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 브루더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운비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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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태생 자체가 정확할 수가 없고,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자의적 기억을 풀어내는 소설가의 기억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내 착각이었다. 작년 스웨덴 한림원이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노벨문학상을 주면서 그 이유로 “붙잡을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기억의 예술로 환기시키고 (나치의 파리) 점령기의 생활세계를 드러냈다”고 했다. 그런데 후자만 기억하고 전자는 아예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전에 읽은 두 편 소설 모두 전자의 조건에는 해당하지만, 후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사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을 읽기 전에 시발점을 바로 이 작품 <도라 브루더>로 시작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도라 브루더>야말로 내가 판단할 때 모디아노가 노벨상을 받은 이유와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삶이 어디 자신의 뜻대로 되는 법이 있었던가. 어쨌든 세 번째로 만난 모디아노의 책은 언제나 그렇듯 모호하면서도 또 여전히 시간의 탐색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모디아노는 과거의 어느 사건을 파고드는 것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좀 더 노골적인 방법으로. 그런데 소설 속의 화자(소설가)가 글을 쓰고 있다고 발표한 현재 시점의 1996년이 아닌 1941년의 어느 실종 신고로 독자를 조용하게 이끈다. 그리고 보니 책의 표지에 파리 시내 지도가 한 장 실린 것을 깜빡했다. 모디아노에게는 익숙한 지명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는 파리의 지명과 대략적인 위치 파악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을 위한 것이리라. 과거에 군부대의 병영이 있었다는 클리냥쿠르, 영화를 보기 위해 찾던 오르나노 대로 같은 이름이 갖는 프랑스 내부의 문화 사회적적 의미를 과연 나는 이 책을 통해 잡아낼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 같다.

 

반세기도 더 지난 시절의 일에 관심을 갖는 화자가 나는 더 궁금하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15세 소녀, 도라 브루더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왜 그렇게 알고 싶었던 것일까. 혹시 프랑스 지식인들이 지금도 터부시하는 1942년 7월 16일 벨디브 유대인 일대검거사건에 대한 부채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독일법령이 우선시되는 점령기였다고 하지만, 프랑스 사법권의 도움과 꼴라보들의 자발적인 협력이 없었다면 1만 3,152명이 되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을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잡아들일 수가 있었을까. 더 큰 문제는 그들 중 대다수는 외국인 신분이 아닌 어엿한 프랑스 시민권자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한 국가란 존재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그들의 운명은 투렐 억류 센터와 드랑시 수용소를 거쳐 최종목적지인 아우슈비츠였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화자는 그로부터 20년이란 시간이 흘러 알제리 사태의 복판에 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슬쩍 흘리기도 하고, 나치 독일의 점령기 시절 어머니와 이혼한 아버지의 수상쩍은 암거래 에피소드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아버지와의 불화 같은 개인적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이것이 바로 종잡을 수 없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주특기인 모호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야기의 얼개 구조다. 이렇게 파편적인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끈은 우리가 과거에 어느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져 있지 않았을까하는 가정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의 흔적들은 기록에 존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아주 사고해 보이는 징후들조차 놓치지 않고 탐문과 서류 조사, 별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없는 몇 장의 기념사진 그리고 정말 우연하게 얻어 걸린 고시장에서 사들인 금방 사그라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오래된 편지까지 끈기를 가지고 꼼꼼하게 살핀다. 역설적이지만 모든 것을 수치화해서 기록하는 독일식 방식이 도운이 되기도 한다. 마치 무슨 암호처럼 보이는 체포와 호송 절차에 대한 기록이야말로 내가 도라 브루더를 추적하는 연결고리인 셈이다.

