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걸으며 제자백가를 만나다
채한수 지음 / 김영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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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와 춘추전국시대에 대한 호기심은 이전부터 있었다. 지금까지 읽은 수많은 책 속에서 제자백가 이야기를 만났다. 하지만 제대로 제자백가의 저서를 읽은 적은 없다. 가장 많이 읽은 것으로 꼽는다면 <장자>가 될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장자에 매혹되어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았다. 원문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이거나 아니면 장자의 전체 흐름을 새롭게 풀어내었다. 읽을 때마다 감탄하고 알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냥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수박 겉핥기식 독서의 결과다. 이것은 <논어>도 마찬가지다. 사놓은 해석 책이 몇 권 되지만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책은 어떻겠는가.

 

제자백가를 제목에 넣었지만 여기서 다루는 책은 모두 열 권이다. 장자, 열자, 한비자, 전국책, 여씨춘추, 논어, 묵자, 맹자, 회남자, 안자춘추 등이다. 분량으로 따지면 <장자>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한비자>다. <열자>까지는 어느 정도 분량이 되지만 나머지는 다루고 있는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다. 개인적으로 <묵자>와 <회남자> 내용이 많이 궁금했는데 너무 적은 분량이라 아쉬웠다. 현재 남아 있는 내용도 실제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을 알지만 특별히 찾아서 읽지 않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책들이 아니라 더 그런지 모르겠다.

 

책의 구성은 간단하다. 먼저 앞에 말한 열 권의 고전을 선택한다. 각 고전 속에서 이야기를 뽑아 저자가 편집한 내용을 나열한다. 그리고 이 내용에 대한 각각의 해설을 단다. 이 작업의 연속인데 저자의 의도에 따라 편집된 부분이 많다. 원문을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이야기 식으로 풀어내었다. 그래서 처음 접하는 사람이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었다. 해석에서 본문에 생략된 부분을 말해주는데 어떤 부분은 과도한 편집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이해되지 않던 부분을 잘 알려줘서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 중 90% 이상은 한두 번 본 것들이다. 원전의 해설서를 읽으면서 혹은 다른 책들 속에 인용된 것에서나 고사성어에 대한 해설 등에서. 하지만 몇 가지 이야기를 제외하면 전혀 원전을 몰랐다. 한 번도 <열자>나 <전국책>이나 <회남자> 등에 실린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만으로 친다면 출처를 알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출처가 중요하다. 그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맹자>의 ‘닭 도둑의 변명’이야기는 현재에 그대로 적용된다. 이전 정권의 부자 감세 정책은 신속하고 대대적으로 벌어졌지만 현 정권의 부자 증세 정책은 아주 더디다. 대신 사람들의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 간접세의 증세는 신속하다. 가진 자들을 위한 변명은 언론을 통해, 정부 관료의 입을 통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경제 위기, 혼란, 성장 우선 등의 변명들 말이다. 하지만 이 변명의 이면에는 현재를 고착화시켜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저자가 해석에서 정치인들을 질타한 것도 이런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다.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불만인 것이 몇 개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춘추전국시대 각 나라의 수도로 서울이라고 호칭한 것이다. 서울과 수도를 같은 것으로 놓고 무심코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서울이 곧 수도라는 철학을 가지고 쓴 것인지 궁금하다. 무심코 사용한 것이면 수정해야 할 것이고,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면 헌재의 관습헌법처럼, 혹은 <한비자>의 ‘입던 바지가 편하다’이야기의 해설처럼 의식 개혁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랑캐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하고 있는데 조금 더 연구한다면 그 시대 북방민족의 이름을 제대로 적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제목처럼 천천히 제자백가를 만났다. 특별히 신선한 것은 없지만 잘 정리된 이야기는 이전 기억들을 환기시키고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각 유파의 입장을 알 수 있어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더 느낀 것은 유학자들이 권력을 쥐게 된 데는 권력자들의 입맛에 가장 맞는 통치철학이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현재 묵자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놀랐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더 공감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제자백가에 대한 입문서로 권하고 싶다. 단지 입문서로만. 지금 괜히 예전에 읽은 장자에 대한 책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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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3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시원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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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쓰나지마라는 섬을 배경으로 쓴 여섯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책 제목인 <망향>은 단편의 제목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고백> 이후 최고다. <고백>의 영향이 너무 커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을 때면 늘 비교하게 되었다. 사실 이 작품도 앞의 단편을 읽을 때까지는 그랬다. <고백>이 단편에서 장편으로 발전한 것임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 책을 빌려준 몇 사람들에게 들은 극찬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히 나의 취향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의 2기를 열었다는 평은 머릿속에 담아둘 필요가 있다.

