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늦 매화가 피었다.

 홍매화, 청매화에

 눈길을 빼앗겨 한참이나 혼몽한데,

 

 하늘에서도 매화가 뚝뚝 ~ 철잊은 눈송이가 함박이다. 왜 이리도 봄은 더딘 것인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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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이표

되돌이표 :ㅣㅣ :  늘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움,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관점을 고정시켜 사물을 보려는 습관은 지적을 한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는다. 맥락이나 삶의 과정 중에 피해로 정착된 시선을 벗기는 것은 주변의 도움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규정짓던 단어였다. 나 또한 다른 이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습관도, 생각도, 행동도 똑같은 패턴으로 움직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경계와 무늬가 달라지는 것은 스스로 이던가 아니면 몸이 겹쳐 무의식중에 다른 길로 접어들 때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원칙을 지킨다는 것, 비판의식을 견지한다는 것. 이 자신의 관점과 무늬로 색칠이 될 때 어쩌면 그 담을 넘지 못하고, 섞이지 못해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모임과 모임이 뒤섞이는 일들 가운데 나름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나름 저 모임은 이러이러하다고 규정짓는 순간, 그 일을 합리화하고 관계를 끊는다는 일……. 또 그것을 어떻게든 합리화시킬지도 모르지만,

 

모임의 합이나 관계의 덧셈을 한 번 더 반추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개인의 자유를 억제하는 모임과 결정과정이 너무도 답답하여, 저 모임은 딱딱하고, 나의 자유를 구속시키는 존재다. 열이 꼭지까지 올라서 그래 끝이다 더 이상 관계는 없다고 행동하는 일. 그것이 최선일까?

 

덧셈 아니, 만든다는 일. 합의 합이 곱셈이 되는 일은 험난하다. 서로 기대고 있기에 관계를 잇고 있기에 좀 더 낫게 만드는 일은 나름 원칙을 지킨다는 것과 냉철한 비판의식을 지닌다는 것의 조금 밖에 무게중심이 있지 않나 싶다. 모임과 모임 사이, 좀 더 원칙이 아니라 세속화가 필요하다. 그 양념이 똥물 뚝뚝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라 모임과 모임의 덧셈이나 관계의 확장을 위해 나를 멈추고 나-너의 입장에서 판단을 유보해보는 일이다. 일단 멈춤.

 

만든다는 일, 짓는다는 일. 정체성도 부여잡을 수 없지만 정체가 있는 모임들. 그 정체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 모임은 좋아하는 일, 하는 이, 하고 싶은 일들로 나름 문화가 있다. 정체가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어디서 시작한 것이 정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색깔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원칙과 비판의식, 세속화. 불쑥 세속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원칙과 비판의식을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 같겠다. 하지만 개인이 갖고 있는 원칙과 비판의식을 개인소유가 아니라 모임의 공유자산으로 갖고 싶기에 중언부언하는 것이다. 모임과 모임을 주관하는 이들(편의상 활동가)간 문화적 차이가 있다. 혼자인 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너-나- 결정이나 논의의 수준 문화적 공감의 형성들이 다르다. 나의 정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너의 정체가 있다. 일과 일의 만남으로는 모임간의 색깔을 건들 수 없다. 나와 나의 만남 정도로는 기존의 모임 색깔은 변하거나 움직일 수 없다. 모임과 모임을 들썩이게 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문화적인 충격이 필요하다.

 

활동가들 사이의 문화적 접속, 이질적인 가치의 접속을 위해서는 단체 간 맞짱이 필요하다. 논의의 수준과 확장을 전제로 절치부심하고 선입견을 감안한 공격을 준비해야 한다. 패거리 의식도 필요하고 패싸움? 도 필요하다. 성원들이 섞일 때 모임의 때가 조금이나마, 결정의 습속도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다. 소수의견으로 몰려있던 안건들이 도드라져 보일 수 있다. 그때서야.

 

우리는 모임의 틀, 암묵적인 길로만 가려는 습속이 있다. 모임의 나침반은 늘 그 방향을 가리킬 수밖에 없고 그 길을 간다. 하지만 모임이 풍요로워지고 또 다른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일은 세속화다. 다른 모임 사절단을 받아들이고 이질적인 문화에 녹아들려고 하는 의식적인 노력들을 욕망해야 한다.

