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엔 한의원에 다녀왔다.
건우아빠가 전에 다녔던 한의원인데, 그때 다녀본 경험으로 실력도 뛰어나고 약보다는 침을 권해 비용도 별로 안든다는 엄청난 장점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몰려오는걸 탐탁치 않아하며 결정적으로 집에서 두시간이나 지하철을 타야한다는 것이 단점인 곳이다.
어쨌든 몸이 힘드니 예약을 받아달라고 들이대다시피해 다니게 된 곳이라 군말없이 세개노선의 지하철을 갈아타고 보라매역으로 갔다.
땅속으로 다니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터라 이렇게 장시간 지하철을 타는건 태어나서 손가락안으로 꼽을 만한 일이었다.
긴시간 지하철을 타고 가자니 앞자리에 앉은 사람을 멀뚱거리며 관찰하기도 맥없는 노릇이어서, 일전에 작게작게님의 리뷰를 보고 홀랑 구입을 한 정운영선생의 칼럼집<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을 읽었다.
작게작게님이 이 글을 본다면 정운영선생의 책을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읽다니하며 눈을 부릅뜰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해해주시라. 최근의 나는 그나마 지하철에서의 한때가 가장 길게 여력이 나는 시간이니...
그리하여 왕복 네시간여를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때론 서서 내리는 지점을 놓칠까 눈을 흘깃거리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 책을 읽어 내려가니 선생의 어조나 느낌은 선명한데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이나 지명은 벌써 가물가물 하였다.
그리고 이미 전에 두번 미리 진맥을 받고 침도 맞은터라 한약을 한재 받으며 몇몇음식은 먹지 말라 당부하는 한의사선생의 설명도 들은바 있건만 그날저녁은 그음식들이 더 당겨 한약먹기전 기념이라며 안주로 만들어 건우아빠와 술을 마셨다.
한잔만 마시자며, 아이들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이며 건우아빠 공부얘기들을 나누다가, 내가 읽고있던 책에 화제가 돌아갔다.
건우아빠는 나이들어 같은 방면의 공부를 하는 이로써 정운영선생에 대해 느끼는 감회가 좀더 절실한 모양이었다.
나: 선생이 말년에 회한이 많았던 모양이야...
건우아빠: 그렇겠지...
나: 다른부분보다 장하준선생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어째 본인의 입장이랑 좀 비슷하게 여겨졌었던지 좀 비감하게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안타까움이 유독 심한것 같더라..
건우아빠: 왜 안그렇겠어. 진작에 우리대학에 자리를 잡았어야하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너무 예리해 나쁜놈들이 감당하기 어려우니 저사람만은 안된다고 했다더구만... 세상에 나쁜놈들이 계속 기득권을 잡고, 좋은 사람들이 자꾸 밀려나면서 저렇게 퇴장을 당하는걸 보면, 이나라는 본질적으로 살만한 나라가 아닌것 같아...
나: 뭐 그렇다고 본질씩이나...
건우아빠: 지리적인 요인일까, 우리 나라는 역사적으로 기회주의자들의 발호가 끊겼던 시대가 없는 것 같아.
나: 글쎄, 그렇다고는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거 아닌가. 그리고 그 조금씩을 보고 우리는 살아가야하는거고... 난 가끔 운동을 하는(했던) 이들의 조급증이 걱정스러워. 당신을 포함해서...역사의 변화가 단시간에 이루어 지겠어?
건우아빠: 내말은 신자유주의라는 대세에서 마르크스경제학으로 바뀐다고 해도 말이야, 이런식이라면 지금의 기회주의자들이 다시 마르크스의 얼굴을 하고 또다시 기득권층이 되리라는거지. 기존에 그방면으로 열심히 하고 있던 모든 선량하고 성실한 이들을 다 밟아버리고 또다시...
나: 너무 비관적이네...
건우아빠: 우리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땅에는 아무리 인재가 태어나도버림받기만 하는 것 같아.... 확 이민이나 갈까...
술탓이었을까, 건우아빠의 비관은...
한잔만 간단히로 시작된 술자리가 1.8리터 소주병에 든 복분자주를 반넘게 비운채 계속되었다.
술탓이기를, 그리고 안타까운 한 경제학자의 죽음에 뒤늦게 따라붙는 허무이기를 바라며 복분자주는 숙취가 없다던 동료의 말이 사실이기만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