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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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빵을 좋아한다. 언젠가부터 아침에는 빵을 먹는다. 오늘 아침에도 우유 두 잔과 슈크림 크루아상 두 개를 먹었다. 그런데 다른 거에는 관심이 많으면서도 정작 내 입으로 들어가는 먹거리들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져서 내 살이 되고 피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저 싼 값이면 족하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많은 이들이 올해의 책으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은 일본 시골빵집 주인장 와타나베 이타루 씨가 쓴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를 읽으면서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먹거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대량생산 대량소비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서 대량생산된 제품들(먹거리를 포함한)은 단가 후려치기와 노동력 착취를 통한 교환 가치 하락에 방점을 두고 있다. 오, 시작부터 너무 마르크스주의적이 아니냐고? 솔직히 말해 거두절미하고 본론에 들어가자는 것이 나의 속셈이다. 서른이 너머 빵집을 차릴 생각을 하고, 동일본 대지진을 피해 안착한 가쓰야마라는 시골 마을에서 다른 곳보다 서너배는 비싼 빵을 만들어 팔면서 빵집 <다루마리>의 주인 와타나베 씨는 생산수단을 보유한 자본가의 지배로부터 실제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한다.

 

똑같은 맛의 빵을 실패하지 않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동한다. 어마어마한 들판에서 기계화된 농법으로 재배된 밀을 대량으로 수입해서, 바로 바닷가에 자리 잡은 대기업화된 제분공장에서 빻은 밀가루를 원료로 해서 순수 배양균이라는 효모를 이용해서 만들어낸 빵이 우리가 쉽게 접하는 빵이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의 선택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그런 대기업화된 빵집이 만든 빵을 살 것이냐 아니냐로 선택지는 좁혀진다. 조금은 허랑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 작가는 전쟁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의시가 되보려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그놈의 형편없는 시험성적 때문에 농대를 선택하게 되고 시골이야말로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는 장소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를 읽어 보라는 아버지의 조언도 한몫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빵집 <다루마리>는 자본의 총아인 이윤추구를 극도로 혐오한다. 부패하지 않는 돈의 경제야말로 자본주의 모순의 핵심이라는 점을 작가는 적확하게 파악했다. 기계화된 설비로 대량생산된 제품의 교환가치 하락은 필연적으로 노동의 교환가치 하락을 불러온다는 자본주의 철칙마저 간파한 그는 밀가루 반죽을 부패시키는 천연균처럼 돈도 한편으로는 부패도 하고 선순환의 과정을 통해야만 비로소 경제의 활력소가 된다는 점을 주장한다. 글로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체험한 과정을 소개하고, 또 매 장의 서두에서는 <다루마리>의 주력 상품인 주종 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그림을 통해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소비자협동조합 운동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와타나베 씨는 지역경제를 살리는 그런 소상인 협동조합 운동이야말로 자신이 믿고 실천하고 있는 삶의 방식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다루마리>에서는 인공적으로 생산된 순수 배양균을 지양하면서, 100년된 고택에 사는 천연균의 힘을 빌어 빵을 발효시키고, 사용하기에는 편리한 플라스틱 용기 대신 인근의 죽세공 장인이 만든 대나무 소쿠리를 사용하며, 맛 좋은 가쓰야마 인근의 물로 빵반죽을 만들며, 역시 자연재배 방식으로 수확한 밀을 사용한다. 그리고 노동을 착취해서 빵을 대량생산 하는 대신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부여해서 창조적인 빵만들기를 장려하고 있다. 창조를 닦달해대는 환경이 아닌 충분히 휴식한 호모 루덴스적인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와타나베 씨는 깨달은 것이다.

 

와타나베 씨의 생각에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작은 활동이 과연 날로 거세지는 자본주의 이윤추구라는 거대한 물결을 막아낼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누구나 글쓴이처럼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꿈을 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와타나베 씨는 정치를 바꾸는 방식이 투표라면, 경제를 바꾸는 방식은 돈 쓰는 방식이라고 선언한다. 책을 통해 배운 사고의 전환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나의 책읽기 체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와타나베 씨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한 아름다운 부패와 순환의 알레고리를 당장 오늘부터라도 나의 실천적 삶에 적용시키는 문제를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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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열 - 제149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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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겨 찾는 사이트가 하나 생겼다. <소설리스트>라고 몇몇 작가와 서평꾼들이 주로 새로 출간되는 소설에 대해 알려주는 그런 사이트다. 뭐 절대적인 정보는 아니라지만, 아주 유용하게 사용 중이다. 특히 지난 연말에는 올해의 베스트 3라는 타이틀로 여러 책들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책지름신이 강림하여 여러 권을 책을 사게 됐다. 쿠라하시 유미코의 <성소녀>를 필두로 해서 플래너리 오코너 그리고 사쿠라기 시노의 <호텔 로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들을 사모았다. 그리고 작년 말부터 해서 오늘까지 <호텔 로열>을 읽었다.