 

다시, 강한 나 홀로 자유, 나 홀로 비판의식을 나-너로 기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임에서 나-너의 자유, 너-나의 비판의식으로 확장하기 위해 세속을 주장하기에 앞서, 모임의 온도를 올리거나 모임과 모임의 영토를 확장하는 주문을 보탠다. 나의 비판의식과 자유의 확장을 위해 호수위의 백조처럼 우아함을 위해 끊임없는 발길질을 청한다. 자유와 비판, 그리고 동시에 추구하여야 하는 것은 만든다(作)는 것이다. 그 지난한 덧셈을 감안한 노력을 병행하자는 이야기다.

 

모임과 모임을 옮겨 다니며 그저 모임의 성원, 만족 받는 모임의 성원들이 아니라, 기대고 있는 너, 그리고 너-너로 만들어진 습속, 정체, 문화적 주장을 감안하여 모임의 울타리에 대한 의식이다. 발라진 나도 없고, 발라진 무한 비판도 없다. 약하거나 강하게 기대어 있는 너-나들. 그리고 일상들, 기대어진 삶들이 있다. 독립된 개인만이 있어서, 로빈슨 크루소 같은 자유인만 있어서 척박해지는 일상과 삶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세속을 이야기하고 좀 더 사고가 자유로운 작은 모임들의 연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된 공간들을 좀 더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모임에 나가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모임이 나로 인해 확장되고 커지는 나를 위해서 자기주도적인 나-너가 많아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듦의 끈을 어찌할까? 관계 짓기의 확장은 다음 문제이다.

 

뱀발. 참* 총준위, 그리고 근대사 벙개에 다녀오다. 발품 덕에 속내와 이면의 관계들을 알 수 있고, 생각을 보듬을 수 있어 고맙다. 박**샘, 강**샘의 이야기..서**샘과 발품이 섞여있긴하다. 그동안 일들이 겹친다. 참*를 챙기지 못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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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18 화요모임이다. 연**의 인권선언 발제를 따라가면 생각을 낚아본다. 선언, 실무의 과정에 삼민주의자가 관여했는가? 얼마나? 성안이 되기에 견해차이가 났던 부분은 어딘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지켜지고 있는가? 일주일에 한번 휴식할 자유는 있는가? 레져가 아니라 Rest 할 자유, 아무 일 하지않고 빈둥거릴 자유를 말하는 것 같다. 미국의 경우 살인율과 자살율이 급등지점에 대해 연구를 하다가 보니 이유를 도저히 찾지 못하다가 그것이 집권정권과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것을 보는데, 우리나라 현실은 짧고강열한 연구로 이슈화할 수는 없는 것인가? 조폭의 역사? 신종 토크방의 성시? 등 문화현상에 대한 빠른 연구는 필요치 않는가? 법리와 인권이 충돌하는 부분은 없는가? 인간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공간-역사적 개념 속에 있어 고정된 법의 틀로만 가두어둘 수 없다. 

 

 

 

120320 저녁 복*훈이란 평론가를 만나다. 목*대 인문학 강의차 왔다가 지인/SF 학위자인 한*박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기차 예약시간을 몇번씩 되물리며 그는 마지막 참여자인 서*샘의 인연까지 확인하고 막차를 타며 갔다. 그리고 한박사와 수작이야기도 할겸 자리를 옮겨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며칠 뒤 그가 건넨 책을 보다가 이것저것 걸려있는 편린들과 사상가들의 습작에 눈길이 간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120322 대(전충남)인(권)연(대)가 창립식을 갖다. 조효제교수의 강의 내내 스타일과 재미가 한껏 부풀어 좋다. 뒤풀이겸 사*국장의 지인들을 다시 볼 수 있어 반갑기도 했고, 젊은 활동가들(나보다 어린)이 얘기를 섞을 수 있어 더 좋은 느낌이다. 방식과 인권, 운영에 대한 사견을 덧보태기도 한다. 혼자 갈 수도 없고, 혼자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이기에 비우면서 가라고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채울 때 제대로 서는 것이라고 말미 이야기를 건넨다. 양*과 인* -나무 분들이 여럿 함께 책이며 인권에 대한 고민을 들을 수 있긴 하였는데, 견해가 나뉜다. 고민을 섞지 않고 나누지 않아 정체된 느낌도 보이고, 선택한 인권이 성원간에 좀 겉도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학번의 위계가 있어 다양성을 포착하는 것이 느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세계인권선언을 기준으로 논쟁과 활동, 고민을 동시에 섞어보는 것이 어떤가 제안을 해보기도 한다.