 

첫 작품 <귤꽃>은 이 책이 단편집이란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읽었다. 조금 긴 호흡으로 읽었는데 갑자기 살인 이야기가 나왔다. 중반까지 한 여자의 섬과 자기 집안 이야기라 방심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버지의 외도와 죽음으로 섬사람들의 질타가 이어지고, 언니는 왕따까지 당하고 있었다. 귤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던 어느 날 언니가 남자와 달아났다. 그 후 긴 시간이 흘렀고 언니는 작가로 성공했다. 섬은 인구 감소로 인해 다른 시에 합병되게 되었다. 합병 행사에 초청 인사 온 언니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인사건 이야기는 비약처럼 다가왔고, 이어지는 진실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바다별>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야기를 추억으로 풀어낸다. 실종을 죽음으로 보지 않고 밤마다 아버지를 찾아다니는 엄마와 함께 성장한 한 소년의 기억을 다룬다. 이 추억 속에 한 어른이 끼어든다. 그의 등장은 머릿속에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저런 상상 속에 밝혀지는 마지막 사실은 역시 반전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진한 여운도 남긴다. <꿈나라>는 할머니의 위압적인 권위에 짓눌렸던 소녀의 과거가 현재의 놀이동산 속에서 떠오른다. 너무나도 가고 싶었던 드림랜드를 결혼 후에야 가게 된 사연을 보여주는데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은 섬뜩하다. 절망 속에서 손녀가 선택한 것은 살인에 버금간다. 화려한 놀이기구보다 추억 속 놀이기구에 감동하는 그녀의 모습은 가슴이 아련해진다.

 

<구름 줄>은 한 가수의 추락으로 시작한다. 그는 길거리 가수에서 시작하여 인기 가수가 된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다. 이 사실은 섬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엄마는 섬을 떠나지 않고 모두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면서 살아간다. 성공한 가수인 그는 살인자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렵다. 이 두려움이 학창 시절 그를 괴롭혔던 지방 유지의 아들 마토바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게 한다. 창립 50주년 행사와 섬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은 의도적이고 위악적이다. 가수의 약점을 파고든다. 결국 무기력한 그가 선택한 것이 자살이다. 그 후 밝혀지는 살인의 진실은 가슴이 먹먹하게 만든다.

 

<돌십자가>는 추억을 위기와 함께 엮어 풀어내었다. 낯선 섬에 오게 된 사연과 악의적인 소문은 한 여학생의 학교 생활을 힘들게 만든다. 이때 존재감이 없던 메구미와 친구가 된다. 이 둘이 함께 하면서 찾아내는 십자가의 희망은 현재에도 이어진다. 메구미의 전화가 좋은 친구란 이런 것이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빛의 항로>는 이 소설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왕따를 정면에서 다룬다. 작가의 의지인 듯한 “왕따, 나는 이 말을 사용하는데 거부감이 든다. 비방, 중상, 절도, 폭력, 이런 도를 넘은 행위를 성인이 저지르면 범죄가 되는데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면 그저 두 글자의 무게감 없는 단어로 의미가 희석된다.”(252~253쪽)는 문장에 눈길이 간다. 점점 소년 범죄가 잔혹해지고 대범해지는 요즘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왕따를 둘러싸고 과거 선생이었던 아버지의 사연을 통해 한 명의 선생으로 좀더 성장하게 되는 모습은 강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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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여행자 - 히말라야 도서관에서 유럽 헌책방까지
김미라 지음 / 호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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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저자에게 두 가지 부러움을 느꼈다. 하나는 영어를 원서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고, 이 능력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어릴 때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 산속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가 저자에게 결코 평탄하고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히말라야 산속을 뛰어다니고 학교 도서관 속에서 비밀의 도서관을 만난 장면을 읽을 때면 가슴 한 곳이 쿵쾅거린다. 하지만 가장 멋진 것은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비행기 표를 끊고 나아간 것이다.

 

모두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멸의 책, 책읽기, 헌책방, 서점 등이다. 개인적으로 앞의 세 장은 재미있었고, 얼마 전에 읽은 책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은 감상이 곁들어 있는 책방 정보라 생각보다 밋밋했다.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는 책방은 흥미로웠지만 단순한 정보로 이어진 듯한 서점 이야기는 백과사전처럼 다가왔다. 이중에서 가본 곳이라고는 딱 한 곳뿐이라 더 그런지 모르겠다. 물론 예전처럼 서점과 헌책방을 찾아다니던 시절의 나였다면 조금 다를 것이다. 뭐 그때는 전혀 외국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아 단순히 상상만으로 즐겼을 테지만.

