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야방 : 권력의 기록 1 랑야방
하이옌 지음, 전정은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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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창시절, 빠질 수 없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무협지다. 왜 그리 무협지가 재미있던지, 참 무던히 많이 읽었다. 몇 질이 아닌, 한 벽 두 벽 단위로 말할 정도로 말이다. 동네 만화방엔 더 이상 읽을 무협지가 없어, 옆 동네 만화방 두어 곳을 기웃거릴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의 절반만 공부했더라도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무협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보다 더 과장되고, 더 황당하며, 더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끌리게 된다. 그러다 만난 정통무협소설이 바로 김용의 소설들이다. 엄청 뻥이 심한 무협지에 길들여진 나에게 김용의 무협소설은 처음엔 너무 시시하고 담백했다. 그런데, 점차 자극적이진 않으면서도 묘한 매력을 발견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게 만드는 뭔가가 말이다. 결코 무협소설을 폄하할 수 없을 만큼 무협소설의 격조를 세운 사람이 김용일 게다.

 

마치 김용의 작품마냥 격조 있는 무협소설을 만났다. 신진 작가 하이옌의 『랑야방』1권이다. 작가는 대학 졸업 후 건설회사에 다니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렇게 쓴 소설을 2011년 중국 인기 웹사이트에서 연재하기 시작하였는데, ≪랑야방≫의 인기는 책 뿐 아니라 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54부작 드라마로 제작·방송, 50개 도시 시청률 1위를 했다니 그 인기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케 한다. <중화TV 개국 이래 최고 시청률 갱신, 국내 ‘중국드라마 열풍’을 몰고 온 수작>이란 선전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드라마를 보진 못했지만, 책으로 만난 『랑야방』은 과연 인기를 끌 법한 내용이다.

 

주인공 매장소의 원래 신분은 황제의 조카이자 적염군 소원수 신분인 임수다. 하지만, 정치판의 희생양이 되어 12년 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당시의 사건으로 무공을 잃고 병약한 몸이 되었지만, 천하제일 대방파인 강좌맹의 종주가 되어 돌아온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랑야방’은 천하를 움직이는 인재들의 순위를 기록한 문서다. 최고정보조직인 랑야각이 해마다 이 랑야방을 발표한다. 천하 10대 고수, 천하 10대 방파, 천하 10대 부호, 천하 10대 공자, 천하 10대 미인. 이렇게 다섯 분야 50명의 순위를 말이다. 이 가운데 천하 10대 공자 순위 1위가 바로 매장소다. 아울러 매장소는 천하 10대 방파의 1위인 강좌맹의 종주다. 이뿐 아니다. 랑야각은 태자의 요청에 의해 천하를 얻게 해줄만한 재사를 지목하기에 이르는데, 그렇게 지목된 사람이 바로 매장소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를 얻는 자, 천하를 얻을 것이다!”란 말이 나오게 된다.

 

이런 매장소가 금릉에 왔다(소설의 무대인 대량제국은 가상의 나라다.). 이에 금릉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차기 황제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태자와 예왕의 러브콜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이들이 모르는 게 있다. 매장소가 바로 적염군 소원수인 임수임을 말이다. 그리고 적염군을 몰살시킨 그 원흉들(태자와 예왕 모두 이에 속한다.)을 향해 칼을 갈고 금릉으로 오게 되었음을 말이다. 과연 매장소의 복수는 어떻게 진행될까? 그리고 성공하게 될까?

 