 

 

120323 아카** 안과 대표단-장 식사모임을 갖다. 데미안의 속내와 삶의 이력을 살필 수 있고, 아픔의 언저리도 느낄 수 있어 좋다. 부담감이나 장점, 의욕을 함께 섞을 수 있어 좋은 자리이다. 재주의 뿌리와 섞여있는 아픔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놓친다. 이래저래 생동감이 돈다. 다음 자리는 어디일까? 어디쯤에서 피울까? 꽃은?

 

뱀발.

 

1. 뒤풀이와 모임에서 지난 총회에서 놓친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건넨다. 새로운 시도, 신선한 실험, 삶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보탠다. 그러다보니 보듬어가지 말고 끌고 가라는 주문이다. 쭈욱 당겨서 먼저 가고 올 수 있도록 하는 포인트를 준다. 인간, 사람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과 질문에 대해서도 좀더 유연성을 가진 개념이 펼쳐지는 것은 아닌가 싶다. 화*모임의 성원이 안정화되며 논의의 질적수준도 속도를 갖고 가는 듯하다. 짧고 강열한 연구(기자의 수준)에 대한 희망사항을 나누고 싶은데 어떤지 모르겠다. 어떻게 시도를 하고, 구성의 논의를 끌고가야하는지도 고민이다.

 

2. 조효제 교수의 번역작업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최근 어느책 서문에서 밝혔지만 그 노력의 흔적의 속내를 듣는 순간, 아.. 머리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먼저가는 사람이구나하구 무릎을 치게 한다. 독일에서 1년간 교수로 생활한 이야기도 무척 흥미를 끈다. 어떻게 저리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단순한 패턴이지만 강열한 교수기법도 눈길을 끈다.

 

3. 반복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습관들이 있다. 음식 타박을 하지 않는 편이며 애써 그 세분을 즐기기 않거나 못한다. 같이 이야기의 반복을 몹시 꺼려하는 편이다. 매체도 찾아읽기를 그만둔 것이 십여년을 훨씬 지나친 듯 싶다. 그런데 그 변화와 다름에 몹시 신경이 쓰인다. 디테일에 대한 요구가 만들어지는 것인지? 패션처럼 유행하는 것에 밀리는 것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무던함을 재고해봐야 하는 지점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매체의 변화와 관계짓기, 그 불편함과 다중성이 혼란스럽다.  오랜만에 모임흔적을 남긴다. 무척이나 빠른 나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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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밀려와 끙끙댄다 ▼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와 게으름도 피우고 끙끙댄다. 얇은 독서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다. 독서의 가닥을 잡은 것은 최근이다. 그 생각이 불쑥 들어서자 책읽기는 거의 멈추다시피 했다. 하지만 또 미련을 두는 것은 또 어떤 책이 뺨을 후려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멈출 수 없다.

 

 

1. 윤석중 외, 『소년소녀 세계위인전집』(계몽사, 1971/1979)

시커멓게 날리는 탄광의 풍경은 어른들 몫이었지만 조금만 골짜기로 접어들어서면 아이들에게 파라다이스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놀고 멱 감기를 배울 무렵, 고역 같은 노동에 시달리는 아버지의 마음씀이 옆에 있었다.

 

2. 허영만, 『각시탈』(만화영상진흥원, 1974/2011) 윤길영,『바벨2세』(도서출판 새소년, 1975/2007)

[10원에 나갈 때]까지, 10원만내면 시간제한이 없는 만화방을 섭렵?하고 신간에 갈증나던 무렵 과학?만화와 공상만화에 푹 빠져지냈다. 물론 어머니에게 발각되어 만화방 출금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3. 이광수, 『무정』(우신사, 1981)

양장본표지를 넘기면 얇은 투명지가 있는 고급스런 전집이었다. 서울변두리 신생 고교 도서관, 하드커버 소크라테스를 들다 헉 소리를 내며 난, 지레 물렸다. “도대체 뭔소리?” 수험공부만 한 말미, 그런 까까머리에게 무정은 달콤했다.

 

4. 조성오, 『철학에세이』(동녘, 1983/2005)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대학생에겐 세미나가 낯설었다. 얇고 글씨가 큰 편이어서 망정이지 말이다. 지금까지 길들여진 나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도아니면 모였다. 책읽기도 그러했다.

 

5.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 2003)

불침번 대타 진중문고 읽기 군생활과 포스트모던을 핑계한 90년대를 지난다. 이천년이 되어서야 편식독서자인 스스로에게 니체는 또 다른 설레임이었다. 이후 새로운 생각이라 주장하고 싶었지만 늘 그 그물에 걸렸다.