 

아무래도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솔직히 잘 모르는 사쿠라기 시노란 작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는 고향인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작품활동을 한다고 하는데, 관능소설 작가란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그 방면에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 역시 역자후기를 통해 알게 된 정보인데, 작가의 부친께서 진짜 <호텔 로열>이란 이름의 러브호텔을 경영했었다고 한다. 남녀관계의 궁극을 너무 일찍 깨달아서일까, 작가가 괜히 관능소설의 대가가 된 게 아닌 모양이다.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사람과 풍경이 있는 소설 <호텔 로열>은 연작소설집으로 공간적 배경은 호텔 로열과 직간접적 연관성을 이루며 역순으로 전개된다. 한창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사랑을 나눌 곳을 원하던 연인들에게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던 호텔 로열의 폐허에서 연인의 누드 사진을 찍겠다고 찾아오는가 하면, 한 때 문전성시를 영업을 마치고 폐업하던 날 그동안 성실하게 성인용품을 대주던 업자와 일탈을 감행하려던 주인장의 딸의 유혹이 배어 있기도 하다. 가족의 봉안을 맡은 주지 스님의 처는 대를 이어 가며, 사찰을 후원하는 단가의 자제와 묘한 관계를 맺는다.

 

예의 스님이 다른 곳으로 독경을 하러 가게 되어 굳은 돈으로 빡빡한 현실에서 벗어나 러브호텔을 찾은 중년부부의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자그마치 20년 동안이나 자신의 스승과 불륜 관계를 맺은 아내에 대한 실망으로 출장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제자와 어디론가 떠나 버리는 수학 선생님의 이야기는 구슬프다. 어쩌면 이 두 사람이 <호텔 로열>에서 벌어진 정사(情死) 사건의 주인공들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홋카이도 동부 지방에 위치한 구시로(釧路) 습원은 두루미와 사슴으로 유명한 명소라고 한다. 아칸 산 부근에 위치한 국제 두루미 센터는 자연생태 사진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소설의 어디선가에서도 아마 두루미가 등장하지 않았나 싶다. 푸른 녹지가 장관이라는 곳 언덕에 위치한 러브호텔, 그곳의 풍경을 바탕으로 벌어지는 사람들의 희로애락 이야기가 <호텔 로열>을 채우고 있다. 사쿠라기 시노 작가의 소설은 그렇게 풍경을 채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네 삶처럼 평범한 이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배어 있다. 그 이야기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즐겁다.

 

연작소설 특유의 서사구조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렇게 이어진다. 때로는 <호텔 로열>이라는 공간이, 혹은 전작에 등장한 캐릭터가 다음 이야기에서 접점을 이루면서 실타래처럼 얽힌 소설의 인과관계를 설명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복잡하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단순하면서도 명징함이야말로 <호텔 로열>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작가가 관찰한 그네들의 삶에 어떤 절묘한 해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정말 오랜 시간 바람을 피웠다는 무력감에도, 오래전 집을 나가 자수성가했다고 생각한 아들이 실은 조폭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어렵게 번 돈으로 분위기도 모르는 남편과 러브호텔에 가고 싶다는 아내의 바람에서도 소소한 삶의 진실이 느껴진다. 그런 삶의 진실에 관능까지 더하니 어찌 맛깔스럽지 않겠는가 말이다.

 

사쿠라기 시노 작가와의 첫 만남은 강렬하면서도 담백했다. 작년에 모두 그녀의 작품이 세 권 출간됐는데, 남은 두 편의 작품에 도전해 보고 싶다. 양양한 을미년이 이제 시작이니, 이루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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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5
정세랑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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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처음으로 읽은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읽기로 결정한 순전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나의 절친 이름과 같은 이름이 떡하니 표지에 박혀 있어서라고 한다면 너무 단순한 걸까.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나오고 있는 노벨라 시리즈, 우연한 기회에 초능력을 갖게 된 삼남매의 이야기가 쏠쏠하다.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삼남매는 서해안의 모처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길에서 먹은 형광색 나는 바지락칼국수 때문에 초능력을 얻게 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초능력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다. 어려서 슈퍼맨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면서 저런 초능력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는 그런 초능력이 허황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한 번도 초능력 타령을 한 적이 없다. 지금도 아마 그런 나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재인, 재욱, 재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초능력은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니다. 표지에 보면 손톱깎이 하나, 열쇠 한 개 그리고 레이저 포인터 이렇게 그들의 초능력을 상징하는 요상해 보이는 물건들이 나열되어 있다. 사실 레이저 포인터의 경우에는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화학과 출신으로 대전의 연구실에서 생활하는 큰누나 재인은 깎이지 않는 강력한 손톱을 자랑한다. 애걔, 이게 무슨 초능력이야 싶지만 자신의 특기인 사물에 대한 관찰과 연구를 바탕으로 같이 사는 친구 경아를 스토커 남친으로부터 구하게 된다.

