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문명의 분석을 형성한 유기적 '신기술'과 자본주의적 탐욕 사이의 대립관계 대신, 이제 멈퍼드는 문명의 새벽에서부터 시작된, 민주주의적 기술과 권위주의적 기술 사이의 역사적 갈등을 추적했다. 멈퍼드에 의하면 민주주의적 기술은 신석기 농업, 여성 노동, 장식된 꽃병과 창고의 창조에서 그 뿌리를 갖는 것으로, 산업주의 시대에도 노역을 제거하고 개인의 예술적 능력을 고양시킨 수공업과 탈집중화 기술이라고 하는 지하의 전통으로 존속해 왔다.  권위주의적 '거대 도시'가 피라미드를 세운 노예라고 하는 인간 '기계'와 고대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들을 향한 무덤들에 의해 성장했다고 하는 주장이다...전체적 통제를 위한 거대 기구의 연구는 지배자들을 경쟁의 악순환으로 몰아넣고 시민들을 수동적인 기계인간으로 축소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29


우리의 삶 전체가 예술가들의 작품에 깃든 특징을 갖고자 하면 기술 세계 자체가 변해야 합니다. 구제의 길은 기계에 인간성을 실용적으로 적응시키는 데 있지 않고, 질서와 조직을 찾는 인간적 요구의 산물인 기계 자체를 인간성에 재적응시키는 데 있습니다. 인간적 패턴, 인간적 척도, 인간적 속도, 무엇보다도 인간적 목표가 기술적 활동과 과정을 변형시켜야 합니다. 기술이 인간의 발전에 위협이 되면 이를 억제하고, 심지어 기술을 인간의 발전이라는 경로 속으로 향하도록 하는 적절한 정치적 수단과 사회적 제도가 창안되지 않는 한, 기술의 사용 자체를 자시 중단해야 합니다.  51


인간은 예술 속에서 자기 삶의 본질적 경험을 영구화하고 부활시키며 타인과 나눌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수단을 발전시켰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인간이 기거나 걷기 시작하기 전에 항상 아동은 뜻을 알 수 있는 제스처를 발전시키고,  옹알이를 시작하며,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소리를 사용하기 시작하는다는 것은 아마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의사소통이라는 기능은 작업 기능에 선행하며, 인간 사회의 발전에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54


예술의 발전에는 3단계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1단계는 자폐적이고 유아기적인 자기 동일시의 단계입니다. 2단계는 사회적이고 청소년기적인 단계로서 단순히 주목받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 무엇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기 과시가 상호 소통으로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3단계는 개성적이고 성숙된 단계로, 여기서 예술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직접적 요구를 초월하여 삶의 새로운 형식을 낳을 수 있게 됩니다. 즉 예술 작품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인 힘이 되는 시기입니다. 62


저는 정서나 욕망의 억제나 대상에 대한 존중을 참된 객관성과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객관성이란 경험의 모든 측면을 포함해야 하고, 따라서 가장 중요한 측면인 주체 자체를 제외해서는 안 된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객관적일 때,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뿐 아니라, 또한 반대로 사물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우리의 목적과 가치가 무엇인지도 결국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따라서 기술이 전인격 속에 흡수된다 하더라도, 기술의 어떤 질서와 규칙성과 중립성이 통합된 인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더 의미 있는 전체의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93


우리는 세계를 2개의 계급으로 급속히 나누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복제 과정으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소수이고, 다른 하나는 삶 전체를 이러한 복제 과정의 수동적 감상자나 자발적 희생자로 낭비하는 다수입니다. ...(과거에는 그림이 희소한 종류의 상징이었고, 주의 깊은 집중을 요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는 실제의 경험이 희소하게 됐고 그림은 어디에나 있게 됐습니다.) 135

 

