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 제3권 독립과 냉전의 시대 - 믿고 보는 신일용의 인문교양 만화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3
신일용 지음 / 밥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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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親美)에서 반미(反美)로, 호치민[胡志明]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호치민[胡志明, 1890~1969]는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그는 이념보다 민족을 앞세운 독립운동가였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제2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1935)처럼 좌파 민족주의자 혹은 민족적 사회주의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는 서술되지 않았지만, 호치민은 젊은 시절 파리에서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Eugene Choi)의 실제 인물이라는 황기환(黃玘煥, EARL K. WHANG, 1886~1923),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된 대한국민의회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윤해(尹海, 1888~?) 등과 만나 교류했으며,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 활동했다고 한다.1) 그래서인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부분의 동남아 지도자2)들은 일본에 협력했지만, 호치민은 이와 반대로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심지어 CIA의 전신(前身)인 OSS와 협력관계에 있을 정도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볼 때, 미국이 베트남의 독립을 용인하고 지원했다면, 호치민의 베트남은 친미(親美)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프랑스의 베트남 재점령에 부정적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F.D.Roosevelt, 1882~1945)가 1945년 4월에 급사한 후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는 반공(反共)으로 흘렀다. 당연히 ‘공산주의자’ 호치민은 미국의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越南獨立同盟會]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협상조차 반대하는 매파가 득세했다. 결국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생했고, 1954년 디엔비엔푸[奠邊府]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여 프랑스의 식민지라는 선택지는 사라졌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마무리하는 제네바 합의에는 “2년 내에 국제사회 감시하에 선거를 치뤄 통일정권을 세우도록 해주겠소”[p. 40]라는 조항이 있었다. 이때 중국에 이어 베트남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는 ‘도미노 현상’을 막기 위해 미국이 선택한 것은 저명한 반공(反共) 반(反)프랑스 민족주의자 응오딘디엠[吳廷琰, 1901~1963]이다. 가톨릭을 믿는, 지주 출신의 정통 엘리트였던 그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비판에 민감했다. 여기에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던 응오딘디엠은 정권을 잡자마자 반공(反共)을 내걸고 날뛰는 사조직, 즉 메콩델타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가톨릭 교리를 흉내 낸 종교 단체 ‘카오다이[高臺]’와 사이공 인근의 촐론에서 공권력 노릇을 하는 깡패 조직인 ‘빈슈옌[平川]’을 군대를 보내 소탕3)했다. 그 결과 이들의 잔존세력은 우리에게 ‘베트콩’으로 알려진 인민해방전선(NLF)으로 귀순했다.

응오딘디엠 본인은 당시 동남아 지도자 가운데 드물게 부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베트남 공화국은 부패하고 무능했다. 게다가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가지고 그를 따르는 북부 출신의 반공주의자를 우대하면서, 노골적으로 친(親)가톨릭 반(反)불교 정책을 펼쳐 그를 선택한 미국조차 그에 대한 기대를 버리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의 뒤를 이은 정치군인들이 응오딘디엠 만도 못했다는 것이다.

 

 

시하누크의 외줄타기, 킬링필드의 비극을 빚다

 

