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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회복하는 인간 Convalescence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24
한강 지음, 전승희 옮김, K. E. 더핀 감수 / 도서출판 아시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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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핫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한강 작가의 단편소설 『회복하는 인간』을 만났다.

 

주인공은 언니 장례식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다 발목을 삔다. 삔 발목 치료를 위해 뜸 치료를 받는다. 하지만 도리어 발목에 심각한 화상을 입게 되고. 심각한 화상이지만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방치해 둠으로 결국 회복불능의 상태가 되어 병원을 찾게 된다. 이때부터 지난한 치료가 시작된다. 회복불능 상태이기에 도려내야 하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에 기대며 시작된 치료는 계속되지만,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회복의 가능성이 보인다며 계속하여 치료를 하게 되고. 이런 지난한 치료과정과 함께 주인공 안에 응어리진 상처가 언급되며 소설은 진행된다.

 

작가는 이 짧은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우리네 삶이 회복 불능의 상태라고. 우리네 삶이 이처럼 불행이 가득하고, 눈물과 한숨이 가득하다는 걸까? 모를 일이다. 어차피 작가의 손에서 떠난 글은 독자의 것이다. 그러니, 내키는 대로 이해하고 붙잡으면 그만 아닐까.

 

그래. 이 여인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일지 모르겠다. 우리 삶이 이미 회복불능 상태일지도. 아니, 그러한 상태인줄도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어쩌면 사랑함에도 도리어 상처주고 깨어진 관계로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고. 견딜 수 없는 슬픔에 함몰되어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작가가 주인공을 ‘당신’이라 칭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일인칭도, 삼인칭도 아닌 2인칭 시점이라니. 이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소설을 읽는 ‘당신’이라 속삭이는 듯하다.

 

온통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 깨어진 관계, 슬픔과 불행의 삶, 다소 답답하기도 하고 호구 같이 여겨지는 주인공. 그가 바로 ‘당신’아니냐는 속삭임으로 말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나기도 하고, 답답하고 먹먹하다. 아프다. 회복과 희망은 저 먼 곳에 있는 듯 여겨져 짜증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여기에서 끝인가. 과연 슬픔 그 자체만을 이야기 하고 있을까? 아니다. 비록 더디지만 회복이 있다. 어쩌면 이 회복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느껴지지도 자각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결국엔 회복이 있다. 물론 여전히 슬픔은 떠안게 되고, 그 슬픔의 상처가 남겠지만 말이다. 소설의 제목 역시 『회복하는 인간』 아닌가! 회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회복 불능의 상태처럼 여겨진다. 우리의 삶도, 우리 사회도 그렇다. 하지만, 결국엔 회복이 이루어진다. 슬픔과 눈물 위에 세워진 회복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오늘 우리 삶이, 우리네 사회가 이처럼 회복을 향해 나아가길 꿈꾼다. 여전히 회복불능의 상태처럼 여겨진다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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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어 수강일지
우마루내 지음 / 나무옆의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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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책 제목 모두 흥미를 끄는 소설을 만났다. 작가 우마루내의 『터키어 수강일지』란 소설이다. 우마루내란 이름이 왠지 외국작가 같다(처음 이 이름을 보며, 몽골작가인가 싶었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한국작가다. 이 책은 그녀의 첫 번째 소설이다. 그러니, 이제 막 작가의 길을 걷는, 또는 걷고자 하는 신참 작가의 소설임을 감안하고 책을 읽는다면 좋겠다. 다소 산만하며 다소 미숙하여 느껴질지라도, 장차 대문호가 될 작가의 첫 작품을 만났다는 신선함과 설렘, 그 즐거움을 누리자.

 

주인공 ‘나’는 15세 소녀다. 다소 독특한 코드를 갖고 있는 소녀다. 왜 독특하냐고? 그 나이에 꽂힌 남자가 다름 아닌 낚시가게 아저씨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낚시가게 아저씨의 펑퍼짐한 엉덩이에 빠졌다. 살짝 삐져나와 비치는 낡은 팬티에 설레는 소녀의 마음이라니. 이런 다소 독특한 소녀가 겪게 되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소설은 이야기한다.

