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착취원을 바탕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최근 2-3세기에 걸쳐 전 지구적인 장을 만들어 냈다. 전 자본주의 단계는 타자를 구성해내고, 주체와 구별해내는 작업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해왔고, 존립근거인 노동력을 착취해내는 구조적 작업을 해 온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부일처제, 가부장제, 가족 울타리란 이데올로기와 공간의 생성은 자본주의가 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과정과 함께 이루어졌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초과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외화되지 않은 노동을 찾아내고 구조화한다.  그 구조화는 말단에 상품도 될 수 없고, 선택할 수도 없는 늙은 창녀, 장애인, 병자와 같은 사회적으로 배척된 존재를 만들어 낸다.  그 전단계로 입에 풀칠만 할 정도의 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가사노동-어린이 노동 착취 시스템이다. 이것은 자본 시스템에 포섭된 기술력의 발전은 평균적으로 여가시간을 더 만들어내지 않는 것과도 유사하다. 당연한 구조로 정착되어 그 상태에서 더 높은 효율을 요구하고, 더 낮은 임금의 수평적 확대를 욕망한다


백인 남성 부르조아의 이데올로기와 자본은 불과 2-3세기 만에 일국내 자본가-노동자의 구조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위계와 제4세계라 할 수 있는 노동의 하위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지배/피지배의 위계는 백인남성 부르조아라는 1차원의 무게에서 끝단으로 갈 수록 배가되어 백인여성 - 유색 자본가 - 유색여성 -민족/계급/인정/성/-삶의 존폐단계로 복층적으로 누적된다.


그러나, 복층적인 문제를 누적하고 있는 서발턴(하위주체들)의 움직임이 드러날 수 없었던가? 지식인은 왜 입체적으로 보거나 느낄 수 없던 것일까? 아니 왜 지식인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헤겔,칸트,들뢰즈,푸코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투명한 것이 있다’라는 전제가 무의식 중에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만들어내고, 이것이 철학,문학,사회,문화 이념에 착근해있기때문이라고 한다. 지배/피지배, 이성/감성, 권력 등 이분구도가 전 지구적인 서발턴그룹을 보지 못하게 만든 이유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피지배가 지배의 공간을 메우거나 감성이 이성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배와 피지배의 양피지 위에 새로운 해석을 덧보태는 것, 그 상황을 단선적인 각도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해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만들고 지배해온 이데올로기의 맹점을 제3의 시선으로 재해석해내는 것과 지배/피지배의 시선 위에 덧방을 대어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라고 한다. 그들이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볼 수도 없고, 보인다고 해도 그들이 말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말을 걸 수 있다한다. 전 지구적 시선에, 중층적 문제를 겹치고 있는,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온몸으로 살고 있는 서발턴, 어디에 어떻게, 어떨지 말을 걸 수 있다한다.  중첩된 모순의 실마리를 이야기하는 것, 느끼는 것은 지식인의 몫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맑스를 바탕으로 데리다, 그람시, 푸코에 빚지고 있는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에 공감한다. 학자의 입장으로 연구결과물에 대한 비판도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어설프게 가져와 비평으로 끝나고 유행처럼 묻혀버릴 것이라면, 역사-철학-문학-문화적 측면에서 엄밀함으로, 시선의 정교함과 치밀함, 오류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풍부함으로 열매맺지 못하고, 비난으로 스스로 발목을 잡는다면 안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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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5-25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이어 몸을 가학에 가까운 수준으로 학대하였더니, 정신도 몸도 몽롱하였다. 잠결을 피해 드문드문 보기시작한 책이 스피박을 중심에 둔 책이다. <탈식민주의의 페미니즘>,<서발턴의 역사학비판>을 먼저 읽었기에 망정이지 <포스트 이성 비판>부터 읽었으면 낭패를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한글인지, 영어인지 도통 헛갈려서, 그나마 의지로 버텨, 중언부언 한 덕에 조금은 나아지는 듯하다. 

몇권의 책이 더 도착하면 계속 독서를 이어서 할 생각이다.  반복되어 나오는 것이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그림자 노동>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반 일리히나 엘빈토플러도 언급한 바가 있어 다시 참고하려한다. <신제국주의>는 요약, 서평을 보았는데, 다시 참고하려 한다.

<탈식민주의의 페미니즘>의 3부 몸의 유물론이 나온다. 하지만, 불쑥 여성으로 돌아가 맥락이 도통잡히지 않는다. 몸의 언어가 필요한 시대는 아닐까해서 읽었는데, 독자와 저자의 요구가 만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막 지나온 길이

 

이제 막 지나온 길이

뻣뻣이 굳는다

나는 이 길의 근성을 알고 있다

 

옛날에도 나는 몇 차례

빠른 걸음으로

이 길을 지나갔다

하늘고 맞닿은 이 길을 돌아 나오며

내가 흘린 눈물을

 

나는 알고 있다

협곡을 지날 때면 들려오는

슬픈 메아리

가지 못할 세계로 유골처럼 굴러가는

위태로운 생각들

 

멈추면 그 순간

서늘한 이끼가 몸을 덮는다

 

낙 지

 

몸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얼마나 된다고

 

접시 속 낙지의 몸이

사방으로 기어나간다

죽음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신의

몸은 힘차다

 

몸으로 다다를 수 있는 세계도

무궁무진하다는 듯

죽은 정신이라도 이끌고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것은

몸뿐이라는 듯

 

믿음이 나를 썩지 않게 한다

 

씨앗 속에 드는 세상의 이치처럼

오늘도 나는 삶을 믿으며 잠자리에 든다

꽃들이 고봉으로 차오르기도 하는

잠 속으로 찾아오는 것들은

내 몸을 돌며 울부짖기도 하지만

 

믿음이 나를 썩지 않게 한다

내가 보는 세상은

아직은 싱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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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5-23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서재를 기웃거리다 고른 시집이다. 일터 술자리에 가져가 문지시집을 처음 본 친구는 <좋은세상>같은 잡지인줄 알았다구 하여 타박을 맞고, 마시기전 접힌 몇꼭지, 술마신 뒤, 이따위 시라고 타박을 또 맞고, 아침 이렇게 명예회복을 한 <따듯한 흙>이다. 그래도 시인은 살아있다. 마지막 보루인가? 싼 값에 팔리지 않는 시인은 ... ..팔지 않는 시인들은... ...
 

1. 무심코 짚어든 책, 불쑥 코 앞에 나타나는 책들이 있다.  양*수후원회 대학주점에 가던 차에 택시에서 마저 본 책이었고, 다 아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끝물을 만난 것은 아닌지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탈식민주의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 회자도 많이 된 것 같은데, 명색이 이공계라 혹 ... ... 저자 학교 출신에게 물어봐도 그 교수를 모르겠다하고... ...

2. 리뷰를 몇 편 보니, 혼자만의 놀라움은 아닌 듯 싶다. 품을 거리, 나눌 거리들을 많이 남겨주고, 고민하게 하는 접점을 남기는 책이었음을 알게 되어 가슴졸이며 흔적 남긴다. (동료가 부조금 봉투 좀 써달라고 하는 바람에) 한 호흡을 놓쳐 생각들이 엉크러지기는 하지만 노력해보아야 겠다.

3. 산개해있던 개념과 사람들이 연결된다. 푸코,스피박, 사이드, 네그리-하트, 알뛰세르,파농 (이번엔 동료가 간식으로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자본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기나긴 역사의 흐름에 맥락을 갖게 해준다는 점이 그 하나다.