비시 프랑스 정부가 선택한 캄보디아의 왕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1922~2012, 이하 ‘시하누크’)는 뛰어난 외교능력으로 1949년 프랑스 연합의 반(半)독립국이 되고, 태국으로부터 시엠립과 바탐방도 다시 찾아왔다. 나아가 1953년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독립도 했다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그는 미국과 소련 양쪽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원을 받는 등거리 중립외교를 펼쳤다. 문제는 시하누크가 말했듯이 약소국이 중립외교를 할 때는 어느 한 쪽에 기울어지면 안 되는데, 베트남 전쟁(1955~1975)이 진행 중인 1963년에 시하누크는 남베트남과 단교를 선언하고, 1965년에는 미국과도 단교를 선언했다. 이렇게 한쪽으로 기울어지자 시하누크에게 선택권이 사라졌고, 어쩔 수 없이 베트남의 병참수송로[호치민 루트] 역할을 떠 맡아야 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우파 민족주의자였던 총리 론 놀(Lon Nol, 1913~1985)은 쿠데타를 통해 ‘크메르 공화국’이라는 친미 정부를 세우고 베트남인 말살정책을 펼쳤다.  권좌(權座)에서 쫓겨난 시하누크는 극좌파인 폴 포트(Pol Pot, 1925~1998)의 크메르 루즈와 협력, 부패한 론 놀 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 캄푸치아 공화국’을 세웠다. 이 정권의 실질적인 리더는 폴 포트로, 그가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을 벤치마킹한 결과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것이 영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1984)로 널리 알려진 그 학살이다. 이 과정에서 침공을 당한 베트남은 반격에 나서 크메르 루즈를 쫓아내고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을 세웠다. 베트남군의 철수 후 시하누크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수상 출신 훈 센(Hun Sen, 1952~ )이 권력을 나눠가졌다. 하지만 이 기형적인 정치체제는 1997년 훈 센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1인 독재로 다시 회귀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말라야 정권이냐 말레이 정권이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은 연방말레이주(FMS)에 속하는 4개 주와 비연방말레이주(UMS)에 속하는 5개의 주, 해협식민지인 페낭과 믈라카를 합쳐 말라야 연방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수용되어 독립하는 과정에서 말레이인을 위한 정권인 ‘말레이 정권’이냐 말라야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정권인 ‘말라야 정권’이냐 논의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말레이시아 건국의 아버지로 꼽히는 초대 수상 툰쿠 압돌 라만(Tunku Abdul Rahman, 1903~1990)을 중심으로 하는 UMNO(United Malays National Orgaization)는 영국과 타협, 말라야 정권을 표방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해협 중국인계 MCA(Malayan Chinese Association)와 연립정권, 중국계 및 인도계의 참정권 자격의 거주기간 제한 단축 등의 혜택과 다른 종교도 허용하나 이슬람 교도를 타 종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금지하고 말레이인에게 경제적 특혜를 부여하는 부미푸트라 정책을 시행했다. 독립 당시 말레이인이 과반수가 아니었고[말레이인 230만, 중국인 200만, 인도인 54만], 중국계가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비주류인 인도계 출신의 4대 수상 마하티르 모하맛(Mahathir Mohamad, 1925~ )도 장기간 집권하면서 대형 사업에서 말레이인의 지분을 늘리는 등 부미푸트라 정책을 강화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배우자는 Look East 정책을 펼쳐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부미푸트라 정책의 지속은 인종차별적인 말레이시아를 만들었고, 차별에 반발한 중국계 우수인력의 해외유출도 이루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특이한 것은 동남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군부 쿠데타가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테러는 군대가 아닌 경찰의 문제라고 본 말레이시아 지도부의 입장이 작용했다. 그래서 중국인 중심으로 조직된 말라야 공산당(MCP)이 친펭[陳平, 1924~2013]의 지도 하에 무장투쟁을 전개했지만, 정부는 범죄자들의 테러라면서 끝까지 경찰로만 대응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군부에게 권력의 지분을 주장할 명분을 주지 않았기에 이후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니 않은 유일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p. 163]고 한다.

 

 

미국의 판단,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독립을 지원하다.

 

일본에 협조하고 있던 수카르노(Soekarno, 1901~1970)와 모하맛 하타(Mohammad Hatta, 1902~1980, 이하 ‘하타’)는 종전이 가까워지자, 해군소장 및 자카르타 주재무관으로 근무 중이던 마에다 타다시(前田精, 1898~1977, 이하 ‘마에다’)의 지원을 받아 독립선언 준비를 했다는 얘기가 있다. 1945년 8월 17일의 인도네시아 독립선언이 마에다의 관저에서 이루어지고, 1976년에 마에다에게 인도네시아 국가 및 국민에게 주어지는 최고영예인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된 점을 감안하면 그럴 듯하다.

 

어쨌든 수카르노와 하타가 독립선언을 했으나 젊은 과격파가 득세하여 인도스(네덜란드 혼혈)이나 중국계를 대상으로 하는 사적 보복으로 혼란이 지속됐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독립지도자들의 친일부역 전과와 공산주의 의혹을 제기하며 복귀를 서둘렀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1949)]. 이때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수카르노가 이끄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반기를 들고 마디운(Madiun)에서 정권을 세웠다. 수카르노는 이들과 타협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덕분에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는 패배했으나 무난히 독립할 수 있었다.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미국을 도와 일본과 싸웠다. 하지만 미국은 그를 민족주의자라기보다 공산주의자로 판단하였다. 반면에 수카르노는 일본에 부역한 전력이 있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로 판단하였다. 이 차이로 베트남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도 미국과 7년의 가혹한 전쟁을 치뤄야 했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에 패하고도 미국이 지지한 덕에 온전한 신생독립국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p. 238]

 

독립은 했지만 다양한 종교를 믿는 수많은 인종과 언어로 갈라진 군도(群島)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에 수카르노는 사실상 독재인 교도(敎導) 민주주의를 제창했고,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하타는 이에 반발해서 사임했다. 점차 독재자로 변하면서 수카르노는 많은 지지를 받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을 통해 군부를 견제했다. 이는 반미(反美)정책을 통한 지지자 결집을 가져왔지만, 미국의 불안도 증가시켰다. 여기에 좌우로 쪼개진 군부를 통해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하지 모하마드 수하르토(Haji Mohammad Soeharto, 1921~2008)에게 진압됐다.

