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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 - 2014년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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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역사소설의 귀환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싶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필두로 해서,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 그리고 이기호 작가의 <차남들의 세계사>, 최민석 작가의 <풍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간 우리 문학 작가들이 잘 다뤄오지 않던 한국 현대사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 풍년을 이루고 있다. 나는 <투명인간>, <소년이 온다>에 이어 세 번째로 <차남들의 세계사>를 읽었는데 제목이 자못 심각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웃픈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역사소설의 장점이 무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선 가독성이 뛰어나다. 내가 살아온 지난날과 소설에 등장하는 그것이 중첩될 때, 가독성은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기호 작가 특유의 블랙 유머가 덧붙여지면서 서사가 주는 재미는 스카이로켓처럼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잠깐 그런데 왜 그동안 우리 작가들은 이렇게 재밌는 현대사를 외면해 온 걸까? 얼마 전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대하면서 느낀 거지만, 그건 아마도 작가의 역량 탓이 아닐까 싶다. 그런 엄혹한 시절을 그려 내려면 보통 이상으로 다져진 내공과 긴 호흡이 필요하니 말이다.

 

이기호 작가는 누아르 뺨치는 반전드라마로 독재자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수사관에서 일약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누아르 주인공 전두환 장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시절, 안전택시 운전기사 1년차 신입 나복만에게 벌어진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는 짧게 끊고 지나갔지만, 그 시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부미방(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필두로 해서, 미국 부통령 방한을 앞둔 시기에 공권력을 집행하는 순경의 총기 난사 사건 그리고 대한민국을 통째로 흔든 큰손 장영자 씨 사건 등 그야말로 자고 나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사고공화국의 추억이 아련히 지나간다. 그리고 그 사건사고들의 뒤켠에는 누아르 주인공의 그림자가 얼비치고 있었다는 점도.

 

미국을 큰형으로 모시던 웃기는 짬뽕 같은 누아르 집권자는 부미방 사건의 주도자들을 잡기 위해 그야말로 전국을 이잡듯 뒤진다. 수배 중인 용의자들이 대거 원주에서 검거되기에 이르는데, 바로 이곳 원주가 우리의 주인공 나복만 씨가 둥지를 틀고 있던 곳이었다. 작가가 끝없이 권하는 대로 맥주를 들이켜거나 혹은 감자 칩을 무시로 집어 먹으며(실제로 독자는 작가의 권유대로 따라했음을 고백한다) 이기호 작가가 현란하게 구사하는 구라의 세계 속에 빠져 들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주인공 나복만의 아버지가 월북인사이며, 홀로 남은 어머니는 나복만을 두고 개가하여 나복만은 고아로 자라났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글을 모르는 문맹(文盲)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훗날 그날 안기부원들에게 고초를 겪을 적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글을 모르니 진술서를 작성할 수가 없었다.

 

깝깝한 마음에 시간이 있다면, 담배 한 대 피우고 나서 다시 이어가자. 아니지, 앞으로 배보다 배꼽이 커지게 될 정도로 담뱃세가 오른다니 누구 좋으라고 담밸 피우나.

 

훗날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는 중이지만, 장군이 통치하던 누아르 시절에 숱하게 언론 지상에 도배되었던 수많은 간첩 공안사건들이 알고 보니 모두가 정권 보위 차원에서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이기호 작가가 전면에 내세운 나복만 씨는 어쩌면 그 시절에 국가권력에게 그렇게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무고한 이들의 오마쥬가 아닐까. 도대체 운전면허도 딸 수 없는 실력의 까막눈 나복만 씨가 무슨 실력으로 이북에서 파견된 아버지와 만나 접선을 하고, 아버지가 건네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숙지하고, 원주 부근의 미국 주둔지에 대한 정보를 작성해서 북한에 보내 선전선동을 일삼았단 말인가. 그들의 상상력은 어지간한 글쟁이들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나 보다.

