 해미는 언니에게 “땡땡이 치지 못하는 범생”이라고 놀렸기 때문에 언니가 조퇴하고 거리를 거닐다 사고를 당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아직 어리고 언니에 대한 기억도 적을 여동생 해나까지 의식하면서, 그녀는 멀쩡하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면서 괴로움을 삭혀야 했다.


살아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언니였다면 언니는 틀림없이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주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좋아요.”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엄마 아빠를 위해 그렇게만 말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 [p. 30]


엄마를 따라 해나와 함께 옮겨간 곳은 독일 중부의 G시였다. 수많은 장소 가운데 G시를 선택한 것은 엄마의 언니인 ‘행자 이모’[오행자]가 정착한 곳이라는 점도 한몫 했다. 갑자기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의 도시에서 살게 되었지만, 해미는 가족을 의식해서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했다. 바둑에서 훈수 두는 이처럼, 제3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고독과 불안이 잘 보이는 것일까? 간호조무사로 건너가 의사로 정착한, 행자 이모는 그런 해미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진짜 친구를 소개시켜 준다. 바로 그녀보다 한 살 위인, 마리아 이모[최말숙]의 딸 ‘레나’였다. 이렇게 만난 레나와 친해진 후 해미에게 가상이 아닌 현실의 친구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 아이들과 있을 때면 나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나라에서 이주해온 이방인도, 언니를 사고로 잃은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그곳에서 나는 그저 온전한 나였고, 레나는 온전한 레나였으며, 우리는 온전한 우리였다. 그런 시간은 이모가 시장에서 떨이로 사온 무른 산딸기나 살구로 만들어주던 잼처럼 은은하고 달콤해서, 나는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는 걸 배웠다. [p. 40]


선의의 거짓말이라지만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다 보니 자신의 얘기가 모순되지 않도록 해미는 자신의 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디서나 노트를 들고 다니며 거짓말을 할 때마다 기록을 하는 해미를 보고 사람들은 그녀가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레나는 해나에게 뇌종양에 걸린 선자 이모[임선자]의 아들 ‘한수’를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레나와 해미는 선자 이모가 기억을 잃기 전에 그녀의 첫사랑을 만나기를 원하는 한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이들은 첫사랑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선자 이모의 일기를 몰래 읽어나갔다. 일기 속에는 선자 이모가 1973년 독일로 떠나온 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간직해온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흩어져 있다. 하지만 그 첫사랑이 누구인지를 명확하지 않았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 첫사랑의 이니셜이 ‘K.H.’라는 사실뿐이었다.


석사학위까지만 받기로 아빠에게 약속하고 독일로 건너왔던 엄마는 학위를 따게 되면 박사과정까지 진학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해나는 한국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독일어로만 말했고, 나는 도시를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곳이 내 자리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 가족도 행복에 거의 가까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언니가 떠오르면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의 행복이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찌를 때마다 속으로 언니에게 말을 걸어야 했을 만큼의 행복.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p. 109]


그러나 자신이 있을 곳을 드디어 마련했다는 따스한 안도감도 잠시,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해미의 가족은 갑자기 한국, 정확히는 아빠가 사는 부산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느새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境界人)이 된 해미는 타인과의 깊은 교류를 자제하게 된다. 심지어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만나 미묘한 감정을 주고 받던 ‘우재’와도 친구와 연인 사이의 선(線)을 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우재는 해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그 과정에서 해미는 상자에 담아 묻어두었던 선자 이모의 일기와 편지를 떠올리고, 늦었지만 그녀의 첫사랑 K.H.를 다시 한번 찾아본다.