 

 

싱가폴, 사형제도가 있는 디즈니랜드

 

해협중국인 출신의 리콴유[李光耀, 1923~2015]는 이주중국인 출신의 림친시옹[林淸祥, 1933~1996]등 정적들을 제거하고 말레이시아의 싱가폴주(州)를 만들었다. 하지만 2년 만에 싱가폴은 말레이시아로부터 퇴출되어 강제적으로 독립되었다. 여기서 리콴유는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조그만 섬인 싱가폴의 위기의식을 자극해서 극단적인 공익우선과 실용주의를 실천하는 싱가폴을 기획, 연출했다.

구체적으로 1969년 노조의 파업권 등을 노조 활동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강성노조를 무력화시키고,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을 통해 상급학교 진학여부 등이 결정되게 만들었다. 또한 공무원 보수를 민간기업보다 높여 충분한 보상을 하되, 부패행위가 적발되면 파멸적 징계[파면, 가혹한 형량 선고, 벌금, 신문1면에 대문짝만 하게 사진을 실어 사회적으로 사망 선고 등]를 하여 싱가폴을 부패 없는 풍요로운 도시로 만들었다.

 

이렇게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이야기 3>에서는 동남아 각국의 독립과정과 베트남[호치민, 응오딘디엠], 캄보디아[시하누크, 론 놀, 폴 포트, 훈 센], 말레이시아[마하티르 모하맛], 인도네시아 [수하르노, 수카르노], 싱가폴[리콴유] 등 각국의 독재자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동남아 각국의 리더와 국민들의 선택 하나하나가 모여 그들의 오늘을 만든 것이라는 점을 만화를 통해 가볍게 보여주는 셈이다. 하지만 영웅이 될 수도 있던 동남아 리더들이 독재자로 전락(轉落)하는 모습들은 왠지 씁쓸했다.

 

1) 김용래, “호찌민 감시 佛 경찰문건 대거발굴… 한국 임시정부 활약상 생생”, <연합뉴스> 2018.09.30 (https://www.yna.co.kr/view/AKR20180929039500081)

2)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Achmed Sukarno, 1901~1970)는 일본군의 점령에 협력하고 일본군의 묵인을 얻어 독립을 선언했다. 타이의 피분송크람(Luang Phibun Songkhram, 1897~1964)는 일본과 방위동맹을 체결(1942)하고 일본과 협력하여 참전했다. 미얀마의 아웅 산(Aung San, 1915~1947)은 일본의 원조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로 침입하였다.

3) 빈슈옌과의 전투과정에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인 찐민테[程明世, 1920~1955]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미국이 가지고 있던 ‘응오딘디엠’의 대안이 사라졌다. 또한 응오딘디엠에 협조적이었던, 그가 속해있던 반(反)베트민[越盟] 조직은 유력한 지도자를 잃었고, 그의 부하들은 해산되어 흩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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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용 지음 / 밥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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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독립의 아버지, 호세 리잘

 

호세 리잘(Jose Rizal, 1861~1896)은 중국계 메스티조1)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사가 되기 위해 유학 갔던 스페인에서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한 <놀리 메 탕헤레(Noli Me Tangere, ‘Touch Me Not’의 라틴어)>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이 소설 때문에 그는 퇴학당하고 필리핀으로 추방되었다. 귀국한 후 그는 필리핀 동맹(La Liga Filipina)를 조직, 인도의 간디처럼 비폭력과 스페인 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자치 운동을 주장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896년 스페인 식민지 군에 의해, ‘KKK’ 혹은 ‘카티푸난(Katipunan)’이라는 무장혁명을 위한 비밀조직의 배후로 몰려 공개 총살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절명시(絶命詩)는 ‘나의 마지막 인사’로 알려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 스페인 시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고 한다.

 

나의 마지막 인사

 

안녕, 나의 사랑하는 조국, 태양이 쓰다듬는 땅,

(Adios, Patria adorada, region del sol querida,)

동방의 바다의 진주, 우리의 잃어버린 낙원이여!

(Perla del mar de oriente, nuestro perdido Eden!)