소설은 무협소설이면서도 마치 추리 스릴러 소설을 읽는 느낌도 갖게 한다. 무협소설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소재 가운데 하나인 무술대회로 소설이 시작된다. 또한 ‘랑야방’이란 문서 자체가 순위매기기를 좋아하는 무협소설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그럼에도 일반 무협소설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하고 재미난 부분인 무공 전수에 대한 내용이 거의 없다. 기연을 통해 내공을 얻고, 비급을 얻어 무공을 연마하는 내용들이 그런 내용들이 말이다(1권에서 그렇다. 아직 2권을 읽지 못했으니 나중은 모르겠다.). 그러니 보편적 무협소설과 유사한 요소들이 있으면서도 차별화되어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복수를 위해 마치 탐정이 옛 사건들을 끄집어내 공론화시키고 상대를 압박해 나가는 부분들은 마치 추리소설과 같은 느낌도 갖게 한다.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태자와 예왕의 권모술수, 그리고 그 사이에서 복수를 행하며 권력을 잡으려 하는 매장소의 이야기. 여기에 사내들의 가슴 뭉클한 우정과 의리, 옛 정혼자와의 애정 문제까지. 상당히 두툼한 분량(571페이지)임에도 한 번 잡으면 중간에 내려놓을 수 없고 내려놓아도 자꾸 생각이 나 끝까지 읽어야만 하는 중독성이 강한 무협소설이다. 2권은 과연 언제쯤 만나게 될까 궁금했는데, 아니 벌써!!! 2권이 나왔다. 예약판매를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며칠 후(7월 20일)면 만날 수 있다. 천하를 얻고자 하는 자, 빨리 2권을 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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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2016-07-1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요약을 잘 해주셔서 더 기대되는 책이네요.
감사합니다.

중동이 2016-07-19 00:0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무협소설, 참 재미나네요.
 
모나리자 바이러스
티보어 로데 지음, 박여명 옮김 / 북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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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에서 엄청난 사건들이 벌어짐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 참가자들이 탄 버스가 납치되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미녀들. 그리고 얼마 후 추악한 괴물로 변하여 한명씩 돌아오는 미녀들. 또한 지구 곳곳에선 벌떼들이 의문의 떼죽음을 당한다. 지구상의 벌들이 사라지면 인류는 4년 만에 멸망할 것이라 아인슈타인이 말했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또 한 편으로는 황금비율로 유명한 라이프치히 시청사 성탑이 폭발하게 되고, 컴퓨터 바이러스가 기승함으로 모든 영상이 파괴된다. 사진 속의 얼굴이 괴물로 변하게 되는 것. 이를 누군가 ‘모나리자 바이러스’라 부른다.

 

이런 엄청난 사건들 속에서 신경미학자인 헬렌의 딸(16세, 거식증 환자)이 실종된다. 뿐 아니라 세계적 갑부인 파벨 바이시가 실종되었는데, 이 실종이 헬렌과 연관 있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파벨 바이시의 아들 파트리크 바이시로부터. 딸의 실종사건으로 인해 헬렌은 엄청난 음모의 소용돌이 속으로 조금씩 빠져들고 만다.

 

서로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바로 미의 파괴, 황금비율의 파괴, 그리고 미의 근원을 파괴하려는 음모로 말이다. 과연 이 사건은 어떤 결말을 향해 치닫게 될까?

 

‘댄 브라운의 귀환’이란 찬사를 받고 있는 티보어 로데의 『모나리자 바이러스』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못지않게 재미난 추리 스릴러 소설이다(물론, 『다빈치 코드』만큼 논란의 중심에 서기엔 주제 면에서 부족함이 있지만, 흥미 면에선 개인적으로는 『다빈치 코드』보다 더 재미있다고 느껴진다.).

 

지구 반대편에서 각기 실종된 재벌과 16세 소녀의 실종으로 인해 아버지와 딸을 쫓는 두 사람 파트리크와 헬렌. 그리고 미녀들의 실종과 벌들의 죽음을 쫓는 FBI 요원 그렉 밀러. 이들이 조금씩 사건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범인이 누구인지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밝혀진다. 하지만, 범인이 금세 밝혀짐에도 소설의 몰입도와 긴박감 그리고 흥미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두꺼운 분량의 책임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는 소설이다.

 

소설은 중세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역작 가운데 역작인 <모나리자>에 대한 놀라운 접근을 한다.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모나리자>는 다름 아닌 미에 대한 바이러스의 근원이라고 말이다(이는 소설 속에서 ‘모나리자 바이러스’라 불리는 컴퓨터 바이러스와는 구별된다.). 모나리자가 다름 아닌 미(美)에 대한 잘못된 정서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모나리자>가 밈(Meme)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현대인들로 하여금 성공하기 위해선 날씬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 아름다움이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편만하게 한다. 이로 인해 거식증 환자가 생기고, 성형이 난무하게 된다.