 

고아원 시절 형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며 맷집 하나는 자신 있던 나복만 씨였지만, 장장 이십여 년 간 갈고 닦은 기관원들의 무수히 쏟아지는 각목 세례와 발길질 매뉴얼에는 어림도 없었다. 민주주의자 고(故) 김근태 의원이 남영동에서 스포츠머리나 손등에 털이 많이 난 요원 혹은 정 과장 같은 기관원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당할 때 정말 두려웠던 건, 고문 막간에 자식들의 성적이나 집안의 대소사 같은 일들을 걱정하는 일상의 이야기를 할 때였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괴물 같은 폭력을 행사하던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일상을 지내는 보통 사람이었다는 점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 하긴 최근에 읽은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서 보면 독일 함부르크에서 모집된 지극히 평범한 독일 중년 사내들이 동부전선에서 냉혹한 유대인 학살자가 되지 않았던가.

 

이기호 작가의 현대사를 대하는 빼어난 역량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하는데 있지 않고, 너무 심각해질 수 있는 소재를 희화화해가면서 서사에 힘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다큐멘터리처럼 나복만 씨의 비참한 삶을 그대로 그렸다면, 독자의 가독성은 현저하게 떨어졌을 것이다. 어마무시한 간첩단 조작사건에 교사가 연루된 불륜치정사건을 곁들이고,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반미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복만 씨의 동료 운전기사 박병철의 협박사건까지 고명으로 얹으니 장군의 누아르 반전드라마 뺨치는 그런 서사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반에 난데없이 월북해서 소련에서 희곡 작가로 활동 중인 나복만 씨의 생부가 등장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개연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 정도야 옥의 티 정도로 봐주면 안 될까.

 

그래서인지 후반으로 갈수록 왠지 힘이 달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 초반에 나복만 씨에게 30년도 넘는 수배의 족쇄를 채웠으니 해피엔딩을 기대하기는 난망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그가 악몽 같은 3호실에서 어떻게 탈출해서 옛 애인 김순희에게 연락을 해왔는지 궁금했지만 서사의 전개 과정을 유추해 봤을 때, 그것도 또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두렵고 분통이 터졌던 건, 우리가 부지런히 먹고 마시고 피우며 알게 모르게 낸 세금이 스포츠머리나 손등에 털이 많이 난 요원 혹은 정 과장의 활동자금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다시 한 번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어떻게 주인을 배신하는 아브락사스가 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됐다. 이렇게 부조리한 현실의 기원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 이기호 작가의 꾸준한 집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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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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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을 읽었다. 법을 전공한 작가답게, 이번 작품에서도 인간사에서 빠질 수 없는 법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중요한 소재로 삼고 있다. 주인공 페터 데바우어의 아버지를 찾는 문학적 <오디세이아>가 악에 대한 인간의 본성과 어우러져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귀향의 전범이라는 <오디세이아> 이야기, 선과 악에 대한 심각한 논쟁 그리고 아버지 부재의 극복이라는 진지한 주제들로 쉽지 않은 독서였다.

 

아버지가 전쟁 중에 죽었다고 믿는 페터 데바우어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가 정겹다. 독일에서 홀어머니 밑에서 살지만, 방학이 되면 스위스에 사는 조부모님의 집에 가곤 하던 시절의 이야기.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갖가지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자못 흥미진진하다. 역시,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가 드리우는 유년시절의 그림자랄까? 그런 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현업에서 은퇴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여가에 공을 들여 <기쁨과 재미를 주는 소설>이라는 총서를 편집한다. 그리고 화자이자 주인공인 페터 데바우어는 성장해서, 어려서 자신에게 금지되었던 총서의 이면의 글을 읽게 된다. 신화 속의 이야기가 그렇듯, 모든 금기는 깨지게 되어 있고 주인공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비밀에 도전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가 접하게 된 금단의 소설은 카를이라는 독일군 포로가 러시아에서 귀향하지만, 집에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아내는 낯선 남자와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결말에 집착하게 된 주인공은, 이 이야기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연원을 쫓기 시작한다. 그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쫓으면서, 동시에 자신도 오디세우스의 그 위험천만한 여정을 따르게 된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카를이 그의 아버지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법을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페터는 출판사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아는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의 그림자를 쫓지만, 완고한 어머니는 항상 모호한 대답으로 얼버무린다. 그는 카를 이야기의 원형을 이루는 방랑, 모험, 위기의 극복, 좌절 그리고 귀향이라는 패턴이 <오디세이아>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후 독일에서 붐을 일으킬 정도로 유행했던 수많은 귀향 이야기 중에서, 카를의 이야기야말로 진수일 거라고 예감한다.