기꺼이 너에게 나의 슬프고 억눌린 삶을 바치노라, …

( A darte voy alegre la triste mustia vida, …)2) [p. 57]

 

 

최강의 군사강국, 식민지가 되다[미얀마]

 

19세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강국은 버마였다. 라이벌인 시암(태국)은 버마를 상대로 패권 싸움을 벌였지만 열 번의 전쟁이 일어나면 아홉 번은 버마의 승리였다. [p. 64]

 

9세기 중반 운남(雲南)의 남조(南詔)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 지역에 살던 버마족과 타이족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했다. 당시 버마 남부에는 몬(Mon)족이, 중북부에는 퓨[Pyu, 驃]족이 살고 있었는데, 버마족이 퓨족을 대체하여 중북부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들 버마족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왕조가 바간(Pagan) 왕조다. 오늘날 미얀마의 원형인 바간 왕조는 11세기 아노라타(Anawratha Minsaw, 1014~1077)가 세웠다고 한다. 아노라타는 전통신앙인 ‘낫(Nat)’ 신앙을 정리하고 소승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남쪽으로는 말레이 반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4세기 초 몽골에 의해 바간 왕조가 멸망한 후, 북부의 버마족 중심의 아바[Ava, 상부 버마]와 남부의 몬족의 바고[Pegu, 한타와디(Hanthawaddy) 왕조, 하부 버마]가 각축을 벌였다. 한때 바고가 아바를 격퇴하고 융성했으나 따옹우(Toungoo)의 버마족이 타빈쉐티(Tabinshweti, 1516~1550)를 중심으로 반격을 가했다. 이때 세워진 것이 두 번째 통일왕조인 따옹우 왕조이다. 타빈쉐티의 처남 바이나웅(Baynnaung, 1516~1581)에 의해 따옹우 왕조는 인도의 마니푸르, 버마 서남부의 아라칸(Arakan) 왕국, 라오스의 란쌍 왕국, 태국 북부 치앙마이의 란나(Lan Na) 왕국 등을 연이어 정복하여 당대 동남아에서 가장 영토가 넓고 강력한 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버마의 광개토대왕이라고 할 만큼 강력한 정복군주였던 바이나웅의 사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한때 속국이었던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의 흑태자 나레쑤언의 활약 등으로 타격을 입어 쇠약해졌다. 이후 프랑스의 후원을 받은 몬족이 독립하여 1740년 후(後)바고[= 부흥 한타와디] 왕조를 세웠다.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무기를 제공받은 후(後)바고 왕조에 의해 몬족의 통일 왕조가 생길 뻔 했지만, 목소보(Moksobo)의 아웅제야(Aung Zeya, 1714~1760)가 이끄는 버마족에 의해 후(後)바고 왕조가 멸망했다. 이후 몬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아웅제야는 후(後)바고 왕조에 무기를 제공했던 프랑스와 영국을 몰아내고 버마 최후의 왕조인 곤바웅(Konbaung) 왕조를 세운 후, ‘미륵불’이라는 뜻을 가진 알라웅파야(Alaungpaya, 1714~1760)으로 개명했다. 그의 아들인 신뷰신(Hsinbyushin, 1736~1776)은 중국 청(淸)나라의 건륭제(乾隆帝)의 침략을 4차례 물리치고, 태국 북부 치앙마이의 란나왕국과 라오스의 비엔티안(Vietiane)왕국을 점령[1764]했으며,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도 멸망[1767]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다.

그의 후계자들도 버마-시암 전쟁(1785~1786) 이후 인도와 인접한 아라칸 지방(1785), 마니푸르(1814), 아삼 지역(1817)까지 정복하여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인도의 안보가 위협받는다고 여긴 영국과 전쟁[1차 영국-버마 전쟁(1826), 2차 영국-버마 전쟁(1852)]이 벌어졌다. 여기서 잇달아 영국에게 패배한 후 점차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국권을 침탈당해 마침내 버마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물론 버마가 무기력하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버마 최후의 불꽃이라고 할 수 있는 민돈(Mindon, 1808~1868)와 그의 이복동생 카나웅(Kanaung Mintha, 1820~1866)에 의해 개혁이 진행되었다. 카나웅은 민돈 왕의 후계자 자격으로 행정과 군사를 맡아 버마를 민돈 왕과 사실상 공동통치하면서 근대적 상비군의 창설, 전신선 설치 등의 혁신을 이루었다. 하지만, 왕위 계승에 눈이 어두운 민돈의 두 아들, 밍군(Myingun)과 밍곤다잉(Myingundaing)에 의해 국무회의 도중에 카나웅와 그의 아들들이 살해당하면서 마지막 불꽃은 허무하게 꺼졌다.

 

 

동남아 유일의 내륙국가, 라오스

 

5~8세기경 타이족의 일파인 라오족이 라오스 중북부로 이주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1353년 파응움(Fa Ngum)에 의해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을 가진 란상(Lanxang) 왕국이 세워졌다.