우리는 이 세계를, 대체로 시각적 상징물의 대량 생산을 통해 모든 사람이 간접적이고 파생적인 삶을 사는 간접적 세계, 유령의 세계로 바꾸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실제 존재의 이 창백한 환경을 하데스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그림자 왕국이 우리의 기계적이고 황금만능 문화의 궁극적 목적지여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적 상징물의 증대는 예술자체의 충격을 감소시키는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이처럼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는 상징을 저평가하고 순수하게 감각적인 측면을 제외한 상징의 모든 측면을 거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 반복 과정이 지극히 자동적으로 이러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한 자극의 반복 자체는 우리에게 자체 방어를 위해 그 의미를 제거할 필요를 만들 것입니다. 136

 

우리가 마음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적나라한 선정주의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예술가가 방어적으로 점차 할 말을 잃어가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선정주의가 의미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예술가는 거대 광고업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사용되는 묘기와 유사한 과장과 왜곡이라고하는 과정을 지나도록 강요당합니다. 따라서 '더욱 빨리, 더욱더 빨리'라는 수량화 원리는 '더욱 시끄럽게, 더욱더 시끄럽게'라는 선정주의를 유도하게 되고, 이어서 예술가가 사용하는 상징의 의미에도 영향을 미쳐 '더욱 공허하게, 더욱더 공허하게'로 나아갑니다 . 이는 대량 생산과 그것과 경쟁하는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무서운 대가입니다. - 우리는 복제와 대량 생산을 위한 메커니즘의 존재 자체가 그 완벽한 능력을 발휘할 의무를 수반할 것이라고 무턱대고 가정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필연성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자유인입니다. 137-138


선배들은 "좋은 것도 너무 많이 가지면 지나칠 수 있다"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젊었을 때는 어쩐지 잘난 체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 잠언의 배후에는 인류의 오랜 경험이 들어 있습니다. 사실 강렬한 경험일수록 그만큼 가치가 있고, 희소할수록 그 지속은 더욱더 짧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너무나 잦은 축복은 저주가 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기계의 선물인 규칙성과 반복성은 신체의 반사 조직에 해당하는 삶의 그런 측면에 한정돼야 합니다. 즉 그것들은 엄밀하게 종속적인 방법 외에는 더욱더 높은 기능에, 감정과 상상력에, 미적 감각과 합리적 통찰에 기여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갖는 과정이 아닙니다. 142


진기성, 모험성, 다양성, 자발성, 강렬성, 이 모든 것들은 예술 작품에 너무나도 필수적 요소들입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볼 때마다 새로움이 주는 충격과 환의의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한 작품은 그 의미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즉 너무 자주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경험의 희소성이야말로 환희를 위한 필수적 준비입니다. 리듬과 간격이 없다면 오로지  포만과 권태가 있을 뿐입니다. 143


울창한 숲이나 높은 산꼭대기같은 자연 속에서 맛보는 강렬한 고독의 기쁨입니다. 그러한 특별한 경험의 적지 않은 부분은, 어느 순간에든 거기에 있었던 사람이 매우 적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경험에다 심미적 의미와 정서적 자극의 마지막 강점을 더하는 것입니다. 만일 산꼭대기까지 3차선 고속 도로를 내고 5천 명을 데려다 놓고서 고독을 즐기라고 한다면, 그 경험의 본질 자체는 없어집니다. 이는 다른 무엇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연의 감각도 없고, 우주적 고독감도 없이, 도시 공원 대신 산꼭대기에서 만난 5천 명의 집단적 성격과 평범한 사교로 대체됩니다. 147


만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한 방울을 주기 위해 포도주에 물을 무한정으로 타서 나누어주고서 그것으로 모든 사람이 착실하게 술잔을 비웠다는 환상을 갖는다면 그러한 복제 과정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봉사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147

 

거대한 조립 라인의 생산 단위라는 수단에 의해 증대된 기계화, 집중화, 몰개성화라는 과정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만족과 위안을 주었습니다. 권력, 명성, 이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삶을 물량화한 사람들은 여기서 아무런 저할 없는 명백한 길을 뒤따르도록 허가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만족적 타성이 창조석을 대신할 수 있게 됐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타성의 결과, 삶 자체는 바로 그 확대 속에서 저지되고 억제됐습니다. 삶의 의미는 더욱더 공허해졌고 심지어 그 기계적 효율성은 더욱더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것이 됐습니다 181