 

재인의 초능력에 비하면 재욱의 그것은 좀 더 특별하다. 시야가 붉어지면서 문제가 생기는 지점을 파악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재인과 재욱에 비해 좀 더 다른 모양새의 막내 동생 재훈은 가장 먼저 자신의 초능력을 감지해 내지만 그 능력 역시 소박하기 짝이 없다. 엘리베이터와의 교감이라니. 세 남매에게 각기 다른 세 가지 물건들이 소포로 배달되면서 그들은 각각 save 1, save 2 그리고 save 3 라는 미션을 부여 받는다. 그 미션이 무엇인지는 소설을 읽어 보시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니.

 

정세랑 작가의 노벨라 <재인, 재욱, 재훈>은 최근 유행하는 경장편 소설이다. 사실 도끼 선생의 <죄와 벌> 같은 대작 장편소설을 끈기 있게 읽어낼 참을성도 생각보다 부족하니 경장편이 대세인 요즘 세태를 나무라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사람들은 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데, 독서 말고도 관심을 사로잡는 온갖 것들에 포위되어 있는 마당에 대작소설을 읽기에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무엇보다 끈기도 너무 부족하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새해 첫 독서로 <재인, 재욱, 재훈>은 나에게 안성맞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녀선발대회에 참가한 미녀들에게 희망이 무어냐고 물을 때마다 월드 피스(world peace)"라는 대답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슈퍼내추럴 파워를 가진 슈퍼히어로들 역시 세계를 구하는 것이 자신의 미션이라는 말도 새삼스럽지 않을 것 같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슈퍼내추럴 파워를 가진 재인, 재욱 그리고 재훈 역시 거창하게 세상을 구하는데 동원됐다면 비현실적이었을 것이다.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자기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구하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는 독자의 이성과 감성을 예리하게 타격한다. 그들이 구한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고 말이다. 물론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짚으면서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또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내 생각은 그렇단 말이다.

 

세 사람이 처한 상황 중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케이스가 바로 막내동생 재훈의 조지아 염소농장 이야기였는데, 작가의 친동생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엮은 이야기라고 하니 좀 얼떨떨하기도 했다. 작가의 말대로 정말 타인의 이야기를 참고만 잘하면 직접 사막에 가보지 않고서도 사막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서술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 부분은 정말 참고할 만하다. 물론 체화의 문제는 또 다른 것이겠지만 말이다.

 

<재인, 재욱, 재훈>은 은행나무의 노벨라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데, 시리즈의 전작과 앞으로 나올 작품들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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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거인 철학하는 아이 3
마이클 포먼 글.그림, 민유리 옮김, 이상희 해설 / 이마주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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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사두기만 아직도 읽어볼 생각도 못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시대를 다룬 대역사물이라고 하는데, 전쟁 뒤에 따르는 평화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을까라고 아직 읽어 보지 못한 독자의 심정으로 생각해본다. 어린이 브랜드 이마주에서 나온 마이클 포먼의 <두 거인>은 책의 뒷면에 나온 대로 전쟁의 어리석음과 평화의 의미를 다룬 책이다.

 

