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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 브루더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운비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평점 :
기억은 태생 자체가 정확할 수가 없고,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자의적 기억을 풀어내는 소설가의 기억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내 착각이었다. 작년 스웨덴 한림원이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노벨문학상을 주면서 그 이유로 “붙잡을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기억의 예술로 환기시키고 (나치의 파리) 점령기의 생활세계를 드러냈다”고 했다. 그런데 후자만 기억하고 전자는 아예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전에 읽은 두 편 소설 모두 전자의 조건에는 해당하지만, 후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사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을 읽기 전에 시발점을 바로 이 작품 <도라 브루더>로 시작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도라 브루더>야말로 내가 판단할 때 모디아노가 노벨상을 받은 이유와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삶이 어디 자신의 뜻대로 되는 법이 있었던가. 어쨌든 세 번째로 만난 모디아노의 책은 언제나 그렇듯 모호하면서도 또 여전히 시간의 탐색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모디아노는 과거의 어느 사건을 파고드는 것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좀 더 노골적인 방법으로. 그런데 소설 속의 화자(소설가)가 글을 쓰고 있다고 발표한 현재 시점의 1996년이 아닌 1941년의 어느 실종 신고로 독자를 조용하게 이끈다. 그리고 보니 책의 표지에 파리 시내 지도가 한 장 실린 것을 깜빡했다. 모디아노에게는 익숙한 지명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는 파리의 지명과 대략적인 위치 파악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을 위한 것이리라. 과거에 군부대의 병영이 있었다는 클리냥쿠르, 영화를 보기 위해 찾던 오르나노 대로 같은 이름이 갖는 프랑스 내부의 문화 사회적적 의미를 과연 나는 이 책을 통해 잡아낼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 같다.
반세기도 더 지난 시절의 일에 관심을 갖는 화자가 나는 더 궁금하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15세 소녀, 도라 브루더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왜 그렇게 알고 싶었던 것일까. 혹시 프랑스 지식인들이 지금도 터부시하는 1942년 7월 16일 벨디브 유대인 일대검거사건에 대한 부채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독일법령이 우선시되는 점령기였다고 하지만, 프랑스 사법권의 도움과 꼴라보들의 자발적인 협력이 없었다면 1만 3,152명이 되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을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잡아들일 수가 있었을까. 더 큰 문제는 그들 중 대다수는 외국인 신분이 아닌 어엿한 프랑스 시민권자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한 국가란 존재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그들의 운명은 투렐 억류 센터와 드랑시 수용소를 거쳐 최종목적지인 아우슈비츠였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화자는 그로부터 20년이란 시간이 흘러 알제리 사태의 복판에 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슬쩍 흘리기도 하고, 나치 독일의 점령기 시절 어머니와 이혼한 아버지의 수상쩍은 암거래 에피소드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아버지와의 불화 같은 개인적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이것이 바로 종잡을 수 없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주특기인 모호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야기의 얼개 구조다. 이렇게 파편적인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끈은 우리가 과거에 어느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져 있지 않았을까하는 가정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의 흔적들은 기록에 존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아주 사고해 보이는 징후들조차 놓치지 않고 탐문과 서류 조사, 별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없는 몇 장의 기념사진 그리고 정말 우연하게 얻어 걸린 고시장에서 사들인 금방 사그라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오래된 편지까지 끈기를 가지고 꼼꼼하게 살핀다. 역설적이지만 모든 것을 수치화해서 기록하는 독일식 방식이 도운이 되기도 한다. 마치 무슨 암호처럼 보이는 체포와 호송 절차에 대한 기록이야말로 내가 도라 브루더를 추적하는 연결고리인 셈이다.
우리는 끈질긴 소설가의 추적 덕분에 점령기 시대 유대인들의 신산한 삶에 대한 빈약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그네들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됐다. 도라의 부모님인 에른스트와 세실은 각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었다. 아버지는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 베테랑으로 식민지 부대에서 숱한 전투를 치르고 100%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끝내 프랑스 국적을 얻지 못했고,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 역시 나치 독일의 점령 이후 강화된 유대인 등록과 검거 열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와중에서 반항적이며 독자적 자질과 방탕기가 다분했던 십대 소녀 도라 브루더는 도피 행각을 계속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도라였지만, 부계와 모계 덕분에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고 기독교계 기숙사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을 거라고 소설가는 추정한다. 아무리 삶에서 달아나려고 노력했음에도 도라의 운명은 다른 유대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그는 조용하게 증언한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이 소설에서 설정한 시간이라는 시니피앙(기표)과 짝을 이루는 시니피에(기의)는 시간의 이빨, 다시 말해서 망각이다. 작가는 점령기라는 자의적 시간이 그리는 궤적에 놓인 인간의 운명에 대한 고증을 통한 추적에 나선다. 시간의 탐색과 재구성을 통해 자신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유대인 소녀의 운명을 추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가혹한 홀로코스트 시대에 아무런 대응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던 무력한 개인의 운명을 읽으면서 시대를 막론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고민하던 청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도라 브루더에 대한 추적은 어느 순간, 수면 아래로 잦아들고 대신 그의 삶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운다.
사회적인 폭압과 갈등이 만연해 있던 1940년대와 2015년 현재의 모습이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주변 환경은 우리에게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망각하라고 끊임없이 종용한다. 동시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삶의 객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주체가 될 것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