 

헨리 오즈번 테일러 - "1600년 이래 진행 중인 속도로 본다면 사상의 붕괴에는 1세기나 반세기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경우 이론이나 선험적 원리로서의 법은 사라지고 권력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입니다. 도덕은 경찰로 바뀔 것입니다. 폭발은 우주의 폭력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해체가 통합을 압도할 것입니다."  182


불행히도 우리 시대는 아직 회화 부분에서 많은 브뤼헐과 고야를 낳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건강한 예술이란,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를 정도로 어리석거나 자기만족적인 사람들의 평범한 작품이나, 전통적인 힌두교나 기독교의 은자들처럼 거의 자폐적인 정신적 은둔자, 즉 자신을 때려눕히거나 밀어낼지 모르는 현대생활의 강력하고 급격한 탁류를 피해 전통적 삶이라는 조용한 샘에서 평온하게 물놀이를 하는 예술가들의 작품뿐입니다. 그건 예술가들이 그러한 은둔에 의해 순수성이나 강렬성을 얻는 것은 의심할 바 없지만, 같은 이유로 인해 표현력과 호소력을 어는 정도 상실하고 있습니다. 185


오늘의 삶이라는 위대한 드라마를 위한 가장 호소력 있는 표현의 근원은, 분열과 해체를 극복하는 노력,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노력입니다. 은둔이 아니라 참여에 의해, 도피가 아니라 삶을 위협하는 힘을 정복함에 의해서 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을 위한 주도권의 회복에 실패한 것, 내면의 평정을 회복하고 우리의 숨은 욕망을 확인하며 침몰된 희망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상징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 절망의 수렁에서 우리를 끌어낼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은 모두, 예술에만 특유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거의 대부분의 다른 활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이를 보상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한 사람의 독재자에게 개성이라고 하는 속성을 부여합니다. 구세주 황제의 현대판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만이 참된 인간이 됩니다. 지도자만이 결정을 내리는 데 자유롭습니다. 187-188


제가 말하는 변화는 다름 아닌 유기체와 인격 전체를 향한 관심의 변화입니다. 즉 가치의 전환입니다. 하나의 새로운 철학적 틀입니다 새로운 생활습관입니다....우리가 하나의 철학을 수립하기 전까지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철학이란 우리가 자연의 해석자이자 변형자로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 -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나 본래의 생물학적인 자아를 초월하는 삶 - 의 창조자로서, 기계를 밀어내고 인간을 우주의 바로 중심으로 복귀시켜 이 사회를 재조정할 수 있는 철학입니다. 인간은 지금 여기에 있는 피조물일뿐 아니라 무한과 영혼의 거울이기도 합니다....인간이 창조를 중단할 때 삶도 중단됩니다. 193-198

 

볕뉘.  그리스의 테크네란 말은 기술과 예술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었다 한다. 기술이 삶을 압도하는 지금, 삶과 기술, 예술의 격벽을 허문다. 그 그릇안의 온도는 36.5도 인간의 따듯함이다. 씨앗이다. 세상이 바뀌는 삶의 시작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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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학

 

문회우 우보인

 

동심

 

 

