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식민지 시대를 겪은 화가들 


 이인성, 김기창의 작품, 그리고 입상작품들의 시장묘사 장면들을 포함하여 전통을 산입하는 일련의 그림들에서 뭔가 매끄럽지 않은 느낌들이 있었다. 그리고 위 화가들의 청, 주황색의 그림들은 색감마저 도통 어떤 흐름을 갖는 색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 저작은 서로 주고 받은 영향들을 발굴해내서 그런 흐름들의 빈 자리를 채워준다. 다행히 칼라화보의 선명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일련의 흐름들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중간중간 석류제목의 그림을 설명하는데 자꾸 감이라고 표현하거나 화가들을 다루면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설명이나 장면이 거슬린다. 그리고 오탈자도 그렇다. 다시 증보판이 나온다면 깔끔하면 더 좋겠다싶다. 저자의 결론처럼 뭔가 빠지거나 지운 퍼즐들은 제대로 맞춰져야 온전한 판단으로 진일보할 수 있겠다싶다.















2. 불안과 공포


독신교사로서 삶을 꾸려나가는 일은 쉽지 않다. 지금이 아니라 노후까지 이어진 불안은 지금 누리는 것의 안정감을 두텁게 하지 못한다. 이 땅 위에 살아지는 것들은 미물은 물론 자본가에서 일용직까지 아픈자, 아플자 모두 복을 구가하지 못한다. 한국 땅위에서 하위 20%를 제외하곤 세계 상위 10%의 삶을 누린다는 대목이 나온다. 잘 살아간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각자의 일상들은 사연을 가지고 있고 다 다르다.  또한 그것들을 타넘어 안정을 취하는 방법들도 다 다르다. 명상과 불교, 성당, 기독교 등등 뫔을 기대는 방식 또한 각각이다.


지금은 아무도 가지 않지만 서로 가다보면 이 책처럼 가능성은 열리기도 한다. 팃탯폿의 <협력의 진화>라는 순방향의 고리에 안착하는 것 역시 우연이면서도 운명인 듯싶다.




3.감정워치 


죽음의 철학이 아니라 탄생의 철학이 필요하단 말을 반복해본다. 감정덩어리. 스피노자의 오백원짜리 동전 역시 드라마에서는 별반 큰 역할을 못한다는 반론이다. 감정에 대한 적확한 표현과 응시역시 드라마를 아우르는 주인공남녀로 대비할 때 묘사가 떨어진다는 응답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천개의 고원에 빗댄 천개의 문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라고 건넨다.  철학의 바탕을 녹아들게 하려는 의도와 대본 구성의 효과는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같이 나눈 얘기들에서 미진한 것들이 텍스트사이로 비집고 나온다는 느낌도 드는 시간이기도 했다. 





4. 변신 - 다음 이런이론모임 텍스트이다. 변신이라니 설레지 않는가




볕뉘


쥔장은 상반기 결산으로 맥주파티를 제안했지만, 비가오고 아프고, 바쁘고, 술을 못마신다해서 결국은 가을로 연기된다. 그래 그렇게 우리의 삶들은 격류의 지점을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맥주 한잔만 가볍게 집에서 하고 바쁜 하루를 닫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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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나온 책이니, 구입한 뒤 7-8년이 지나서 읽는 셈이다. 마땅한 이유도 없었거니와 사무실 한켠에 잘 보이는 곳이 놓아두어 그나마 안심한 연유인가보다. 야나기 무네요시에 이어지는 아사카와 형제들과 일본 남종화와 한국화가들의 인연들이 겹치면서 이어진다. 품위, 기술, 고안이라는 조선미술대회의 기준이 마련된 연유라던가. 한국화가의 근대 색감이 왜 그랬는가도 살펴볼 수 있다. 중후반을 읽고 있다. 책이 나오고 페북 친구로 저자를 찜해둔 상태라 이후 고급정보들을 많이 얻게 된다. 그림을 보는 눈은 암맹되는 것이 아니니, 본 뒤 새로운 그림들에 대한 갈망은 얕아지지 않는다.


저자의 이후 저작들도 보고파 진다. 