 

불멸의 책 장에서 건저올린 “그래서 행동은 문자가 아니라 문자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의 것이었다.”(30쪽)란 문장은 언제나처럼 나의 말뿐인 삶을 뒤흔든다. 그렇다고 갑자기 삶이 변하지는 않는다. 예전에 절판된 책이나 금서를 구한 후 흥분했던 기억은 지금도 가슴 한쪽에 남아 있다. 금서와 애서가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읽은 책과 겹치는 부분은 새롭게 머릿속에서 정리되었고, 다른 부분은 저자가 무심코 사용한 듯한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수용미학적 입장으로 풀어낸 이야기에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커피와 책, 여행과 책, 책 냄새 등은 읽으면서 가장 많이 공감한 부분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집에는 사놓은 책으로 가득하고 언제 읽을지 모를 책 때문에 추가로 책 사는 것이 살짝 두려워졌다. 그렇다고 책사기가 중단되지는 않는다. 단지 속도가 느려질 뿐이다. 사는 것보다 읽기를 더 하고 싶지만 현실 여건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생각보다 느린 진도와 일상이 한껏 끌어올린 속도를 늦춘다. 그렇지만 뿌듯해지는 감정은 책장을 볼 때마다 샘솟는다. 정리하지 못한 책들이 방바닥에 뒹굴거릴 때는 조금 다르지만.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내가 읽은 책들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물론 읽지 못한 책들이 훨씬 많다. 다른 취향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읽은 책들은 나보다 더 깊게 읽는 느낌을 받았다. 그 깊이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이것을 밖으로 드러낼 때 단순한 정보도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그것은 책 여행자라 자칭하는 저자가 세계를 돌면서 경험한 수많은 서점과 책들과의 만남에서 자연스레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녀가 경험한 수많은 서점과 읽은 책들은 어느 순간 조금씩 잊혀 가겠지만 그 경험과 느낌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 이어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다음 책에서는 서점보다 자신이 읽은 책들을 자기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표현한 것이었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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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그린
데이비드 미첼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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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두 번을 읽었지만 아직도 그 재미를 모른다. 이 때문인지 이 소설도 재미있는 이야기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이야기로 구분된다. 나의 경험이, 삶의 방식이 작가가 경험한 혹은 살아온 것과 다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그가 글로 표현한 것이 충분히 나의 감성을 적시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을 되돌아보고, 비교하고, 공감하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 이상 겪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열세 살 소년 제이슨이 주인공이다. 우리나라 교육제도에 대입하면 중학생인 그는 말을 더듬는다. 그는 이것을 행맨이라고 부른다. 행맨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단어를 더듬게 하거나 다른 단어를 사용하게 만든다. 언어 교정을 위해 의사를 찾아가지만 이것이 쉽게 고쳐질 리가 없다. 행맨은 이후 그의 삶과 함께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이다. 교구 잡지에 엘리엇 볼리바란 필명으로 시를 쓴다. 이 시는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진다. 에바 크롬린크 부인이다. 그녀를 통해 시 교육을 받고, 자신의 정체성과 용기를 배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인연은 그렇게 길지 않다.

 

대처 시대 영국이 배경이다.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이 있던 시기다. 언제나 그렇지만 전쟁은 국민들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애국심은 고취되고 권력은 하나로 집중된다. 훗날 대처리즘이라고 불리는 정책이 시행되던 시기다. 하지만 아직 제이슨이 이 정책을 피부로 느끼기엔 어리다. 집의 경제도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다. 주변에서 실업자가 한 명씩 늘어나고 있지만 다른 집의 문제일 뿐이다. 그에게 닥친 문제는 또래들과의 관계다. 학교 서열에서 중간 위치를 차지해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진 학생들이 겪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이 목표는 엄마와 함께 영화관에 간 것을 들키면서 틀어진다.

 

