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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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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삶이란 어떤 것일까? ‘삶’, ‘Life’, ‘生’……. 다양한 언어로 표현하기는 쉬워도 정의(定義)하기는 어려운 단어다. 어쩌면 사람마다 자신만의 삶에 대한 정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각자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느끼는 것이 다를 테니까.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로 유명한 알렉산드로 푸시킨(Alexander Pushkin, 1799~1837)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왜 슬퍼하는가?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 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게 여겨지리라

 

라는 시(詩)를 남겼다. 어떤 삶이든 상관없이 삶에 순응하라는 의미로 읽혀진다. 하루하루가 고달픈 삶을 사는 이라면 이런 자세가 위로가 될 것이다.

에밀 아자르, 아니 로맹 가리(Romain Gary, 1914~1980)의 <자기 앞의 생>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1970년 이방인들이 밀집된 빈민지역인, 파리의 멜빌에 있는 아파트에서 창녀들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폴란드계 유대인 아줌마 로자의 손에서 아랍 소년 모하메드 카디르(이하 ‘모모’)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려가고 있다.

 

모모는

 

나는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여러분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그가 생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감상에 젖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p. 139]

 

라고 얘기한다. 이것만 보면, 저자가 모모의 입을 빌려 말하는 생(生)은 무척 건조할 것 같은데, 또 막상 소설 속에 그려지는 삶이 그렇지도 않은 것을 보면 묘(妙)하다.

 

 

생(生)을 긍정해야 버틸 수 있는

 

열네 살 모모의 주변에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거리의 여자로 살아가다가 은퇴 후에는 주로 창녀의 자식을 맡아 키우게 된 폴란드 출신 유대인 로자 아줌마, 여자의 삶을 선택한 세네갈의 전직 권투선수 출신의 여장 남자 롤라, 첫사랑을 평생 잊지 못하는 알제리 출신 무슬림 노인 하밀, 나이지라아 출신의 멋쟁이 포주인 은다 아메데, 거리에서 묘기를 부리는 카메룬 출신의 청소부 흑인 왈룸바…….

 

로자 아줌마는 폴란드 태생 유태인이었지만, 수년간 모로코와 알제리에서 몸으로 벌어먹고 살았기 때문에 아랍어를 웬만큼 할 줄 알았다. 유태어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곧잘 유태어로 이야기하곤 했다. [p. 13]

 

오층에 사는 롤라 아줌마는 여장 남자로, 볼로뉴 숲에서 일했다.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는 세네갈에서 권투 챔피언이었다고 했다. [p. 18]

 

하밀 할아버지는 알제리에서 온 사람이었다. 삼십 년 전 알제리에서 메카로 순례를 떠났었다. [p. 48]

 

생 미셸 거리에서 불을 삼키는 묘기로 구경꾼을 끌어 모으던 왈룸바 씨도 찾아와 로자 아줌마 앞에서 자기 재주를 보여주었다.

왈룸바 씨는 카메룬 출신의 흑인으로 청소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는 여러 명의 아내와 자식들을 고향에 두고 왔다. 그의 불 삼키는 솜씨는 가히 올림픽 금메달 감이었고, 그는 여가시간을 모두 이 일에 바쳤다. [pp. 196~197]

 

이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고 노력한다.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 한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여러 사람이 나눔으로써 그 무게를 줄이고 상황을 다소 누그러뜨리는 것처럼.

 

그래서 모모의 아버지 유세프 카디르가 자기 아들을 찾으러 왔다가, 아랍인[모하메드]이 아닌 유대인[모세]으로 키워졌다는 오해에 충격을 받아 죽은 다음에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모습을 그린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좀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서로 말하지 않으려 애썼다. 머리만 복잡해질 것이 뻔했다. 나는 그녀의 발치에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서, 그녀가 나를 지키기 위해 해준 일들에 감사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우리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은 지켜야 했다. 아주 못생긴 사람과 살다 보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정말로 못생긴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p. 232]

 

이 부분은 아무리 힘들어 버거운 삶도, 혼자가 아닌 ‘함께’라면 살만하다고 얘기가 아닐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역설적으로 각자가 자기 앞에 놓인 생(生)을 긍정하고 버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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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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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휴머노이드의 구분이 의미 있을까?