 

주인공에게 또 하나 중요한 건 인터넷 카페 <존나 카와이한 그룹>이다. 카페 이름이 쪼까 거시기하다. ‘카와이’는 일본어로 귀엽다 사랑스럽다 작다 등의 의미란다. ‘존나’는 어떤 의미일까? 지금 여러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존나’가 맞다.

 

여기서 잠깐! ‘존나’가 어떤 의미일까? 부정적 의미일까? 긍정적 의미일까? 아님, 아무런 의미 없는 추임새에 불과할까? 모두 맞다. 물론, 누군가는 청소년들이 입에 달고 있는 이 단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할 때는 ‘졸라’, 부정적으로 사용할 때는 ‘존나’가 된다고 말하기도 하더라만. 사실, 이 안에는 모든 뉘앙스가 다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 <존나 카와이한 그룹>에서 사용하는 ‘존나 카와이하다’, 줄여서 ‘존카’ 또는 JK는 이런 다양한 의미를 모두 아우른다. 카페 회원들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소속감을 느낀다. 어쩌면 작가는 이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청소년시기에 친구들과 함께 같은 곳에 속하길 원하는 욕망. 그리고 그 무리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아무런 의미 없는 말, 특정 언어를 함께 공유하고 뱉음으로 함께 한 곳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을 누리려는 몸부림. 이에 반하는 또 다른 욕구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표현하려는 갈망. 청소년 시기에 갖게 되는 이 두 감정 사이 갈등과 고민을 소설은 보여준다.

 

또래아이들과 어울리면서도 다소 색다른 고민을 안고 있는 주인공. 주인공은 어느 날 카페에서 자신의 고민을 한스 요아힘 마르세유에게 털어놓고 만다. 아뿔싸! 한스 요아힘 마르세유는 <존나 카와이한 그룹>에서 부정적 의미로 존카한 사람이다. 오지랖 넓게 낄 자리 안 낄 자리 가리지 않고 끼어드는 사람. 왠지, 질척거린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사람. 카페 내에서 암묵 중에 투명인간 취급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으니 이로 인해 또 다른 주인공의 고민이 시작된다.

 

결국 터키어 수강을 위해 간 ‘터키 문화원’에서 한스 요하힘 마르세유를 만나게 되고. 온라인상의 인물을 오프라인상에서 만나게 된 주인공. 과연 그 앞에 펼쳐질 시간들은 좋은 의미에서 존나 카와이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우리 안에는 어딘가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음을 말하는 걸까? 다소 요상한 단어인 존나 카와이, 다소 익숙지 않은 언어 터키어를 등장시킴으로 소통의 다중성을 말하는 걸까? 남과 다른 생각, 열망에 대한 접근일까?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다. 단지, 내일도 우리의 삶이 존나 카와이 하길 바랄뿐. 좋은 의미에서 말이다.

 

그럼, 소설은 어떤가? 물론 존카하다. 무슨 의미냐고? 그건 독자마다 각자 다를 것이다. 단지, 작가는 이제 막 첫발을 떼어놓은 것뿐임을 기억하자. 앞으로 찍히게 될 작가의 발걸음이 위대한 발걸음이 되길, 건필을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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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1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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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 이어지는 소설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1권을 읽었다. 계속되는 ‘잘금 4인방’의 활약이 재미나고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가랑 이선준은 조정의 2인자인 아버지와 내기를 하여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상과 결혼을 한다. 바로 대물 김윤식의 누이 김윤희와(사실 김윤희가 바로 대물이지만.). 그리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대물이 곧 김윤희임을 밝혔다가 맞아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만큼 궁지에 몰린 선준. 이제 대물 김윤식의 정체를 알게 된 우상(『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서 좌상이었던 가랑의 아버지는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에서는 우상으로 한끝 발 내려간다.)은 김윤희에게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사직하라 협박을 한다.

 

또한 임금 정조 역시 대물 김윤식이 실상은 김윤식이 아닌 김윤희 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른 척하며, 추후 우상을 잡을 수단으로 갈무리한다. 그리고는 ‘잘금 4인방’ 모두를 규장각 각신으로 임명하도록 하지만, 조정의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이에 이 반대를 물리치기 위한 수단으로 과한 신참례를 명하고, 이런 신참례를 통과하면 ‘잘금 4인방’ 모두를 규장각에 둬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하여 ‘신참례’를 치르게 되는 ‘잘금 4인방’의 활약이 1권에서 주를 이룬다.