라오스 지역은 내륙인데다 산악지형이 대부분이라 경제적으로 풍요할 수가 없었다. 외적의 침입으로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앤을 옮겨 다녔다. 그나마 ‘란상’이 라오스 역사에서 가장 빛난 왕국이었다. [p. 79]

오늘날 라오스의 정체성을 형성한 이 국가는 당초에 느슨한 봉건적 연맹체인데다가 해외세력과의 접점이 없는 내륙국가였기에 국가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18세기 초에 이르면 왕위 계승 분쟁으로 북부의 루랑프라방(Luang Phrabang) 왕국, 중부의 비엔티앤(Vientiane) 왕국, 남부의 참파삭(Champasak) 왕국으로 갈라지면서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비엔티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차오 아누윙(Chao Anouvong, 세타티랏 5세, 1767~1829)은 태국과 베트남의 이중 속령(屬領)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란상 왕국의 재통합을 추진했다. 그는 참파삭 왕국 지역을 재통합한 후 태국과 전면전을 펼쳐 한때 방콕에서 108km떨어진 사라부리(Saraburi)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태국의 반격으로 끝내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죽었다. 라오스 국민영웅이 보여준 마지막 저항은 이렇게 끝났다.

 

 

개혁군주 촐라롱꼰 [태국]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세워진 왕조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짜그리(Chakri) 왕조다. 영화 <왕과 나>의 주인공인 몽쿳(Mongkut, 라마 4세, 1804~1868) 시대부터 개혁이 시도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촐라롱꼰(Chulalongkorn, 라마 5세, 1853~1910)이 그 개혁을 이어받아 근대적 국가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촐라롱꼰은 귀족연합의 대표 정도였던 짜끄리의 왕권을 중앙집권적 왕권으로 격상시키고, 노예제도와 평민이 지역의 귀족들에게 동원되어 공짜 노역(corvee)을 제공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대식 지도를 작성해서 영토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하는 등 근대화에 몰두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태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개혁군주로 꼽히고 있다.

 

전근대적 만달라의 말단을 희생하여 근대적 영토의 주권국가를 확립한 것, 이것이 출라롱꼰의 업적이다. 이런 기3이 있었기에 운7을 활용하여 동남아 유일의 독립국이 될 수 있었다. [p. 180]

 

 

남비엣[南越], 남진(南進)하다 [베트남]

 

오늘날 베트남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북부의 남비엣[南越]이 중부의 참파 왕국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끝내 남진하여 참파의 흔적을 지워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중국의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남비엣과 상업에 치중한 인도의 힌두문명권에 속하는 참파, 두 나라는 서로를 용납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장기 집권 왕조인 리(Ly) 왕조는 베트남에서 과거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한 왕조다. 훗날 8대 혜종(惠宗)의 외척 짠투도[陳守度]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자, 혜종의 숙부 건평왕(建平王) 리롱뚜엉[李龍祥, 1174~?]이 일가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 귀화하여 화산(花山)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짠투도에 의해 시작된 짠[陳] 왕조는 ‘정송가도(征宋假道)’를 요구한 몽골의 침공을 베트남의 국민 영웅 짠홍다오[陳興道, 1228~1300]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쳐 격퇴했다.

 

광남국(廣南國)이라고 불리던 응웬[阮] 정권의 후예인 응웬폭안[阮福暎, 1762~1820]은 삐뇨 드 베엔(Pignead de Behaine, 1741~1799) 신부의 지원 등을 받아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웬[阮] 왕조를 열었다. 지아롱 황제[嘉隆帝]로 즉위한 그의 장남 응웬푹깐[阮福景, 1780~1801]은 어릴 때부터 삐뇨 신부를 따라 유럽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가 요절하는 바람에, 동생이 민망 황제[明命帝, 1791~1841]로 등극했다. 민망 황제는 철저한 유교 보수주의자였기에 지방 자치를 허용한 총독 제도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적 정책을 펼쳤으며, 수백 년에 걸친 남진(南進) 정책을 완성하여 오늘날의 베트남 영토를 확정했다. 또한 서양과의 교류를 차단했으며, 가톨릭을 박해하여 대규모 순교자를 양산했다. 그의 영향인지 쇄국주의 강경파 대신들에 의해 5대 황제 뒥둑[育德, 1852~1883]이 사흘 만에, 6대 황제 히엡후아[協和, 1847~1883]는 4개월 만에, 7대 황제 키엔푹[建福, 1869~1884]은 7개월 만에 각각 죽음을 당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사실상 마지막 황제인 함니[咸宜, 1871~1944]로 깐부엉[勤王] 운동의 리더이며 가장 과격한 쇄국주의자인 똔땃뚜옛[尊寶說, 1839~1913]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래서 함니는 똔땃뚜옛을 따라 3년간 게릴라전을 치렀지만, 끝내 프랑스의 포로가 되어 알제리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는 1887년 베트남 지역(남부의 코친차이나, 중부의 안남, 북부의 통킨)에 캄보디아 왕국을 포함시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발족시켰다. 이어 주(駐) 라오스 프랑스 부공사였던 오귀스뜨 빠비(Auguste Pavie, 1847~1925)의 활약으로 1893년 태국의 지배를 받던 라오스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합류시켰다.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만 직접 통치하고 안남, 통킨, 캄보디아, 라오스는 보호국으로서 왕실을 유지하여 부분적인 자치를 허용하는 형식을 취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통치를 반겼을지 모르지만 베트남은 입장이 달랐다.