4. 지배와 종속, 타자화의 구조와 관계를 밝혀주고 표면적인 관점이 아니라 의식상의 타자화 내면화과정도 동시에 고민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피상적이지 않은 것 같다. 내 몸은 장애인, 외국인노동자에 익숙하지 않다. 끊임없이 뱉어내는 생각들이 뼛속깊이 파고 들어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생각과 달리, 몸은 꽤나 보수적이다. 그 경계를 지우는 연습, 무화시키려는 노력, 방법을 잘 모르지만, 입문할 수 있지는 않을까? 

 5.탈식민주의가 아니라, 탈자본주의, 탈제국주의라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 그리고 권력이 수직적인 것만 아니고 밑에서 불쑥 불쑥 솟아나고 움직이는 것이라면, 역담론이든 저항담론이든, 기존 지배-피지배의 전제만 가지고 있던 **주의에 대항하는 담론도 권력을 갖고 만들 수 있게는 할 수는 없을까?

 6. 학계의 동향이 어느 정도인지? 유행을 타다 한물 간 것인지? 머리만 채우다 소멸하고, 일상으로 넘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그렇게 큰 그물이 갇는 맹점들은 어떤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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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5-22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우로티는 노동을 파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몸을 파는 존재이다. 상품으로서 자신의 가격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며 상품을 산출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녀는 노동자도 인간적 주체로서 존재도 아니다. 전적으로 타자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이다. 그녀는 스스로 몸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사회적으로 배척된 존재이다."


"사랑이란 바로 노력이다. 그것은 매우 세세하게 상대방에 귀 기울이는 것이며, 양쪽의 마음이 변하는 것이고, 순간적으로 나마 실천될 수 있는 윤리적 개별성의 실현 가능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집단적 노력이 법, 생산관계, 교육체제, 그리고 의료체계를 바꾸게 될 것이다. 윤리적 개별성이란 비밀스런 만남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이것은 양쪽으로부터 반응이 있는 경우 가능해진다."


담론(discource) 지배그룹이 피지배그룹에 특정 지식, 규율,가치를 강요함으로써 진리의 장을 구성하는 체계


타자화전략

재현(representation) - 대상,사람,현상 간에 의미가 생산되고 교환되는 과정

재현은 타자에 대한 상투적이고 고정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곧 ‘정형화(stereotype)'작업 혹은 고정관념 만들기이다. 고정된 이미지를 널리 유포시키고 허위 지식을 생산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한다. 지식과 권력의 담합에 의해 타자에 대한 지배가 가능해진다.

 

정형화 작업의 기본원리는 ‘분리와 배제 그리고 봉쇄’라 할 수 있다. 정형화 작업은 힘의 불균형을 이룰 때 발생한다. 권력은 정복과 약탈이란 방식 이외에 간접적인 방식으로도 생산된다. 정신의 탈식민화를 위해서 정형화의 부당성을 간파하고 포섭당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권력행사를 위해서는 구분,구획,분류,명명의 방식에 의존한다.

 

호명을 당한 개인은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제국주의란 어느 시대나 사회에 통용되는 보편타당한 것이 아니라, 특정 시기에 특정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시적인 가치체계를 말한다. 정형화와 타자화 및 이데올로기의 호명 방식에 의한 권력의 작동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력이 수직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없는 밑으로부터 다양한 지점에서 생긴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권력에 맞서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권력은 억압적일 뿐만 아니라 생산적이기도 하다./생체권력


담론은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드러나는 세상의 모습이 일방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데 있다. 어떤 언술은 허용되고, 다른 언술은 허용되지 않는다. 분류, 배분, 순서를 정해서 만들어진 언술체계는 개개인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순응시키는 데 동원된다.

 

몇가지 노트... 



여울 2007-05-23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기고] 한국학문의 식민지성과 탈식민지성
진보의 과제 외면하는 90년대… 탈식민화, 역사와 구조 성찰서 싹터
2001년 01월 02일 (화) 00:00:00 윤건차 가나가와대 webmaster@kyosu.net

한국의 학계에서는 지금 외국 학문에 대한 의존도가 도를 지나쳐서 스스로의 주체성과 자생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소리가 나날이 높아가고 있는 듯하다. 어느 시대나 외국으로부터 배워오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세계의 모든 나라는 언제나 외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일본의 식민지시대는 물론이거니와 해방 후에도 미국을 비롯한 여러 외국에서 많은 것들을 배워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리고 ‘배워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학문의 근본에 대한 물음이다.


그렇다면 먼저 ‘학문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학문도 있을 것이다. 혹은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로 학문을 구별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외국 학문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 대한 염려는 역시 외국에서 들여온 학문이 한국사회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나 미래를 전망하는 사회진보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진보를 저해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단순하게 생각해 본다면 학문의 목적이나 방법이 확실한 상태라면 외국의 학문을 아무리 많이 배워 온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이다. 따라서 현재의 한국에서는 활발한 외국 학문의 수용이 한국 사회의 욕구와 어딘가 맞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국의 ‘탈근대’는 ‘탈식민주의’ 수반하는가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학문, 특히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이란 어떤 것인가’가 문제로 부각된다. 이는 당연히 ‘한국 사회의 역사와 구조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충분히 성숙해 있고 개선돼야 할 점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학문은 스스로 현상유지와 기득권 옹호를 위한 보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현재의 한국 사회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많은 변혁과제를 안고 있다고 진단한다면 그에 적합한 변혁의 학문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현재의 한국에서는 반공의 옷을 입은 자유주의나 기득권 옹호의 보수주의, 나아가서 자민족 중심적인 민족주의 등을 비판하면서 한국 사회의 진보, 변혁의 목표를 모색해야 나가야 하는 것이 근본적인 과제가 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의 역사와 구조를 적확하게 파악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한국 사회를 역사적·구조적으로 본다는 것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 사회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근대’라는 시대는 서구 근대의 ‘보편주의’에 의해 크게 규정되는 것인데, 이와 동시에 서구 근대의 ‘보편주의’는 타자를 억압겺㎎쳛차별하는 ‘식민주의’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최근에 유행하는 ‘탈근대’의 과제는 실제로는 ‘탈식민주의’와 동시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서구 여러 나라나 일본 등의 ‘선진국’은 근대가 초래한 여성 차별이나 환경 파괴, 소수자 배제 등의 탈근대적 과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이 해결이란 동시에 이전의 억압겺㎎쳛차별이라는 식민지주의적 행위를 반성·사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스스로의 노력을 동반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한편, 근대에 식민지 또는 半식민지였던 나라나 지역에서는 서구 근대가 획득한 긍정적인 인간적 가치를 확보하는데 노력하면서도 보다 근본적으로는 ‘선진국’의 식민지주의에 의해 야기된 마이너스의 유산을 청산하는 것이 커다란 과제이다. 당연히 그러한 노력은 근대의 달성을 지향하는 것과 함께 근대가 해결할 수 없는 탈근대적 과제에도 동시적으로 대처해 가는 것이 된다. 한국의 학문에 있어서 그 과제는 식민지근대의 과거와 현재를 냉철히 응시하면서 남북통일이라는 구체적인 과정을 이끌어가는 형태로 그 길을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한국의 학문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의 역사적겚망뗌?특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서 ‘한국 사회의 역사적겚망뗌?특질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이 되는데,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와 ‘해방’ 후의 남북분단이다. 학자나 사상가는 각각 다른 사고를 하고 있는 존재라 하더라도 한국의 근현대사가 식민지와 분단의 시대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특질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 특질의 모순이나 문제점의 해결을 진지하게 고찰한다면 외국 학문을 과도하게 배우는 행태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외국 학문에 대한 의존도가 도를 지나쳐서 스스로의 주체성과 자생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날이 높아가고 있는 현실은 외국 학문을 배우는 것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규정하고 있는 식민지와 분단의 모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90년대 이후에 그 당시까지의 마르크스주의적 사조가 분화돼 다양한 포스트모던적 사상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 현상은 결코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실제로 당시까지 경시돼 왔던 페미니즘이나 환경 문제, 소수자 문제 등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러한 문제의 중요성도 명백해졌다. 개별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민운동도 활발해져서 한국 사회가 성숙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도 분명하다. 거기에 푸코나 들뢰즈로 대표되는 프랑스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90년대의 사상 흐름을 관찰해 보면, 그러한 탈근대적 요소를 띤 사상의 활동은 반드시 80년대 한국의 유산을 정당하게 계승하고 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가 상당한 의미를 가졌던 80년대 한국은 反독재곙柴셉╂?민주화투쟁의 시대였는데, 이는 보다 큰 의미에서는 민주주의를 전진시키고 나아가 통일을 성취시킴으로써 한국에서 미완의 근대를 조금이라도 완성시키려 하는 것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 사상적 접맥 필요