시간적 배경은 아주 오래전 옛날, 그리고 공간적 배경은 아름다운 나라다. 이 나라에는 샘과 보리스라는 두 명의 친한 거인이 살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아무 것도 아닌 분홍색 조가비였다. 샘과 보리스는 분홍색 조가비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움을 벌인다. 결국 싸움판 끝에 대홍수가 나고, 신발은커녕 양말도 서로 바꿔 신고 멀리 떨어진 섬으로 헤어지게 된다. 그게 끝이 아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서로에 대한 감정 때문에 큰 돌멩이를 날려 다치게 하고, 커다란 돌 방망이를 들고 쳐들어가 친구를 해칠 계획까지 세운다. 그러다 샘과 보리스는 서로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난 싸움이 모두 부질 없었노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분쟁에 대한 아주 이상적인 해결책이 아닐 수 없다. 나머지는 둘 다 행복하게 잘 지냈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전쟁/다툼의의 시초는 아무 것도 아닌 분홍색 조가비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홍색 조가비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아닐까. 다시 동화 속의 이야기로 돌아가, 현실세계의 전쟁도 그렇게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된다면 문제해결이 쉽지 않을까. 양국의 전략적 이해가 걸려 있는 영토분쟁을 필두로 해서, 자국에서는 없는 에너지 자원 확보를 위한 무력 충돌, 특정지역의 패권과 정치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부른 전쟁 등 분쟁의 원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래도 영국 출신의 노작가 마이클 포먼은 <두 거인>에서 분홍색 조가비라는 아무 것도 아닌 재화를 등장시켜 전쟁의 원인이 되는 이유가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가설을 세운다.

 

전쟁과 평화는 야누스처럼 이면을 가지고 있다. 전쟁이 시작이라면 평화는 끝을 상징한다. 어떤 전쟁도 끝이 없을 수 없고, 한쪽편이 이기든 지든 평화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작가는 두 거인이 싸움을 벌이면서도 짝짝이 양말을 신고 헤어졌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평화 대신 전쟁을 누구 원하겠는가. , 천문학적 무기 시스템을 팔아야 존재할 수 있는 다국적 군산복합체 정도가 있을까. 역설적으로 전쟁/다툼의 시작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타협을 통한 평화도 거인들의 짝짝이 양말이 가져다준 화해처럼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아이들을 위해 마이클 포먼이 그린 동화답게 정교한 그림 대신, <두 거인>은 큼지막한 글씨와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거인의 그림은 골판지 재료를 찢어 붙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의 시선으로 보면 전쟁과 평화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는 과연 철학하는 아이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자못 궁금해졌다. 그들의 생각도 들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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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0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아무것도 아니긴요..무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분홍의 조개라는 실체를 두고 전쟁..
그런 것이니..눈에 뵈지않는 이념과 사상을
놓고 싸우는 것보단 적어도 실리주의.끝이나도 양말이 짝짝이라도 곧 어깨동무 하겠지요.

그런데. 이야기라는건 다 거기서 거기인가봐요.아니면 모티프ㅡ얻어..그런건가??
이 거인족 하니..갑자기 일애니 원피스 중
거인족스토리가 상당히 비슷하다 했어요. 투박하고 단순한 그림체 맘에들어요..
처음 앞의 질문부분까지만 읽고 답을 했어요.
다 읽으면 결론을 내 놓으실 듯 해서요.
그럼 누가..이 동화를 보겠나..싶어.
서둘러 제 답을 쓰고..결론은 같더라도.
그때는
아..양말을 나눠 신자..하고..ㅎㅎ
생각하는 동화 고맙습니다. 계속 소개 부탁드려요..재미있네요..
그럼 깊은밤 ~ 굿나잇! 꿀나잇~!!
 
달과 6펜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7
서머싯 몸 지음, 안흥규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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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이제야 읽게 됐다. 하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보가 많아, 대강의 줄거리는 꿰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읽은 것하고는 또 다른 체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해 양가적 감정이 내적으로 치열하게 충돌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이 40세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열정 하나만 가지고, 그동안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훌쩍 떠난 한 남자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쏟아내는 자아와 또 한편으론 참 멋지다라는 느낌이 동시에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태어나면서부터 현실과 이상이라는 서로 상이한 두 세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성장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는 자조적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이 생활에 충분한 돈까지 벌어다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러기가 쉽지 않다. 영국 출신의 작가 서머싯 몸이 프랑스 야수파 출신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삼은 소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영국 런던에서 증권 중개인으로 활동하던 중, 어릴 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17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훌쩍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스트릭랜드 부인은 참을 수가 없다. 그녀는 찰스가 그림이 아닌 다른 이유, 젊은 여자가 생겨 떠났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때 절실하게 사랑한 사람이 자기가 사랑했다고 믿는 남자의 꿈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는 사실에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서머싯 몸은 작가의 페르소나 역할을 충실하게 대행할 인물로 화자인 나(역시 작가다)를 투입한다. 나레이터 역할의 나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행적을 쫓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캐릭터다. 찰스의 관심 분야와는 다르지만, 명확한 예술가이며 일반인들의 일상적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찰스와 그나마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에게 찰스가 이야기를 털어 놓으니 소설의 진행에 큰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하다.