껄끄러웠길래 베트남만 코친차이나, 안남, 통킨으로 분리했겠지. [p. 266]

 

다만, 베트남의 분리에는 베트남 스스로가 박끼[北區] 혹은 통킨[北圻, Tonkin], 쭝끼[中], 남끼[南]으로 구분했던 것도 반영되어 있다. 중국 남부에서 이주한 킨[京]족 혹은 비엣[越]족의 폐쇄적인 농업중심의 북부, 말레이계 참파 왕국의 영향으로 개방적인 상업 중심의 중부, 크메르 제국에 속해 있던 남부의 차이는 오늘날에도 언어, 풍속, 문화 등에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옥의 티

 

p. 234

베트남군의 칼에 죽은 전사자보다 급히 철수는 바람에 홍강의 다리가 무너져 죽은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단다. ⇒ 베트남군의 칼에 죽은 전사자보다 급히 철수하는 바람에 홍강의 다리가 무너져 죽은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단다.

 

1) 필리핀에서는 페닌슐라레(스페인에서 파견된 스페인 사람), 인슐라레(필리핀 군도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 스페인계 메스티조(스페인인과 원주민의 혼혈), 프린키팔리아(원주민 지배계급), 중국계 메스티조(중국인과 원주민의 혼혈), 중국인, 인디오(가톨릭을 믿는 원주민), 모로(이슬람을 믿는 원주민) 순서의 계급제가 존재했다.

2) <돈키호테>를 완역한 민용태 교수의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동방의 진주여

잃어버린 에덴이여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너를 위해 바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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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 제1권 바다와 교류의 시대 - 믿고 보는 신일용의 인문교양 만화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1
신일용 지음 / 밥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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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는

 

동남아’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현수막 광고로 상징되는, 무능력한 남자도 쉽게 결혼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 혹은 외국인 노동자나 불법체류자의 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도

우리도 동남아를 싼 음식이 널린 관광지, 밤거리 문화로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가? 과연 동남아는 그렇게만 알고 있어도 되는 곳인가? [p. 26]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자, 그럼 동남아는 어디를 가리키고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남아는 아시아 대륙 남단의 ‘대륙지역’[인도차이나 반도]과 해상의 ‘도서지역’[말레이 제도]로 나눌 수 있다. 대륙지역에는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가, 도서지역에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동티모르가 속한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보면, 이질적인 존재가 있다. 한자(漢字) 문화권에 속하며,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하고, 중국의 한자를 개량한 추놈[字? 혹은 ???]을 사용한 베트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한데 묶어 ‘동남아’로 칭하게 된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동남아시아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이곳을 점령했던 일본군을 무장해체하기 위하여 들어온 마운트 배튼 경의 연합군 사령부를 동남아사령부(South East Asia Command)로 부르면서부터이다. [p. 34]

라고 한다.

너무 성의 없고 편의적인 이름 붙임[命名]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민의 역사

 

동남아의 역사는 이민의 역사라고 한다. 이 지역의 선주민(先住民)은 한때 갈인(褐人)으로 분류되었던, 곱슬머리에 매우 짙은 갈색 피부를 가진 작은 신장의 오스트랄로이드(Australoids) 계열의 네그리토(Negrito)라고 한다. 하지만, 동서양교류의 길목이다 보니 계속해서 새로운 이민자들이 나타났다.

먼저 대륙지역의 오스트로아시아 어족[베트남어, 몬어, 크메르어]과 도서지역의 오스트로네시아 어족[말레이-인도네시아어, 필리핀어, 태툼어, 자바어, 순다어, 세부아노어, 발리어, 아체어]의 1세대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이후 중국 남부지역[운남(雲南), 광서(廣西)]에서 한족(漢族)에게 밀려난 타이(Tai)족, 버마족이 2세대 이민자에 해당한다. 대체로 이 2세대 이민자까지를 원주민(原住民)으로 간주한다.