거기에는 민족이나 계급, 국가가 문제로 부각되고 통일의 달성은 그러한 사회과학적 개념의 총화적 의의를 담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점에서 90년대 한국의 사상 흐름에서는 탈근대적 지향이 커다란 위치를 점함으로써 민족이나 계급, 국가의 문제가 뒤로 밀려나고 사고의식에서 탈정치화가 끊임없이 진행돼 이제는 한국 사회의 기본적 모순이 그다지 자각되지 않을 정도가 돼 버린 듯하다. 푸코도 좋고 들뢰즈도 좋다. 사이드나 기든스를 공부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것들을 공부하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한국 사회의 진보에 있는 것이다. 90년대에 모처럼 배운 페미니즘이나 환경 문제, 소수자 문제 등을 다시 한 번 자신의 머리로 음미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민족이나 계급, 국가 그리고 통일 등의 문제에 다시 의문을 던지는 노력을 한다면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한국의 미래상이 드러날지도 모를 일이다.


바깥에서 보고 있으면 한국의 지식인은 세계에서도 매우 드물 정도로 근면하고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의 변화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지식을 흡수하려는 정열은 정말로 대단하다. 세계의 모순을 직접 느끼는 입장에 놓여있기 때문이겠지만 실제로 한국의 지식인은 단순히 한국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의 ‘보편성’으로 이어지는 지적 활동을 촉구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사실, 80년대와 90년대의 한국 사상의 행보는 압축근대곀畸뮈【?놀라울만한 고뇌의 누적을 나타내면서도 계속되는 좌절을 극복하고 곤란에 당당히 맞서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분단국가 지식인의 ‘행운’

한국이 분단국가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은 지식인에게 결코 불행한 일은 아니다. 그만큼 세계의 다른 사람들보다도 많은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남북의 통일도 분리돼 있는 남과 북이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과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또한 ‘탈근대=탈식민지주의 속에서 세계의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는 ‘민족주의’ 내지는 ‘탈민족주의’ 사상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라는 과제도 생각해야 한다.


포스트주의에서 곧잘 논의되는 ‘탈국민국가’도 한국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그 대부분은 ‘탈국가주의’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전의 종주국이었던 일본이 과거청산도 하지 않은 상태여서 동아시아의 미래에 커다란 짐이 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한국의 지식인은 동아시아의 미래를 솔선해서 이끌어 나갈 패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요구된다.


거듭 말하지만 외국의 학문을 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목적과 주체성이 확실하다면 외국의 학문은 아무리 많이 배운다고 해도 지나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자각과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 각각 고립 분산돼 배운다고 할지라도 가끔은 서로의 의견이나 사상을 저술하고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기회를 마련해야 하고 손을 맞잡고 현실의 문제에 대처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90년대 시민운동의 전개는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해외에 있는 동포도 이에 함께 참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번역 장화경/성공회대·일본학

□ 약력: 1944년 교토 生. 도쿄대 교육학 박사. 가나가와대 일본근대사상사, 한국 현대사상사, 근대 한일관계사 전공 교수. 번역된 저서로 『현대 일본의 역사의식』(한길사, 1990),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당대, 2000) 등 외 다수.


여울 2007-06-11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탈식민주의와 문화주체 이동연의 문화강의

2007/02/23 16:36

http://blog.naver.com/sangyeun65/110014715632

첨부파일탈식민주의문화주체-sangyeun65.hwp
 

탈식민주의와 문화주체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흑인이란 검은 인간이다. 즉 일련의 감정적 편향의 결과로 그는 그가 빠져 나와야 할 우주의 심층에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다만 내가 바라는 바는 검은 피부의 인간을 그 스스로 해방시키는 것 뿐이다.


                                              프란츠 파농



1. 문제설정: 탈-식민주의 개념의 이해


요즘 서구의 문화적 생산물을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읽으려는 새로운 비평적인 방법론들이 자주 목도된다. 한동안 서양 문학을 연구하는 문학도들에게는 가문의 족보나 성경처럼 여겨졌던 서구 문학의 위대한 경전에 대한 해체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부르주아 텍스트에 대한 인간주의적, 신비평적 해석으로부터의 단절과, 그러한 텍스트들에 대한 전복적인 글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 여파로 소수 민족작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서구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시각에서 오래동안 벗어나 있던 텍스트들의 역사적 복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 문화 생산물에 대한 비판적인 독해들은 최근의 이론 동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그러한 독해를 이론적으로 가장 잘 뒤받침해주는 것이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가 아닌가 싶다.

국내에서도 요즘들어 탈-식민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이 개념에 대한 적절한 정의조차 공유가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탈-식민주의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구하는 것만으로도 아직 논의해야 할 점들이 많아 보인다. 사실 ‘탈-식민주의’라는 말에는 역사적인 시기구분, 인종, 지역, 성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2차세계 대전 이후의 제국주의-제3세계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그 개념을 하나의 명제로 명료하게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탈-식민주의에서의 ‘탈’(post)이라는 접두어가 80년대 이후부터 지속되고 있는 이른바 ‘포스트주의’의 파급효과에서 나온 것임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예컨대 포스트주의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를 같은 문화적 맥락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들이 있다. 탈-식민?! 聆풔? 미국 다원주의 대중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이후의 프랑스 철학을 대변하는 탈구조주의에서는 발견되기가 힘든 서구와 제3세계 사이의 구체적인 정치적, 문화적인 억압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탈구조주의 역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며, 탈-식민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들의 방법론이 탈구조주의의 몇몇 핵심 개념에 의존하고 있지만, 이들의 이론들은 담론투쟁을 통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자신의 정치적 전략을 구체화한다는 점에서 앞의 이론들보다 더 현실개입적이고 세속적이다.

