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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ㅣ 노버트 데이비스 시리즈 Norbert Davis Series
노버트 데이비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을미년 새해 들어 오래 전에 작고한, 그리고 당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글을 연달아 접하게 됐다. 지금 막 읽은 미국 출신의 하드보일드 작가 노버트 데이비스를 필두로 해서,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들 그리고 오늘 막 도착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가 그 주인공들이다. 먼저 정말 처음 들어보는 노버트 데이비스란 작가는 마포 김사장님의 열렬한 찬사 덕분에 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철학 천재 비트겐슈타인이 절찬한 바로 그 소설이라고 하니 어찌 거부할 수 있으리오.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1940년대 멕시코의 로스알토스라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탐정물이다. 하드보일드 소설답게, 감상이나 한가한 경치 묘사 따위는 일체 거부하고 액션과 속도감 넘치는 진행이 돋보인다. 우리의 주인공으로 사립탐정 도앤은 뚱보 스타일의 냉혈한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악당들에게 총질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며, 이익을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제목부터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탐정이 누구인진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버디로 등장하는 거구의 그레이드데인으로 끝장 비주얼을 가진 카스테어스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낯선 장소의 등장한 낯선 인물처럼 탐정 도앤의 곁을 지키는 친구 역시 낯설기 짝이 없다.
아즈테카 호텔을 떠난 일단의 미국인 관광객들이 로스알토스 마을에 지진 때문에 외부와 통신과 교통이 단절되어 고립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해프닝들은 확실히 재밌다. 게다가 로스알토스에서는 흉악한 범죄자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암약하고 있다고 한다. 거의 완벽한 설정이 아닌가. 여느 탐정물처럼 초반의 등장인물 소개와 어떻게 해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가 세팅되고 나면 나머지는 휙휙 돌아가는 수레바큇살처럼 일사천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요즘 들어 이상한 독서 습관 때문에 이책 저책 지분대는 바람에 바로 단숨에 읽진 못했지만, 가뜩이나 느려 터진 요즘 책읽기에 비하면 나름 선방한 셈이다.
탐정소설의 리뷰를 쓰면서 항상 하는 고민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면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거리를 다 알려 주면 도대체 어느 독자가 예의 리뷰를 보고 그 책을 보려고 하겠는가. 그러니 적당한 관심을 보여 주면서도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적당히 넘어가주는 그런 기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개인적으로 탐정소설 리뷰를 쓸 적에는 주로 캐릭터 분석에 공을 들이는 편이다.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나의 관심을 끈 캐릭터는 바로 고아로 미국 사립학교 출신의 여교수라는 재닛 마틴 양이었다. 하드보일드 탐정물에 어울리지 않는 블랙유머 때문에 고전했다는 노버트 데이비스 작가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소설 속에서 재닛 양과 주인공 도앤이 벌이는 다양한 대화를 통해 접할 수 있는 1940년대 시대상을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마 소설이 발표될 즈음인 1943년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었는지 유럽대륙을 제패한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소설에서 희대의 악당으로 나오는 보티스트 보노파일이 멕시코혁명의 전설이었던 사파타와 판초 비야가 몰래 숨겨 놓은 막대한 무기를 횡재하게 됐다는 설정도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 세계 유명한 관광지를 누비는 미국 관광객들에 대한 노버트 데이비스 식의 신랄한 풍자도 빼놓을 수 없다. 1920년대말 시작된 대공황에 허덕이던 미국 경제는 유럽과 태평양에서 시작된 2차세계대전으로 미국본토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태에서 전선에서 소용되는 막대한 군수물자를 생산해 내면서 불황에서 벗어나 완전고용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패권국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소득과 휴가시간의 증가로 특권층 뿐만 아니라 보통 시민들도 해외여행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 그렇게 관광지를 찾은 미국인들의 관광형태를 로스알토스라는 공간적 배경을 통해 역시 지식인 계급으로 좀 배운 페로나 대위의 입을 빌어 신랄하게 비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 나라고 가서 그 나라 말이 아닌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들의 자신감이란.
소설을 관통하는 상당히 시니컬하지만 능숙하게 사건을 대하는 탐정 도앤의 쿨함도 하드보일드를 더 뜨겁게 만들어주는 요소지만, 코르테스의 멕시코정복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노버트 데이비스의 역사적 접근방식이 놀랍다. 결국 코르테스의 부관 페로나의 친구였던 길 데 리코가 남겼다는 연대기 기록을 바탕으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는 주인공이 바로 재닛 양이 아니던가. 그녀의 순진함은 능구렁이 같은 도앤의 잔머리와 묘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소설을 더 재밌게 만들어준다. 이렇게 당대에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아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탐정소설가는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에 탐정소설이 갖출 수 있는 모든 재밌는 요소들을 두루 투입했던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도 넘어서 우리에게 도착했다.
책과 함께 온 르 지라시 8호는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기대가 크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전히 신비에 휩싸인 그리고 나같은 범인(凡人)은 잘 알지도 못하는 철학천재 비트겐슈타인을 마케팅에 활용한 아이디어는 끝내줬다. 브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