 

이 지역에 중국풍이 짙게 묻어나기 시작한 것은 쩡허[鄭和, 1371~1433]의 원정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 곳이 말레이시아의 믈라카(Melaka)와 인도네시아의 팔렘방(Palembang)이다. 1405년부터 1430년까지 7차례의 대원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들 지역에 중국인 마을, 부킷찌나(Bukit Cina)가 생겨났다. 여기에 눌러앉은 중국인들이 현지 여인들과 가정을 이루면서 중국과 동남아 요소가 혼합된 프라나칸(Peranakan) 문화를 이루었다.

한편 1926년 영국은 말레이 지역의 4개 식민지[페낭(Penang), 싱가포르, 말라카, 딘딩(Dinding)]을 합쳐 ‘해협식민지’를 형성했다. 그리고 나서, 영어도 좀 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잡은 중국인들을 ‘해협 중국인’으로 분류하여 세금징수하청업 등을 맡기며 식민정부와 중국인 사회의 중개 역할을 부여했다. 이들 이외에 19세기~20세기 초 중국인의 대규모 이민기에 막 동남아로 흘러 들어와서 신커[新客]라 불리는 ‘이주 중국인’도 있다. 최하층 생활을 하면서 ‘쿨리[苦力]’로 불리던 이들 저임금 노동자들의 후예가 오늘날 동남아 중국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인이 타밀(Tamil)족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인들을 말레이시아의 고무 플랜테이션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데려왔다.

 

 

복잡 다양한 동남아

 

동남아는 생선을 발효한 액젓[Fish sauce]을 주로 사용하는 문화권인데, 태국에서는 남쁠라, 베트남에서는 느억맘, 라오스에서는 빠덱, 캄보디아에서는 쁘라혹이라고 한다. 웬만한 동남아 음식에 빠지지 않는 향신료인 고수[=샹차이[香菜], 코리앤더(coriander)], 대표적인 과일인 망고스틴과 두리안 등에 대해 소개한다. 말레이시아의 아이스 까짱(Ais Kacang), 인도네시아의 첸돌(Cendol), 필리핀의 할로할로(Halohalo) 등 얼음 디저트 등에 대한 안내도 빠지지 않는다.

 

덧붙여서 그들이 자랑스러워할, 캄보디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크메르 제국[진람(眞臘), 802~1431], 해상왕국 스리위자야 왕국[Sriwijaya, 650~1275], 인도네시아의 최강국이었던 마자파히트 제국[Majapahit Empire, 1293~1527] 등의 역사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어서 1511년 포르투갈의 알부퀘르크(Alfonso de Albuquerque, 1453~1515)에 의해 동남아에서 가장 풍요롭던 무역도시 믈라카가 함락된 이후, 유럽인에 의한 동남아 식민지화가 시작되는 과정도 그리고 있다.

 

동남아에서는 다소 이질적인 존재라서 그런 것일까?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1권에서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을 베트남에 대해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스쳐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전체 4권으로 된 시리즈이다 보니 다른 권에서 다루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만화’라는 형식을 선택했기에 좀더 넓은 연령층에서 접근하기 쉽다. 다른 권들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한다면, 동남아의 전반적인 문화와 이야기에 대해 입문하려는 자에게 좋은 가이드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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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
김금숙 지음, 정철훈 원작 / 서해문집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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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블라디보스토크의 형무소에서 어느 수감자가 자신이 처형시킨 인물 가운데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볼셰비키의 우두머리라는 한인 여성이 있었다는 고백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를 이어 착취 받는 이들을 대변하다.

 

김두서(金斗瑞)는 생존을 위해 고향인 함경북도 경흥을 떠나 북으로 갔다그는 한국중국러시아의 접경지인 지린[吉林]의 훈춘[琿春]에서 잠시 소작농 생활을 하면서 중국어를러시아로 이주 후에는 러시아어를 익혔다.  그러다가 연해주 우수리스크 인근의 시넬니코보[永安坪]에 정착하면서 귀화하여 표트르 김이 되었다그의 어학 능력 때문에 동청철도(東淸鐵道)1) 현장에 파견된 러시아 군대의 통역으로 징집되었는데여기서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차별 받고 심지어 임금체불마저 당하는 한국과 중국 노동자를 위해 철도관리국에 항의하거나 노동쟁의를 벌여 못 받은 임금을 받게 해줬다이렇게 명성을 떨쳤지만제대하고 나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의 딸인 김알렉산드라[1885~1918, 본명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애칭은 쑤라]는 아버지의 사망 후 그의 친구였던 폴란드 귀족 출신 러시아인 표트르 스탄케비치의 도움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여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교사가 되면서 표트르 스탄케비치의 아들 마르크 스탄케비치(이하 마르크’)와 결혼을 했다한때 사상적 동지였지만 항만노조 일을 돌보느라 며칠씩 집에 오지 않는 그녀를 의심하고 이해하지 못한 남편은 도박에 빠지고 폭력을 휘둘렀다결국 스탄케비치 가문의 귀신이 되라는 남편의 저주를 뒤로 한 채 그녀를 집을 떠났다.