 

아름다움을 쫓는 세상의 광기가 다름 아닌 <모나리자>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 이 사람이 바로 파벨 바이시란 자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모든 미를 파괴하려 한다. 모나리자까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500여 년 전에 마치 신만이 부여할 미를 창조해냈다면, 파벨은 신이 되어 미를 파괴하려 한다.

 

이처럼 소설은 아름다움에 대한 광기가 끌고 간다. 아름다움을 최고의 선으로 삼고 쫓는 광기가 있다면, 아름다움을 파괴함이 신이 허락하는 소명으로 삼는 광기. 물론, 이런 광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챙기려는 광기가 또한 숨어 있다.

 

미를 숭배하고 미를 쫓는 광기가 이미 바이러스처럼 만연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미를 파괴하고 황금률을 파괴하려는 광기와 이에 맞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재미와 함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 우리 역시 소설이 말하는 <모나리자 바이러스>에 오염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말이다. 아름다움이 권력이 되고, 산업이 되며, 힘이 되는 세상. 그리고 그러한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영혼까지 팔아 치울 수 있는 광기를 보이고 있진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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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든 루스 - 제7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이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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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린 삼포시대, 오포시대를 넘어 칠포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처음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 그러던 그들은 이젠 인간관계와 내집마련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래도 좋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힘겨워도 꿈과 희망이란 것을 붙잡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젠 꿈과 희망마저 포기해야 하는 칠포시대란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힘겹다. 중년은 중년대로, 노년은 노년대로 힘겨움이 우리의 이웃이 되었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의 힘겨움은 언제나 유독 아프다. 한창 피어나야 할 시기이기에 더욱 그렇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포기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청춘이라니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 시대 젊은이들 삶을 소설 『담배를 든 루스』는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2015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얼룩, 주머니, 수염>이 당선된 후 장편 <담배를 들고 있는 루스 3>으로 제7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이 책 『담배를 든 루스』는 바로 그 수상작이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사람들 곁에 떠도는 사물을 본다는 주인공의 모습이 다소 판타지적인 요소가 곁들여져 있다(솔직히 왜 이런 설정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이 위에는 피아노가, 어떤 이 위에는 휴지통이. 이처럼 사람들 곁을 떠도는 사물을 보는 주인공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젊은이다.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한 아르바이트 숙련자(?)인 주인공. 지금은 <날씨연구소>의 직원이다. <날씨연구소>란 다소 괴상한 이름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대생. 이렇게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이유는 방세를 내고,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그토록 방세를 벌기 위해 일하느라 정작 힘겹게 얻은 방에 있지 못하고, 학비를 버느라 도리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점이다. 오늘 우리 곁에 이런 젊은이들이 어디 한둘이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젊음의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이 땅의 수많은 청춘들.

 

작가는 이들의 힘겨움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는 돈이 모이지 않는 게 일종의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는데, 어째서 늘 돈이 없는 걸까. 문장으로 써도 셈을 해봐도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돈이 없던 사람은 쭉 없을 수밖에 없다는 걸.(96-7쪽)

 

그 때 알았다. 돈은 처음부터 있는 사람만이 모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언제나 돈이 생기기 무섭게 집세를 내야 했고, 식료품과 생필품을 사야 했다. 조금 목돈이 모이면 등록금을, 책값을, 교통비를, 공과금을 내야 했다. 그래도 언제나 돈이 없었고 심지어 빚투성이였다. 돈은 나를 파이프 삼아 제멋대로 흘러 다녔다.(98쪽)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민중을 개 돼지로 인지하는 특권층 때문일까? 그네들의 신분, 그네들의 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과 힘 앞에 여전히 민중은 개 돼지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걸까? 수많은 아르바이트에 젊음을 바치면서도 여전히 허덕여야만 하는 걸까? 모를 일이다.

