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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밀리건 - 스물네 개의 인격을 가진 사나이
다니엘 키스 지음, 박현주 옮김 / 황금부엉이 / 2007년 7월
평점 :
한번 생각해 보자. 3명의 여성을 납치,강간한 혐의로 체포된 피의자가, 일명 다중인격으로 불리는 '해리성 정체장애'를 앓고 있다며, 책임무능력을 주장한다면. 과연 당신은 어떤 판단을 할 것인가? 먼저, 간략한 법률지식을 알아야 한다. 범죄란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위법하고 유책한 행위로써, 구성요건해당성, 위법성, 책임이란 세가지 요건이 갖추어 져야 한다. 즉, 아무리 살인,강간을 했더라도, 책임능력이 없다면 처벌받지 않는다. 과연, 다중인격이란 '해리성 정체장애'를 인정할 수 있을까? 이름조차 생소한, 상식적으론 납득할 수 없는 저 장애를…
우리는 지금부터 '해리성 정체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빌리 밀리건의 삶을 소설의 형식으로 돌아볼 것이다. 일단 모든 가치판단을 자제하고, 소설의 내용은 차근차근 살펴가자. 23살의 빌리 밀리건은 대학가 연쇄 성폭행사건을 저지른 혐의로 체포된다. 피해자들의 증언, 빌리 밀리건의 집에서 발견된 피해자들의 물건들, 그리고 지문까지…검사는 그의 유죄를 당연시 한다 . 하지만 정신과 의사 '도로시 터너'는 빌리 밀리건을 상담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그녀는 빌리 밀리건의 변호사인 '주디 스티븐슨'에게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시빌'이란 책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시빌'은 16개의 인격을 가진 시빌 아델 메이슨이란 여성의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이라 한다. p.58참조) 빌리 밀리건이 다중인격이라는 것인가?
변호사인 주디 스티븐슨과 '게리 위웨이카트'는 빌리가 다중인격임을 확신하고, 이를 법정에서 주장하기로 한다. 주디와 게리는 여러 저명한 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상대방인 검사측을 포함한 그들 앞에서 다중인격이 발현되는 빌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평소 다중인격이란 것을 믿지 않았던 이들도, 다양한 인격이 발현되는 빌리의 모습을 보면 그가 연기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빌리는 책임무능력을 이유로 무죄로 풀려난다.
빌리의 몸 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여겨진 인격은 총 24명이다. 하지만 14명은 저자가 나중에 연구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낸 것이고, 재판당시에는 10명이 부각되었다. 간략히 살펴보자면, '빌리' 빌리는 핵심인격으로, 다중인격으로 괴로워 하며, 자주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주변의 다른 인격들이 그를 항상 잠재워 두려한다. '레이건' 레이건은 아주 거칠고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앨런' 앨런은 사기꾼으로 뛰어난 말솜씨로 협상을 주로 맞는다. 나머지 인물들은 직접 읽어보시길.
이제 슬슬 처음 질문에 답을 해야 할거 같다. 과연 '빌리 밀리건'은 해리성 정체장애를 겪고 있는 가엾은 환자인지, 아니면 처벌이 두려워 연기하는 사기꾼인지.
다소 맥 빠진 답이지만, 판단을 유보하겠다.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기엔 주어진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부분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모두 존재한다. 의심스러운 부분은 빌리에게 발현되는 인격들이 상황에 따라 급조된다는 점이다. 초반 레이건, 앨런등이 주로 부각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강간사실을 부인한다. 그렇기에 과연 강간은 어떤 인격이 주도했냐가 문제 되었는데, 이때까지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은 레즈비언 '에이들라나'가 갑자기 등장한다. 그리고는 그녀가 강간을 했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연결된다. 수많은 학자와 법률가 앞에서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에이들라나'가 갑작스레 등장해서 강간 범행을 고백하는 부분 역시 의심스럽다.
또 있다. '선생'이란 인격이다. 사건 초반 '선생'이란 인격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를 만나고 부터, 다른 인격들을 통합하는 조정자로써 선생이 부각된다. 다른 인격을 통합한다는 것은 상당히 비중있는 역할인데도 지금껏 숨어있다가 필요할 때, 갑자기 드러나는 그 공교로움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다양한 인격은 연기를 통해 꾸며낼 수 있다.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24명이란 인물을 통일성있게 연기한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아니다. 24명의 인격중 실제 발현되는 인격은 소수이다. 다른 인격은 부끄러움을 탄다던지, 어리다던지 하는 이유로 부각되지 않고, 일부 핵심 인격만이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실제 연기해야 하는 인격은 24명이 아닌 5~7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저 정도는 연기를 통해 충분히 꾸며 낼 수 있다.
빌리는 남성들을 극도로 꺼리고 주로 여성들과 소통하려 하는데, 그건 어린시절 새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어린시절 학대가 해리성 정체장애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빌리의 주장만으로 가정내 아동학대 문제로 접근하는건 성급해 보인다. 새아버지는 언론을 통해 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렇듯 논란이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의 주장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이 책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는 상황.
이제, 빌리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살펴보자. 가장 공감이 갔던 건, 빌리의 행동이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각 인격들이 특성에 따라 일관성 있는 행동을 보이는 건 놀랍다. 사건 발생 전에 해리성 정체장애의 증상으로 볼 수 있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어린시절 친구들과 교사의 증언역시 빌리의 주장에 힘을 더해준다. 또한 해당분야 전문가들과 검사, 판사들 모두가 빌리를 보고나서는 그가 연기를 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그에게 호감을 가진 점 역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제 좀 정리해 보자. 위에 이야기한 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빌리 밀리건>을 읽고 느낀 점이다. 이 점은 분명히 하고 싶다. 실제 빌리 밀리건을 보지 못한 내가 '빌리 밀리건'이란 한 인물에 대해 언급하는 건(그것도 생존해 있는) 무리가 있다.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실제로 빌리 밀리건을 보지 못하고 이야기만을 접한 지금은 그의 해리성 정체장애 주장에 회의적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 유보적이다. 실제로 해리성 정체장애를 겪고 있다고 주장하는 환자를 보기전까지. 빌리를 보기 전까지.
* 책 뒤편에 빌리 밀리건의 최근 근황과 편집후기가 실린, 편집자의 '뱀다리^^'가 있는데, 인상적이었다. 저자나 역자의 후기, 평론가의 해설과 평론은 접할 기회가 있지만, 책을 만드는 편집자의 생각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이런 편집자분들의 후기가 계속 실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