 

저자는 <작별인사>가 개작(改作)을 거치면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서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두 개의 화두(話頭)는 서로 배제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나는 서로 섞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휴먼매터스 랩에서 휴먼매터스의 창립 멤버인 최진수박사의 아들로 살아오던 ‘철이’는 비 오는 날 아빠에게 우산을 가져다 주러 나갔다가 미등록 휴머노이드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다. 그곳에서 철이는 스스로 기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기계파’ 휴머노이드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처럼 살아가는 최신형의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인 것처럼 행동한다.

 

처음엔 그저 그들을 흉내냄으로써 안전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점차 그들과 나 사이에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들의 관절은 연골과 윤활액 대신 인공적으로 합성한 유기화학 제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뇌에 뉴런 대신 회로가 있다는 것 등의 차이들이 있겠지만, 이미 많은 인간이 뇌에 칩을 박아 컴퓨터와 연결하거나, 잘린 팔다리 대신 인공 수족을 장착하여 높은 곳에 쉽게 뛰어오르거나 무거운 것을 가볍게 들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pp. 68~69]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서부터가 기계인 걸까? 육체의 몇 %까지 인공 기기로 교체해야 기계일까? ‘뇌’만 남아있으면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의 고유한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육체의 100%가 기계로 되어 있어도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소설 <작별인사>에 배경이 되는 시대라면 어디까지 ‘인간’이라고. 또 어디까지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가 '나'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중략 ~

예를 들어 새로운 몸을 가지고 다시 태어날 민이는 예전의 그 민이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어디까지 ‘나’일까? 팔도 교체할 수 있고, 다리도 교체할 수 있고, 몸의 모든 부품을 교체할 수 있다면, 그 부분들은 '나'가 아닌 거잖아. 그게 없어도 나는 나일까?

그렇지. 뇌가 그 경계일 거야. 의식은 거기서 생겨나니까.” [pp. 200~201]

 

 

나를 '나'로 정의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소설 속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알고, 인간처럼 살아가는 최신형의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는 겉보기에는 인간과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스스로 기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기계파’ 휴머노이드는 수용소에서 자신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개체의 팔을 뽑아 버린다. 분명히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수단이기는 하다. 하지만 휴머노이드가 아닌 인간일 경우 이런 구분방법은 치명적인 부상이 된다. 따라서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사실,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하는 ‘기계’, 아니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기계’를 그리는 작품은 이 작품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인간다움’에 대해 논의하는 작품으로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1920~1992)의 단편 <바이센테니얼 맨(The Bicentennial Man)>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와는 다소 다르지만 외관상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리플리컨트를 다루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도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네가 스스로 인간이라고 믿는 증거 같은 거 말야.”

아, 음악. 음악이 있어. 나는 음악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여. 정말 말 그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아. 그리고 보니 수용소에 잡혀올 때도 소광장에서 하이든을 듣고 있었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요. 마음은 그냥 안에 있어요.”

민이가 내 말을 잘랐다.

이런 걸 비유라고 하는 거야. 마음은 물론 내 안에 있지만 흔들리고 무너지는 거야. 나는 집에서 들었던 아름다운 음악들을 떠올리면서 수용소의 끔찍한 날들을 견뎠어. 내가 기계라면 왜 음악 같은 것을 듣고 감정이 변할까? 음악은 기계에겐 아무 의미도 정보도 없는 소음일 뿐인데나는 시를 읽으며 감탄하고 영화를 보다가 괴로워하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19세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안타까워하면서 읽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인간이 아니야 [p. 123]

 

여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나를 '나'로 정의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다. 예전에 화제가 되었던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사태를 기억하는가? 가수 타블로가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한 ‘대니얼 선웅 리(Daniel Seon Woong Lee)’임을 증명하는 여러 증거들을 믿지 않는 ‘타진요’ 같은 이들이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화 <트루먼쇼>의 트루먼처럼 거짓으로 꾸며진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

 

 