한편 “‘포스트콜로니얼’이라는 용어를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해서 독립을 쟁취한 후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 과정의 피해를 본 모든 문화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1)는 지적은 각 민족-국가의 식민지 역사와 문화적 상황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너무 일반화시키는 정의이다. 또한 패트릭 윌리암스(Patrick Williams)나 로라 크리스만(Laura Chrisman)의 언급 처럼 식민지 군사지배가 종결되었지만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결합되는 ‘신식민지적 상황’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탈-식민지란 용어를 문제없이 사용하기에는 많은 장벽이 있다.2) 앤 맥클린토크(Anne Mcclintock)는 이전의 식민국가를 탈식민국가로 간주하는 것은 유동적이며 논쟁적임을 강조하는 데, 왜냐하면 핵심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이 자신이 계속해서 무기를 대주고 적대의 분위기를 조장시킨 그 국가를 상대로 걸프만에 무력개입하고, 박애주의를 가장하여 소말리아에 군사적인 개입을 감행한 것, 이런 모든 사실등은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시기에 행했던 태도들과 전략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이 남아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3) 그리고 탈-식민주의를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에 의거해서 설명하려는 논의도 있다. 서구의 제국주의 역사를 크게 4단계로 구분할 때, 통상 그 용어가 사용되기 전인 레닌 이전의 맑스의 단계, 자본주의의 최후의 단계로 지칭한 레닌의 제국주의 단계,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독립한 신식민지적 단계, 그리고 세계화 시대의 다국적 자본?! 聆?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4번째 단계를 탈-식민주의의 단계로 말하 는 것도 제 3세계 국가 내의 경제적 발전의 불균등성을 고려하지 않는 바이겠다.

이런 저런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포스트콜로니어리즘에서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후기’로 사용되건 ‘탈’로 사용되건 그 자체로 완전한 경계긋기란 불가능하며, 그런 점에서 기술적인 쓰임 역시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문제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마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요한 것이 ‘근대성’, ‘근대주의’(modernism) 또는 ‘근대화’(modernization)에 대한 성격규정이듯이, 바로 식민지적인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용어 사용자의 비판적 인식이다. 예컨대 현재의 제 3세계적 상황을 식민주의가 완전히 청산된 상황으로 본다면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은 단절의 의미가 강한 탈-식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서구의 지배 담론이기가 쉽다. 거꾸로 현재의 상황을 2차 세계 대전까지의 제국주의 지배가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으로 본다면 ?! 怠뵈?콜로니얼리즘이란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게 되며, 그것은 오히려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에 가깝다. 이 두 입장은 현재의 제국주의-제3세계 사이의 사회적 성격을 지나치게 ‘단절’로 낙관하거나, ‘종속’으로 비관하는 양극단의 태도를 보이는 데, 이러한 태도는 세계화와 지역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동과정에서 제 3세계적 실천의 담론적, 이데올로기적 장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용어 사용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미 탈-식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셈이 되었는데, 이 때 ‘탈’이란 접두어는 식민지 시대와의 단절이라는 확정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뒤의 본말(식민주의)과 접합 시에 대단히 유동적이고 불확정적인 의미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필자가 ‘탈’과 ‘식민주의’ 사이에 거리를 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말하자면 ‘탈’이라는 의미는 논의되는 대상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는 것이다. 예컨대 탈-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식민주의 담론과 투쟁할 때 ‘탈’의 의미는 ‘반’(anti)의 의미에 가까우며, 파농과 사이드의 식민지 담론이나, ‘네그리튜드’4)(Negritude)와 같은 본질론적인 민족주의! 를 비판할 때, 그 의미는 ‘연속’의 의미에 가깝다.

탈식민지주의 개념과 연관해서 한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그것을 하나의 ‘담론적(이론적/비평적) 실천’으로 제한해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은 직접적인 정치적 해방을 요구하기 보다는 서구의 역사에 공고하게 자리잡은 동양인, 혹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지식-체계를 해체하고 전복하려는 대항 담론을 내세운다. 그러한 대항담론은 70년대 ‘종속이론’이나 80년대 ‘신식국독자론’과 같이 ‘제 3세계의 독자적인 해방이론을 정립하는 것이기 보다는 서구의 지식-체계에 스며든 동양관의 이데올로기를 밝혀내고, 한편으로는 그러한 서구의 지식-체계와 문화적 관습과 조응해서 형성되는 제 3세계 주체들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일종의 해석적인 실천인 것이다.

담론적 실천으로서는 탈식민주의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오리엔탈리즘󰡕 이후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이 푸코의 계보학과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결합해서 서구의 지식체계에 대한 전복적인 글읽기를 시도했다면, 가야트리 스피박(G. Spivak)은 데리다의 해체주의, 호미 바바(H. Bhabha)는 프로이트와 라깡의 정신분석학, 아이자 아마드(A. Ahmad)는 맑스주의. 찬드라 모한티(Chandra Mohanty), 사라 술레리(S. Suleri)는 페미니즘을 각각 자신의 이론의 축으로 삼아 식민지 담론들에 대해 좀 더 정교한  비판을 가한다. 본 글은 각각의 이론가들을 개별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탈식민주의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각 이론가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은 필자의 주를 참고하기 바! 란다. 


2. 식민지 주체형성

   

반식민지 저항이론의 선구자인 프란츠 파농은 1925년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서인도 제도의 한 섬에서 태어났다. 1943년 알제리 내전에 참가한 그는 아프리카에서 서구인들이 자행하는 폭력을 목격하면서 식민지 저항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953년 이후 알제리 쥬앵빌 병원에서 5년간 일하면서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하게 되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서구인들에 대한 독특한 컴플렉스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검은 피부, 흰 가면󰡕(Black Skin, White Mask)5)은 그가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만난 알제리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히 서구(프랑스)와 서구인들을 직접 경험한 정신질환자들은 서구에 대한 공통적인 선입관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서구인들을 우월하고 지적이며, 흑인들은 열등하고 야만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이다. 정신질환자들은 이 이분법이 가하는 공포에 시달리며, 그것을 거의 진리처럼 믿으며 자신의 사고관이나 행동양식을 그 이분법적인 신화에 맞추며 살아간다. 파농은 백인의 우월감이나 흑인 열등감의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흑인들의 컴플렉스를 형성시킨 감정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흑인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해석만이 유효하다고 말한다(10쪽).