 

여기에 우랄로 떠난 노동자들이 계약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그녀는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1914년 우랄의 벌목장에 통역으로 간 것이었다.

 

2월 혁명 전야의 파도는 우랄까지 당도했다.

난 이 문제를 러시아 사회민주당 예카테린부르크 지부에 편지를 보내 우랄 목재소의 지옥 같은 상황을 고발했다(뤄쯔거우[羅子溝무관학교 출신생도들과 한인 노동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전폭적으로 날 지지했고점점 나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그들의 억울함을 자세히 들어주는 일이야말로 수없이 꼬인 문제들을 풀어내는 기초가 되었다.” [p. 174]

이를 기반으로 그녀는 우랄 노동자 연맹을 조직했다.

감격의 순간이군요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러시아·중국 노동자일제의 강점에서 독립하고자 투쟁하는 한인오스트리아 포로병그 모두가 우리의 동무입니다노동과 계급의 형제언제 어디서나 서로를 도울 동지입니다얼굴도 다르고 피부색과 국적도 다르지만 일하는 자로서 하나입니다만세!” [p. 185]

나아가 그녀는 2월 혁명 직후 차르 정부가 미지급한 노동자 임금을 받아내서 명성을 얻었다.

 

 

전환점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1917년 그녀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한다그리고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을 접견하고그의 오른팔이자 탁월한 조직가인 야코프 스베르들로프(Yakov Sverdlov, 1885~1919)의 요청으로 하바롭스크로 파견되어 극동인민위윈회 조직에 참여한다. 1918년에는 극동인민위원회 외교인민위원(외무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같은 해에 이동휘(李東輝, 1873~1935) 등과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2)을 결성한다다만김알렉산드라가 사회민주당 당원이었기에 직책은 맡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이동휘와 함께 100명 규모의 한인사회당 적위군(赤衛軍)’을 조직러시아 혁명군인 적군(赤軍)에 가담하여 반()혁명세력인 러시아 백위군(白衛軍)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그러다가 그 해 9월 하바롭스크가 함락되자 철수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백위군에 발각체포된다.

 

이후 재판관이 그녀에게 만약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고 호소한다면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p. 225]고 회유했지만,

그녀는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을 모독했어요당신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계급투쟁에 나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어요당신은 그 모든 여성에게 자신의 활동을 뉘우치라고 얘기할 건가요?

잘 들으세요몇 년 뒤에 극동에서조선에서중국에서전 세계에서 여성이 남성과 나란히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참가할 것입니다내가 해오던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 가운데서 전개되어 나갈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면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 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 [pp. 225~226]이라고 반박하고 죽음의 길을 걸어갔다.

 

혹시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그녀가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볼 여지는 있다하지만그녀가 혁명가로서 살아가고또 살아가기로 결정한 것이 결국 아이들이 장차 살아갈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 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능하고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그녀와 같은 이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의 삶이 가능해졌으니까물론 지금도 완벽하게 평등한 세상은 아니다그러나 남성과 여성계급과 지위민족과 인종의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그녀의 꿈을 지금 우리가 나눠서 꿈꾸면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오지 않을까?

 

 

옥의 티

 

p. 203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사회당)이 탄생했다.

→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사회당)이 탄생했다.



1) 동청철도헤이룽장성(黑龍江省하얼빈[哈爾濱]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내몽골[內蒙古자치구 만저우리[滿洲里], 동쪽으로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쑤이펀허[綏芬河], 그리고 남쪽으로는 랴오닝성[遼寧省다롄[大連]과 뤼순[旅順]을 잇는 철도 노선이다. 1911년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에는 중동 철도(中東鐵道)라고 불렀다.

2) 임시 의장 이동휘(李東輝, 1873~1935), 부위원장 오와실리[한인 2김알렉산드라와 사실혼 관계], 군사부장 유동열(柳東說, 1879~1950), 당 기관지 <자유종주필 겸 출판부장 김립(金立, 1880~1922),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 이인섭(李仁燮, 1888~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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