영생(永生), 그 덧없음에 대하여

 

미등록 휴머노이드라는 이유로 잡혀간 수용소에서 ‘철이’는 복제인간 ‘선이’와 버림받은 휴머노이드 ‘민이’를 만난다. 그들은 철이를 만나기 전에 이미 탈출을 시도하다가 민이의 왼쪽 팔목만 로봇 개에게 잃고 다시 잡혀왔다. 수용소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민병대의 습격으로 수용소가 혼란해지자 철이, 선이, 민이는 탈출한다. 휴먼매터스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민이는 살해되고, 철이와 선이는 휴머노이드 재활용 업체를 운영하는 휴머노이드 달마를 만난다. 철이는 달마를 통해 자신이 휴머노이드임을 인지하고,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영생(永生)할 수 있음도 알게 된다.

 

나는 휴먼매터스 밖으로 나와 진짜 세상을 보았다. 민이 같은 휴머노이드가 존재하는 걸 이미 알아버렸고, 선이처럼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클론과 친구가 되었다. 휴먼매터스는 내 피난처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혼란에 큰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언제나 문제의 일부였다. 아빠가 나를 원하는 것은 아마도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진행해온 자랑스러운 프로젝트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그가 정확히 나에게서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나를 통해 세상의 고통을 줄이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휴머노이드를 만드는 게 정말 그 휴머노이드를 위해서일까? 인간에게 필요한 장기를 생산하기 위해 선이와 같은 클론을 배양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도구로만 여기고 그것의 활용을 고민한다. 나의 ‘용도’는 정확히 무엇일까? 그것을 분명히 알기 전에는 휴먼매터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pp. 212~213]

 

하지만 누구도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영생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개별성이 보존된다면, 레이먼드 F. 존스(Raymond F. Jones, 1915~1994)의SF소설 <합성 뇌의 반란(The Cybernetic Brains)>에서 ‘뇌’가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영생(永生)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름만 영생(永生)이지, 사실상 종신노예가 아닌가.

 

나의 의식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즐기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갔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단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p. 276]

 

영생(永生)은 아니지만 판타지 소설에서 만 년의 수명을 가졌다고 설정된 드래곤의 경우, 긴 수명을 무게에 짓눌려 다른 생명체의 모습으로 유희를 떠나거나 장시간의 수면에 든다. 육신이 있는 존재도 그러할진대, 육체 없이 의식만 있는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 아닐까? 육체가 없다면 쉴 수도 없을 텐데……. 여기에 망각도 할 수 없다면…….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드래곤 ‘크라드메서’처럼 미치거나 자살해버리지 않을까?

 

하지만,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 1917~2008)의 SF소설 <유년기의 끝(Childhood’s End)>를 보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어 영생하는 방식은 개별성이나 독자성을 점차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된다. 그 소설에서 인류는 점차 개개의 독자성을 상실하고, 기존의 인류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완전히 다른 새로운 종(種)으로 변한 끝에 ‘오버마인드’라고 부르는 하나의 거대한 정신체의 일부로 통합되어 버린다.

 

이 소설, <작별인사>에서는 인간도, 휴머노이드도 대부분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어 영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제목 ‘작별인사’는 개별성 혹은 독자성과의 작별인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 그리고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라는 종(種)이 개체성을 상실하여 ‘종(種)’으로서 소멸해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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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전.호질.광문전.임호은전 - 한국고전문학100 11
김기동 외 지음 / 서문당 / 198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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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문자전(廣文者傳)> 혹은 <광문전(廣文傳)>(이하 ‘광문자전’)은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번쯤 제목은 들어보았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단편소설이다. 그냥 읽으면 광문(廣文)이라는 거지의 의리 있는 행동을 부각시킨 글에 불과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에 구애 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광문이라는 비렁뱅이를 통해 유교적 관습에 얽매인 조선의 사대부를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조선의 사대부는 공식적으로 군자(君子)를 지향한다. 바로 유학(儒學)의 시조(始祖)인 공자(孔子)가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꼽은 ‘군자(君子)’말이다. 하지만 영남학파의 시초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소총(홍유손(洪裕孫, 1431~1529), 생육신의 하나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 등 많은 문인들은 도가적인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지향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죽림칠현을 지향하는 것은 사대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문자전>에 언급된 광문 혹은 달문(達文)의 행적을 보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물론 그가 비렁뱅이라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지라고 해서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기는 힘들다. 심지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出家)한 스님 조차도 또 다른 사회에 얽매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병든 거지 아이를 위해 구걸했지만 살해했다고 의심받아 매를 맞고 쫓겨나도 변명하지 않았고, 약방 부자가 도둑질했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도 묵묵히 지낸 광문의 행적은 독특하다. 마치 <장자>에서 말한, 사심(私心)이 없는 ‘지인(至人)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자(莊子)> 소요유편(逍遙遊編)에 언급된 송영자(宋榮子)를 보면,

