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뜨거움, 기우뚱한 균형, 마음의 공유-다르게 선택행동하기

 

공감을 얻어내고도, 마음을 교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버릇을 바꾸는 것도 개인을 다르게 만드는 일로 좋겠지만, 몇 사람이 공감한 주제라면, 지금바로다음에 취할 수 있는 선택폭을 두고 결정하는 습관을 갖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렇게 마음과 생각을 나누었는데, 이것을 구체화시키는 것은 다 , 이렇게 모인 시점, 의사가 모인 시점에서 나눌 수 있는 선택지에 대해 성원 가운데 가장 낮은 단계에서 가장 높은 행위,생각을 담는 높은 단계까지 나열해볼 수 있다면 예를 들어 1에서 10사이에 가능한 변수를 두자. 그리고 그 가운데 품어진 마음을 선택을 해보고, 또 선택을 해보는 것이다. 의견의 합의 아니 행동의 합의가 어디까지 진도 나가는지도 살펴보자. (일상이 벌어진 느스한 사회단체라면 더욱 더, 그런면에서 되돌아보면 일터에서 그런 제약이 일상적인 관리 포인트이기도 하다. 선택지가 너무 없어서 문제이지만, 그런면에서 다양성, 다양화를 이야기하지만 일상은 늘 독선과 독단의 변주라는 표현이 적절한가? 대면하는 관계가 흑백으로 일상화되어 있고, 속도에 취해 대부분이 이런 것에 자각하고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어떻게 서로 다르게 하는데 기여하는 것일까? 라고 의문을 보태어본다.)

이런 가정만이 아니라, 다르게 일상을 만들어나가지 않는, 결정해보지 않는 우리의 삶은 늘 머리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혼자 일상을 바꾸어내는 것도 색다른 재미이겠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또 다른 관계에서  어떤 사람도 함께 만들어내는 것을 너무도 먼일, 먼그림으로 바라만 보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시선만 던지는 일, 섞인 시선으로 해낼 수 있는 몇가지를 찰라에 제시하지 않고, 고르지 않는 일상은 점점 더디어지는 것은 아닐까? 고담준론과 일상의 경계는 어디일까?

0.1 음 이야기를 하는데 아빤 잘 알아듣겠는데, 좀 장황해서 오빠엄마가 잘 알아듣지 못하나봐, 하고자 하는 이야기줄거리를 먼저하고ㅡ 재미있어할 부분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듣는 사람도 기분 짱일 것 같은데.

0.2 오늘 포럼을 통해 이런저런 전망을 나누었는데, 내년에 다시 개최하자. 오늘 안 가운데 쟁점이 된 부분에 대해 분기별로 나누어서 사안을 발굴하자.선택지를 여러개로 나누어 투표를 해야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소중한 자리가 의미를 잃어버리거나 개인의 의사결정을 존중하지 못하여 정확한 다음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요? -토론자 권교수님 (미분의 필요) 071130

0.3 민이가 삐치면 오빠누나에게 투정을 부리는 버릇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버릇을 바꾸는 방법은 없을까?.....그렇게 하지 않으면 용돈은 주면 어떨까요. 한번에 오백원....일년이면 우와 3만원...그런데 너무 돈으로만 해결하는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은 없을까? 누나가 뽀뽀해주기...징그럽지 않을까......

0.4 자원활동분들과 한학기 함께 했는데, 연락드리면 부담스러운 것 아닌가요? 연락해도 되나요?라는 부탁보다, 이런 부분은 공감했는데, 이 점이 어떻게 개선되면 참여해줄 분 있나요? 있다면 이런 저런 부분이 참여가능할 것 같은데, 언제, 어떻게 참여가능할까요? 이렇게 나누어서 제시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분...이런저런 공약을 제시한다면 다음 총선에서 자원봉사활동...그 세부사항에 대해 아이디어나 의견을 줄 수 있나요. ....판단이나 결정을 교감하거나 선택하게 하려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071201