 

작가는 허황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칠포에 동참하라 말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위태로운 걸음을 걸어가고 있음이 고맙다. 여전히 우린 칠포 시대에 살아가겠지만, 그럼에도 우린 꿈과 희망 그리고 포기 사이에서 위태롭게 걸어가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이 그랬듯이, 오늘 우리는 우리가 써나가는 삶의 소설 속에서 그래야만 한다. 여전히 그렇게 걸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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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친구의 고백 소설Blue 5
미셸 쿠에바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나무옆의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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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자크 파피에는 고민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자크를 마치 없는 사람 취급합니다. 단, 쌍둥이 여동생이자 단짝인 플뢰르, 그리고 엄마 아빠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심지어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조차 자크를 싫어합니다. 자크가 스쿨버스에 미처 오르지 않았는데, 운전기사는 문을 닫아 버리곤 합니다. 수업시간에도 선생님이 질문한 문제를 알아 손을 들었는데도, 선생님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 말씀하시고요.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크를 없는 사람 취급합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답니다. 자크는 플뢰르의 ‘상상 친구’거든요. 자크는 오직 플뢰르의 눈에만 보입니다. 플뢰르가 만든 ‘상상’의 산물이니 말입니다. 이처럼 ‘상상친구’인 자크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풀어나가는 이야기의 방식이 참 기발하고 흥미롭습니다.

 

미셸 쿠에바스의 장편소설 『상상 친구의 고백』은 장편동화라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네요. ‘상상 친구’인 자크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과정에 왠지 가슴을 아려 옵니다. 자신을 진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자크, 플뢰르의 쌍둥이 오빠인줄 알았던 자크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을 때의 당혹감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당혹감이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해집니다.

 

그럼, 자크는 진짜가 아닌 걸까요? 동화는 말합니다. 비록 상상 속에 존재하는 존재임에도 진짜라고 말입니다.

 

진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진짜’가 아닌 게 아니야.(95쪽)

 

자크는 자신이 ‘진짜’ 존재한다면, 누군가의 상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 자유로운 존재를 꿈꿉니다. 이렇게 자유를 찾는 자크의 여행이 시작됩니다. 과연 자크는 자유를 찾게 될까요?

 

‘상상 친구’는 가상의 존재입니다.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입니다. 하지만, 실존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아이들의 상상이 있는 한 실존하는 존재입니다. 아니, 동화 속에 등장하는 ‘상상 친구’는 자신을 상상해 내는 누군가의 상상이 마르게 된다고 소멸되는 존재는 아닙니다. 다른 또 다른 누군가, ‘상상 친구’를 필요로 하고 상상하는 아이에게로 속하게 됩니다. 그래서 동화 속에는 ‘상상의 재배치 사무실’이 있답니다. 이곳에서 새롭게 어린이를 재배치 받아 새로운 아이의 ‘상상 친구’가 되는 거죠.

 

‘상상 친구’는 가상의 존재임에도 실존하는 존재이며, 아울러 인격이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상 친구’가 눈에 보이는 분들이라면 여전히 동심을 간직한 맑은 영혼이겠죠?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상상 친구가 보이나요? 아쉽게도 전 안 보이네요.^^

 

자유를 찾아 여행을 떠난 자크는 결국엔 자유를 찾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자크가 처음 생각했던 자유는 아닙니다. 여전히 누군가의 상상에 의해 존재하는 그 한계성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자크는 여전히 다른 누군가의 상상 친구로 남게 됩니다. 이렇게 여러 아이들의 상상 친구로 존재하면서 자크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합니다. 바로 이런 인정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거죠.

 

뿐 아니라 커가면서 상상력을 잃어가는 아이들도 자크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자크는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플뢰르에게로 돌아갑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제 플뢰르는 ‘상상 친구’가 필요 없는 나이가 되었고, 플뢰르의 동생의 상상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자크는 알게 됩니다. 플뢰르가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고 있음을 말입니다. 이 기억함이 동화를 한 없이 훈훈하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이런 훈훈한 결말은 또한 우리에게 ‘기억’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합니다.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지면 그 존재는 누구일까? 주변에 자신의 역할을 생각나게 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 존재는 누구일까? 또 후회할 기억이 없거나 자신을 따뜻하게 하는 기억이 없다면 그 존재는 누구일까?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면 그 존재는 무엇일까? 또 어떤 형태를 취할까?(234쪽)

 

오늘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어떻게 소멸되어지며, 또는 남게 되는지를. 그건 바로 ‘기억’을 통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행복한 기억들. 때론 아프지만 소중한 기억들. 이 기억을 통해 우린 누군가를 존재하게도 소멸시키기도 합니다. 오늘 우린 누굴 소멸시키고 있는지, 또 누굴 존재케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상상 친구의 시점으로 접근함이 참 기발한 동화입니다. 이야기도 재미날뿐더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동화이기도 합니다. 예쁘고 멋진 문장도 많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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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유령 - 유령에 대한 회고록
존 켄드릭 뱅스 지음, 윤경미 옮김 / 책읽는귀족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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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정말 존재할까? 아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까? 만약 존재한다면, 그리고 누군가 특정인의 눈에 보이는 존재라면 물질적인 실체를 가진 걸까? 아님, 단순한 시각적인 형태에 불과한 걸까?