한남대 탈패 37주년 기념공연 양주별산대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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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주 판소리 완창 - 시외버스를 타고 한옥마을을 다녀오다. 판소리, 판의^^소리, 마당.  육성이 들리는 그 안에서 감흥이 일면서 와 닿는다. 관조의 매체가 아니라는 것을 천변을 거닐다 우연히 그 소리를 접하고 매혹적이란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다. 전주 부채박물관, 오밀조밀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합죽선과 난그림을 점찍어두고 오목대를 거쳐 동헌에 이르러 심청가 완창을 접한다. 달콤한 것만 빼내어 한소절 부르던 것에 익숙한 몸은 몇 대목에 금방 풀려버린다. 한 대목, 하나 하나 그리 절절할 수가 없다. 할머니 구연동화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두눈을 말똥말똥 뜨고 곁에 있는 듯싶다.  산을 오를 때 못본 그 꽃, 내려올 때 보았다는 그 마음같다.  심청가 판소리본을 얻었는데 300여쪽이 넘는다. 분량이 아니라 몸말, 구어에 눈길이 가서 한참을 번갈아 들여다 본다. 지금도 마음은 그 안에 가 있다.

 

 

2. 볼트와 너트 집 - 대전 역 앞에는 40년째 볼트와 너트를 파는 가게가 있다. 반들반들 손때에 절은 나무사다리와 수천종의 너트와 볼트를 담아놓은 상자의 디자인과 글씨체는 눈길을 끈다. 이런 손님이 적지 않은 듯 주인장은 무심하다. 손톱만한 것에서 팔뚝만한 것까지 어디든 헐겁고 헤어진 곳, 너덜너덜해진 곳에 네가 필요하다니, 그렇게 너를 원하고 챙길 곳이 많다니 아연해지기도 한다.

 

 

 

 

3. 시극을 한권 건네받다 - 김경주시인이 시극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출간 소식을 받아 안다. 주말 읽고 시극이 몹시 보고 싶어진다.  기담 -  언어이전, 언어에 앞선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간절함의 시로 읽던 기억과 겹친다. 늑대의 울음소리로 형상해 두었다. 작가의 의도와 해석을 읽고 더 온전해진다. 기회가 된다면 꼭 봐야될 듯 싶다. 판소리와 겹친다. 형식과 간절함은 모종의 유사함이 배여있는 것은 아닐까.  저녁 술잔을 건네며 장애우운동을 하는 친구의 애틋함이 전해와 더 뭉클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없는 것으로 쳐야한다고 일침을 둔다. 허나 생각만 달리먹고 근력을 키워오고나 조직의 문화가 조금만 달랐다면 그의 제안을 충분히 받았을 수 있다고 여겼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모임의 쓴소리, 모임의 야당, 조직의 야당, 악마의 변호인 ....우리 모둠의 문화의 근력이나, 민주주의의 근력이 일천하다 못해 그자리에 맴도는 현실이 더 안타까운 밤이었다. 목척교 대전천변의 분수는 분수도 모르고 찍찍 솟았다.

 

 

4. 전주에서 완창을 세시간여 듣다가 약속으로 먼저 나오는데 미안하다. 풍경을 고르고 마음에 둔 합죽선의 란과 편액의 그림을 산다.  돌아오는 길 선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녁모임에서 푼다. 그림이 눈에 선하다. 파는 이는 작가를 알고싶다하니 점원은 호만 알려주었다. 그분은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말을 전한다.  그림이야 친구들 다시 만나면 보게 되니 그리 섭섭한 일만 아니다.

 

 

 

5. 주말내내 몹시 힘들었다. 마음들도 녹아버린 것처럼 여름내내 한겹 한겹 쌓인 것들이 끓어넘친 듯하다. 친구들에게 푸념을 이틀내내 했다. 이대로는 더 뫔을 안으로만 추수릴 수 없다고 말이다. 한 친구는 묵묵히 듣고 쓰고싶은 것들, 그리고 싶은 것들을 환기겸 간간히 반사시켜준다하고  또 한 친구는 음악샤워를 시켜준다.  투팩의 Life goes on의 힙합과 선곡한 민중가요를 들려준다. 살며시 다른 곳을 보며 눈물을 훔쳤다. 본 앰프의 라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BAB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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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의 3대용법 - 도덕적 우월감. 매우 무례한 인간을 대할 때 화가 나긴 하지만, 그게 그리 오래가진 않는다. 그 사람을 '천하의 몹쓸 놈'이라고 진단을 내리고 나면, 모든 문제가 간단히 풀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하는 사람은 좀 다르다. 상대편이 제법 예의바른 태도를 취한다 하더라도 나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처럼 전제하고 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 뿐만 아니라 그 감정이 오래간다. 무례하게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은 정말이지 한 대 패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 아니 두고두고 패주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간직하게 된다. 39