십대 남자들. 이들은 과장된 남성성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표출하려고 한다. 제이슨이 필명으로 시를 보내는 것도 계집애 같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다.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보러가는 것도 이런 일 중 하나다.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은 남자로 자라고 살아가는 동안 평생 듣고 살게 된다. 이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다. 반대편에는 여자답지 못하다는 말이 있겠지만. 이 남자다움을 증명하는 것은 그 시절 아이들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처럼 말을 더듬고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에게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13개월 동안 13개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시간이 제이슨으로 하여금 성장의 고통을 겪게 만든다. 할아버지 유품인 시계를 스케이트 타다가 부수고,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 사장에게 굽실거리면서 아부하는 아버지를 보게 한다. 시계가 부서졌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는 그와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 못하는 아버지가 겹쳐진다. 제이슨에게는 아버지의 화난 모습이, 아버지에겐 실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 엄마와 함께 영화 본 것을 들킨 후 버러지라고 학교짱 패거리의 놀림을 받는다. 중간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것을 정면으로 돌파할 용기가 부족하다. 그 용기는 어느 순간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와서 행동으로 표현된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뭐지 한 부분이 있다. 제이슨이 시계를 깨트리고 발목을 다친 후 찾아간 어떤 노파 집에서 벌어진 마지막 장면이다. 이 소설의 첫 장인데 여기서 혹시 다른 판타지 세계로 빠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길 정도였다. 이 의심은 마지막에 해결되는데 솔직히 조금 아쉬웠다. 뭔가 다른 이야기를 더 많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실로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가 행맨에 대한 것이라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소설 곳곳에 80년대 영국 가정의 풍경이 녹아있다. 허세와 과장된 표현이 가득하고, 유행과 과시도 그대로다. 진실을 마주하기보다 자신들이 보기에 편한 것만 보고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이 쉽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정체도 아닌 퇴보로 이어진다. 제이슨이 성장한 만큼, 혹은 그 이상 어른들은 퇴보하고 있다. 조그만 세상에서 자신만 보던 제이슨에게 점점 넓어진 세계의 모습은 너무 낯설다. 이 낯선 풍경을 하나씩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는 겪고 있다. 그 속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들어있다. 마지막에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를 보면서 안타까움과 연민이 몰려온다. 동시에 그의 첫 키스 장면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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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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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의 단편집을 두 번째 읽었다. 첫 번째보다 훨씬 재밌고 상대적으로 쉽게 읽었다. 한 편의 분량이 더 많은 것도 이유일 것이고, 조금 더 익숙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첫작품이었던 <행복한 그림자의 책>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고, 작가에 대한 호평도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작품집을 읽으면서 거장이란 평가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완전히’가 아니고 ‘살짝’인 것은 아직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 충분히 몰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도입부와 마지막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다.
 
모두 여덟 편이다. 이중 세 편은 연작이다. <우연>, <머지않아>, <침묵> 등이다. 이 세 작품은 줄리엣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첫 번째 작품인 <우연>을 모두 읽은 후 <머지많아>를 읽으면서 낯익은 이름이 나와 혹시 했는데 역시나 이어졌다. 그런데 <침묵>에서 또 이어졌다. 이 연작은 한 소녀 줄리엣이 사랑을 찾아가고, 아이를 낳은 후 부모의 집을 방문하고, 집을 떠난 딸을 기다리는 엄마를 시간 순으로 다룬다. 각각 다른 역할을 맡은 줄리엣을 보여 주면서 한 명의 여자가 어떻게 변하는지 알려준다. 개인적으로 <침묵>이 가장 마음에 들지만 그녀와 딸 퍼넬러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강요가 아닌 인내를 통한 그녀의 기다림이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지 의문이다.
 
표제작 <런어웨이>는 처음에 칼라의 나이가 많을 것이란 선입견에 빠졌다. 남편 클라크의 행동 때문이다. 이 부부의 관계가 평탄해보이지 않는데 유명 시인의 아내 실비아가 이 둘 사이에 끼어들면서 급박하게 변한다. 이 변화의 시작은 칼라지만 촉발한 것은 실비아다. 삶에 지친 아내의 탈출기가 되는구나 하는 순간 이야기는 또 변한다. 자기 앞에 놓인 자유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찾아온 자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열정>은 어느 날 분위기에 휩쓸린 한 여자 그레이스 이야기다. 자신을 찾지 못한 그녀가 억눌렀던 감정이 조그만 사고로 폭발하는데 그 순간들이 비약처럼 다가온다. 이것은 결국 새출발로 이어진다.
 
<허물>과 <반전>은 미스터리 같다. 특히 <반전>은 제목처럼 반전이 펼쳐진다. 우연히 만난 남자와의 약속,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과 열정. 하지만 조그만 준비 부족과 큰 오해가 겹치면서 삶의 궤도는 완전히 뒤틀린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밝혀지는 사실은 되돌릴 수 실수다. 이 실수를 그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녀의 순수한 감정이다. <허물>은 도입부를 유심히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장면을 무심코 지나갔는데 다시 읽으니 마지막 장면과 이어진다. 로렌을 두고 각각 다른 입장에 선 두 집의 이야기는 의문을 불러오고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러다 밝혀지는 사실은 오해의 중첩이자 사실을 숨겼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힘>은 낸시의 시점으로 읽는다면 올리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되고, 올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낸시의 이야기가 거짓이 된다. 낸시와 윌프의 결혼이 사실이지만 테서를 두고 각각 다른 기억이 존재한다는 것은 해석의 문제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녀가 만난 테서와 올리 모두 환상일 수도 있다. 마지막에 “자신이 그 두 사람의 인생에서 쫓겨나, 혹은 끌려 나와 자기 인생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500쪽)를 보면서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각각 다른 순간을 통해 풀어낸 이 작품의 무게는 읽으면서 또는 그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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