0.5 난방비에 대해 부모님세대, 우리들 세대, 춥고 찬, 내복을 입느냐 마느냐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조건 줄일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다양하게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0.6 민&당 의사결정구조가 다수결로 처리되면서 소수자 의견이 늘 배제된다면, 외부자의 시선으로 다양하게, 소수자의 의견이 참여구성비 정도는 반영되도록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방법을 스무가지 이상 나열할 수 있을까? 그 다양한 방법에 대해 선택을 할 수 있는 본인이 의사결정한 방법에 대해 심화토론할 수 있는가? 071202

0.7 시민독서프로젝트도 이런 관점으로 볼 필요는 없는가? 모아진 함의를 시도, 개인적 소유로 돌리고 몇개의 결과물 - 불안사전,...등등으로 산개해버린 것은 아닌가? 선택지를 다시 두고 가능한 행동의 선택지를 만들 수 없는 것일까? 선택의 재미를 좋은 만남의 기억으로만 소유해야 되는 것일까? 다른 가능한, 연결시켜주는 방법은 없는가? 100여가지 낼 수 없는가? 거기에서 고르는 연습과 관계맺기, 결과물 잇기, 행동-선택의 가능성을 좁혀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0.8

뱀발.

0. 지난 금요일 지역운동에 대전 지역포럼 말미 토론자로 나오신 권교수님의 지적 '기우뚱한 균형' ...에 대한 도전적 제기, 그리고 이어진 외부발제자의 질문, 고민이 한참이어진다. 숙의민주주의라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외피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 가져와 달라지는 과정들이 없으면, 결국 무화되는 나날이 되새김질 된다. 좀더 생각을 가다듬고 조언을 듣고 싶다. 오고가는 길 횡설한 생각을 주워놓는다.(죄송하네여. 문장,문맥 습관된 것은 아닌지...그냥 도망가지 않게 붙잡아두니 이해해주세요.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눈만 피곤하게 해드려 미안..ㅏㅂ니다요.)

1. 같지만 다른 목소리 - 세대별 소통방식의 변화 및 유권자의 변화 15%, 다른 동력원이 나오고 있다. 그들이 주체가 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현장이 답이다. 접점이 없는 것은 아닌가. 부문이 진화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함께 힘을 모아 진력해본 적이 없다. 집중하면 가능하다. 권력-연구-주민의 포트폴리오 구성 실천 필요. 실천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다른 구성이나 집행시스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정책이 어느 계급에 계층에 손익이 되는지 평가해내야. 부문을 섞는일이 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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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부친생신으로 어제 참* 일을 마치고 서울행, 조카가 낼 모레 군입대라. 관물함에 있던 조카와 아버지가 함께 찍은 사진이 떠오른다. 생각의 고리도 없이 그저 달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시간에 대한 거리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내일 아침이면 눈발이 비칠 수 있을까? 출근길이 더디더라도 황량한 겨울철, 아이들 마음이라도 넉넉하면 좋을텐데... ...

1. 지난 번 그물에 들어왔다 때를 놓치고 있던 살림책-일본편들을 읽는다. 대충은 느끼지만, 이가 빠져버린 편린들.  별사탕-카스테라-단팥방-크림빵-소보로빵, 육식의 재개, 기독교의 인입과 신격화되지 않는 구복의 성격의 갖는 신, 신사, 화혼한재, 화혼양재, 내란이나 민중봉기로 역사의 줄기가 바뀌지 않은 유일한 나라. 근검,검약,개인은 못사는 나라. 스물다섯평의 중산층

2.  외래사상의 <진리의 결정>이 아무리 단단하고 날카로워도 일본인의 <마음의 자장>을 파괴하여 파고드는 일은 없엇고, 일본인이 일본인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앗다는 것이다. [일본적 인간성 연구] 정신적 발전도상국에 지나지 않는 일본은 일본의 상식을 버려야 한다. 1990년 경제 거품은 통속도덕에 입각한 자발적 습속으로 극복된 것은 아닌가...한차례 [청빈의 사상]이란 일본고전에세이가 유행하였다고 한다.