 

우리는 끈질긴 소설가의 추적 덕분에 점령기 시대 유대인들의 신산한 삶에 대한 빈약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그네들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됐다. 도라의 부모님인 에른스트와 세실은 각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었다. 아버지는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 베테랑으로 식민지 부대에서 숱한 전투를 치르고 100%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끝내 프랑스 국적을 얻지 못했고,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 역시 나치 독일의 점령 이후 강화된 유대인 등록과 검거 열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와중에서 반항적이며 독자적 자질과 방탕기가 다분했던 십대 소녀 도라 브루더는 도피 행각을 계속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도라였지만, 부계와 모계 덕분에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고 기독교계 기숙사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을 거라고 소설가는 추정한다. 아무리 삶에서 달아나려고 노력했음에도 도라의 운명은 다른 유대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그는 조용하게 증언한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이 소설에서 설정한 시간이라는 시니피앙(기표)과 짝을 이루는 시니피에(기의)는 시간의 이빨, 다시 말해서 망각이다. 작가는 점령기라는 자의적 시간이 그리는 궤적에 놓인 인간의 운명에 대한 고증을 통한 추적에 나선다. 시간의 탐색과 재구성을 통해 자신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유대인 소녀의 운명을 추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가혹한 홀로코스트 시대에 아무런 대응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던 무력한 개인의 운명을 읽으면서 시대를 막론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고민하던 청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도라 브루더에 대한 추적은 어느 순간, 수면 아래로 잦아들고 대신 그의 삶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운다.

 

사회적인 폭압과 갈등이 만연해 있던 1940년대와 2015년 현재의 모습이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주변 환경은 우리에게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망각하라고 끊임없이 종용한다. 동시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삶의 객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주체가 될 것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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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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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두 번 갔다. 여느 여행자처럼 두 번 모두 수박 겉 핥식의 그런 여행이었다. 그래도 두 번째 파리에 갔을 적에는 한 번 가본 곳이라고 기시감 덕분에 더 편안한 느낌이었다. 작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을 읽으면서 파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생각에 작가가 들려주는 파리의 이모저모를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내게는 오데옹 사거리, 브레트빌 대로 그리고 뇌이 시청 같은 낯선 지명보다 여전히 홍대의 미로 같은 골목길이 그리고 종로의 피맛골이 더 친근한 걸 보면 말이다.

 

먼저 이 책이 내가 읽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첫 번째 책이라는 점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재작년 수상자였던 앨리스 먼로의 책도 서너 권 사두고는 아예 읽어볼 궁리도 하지 않았다. 모옌의 책도 마찬가지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책은 왠지 어려울 것 같다는 편견과 아집에 발동된 거부감이 스스로를 기만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읽지는 않았지만, 난 그래도 노벨문학상 받은 작가의 이런 저런 책은 가지고 있다고 자위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다 읽고 나서, 바로 옆에 있던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가 눈에 띄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는데 놀랍게도 단박에 다 읽어 버렸다. 게다가 재밌기까지 하다. 모쪼록 이참에 노벨문학상은 어렵고 재밌지 않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됐다. 아, 그리고 160쪽 가량의 짧은 분량이었다는 점도 속독에 한몫했다.

 

작가가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라고 명명한 카페 <르 콩데>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며 한 잔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우정을 쌓던 바로 그 곳에서 첫 번째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조금은 이질적 존재로 다가온다. 문득 <르 콩데>가 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만 했을까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화자 나는 그런 곳이야말로 정의할 수 없는 자력이 있는 장소라고 설명한다. 한편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치기 어린 젊은이들은 폭음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런 통과의례의 절차를 거쳐야만 자신들의 패거리에 낄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에 합의하고 있었다고 화자는 증언한다.

 

화자가 소개하는 이름 중의 배턴을 이어 받아 앞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몇몇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 받은 캐릭터가 바로 본명을 알 수 없는 루키라는 여자다. 이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장’은 자신의 노트에 카페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시간 그리고 등장인물들을 사진사가 카메라로 작업을 하듯 그렇게 정교하게 적어 넣는다. 마치 영화 <스모크>에서 담뱃가게 주인 하비 케이틀이 매일 같이 똑같은 사진을 찍는 것처럼, 일상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첫 번째 인스톨의 말미에 자신은 고등광산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운 듯 밝히며 배턴을 다음 주자에게 넘긴다.