나는 네 마음을 그저 짐작하고 내 마음을 조심스레 암시하면서 두려워만 하다가 너를 잃었다. [p. 299]


선자 이모에게 들은 힌트로 그 사람의 이름이 K.H.로 시작되는 수학시간에 쓰는 용어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해미는 K.H.를 ‘기호(記號)’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해미는 K.H.가 ‘근호(根號, 제곱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끝내 K.H.를 찾아 선자 이모의 일기와 편지를 전할 수 있었다. 비로소 오랫동안 고스란히 묻어두었던 상처를 들추어 실패로 남겨두었던 지난 일들을 바로잡은 셈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늘 동경했던 시인이 되지도 못했고, 뼈아픈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어.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pp.30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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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킷 - 제1회 위즈덤하우스 판타지문학상 청소년 부문 대상 수상작 텍스트T 7
김선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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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의 상실, 비스킷이 되어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성제성(이하 ‘제성’)은 남들보다 예민한 청각으로 인해 ‘청각 과민증’, ‘소리 공포증’, ‘소리 강박증’이라는 청각 관련 질환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이 예민한 청각 덕분에 자신을 지키는 힘을 잃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사람’이라고? 수련을 통해 닌자[忍者]가 된 사람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투명인간이 된 것일까? 아쉽게도 그들은 닌자가 되기 위해 끝없이 수련을 한 것도, 특별한 약을 먹거나 광선을 쐰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의 존재감이 옅어져서 사람들이 그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세상에는 자신을 지키는 힘을 잃어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존재감이 사라지며 모두에게서 소외된 사람.

나는 그들을 ‘비스킷’이라고 부른다. [p. 7]


이들 비스킷을 제성은 어떻게 찾아냈을까?


나는 비스킷을 소리로 인지한다. 미약한 숨소리, 힘없는 발소리, 가볍게 스치는 옷감의 소리를 듣고 그들이 주변에 있다는 걸 안다. 일단 그 소리를 인식하면 곧이어 모습이 보인다.

비스킷은 대체로 형체가 희미하다. 희미한 정도는 비스킷이 자신을 인식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비스킷의 상태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반으로 쪼개진 상태. 보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딱히 존재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주변 사람들이 “어? 너 여기 있었어? 몰랐네.”라고 말하는 단계이다. 몸 선이 흐리고 전체적으로 선명하지 않다. 시력이 좋은 사람은 1단계 비스킷을 만나면 어쩐지 어두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2단계는 조각난 상태. 열 명 중 다섯 명이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만큼 존재감이 불안정하고 자신을 지키는 힘이 약하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를 보는 것처럼 흐릿해서 보았어도 무엇을 봤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유령이나 초자연 현상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2단계에 해당한다. 종종 목소리를 통해 존재감이 드러나서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주변인들이 깜짝 놀랄 때도 있다.

3단계는 부스러기 상태. 존재감이 없어 세상에서 사라지기 직전인 상태다. 투명인간과 비슷할 정도로 잘 보이지 않아 나도 소리로 찾아내기 힘들다. 이때까지 비스킷 3단계인 사람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비스킷 3단계는 오랫동안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로 여겨왔기에 주위에서 덩달아 관심을 꺼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사라진 비스킷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더욱 숨기는 악순환에 빠진다.

지금까지 관찰할 바로는 비스킷의 단계는 수시로 변한다. 자신을 인정하는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졌다가 재건되기 때문인 것 같다. [pp.7~9]