 

6. 피에르 부르디외, 조흥식 역, 『과학의 사회적 사용』(창비, 2002)

[세계의 비참]의 저자 부르디외를 다시 만났다. 과학만 생각하는 현실에 묻어있는 사회적 역할을 말해준다.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이렇게 얇은 책조차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여기에 여전히 유효하다.

 

7. 토머스 페인, 박홍규 역, 『상식, 인권』(필맥, 2004)

지금여기에 침잠하다보면 역사 속에서 지금의 삶을 반추할 수 없다. 페인은 250년 전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을 오가며 기록했다. 자본주의의 시원에 대한 목소리를 잊은 것은 아닐까? 자본을 정점으로 꽃피운 지금의 과제는 여전히 상식과 인권에서 시작한다. 인식의 시점을 고전으로도 돌릴 것을 제안한 책이었다.

 

 

8. 안드레 군더 프랑크, 이희재 역, 『리오리엔트』(이산, 2003)

세계사를 유럽중심주의나 자민족중심주의를 떠나서 생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책으로 말미암아 세계사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천동설론자가 지동설론자로 바뀌듯 관점의 아집에서 벗어날 것을 명했다.

 

9. 칼 폴라니, 홍기빈 역 『거대한 전환』(길, 2009)

경제란 파쇼속의 일상은 갈수록 척박하고 힘들다. 사람과 삶이 스미는 살림살이로 나아가는 길의 이정표는 있을까? 굶지 않는 삶, 누구나 꿈꾸는 삶이 우선 되고 이 경제란 넘은 아주 작은 위치를 차지했으면 한다. 그 왜곡을 뿌리 깊게 폭로하는 책이다.

 

 

10.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다산초당, 2005)

시는 양념이고 저기 경계밖에 피어있는 꽃이다. 그 꽃을 꺾으러 다가선다. 그 꽃을 보러 다가선다. 눈이 부신 나날, 가끔 백석을 그린다. 그리고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그리워한다. 비코의 [처음으로 돌아가라]처럼 사람은 역사에 있어 누구나 시작점이다. 세상을 만들어간다는데 동의한다. 시처럼 서로 달리 호명되며 세상은 만들어져야 한다. 이 순간부터 너를 부여잡는다.

 

펼친 부분 접기 ▲

 

뱀발.

 

1. 글을 챙기다보니 10번째 책이 망설여졌다. 사실은 [세가지 생태학]이란 책과 비코 책이나 루쉰의 책들이나, 김영민 [사랑, 그 환상의 물매]라는 책들, 부버[나와너]나 악셀호네트의 책들을 권하고 싶긴 하였는데 시선을 의식해서 시집 한권을 올린다. 김선우의 시나 [페미니즘의 도전] 같이 여성성이 오히려 몸으로 다른 지평과 가고자 하는 지평을 미리 보여준다 싶다.

 

2. 청탁을 불쑥 받아들인 것이 화근인지 몇번을 생각에 시달려야 했다. 서재의 책들을 살펴보기도 하고, 골라야 하는 일이라 성가시기도 했다. 사실 보여주는 것보다 달리 관심이 많은 분야가 따로 생겨 좀더 침잠할 이유가 다른 곳에 있다.  혹시 이 글에 관심이 있다면 잘 정리해둔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을 보면 애써 끙끙댈 필요가 줄어들 듯싶다.

 

3. 봄이 많이 익었다. 그런데도 심신은 춥다.  일 밖으로 몸이 튕겨져 나갔으면 싶다. 아질거리는 봄으로 몸을 녹였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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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황이 없어

빌린 책들도

 

 

 

 

 

 

 

 

 

 

 

 

 

몇권 보태어 쏜살처럼 다가온 반납기일을 당겨 건네주어야 했다.

 

 어쨌든 그 만한 속도로 봄은 경착륙해있다.

 가끔 햇살의 따가움을 창을 두고 마주친다.

 벌써 목련의 환한 모습을 두근두근할 계절이다 싶다.

 

 뱀발. 정신줄을 놓았던지, 맨발의 신데렐라의 컨셉이 정작 새로운 실험, 새로운 시도였는데도 파티같은, 다른 삶으로 말을 잘못해놓아 오해를 산 것은 아닌가 싶다.  몸, 마음, 생각, 고민이 모두 따로따로다. 경황...정황...정신차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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