김규항의 '불공정게임' -김규항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나는 그가 비판의 논리구조상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관계가 '민주당과 좌파'의 관계와 닮은꼴일 수 있다는 점에 눈을 돌려 좌파가 스스로 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에 자신의 탁견을 발휘해주면 좋겠다. 좌파 쪽에서 그런 변화가 있어야 '싸가지 없는 진보'의 가능성도 열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43


'싸가지 없음'의 원조 좌파진보 - 노동당 당원 남종석. "좌파들 중에 논쟁으로 정파 싸움하면서 허송세월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아요. 조금 차이 나면 싸우고 논쟁하고 상대를 기회주의자라고 규정하고, 가치를 위한 운동을 하니까 그래요. 그러면서 민주노총도 갈라졌지요....이제 진보는 새정치민주연합 욕만 하고 사는 존재 같아요." 45

 

정의당 당원 이창우. "진보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존재하는데, 정작 원조 진보정당들은 전멸했습니다. 이것이 마치 유권자들이 진보에 의지하려고 하면서도 진보정당에게 '너희가 제대로 된 진보냐?'고 되묻는 것과 같아요. 과격하기만 한 진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진보가 아니라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을 책임있게 추진할 수 있는 진보를 원하는 겁니다. 진보정당이 분열과 반목을 일삼으면서 국민들 눈에 함량 미달로 보이는 거죠." 45 강기갑. '진보라는 본질의 항아리를 끌어안고 그들만의 논쟁과 다툼으로 아까운 세월 보내는 진보, 자기주장만 하는 강직성과 진보라는 우월성에 갇혀 대중성과 민심에 다가가지 못하는 진보는 이 시대적 요구와 국민적 갈망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46


'싸가지 없는 진보'는 단기적으로 '남는 장사' - 싸가지 없는 언행은 한 정당 내에서도 나와 우리편의 승리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지, 우리 편을 향한 게 아니다. 반대편에 대한 싸가지 없는 언행은 지지자들을 열광시키는 동시에 단합의 대열로 이끌 수 있다. 51 진보의 내부 헤게모니 쟁탈을 위해선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정치 양식이다. 좋건 나쁘건 정치의 동력은 증오다.


왜 '악마의 변호인'이 필요한가 - 피터 드러커는 반대 의견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경영자는 칭찬을 받으면 좋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오히려 상반된 의견을 듣고 토론을 나누고 여러 대안을 모두 고려해야 제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의사결정의 첫 번째 규칙은 반대 의견이 없으면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56


불관용을 관용할 수 있는가 - 진보의 진보 비판에 대한 비판은 진보 진영 내에선 그 어떤 비판도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해선 안 된다는 논리. ....진보의 진보 비판에 대해선 포괄적 원칙이나 이론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비판의 사안별 적합성이나 정당성을 따지는 것이 옳다. 즉, 어떤 비판이 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거나 그 이유를 자신의 입장에서 논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법칙을 만들겠다는 식으로 상대편이 '비겁함' 또는 '무지'를 들먹거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62


진중권의 '가증스러운 이중잣대'란 표현 - 진짜 문제는 내부 비판이 아니다. 비판이 문제라기보다는 비판의 방식이 문제다. '싸가지 있는 비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앞선 비판들은 너무 거칠다. 비판이라기보다는 인신공격성 비난에 가깝다. 다름을 인정하는 선에서의 소통, 즉 싸가지 있는 소통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논쟁을 '싸가지 없기 경연대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63


