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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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어느 날, 윌리엄 스토너가 내 삶에 들어왔다. 그는 미국 중부 미주리 주 분빌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갈라진 손 틈에서 흙을 떨어낼 수 없는 그런 농부였다. 스토너 역시 억센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 지내던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농과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다가 영문학의 세계에 매료되어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는, 어떻게 보면 평범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수성가의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의 삶의 어떤 점에 나는 매료된 걸까.

 

빌 스토너를 창조해낸 존 윌리엄스를 이름을 이 책을 통해 처음 듣게 됐다. 이미 오래 전에 작고한 작가로, 생전에 네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 <스토너>는 사후 반세기 뒤에 고향인 미국도 아닌 유럽에서 재평가를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고 우리에게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소설 <스토너>는 주인공의 부고로 시작해서 그의 전 생애를 다루고 있다. 톰 행크스가 말한 대로 어느 청년이 대학에 가 교수가 된 이야기라는 것이 이 소설을 집대성하는 한 문장일 것이다. 하지만, 존 윌리엄스는 어떻게 보면 진부해 보이는 개인의 내면세계를 집요할 정도로 깊숙하게 파고들면서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작가는 간결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소설을 진행하면서, 인생의 실패자로 보일 수도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미국이 패권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두 번의 전쟁과정 동안, 대학이라는 학문의 전당에서 세월을 보낸 스토너 교수의 삶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가진 것 없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 자신도 당연히 농부가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삶의 여정은 그를 교육자의 길로 인도했다. 사람은 자신을 어떤 길로 인도할 인생의 멘토를 만나기 마련인데, 미주리 대학교 영문학과의 아처 슬론 교수가 이 소설에서는 그런 역할을 했다. 농과대학생이 교양 강의 시간에 들은 셰익스피어 소네트가 그의 삶의 진로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과연 그가 가진 학구열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은 당시엔 몰랐겠지만, 학문에 대한 사랑이 온갖 역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폭풍 같은 스토너의 삶의 현장에서 그를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했다고 하면 과언일까.

 

독자라는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그의 삶은 평범해 보였지만 그 역시 다른 이들처럼 비슷한 좌절과 고통에 시달려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스토너는 멘토 아처 슬론 교수의 충고를 받아 들여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나 고든 핀치처럼 열정에 휩싸여 전쟁터로 나가는 대신 대학에 남아 연구를 계속했다. 징병 유예가 어쩌면 그의 주홍글씨처럼 남을 수도 있었지만, 무소뿔처럼 혼자서 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유명한 클레어몬트 학장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세인트루이스 출신 아가씨 이디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 스토너는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하게 된다. 영문학에 대한 첫 번째 사랑은 스토너의 인생 동안 계속해서 유지되었지만, 두 번째 사랑이었던 이디스와의 결혼은 훗날 스토너의 삶에 잿빛 암운을 드리우게 하는 결정적 실수였노라고 소설은 조용하게 증언한다.

 

스토너가 가정에서 멀어질수록 그의 학문과 강의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가정에서 찾을 수 없었던 내면의 행복과 안식을 그는 다른 곳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가 태어나면서 아버지가 된 스토너는 이제는 타인처럼 되어버린 부인 이디스를 대신해서 가사와 일까지 도맡아 하는 헌신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고향 아버지의 밭에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기대할 만한 소출이 나지 않는 밭은 가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이디스는 그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자신만의 서재를 꾸미며 안식을 찾은 스토너의 공간을 빼앗고, 사교모임을 한다는 핑계로 낯선 이들을 쉴 새 없이 집으로 불러들이고, 딸 그레이스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꼴을 보지 못해 교육을 빌미로 둘 사이를 떼어놓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스토너가 이런 내적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면, 외적으로는 같은 영문과 동료 교수 로맥스와의 불화가 한몫했다. 게다가 로맥스가 자신의 상관격인 학과장이 되고, 엉터리 대학원생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찰스 워커 사건으로 두 사람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다. 로맥스는 스토너가 정식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물론이고, 고참 선임교수임에도 불구하고 강사들이나 맡는 1학년 학부 강의를 맡기는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진 종신교수직(tenure)은 그가 로맥스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이제 나이가 들어 고집불통이 된 스토너는 로맥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강의를 묵묵하게 해내면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가시밭길을 헤쳐 나간다. 스토너는 창조적인 기지를 발휘해서 로맥스에게 반격을 가하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해묵은 감정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위기마다 등장하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사이드킥인 고든 핀치와의 격의 없는 대화는 존 윌리엄스 식의 유머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무미건조해 보이는 스토너의 삶에 어느 날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토너 영감이 그런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다니, 믿기지 않는다. ‘기존 관념’의 기준에서 볼 때, 대학원 세미나 강의 시간에 만난 캐서린 드리콜과의 예상하지 못했던 연애는 불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상실한 불혹의 남자가 보통 사람이라면 십대에 경험했을 그런 불같은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일탈로 이어지는 과정은 자못 흥미진진하다. 곧게 뻗은 철로 밖으로 갑자기 이탈한 기차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존 윌리엄스는 가정에서 사랑 받지 못하는 남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라는 정말 진부해 보이는 플롯을 전개하면서, 스토너의 마지막 사랑을 배움의 코드로 치환하는 수완을 보이기도 한다. 정말 교수님다운 발상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스토너>를 읽으면서, 존 윌리엄스가 기술한 어떤 대목에서는 너무 공감이 되어 격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굴곡진 빌 스토너의 삶을 읽으면서 그가 체험한 삶의 희로애락에 그만 몰입되어 버렸다. 스토너의 삶에서 고통과 인내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그런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누구에게나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 속에 지고의 행복 대신 왜 원하지 않는 고통이 그렇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걸까? 소설 속에서 그가 했던 것처럼 무조건적인 인내가 고통을 경감시키고, 쾌락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삶에서 바라는 궁극의 행복이 증진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가 문학에서 찾은 영혼의 해방구 이미지는 책의 표지에서 층층이 쌓인 책과 아주 멋지게 형상화되어 있다. 문학이 삶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스토너>에서처럼 타인의 삶을 통해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야말로 오늘도 내가 소설을 꾸역꾸역 읽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어쨌든 수고하셨소 스토너 교수님, Rest in peace.

 

[리딩데이트] 2015년 1월 15일 ~ 21일 오후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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