 

세상 모두가 칭찬한다고 더욱 애쓰는 일도 없고, 세상 모두가 헐뜯는다고 기(氣)가 죽지도 않는다. 다만, 내심(內心)과 외물(外物)의 분별을 뚜렷이 하고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구분할 뿐이다그는 세상 일을 좇아 허둥지둥하지 않는다.

중략 ~

그래서 “지인(至人)에게는 사심(私心)이 없고, 신인(神人)에게는 공적(功績)이 없으며, 성인(聖人)에게는 명예가 없다”고 한다.1)

 

그렇기에 광문의 평가가 가장 공정(公正)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장안에 이름난 기생으로 얼굴이 어여쁘고 노래와 춤을 잘해도 광문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지 않으면 그 기생은 한 푼어치의 가치도 될 수 없었다2)고 한 것이 아닐까?

 

어느 날 궁궐 안 별감(別監)들이며 부마(駙馬)들 또는 그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름난 기생 운심(雲心)을 찾아갔다. 술상을 차려 놓은 가운데 장고 거문고 등에 맞추어 춤추기를 부탁하며 애원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운심은 자꾸 미루면서 춤출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 광문은 밤에 이들이 노는 집 밑에 다다라 머뭇거리다가 방에 뛰어 들어가 상좌에 앉았다. 광문은 비록 다 떨어진 옷을 입었지만 아무 거리낌없이 당당한 태도였다.

중략 ~

술 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서로 눈짓을 하며 광문을 몰아내 쫓아 버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광문은 더욱 다가앉으면서 무릎을 치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장단을 맞추는 것이었다. 운심은 일어서더니 옷을 고쳐 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추기 시작하였다.3)

 

이렇게 광문은 남의 권위를 빌리려는 가짜들과 달리 당당하게 ‘나’를 내세우는 진짜였기에 운심도 그를 위해 기꺼이 칼춤을 춘 것이다. 광문이 진짜니까 그녀도 진짜를 대접한 셈이다.

 

<광문자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서광문전후(書廣文傳後)>를 보면, 광문의 명성을 빌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척 하는 거지 아이와 그의 동생인 척하는 요망한 자가 결국 사형되거나 귀양을 간 이야기가 적혀 있다. 거짓으로 남의 인생을 사는 자의 말로(末路)가 이처럼 명확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은 예외라고 생각해서 기꺼이 남의 인생, 거짓된 삶을 살려고 한다. 그렇게 사는 것도 재능이 필요하기에 쉬운 일도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잠깐 부귀영화의 끝자락이나마 맛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재능을 헛되게 낭비하게 만든 셈이다.

 

<광문자전>과 <서광문전후(書廣文傳後)>에서 보이는 광문처럼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장자>에서 말하는 사심(私心)이 없는 ‘지인(至人)’이라고 할 수 있는 광문의 마지막을 저자는 “그 뒤에 광문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는 말로 끝낸 것 같다. 아마도 광문과 같은 이가 세상에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1) 장주, <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 1993), pp. 33~34

2) 김기동, 전규태 엮음, <양반전, 호질, 광문전, 임호은전>, (서문당, 1984), p. 33

3) 앞의 책, pp. 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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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알베르 카뮈 전집 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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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의 <전락(轉落, La Chute)>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멕시코 시티’라는 바(bar)에서 ‘누군가’를 만난 변호사 장-바티스트 클라망스(이하 ‘클라망스’)의 고백이다. 마치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클라망스는 스스로를 ‘참회한 재판관’이라고 말하며 며칠에 걸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고 세상을 비판한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독백 속에서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저자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인간의 이기심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먼저 화자(話者)인 클라망스는 인간은 모두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어쩌다가 닥친 불행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죄(罪)는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타인을 심판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심판’은 회피하려 한다고 얘기한다.