진보의 진보 비판은 진보의 숙명 - '빠' 네티즌들이 "상대 정파에 내뱉는 경멸적 언사들은 매우 파쇼적"이라는 고종석의 개탄에 동의할 수 없는가? 원래 인터넷이나 SNS는 그런 매체이니, 쿨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렇지 않다. 그렇게 형성된 의식과 태도는 진보 정치에 그대로 반영되기 마련이다. 같은 맥락에서 비판의 '동기 분석'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동기 분석'은 충분한 근거가 수반될 때에 한해서 타당할 수 있지만, 그냥 자기 짐작을 일방적으로 내지르는 건 곤란하다. 그건 감정싸움으로 나아가자는 신호탄과 다름없다. 68


민주당의 '5대 뻔한' 신드롬 - 뻔한 인물(불로장생 원로, 꽉 틀어쥔 486, 진보의 이준석부재), 뻔한 노선(아직도 반새누리당이면 모든 노선이 정당화되고 철학이 없음), 뻔한 체질(계파 갈등, 노숙 및 단식 투쟁, SNS 환청, 환각현상), 뻔한 전략(편 가르기, 안 되면 단일화 등), 뻔한 우군들(야당 외곽 세력은 그들만으 언론, 학자, 시민단체들) 71


왜 강남좌파는 '왕싸가지'가 되었나 - '지식 엘리트'의 속성은 자신의 비교우위가 지식,지성,비전에 있다는 걸 거의 본능 비슷하게 갖고 있기 때문에 타인과 세상에 대한 '계몽 욕망'으로 충만해있다. 미국 정치에서 늘 진보적 지식 엘리트가 일반 서민의 거센 반감의 대상이 되는 등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국에선 그들의 계몽 욕망이 해소되기 어려운 내부 분란을 낳은 건 물론이고 외부적으로 자주 싸가지의 문제로 비화된다. "우리가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 우리를 따르라"는 식이니 말이다. 83


 

"보수는 인간에게, 진보는 사물에게 말한다" -노명우가 잘 지적했듯이, "상업주의와 보수주의자들이 대중의 상식을 기막하게 이용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지식인과 진보주의자는 상식을 대체할 양식을 훈계의 어투로 늘어놓는 능력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는 가끔 인용되는 말이라며, "우익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에게 말하고 있고, 좌파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물에게 말하고 있다고 했는데, 진실이건 거짓이건 진보의 기본자세는 인간지향적이라기보다는 사물지향적이다.  88-89


유권자의 '확증편향' -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 한국 정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주로 정치인들만 욕할 뿐 대중은 늘 피해자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정치인들은 대중의 확증 편향에 영합할 뿐이라고 보는 게 진실에 더 가깝다. 이 세상에 숱한 음모론이 성황을 누리는 것도 바로 '확증 편향'때문이다. 어떤 정치적 이슈나 사안에 대해 편을 갈라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그 싸움이 '확증 편향' 간의 싸움이라는 것만큼은 인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95


박유림. " 김어준은 대중이 궁금해할 만한 사안들을 정확히 짚어낸다.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하고 움직일 만한 것들을 이슈화하는 동물적 감각을 지녔다. 논리적으로 수긍이 가는 지점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지점을 알고 있다. 감정의 영역에서 결정되는 것이 비단 정치만일까. 인간계에서 결정되는 일들 가운데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얼마나 있나. 그런 점에서 '감정'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중요성이 사회에 만연하게 된 지금은 바야흐로 '감정의 시대'" 97


나꼼수를 덮친 승자의 저주 - "좌의 취약점이 뭐냐. 좌는 스스로 지적으로 우월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는 거. 그게 왜 문제냐면, 좌가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다보니 부지불식간 드러나는 지적 오만이 대중들로부터 좌를 유리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거. 자기들만의 언어로, 자기들끼리만 대단하고 자기들끼리만 정당하지. 그러고는 자신들의 언어로 거대한 담론을 설법하려 하지. 예를 들어 우리 좌파가 입에 달고 사는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만 해도 그래. 그 언어로 대중을 설득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거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선, 자기들끼리의 리그에서 자기들끼리의 언어로 자기들끼리만 잔치를 하고 만다고. 자기들끼리 거룩한 순교자가 되는 거지." 99 김어준뿐만 아니다. 대중에게 감정으로 접근해 그들을 매료시키는 진보 논객은 많다. 늘 문제는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의 감정은 아예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딜레마가 있다.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의 감정까지 고려하는 어법으론 우리 편 사람들을 열광시킬 수 없다. 이게 바로 우리가 직면해 있는, 정치담론의 시장 논리다. 100


