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지나온 길이

 

이제 막 지나온 길이

뻣뻣이 굳는다

나는 이 길의 근성을 알고 있다

 

옛날에도 나는 몇 차례

빠른 걸음으로

이 길을 지나갔다

하늘고 맞닿은 이 길을 돌아 나오며

내가 흘린 눈물을

 

나는 알고 있다

협곡을 지날 때면 들려오는

슬픈 메아리

가지 못할 세계로 유골처럼 굴러가는

위태로운 생각들

 

멈추면 그 순간

서늘한 이끼가 몸을 덮는다

 

낙 지

 

몸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얼마나 된다고

 

접시 속 낙지의 몸이

사방으로 기어나간다

죽음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신의

몸은 힘차다

 

몸으로 다다를 수 있는 세계도

무궁무진하다는 듯

죽은 정신이라도 이끌고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것은

몸뿐이라는 듯

 

믿음이 나를 썩지 않게 한다

 

씨앗 속에 드는 세상의 이치처럼

오늘도 나는 삶을 믿으며 잠자리에 든다

꽃들이 고봉으로 차오르기도 하는

잠 속으로 찾아오는 것들은

내 몸을 돌며 울부짖기도 하지만

 

믿음이 나를 썩지 않게 한다

내가 보는 세상은

아직은 싱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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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5-23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서재를 기웃거리다 고른 시집이다. 일터 술자리에 가져가 문지시집을 처음 본 친구는 <좋은세상>같은 잡지인줄 알았다구 하여 타박을 맞고, 마시기전 접힌 몇꼭지, 술마신 뒤, 이따위 시라고 타박을 또 맞고, 아침 이렇게 명예회복을 한 <따듯한 흙>이다. 그래도 시인은 살아있다. 마지막 보루인가? 싼 값에 팔리지 않는 시인은 ... ..팔지 않는 시인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