이런 비스킷을 찾아내다니 뭔가 대단한 능력처럼 보인다. 어쩌면,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대가로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엑스맨>속의 돌연변이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 <엑스맨>속의 돌연변이들과는 달리 제성에게는 자비에 교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신 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제성은 어린 시절 길을 헤매다가 개에게 위협당하는 비스킷인 김효진(이하 ‘효진’)을 구해주었다. 문제는 비스킷 3단계에 도달한 효진이는 투명할 만큼 존재감이 흐렸기에, 개 주인을 비롯한 이를 본 사람들이 제성이 그냥 짓기만 하는 개를 뛰어가서 일방적으로 걷어찼다고 여긴 것이다. 이로 인해 제성은 ‘비스킷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결국 제성은 자신의 존재감을, 비스킷이 된 이를 구하고 그들을 위해 복수하는 것으로 채워나간 셈이다. 분명히 비스킷이 된 이들을 구하는 것은 선의(善意)다 하지만 그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복수하는 것은 다르다. 어떤 형식으로 복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복수는 범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수가 주는 쾌감과 허무함에 중독되면 존재감을 증폭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를 파괴하게 된다. 물론 복수는 하지 않더라도 비스킷을 구하는 것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oller, 18921~1984) 목사의 “처음 그들이 왔을 때”라는 글처럼. 너도, 나도 비스킷이 될 수 있으니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민단원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비스킷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채식주의를 선언했다가 튄다는 이유로 학폭의 대상이 된 서도주(이하 ‘도주’)나 대입을 앞두고 부모님의 절대적인 관심을 받는 언니와 매 순간 신경 써야 하는 우악스러운 동생과는 달리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구걸하듯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배신감을 느낀 조제 혹은 이지안(이하 ‘지안’)처럼 스스로 존재감을 지우는 경우도 있다. 도주의 경우 학폭 가해자에게 복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지안처럼 자신에게 덜 신경 쓰는 부모가 원인인 경우에는 도대체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 할까? 그렇기에 제성의 방식은 어린 시절 치기 어린 미숙함이 빚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제성에게 영화 <엑스맨>속의 자비에 교수처럼 믿을만한 어른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다른 방식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불필요한 악연들은 좀 더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소설에서처럼 아이들만이 비스킷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른들이 더 많이 겪게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해고하는 대신,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한 취급을 하는 방식으로 퇴사를 유도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가 거부당하는 느낌, 혹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는 느낌에 짓눌려 결국 사표를 제출하지 않았을까?


눈으로 보았어도 믿을 수 없는 존재. 보이지 않아도 좌시해선 안 되는 존재. 그 존재들이 모두 인간이고, 우리의 이웃이라는 걸 잊은 듯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만 모두가 공감하는 한 가지 사실은 누구도 비스킷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비스킷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주변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다. 세상에서 소외되면 많은 사람들은 자존감을 잃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용기마저 잃고 만다. 그렇게 스스로 고립을 택하고 자신을 지켜 낼 힘을 잃으면서 단계를 넘나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스스로를 지켜 내기 위해 힘껏 노력하지만, 꾹꾹 눌러 담았던 쓸쓸한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왈칵 쏟아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모습이 희미하게 깜박거린다. 그 때 필요한 건 어디로 나아갈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득함을 함께 바라보고 손잡아 줄 수 있는 누군가다.

누구나 비스킷이 될 수 있다. 또한 누구나 비스킷을 도울 수 있다. 그 전제를 잊지 않으면 모습이 사라져도 서로를 믿고 존중하며 건강하게 서서히 회복할 수 있다. 그걸로 반은 성공한 거다. [pp. 217~218]


(주)마크로밀엠브레인이 올해 4월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대의 59.2%가 일상에서 외로움을 느낀다1)고 한다. 개인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단절된 사회가 가져온 결과인 셈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비스킷’도 이러한 사회 해체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도의 차이가 있고, 수단의 차이가 있어도 우리 사회 역시 ‘비스킷’을 만드는 사회이기에 서점에 가면,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 충페이충[叢非從]의 <자존감 회복 수업>, 김태형의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처럼 ‘자존감’을 다루는 책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이런 종류의 책들이 출판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주위에 또 다른 ‘비스킷’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듯해서 씁쓸했다.



 

1) 정현진, “[청년고립24시]10명 중 6명 ‘외롭다’… 관계단절·박탈감 호소”, <아시아경제> 2024.05.05 (https://v.daum.net/v/20240505063021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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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다 1 - 흠영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9
유만주 지음, 김하라 편역 / 돌베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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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주(兪晩柱, 1755~1788). 그는 한 양반 가정의 외아들로 자라, 두 여성의 남편이자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갔다. 그리고 서른넷이라는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삶의 대부분을 혼자서 읽고 쓰는 데 할애하여 스물네 권의 방대하고 치밀한 일기 <흠영(欽英)>을 남겼다.

