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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평점 :
국내에도 탄탄한 독자층을 갖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등단 35주년(2020년 기준)을 맞아 발표한 신작 소설 『녹나무의 파수꾼』은 작가의 요즘 작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본격추리소설에서 사회파소설로, 다시 감동소설로 그 영역을 확장시켜나간 작가의 등단 35주년을 맞아 내 놓은 작품은 ‘감동소설’이라 볼 수 있다(물론 또 다른 신작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은 다르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하루하루 되는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레이토는 없는 놈이 되는 일도 없다고 불운의 아이콘처럼 되어 버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한 회사에서는 누군가의 실수로 벌어진 문제를 뒤집어쓰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만다. 웨이터로 취직한 곳에선 그곳 아가씨의 유혹에 넘어가 하룻밤을 보낸 일로 인해 잘리고 만다. 그 다음 취직한 회사에서는 제품의 하자를 속이는 회사의 모습에 고객에서 솔직히 하자를 밝혔다가 퇴직금은커녕 일한 봉급도 받지 못하고 내쫓기고 만다.
그러다 결국 절도행각으로 붙들린 레이토, 꼼짝없이 전과자가 되어 형을 살아야할 위기 앞에 그를 향해 내민 손길이 있었다. 레이토의 이모라는 여인이 등장한 것. 자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상류층 여인인 이모는 레이토에게 ‘월향신사’란 곳의 관리를 맡긴다. 보다 더 정확하게는 그곳에 있는 신비한 나무 녹나무의 파수꾼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녹나무에 들어가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신비한 나무. 과연 이 신비한 녹나무에 얽힌 소문은 진실일까? 녹나무의 파수꾼이 된 레이토는 그곳을 찾는 이들의 진심어린 모습에 점차 매료된다. 과연 이들이 한다는 기념은 무엇일까? 기념을 하는 시기는 그믐 즈음과 보름 즈음인데 두 시기의 차이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녹나무가 들어주는 소원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과연 녹나무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소설은 미스터리 소설이라기보다는 감동소설이다. 하지만, 미스터리적 요소가 없진 않다. 무엇보다 이 녹나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파수꾼이 된 레이토를 알아가게 된다. 녹나무의 파수꾼이 되었지만, 정적 녹나무의 효능도 어떻게 기념하는지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한다. 게다가 이모 역시 알려주지 않는데,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만 하며. 그렇기에 녹나무에 대한 것들을 알아가는 장면이 마치 추리과정처럼 느껴진다. 마치 오리무중에 빠진 범인을 추리하여 밝혀내듯 말이다.
여기에 또 한 사건, 레이토가 마음에 두고 있는 아가씨 유미의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이 불륜인지, 그리고 그가 녹나무에 와서 하는 기념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 역시 미스터리의 요소가 느껴진다.
하류인생인 레이토 앞에 찾아온 녹나무 파수꾼이란 이상한 직업, 이 일을 통해 레이토의 미래는 신비롭게 열리게 된다. 마치 녹나무의 또 하나의 능력인 양.
소설은 무엇보다 가족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녹나무가 효력을 발휘하는 대상은 가족이다. 그것도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혈연의 테두리 안에 가족의 의미를 축소시키진 않는다. 녹나무의 신비한 효력은 혈연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지만 그럼에도 소설은 이런 혈연을 뛰어넘는 가족의 신비 역시 보여준다.
녹나무가 가진 능력은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염원이다. 아니 어쩌면 이는 후대를 향한 기대와 바람, 희망의 전달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녹나무를 통해 가족 정신이 이어진다. 심지어 가족을 향한 마음과 감정도. 그렇기에 녹나무는 현실 속에 자리한 환상의 공간이다. 이러한 환상적인 공간을 통해, 상처 난 관계는 치유되어지고,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며, 허물어진 관계는 새롭게 세워져간다. 물론, 그 범위는 가족이란 한계가 정해져 있지만. 그럼에도 녹나무를 통해 전해지는 감동은 가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모든 독자에게 전해진다.
아울러 하류인생, 그저 하루하루 살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 여기는 극히 염세적인 한 청년이 성장해나가는 과정 역시 소설의 또 하나의 큰 힘이다. 결국 인생이란 어떤 인생도 존중받아야 마땅한 인생이며, 가치 없는 생명은 하나도 없음을 알려준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 당신 역시 마찬가지라는 속삭임, 이것이야말로 소설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힘이다.
『녹나무의 파수꾼』을 읽고 난 후엔 어쩌면 우리 안에도 이런 신비한 힘을 가진 녹나무 하나쯤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가족을 향한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 간절한 기대와 소망, 등을 전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녹나무’의 신비함을 발휘하지 않을까? 녹나무가 주는 감동은 책장을 덮은 후에도 여진처럼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