 

‘신참례 ’와 함께 ‘잘금 4인방’을 힘겹게 하는 것은 ‘잘금 4인방’에게만 내려진 또 하나의 업무다. 임금은 ‘잘금 4인방’을 수많은 책으로 가득 찬 열고관으로 데려가 그곳의 책을 모두 쏟아 놓은 후, 이 모든 책을 읽고 초록을 마친 뒤 제자리에 꽂아야만 함을 말한다. 그것도 열고관이 단지 시작일 뿐인 그런 엄청난 일을 말이다. ‘성균관’에서 머리 터지게 공부하면 끝일 줄 알았는데, 더 심하게 공부해야만 하는 ‘잘금 4인방’의 운명이 얄궂지만, 또 한 편으로는 웃음 짓게 한다. 과연 이 빡쎈 규장각 각신으로서의 시간들을 ‘잘금 4인방’이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게다가 이번 이야기에서는 청벽서가 등장하였다. 과연 청벽서의 등장은 무엇을 노린 것일까? 그리고 이런 청벽서의 도발 앞에 ‘잘금 4인방’은 어떻게 반응해야만 하는 걸까? 특히 걸오를 노리는 듯한 이 도발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게 될까?

 

이런 내용들이 흥미진진할뿐더러, 이번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에서는 걸오가 장가를 간다. 그것도 14살 꼬마 아이에게. 이렇게 걸오의 장가가는 장면과 그로 인한 에피소드들이 재미나다. 특히, 걸오의 어머니의 캐릭터가 웃음을 짓게 한다.

 

이처럼, 전편인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전2권)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정조시대) 규장각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소설답게 이번 이야기 역시 재미나다. 뿐 아니라 조선시대 성균관과 규장각에 대한 작가의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써나가기에 허무맹랑하면서도 전혀 허무맹랑하지 않다. 아울러 다소 가벼운 느낌이 들면서도 그 안에 작가가 꿈꾸는 조선을 엿볼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 왠지 의미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가랑 이선준이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백성들은 이런 냄새나는 거름을 뿌려 놓고 그 옆에서 밥을 먹습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먹어 둡시다. 오늘의 이 밥맛, 머지않아 떠올릴 날이 있을 겁니다.”

선준은 이렇게 말해 놓고 밥을 푹 퍼서 먹기 시작하였다. 구역질이 나지 않을 리가 없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하였다. 그의 수저질은 재신과 윤희까지 밥을 먹게 하였고, 결국 용하도 ‘우웩!’을 연발하면서도 꾸역꾸역 먹게 만들었다.(325쪽)

 

백성의 힘겨움을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는 지도자들이란 거짓이다. 오늘 얼마나 많은 거짓이 판치고 있는가? 또한 선준은 진정한 충성이란 임금을 향하기보다는 백성을 향하여야 함을 보이고 있다. 이런 모습이 얼마나 멋진가!

 

선준은 이 장계에서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 달라고 의견을 첨부하고 그 아래에 자신의 수결을 남겼다. 관원이라면 누구나 일심이라는 글자로 만든 수결을 자신이 처리하는 문서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의미로 남겼다. 일반적으로는 일심은 임금을 향한 충성을 뜻했지만, 선준에게는 백성을 위한 단 하나의 마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수결을 새길 때마다 이 결정이 백성에게 부끄럽게 않은지를 되새겼다.(396쪽)

 