3. 미국이 잔인한 실용주의라면, 일본은 뭐라고 할까?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길을 쫓아가는 것은 아닐까? 거품을 감내하는 정신과 열정은 별반 복습하지 않고 싶은데. 여전히 같은 길을, 더 큰 원심력을 갖고 가는 것은 아닐까? 청빈하지도, 우리의 상식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현실, 내것으로 들어오면 별반 체화되거나 교감폭이 적은 현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가?

4. 2004년 일본공산당이(아직도 있는지?) 헌법9조의 개정에 따라 강령도 천황제를 인정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있더군요. 천황이나 국가에 움직임에 거스르는, 어찌하면 120년전에 번역된 개인이라 서구의 관념은 아직도 사회에서 이해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점에 있어 우린 어떤가요? 성장을 멈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돈이란 것이 성장점을 짓누르면서 모든 사회적 주체로서 기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요? 사회적 유아란 비하발언이 맞는가요? 우리는 우리의 이런 상식을 버릴 수 있을까요?

5. 합의도 없고, 합의에 따르는 다양한 선택지점에 대한 결정도 없고, 선택에 대해 한발 나간 뒤 평가도, 합의도, 또 다른 선택도 없고... 오로지 소통, 교감, 연대라는 유행구호만 소비하여 또 다시 인식을 마비시키는 한걸음을 딛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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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방만한 책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라토리움을 선언해야 할 지경이 아닌가싶네요. 사들이는 책과 읽어내는 책의 수지가 균형을 잃어버렸습니다. 욕심이 나를 먹은 것이겠죠. 마음에 들어온 녀석이라고, 관리를 해야겠네요. 허구한 날, 모임과 만남으로 얼룩진 것이 아닌가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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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말하고 싶지 않는..


언제나 연예시절이나
신혼때와 같은 달콤함만을 바라고 있는
남녀에게 우리 속담은 첫사랑 삼년은
개도 산다고 충고하고 있다.

사람의 사랑이 개의 사랑과 달라지는 것은
결국 삼년이 지나고 부터인데,
우리의 속담은 기나긴 자기 수행과 같은
그 과정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열살줄은 멋 모르고 살고,
스무줄은 아기자기하게 살고,
서른줄은 눈 코뜰 새 없어 살고,
마흔줄은 서로 못 버려서 살고,

쉰줄은 서로가 가여워서 살고,
예순줄은 서로 고마워서 살고,
일흔줄은 등 긁어주는 맛에 산다.

 

이렇게 철 모르는 시절부터
남녀가 맺어져 살아가는 인생길을
이처럼 명확하고 실감나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자식 기르느라 정신 없다가 사십에 들어서
지지고 볶으며 지내며 소 닭보듯이,

닭 소 보듯이 지나쳐 버리기 일쑤이고,
서로가 웬수 같은데 어느날
머리칼이 희끗해진 걸 보니 불현 듯 가여워진다.

그리고 서로 굽은 등을 내보일 때쯤이면
철없고 무심했던 지난날을 용케 견디어 준 서로가
눈물나게 고마워질 것이다. 



이젠 지상에 머물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쭈글쭈글해진 살을 서로 긁어주고 있노라니.
팽팽했던 피부로도 알수 없었던
남녀의 사랑이기보다 평화로운 슬픔이랄까,
자비심이랄까 그런것들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사십대는.....
어디를 향해서 붙잡는 이 하나도 없지만
무엇이 그리도 급해서 바람부는 날이면
가슴 시리게 달려가고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미친듯이
가슴이 먼저 빗속의 어딘가를 향해서 간다.

나이가 들면 마음도 함께 늙어 버리는 줄 알았는데
겨울의 스산한 바람에도 온몸엔 소름이 돋고

시간의 지배를 받는 육체는
그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늙어가지만
시간을 초월한 내면의 정신은
새로운 가지처럼 어디론가로 새로운
외면의 세계를 향해서
자꾸자꾸 뻗어 오르고 싶어한다.