파농은 그 정신분석학적 해석에서 언어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언어현상을 통해 유색인들은 백인의 차원을 이해하는 방법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파농이 고찰한 바에 의하면 서인도 제도의 흑인들은 프랑스어를 자기의 국어로 하면할수록 보다 더 백인에게 가까와진다는 점, 바꿔말하면 한층 더 진짜 인간에 가까와지는 것으로 믿는다. 식민지 원주민은 지배 국가의 문화적 규범을 자기의 가치로 여기면 여길수록 정글 속에서 탈출할 수 있게되고 피부의 검은 빛, 즉 미개발 상태를 부정하면 할수록 백인에게 가까와진다(19-20쪽). 프랑스 언어는 따라서 백인과 흑인을 묶어주는 하나의 지주가 되면서, 프랑스인이 되고 싶은 서인도 제도의 흑인들은 언어를 통해 프랑스의 문명과 의식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한다. 이는 언어과정을 통해 흑인 주체들이 자신을 프랑스인으로 형성하?! ? 바라고, 자신과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동일화하려는 욕망을 꿈꾸는 일종의 자기 컴플렉스의 징후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파농은 흑인들의 컴플렉스를 검은 피부의 여자와 유럽남자, 검은 피부의 남자와 유럽여자와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흑인들에게는 자기의 개별성으로부터 도망가고 자기현존을 파괴하려는 신경증적인 소외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시한다(61쪽). 흑인들의 자기소외는, 예컨대 파농이 분석한 백인 남자와 사귀고 있는 서인도 흑인 여성 메이요트 카페시아처럼 백인의 주위를 끌려는 자기고립, 보호적인 자질을 획득하려는 화고한 의지, 백인처럼 강해지고자 하는 관심으로 이어져 이런 것들이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는 부분으로 변하게 된다. 파농은 이런 컴플렉스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라기 보다는 백인이 흑인들에게 은연 중에 강요한 허위의식과 그 허위의식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흑인들의 동화작용이 만들어낸 가상효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나의 혼이 가장 검은 부분으로부터 얼룰! 덜룩한 줄무뉘를 따라 갑자기 백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오른다”라는 발언은 특히 백인 사회에 살고있는 흑인들의 주체 형성을 지배하는 무의식적인 측면이다. 흑인들은 이 무의식적 욕망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비난하거나, 자신의 가치를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닌 기형적인 형태로 만들게 하다. 파농은 바로 여기에서 흑인들의 신경증적인 컴플렉스가 생긴다고 보고, 그것을 치료해주는 것이 중요한 실천으로 생각한다. 파농은 백인들이 강요한 허위의식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치료술로 세계를 다시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85쪽)고 역설하는데, 그의 그러한 생각은 흑인 자체의 우월성을 반대급부로 내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소외로부터 해방으로가는 흑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미리 결정하지 않고 스스로 “오, 나의 육체여”(235쪽)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끝임없이 던질 때 진정한 자기모습을 찾을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파농이 식민지 주체의 정신병리학적인 형성과정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팔레스틴 츨신 사이드는 서구 지식-체계의 담론과정에 주의를 기울인다. 사이드는 팔레스틴인이면서도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슬람교도가 아니라 기독교인인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미국을 비롯한 서루 제국주의의 강력한 비판자이면서도 동시에 회교 분리주의에도 반대하는 그의 정치적 입장의 배경이 되고 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이론은 무엇보다도 서양과 동양의 이분법적인 사고관에 대한 해체를 핵심 전략으로 삼는다. 문명/야만, 선/악, 정교도/이교도, 물질/정신과 같은 서양과 동양에 대한 이분접적인 사고관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를 사이드는 방대한 서구의 문학 텍스트와, 역사문헌 등을 통해 검토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오리엔탈리즘이란 “오리엔트, 곧 ?! 옛玲? 관계하는 빙식으로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으로 “문화적이고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적인 그러한 동양의 모습들을 제도나 어휘, 학문, 심상, 강령, 심지어 식민지 관료체제나 식민지적 스타일에 도움을 받아 하나의 담론 양식으로 표현하고 표상하는 것”6)을 의미한다. 좀 더 압축해서 말하자면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권위를 세우려는 서양의 스타일이다(3쪽). 사이드가 추적하고 있는 점은 서양의 정치적인 폭력과 탄압의 증거들이 아니라, 서양의 동양에 대한 지식 축적 과정 속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그렇지만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표현들과 스타일들이다. 그래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하나의 하나의 담론으로 고찰하지않고서는 유럽문화가 동양을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군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고 과학적이고 상상적으로 다루어왔고 생산했던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이드는 푸코의 ‘지식-권력’ 개념과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결합해서 오리엔탈리즘의 담론 효과를 설명하고 있는데, 푸코에게서는 동양을 담론화하는 서구의 역사적 문헌들의 권력 의지를, 그람시에게서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불군등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각각 읽어내고 있다. 특히 사이드는 그람시의 시민사회의 헤게모니가 지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의(consent)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서구가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서구밖의 문화에 대해 “우월한 입장”을 차지하는 것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점을 오리엔탈리즘의 주요한 작통 메카니즘으로 본다. 요약하자면 오리에탈리즘에 의한 서양과 동양의 관계는 그의 말대로 “권력과 지배, 그리고 다양하고 복잡한 헤게모니의 관계이다”(5쪽)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하나의 이론적인 문제설정으로 정하면서 직면한 문제들을 세가지로 말하는데, 그것이 순수한 지식과 정치적인 지식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둘째는 방법론 상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문제설정(problematic)을 말하는 전략적인 위치(strategic location)와 전략적인 구성체(strategic formation)에 관한 것이고, 세째는 개인적인 자신의 위치가 갖는 특이함에 관한 것이다. 첫째는 문학 연구가로서의 자신의 입장이 결국은 정치적인 효과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자신이 연구하려는 방대한 분야의 문헌들과 문학 텍스트들이 직간접적이든 제국주의 권력의 작용점으로 작동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는 자신이 쓰고 있는 동양에 관련된 자료와 관련하여 저자가 그 텍스트 안에 어떤 위치에 있는가하는 점을 기술하고, 텍스트들과 텍스트! 들의 그룹과 유형들이 나중에 문화전체에서 대량화 되고, 농밀하게되고, 지시적인 권력을 갖게되는 방식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다(20쪽). 그리고 세번째는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팔레스틴 지식인으로서 가장 효과적인 제국주의 투쟁이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슬람의 정치적, 문명적 오리엔탈리즘을 교정하기 위한 “기록의 싸움”임을 강조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서양의 동양 지식은 동양의 진실이 아니라 단지 권력과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한 표상일 뿐이다.


3. 하위주체와 모방의 주체


사이드와 함께 현재 탈식민주의 이론 진영에서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야트리 스피박과 호미 바바는 식민지 담론의 대전제라 할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작동방식을 문헌적인 분석과 같은 계보학적인 접근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고 있다. 예컨대 억압당한 식민지 주체의 정신치료술을 위한 파농의 분석이 식민지 주체의 정신구조를 해체하고 있고, 제국주의 담론의 구성과정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하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론은 서구 주체의 담론 구성체를 해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식민지 담론을 둘러싼 이 대립주체들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규명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스피박과 바바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인데, 이들의 논의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대전제가 놓치고 있는 식민지 주체 자체의 복잡한 구성 형태를 미세하게 읽어내?! ? 있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이론적 구체화이자, 한편으로 오리엔탈리즘이 자칫 빠지기 쉬운 계보학적, 이데올로기적 분석 수준을 극복하는 새로운 이론틀이라 할 수 있겠다. 좀 더 부연하자면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론이 기본적으로 제국주의 담론의 형성과정만을 주로 언급하는 것과는 달리, 스피박과 바바는 ‘주체화 양식 과정’(타자화과정)과 ‘담론 과정’에서 서구와 비서구의 비선형적이고 불확정적인 경계를 문제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스피박과 바바에게 서구/비서구 주체,  혹은 서구/비서구 담론의 이분법적인 경계는 지도상에 그려진 추상적 구획처럼 실제로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요하는 지형이다. 이 동요의 관계를 스피박과 바바는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사이의 동요의 관계로 파악한다. 요약하자면 이들은 지배/피지배의 문제를 어느 한쪽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절합관계에서 나오는 ‘효과’로 본다는 점에서 식민지 주체를 의식적인 주체로 보려는 이전의 방식과는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스피박은 󰡔하위주체 연구󰡕라는 책 서문에서 하위주체 연구(subaltern studies)에 대한 본질론적인 민족주의와 계급주의 평가를 피하고, 그들의 주체-의식을 해체주의적인 관점에서 읽어내고 있다.7) 「하위주체 연구」는 구아(Guha)가 중심이 되어 인도의 하위문화를 연구를 하는 그룹으로, 푸코식의 계보학적인 접근과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방법론으로 사용하여 인도 역사의 지식-권력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그룹이다. ‘하위주체’는 인도의 민중계급이 아니라 지배계급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지식인 그룹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 하위주체 그룹에 대한 스피박의 평가를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하위! 주체’, ‘하위주체 연구’, ‘하위주체 연구 대상’을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피박은 주로 하위주체들의 순수하고 자명한 의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들이 연구해온 담론들의 재현가능성에 대해 의문시하려는데 이 때 하위주체는 의식적인 차원에서, 하위주체 연구는 담론적인 차원에서, 하위주체 연구 대상은 재현의 차원에서 각각 부정되고 있다.