우리는 모두 이중개념주의자다 - 진보는 자신만이 옳고 보수는 몹쓸 집단이라는 식의 태도를 보일 때가 많은 것 같다. 자신과 상대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과도한 적대의식을 보이면서, 국민들에게 양자택일을 종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담스럽다. 종교적 폐쇄성이 강한 기독교에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 몇년 전에는 진보라고 생각했던 유권자. 108


인격없는 이념은 쓰레기 - 우리가 정치 분야에서 인격을 홀대하는 데는 한 세대에 걸친 독재와 반독재투쟁의 상흔이 자리 잡고 있다. 독재정권이 반독재투쟁을 비난한 수법 중의 하나가 '수신제가' 이데올로기였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데다 인간적 흠이 많은 주제에 무슨 민주화운동을 하느냐는 선전 공세를 핀 것이다. 그 좋은 말이 그런 용도로 오, 남용되었다는 게 기가 막히지만, 더욱 비극적인 건 그런 공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이념과 인격의 분리 현상이다. 이념과 인격에 모두 충실한 사람도 많겠지만, 이념에 투철할 수록 인격은 엉망인 사람도 많다. 부실한 인격을 이념적 전투성으로 보완하려는 탓이다. 125


'있는그대로의 세상'과 '원하는 세상' - 알린스키는 '사물의 양면성을 분리시켜 파악하는 인습적 사고방식'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이 기능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행동할 때의 우리는 모든 가치와 문제들을 분할하고 고립시킨다.", "문제가 극단적으로 나누어져야만 사람들은 행동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100% 천사의 편에 있으며 그 반대는 100% 악마의 편에 있다고 확신할 때 행동할 것이다. 조직가는 문제들이 이 정도로 양극화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조직가라면 자신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한 부분은 행동의 장에 있으며, 그는 문제를 100대 0으로 양분해서 자신의 힘을 투쟁에 쏟아붓도록 힘을 보탠다. 한편 그의 다른 부분은 협상의 시간이 되면 이는 사실상 단지 10%의 차이일 뿐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타협은 언제나 실질적인 활동 속에 존재한다. 타협은 거래를 하는 것이다. 거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숨 고르기, 보통 승리를 의미하며, 타협은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다. 당신이 무에서 출발한다면, 100%를 요구하고 그 뒤에 30% 선에서 타협을 하라. 당신은 30%를 번 것이다....타협이 전혀 없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를 하나의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 단어는 '타협'일 것이다." 158-160


'증오 마케팅'은 진보에 불리하다 - "진보주의자가 대중에게서 감정이입을 더 많이 활성화할수록, 그들은 더 많이 지지를 받고 보수주의자는 더 많이 손해를 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가 대중에게서 더 많은 공포심을 생성할수록, 그들은 더 많이 지지를 받고 진보주의자는 더 많이 억압을 받을 것이다. 진보주의자는 공포에 근거한 프레임을 수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연히 자신의 도덕적 세계관, 즉 감정이입과 책임, 희망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조지 레이코프. 166


'진정성'을 버리고 '성실성'을 보여라 - 패터슨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웃과 직장 동료들이 진정한 성차별주의자인지, 노인차별주의자인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중하고 사회성 있으며 성실한가 하는 점입니다. 성실성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그들이 약속을 지킬 것인가? 우리가 암묵적으로 타결한 합의를 그들이 존중할 것인가? 그들의 따듯한 표현이 의도적인 선의에서 나오는 것인가" - 진정성이 집단사고를 강화할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173