 

나이를 말하고 싶지 않은 나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확인하고 싶지 않은 나이
체념도 포기도 안되는 나이.

나라는 존재가 적당히
무시 되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시기에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와버린 나이.

피하에 축적되어 불룩 튀어나온 지방질과
머리 속에 정체되어 새로워지지 않는 낡은 지성은
나를 점점 더 무기력하게 하고
체념하자니 지나간 날이 너무 허망하고
포기하자니 내 남은 날이 싫다하네.

 

하던 일 접어두고
무작정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것을 ...
하루 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삶에 대한 느낌은 더욱 진하게 가슴에 와 머무른다.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 꿈을 먹고 산다나
추억을 먹고 산다지만 난 싫다...
솔직하게 말 하자면
난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다.

 

사십을 불혹의 나이라고 하지.
그것은 자신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거라고
젊은 날 내안의 파도를...
그 출렁거림을 잠재우고 싶었기에....

사십만 넘으면 더 이상의 감정의 소모 따위에
휘청 거리며 살지 않아도 되리라 믿었기에.
이제 사십을 넘어
한살 한살 세월이 물들어가고 있다.

 

도무지 빛깔도 형체도
알 수 없는 색깔로 나를 물들이고,
갈수록 내 안의 숨겨진 욕망의 파도는
더욱 거센 물살을 일으키고

처참히 부서져 깨어질 줄 알면서도
여전히 바람의 유혹엔 더 없이 무력하기만 한데...

아마도 그건 잘 훈련 되어진 정숙함을 가장한
완전한 삶의 자세일 뿐일 것 같다.
마흔이 넘어서야 이제서야 어떤 유혹에든
가장 약한 나이가 사십대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도...
더없이 푸른 하늘도....
회색 빛 높이 떠 흘러가는 쪽빛 구름도
창가에 투명하게 비치는 햇살도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코 끝의 라일락 향기도
그 모두가 다 내 품어야 할 유혹임을...

끝 없는 내 마음의 반란임을
창가에 서서 홀로 즐겨 마시던 커피도
이젠 누군가를 필요로 하면서
같이 마시고 싶고....

늘 즐겨 듣던 음악도
그 누군가와 함께 듣고 싶어진다.
사람이 그리워지고 사람이 만나고픈....
그런 나이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싶다.

사소한 것 까지도
그리움이 되어 버리고,
아쉬움이 되어 버리는 거..

결코 어떤 것에도 만족과 머무름으로
남을 수 없는 것이
슬픔으로 남는 나이가 아닌가 싶다.

 

진잎들.  언제부터인가 계절이 선명히 들어왔다.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나무들이 들어오고, 급기야 나무가지의 곡선에도 어쩔 줄 몰라한다. 자연에 대한 눈길은 속도를 정지한 듯 싶다.  끊임없이 세밀화를 요구하는, 곧 이어 벌어질 자연의 변화를 미리 눈치채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청춘에 대한 갈망이야 시대를 넘어 여전하겠지만, 이토록 청춘에 집착하는 세상은 이상하다. 얼굴을 고쳐 미인이 복제되는 세상, 또 곧 그 복제에 물려 또 다른 자연미인을 갈구하는 유행을 만들 것이고... ...

정지한 듯 세밀한, 시간을 돌리는 어른이같은 세상의 퇴행은 가증스럽기도 하다. 이렇게 전향선언을 하는 나이. 똑 같이 청춘의 속도에 중독되어 있었다. 아직도 그 속도를 향유하고 싶어하는 또 다른 퇴행일까? 하지만 청춘은 철없이 어리고 마음도 여물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이는 어리숙함이 많이 묻어 있다. 나이로 통해 좀더 넓고 깊게 즐길 수 있음은 또 다른 여유는 아닐까? 유혹을 즐기는 것도 나이드는 한가지 방법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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