스피박의 표현에서도 나타났듯이 “하위문화 연구의 작업 안으로 들어가 그것의 결을 거스르는 것”(13쪽)이 그녀의 하위주체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인데, 말하자면 하위주체연구의 의식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해체주의적인 시각으로 다시 재구성하려는 면을 이 글에서 발견할 수있다. 스피박은 하위주체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위주체들이 연구하는 민중계급들(소작농, 봉기자들)과 그들을 이론화하고 지식화하는 부르주아 주체들과 그들의 지식 담론을 구분하려고 하며(예컨대 ‘담론적 치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 전자의 텍스트 재현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이 의도는 결국 이글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하위주체들의 의식의 결정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의식의 순수성, 그 의식 실천의 관념론적 성격을 비판하기 위해 스피박은 이 글에서 크게?! ? 맑스와 데리다(좀 더 넓게 말하면 알튀세르의 ‘주체없는 과정’, 혹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과 푸코의 계보학까지 확장된다)를 결합하고 있으며, 특히 주체의 실천의식의 전통적인 틀이라 할 수 있는 “계급의식”의 문제를 데리다의 ‘차연’ 개념을 통해 그 관념적 성격을 지워내고 있다. 요컨대 맑스의 계급투쟁의 핵심 논점이라 할 수 있는 낡은 계급관계에 대한 청산(sweep away)의 문제를 맑스가 본래 사용했던 지양(Aufheben)의 개념이 갖는 이중적인 의미(유지되면서 동시에 끝장내는)에 주목함으로써, 계급의식에 대한 명목론(nominalism) 관점, 즉 주체-효과로서의 계급의식을 독해해 내고 있다. 주체-효과로서의 계급의식은 주체의 정체성의 이질적인 요소들에 의해 구성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언급이 그런 견해를 뒤받침해준다.


주체-효과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구성될 수 있다. 하나의 주체로 작동하는 듯해 보이는 것은 정치학이나 이데올로기나 경제학이나 역사나 성이나 언어 등등으로 불릴 수 있는 가닥들의 광대한 불연속의 네트웍의 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것들 자체가 수만가지 환경에 의존하는 이질적인 결정체들에 의해 이러한 가닥들의 다른 매듭과 형태배치들은 작동하는 주체-효과를 생산한다(12-3쪽).


스피박이 하위주체 그룹에 대해 언급하는 ‘자기소외’나 ‘부정적인 의식’과 같은 말들은 제 3세계 지식인 주체들의 실천에 있어 통상적인 시각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통상적으로 제 3세계적 지식인 주체의 실천은 오히려 스피박의 언급과는 정반대로 ‘자기해방’과 ‘긍정적인 의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해방’과, ‘긍정적인 의식’은 여전히 서구/동양의 이분법을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을 전제로한 것이기가 쉬었고, 그것이 자명한 민족주의적인 의식과 민족이데올로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고 있었다. 스피박의 해체주의적인 분석은 제 3세계 주체들의 본질론적인 정체성을 거부하고 주체-효과가 생산해 내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정체성의 생동적인 모순관계를 포착한다. 스피박에게 있어 계급과 계급의식은 어떤 결정된 실체가 아니라 ! 데리다 식으로 부단히 차이를 두고 지연시키는 ‘주체-효과’이다.

스피박의 논의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하위주체 의식을 동일성 보다는 차이를 통해 인식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주체로 작동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은 정치학이나 이데올로기나 경제학이나 역사나 성이나 언어 등등으로 불릴 수 있는 가닥들의 광대한 불연속의 네트웍의 부분이 되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가 수만가지 환경에 의존하는 이질적인 결정체들에 의해 이러한 가닥들의 다른 매듭과 형태배치들은 작동하는 주체-효과를 생산한다. 스피박은 주체를 구성하는 수준에서 “계급”은 결국 인간의 생동성에 대한 절대적인(inalienable) 기술이 아니며 기술적인 수준에서 계급의식은 그 자체로 전략적이고 인공적으로 재편하는 인식이다라고 말한다. 그 인식은 변형적인 수준에서 집단 의식이 상황에 따라 발전해왔던 바로 그 계급의 윤곽을 구성한 기제들을 파괴하고자 하며, 이 때에 작취?! ? 지배의 사회적 장 내에 계급 혹은 집단성의 “의식”의 임무는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자기소외적이라고 스피박은 생각한다. 그녀는 집단성 의식이 자기를 소외시키는 치환하는 운동, 그리고 집단성의 의식에 의한 그런 운동에서 생겨나는 전략적인 이해관계의 틀 속에서 자기결정과 소외되지 않은 자기 의식이 제기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그녀의 언급은 하위주체 연구 그룹들의 부르주아적 의식에 대한 비판으로 보여진다. “주체를 마비시키지 않고, 블가능성의 조건들을 가능성으로 지속적으로 변형시기면서, 탐구 주체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9쪽) 이른바 해체주의적인 전략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스피박이 “하위 주체는 말할 수 없다”8)라고 단정한 것은 그들이 어떤 완결되고 고정된 담론 형태와 주체의식을 갖을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하 하겠는데, 이러한 그녀의 주장이 결국은 하위주체들의 연구만이 아니라 모든 반식민지적 실천의 무효성을 주장하는 데로 나가는 것은 아닌지하는 ! 의문이 든다. 

한편으로 스피박이 하위주체 연구 그릅들의 의식들과 그들의 담론 형태를  평가하는 자리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연구가 제국주의 담론에 흡수되지는 않았나하는 점에 대한 지적이다. 󰡔식민지 담론과 탈식민지 이론󰡕의 편자인 윌리암즈와 크리스만이 언급하듯이 하위주체가(the subaltern)가 식민지적이고 자국 제국주의적 담론과 주체성에 반성적인 역할보다는 구성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가하는 점에 대한 비판이다. 하위주체는 식민주의자가 자신의 이론화를 진척시키기 위해 식민지 이전에 구성된 주체성과 지식, 원주민의 현존, 위치, 정치적 저항을, 식민지 담론의 결정적이고 주요한 역할로 삼았던 것보다 더 구성적인 역할을 한 면이 있다(16쪽 참고). 