 

어떤 인간일지라도(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현자(賢者)들이면 몰라도)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공격을 방어하는 유일한 길은 악질적으로 구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심판 받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남을 심판하러 덤비는 겁니다어쩌겠어요?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 마치 본성의 바탕에서 우러나듯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은 바로 자기는 아무 죄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저 키 작은 프랑스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사내는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그가 호송되어 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던 서기에게 이의신청을 해야겠다고 고집을 했어요. 이의신청이라니? 서기와 그 동료들이 웃어댔습니다. “소용없어, 이 친구야. 여기선 이의신청 따윈 하는 게 아니라구.” “그렇지만 말입니다, 내 경우는 예외거든요. 난 죄가 없습니다!” 하고 키 작은 프랑스인이 말했어요. [pp. 85~86]

 

이처럼 나만 예외라고 주장하는 것의 밑바탕에는 심판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심판을 받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

 

우리는 자신의 안 좋은 점을 고치거나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자면 우선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는 판정을 받았어야 했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그저 남에게 동정을 받고 제가 가고 있는 길을 가면서 격려를 받고 싶은 겁니다. 요컨대 죄를 짊어지고 있는 것도 싫고 또 동시에 깨끗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겠다는 겁니다. [p. 88]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기 보다는 타인의 위로와 주위 사람들의 인정에만 연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것은 클라망스도 과거에 그런 인간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전쟁, 자살, 사랑, 가난 같은 것에 사정이 어쩔 수 없을 때는 관심을 갖긴 했지만 그것도 예의상이거나 피상적으로 그랬을 뿐이지요. 때로는 내 일상생활과 관계가 없는 어떤 대의명분에 열렬한 관심을 기울이는체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나의 자유가 위협받는 경우라면 물론 다르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어요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그저 표면만 스치면서 미끄러지는 거예요. 맞아요. 모든 게 내겐 겉만 스치면서 미끄러져갔어요. [p. 56]

 

예전에 클라망스는 가난하거나 변호할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변호하면서, 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덕망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는 클라망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한 결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리 근처를 산책하다가 어떤 여성이 자살 시도하는 걸 목격했지만 그냥 지나쳐버린다. 왜 그랬을까? 주위에 그를 심판 혹은 평가할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

몇 년 후 갑자기 그는 그때 죽은 여성의 웃음소리를 듣는 환청을 겪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무엇이 원인이 되어 그가 죽은 이의 웃음소리를 듣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각성을 통해 그는 깨닫는다.

 

자기 자신을 비판함이 없이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남을 비판할 권리를 갖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통렬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재판관은 누구나 다 결국은 참회자가 되고 마는 법이니까 길을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가서 우선 참회자로서의 직업에 종사하다가 마침내는 재판관이 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내 말 알아들으시겠어요? 좋아요. 하지만 좀 더 분명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중략 ~

우선, 선생께서도 경험해보셨듯이,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공공연한 고백을 하는 일입니다. 나는 종횡무진으로 나 자신을 고발합니다.