 

다음 주자로 등장한 화자는 좀 더 흥미로운 인물로 배치가 되어 있다. 스스로 예술편집자라고 카페 <르 콩데>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던 사립탐정 피에르 케슬레가 누군가를 추적하는 과정이 소설에 가미된 미스터리 효모를 들뛰게 만든다. 그가 찾는 사람이 바로 <르 콩데> 카페의 단골손님 루키이고, 그녀의 처녀적 이름은 자클린 들랑크 그리고 지금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장피에르 슈로의 집나간 부인이라는 사실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 탐정은 사건 의뢰 받은 사람을 찾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클린의 도피 혹은 방황에 일조한다. 그리고 그녀가 오래전 ‘미성년자의 방황’을 경험했다는 사실까지 알아낸다. 그렇다면 남편을 떠난 자클린의 도피는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셈이란 말인가.

 

자자, 이제 드디어 이 소설의 실제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자클린 들랑크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 차례다. 그녀는 물랭루주에서 일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어쩔 수 없이 저녁 시간을 홀로 보내야했다. 성정이 예민해지고 가슴이 들끓을 그런 청소년기에 그녀는 집에만 있을 수가 없었나 보다. 그렇게 야심한 시간에 돌아다니다 경찰의 보호를 받게 되고, 경찰을 연락을 받은 어머니의 에스코트를 받아 집에 돌아오게 된다. 물론 그 정도로 자클린이 벌이는 (현실세계에서의) 도피 행각이 멈출 리 없다. 그러다 해골이란 별명을 가진 자네트 골이라는 여자와 만나 ‘눈’을 맞는 경험도 하게 된다. 그렇게 도피 중에 그녀가 자주 들렀던 서점 주인이 그녀에게 건넨 “그래, 당신의 행복을 찾으셨나요?”란 질문은 화두처럼 상냥하면서도 신비하게 그녀를 매료시킨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해주는 서점 주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소설의 나머지 두 꼭지는 자클린의 친구 롤랑이 맡는다. 소설의 어디에선가 그는 자신이 전생에서부터 그녀를 알았던 것 같다는 고백을 한다. 그리고 다시 위대한 철학자의 ‘영원한 회귀’ 사상까지 도입해서 고대 철학자가 줄기차게 주장한 고통의 경감과 쾌락의 증진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가치라는 그런 결론에 방점을 찍는다. 뒤표지에 실린 ‘도망치는 순간’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미미여사의 <화차>가 떠올랐다. 놀랍다, 그저 바람나서 도망간 아내를 추적하는 이야기일 거라는 나의 소설의 얼개에 지레짐작을 정통으로 박살내준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자신의 소설에서 장기로 삼은 시간을 통한 기억의 탐색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소설에 등장하는 모두가 어느 순간엔가 서로 만나지는 못했더라도 스쳐지나가지 않았을까는 추론을 도달하는 개연성 설계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밥 스톰스가 주최한 파티에서 벌어지는 시(詩) 배틀은 또 어떤가.

 

영화 <라쇼몽>처럼 직접적인 교차 서술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를 무대로 활동하는 캐릭터들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펼치며 벌이는 느슨하면서도 삶의 어느 순간에 서로 연결된 이야기들은 매력적이다. 삶 속에서 도피와 방황을 반복하던 자클린이 특정한 시간에 좌초되어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 도착했을 지도 모른다는 고등광산학교 학생의 추측도 흥미롭다. 자클린을 찾아 나선 사립탐정 케슬레는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가 언급한 진실이 토해지는 순간이야말로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의 고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소설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젊음’은 삶에서 규정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단절되었거나, 방황 혹은 도피하는 이들만 알아볼 수 있는 비밀코드가 아니었을까.

 

그동안 출간된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들을 많이도 모아 두었다. 올해 을미년을 모디아노의 해로 삼아 천천히 읽어도 될 정도다. 바로 <팔월의 일요일들>도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이 소설에도 그가 구사하는 어느덧 익숙해진 기억 속의 탐색이 등장해서 반가웠다.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 꾸준하게 구사하는 주제에 익숙해진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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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23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요. 레삭매냐님. 잘 지내시죠? ^^ 저번 주에 책방에서 운 좋게 모다이노의 <슬픈 빌라>를 구입했어요. 저도 모다이노 작품을 정주행 독서를 해보려고 합니다.

