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착취원을 바탕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최근 2-3세기에 걸쳐 전 지구적인 장을 만들어 냈다. 전 자본주의 단계는 타자를 구성해내고, 주체와 구별해내는 작업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해왔고, 존립근거인 노동력을 착취해내는 구조적 작업을 해 온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부일처제, 가부장제, 가족 울타리란 이데올로기와 공간의 생성은 자본주의가 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과정과 함께 이루어졌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초과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외화되지 않은 노동을 찾아내고 구조화한다. 그 구조화는 말단에 상품도 될 수 없고, 선택할 수도 없는 늙은 창녀, 장애인, 병자와 같은 사회적으로 배척된 존재를 만들어 낸다. 그 전단계로 입에 풀칠만 할 정도의 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가사노동-어린이 노동 착취 시스템이다. 이것은 자본 시스템에 포섭된 기술력의 발전은 평균적으로 여가시간을 더 만들어내지 않는 것과도 유사하다. 당연한 구조로 정착되어 그 상태에서 더 높은 효율을 요구하고, 더 낮은 임금의 수평적 확대를 욕망한다
백인 남성 부르조아의 이데올로기와 자본은 불과 2-3세기 만에 일국내 자본가-노동자의 구조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위계와 제4세계라 할 수 있는 노동의 하위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지배/피지배의 위계는 백인남성 부르조아라는 1차원의 무게에서 끝단으로 갈 수록 배가되어 백인여성 - 유색 자본가 - 유색여성 -민족/계급/인정/성/-삶의 존폐단계로 복층적으로 누적된다.
그러나, 복층적인 문제를 누적하고 있는 서발턴(하위주체들)의 움직임이 드러날 수 없었던가? 지식인은 왜 입체적으로 보거나 느낄 수 없던 것일까? 아니 왜 지식인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헤겔,칸트,들뢰즈,푸코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투명한 것이 있다’라는 전제가 무의식 중에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만들어내고, 이것이 철학,문학,사회,문화 이념에 착근해있기때문이라고 한다. 지배/피지배, 이성/감성, 권력 등 이분구도가 전 지구적인 서발턴그룹을 보지 못하게 만든 이유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피지배가 지배의 공간을 메우거나 감성이 이성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배와 피지배의 양피지 위에 새로운 해석을 덧보태는 것, 그 상황을 단선적인 각도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해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만들고 지배해온 이데올로기의 맹점을 제3의 시선으로 재해석해내는 것과 지배/피지배의 시선 위에 덧방을 대어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라고 한다. 그들이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볼 수도 없고, 보인다고 해도 그들이 말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말을 걸 수 있다한다. 전 지구적 시선에, 중층적 문제를 겹치고 있는,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온몸으로 살고 있는 서발턴, 어디에 어떻게, 어떨지 말을 걸 수 있다한다. 중첩된 모순의 실마리를 이야기하는 것, 느끼는 것은 지식인의 몫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맑스를 바탕으로 데리다, 그람시, 푸코에 빚지고 있는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에 공감한다. 학자의 입장으로 연구결과물에 대한 비판도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어설프게 가져와 비평으로 끝나고 유행처럼 묻혀버릴 것이라면, 역사-철학-문학-문화적 측면에서 엄밀함으로, 시선의 정교함과 치밀함, 오류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풍부함으로 열매맺지 못하고, 비난으로 스스로 발목을 잡는다면 안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