 

페터는 소설에 등장하는 실제 주소를 찾아갔다가 바바라라는 이름의 낯선 여인과 만나게 되고, 필연적(?)으로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페터는 바바라 남편의 ‘귀향’이라는 당혹스러운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여인으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생각한 페터는 회의주의에 빠져 자신을 분주함 속으로 내몬다. 그리고 다시 잠시 중단했던 카를을 찾기 위한 <오디세이아> 프로젝트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바라의 친언니인 마가레트를 통해 카를의 모델이라고 믿어지는 폴커 폰란덴이라는 미지의 인물을 존재를 알게 된다. 모든 비밀의 열쇠를 쥔 자신의 어머니를 닦달해 보지만, 그녀는 완강하게 거부한다. 페터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에 비례해서, 그의 어머니는 과거를 밝히고 싶지 않은 욕망을 드러낸다. 마치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욕망의 평행선을 달리는 기관차 같다고나 할까.

 

통일 독일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날아간 페터는 우연한 기회에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바바라를 만난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페터는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예전의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는 페터. 관청에서 결혼신청을 하다가 자신의 본명이 데바우어가 아니라 그라프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지지부진하던 페터의 아버지 찾기 <오디세이아>는 다시 한 번 급물살을 탄다. 게다가 우연히 입수하게 된 <법의 오디세이>라는 책의 저자 존 드 바우어라는 이름과 그의 저술을 통해 알게 된 모든 지표가 존 드 바우어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가르킨다. 자, 과연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은 확실히 쉽지 않은 소설이다. 작가 슐링크는 페터가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 눈물의 부자상봉 혹은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분노의 일격을 가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천편일률적인 구성 대신 훨씬 더 복잡한 시놉시스를 구사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귀소본능의 지향점인 ‘귀향’이라는 간단한 주제를 가지고, 귀향의 고전 <오디세이아>와 악이 선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는 지극히 파시즘적인 소재를 양념으로 곁들인다. 마지막 장에 나오는 존 드 바우어 교수의 세미나를 가장한 인간본능 테스트는 구세대에 대한 슐링크식 조롱이라고나 할까. 동시에 뛰어넘을 수 없는 기성세대 권위에 대한 좌절도 동시에 표출된다.

 

페터의 <오디세우스> 과정에서 작가는 곳곳에서 ‘카를’을 쫓는 실마리들을 차례로 배치한다. 조금 개연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 정도야 애교로 봐주자. 그렇게 준비된 절묘한 조력들을 따라가다 보면 대서양 너머에서 새로운 정체성으로 가정을 꾸리고, 성공한 법학자의 삶을 사는 존 드 바우어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과 대면하게 된다. 어느 순간, 그가 정말 페터의 아버지냐 그렇지 않느냐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전쟁 세대와 통일 세대라는 뚜렷한 구분에서 더 나아가, 과거에 빚을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 싶은 21세기 독일의 현재가 아닐까.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을 읽고 났더니, 호메로스의 원전 <오디세이아>와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읽어 보고 싶어졌다. ‘귀향’이라는 주제는 그야말로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인류의 영원한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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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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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루키다. 올해 출간된 하루키 상의 열 번째 단편집이 출간되기도 전에 예판만으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신형철 평론가가 진행하는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에서도 대대적으로 하루키 상의 단편집 소개에 나섰다. 그 방송을 듣고 나니 도저히 배길 재간이 없었다. 난 사실 하루키 상의 열혈 팬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의 책이 나오는 족족 사서 보고 있다. 누가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루이스 세풀베다와 로베르토 볼라뇨라고 할텐데.

 

 