레삭매냐 2015-01-24 10:1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싸이러스님!
저도 헌책방에서 모디아노의 책들을 찾아 헤맸는데
생각처럼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노벨문학상
위업이 대단하긴 한가 봅니다.
간신히 <도라 브루더> 구한 뒤에는 이런저런 루트로
잔뜩 쟁여 두게 되서 싸이러스님처럼 정주행 해보렵니다.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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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어느 날, 윌리엄 스토너가 내 삶에 들어왔다. 그는 미국 중부 미주리 주 분빌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갈라진 손 틈에서 흙을 떨어낼 수 없는 그런 농부였다. 스토너 역시 억센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 지내던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농과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다가 영문학의 세계에 매료되어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는, 어떻게 보면 평범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수성가의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의 삶의 어떤 점에 나는 매료된 걸까.

 

빌 스토너를 창조해낸 존 윌리엄스를 이름을 이 책을 통해 처음 듣게 됐다. 이미 오래 전에 작고한 작가로, 생전에 네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 <스토너>는 사후 반세기 뒤에 고향인 미국도 아닌 유럽에서 재평가를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고 우리에게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소설 <스토너>는 주인공의 부고로 시작해서 그의 전 생애를 다루고 있다. 톰 행크스가 말한 대로 어느 청년이 대학에 가 교수가 된 이야기라는 것이 이 소설을 집대성하는 한 문장일 것이다. 하지만, 존 윌리엄스는 어떻게 보면 진부해 보이는 개인의 내면세계를 집요할 정도로 깊숙하게 파고들면서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작가는 간결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소설을 진행하면서, 인생의 실패자로 보일 수도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미국이 패권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두 번의 전쟁과정 동안, 대학이라는 학문의 전당에서 세월을 보낸 스토너 교수의 삶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가진 것 없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 자신도 당연히 농부가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삶의 여정은 그를 교육자의 길로 인도했다. 사람은 자신을 어떤 길로 인도할 인생의 멘토를 만나기 마련인데, 미주리 대학교 영문학과의 아처 슬론 교수가 이 소설에서는 그런 역할을 했다. 농과대학생이 교양 강의 시간에 들은 셰익스피어 소네트가 그의 삶의 진로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과연 그가 가진 학구열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은 당시엔 몰랐겠지만, 학문에 대한 사랑이 온갖 역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폭풍 같은 스토너의 삶의 현장에서 그를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했다고 하면 과언일까.

 

독자라는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그의 삶은 평범해 보였지만 그 역시 다른 이들처럼 비슷한 좌절과 고통에 시달려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스토너는 멘토 아처 슬론 교수의 충고를 받아 들여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나 고든 핀치처럼 열정에 휩싸여 전쟁터로 나가는 대신 대학에 남아 연구를 계속했다. 징병 유예가 어쩌면 그의 주홍글씨처럼 남을 수도 있었지만, 무소뿔처럼 혼자서 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유명한 클레어몬트 학장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세인트루이스 출신 아가씨 이디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 스토너는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하게 된다. 영문학에 대한 첫 번째 사랑은 스토너의 인생 동안 계속해서 유지되었지만, 두 번째 사랑이었던 이디스와의 결혼은 훗날 스토너의 삶에 잿빛 암운을 드리우게 하는 결정적 실수였노라고 소설은 조용하게 증언한다.

 

