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515 (참*)

(일) 빨리 하는 것이 빠른가? 제대로 하는 것이 빠른가? 빨리 제대로 할 수 있는가?

 

1. 일터에 품질경영시스템이란 것(ISO)이 있다. 문서와 일이 같이 가서 고객이 일단 유사시 샘플링하더라도 그대로 드러나 확연히 알 수 있는 시스템이다.  서구의 기준이 우리에게 들어왔는데, 우리에겐 어색하다. 왠지 어색한 옷을 입은 것 같고, 제대로 자리잡기가 힘들다. 몇차례 이 친구들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한 일을 적고 보고한다. 이들에겐 문서가 늘 옆에 붙어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것이 만만치 않다.

2. 경영시스템도 5S(정리정돈)를 비롯, 리엔지니어링, 균형성과지표 들의 경영도구 - 어쩌면 우리가 새로운 것이나 유행은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괜찮다싶으면 소유하기위해 안달날 정도로, 그런 대충대충이 장점도 있겠지만, 대부분 '우리'를 잘 몰라서 과도한 만용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다.

3. 두가지 다. 언어습관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1) 주어를 늘 먼저쓰는 그들과, 동사는 늘 먼저쓰고 주어가 대부분 생략된 우리. 그들은 늘 주어가 있어야 한다. 당연히 문서를 만들면서 일을 하는 것이 쉽게 몸에 익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에겐 만만치 않은 일이다. 조직적인 강제가 있더라도 문서와 일이 몸에 익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존재론과 관계론이라고들 하지만 일정정도 맞는 것 같다. (2.) 역시 '우리'라는 주어의 현실적 실정을 무시하는 것인데, 여러 관계를 통해 좋다고 인정되는 것-유행을 쉽게 받아들이는데 '주어'에 대한 , 주제파악이 되지 않아 실패를 거듭한다. '우리'와 '그들'이 엄연히 다름에도 동일한 평가잣대를 들이대거나 녹아있지 않은 평가기준을 만들어 강제한다. 백이면 백 모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정부출연기관의 PBS, 최근 바람이 불고 있는 BSC 정책의 결정적 결함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4. 모두의 질문을 받아들인다는 전제는 (일과 관계)를 분리하는데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습관화 된 사람이 다수를 차지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 같다. 엘리트라고 자처하거나 그런 쪽에 가까울수록,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할 수 있겠다. 일터나 촌각을 다투는 관료조직의 성격과 부합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속도에 비하면 '기어다닌다'고 폄하될 수 있는 사회단체일은 어떨까? 제대로 빨리하면 될까? (제대로-빨리)는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단어일까? '빨리'엔 지적욕망과 권력이 숨어있거나, 아니면 근저를 이루는 지식이 바뀌면 한순간에 사라져, 또 다른 원점에서 일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제대로 -빨리)가 아니라 (제대로-천천히)가 훨씬 유연하고 변하는 지식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5. 어차피 (제대로-천천히)를 맘 속에 담는다면 (일-관계)를 (관계(일))=관계속의 일로 생각해두면 어떨까? (일(관계))로 인해 일은 하지만 관계는 사라지는 그런 것 말고, (관계(일))로 보아 정말 관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힘이 길러지면 어떨까? 그러면 이런 도식이 가능할까? (제대로-천천히): 늦는 것도 아니고 쳐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꼭지) 지난 두달간 여러 연구논문을 검색하며 자본의 눈길을 받지 못하는 무수한 논문이 창고에 재워져있는 것을 공감하였다. 자본이 아니라 사람의 눈길이나 지역의 눈길이나 사회의 눈길을 조금이나마 받았다면 돈이나 노고를 들이지 않더라도 기사회생할 수 있는 논문들이다. 희망제작이 아니라 새로운사회를 여는 씨앗들이 심증의 단계를 넘어 물증의 단계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참여한 분들의 공통된 시각들이다. 어쩌면 공방에서 취미거리로만 해도 말이다. 자본의 그늘때문에 볕을 보지 못하는 수많은 노력이 에너지-환경-생물-등등(오버인가??)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다. 인간의 모습을 한 과학이 학위논문으로만 있거나, ...