신형철 평론가의 꼬드김으로 <빵가게 재습격>을 읽게 됐다. 2010년 멕시코 출신의 감독 캉를로스 쿠아론이 연출을 맡아 단편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해서 유튜브로 검색을 해보니 동명 제목 <The Second Bakery Attack>으로 수많은 패러디 작품들이 있었지만, 정작 본 영화는 구할 수가 없었고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두 주인공이 맥도널드를 터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단편집에서는 남자인 내가 이야기를 이끌어 갔는데, 영화에서 보니 실제적인 액션/행동은 여자 주인공 냇(커스틴 던스트 분)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단편에서는 맥도널드를 털기 전에 자동차 번호판까지 꼼꼼하게 가리는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영화에서도 그랬는지 궁금하다. 뱀파이어 소녀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 멋진 연기를 보여 주다니, 그릴에서 지글지글 굽는 햄버거 패티를 보며 참을 수 없는 공복의 표현인 던스트 양의 꿀꺽하는 목넘김 소리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신형철 평론가의 이야기를 빌어 하루키 월드를 분석해 보자. 하루키 상에게 1960-70년대는 영원한 이상향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 자유로운 의지로 이룰 수 있었던 시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그의 작품 곳곳에 묻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그가 매문(賣文)하여 먹고 사는 지금은? 어쨌든 이 매력적인 단편 <빵가게 재습격>의 이야기는 참을 수 없는 공복 때문에 한밤 중에 일어난 남자 주인공은 어린 시절 못다 이룬 빵가게 습격을 다시 성공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로를 이제 막 결혼한 그의 아내가 동조해서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레밍턴 산탄총에 스키 마스크까지 준비해서 빵집털이에 나선다는 얼개다. 그런데 왜 유독 빵집만 털어야 하지? 일본에는 빵집 말고도 오코노미야키라든지 맛있는 우동, 혹은 돈까스집도 많이 않은가.

 

소설의 서사 중에서 개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제 막 결혼한 와이프가 도대체 어디서 레밍턴 자동 산탄총을 준비했는지 너무나 궁금하다. 단편영화의 배경인 뉴욕 브루클린이라면 몰라도 도쿄 한 복판에서! 물론, 그건 오래 전에 못다 이룬 꿈(빵털이)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는 사나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하루키 월드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빵가게 습격에서 실패한 원인 중의 하나였던 바그너의 음악을 당당하게 재습격에 차용한 카를로스 쿠아론 감독의 재치가 인상적이었다. 라지 콜라 가격까지 지불하고 맥도널드 매장을 나서는 커플의 당당함이 과거에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을 해소하는 기폭제로 멋지게 작용한다.

 

<로마제국의 붕괴, 1881년의 인디언 봉기,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그리고 강풍세계>는 제목만 보고서 많은 기대를 했는데 그저 화자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습관처럼 하는 메모의 일부로, 세상을 기억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이라며 눙치며 빠져 나가는 스타일이 역시나 하루키 월드의 지배자답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은 어느 나른한 오후에 벌어지는 기담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을 그만 두고 아내를 대신해서 전업주부로 활동하는 주인공 남자에게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그의 세계를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에로틱한 상상은 어쩐지 넘어서는 안될 선을 위태롭게 넘나드는 그런 유혹이 진득하게 배어 있다. 법대에서 법학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는 꿈도 꾸었지만 어느 순간 일이 꼬여 이렇게 되었나 싶은 상념에 젖었다가 아내의 부탁대로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나서는 주인공. 고양이 수색 중에 우연히 만난 정체 불명의 소녀와 백일몽 같은 서사들이 이어진다. 결국 고양이는 찾지 못하고 아내와 대판 싸우는 남자. 아내는 고양이가 죽었을 거라고 단정하고 그의 탓이라고 비난한다. 화를 달래기 위해 맥주를 마시는 동안,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다시 울린다. 어느 나른한 오후의 여파가 빚은 갈등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최고로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바로 <패밀리 어페어>다. 이십 몇 년을 같이 산 여동생이 결혼을 앞두고 데려온 와타나베 노보루(태엽 감는 새의 실종된 고양이 이름도 와타나베 노보루였다)를 못마땅하게 생각나는 화자의 이야기다. 여름 베짱이 같은 그야말로 일본이 온 세상을 집어 삼킬 것 같이 잘 나가던 시절(1980년대)을 상징하는 주인공은 난봉꾼 혹은 자유연애주의자로 맥주와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LP 레코드 감상을 즐긴다. 생업을 위해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하지만 매사가 귀찮고 일도 그다지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를 재밌게 살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역시 하루키 월드의 정예 멤버다운 성정이다. 여름 베짱이처럼 살면 뭐가 문제냐는 투의 하루키 상인 선사하는 간드러진 유혹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서로를 얽매지 않는 여동생과의 단란한 생활에 와타나베 노보루라는 혼다 500시시 오토바이를 즐겨타는 남자가 등장하면서, 오누이 간의 첨예한 갈등이 피어오른다. 세상을 좀 너그럽게 보라는 여동생에 말에, 시니컬한 오빠는 그렇게 생겨 먹을 걸 어떻게 하냐고 대꾸한다. 이런 가족 간의 사소한 다툼의 배후에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맞이하는 다양한 군상의 모습을 하루키 상은 배치한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개인-가족 그리고 사회의 면모를 반추하게 해준다. 자신의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는 어떠한 변화도 원치 않는 나에게 땜질 인두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겠냐는 설득이 묘하게 다가온다. 물론 그 이면에는 노보루가 자신의 오디오를 고쳐준 고마움에 대한 화해의 일면도 담겨 있겠지만 말이다.