스토너가 가정에서 멀어질수록 그의 학문과 강의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가정에서 찾을 수 없었던 내면의 행복과 안식을 그는 다른 곳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가 태어나면서 아버지가 된 스토너는 이제는 타인처럼 되어버린 부인 이디스를 대신해서 가사와 일까지 도맡아 하는 헌신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고향 아버지의 밭에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기대할 만한 소출이 나지 않는 밭은 가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이디스는 그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자신만의 서재를 꾸미며 안식을 찾은 스토너의 공간을 빼앗고, 사교모임을 한다는 핑계로 낯선 이들을 쉴 새 없이 집으로 불러들이고, 딸 그레이스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꼴을 보지 못해 교육을 빌미로 둘 사이를 떼어놓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스토너가 이런 내적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면, 외적으로는 같은 영문과 동료 교수 로맥스와의 불화가 한몫했다. 게다가 로맥스가 자신의 상관격인 학과장이 되고, 엉터리 대학원생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찰스 워커 사건으로 두 사람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다. 로맥스는 스토너가 정식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물론이고, 고참 선임교수임에도 불구하고 강사들이나 맡는 1학년 학부 강의를 맡기는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진 종신교수직(tenure)은 그가 로맥스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이제 나이가 들어 고집불통이 된 스토너는 로맥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강의를 묵묵하게 해내면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가시밭길을 헤쳐 나간다. 스토너는 창조적인 기지를 발휘해서 로맥스에게 반격을 가하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해묵은 감정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위기마다 등장하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사이드킥인 고든 핀치와의 격의 없는 대화는 존 윌리엄스 식의 유머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무미건조해 보이는 스토너의 삶에 어느 날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토너 영감이 그런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다니, 믿기지 않는다. ‘기존 관념’의 기준에서 볼 때, 대학원 세미나 강의 시간에 만난 캐서린 드리콜과의 예상하지 못했던 연애는 불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상실한 불혹의 남자가 보통 사람이라면 십대에 경험했을 그런 불같은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일탈로 이어지는 과정은 자못 흥미진진하다. 곧게 뻗은 철로 밖으로 갑자기 이탈한 기차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존 윌리엄스는 가정에서 사랑 받지 못하는 남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라는 정말 진부해 보이는 플롯을 전개하면서, 스토너의 마지막 사랑을 배움의 코드로 치환하는 수완을 보이기도 한다. 정말 교수님다운 발상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스토너>를 읽으면서, 존 윌리엄스가 기술한 어떤 대목에서는 너무 공감이 되어 격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굴곡진 빌 스토너의 삶을 읽으면서 그가 체험한 삶의 희로애락에 그만 몰입되어 버렸다. 스토너의 삶에서 고통과 인내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그런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누구에게나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 속에 지고의 행복 대신 왜 원하지 않는 고통이 그렇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걸까? 소설 속에서 그가 했던 것처럼 무조건적인 인내가 고통을 경감시키고, 쾌락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삶에서 바라는 궁극의 행복이 증진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가 문학에서 찾은 영혼의 해방구 이미지는 책의 표지에서 층층이 쌓인 책과 아주 멋지게 형상화되어 있다. 문학이 삶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스토너>에서처럼 타인의 삶을 통해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야말로 오늘도 내가 소설을 꾸역꾸역 읽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어쨌든 수고하셨소 스토너 교수님, Rest in peace.

 

[리딩데이트] 2015년 1월 15일 ~ 21일 오후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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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의 그녀
가쿠타 미츠요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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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소설 역시 순전히 소설리스트에서 소개된 <종이달> 덕분에 읽게 되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오프라인 서점에 들렀다가 습관처럼 신간 도서 코너를 둘러보게 됐다. 지난 11월부터 시행된 도서정가제 덕분에 이제 더 이상 구간은 잘 사지 않게 되는 경향이 생긴 것 같다. 도서관이나 아니면 중고서점을 이용하게 되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서점 매대에서 일본 작가 가쿠타 미치요의 <종이달>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나오키상을 받았다는 내용을 얼핏 본 것 같다. 물론 신간 <종이달>이 나오키상 수상작은 아니다. 그럼 그녀의 나오키상 수상작은 뭐지라는 궁금증에 집에 돌아와 검색을 해봤다. 바로 이 책 <대안의 그녀>가 가쿠다 미치요 작가의 나오키상 수상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에 나온 책인데 벌써절판의 운명에 처해졌다.

 

그 때 이미 난 다른 책을 읽고 있었는데 <대안의 그녀>를 한 번 읽기 시작하니까 자꾸만 이 책에 손길이 갔다. <대안의 그녀>에는 모두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남편 슈지와 결혼하면서 전업주부로 세 살박이 아카리를 키우고 있는 사요코, 그런 사요코가 구직에 나서 만나게 된 플래티나 플래닛의 사장 동갑내기 사장 아오이 그리고 아오이의 고등학교 시절 단짝친구 물고기 새끼[魚子]라는 이름의 나나코. 작가처럼 주인공 모두 여성이다. 가쿠타 미치요는 사요코의 현재와 아오이의 과거라는 교차서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현재의 사요코는 딸 아카리와 더불어 공원순례를 다닌다. 자신처럼 숫기가 없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딸을 보며, 어느 순간 자신도 자신만의 일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직업전선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웃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경단녀(경력단절녀)에 아이까지 가진 유부녀가 일자리 찾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남편 슈지와 아카리를 맡아주는 시어머니의 시선도 곱지 않다. 이런 와중에 대뜸 자신을 받아 주겠다고 하니 그녀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녀의 보스는 바로 또 다른 주인공 아오이다.