중략 ~

자, 딱하게도 이게 바로 나라는 인간입니다!”하고 말하지요. 논고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가 나의 동시대인들에게 내밀어 보이는 초상화는 거울로 변해버립니다. [pp.140~142]

 

이런 방식으로 그는 먼저 참회자(懺悔者)가 되어 자신을 비판(批判)하고, 이어 재판관이 되어 타인을 심판(審判)한다. 하지만 그의 심판은 단지 ‘말’로만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남이 우리 말을 곧이듣는다고 한번 가정해보시죠? 그럼 정말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할 테죠. 아이구 떨려……. 물이 얼마나 차갑다구요! 그렇지만 안심해도 돼요! 이제는 때가 너무 늦었어요. 언제나 너무 늦은 것일 겝니다. 천만다행이지 뭡니까! [p. 148]

 

<전락>이라는 이름의 그 현란한 자기 고백은 지식인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또 하나의 언어유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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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2023-10-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글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은 적 있는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서 포기했던 책이라서요… 항상 올려주시는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KOEMMA 2023-10-21 08:21   좋아요 0 | URL
1. 주인장님의 격려에 감사합니다.^^

2. 저도 막연해서 고민하다가 이해가 되는 부분만 엮어서 정리했습니다.
 
뫼르소, 살인 사건 -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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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다르게 읽어보기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의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1)

 

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 <이방인>은 프랑스령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인 ‘뫼르소’라는 남자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일상을 살아가던 중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이게 되기까지의 상황을 그린 1부와 ‘뫼르소’를 재판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부조리함,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고 변화하는 주인공의 의식을 통해 묘사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방인>이 가해자 ‘뫼르소’만 조명하고 있기에 우리가 무심코 넘어가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피해자인 아랍인 ‘무싸’와 그 가족의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가 가해자의 인권은 보호되고 피해자의 인권은 보호되지 못하는 사례들을 보는 것처럼, 아랍인 '무싸'는 시신조차 보호받지 못했다.

 

<뫼로소, 살인 사건>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이방인>의 이야기를 피해자 아랍인 ‘무싸’ 가족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이 작품이 잘 알려진 원작의 전복(顚覆)을 꾀하는 유일한 작품은 아니다. <춘향전>의 전복을 꾀한 영화 <방자전>(2010)도 있고, <제인 에어>의 전복이랄 수 있는 진 리스(Jean Rhys, 1890~1979)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1966)도 있다.

 

 

하룬, 또 다른 뫼르소

 

이 소설 <뫼르소, 살인 사건>의 화자(話者)는 <이방인>에서 ‘뫼르소’에게 살해당한 아랍인의 동생 ‘하룬’이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한 형태로 쓰여진 작품이지만, 읽다 보면 <뫼르소, 살인사건>의 ‘하룬’에게서 <이방인>의 ‘뫼르소’가 떠오른다.

 

뫼르소에 대한 증오에서 출발하여 그를 집요하게 분석하던 하룬은, 결국 자신이 뫼르소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뫼르소가 조국이 아닌 땅에서 고아처럼 떠도는 삶을 살았다면, 하룬은 죽은 형이 살아오기만을 바라는 엄마 곁에서 죽은 듯 지내야만 했다. 뫼르소가 대낮에 햇빛 아래에서 저지른 살인을 하룬 역시 한밤중에 달빛 아래에서 저지른다. 또한 뫼르소가 살인 자체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죄인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하룬은 프랑스인을 죽였지만 죽인 시기가 알제리 독립 이전이 아니라 이후라는 점에서 비난 받는다. 이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두 사람은 똑같이 종교를 맹렬히 부정하며 자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확고한 태도를 보인다. [pp. 202~203]

 

다시 말해, <이방인>이나 <뫼르소, 살인사건>에서는 일반적인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처럼 살인의 구성요건을 가지고 다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인 행위 그 자체와 관련 없는 요소 때문에 가해자가 비난 받고 판결이 선고된다. 뭔가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한 느낌이 든다.

 

프랑스인 뫼르소가 눈부신 햇빛이 따가운 오후 2시에 알제리인을 살해했듯이, 알제리인 하룬은 달빛이 서늘한 새벽 2시에 프랑스인을 살해한다. 다음에는 그 프랑스인의 유족이 알제리인을 살해할까? 뭔가 이상한 ‘뫼비우스의 띠’를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왠지 저자가 지나치게 <이방인>을 의식한 나머지 재해석 혹은 안티-테제가 돼버린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피해자 ‘무싸’의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 들면서 ‘뫼르소’ 이야기를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맴돌았다.

 

1) 알베르 카뮈, <이방인>, (책세상, 2012), p.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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