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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평점 :
파리에 두 번 갔다. 여느 여행자처럼 두 번 모두 수박 겉 핥식의 그런 여행이었다. 그래도 두 번째 파리에 갔을 적에는 한 번 가본 곳이라고 기시감 덕분에 더 편안한 느낌이었다. 작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을 읽으면서 파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생각에 작가가 들려주는 파리의 이모저모를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내게는 오데옹 사거리, 브레트빌 대로 그리고 뇌이 시청 같은 낯선 지명보다 여전히 홍대의 미로 같은 골목길이 그리고 종로의 피맛골이 더 친근한 걸 보면 말이다.
먼저 이 책이 내가 읽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첫 번째 책이라는 점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재작년 수상자였던 앨리스 먼로의 책도 서너 권 사두고는 아예 읽어볼 궁리도 하지 않았다. 모옌의 책도 마찬가지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책은 왠지 어려울 것 같다는 편견과 아집에 발동된 거부감이 스스로를 기만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읽지는 않았지만, 난 그래도 노벨문학상 받은 작가의 이런 저런 책은 가지고 있다고 자위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다 읽고 나서, 바로 옆에 있던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가 눈에 띄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는데 놀랍게도 단박에 다 읽어 버렸다. 게다가 재밌기까지 하다. 모쪼록 이참에 노벨문학상은 어렵고 재밌지 않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됐다. 아, 그리고 160쪽 가량의 짧은 분량이었다는 점도 속독에 한몫했다.
작가가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라고 명명한 카페 <르 콩데>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며 한 잔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우정을 쌓던 바로 그 곳에서 첫 번째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조금은 이질적 존재로 다가온다. 문득 <르 콩데>가 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만 했을까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화자 나는 그런 곳이야말로 정의할 수 없는 자력이 있는 장소라고 설명한다. 한편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치기 어린 젊은이들은 폭음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런 통과의례의 절차를 거쳐야만 자신들의 패거리에 낄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에 합의하고 있었다고 화자는 증언한다.
화자가 소개하는 이름 중의 배턴을 이어 받아 앞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몇몇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 받은 캐릭터가 바로 본명을 알 수 없는 루키라는 여자다. 이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장’은 자신의 노트에 카페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시간 그리고 등장인물들을 사진사가 카메라로 작업을 하듯 그렇게 정교하게 적어 넣는다. 마치 영화 <스모크>에서 담뱃가게 주인 하비 케이틀이 매일 같이 똑같은 사진을 찍는 것처럼, 일상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첫 번째 인스톨의 말미에 자신은 고등광산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운 듯 밝히며 배턴을 다음 주자에게 넘긴다.
다음 주자로 등장한 화자는 좀 더 흥미로운 인물로 배치가 되어 있다. 스스로 예술편집자라고 카페 <르 콩데>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던 사립탐정 피에르 케슬레가 누군가를 추적하는 과정이 소설에 가미된 미스터리 효모를 들뛰게 만든다. 그가 찾는 사람이 바로 <르 콩데> 카페의 단골손님 루키이고, 그녀의 처녀적 이름은 자클린 들랑크 그리고 지금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장피에르 슈로의 집나간 부인이라는 사실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 탐정은 사건 의뢰 받은 사람을 찾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클린의 도피 혹은 방황에 일조한다. 그리고 그녀가 오래전 ‘미성년자의 방황’을 경험했다는 사실까지 알아낸다. 그렇다면 남편을 떠난 자클린의 도피는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셈이란 말인가.
자자, 이제 드디어 이 소설의 실제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자클린 들랑크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 차례다. 그녀는 물랭루주에서 일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어쩔 수 없이 저녁 시간을 홀로 보내야했다. 성정이 예민해지고 가슴이 들끓을 그런 청소년기에 그녀는 집에만 있을 수가 없었나 보다. 그렇게 야심한 시간에 돌아다니다 경찰의 보호를 받게 되고, 경찰을 연락을 받은 어머니의 에스코트를 받아 집에 돌아오게 된다. 물론 그 정도로 자클린이 벌이는 (현실세계에서의) 도피 행각이 멈출 리 없다. 그러다 해골이란 별명을 가진 자네트 골이라는 여자와 만나 ‘눈’을 맞는 경험도 하게 된다. 그렇게 도피 중에 그녀가 자주 들렀던 서점 주인이 그녀에게 건넨 “그래, 당신의 행복을 찾으셨나요?”란 질문은 화두처럼 상냥하면서도 신비하게 그녀를 매료시킨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해주는 서점 주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소설의 나머지 두 꼭지는 자클린의 친구 롤랑이 맡는다. 소설의 어디에선가 그는 자신이 전생에서부터 그녀를 알았던 것 같다는 고백을 한다. 그리고 다시 위대한 철학자의 ‘영원한 회귀’ 사상까지 도입해서 고대 철학자가 줄기차게 주장한 고통의 경감과 쾌락의 증진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가치라는 그런 결론에 방점을 찍는다. 뒤표지에 실린 ‘도망치는 순간’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미미여사의 <화차>가 떠올랐다. 놀랍다, 그저 바람나서 도망간 아내를 추적하는 이야기일 거라는 나의 소설의 얼개에 지레짐작을 정통으로 박살내준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자신의 소설에서 장기로 삼은 시간을 통한 기억의 탐색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소설에 등장하는 모두가 어느 순간엔가 서로 만나지는 못했더라도 스쳐지나가지 않았을까는 추론을 도달하는 개연성 설계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밥 스톰스가 주최한 파티에서 벌어지는 시(詩) 배틀은 또 어떤가.
영화 <라쇼몽>처럼 직접적인 교차 서술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를 무대로 활동하는 캐릭터들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펼치며 벌이는 느슨하면서도 삶의 어느 순간에 서로 연결된 이야기들은 매력적이다. 삶 속에서 도피와 방황을 반복하던 자클린이 특정한 시간에 좌초되어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 도착했을 지도 모른다는 고등광산학교 학생의 추측도 흥미롭다. 자클린을 찾아 나선 사립탐정 케슬레는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가 언급한 진실이 토해지는 순간이야말로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의 고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소설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젊음’은 삶에서 규정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단절되었거나, 방황 혹은 도피하는 이들만 알아볼 수 있는 비밀코드가 아니었을까.
그동안 출간된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들을 많이도 모아 두었다. 올해 을미년을 모디아노의 해로 삼아 천천히 읽어도 될 정도다. 바로 <팔월의 일요일들>도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이 소설에도 그가 구사하는 어느덧 익숙해진 기억 속의 탐색이 등장해서 반가웠다.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 꾸준하게 구사하는 주제에 익숙해진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