 

그렇게 현재의 주인공이 사요코라면, 과거의 주인공은 아오이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대도시 요코하마에서 왕따사건에 휘말린 아오이는 부모님을 졸라 시골 군마에서 새출발을 다짐한다. 왕따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인 걸까?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요코와 아오이가 겹쳐 보였다. 너무 튀지도 그 반대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서서 아오이는 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만난 나나코는 그녀와는 너무 다른 성향의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아오이는 당연히 그녀는 자신 같은 삶을 살지 않았으리라고 단정한다. 물론 나나코 삶의 이면을 알기 전까진 말이다.

 

가쿠타 미치요 작가는 마치 한편의 미스터리물을 풀어 가는 그런 구성을 따른다. 현재의 사요코에게 과거의 아오이가 가진 사연에 대한 실마리를 슬쩍 흘리며, 독자를 유혹한다. 도대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하고 독자를 유혹해내는 작가의 뛰어난 수완이 돋보였다. 한편, 사요코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청소대행업을 하면서 존재감이 엷어진 자신의 자아를 찾기 시작한다. 사요코가 어렵게 찾은 두 번째 직업은 청소다. 지우고 싶은 과거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노동과 그에 따른 소득을 통한 자존감의 회복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 걸까. 그녀의 대척점에 놓인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스타일의 사장 아오이를 그녀를 마냥 부러워한다. 마치 그녀와 함께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 같다고까지 생각하지만, 그 정점에서 그녀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친구 나나코가 왕따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변호해주지 못한 자신의 비겁한 모습에 환멸하던 아오이의 감정이 연상됐다. 나나코와 아오이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펜션 아르바이트를 마친 뒤 감행했던 일탈에서 나이든 독자는 그녀들이 행여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을지 노파심이 앞선다. 정말 그들은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이 작품에서 가쿠타 미치요 작가의 방점은 모두 관계로 모아진다. 우리는 살기 위해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관계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내가 시리게 투명한 관계를 원한다면, 진정성 있게 상대방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렇지 않은 관계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부지불식간에 휘발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왕따문제는 삶이 너무 단조롭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뒤틀리고 파행적인 관계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강 건너 기슭에 서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물질적 궁핍 때문에 아이들이 서로에게 잔인해질 수 있다는 점도 그 과정에서 읽을 수가 있었다. 나나코가 사는 임대주택이라는 공간이 누군가에게 관계의 카스트제도로 작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대안의 그녀>의 결말은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 이들의 새출발로 귀결된다. 아니 새출발이라는 진부한 표현보다 리셋(reset)이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진정성 있는 관계를 바라는 사요코처럼 작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보다 상대방을 우선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녀처럼 용기를 내어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하고 리셋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보통 이상의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사요코와 아오이 그리고 나나코의 이야기를 통해 관계에 대해 한 수 배웠다.

 

[리딩데이트] 2015116~ 18일 오후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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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노버트 데이비스 시리즈 Norbert Davis Series
노버트 데이비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을미년 새해 들어 오래 전에 작고한, 그리고 당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글을 연달아 접하게 됐다. 지금 막 읽은 미국 출신의 하드보일드 작가 노버트 데이비스를 필두로 해서,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들 그리고 오늘 막 도착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가 그 주인공들이다. 먼저 정말 처음 들어보는 노버트 데이비스란 작가는 마포 김사장님의 열렬한 찬사 덕분에 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철학 천재 비트겐슈타인이 절찬한 바로 그 소설이라고 하니 어찌 거부할 수 있으리오.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1940년대 멕시코의 로스알토스라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탐정물이다. 하드보일드 소설답게, 감상이나 한가한 경치 묘사 따위는 일체 거부하고 액션과 속도감 넘치는 진행이 돋보인다. 우리의 주인공으로 사립탐정 도앤은 뚱보 스타일의 냉혈한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악당들에게 총질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며, 이익을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제목부터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탐정이 누구인진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버디로 등장하는 거구의 그레이드데인으로 끝장 비주얼을 가진 카스테어스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낯선 장소의 등장한 낯선 인물처럼 탐정 도앤의 곁을 지키는 친구 역시 낯설기 짝이 없다.