 

너무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서 하루키 상이 걷어 올리는 서사들은 가히 매혹적이다.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간단한 저녁 식사를 위해 바지락조개를 씻는 따위의 일상에서 상실한 추억을 떠올리고, 집나간 코끼리와 그 사육사를 생각하거나 내가 원하지 않는 LP판도 때로는 들어야 하는 삶의 의무 또는 소소한 관계의 확장을 통한 세상 보는 시각의 다양화 등이 하루키 월드에는 소소하게 담겨 있다. 물론 생뚱맞게 레밍턴 산탄총과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30개나 되는 맥도널드를 털러 나갈 때도 있지만. 이제 노장이 된 하루키 상의 새 단편집에는 또 무슨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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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2-2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나오는 책이 단편집이군요. 장편소설을 기대했는데, 뭐 그래도 좋지만요ㅎ

<빵가게 재습격>이 너무 읽고 싶어지는 리뷰네요ㅠㅋ 단편영화가 있는지 몰랐네요ㅎ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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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이후, 미국 전역에 보도된 충격적인 영상 하나가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아 불타고 있던 월드 트레이트 센터(WTC)가 마침내 무너져 내리자, 그것을 보고 환호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장면이었다. 미국 언론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분노를 조장하는 듯 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 효과는 대단했다. 미국 본토가 공격을 받은 초유의 사태 속에서 민주당 8년 시절을 보낸 미국 사람들은 급속도로 우경화하기 시작했고, 맹목적인 애국주의의 물결이 전 미국을 휩쓸었다. 당장에라도 911 테러를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아프간의 오사마 빈 라덴을 핵무기로 폭격하라는 자동차 범퍼 스티커가 불티나게 팔렸다. 그 가운데 이성적인 목소리들은 발붙일 틈이 없었다.

 

 

 

 

파키스탄 출신 작가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는 주인공 찬게즈가 그토록 미국의 일부가 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 주류 사회에 편입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터진 911 테러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작가의 명백한 페르소나인 찬게즈(칭기스칸의 애너그램이라고 했던가)는 파키스탄 라호르 출신의 뛰어난 인재로 미국 아이비리그의 명문대 프린스턴 출신으로 언더우드샘슨이라는 기업 감정(평가) 회사에 취업해서 소위 잘나가는 슈퍼엘리트다. 이렇게 미국식 교육의 혜택을 풍족하게 받은 찬게즈가 180도로 바뀌어서, WTC가 불타는 장면을 보고 자신이 느낀 첫 번째 반응이 ‘즐거움’이었노라고 밝히고 근본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모신 하미드는 절묘한 서사 구성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우선 주인공 찬게즈는 자신의 무대였던 미국 뉴욕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파키스탄 라호르의 아나르칼리의 어느 거리에서 처음 만난 미국인에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가 프린스턴을 졸업하고 일하게 된 언더우드샘슨에서는 무한경쟁을 통한 효율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끊임없이 직원들에게 세뇌하는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첨병이다. 아울러 아무 것도 ‘우연’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바로 찬게즈와 아나르칼리에서 만난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미국인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이 점을 잊지 말고 모신 하미드의 서사를 따라가 보자.