다소 가볍고 흥미위주의 내용인 듯싶지만, 소설은 이처럼 소름 돋는 감동적인 구절들이 많다. 작가가 꿈꾸는 나라는 이러한 진짜 지도자들이 세워지는 나라다. 백성들의 힘겨움과 눈물을 외면치 않는 진짜 지도자들, 진정한 충성은 백성들을 향한 것임을 아는 그러한 진짜 지도자들이 세워지는 조선을 이 땅에서 여전히 꿈꾸고 있다. 거짓 각신들이 판치는 나라가 아닌 진짜 조선을. 독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고. 이제 작가가 꿈꾸는 새로운 조선을 기대하며 2권을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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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위해 산다
더글러스 프레스턴.링컨 차일드 지음, 신선해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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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프레스턴과 링컨 차일드(둘은 콤비 작가로 이미 10여 편의 베스트셀러를 공동 집필했다고 한다)의 신간 소설 『죽기 위해 산다』는 마치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하면 산다)이란 말을 떠올리게 되는 소설이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첩보원(정식 첩보원이라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기도 하지만.)이기 때문이다. 시한부 인생이기에 목숨을 도외시 않고 달려들기에 오히려 임무를 잘 수행하게 되는 그런 모습, 정말 생즉사 사즉생을 그대로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

 

소설은 기드온 크루의 어린 시절(1988년, 12살)부터 시작한다. 평범한 연구원이었던 아버지가 인질극을 벌이고 현장에서 사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그 때의 사건부터. 국가기관의 연구원이었던 아버지가 국가를 배신하고 인질극을 벌이다 현장에서 사살 당하였다. 그리고 이 일은 기드온 일생에 낙인이 되어 삶을 힘겹게 만든다.

 

이제 소설은 8년을 건너뛴다. 어머니의 임종 직전 상황으로. 청년 기드온(20살, 1996년)은 죽음을 앞둔 어머니에게서 놀라운 말을 듣게 된다. 국가의 반역자인 줄 알았던 아버지가 실상은 국가 첩보 프로그램의 오류를 잡아냈고, 이 문제를 보고하였지만, 상부에서 묵살함으로 26명의 비밀첩보원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 뿐 아니라, 이 모든 일을 기드온의 아버지에게 덮어 씌워 사살하였던 것. 어머니는 죽음 직전 이 사실을 밝히고 복수를 당부한다.

 

이제 복수를 위해 준비하던 세월을 건너 뛰어 소설은 현재 복수를 앞둔 주인공으로 넘어 온다. 그 동안 복수를 위해 착실히 대학에 다니고 박사가 되어 국가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기드온은 휴가를 내어 통쾌한 복수를 진행하게 된다. 이런 복수 장면이 참 통쾌할뿐더러, 기드온의 철두철미하며, 빼어난 능력이 돋보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는데, 기드온에 접근해 오는 사람들이 있다. 기드온의 실력을 인정하며 비밀 첩보활동을 맡기려는 것. 기드온은 이제 정식 국가 기관은 아니지만, 국가가 인정하는 비밀 기관의 첩보원이 되어 임무를 실행해나간다. 이번 임무는 중국에서 망명하는 중국 과학자가 만든 비밀 무기 자료를 회수하는 것. 하지만, 과학자는 기드온의 눈앞에서 교통사고의 희생자가 되고, 이 일을 진행하는 가운데, CIA 요원, 그리고 모두가 맞서길 두려워하는 엄청난 살인 병기 등과 얽히게 된다. 일개 과학자가 과연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일개 과학자라고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드온의 감춰진 전직은 뛰어난 도둑이었으니 말이다. 미술관을 통째로 털었던 전력이 있는. 게다가 오랜 세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갈고 닦은 변장술이 큰 무기가 된다. 무엇보다 큰 무기는 기드온은 앞으로 1년 정도밖에 살 수 없다는 것. 수술도 할 수 없는 뇌혈관 이상으로 기드온은 주어진 시간 동안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다 어느 한 순간 죽게 될 운명.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야말로 기드온의 가장 큰 무기이다.

 

기드온은 분명 놈의 두려움을 감지했다. 놀랄 일은 아니다. 놈도 인간이라는 증거일 뿐. 반면 기드온 자신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여기가 막바지다. 이 굴뚝에서 살아 나갈 방법은 없다. 그게 뭐 어쩌란 말인가? 이러거나 저러거나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데.

그 생각이 오히려 묘한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노딩 크레인(절대 살인 병기인 사람)이 절대 알지 못하는 비밀무기를 손에 쥔 셈이었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강격한 무기를.(397쪽)

 

그렇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야말로 가장 무서운 자다.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한부 인생’ 기드온 크루가 펼치는 첩보 활동이 재미나다. 긴박하게 진행되면서도 탄탄한 구성과 때론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배경설명 등이 돋보인다. 마치 냉전 시대의 첩보 영화를 보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뭐니 뭐니 해도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죽음을 초월한 기드온의 자세가 아닐까? 죽음을 앞둔 시한부 인생이라는 점. 사실 이것이야말로 기드온이란 캐릭터에게 유일한 단점이다. 하지만, 이 단점이 오히려 엄청난 저력으로 발휘되는 역설을 소설은 보여준다.