6. 어제 늦었다. 어설프게 마무리되어 늦잠을 자다. 그래도 일찍 들어오길 잘했지? 여러 두서없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 고민의 흔적이 놓칠까 (머리-몸)없이, 예의없이 올린다. 담을 목적이니 이해들 해주시길. (실제는 이렇게 불친절하지 않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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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상은 아무래도 (머리-몸)말의 간극이 고정화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리로 말하는 것과 몸으로 말하는 것의 간극, 체화되어 있는 것의 차이는 의외로 큰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몸보다 많이 행동이나 삶을 틀지우고, 어떤 사람은 몸이 머리보다 더 규정지우고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과 관계를 포함하는 몸말이나 세상을 냉혹하게 보고, 의식의 관통과 통찰력을 키우는 머리의 말이 커지면 좋을텐데. 세상은 아마 그렇지 않은 듯하다.

아쉽게도 세상은 몸말보다 머리의 말에 예민한 것 같다. 몸의 말이 느리고 둔하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인지, 머리의 말에 쉽게 현혹되고 머리에 익숙해버려 몸의 느린 반응을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마치 다른 용도인 것처럼 폐기처분하고, 머리에 맞게 그때그때 몸말을 구하는 것은 아닐까?

몸말은 쌓이는 맛이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리를 빌어 그때그때 맞춘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면, 최소한 늘 소통하는 (머리-몸)말의 관계라면,  일이 그릇되더라도 사람은 남는 것은 아닐까? 머리에 익숙해버리면 몸은 늘 소외되어, 자신의 영역만 찾게되는 것은 아닐까? 편안한 관계나 끊임없는 나로 향한 침잠으로.. ...

 

2.

가끔 시인을 보면, 제도안보다 제도곁이나 제도밖의 놀라운 감수성과 제도안을 흔드는 사람들을 본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더라도, 치열한 고통을 수반한 성장은 제도안의 성장을 쥐고 근본을 흔들거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몸말의 상처와 성장은 (머리의 말)의 영역이 얼마나 아둔하고 제 얼굴만 비추어 보는 나르시시즘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3.

새집 집들이에 가면,  점점 몸도 머리도 비우는 세태에 아연해진다. 더 좋은 가구에 더 안락한 분위기에...여기엔 머리도 몸도 없다. (머리-몸)도 아무것도 필요없는 세상은 묘하게 지지기반을 풍부하게 한다. 사회와, 세상과 단절된 안락한 공간들은 왜 이렇게 많이 늘기만 하는 것인지? 그 간극은 점점 커가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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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순전
박영근 지음 / 실천문학사 / 1993년 12월

후기

이 시집이 씌어지는 동안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한 것은 절망의 포즈들이었다. 변화한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함께 바라보려는 인내와 통찰력 없이, 자본의 논리에 그대로 한몸이 된 지식인 언론의 예단과 흥분속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들이야말로 운동의 침체와 함께 벽이었다. 벗들을 탓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내 안에 그 포즈들 완강한 바 있었고 그 벽에 갇혀 비틀거렸으니까. 참으로, 그런 과장 없이, 변화해가는 현실과 변할 수 없는 현실운동의 진보적 지향 사이에 긴장으로 자신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문학하는 일의 자세가 아니던가.(하략)                                     1993년 가을 박 영 근


며칠 전, 시인의 죽음을 신문으로 접했다. <취업공고판 앞에서>의 흐릿한 기억, 그리고 몇편의 시집 가운데 <김미순전>이 남아있어, 잔 생각들이 가시지 않아 찾아본다.  술과 함께 세상을 접었다는 소식이 안타까운 것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 녹여내고 멱살까지 잡아가며 부대끼었을 (몸-맘)고생이 기어들어와 어쩔줄 모르겠다. 세상은 자판기처럼 점점 ㅃㅏ르게 제 것에 맞는 놈만 찍어내려 아둥바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3년전 시집 속, 시인의 후기를 보며, 그가 접한 현실은, 지금은 오히려 더 깊은 벽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을 꿰뚫은 시인들, 시로 물러서지 않고, 굳굳하게,  더욱 건강하게 보란 듯이 잘 살았으면 한다.  정말 잘..