스피박이 해체주의의 입장에서 식민지 담론을 재구성하고 있다면 호미 바바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라캉의 욕망이론을 통해 식민지 담론의 양면성(ambivalence)을 지적해내고 있다. 바바는 식민지 담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타자성(otherness)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하는 데 있어 ‘고정성’(fixity)의 개념에 의존하는 것.9)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서구인 대 비서구인의 관계를 고정시켜 그 안에 선/악, 문명/야만, 이성/감정과 같은 항을 대입시키는 정형화된 틀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바는 그러한 고정성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그 경계가 대단히 모호하고 양면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본다. 식민지 담론에서 문화?! ?/역사적/인종적 차이의 기호로서 고정성은 역설적인 재현 양식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질서뿐만아니라 무질서, 타락, 악마적인 반복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형화(sterotype)는 항상 그 자리에 있고 이미 알고있는 것과, 계속 반복되어야 하는 것 사이에 동요하는 지식과 동일화의 형태이다. 따라서 이러한 식민지적 정형화를 통하게 만들고, 변화하는 역사적 담론적인 국면에서 그 정형화가 반복되게 만들고, 그 정형화가 개인화와 주변부화의 전략들을 알려줄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양면성의 힘 때문이다(66쪽).

바바는 이러한 식민지 담론의 양면성을 모방(mimicry)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바는 식민지적 모방은 다시 만들어지고 공인된 타자, 즉 거의 동일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는 차이를 가진 주체로서의 타자를 욕망한다고 말한다.10) 이는 모방의 담론이 양면성의 주변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방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계속해서 자신의 미끄러짐과 초과와 차이를 생산해야 하는, 즉 양면성을 생산해야 한다. 그래서 바바는 모방이라고 명명했던 그런 식민지 담론 양식의 권위는 미결정성이란 말로 집약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모방은 그 자체로 자신을 부인하려는 차이를 생산한다. 즉 모방은 타자를 전유할 ! 수 있는 조절과 훈육의 전략이지만, 반대로 식민 권력의 지배적인 전략 기능을 수미일관하게 하고, 복종을 강화하며, 표준적인(normalized) 지식들과 휸육적인 권력에 내재적인 위협을 가하는 전유할 수 없는 것의 기호, 즉 차이와 고집의 기호이다. 이러한 모방의 양면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위협이 될 수 있다. 모방의 위협은 식민지 담론의 양면성을 폭로하는 것과 동시에, 그 담론의 권위를 분열시키는 이중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바바가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것의 회귀”(the return of the repressed)를 언급하면서 모방의 양면적인 성격에서 기대할 수 있는 식민지 주체의 저항을 은밀히 읽어내려는 것도 이러한 이중의 비전과 맥락이 닿아있다. 그러나 바바가 말하는 모방의 과정이 식민지 주체의 저항의 가능성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라캉의 환유 개념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면이 분명 존재한다. 바바가 “식민지 모방의 욕망은  현존의 환유라는 전략적인 대상들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 것은 라캉의 환유개념에 기댄 설명인데, 이것이 식민지 주체의 저항의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어려운 것은 기본적으로 라캉?! ? 환유개념은 욕망의 결핍, 즉 요구의 실제 대상을 소유하지 못하는 기표의 치환만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바가 말하는 ‘모방의 양면성’이 식민지 담론을 전복하는 어떤 설명 틀이 되기위해서는 모방의 욕망이 표상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들뢰즈 말대로 그 자체로 생산적인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4. 이산과 문화정체성


지금까지 파농과 사이드, 스피박과 바바를 통해 주로 주체과정과 담론과정의 복잡한 관계를 다루었다. 탈식민주의에서 실제로 중요한 실천은 이러한 담론적인 실천 외에도 과연 식민지 주체의 정체성을 어떻게 사고해야 할가하는 정체성의 정치학도 중요한 문제이다. 식민지 주체하면 우리는 통상적으로 서구 주체에 의해 억압당하는 타자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나 타자로서의 식민 주체는 그 내부에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백인/비백인(white/non-white) 관계는 수많은 인종적이고 종족적인 이질성 속에서, 일자/타자(the one/the other)의 관계는 계급, 성(sexuality), 성차(gender)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듯 식민 주체의 정체성은 대립적인 서구 주체와 이항을 이루어 단순하게 단일한 실체성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 질적이고 모순적인 속성 속에서 서구 주체와 관련을 맺는다.

일례로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언급한 카리브인들의 이산의 정체성을 들어보자. 홀은 문화 정체성을 말할 때 두가지 입장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입장은 문화 정체성을 하나의, 공유된 문화, 즉 일종의 집단적 ‘하나의 진실한 자아’라는 견지에서 정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우리의 문화 정체성들은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공유된 문화적 코드들을 반영한다. 두 번 째 입장은 유사성을 말할 수 있는 많은 요점들이 존재한다는 것 뿐이라 우리 실제 존재(아니 오히려 역사가 개입된 이래로, 우리가 되어온 존재)를 구성하는 심오하고 중요한 차이에 대한 비판적인 요점들도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홀은 하나의 경험과 하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것의 다른 측면들, 즉 카리브인의 독특함을 구성하는 파열들과 불연속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카리브인들의 정체?! 봉? 올바로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11) 홀은 문화 정체성은, ‘있음’(being)의 문제만이 아니라 ‘되어감’(becoming)의 문제이며, 과거에 속해 있는 것처럼 미래에도 속해 있고, 어떤 본질화된 과거에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와 권력의 지속적인 ‘유희’에 종속된다고 말하면서 ‘식민지적 경험’의 상처깊은 특정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입장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강조한다(394쪽). 그래서 홀은 카리브인의 문화 정체성은 유사성과 연속성의 한 축과, 차이와 균열의  다른 축이 존재한다고 보고, 이 두 축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에 의해서 정체성은 구성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카리브인들의 정체성을 살펴보면 그들의 현존은 크케 아프리카적 현존과 유럽적 현존, 아메리카적 현존으로 분리되는 이산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결국 홀이 의도하려는 이산의 경험은 본질과 순수성에 의해서 정의되는 게 아니라 필연적인 이질성과 다양성을 재인지하는 것에 의! 해서 정의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차이와 함께 사는, 설사 그렇지 않다해도 , 차이를 통해 사는 정체성의 개념에 의해서, 즉 혼종에 의해서 정의된다. 이산의 정체성들은 변형과 차이를 통해 스스로를 새롭게 항상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그런 것이다(402쪽). 


5. 식민지 근대와 여성주체


한편 식민지 주체의 인종적인 정체성을 이야기 할 때,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논의는 중요한 문제임도 불구하고 제대로 언급되지 못했다. 술레리의  지적대로 당대 페미니즘 담론에서 탈식민주의는 문화 전투장에서 지유롭게 떠다니는 메타포나 인종의 역사성을 위한 쓸모없는 기표로 읽히는 경향이 있다.12) 특히 국내의 민족주의 담론에서 여성과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않는 실정이다. 제국주의 지배과정에서 여성들이 당한 이중의 억압, 말하자면 가부장제와 제국주의의 동시적인 억압은 유발 데이비스(N. Yuval-Davis)와 안티아스(F. Anthias)가 언급하듯이 여성들과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것은 국가적, 민족?! ? 과정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역동성은 탈-식민주의적이고 식민지주의적인 담론 이론 양자에 모두 핵심적인 쟁점이 되는데, 왜냐하면 민족성이 젠더와 관련된다면, 젠더는 노동과 국가에 대한 질문들과 관련되기 때문이고, 그것이 또 노동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그 노동의 요소가  공식적으로 인정이 되든 안되든 가부장적인 담론 내의 여성의 구성이 물질적, 가사적, 성적인 노동들의 구성과 뗄 수 없기 때문이다.13) 한편으로 데니즈 칸디요티는 이슬람 국가가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문제가 민족주의 기획들 내부로 흡수되어 들어가는지를 설명한다. 칸디요티에 따르면 주권을 가진 민족-국가 내에서의 시민주의로 요약할 수 있는, 여성이 근대적 민족성에 통합되는 과정은 남성의 궤도와는 약간은 다른 궤도를 따른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여성들은 비록 민족에서 그들의 중심성이 항상 재확인된다해도 정치의 주변부로 전락하기 때문이다.14)