이렇게 그의 삶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 흔한, 주변부의 삶을 산 사대부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흠영>을 남기지 않았다면, 아니 남겼더라도 누군가 그 일기를 연구하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역사에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흠영>을 제외한다면 그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13년간 일기를 꾸준히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몇 배의 기간 동안 일기를 쓴 경우도 많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역법 체계 및 책력(冊曆)인 ‘시헌력(時憲曆)’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후 일기 쓰기가 본격화된 것을 감안하면 <흠영>의 특별함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삭주부사(朔州府使, 정3품)와 우림위장(羽林衛將, 정3품)을 역임한 노상추(盧尙樞, 1746∼1829)가 68년간 기록한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영의정(領議政, 정1품)을 역임한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71년간 기록한 <경산일록(經山日錄)> 등과 비교해 보면 <흠영>의 저자인 유만주가 일기를 쓴 기간이나 저자의 경력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만주의 <흠영>은 특별하다. 왜냐하면, <흠영>에는 다른 사대부의 일기와 달리, 우리가 흔히 ‘근대(近代)’를 얘기할 때 언급하는 ‘개인’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의 등장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인간이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양반 사대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안동 김씨 김좌근(金左根)의 아들 ‘김병기(金炳冀)’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만주는 과거시험 응시자인 거자(擧子)라는 불안정한 처지 때문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얘기하고자 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1786년 2월 16일 눈이 내리고 으슬으슬했다. 저녁 무렵 눈발이 날리다 간혹 그쳤다.

과거 응시생이라는 명목을 취하지 않으면 한미한 딸깍발이로 손가락질을 받고, 조금 구두를 떼어 읽을 줄 아는 정도라면 촌학구라는 비웃음을 받으며, 가난하여 의지할 데 없으면 파락호라는 지목을 받는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가 아닐 터이다. [p. 86]


라는 1786 년 2월 16일 일기는, 오늘날 우리가 계속해서 대학 입시에 실패한 장수생(長修生)에게 보내는 날 선 시선이 그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1782년 2월 6일 일기에서


세 선비가 각자 자기가 잘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길흉을 점치고 미래를 헤아리며 기문둔갑(奇門遁甲)을 하는 데 능하오. 좋고 나쁜 일을 미리 알 수 있소.”

다른 한 사람은 말했다.

“나는 쇠로 된 활을 당겨 300걸음 밖의 과녁을 쏠 수 있소. 백발백중이라오.”

나머지 한 사람은 말했다.

“나는 병든 사람을 고쳐 줄 수 있소. 천만 가지 이상한 질병도 모두 그 자리에서 치료할 수 있단 말이오.”

그때 어떤 사람이 밖에서 들어오자 세 선비는 그에게 무엇을 잘하는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다른 재주는 없고, 다만 과거 시험장에서 제한 시간 안에 답안을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을 잘합니다.”

세 선비는 맥이 풀려 서로 돌아보다 이렇게 말했다.

“재주 있는 건 당신이구려. 우리는 아무 쓸모가 없소이다.” [p. 115]


라고 하여, 사람마다 타고난 재주가 다른데 그것을 무시하고 단 한 가지만 요구하는, 당시의 관리선발제도에 대해 풍자의 방식으로 비판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책을 보고 글을 읽는 것은 그저 작문을 익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십중팔구는 지식과 사고를 넓히고 품격을 온전하게 지키고 자신의 가능성을 펼쳐 나가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저 읽고 보기만 한다면 대단히 무의미한 행동이 될 테니 아주 그만두어 버려도 괜찮다. [p. 257]


심지어 1784년 12월 13일 일기를 통해 지식과 사고를 넓히고 품격을 지키고 자신의 가능성을 펼치기 위함이 아니라면 독서인인 사대부라도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까지 한다.


거칠게나마 책을 엮고 글을 고르는 법을 터득했으니, 남이 건성으로 보는 것을 나는 깊이 응시하고, 남이 아무렇게나 버리는 것을 나는 때로 신중히 모은다. 그 가운데서 글의 정밀하고 오묘한 뜻을 이해할 수 있고, 책을 엮어 내는 데 기준이 되는 범례를 정할 수 있는 것이다. 나 혼자 생각으론, 이렇게 함으로써 수백 권의 새로운 총서(叢書)를 이루어 내고 경사자집(經史子集) 네 분야의 책들을 총망라하여, 천고의 역사를 포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한다면 살아 있는 동안 마음이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있게 되고 죽은 다음에는 이름을 남길 수 있으리니, 나의 이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게 될 것이다. [pp. 28~29]