 

소설 <달과 6펜스>는 크게 세 개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초반부의 영국 런던에서는 내가 어떻게 해서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에 개입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 소설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프랑스 파리가 그 무대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특정한 공간에 가야 한다는 공식이 그 시절에도 있었나 보다. 이 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하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 더크 스트로브와의 애증에 얽힌 삼각관계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왠지 초중반의 긴장감에 비해 남태평양 타히티에서의 찰스 스트릭랜드의 최후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김빠진 콜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시켜 버린 예술가에게 마지막 걸작을 남기는 것 외에 무슨 사명이 있단 말인가.

 

이상적인 도덕론자도 아니면서 독자의 양심을 건드리는 것은 17년간 함께 한 가족마저 저버린 찰스 스트릭랜드의 행동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어디까지인 걸까. 스트릭랜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의 가족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찰스는 가족 특히 아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모름지기 예술가는 이상과 현실을 병행할 수 없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서머싯 몸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프라하의 어느 천재 작가 역시 현실 속에서 창작의 고통에 괴로워하지 않았던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소설의 제목처럼 하나는 이상을 지칭하는 ‘달’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물질이라는 이름의 현실을 상징하는 ‘6펜스’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두 명의 캐릭터가 자못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스트릭랜드야 도덕성 때문에 실컷 욕을 먹었을 테니,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할 것이다. 첫 번째 인물은 바로 나레이터인 ‘나’다. 어떻게 해서 나는 계속해서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에 개입하게 되는 걸까. 그 때는 아직 인간의 본성이 모순되고, 성실성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위선이 내재되어 있는지 몰랐다는 고백에서 미생(未生)의 인격을 만나기도 했다.

 

어쨌든 런던, 파리 그리고 마지막의 타히티까지 아우르는 여정은 도저히 개연성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타히티의 숲 속에서 태고적 아름다움의 비밀을 만났게 되었다는 건 어느 정도의 개연적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타히티까지 갈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는 내가 그곳까지 가서 직접 스트릭랜드의 최후를 목격한 사람들의 전언을 듣게 된 것은 운명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소설적 장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예술가가 아닌 다른 직업군의 사람이 나레이터 역할을 맡았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불사른 천재 화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열정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물론 두 번째로 이야기할 문제적 인간 더크 스트로브야말로 그 누구보다 앞서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일찍이 인정했다. 후반에서 찰스 스트릭랜드가 죽기 전에 쉽게 그의 그림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허다했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나레이터의 말은, 예술마저 물신화되고 돈이라는 가치로 계량화된 현대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의 또 다른 문제적 인간은 바로 더크 스트로브다. 나는 그를 어릿광대라고 부르곤 하는데, 비록 그것이 그의 특징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적인 행위를 한 그에게 지나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배은망덕이라고 한다면 세계 챔피언 급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스트릭랜드는 더크 스트로브와 부인 블란치의 지극한 정성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면서도 결국 한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고야 마는 신공을 보여준다. 주변의 호의를 아무런 염치도 없이 받아들이면서, 최소한 지켜야할 인간의 도리조차 지키지 않는 것이 예술가의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냉혹한 잔인성에 그만 질려 버렸다. 어쩌면 서머싯 몸은 이런 극단적 대비를 통해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론을 터득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우리나라 방송계를 쥐락펴락하는 막장드라마의 원조격이라고나 할까.

 

더크 스트로브는 찰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팔리는 화가지만,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화가라고 생각하는 찰스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은인을 환쟁이라고 부르면서 주저하지 않는다. 창조의 재능이 없다고 해서, 그 창조력을 분별하고 비판하는 능력까지 부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더크 스트로브는 온 몸으로 대변해준다. 물론, 이런 찰스의 행동을 파악한 나레이터 나는 교묘하게 그를 자극하면서 이야기의 빠진 퍼즐 조각들을 하나둘씩 채워 넣는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에게 빠져 자신을 버린 블란치가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용서하겠노라고 나에게 선언한다. 문제는 블란치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비극의 피날레에서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가 그린 블란치의 누드화에 칼질을 하려는 순간, 영혼의 고뇌를 거쳐 정화된 예술혼의 결정체에 압도되는 장면이야말로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사족에 불과할 따름이다.

 

<달과 6펜스>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폴 고갱의 삶에 대해 호기심을 느껴 찾아보았더니 정말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나름의 논리를 갖춘 냉혹한 예술가 찰스 스트릭랜드는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란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 현실에 견주어 볼 때, 사후에 비로소 재평가를 받게 된 과정조차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원하는 달(개인의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 정도는 문제없다는 인식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달에도 가기 어렵지만, 현실세계에서 6펜스를 얻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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