문외한 독자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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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님 글을 보고 찜해 두었다 손에 넣다.(얼마나 보고싶었는지 땡쓰투도 못하였다.)  역시 쉽고 잘 읽힌다. 속이 뻥 뚫리듯.  고개도 연신 끄덕이게 만들지만, 남는 가르침은 장난이 아니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듯. 즐기듯 꾸준함, 삶과 닿아 있을 것. 꼼수는 없다라고 읽힌다. 사물, 평범한 것에 대한 애정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름붙이기.

 진정한 고수는 입문이란 과정의 진입장벽을 편안하게 없앤다.  즐거워서 해보지 않아선 안달날 정도로  동기를 부여해주고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준다.  하지만, 엇나간 중급과정엔 한가지가 전부인 듯한 착각, 주객의 경도엔 일침을 가한다.  고급과정은 산전수전의 내력과 삶으로 녹여내는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닐까? 녹여낸 길은 한길로 통하듯 만만치 않다.

달리기 비유도 가끔 들어있어 내심 보긴 좋았지만, 늘 초보로 경도되는 스스로를 보면 역시나, 혹시나 늘 진입장벽 언저리에서 버거워한다. 그래서 늘 나에겐 잘 하는 것이 없다.  이것저것 입맛만 다시다가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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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5-1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셈. 놀랍군요. 거짓말이겠죠!!
 

 

 060510   1.

일터일로 용산미군부대를 다녀오다. 리모델링 공사가 있어 다가서는데 외부인의 접근이 쉽지 않다. 안쪽의 담당자가 걸어나오고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갔다 나오기 위해, 많은 시간을 기다렸다. 물끄러미 오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렇게 30여분, 다른 손님을 기다리기 위해 30여분 1시간이상 머물면서, 왜? 이렇게 정신없이 검문대를 거치게 하는지 의아해졌다.  철조망에 달린 경고?문이 붉은 글씨로 적혀있었다.

내용인즉,  1950년에 생긴? 국보법에 의거한 1954년 국방부장관의 지시에 따라, 출입자는 반드시 검색하여야 하며 어쩌구 저쩌구... ...

그 말을 보는 순간, 정말 짜증 지대로 날 뻔 한다. 그 관행때문에 줄잡아 2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러고 있을 줄이냐?

 

060510    2.

지역에서 한홍구교수 강연회가 있었다. "군사문화와 한국사회"라는 주제였는데, 군생활을 한 예비역으로..군사문화의 제도화 과정과 돌이켜보는 재미가 솔솔했다.  향토예비군-->교련과목-->학도호국단-->병영입소;전방입소. 이렇게 제도화되어 만들어진 관행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입법취지가 사라지면 그 제도는 역으로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관성으로 아직도 두발(2-30년전에 3cm: 지금은 7cm?, 민주주의는 불과 4cm만 신장했을뿐??)에 조회에 앞에 나란히 문화로 살아숨쉰다.

어쩌다 관행-삶이 섞여버린 것일까? 우린 관행에 너무 약한 것은 아닐까? 남들이 하니까? 다들 그렇게 사니까?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 그리고 이 이유가 살아있지 않고 소멸되었다면, 잔재물에 대해 엄밀한 새집짓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일상 구석구석 폐기물이 넘 많다. 그것이 스러지지 않도록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폭력-강도가 일상인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는 그것이 그대로의 현실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관행이자 공기이다.  전부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러해야한다는 것은 알려고해야 알 수도 없는 것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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