 

또한 세상을 뒤엎을 엄청난 무기, 세상을 정복할 만한 엄청난 무기의 실체를 알게 된 기드온이 그 무기를 처리하는 방식도 멋지다. CIA도 FBI도 어느 누구도 모르던 이 신무기란 다름 아닌 ‘실온 초전도체’였다. 이것이 실용화 되면, 세계에서 소실되는 전력량의 99%를 절감할 수 있는 엄청난 물건. 아니, 현재 전기 사용을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면, 99배의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이러한 엄청난 신 재료를 손에 넣는 자는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반대로 이를 없애길 원하는 석유 강국들도 있겠고. 과연 이 엄청난 재료를 손에 넣은 기드온은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그 처리 방식을 보면, 기드온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들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것을 손에 넣으려는 세력도 있고, 자신들의 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것을 폐기하려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세상을 유익하게 할 이것을 무상으로 공개하려는 자들도 있다. 여러분이라면 이들 누구와 손을 잡겠는가? 기드온의 결정이 멋지고 감동스러운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모두가 외면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결정.

 

현 시대 극이면서도 마치 냉전 시대의 첩보물을 보는 것 같은 신나고 재미난 소설이다. 기드온의 또 다른 활약을 만나 볼 수 있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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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아이스
홍지화 지음 / 작가와비평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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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들의 경우, 어떻게 저렇게 많은 책들을 써낼 수 있을까 싶은 분들이 많다. 예를 들면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경우, 평생 500여권의 책을 썼다고 한다. 그것도 그저 그런 내용의 책들이 아닌 책들을 말이다. 분야 역시 소설, 천문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신화, 종교, 심리학 등 그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이렇게 많은 책을 써낼 수 있다니, 과연 그분은 평소 책을 읽고 연구할 시간이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아시모프 정도는 아니더라도, 완성도 있는 소설들을 끊임없이 출간하고 있는 소설가들도 참 많다. 이렇게 엄청난 다작 활동가들이 많은 시대에 20여년에 걸쳐 창작활동 한 단편 9편을 모아 비로소(?) 한권의 소설집으로 출간한 작가가 있기에 어쩌면 더욱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바로 홍지화 작가의 『드라이아이스』란 소설집이다. 이 소설을 내며, 작가는 “소외당하고 외로운, 그래서 상처뿐인 현대인들의 가슴앓이를 그리려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럴까? 9편의 소설은 각기 시대적 배경의 차이가 있고, 주인공들이 처한 환경에도 차이가 있음에도 공통되게 느껴지는 감정은 아픔, 먹먹함, 분노, 무엇보다 결코 좁혀지지 않는 인생의 한계의 벽, 그 한계의 두꺼움이다. 그렇기에 인생의 무게 앞에 우리의 무력함이 더욱 도드라진다. 가정의 깨어짐은 예사롭고, 사랑은 버림받고, 마치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여인네의 삶도 이야기한다. 빼앗기고, 당하고, 취소된 인생들. 아무리 애써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인생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들. 어쩌면 우리네 삶이 이처럼 힘겹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삶의 힘겨움에 대한 작가의 오랜 관찰과 고민이 오롯이 녹아 있는 소설들이기에 참 귀하게 느껴진다.

 

물론, 아쉬움은 대체로 그 힘겨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기에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만난 삶의 진실일 수 있겠다. 어쩌면 삶이란 아무리 희망을 품고 살아가더라도 여전히 그 희망이 채워지기보다는 아무리 애써도 여전히 당하고 빼앗기며 깨어지며 비게 되는 인생이기에 그럴게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임에도 도리어 헛헛한 가슴을 뭔가가 채워간다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안에 삶을 대면하는 작가의 통찰력과 함께 진정성이 묻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역설적이게도 절망과 극단의 결말을 통해 희망을 채워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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