 

우린 유령이란 존재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증명이 쉽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다. 반면 증명에 쉽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 아울러 증명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유령이라면 떠오르는 보편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여기 유령에 대한 소설이 있다. 『내가 만난 유령』이란 제목의 소설인데, 「유령에 대한 회고록」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의 책이다. 그러니 19세기의 책이라는 말이다. 20년 전의 책이라고 해서 고리타분하리라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소설은 신선하다. 120년 이라는 세월의 간극, 19세기의 책이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말이다. 무엇보다 유령이란 소재를 통해 색다른 유쾌함을 전해주고 있다. 가히 유령에 대한 고전적 책이 될 수 있겠다.

 

책을 읽으며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다. 글의 형태가 마치 작가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들을 전해주는 형식이어서, 유령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담아낸 에세이 같기도 하고, 또는 저자의 경험담 같기도 하다(부제가 「유령에 대한 회고록」이니 더욱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유령에 대한 논문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책의 실체는 유령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그러니 사실은 픽션임을 감안하자.

 

유령에 대한 도합 7편의 단편 소설들이 요즘 장마로 인해 처지는 기분에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유령이라고 하면 오싹한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작가 역시 유령이 나타날 때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느낌이란 ‘신경을 바짝 곤두서게 만드는 싸늘한 기운’이라고 말한다. 이런 기운이 갑자기 온 몸을 감싸게 된다면 그건 유령이 내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마치 영화 <식스센스>에서처럼 말이다(어쩌면 영화 <식스센스>가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지금 갑자기 여러분 주변의 공기가 서늘해지면서 오싹한 느낌이 난다면 분명 유령이 여러분 곁에 나타났다는 반증이다.

 

그러니 유령이라면 오싹한 느낌, 서늘한 느낌이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는 생각인가 보다. 그럼 이런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니, 이 책의 내용들이 오싹한 즐거움을 주는 책일까? 물론, 때론 오싹함도 없진 않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유쾌하다. 오싹함을 동반한 유쾌함이다. 예를 들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무더운 여름밤 자꾸 유령이 나타난다. 여지없이 주변 공기는 차가워진다. 이런 오싹함을 이용하여 저자는 무더운 여름밤을 날마다 시원하게 보냈단다. 이런 고마운 유령이라면 열대야로 고생할 때, 찾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유령을 만난다는 공포를 이겨낼 수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고마운 유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집요하고 못된 느낌을 갖게 하는 유령도 있다. 「뜨내기 유령 쫓아내기」에 등장하는 유령이 그렇다. 이런 못된 유령에게 당하기만 하는 주인공이 안쓰러워 독자도 함께 유령을 처치하길 바라기도 한다.

 

재미난 것은 저자는 독자들이 저자의 말을 믿지 못할까 거듭 자신의 말이 진실함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이런 부분이 도리어 픽션임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그 일은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일어났고, 지금부터 나는 그 일을 사실 그대로 정확히 기술하려 한다. 비평가들은 종종 나를 다듬어지지 않은 허황된 작가라고 비판하곤 하는데, 미안하지만 이는 아주 틀린 이야기다. 물론 내가 겪은 경험들은 내 머릿속을 거치면서 상상력이 일부 가미되기는 했지만, 그런 부분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41쪽)

 

나는 사실주의자들의 이상이라 할 만큼 성실하고 정확하게 글을 써왔으며, 나 자신은 스스로에게 진실한 사람이라 여기는 동시에 사실주의 학파의 충실한 추종자라 자부한다.(42쪽)

 

그럼, 사실주의 학파의 충실한 추종자가 전하는 유령에 대한 유쾌하고 재미난 이야기들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분명 이번 여름을 시원하게 해줄 것이다. 오싹한 시원함과 유쾌한 시원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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