 

작가의 서사 구조 한쪽에 아무런 배경 없는 파키스탄 출신의 남자 찬게즈가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프린스턴 학벌이라는 무기를 들고, 세상이라는 거친 무대에서 싸우는 과정이 그려졌다면 다른 한 쪽에는 주인공 찬게즈의 러브스토리가 자리 잡고 있다. 찬게즈의 이름이 중세 세계의 정복자 이름의 애너그램이라면 그가 사랑하는 미국 여인 에리카라는 이름은 볼 것도 없이 많은 이들이 사랑에 빠진 아메리카의 재현이다. 찬게즈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연애의 싸움을 하고 있다. 본인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에리카의 죽은 첫 애인 크리스와의 경쟁이다. 아무리 불확실한 것도 수치화하고 계량화해낼 수 있는 철두철미한 교육을 받은 찬게즈는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이길 수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진흙탕 싸움에 빠져든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 전쟁 이래 서양과 동양의 갈등/전쟁 구조는 21세기 파키스탄 작가의 치밀한 문학 작품을 통해 다시 형상화됐다. 동양남자 찬게즈의 물질적으로 발전한 서방세계에 대한 처절한 구애는 죽은 애인을 잊을 수 없다는 야릇한 핑계로 요리조리 피하는 에리카의 밀당의 다름 아니다. 뛰어난 현실감각을 지닌 이 남자는 자신의 업무나 관계 파악에서는 냉철한 이성을 발휘하지만, 도대체 사랑이라는 게임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장해제당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바로 그 점을 작가는 '주저(reluctant)'라는 표현으로 집약해낸 게 아닐까. 어떤 노력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죽은 옛 애인과의 게임은 아무리 뛰어난 학벌과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미국 주류사회에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의 비애를 절묘하게 짚어낸다. 이창래 선생이나 줌파 라히리의 이민자 문학이 화해 혹은 타협을 지향한다면, 모신 하미드의 그것은 좀 더 공세적이다. 물론, 이 작품 하나로 그의 문학 세계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말이다.

 

한 때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던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더 이상 관용적이지 않다. 그것은 마치 과거 로마제국이 관용(클레멘티아) 정책을 버리고 수구적으로 변해 가면서 세계 제국의 위상을 잃었던 것과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다. 찬게즈는 꾸준하게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에리카를 포기하지 않지만, 에리카의 세계에 그를 받아들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한 조건부 짝사랑이다. 미국 사회에 효용이 될 만한 재능과 능력을 가진 이들은 환영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문호개방은 엄격하게 제한된다. 사랑의 유효기간 만료는 이민자들의 합법적인 체류를 보장하는 비자 기간 만료와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랑이 끝나면 그들은 미국을 떠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를 오스만 제국의 기독교 용병 예니체리에 비유한 장면은 신의 한수처럼 다가온다. 술탄에게 예니체리들은 언제나 소모품에 불과했다는 점에서도 그들의 운명은 일치한다.

 

다시 작가 모신 하미드는 독자를 라호르의 번잡한 아나르칼리 거리로 데려간다. 찬게즈는 계속해서 정체불명의 이 미국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파키스탄 전통 차와 음식, 문화를 권한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자신의 조국 파키스탄은 뛰어난 문명을 이루고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역전되었다고 자조하는 찬게즈의 모습에서 작가의 의도가 무언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도 고향 라호르를 잊을 수 없었던 남자 찬게즈는 미국에서의 생활과 업무 때문에 파견된 칠레에서의 자각을 통해 반미투사 혹은 근본주의자라 불리게 되었다.

 

소설의 후반부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런 급격한 변신의 개연성이 좀 떨어지는 느낌은 있어도 작가의 문학적 미니멀리즘을 통한 직접적 현실성 담보가 인상적이다. 그만큼 현실과 문학적 창조의 상상력을 오가는 모신 하미드의 작법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열린 결말을 배려한 점도 역시 일품이었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2012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영화도 봐서 책과 비교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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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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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젊은 날의 피카소 전이라는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피카소의 초기작을 보면서, 저 정도 그림이야 내가 발로 그려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초기작은 훗날 그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대가로 인정을 받은 후에 재평가를 받은 작품인 것이다.

