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훔쳐라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평점 :
품절


작가 박성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소설집 <우리는 달려간다>를 통해서였다. 몽롱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가 마음에 들어 마음속에 새겨두었는데, 갑자기 그의 다른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이상 이상 이상>, <나를 훔쳐라>, 이렇게 두편의 소설 전부 구입했다. 다행히 출간된지 10년이 넘은 <이상 이상 이상>이 절판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정말 감탄했다. 이런 멋진 작가를 왜 이제까지 알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와 더불어, 일본소설만 탐닉해 오던 내 자신을 돌아봤다. 우리 주변엔 이렇게 멋진 작가가 있었던 것이다. 가장 놀라운 점은 '하리망당' ' 아치랑거리다' '흥감스레' '훙뚱항뚱' '새근발딱' 같은 멋드러진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껏 젊은작가들 중, 박성원 작가처럼 우리말을 아름답고 멋지게 구사하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저자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댈러웨이의 창] 세든 청년의 여자친구에게서 느끼는 묘한 감정과 댈러웨이를 통해 서술되는 철학적 사유가 인상적이었다. 이층에 세든 청년, 그리고 그를 찿아온 여인. 화자는 이층으로 사라진 그들의 행방을 쫓으며, 외로움을 느끼는데 그 심정이 공감이 갔다.(p.13-14참조)

댈러웨이. 댈러웨이는 사진을 직접찍기 보다, 피사체에 반사된 모습을 표현해 냈던 작가라 한다. 그의 사진은 평범해 보이지만 고도의 기술과 주제 의식이 들어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화자는 청년을 통해 댈러웨이를 알게 되고, 댈러웨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지만, 곧 그를 잊기로 한다. 댈러웨이와 위에서 언급한 여인은 오버랩된다고 이해했는데, 다음 서술을 보자. "애정이 증오로 치닫고, 또 그리움이 혐오로 쉽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댈러웨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상하게 구토가 속을 우비고 올라왔고, 댈러웨이 사진을 응용한 광고를 보면 가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p.27)

댈러웨이란 인물은 과연 실제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정말 사실인가? 사실이란게 존재하긴 하는 것인가? 나중에 밝혀진 진실은 그만큼 충격적이다.

[중심성맥락망막염] 구더기사내, 화자, 그리고 친구의 술자리 대화(상담)가 핵심내용인데, 그들 대화의 깊이는 만만치 않다. 구더기사내? 무릎의 상처가 썩어가지만, 항생제 거부반응때문에 항성제를 사용할 수 없는 사내는 썩은 살만을 먹어치우는 구더기를 무릎에 넣은 것이다. 자기 몸속에 구더기라니...끔찍하지 않을까? 부끄럽지 않을까? 아니다. 사내는 당당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회충이나 십이지장충 같은 것들에 비하면 이 구더기는 얼마나 이로운 생물입니까? 회충은 생살을 뚫고 기생하면서 온갖 질병을 일으키지만 제 몸 안에 있는 구더기는 생살을 먹지 않습니다. 오직 썩은 부위만 먹을 뿐이라 이 말입니다. 회충이 얼마나 독한 놈들인지 모두들 잘 아시죠? 수컷은 온몸이 생식기로 이루어져 있고 또 암컷은 한 번에 20여만 개의 알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 중에 이처럼 섹스만 밝히는 더러운 것들은 또 없을 겁니다."(p.38-39)

구더기사내는 중심성맥락망막염이란, 병에 대해 상담을 하고자 한다. 저 병은 망막이상으로 사물의 일부가 보이지 않는 병이다. 볼펜을 들고 있는 손을 바라보면, 손만 보이고 볼펜은 보이지 않는거 같은…. 이야기전개와 무관하게, 난 처음 '이 병이 그렇게까지 고민할 병인가'란 생각을 했다. '걸리면 죽는 불치병이 널렸고, 죽음보다 심각한 고통을 주는 병도 있는데 말야' 하고.

하지만 다음 서술을 보자. "제가 이 병을 겁내고 또한 지독하다고 느끼는 것으 제가 보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사물을 보거나 혹은 책을 읽더라도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확인하지 않으면, 제가 본 것이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점 말입니다."(p.44) 그렇다. 자신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는 삶은, 진실 저 편에 있는 삶일 것이다. 왜 그가 힘들어 하는지 알았다.

저자는 이런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과연 자기가 본 것을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중심성맥락망막염'을 앓고 있지 않다면, 사물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저자는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저런 질문을 재기발랄하고 멋지게 부각시킨다. 짧은 단편이지만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가히 충격적이다. 저런게 능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리뷰에는 단 두편만 소개했지만, 수록되어 있는 단편 모두가 하나하나 음미해야할 가치를 가진다. 아름다운 우리말과 함께, 저자가 던지는 깊이있는 메시지를 가슴으로 느껴보길 바란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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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8-0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댈러웨이의 창을 읽고 정말 충격을 받았지요. 지금도 종종 생각나는 단편이에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쥬베이 2007-08-02 19:53   좋아요 0 | URL
정말 충격받을만한 작품이에요. 감사합니다^^

turnleft 2007-08-0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이 책도 보관함으로~

쥬베이 2007-08-03 18:34   좋아요 0 | URL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아무래도 소장해야 할거 같아,
주문했습니다. 두고두고 읽게요 ㅋㅋㅋ

프레이야 2007-08-03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 박성원이라는 작가를 소개받고 갑니다. 꾸욱^^
순우리말의 재발견도 의미있구요. 담아갑니다.

쥬베이 2007-08-03 18:35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우리말이 제대로 쓰였습니다.
해설을 읽어보니, 저자는 우리도 생소한 우리말을 통해 '낮설기하기'의 효과까지 노린거 같다고 하더군요.

네꼬 2007-08-03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쓰시면 안 읽을 수가 없잖아요. =_=

쥬베이 2007-08-03 18:35   좋아요 0 | URL
꼭 읽어보세요^^ 괜찮으실 거에요~~

302moon 2007-08-0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소설집. 여기서 보니, 반갑습니다. 저도 그때, 우리말 활용에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

쥬베이 2007-08-04 10:0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