공적인 저술로는 정돈되지 않은 <춘추합강>의 초고가 책 상자에 넘쳐나고, 사적인 저술로는 자잘한 글씨로 쓴 <흠영징류>가 한 권을 채웠다. <흠영징류>를 써서 나의 일생을 정리하고, <춘추합강>을 써서 만고의 역사를 살펴 검토했으면 한다. [p. 58]


또한, 1778년 10월 1일과 1780년 6월 21일의 일기에서 드러났듯이 그는 관리가 아니라 역사가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그를 ‘루저(Loser)’라고 여긴다. 이것은 그 당시만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을 역사 연구가라고 소개하면 그것을 ‘백수’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더욱더 지도, 역사책, 여행에 집착하게 된 것이 아닐까?

<흠영>의 편역자인 김하라 교수는 유만주를 두고


유만주가 좋아하는 것 다섯 가지 가운데 지도와 역사책은 공간과 시간의 차원에서 자유를 얻게 해주는 도구로서 의미를 가진다. 좁고 복잡한 18세기 후반 조선의 서울이라는 국한된 시공간을 벗어나 더 넓은 세계를 거침없이 밟아 볼 수 있게 하고, 인간의 시간을 훌쩍 초월하여 천고의 역사를 투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지도와 역사책인 것이다.

‘여행이 편하다’고 한 것 역시 지도와 역사책을 좋아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행자가 되어 길 위에 선 순간 자유를 얻는 것이다.

안과 밖을 구분하고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도구인 주렴에 대한 애착은 무얼 의미할까? 아마도 자신의 고유성을 지킬 수 있는 내면 공간을 갈구하던 심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p. 44]


라고 평가한다.

어쩌면 유만주가 그렇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일기를 통해 해명하려고 한 것도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자신이 바라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갈등을 벗어나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우연히 벽에 걸린 지도를 보고 나도 모르게 세 번 빙그레 웃었다. 천하는 크다. 어찌 ‘나’라는 존재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 좁고 자질구레하고 하찮으며 구차한 하나의 모퉁이에서 금세 생겼다 소멸하는 존재임에랴. 누가 알아주겠는가. [p. 34]


라는 1785년 11월 21일의 일기처럼 자조적인 내용이 실리는 것도 그런 내적 갈등이 빚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사실 <사기(史記)>를 남긴 사마천(司馬遷) 같은 비범한 역사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저 역사책을 좋아하고 즐기는 평범한 양반에 불과하다는 괴리에서 오는 자괴감은 쉽게 해소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젊고 맡은 일이 없으며 주변에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없기에 더욱 이 것을 진지하고 깊게 고민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1783년 6월 27일 일기를 보면, 자신의 일기, <흠영>에 대한 자부심도 엿보인다. 


1783년 6월 27일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하지만 나의 글은 <흠영>에 있고, 나는 시를 잘 쓰지 못하지만 나의 시는 <흠영>에 있으며, 나는 말을 잘 못하지만 나의 말은 <흠영>에 있다. 나는 하나의 땅에서 경제제민(經世濟民)하는 일을 할 수 없지만, 내가 어떤 땅에서 경세제민 하고자 한 것은 <흠영>에 있다. <흠영>이 없으면 나도 없다. [p. 60]


이처럼 자신의 일기 <흠영>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늘어놓은 유만주가 도달한 결론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여행을 편하게 느끼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여행은 일상에서의 탈출 혹은 일탈로 여겨진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끌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듯이, 조선시대에 ‘개인’이라는 근대성의 싹을 피어낸 유만주도 다방면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1783년 7월 11일 일기에서 토로했듯이 그가 행장(行裝)을 꾸려 여행 다니는 것을 편하게 여기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여행을 괴롭게 여기지만 나는 여행이 편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지자(知者)와 더불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p. 41]


아쉽게도 유만주의 일기 <흠영>에서 엿보인 ‘개인’의 싹은 그가 서른넷에 요절하고, 또 주변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해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스러진 것 같다. 이런 싹들이 잘 자랐다면 한국의 근대도 조금 다른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아쉽고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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