 

아즈테카 호텔을 떠난 일단의 미국인 관광객들이 로스알토스 마을에 지진 때문에 외부와 통신과 교통이 단절되어 고립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해프닝들은 확실히 재밌다. 게다가 로스알토스에서는 흉악한 범죄자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암약하고 있다고 한다. 거의 완벽한 설정이 아닌가. 여느 탐정물처럼 초반의 등장인물 소개와 어떻게 해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가 세팅되고 나면 나머지는 휙휙 돌아가는 수레바큇살처럼 일사천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요즘 들어 이상한 독서 습관 때문에 이책 저책 지분대는 바람에 바로 단숨에 읽진 못했지만, 가뜩이나 느려 터진 요즘 책읽기에 비하면 나름 선방한 셈이다.

 

탐정소설의 리뷰를 쓰면서 항상 하는 고민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면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거리를 다 알려 주면 도대체 어느 독자가 예의 리뷰를 보고 그 책을 보려고 하겠는가. 그러니 적당한 관심을 보여 주면서도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적당히 넘어가주는 그런 기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개인적으로 탐정소설 리뷰를 쓸 적에는 주로 캐릭터 분석에 공을 들이는 편이다.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나의 관심을 끈 캐릭터는 바로 고아로 미국 사립학교 출신의 여교수라는 재닛 마틴 양이었다. 하드보일드 탐정물에 어울리지 않는 블랙유머 때문에 고전했다는 노버트 데이비스 작가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소설 속에서 재닛 양과 주인공 도앤이 벌이는 다양한 대화를 통해 접할 수 있는 1940년대 시대상을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마 소설이 발표될 즈음인 1943년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었는지 유럽대륙을 제패한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소설에서 희대의 악당으로 나오는 보티스트 보노파일이 멕시코혁명의 전설이었던 사파타와 판초 비야가 몰래 숨겨 놓은 막대한 무기를 횡재하게 됐다는 설정도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 세계 유명한 관광지를 누비는 미국 관광객들에 대한 노버트 데이비스 식의 신랄한 풍자도 빼놓을 수 없다. 1920년대말 시작된 대공황에 허덕이던 미국 경제는 유럽과 태평양에서 시작된 2차세계대전으로 미국본토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태에서 전선에서 소용되는 막대한 군수물자를 생산해 내면서 불황에서 벗어나 완전고용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패권국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소득과 휴가시간의 증가로 특권층 뿐만 아니라 보통 시민들도 해외여행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 그렇게 관광지를 찾은 미국인들의 관광형태를 로스알토스라는 공간적 배경을 통해 역시 지식인 계급으로 좀 배운 페로나 대위의 입을 빌어 신랄하게 비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 나라고 가서 그 나라 말이 아닌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들의 자신감이란.

 

소설을 관통하는 상당히 시니컬하지만 능숙하게 사건을 대하는 탐정 도앤의 쿨함도 하드보일드를 더 뜨겁게 만들어주는 요소지만, 코르테스의 멕시코정복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노버트 데이비스의 역사적 접근방식이 놀랍다. 결국 코르테스의 부관 페로나의 친구였던 길 데 리코가 남겼다는 연대기 기록을 바탕으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는 주인공이 바로 재닛 양이 아니던가. 그녀의 순진함은 능구렁이 같은 도앤의 잔머리와 묘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소설을 더 재밌게 만들어준다. 이렇게 당대에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아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탐정소설가는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에 탐정소설이 갖출 수 있는 모든 재밌는 요소들을 두루 투입했던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도 넘어서 우리에게 도착했다.

 

책과 함께 온 르 지라시 8호는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기대가 크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전히 신비에 휩싸인 그리고 나같은 범인(凡人)은 잘 알지도 못하는 철학천재 비트겐슈타인을 마케팅에 활용한 아이디어는 끝내줬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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