 

인간의 도덕은 하나가 아니다. - 문화권마다 다른 도덕 체계가 있다. 뉴욕대학 조너선 하이트는 대학생은 거의 자율성의 윤리만을 도덕성의 언어로 삼아 이야기한 반면, 다른 집단(특히 노동자 계층 집단) 사람들은 공동체의 윤리를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고, 신성함의 윤리도 좀더 이용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최근 연구에선 개인, 공동체, 신성이라는 도덕의 세 차원 가운데 진보적인 사람들은 개인을 특히 더 중시하는 반면에 보수적인 사람들은 셋 다 비슷하게 중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84

 

친소관계가 정치의 본질인 정당. NL은 PD를 공격하고, NL과 PD가 연합해서 비운동권을 공격한다. 기어코 '나와' 다른 점을 찾아 배척하는 버릇이 몸에 뱄다. 남 탓하고 반사 이익에 익숙한 정치는 이런 습성에서 비롯됐다. 당 대표보다 계파 수장이 더 잘 챙겨주니, 당 대표보다 계파 수장 의견을 더 따르는 정치문화도 필연적이다. - 구혜영.

 

보수와 진보의 다른 도덕시스템 - "진보주의자들이 정치에서 도덕과 신화와 감정적인 측면을 무시하는 한, 정책과 관심을 가진 그룹과 사안별 논쟁에만 집착하는 한, 그들이 이 나라를 뒤덮은 정치적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게 될 희망은 전무하다." 197


"진보세력이 저소득층의 삶을 향상할 유일한 대안임을 확실히 인식시키기만 하면 문제가 저절로 다 해결되리라는 대선분석은 이런점에서 한계가 있다. 진보세력은 보수적인 국민들이 그들에게 품는 생래적인 거부감, 곧 국가안보와 사회질서를 흔드는 '비도덕적인' 정당이라는 시선을 어떻게 바꿀지 궁리할 필요가 있다." 전중환.  198  똑같이 과오를 저질러도 진보가 더 욕먹게 되어 있다. 세상 민심이 그런 걸 어이하랴. 199


풀뿌리 건설만이 살길이다 - 초기엔 정치적 풀뿌리가 아니라 사회적 풀뿌리를 건설해야 한다. "우리의 정치는 기실 '과잉대표' 되어 있다. 몸집에 비해 머리가 너무나 큰 기형적 가분수 형태다. 수준과 실력에 비해 목표와 기대가 너무 높고 비현실적이다.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다 그러다 보니 열망과 기대에 비해 결과는 늘 실망스러우며, 이는 정치불신과 정치혐오증으로 이어진다. 언론의 탓도 크다고 생각한다. 정치, 중요하다 골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지만 한 사회를 바꾸는 결정적인 힘은 정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지금까지 한 표현을 원용하자면 '정을 붙여야 할' 곳은 '사회' 또는 '사회적인 것'이다....내 이웃과 함께 내 삶의 방식이 어떻게 바뀔 때 사회 전체가 더 좋아지는지를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사회권력' 이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 등을 고민할 때 비로소 정당도, 정치도 제대로 작동한다고 본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이창곤.

 

 

볕뉘. "적을 업신여기면 반드시 패한다 " ㅡ '품위있는 진보는 가능한가', '이념과 인격이 함께갈 수 없는가' 되물으며 이말로 끝맺고 있다. 유행은 덧없지만 이리 빨리 숨죽는 것일 수 있을까? '싸가지' 논점은 수면 아래로 내려간 듯 싶다. 대안논쟁으로 씨끌벅적해야 할 것 같은데 논점을 받고 있는 지역도 흐름도 없는 듯싶다. 그런면에서 진보의 치명점은 남보다 낫다는 선민의식이다.엘리트주의다. 강준만교수의 시선은 계파나 모둠의 시선으로 굴절되어 이미 폐기된지도 모르겠다. 유효기간이 점차 짧아진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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