 

말하는 원숭이 이야기를 들어 보신 적 있는지? 그리고 또 잠깐 아래층에 내려간다고 한 남편이 사라졌다가 한참 뒤에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 이 정도는 돼야 기담 혹은 괴담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아마 범인(凡人)이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했다면 술좌석의 농담 혹은 우스갯소리로 치부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쓰면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번에 새로 나온 하루키의 소설집 <도쿄기담집>은 최신작이 아니다. 2005년에 나온 책으로 모두 5편의 ‘기담’스러운 단편 소설집이다. 나는 맨 먼저 맨 마지막에 실린 <시나가와 원숭이>편부터 읽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시나가와라는 지명을 알 리가 없고, 뒤편에 달린 원숭이에 시선을 끌었다. 안도 미즈키라는 여성이 기억상실 때문에 병원을 찾고, 상담사를 찾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상담의 과정을 거쳐 아주 오래 전, 고교시절 자살한 학교 후배에게서 모든 것이 연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종착역에는 도쿄 시나가와의 말하는 원숭이가 있었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말하는 원숭이가 아니라, 자신이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는 진실을 대면하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그녀가 다시 기억력을 되찾게 되었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5편의 단편 중에서 <하나레이 해변>이 가장 재밌었다. 하와이 하나레이 해변이라는 곳에서 상어에게 물려 다리를 잃고 결국 목숨마저 잃게 된 어느 청년의 어머니 사치의 이야기다. 하와이에서 윈드서핑이 목숨까지 걸 정도인가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사치는 예전에 미국 생활 덕분에 현지에서 영어 소통에 문제가 없다. 그런 세심한 장치까지 배려해 주다니, 역시 하루키답다. 아니면, 본인이 미국 케임브리지에서 2년간 체류한 경험 덕분인지 미국 생활에 대한 그의 감상을 책 곳곳에서 엿볼 수가 있다. 어쩌면 하루키의 재즈 사랑도 그 덕분인지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상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어떻게 해서 그녀가 호놀룰루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저런 만남을 통해 사치의 과거를 되짚어 가는 품이 고수다운 풍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무런 부담 없이 타인의 삶을 엿보는 그런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주인공/타인의 삶에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보이저리즘(관음증)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들의 기일 즈음해서 하나레이 해변을 찾아 며칠씩 보내곤 하는 그녀에게만 왜 외다리 서퍼가 보이지 않는건지 참으로 기이할 따름이다.

 

남자가 평생 동안 만나야 할 의미 있는 여자의 수는 세 명 뿐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남자 준페이의 고민 역시 재밌다. 어차피 깨지기 마련인 터부를 마련하는 고수 하루키는 한 번의 만남 그러니까 다시 말해 원 스트라이크 이후 투 스트라이크를 준비한다. 정말 딱 맞는 상대를 만났다고 준페이는 생각하지만(물론 육체관계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기리에는 자신의 직업도 알려 주지 않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미스터리다. 어쩌면 이렇게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발을 보여주는지 하루키답다. 대뜸 기리에가 직업 킬러가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그렇게 쉬운 직업으로 정할 리가 없지. 얘깃거리가 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이야말로 천생연분이 아니었을까. 결국 준페이는 기리에의 자극을 받아 만날 자리를 옮겨가는 콩팥 모양의 돌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창작에 있어 정말 중요한 건, 영감이 아니라 어떤 식의 자극이라는 하루키 식 고백일까? 미스터리한 그녀의 실종 역시 예측가능한 좌표상에 자리 잡고 있다.

 

하루키 소설집의 공간적 배경은 소설집의 제목이 가리키고 있듯이 대도시 도쿄다. 인구 천만명이 사는 예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다투고, 싸우고, 화해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이 스펙터클하게 변화하는 공간의 이야기가 하루키 식 기담의 원천이 아닐까. 얼마 전 뉴스에 보니 셀카가 뭐라고 남들보다 압도적인 셀카를 찍으려다 절벽에서 추락사하고 고압선에 감전되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이 이야기야말로 기담이 아닌가.

 

판에 박힌 듯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가정을 떠나 자발적 홈리스가 된다는 이야기도 이젠 식상하다. 일상의 모든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은 내면세계의 일탈 욕구가 빚어낸 이야기도 이제는 설명 가능하다. 어느 시대에는 통용되지 않던 이야기나 상식도 시간이 지나가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폭도나 정신병자로 치부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진짜 이 소설집에서 하루키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 그런 상식의 수용 문제가 아니라 그의 작풍 또는 스타일이 아닐까. 정확하게 꼭 집어서 이게 바로 하루키 스타일이야라고 말하기 쉽지 않지만, 재즈와 위스키를 사랑하는 여피 스타일적인 삶의 방식 말이다. <하나레이 해변>의 사치처럼 상실 가운데서도 그런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물론 그러기 위해선 금전적 여유가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하루키는 두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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