식민지 주체의 정체성을 말할 때, 우리는  늘 서구인들의 정체성과 대비시켜 언급하곤 한다. 압둘 잔 모하메드(A. JanMohamed)가 언급하듯이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사이의 관계에는 마니교적 이분법(선/악, 어둠/밝음 등)이 항상 작동되어 이 이항 대립을 고착화시킨다. 그런데 사실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이나, 바바의 ‘양면성’은 완전히 고착화된 이항 대립에서 식민지 지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의 동요와 불안정성, 그리고 헤게모니적인 접합에서 나온다. 식민지 주체의 정체성을 사고할 때, 이 경계의 동요와 공백 지점을 중요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식민지 지배의 작동 메카니즘을 인식하는 것 뿐아니라 바로 여기서 관념적이고 의식의 수준을 넘어선 저항의 계기들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 경계의 동요에 관여하는 식민지 주체의 정체성은 그 식민지적 지배가! 폭력적인 것만이 아니라 더 비가시화되고, 상징적이게되고, 문화적이게 되는 현재의 ‘후기식민지적’ 상황(이를 다문화주의 시대, 혹은 세계화와 지역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시대로 정의할수도있겠다)에서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성질을 드러내게 된다. 예컨대 식민지 주체의 정체성은 계급, 성, 종족, 인종, 성차라는 심급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중층결정되어 있다. 식민지 주체의 청체성을 대립관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차이와 모순의 관계를 함께 사고하는 인식적인 지도그리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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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연두부 > 상처와 눈부신 햇살에 대하여.......
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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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깜박 나를 잊고 출근버스에 올랐다

어리둥절해진 몸은

차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방문 밀치고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챙겨가지 못한 나를 찾아보았다

화장실과 장롱 안까지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집안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몇 장의 팬티와 옷가지가

가방 가득 들어 있는 걸로 봐서 나는

그새 어디인가로 황급히 도망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쉬고 싶어하던 나에게

잠시 미안한 생각이 앞섰지만

몸은 지각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점심엔 짜장면을 먹다 남겼고

오후엔 잠이 몰려와 자울자울 졸았다

퇴근할 무렵 비가 내렸다

내가 없는 몸은 우산을 찾지 않았고

순대국밥집에 들러 소주를 들이켰다

서너 잔의 술에도 내가 없는 몸은

너무 가벼워서인지 무거워서인지

자꾸 균형을 잃었다 금연하면

건강해지고 장수할 수 있을 것 같은 몸은

마구 담배를 피워댔다 유리창엔 얼핏

비친 몸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옆에 앉은 손님이 말을 건네 왔지만

내가 없었으므로 몸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산 없이 젖은 귀가를 하려 했을 때

어딘가로 뛰쳐나간 내가 막막하게 그리웠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 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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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5-22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두 부에게서 퍼 오고 편집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대학 졸업할 때 쯤이나 나를 세상에 팔아먹었는데, 요즘은 더 일찍 팔아먹는 것 같습니다. 공모한 세상의 성화에 점점 더 일찍 일찍... 마른 영혼은 더욱 더 대학에서 쥐어짜대고, 팔려나간 나는, 팔려나갈 나의 복제품들은

은퇴하기까지 건망증 뽕에 맞아 깨어나질 못하거나, 끊임없이 뽕을 주사하는 (나-너)의 질주

마른 영혼하나 , 버린 영혼 하나 구걸도 못하고, 연신 싸게 파세요라구 할 수 밖에 없는 무한궤도


달팽이 2007-05-22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하나 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회 되면 접해 봐야겠어요..

여울 2007-05-22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권 사야겠네요. 영혼이 갈증을 느끼는 것 같군요. ㅎㅎ
 

 

 탈식민주의 관려 책들을 고르다가, 지적욕구가 , 앎이 일상으로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만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그 앎이 온통 머리만 살지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새삼스럽지 않은 것을 새삼스러운 듯 느낀다.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기위한 도구일 뿐, 습속과 무관한 별개의 것이라고 여겨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머리도 몸도 남아나지 않아 진작 합리화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거꾸로 생각하면 이 생각도 파쇼적이다. 앎이 일상으로 녹아내려야 한다고 강박하는...상황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몸으로 읽고 녹아내리게 만드는 것이 별개의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진작 알아야 했을 터인데

앎은 행복한가, 앎이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는가

삶은 행복한가, 삶이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는가

앎을 즐기는가

삶을 즐기는가

앎과 삶이 만나는 곳은 없는가

이미 즐기는가로 만났음에도 앎과 삶은 그렇게 유별한가

이간질은 누가-어떻게-왜 하 ㄴ,ㄹ 것인가

 

 

 조급하지만, 조급하지 않은 흔적,

 곧 대선이고, 이후 곧 총선이다.

 어김없이 다가오는 선거국면에 냉소를 떨기위해 덧보태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되새김길, 아니, 족적에 대해 아픈거나 기쁜 일들에 조율할 줄아는 능력을

 아니, 그럴 대면에 대해 느끼고 싶은 감정이 사실이다.

 

 범벅으로 우리에 대해 흐느끼고 나누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은 더구나 아니지만,

 함께 무엇을, 즐기고, 나누거나 하고싶은 점에 대해

 대변이 아니라 한 꼭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한결 같은 터,

 

 그 동선까지 자네는 고민하고 있는지, 품고 있는지,

 지금만 생각하고 있는지, 지난 일만 생각하는 것인지

 나누고 품고, 고민하는 것은 별개의 일인지...   ...

 

 당신은 무엇을 품고, 나누고, 하고픈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어떻게 자양분이 되는지,

 고추 잎처럼 쑥쑥 커버리는 지,

  자고 큰일에 대해 함께 품어나 본 것인지?... ...

 

080807  메모

1과 3연대(비움과 나눔의 사치)

목표하는 것의 1/3을 덜고 생긴 것을 환산하고, 셋으로 나눕니다.
어떻게에 대해 3배수로 고민을 숙성합니다.(3번의 다른 방향, 다른 의견)


자自계計부
줄이기 - 4끼가 아니라 3끼, 인스턴트 1/3로 줄이기, 가공식품 1/3로 줄이기, 육식 1/3로 줄이기, 1/3 차량이용, 1/3로 줄이기, 언플러그 1/3로 해보기
모으기 --- 모으고 3으로 나누는 방법에 대해 세번,세사람, 세번 해보기

늘리기 - 자계부의 소통, 3달 해보기, 3달치 나눠보기
만들기 -


환산하여야 합니다. 철저히 - 자본으로 환산하고 인간과 사회적 가치로 역환산하는 것만 유통될 수 있습니다.

세번을 다르게 품는 이유 - 앞으로 생길 일에 대한 근기와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다르면 다를수록 현실감은 더 있습니다. 이해하지 말고, 논쟁하고 토론하여야 합니다. 내 입장이 아니라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논쟁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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