평생 일상이 서예였던 이모부님이 돌아가셨다.  농사, 경비일이 대부분이었던 일상의 틈. 상가에 가기 전 그런 문화와 힘, 서예에 대한 갈급과 저력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물어보게 된다. 실습과 국민학교의 상이라는, 그리고 뭔가 있어보인다는 물음과 습속이 낡은 신문지를 하루하루 일상의 빈틈으로 채워나가게 한 것은 아닐까. 그것은 해내고 전시회도 여러 번 하시고, 끝까지 붓을 놓지 않던 모습이 인상깊다. 그리고 그를 갈망하는 일상의 힘을 지닌 어르신들도, 점점 옅어지는 습관과 문화의 농도도 생각하게 된다.


볕뉘

일상의 채우던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운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일본인들이라고 예술과 문화에 대한 영향 역시 없어지지 않는다. 이분의 논리는 이렇게 비석을 지우고 또 그 위에 새기는 것으로 풍요로워지지 않는다. 이항의 대립을 너머서는 것이 먼저다. 사라지려고 하는 것들에 대한 복원력이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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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여겨 보지 않았던, 그러니 건성으로 끝까지 보지도 못한 영화를 본다. 역시나 화려한 색감에 정신이 팔려 스토리를 놓친다. 아니 놓치게 만들어 두었다. 깊이 볼 수 있는 눈들이 신기하다. 뒷모습과 목소리만 나오는 조연배우. 씬에 나오는 배우들과 겹쳐 더 놓치기 쉽다.


스토리를 훑고 새벽에 눈길이 가 다시 본다.


여전히 시선은 의상과 화면의 색들에 가 있다. 검은 무늬까지 다루지 않는 색들이 없다. 그 색감은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매혹의 장면들이다.


폭우, 마작하는 소리. 이웃에 대한 관심. 이런 일들이 가능하지 않다는 법은 없지만 이 또한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일을 만들어낸 것 역시 좋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찻잔. 전기밥솥. 전화기, 국수보온병, 거울. 슬리퍼. 담배, 손끝. 사물들에게 연기시킬 줄 아는 감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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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뭐가 좋다고. 영화를 그리 좋아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회자되는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퇴근한 뒤 식자재마트에 들러 초밥하나와 요구르트 블루베리, 그리고 좋아하는 자두를 챙긴다. 출출한 배를 채우고 잠을 청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는다. 그래서 본다.


삼십 년이 넘었는데도, 대사는 쩐다. 그래서 그렇구나 한다. 영상이나 색감도 눈길을 끌고 남는다. 그런데 그런 쿨한 대본처럼 연애가 가능한가 싶다. 선을 너머버린 일상성에 감동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도 길은 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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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애정하는 작가의 작품이 나온 줄도 몰랐다. 주인공들의 인터뷰들을 라디오방송으로 들었다. <모자무싸>를  정주행하다보니 마지막회를 보고나서 검색하다가 구교환 고윤정인 걸 안다. 격주 주말에 집중해서 <나의 아저씨>까지 본다.


작가가 말한 본 사람, 느낀 사람과 겪은 사람. 작가가 살피는 안쓰러운가, 안아주고 싶은가, 응원하고 싶은가.


작중의 인물들이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들이 많이 겹친다. 그래서 공감하고 몰입하게 된다. 틈틈이 들었던 인디음악들도 꼭 내 취향들이다. 작가가 <천개의 고원>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적절하게 니체와 스피노자에 정통하려 했다는 것도 읽힌다. 하려고 하는 것들과 전하려고 하는 것들이 읽힌다.


<나의 아저씨>는 1화가 80분이다. 그리고 16회까지 장시간이 소요된다. 내내 보

기가 보통 일이 아니다. 혹자는 이를 행복론으로 읽고, <나의 해방일지>를 자유론으로 읽으며 <모자무싸>를 존재론으로도 보는 모양이다. 그렇게도 읽혔으면 좋겠다. 안쓰러운 사람들도 봤으면 좋겠고, 안아주고 싶은 사람들도 보았으면 한다. 응원하고 싶은 사람들도 being과 DOING의 차이를 한번 더 느껴보면 좋겠다싶다.


정희네가 끌어내린 스님은 어찌 되었을까? 겪어 보는 일들, 삶들은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삶들을 살아내는 이들은 대단하다. 상처를 보듬고 매만지려하는 작가의 방법들은 경이롭다. 더 넓고 깊게 매만지고 헤아리는 힘들을 주는 것 같다. 아직도 읽어내야 할 작가의 작품들이 많다.


볕뉘


대본집들을 사보고 싶어졌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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